숙빈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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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빈 최씨는 조선 숙종의 후궁으로, 훗날 조선의 21대 왕 영조의 어머니이다. 1670년에 태어나 7세에 입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무수리 출신이라는 설과 침방 궁녀 출신 설이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 숙의, 귀인을 거쳐 숙빈의 자리에 올랐으며, 인현왕후를 지지하고 장희빈과 대립했다. 영조 즉위 후 왕후 추존은 노론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노력하여 육상궁을 건립하고 소령원을 조성했다. 숙빈 최씨는 여러 드라마와 소설에서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특히 아들 영조와의 관계가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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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최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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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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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표기 | 숙빈 최씨 |
로마자 표기 | Sukbin Choessi |
마 McCune–Reischauer 표기 | Sukpin Ch'oessi |
시호 | 화경 (和敬, Hwagyeong) |
생애 | |
출생일 | 1670년 12월 17일 |
출생지 | 조선 |
사망일 | 1718년 4월 9일 |
사망지 | 한성 이현궁 |
묘소 |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
종교 | 한국 불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숙종 |
자녀 | 영조 외 2남 |
아버지 | 최효원 |
어머니 | 남양 홍씨 |
가문 | 해주 최씨 (출생) / 전주 이씨 (혼인) |
작위 | |
품계 | 정1품 귀인 |
재위 기간 | 1699년 – 1718년 4월 9일 |
기타 정보 | |
출생 관련 주장 | 전라북도정읍시태인면 출생이라는 주장도 있음 |
2. 생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훗날 영의정을 추증받은 최효원의 딸로, 1670년에 태어났다. 숙종 2년에 7세의 나이로 입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의 무수리(잡일을 담당하는 하녀) 출신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침방에 소속되어 있던 궁녀였다(훗날 대립하게 되는 희빈 장씨 역시 원래 침방의 여관이었다. 침방의 여관은 왕족을 모시는 지밀의 여관 다음으로 고위였다). 이후 인현왕후의 측근인 내인(상궁이 아닌 여관의 총칭)이 된다.
1689년,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왕비가 되었다.
이후(1692년 4월 22일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승은상궁(承恩尙宮, 정5품 상당)이 되었고, 숙종 19년 (1693년) 4월 26일에 숙원(淑媛, 종4품 상당)이 된다. 그 해, 왕자를 낳았으나, 2개월 만에 사망했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 (1694년)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훗날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를 낳았다. 이에 앞서, 같은 해 6월 2일에 숙의(淑儀, 종2품 상당)가 되었다.
숙종 21년 (1695년) 6월 8일에 귀인(貴人, 종1품 상당)이 된다.
숙종 24년 (1698년)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으나 3일 만에 사망한다.
숙종 25년 (1699년) 6월 13일, 전년에 제6대 조선 왕 단종이 241년 만에 복위된 것을 축하하여, 정1품 상당의 숙빈(淑嬪)이 된다.
1701년 10월부터 1704년 4월 사이에 본궁인 창덕궁을 떠나, 이현궁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현궁은 숙빈방(淑嬪房)으로 불리게 된다.
숙종 37년 (1711년) 6월 22일, 숙종은 숙빈 최씨를 숙빈방에서 아들 연잉군의 거처로 옮겨, 모자(母子)가 함께 살도록 명을 내린다.
1716년경부터 갑자기 병이 잦아져 사저에서 요양했으나, 1718년 3월 아들 연잉군의 사저에서 사망한다. 향년 49세.
2. 1. 출생과 가계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12월 17일(음력 11월 6일)에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과를 지낸 최효원과 남양 홍씨의 차녀로 태어났다.[13] 할아버지는 최태일, 증조부는 최말정, 고조부는 최억지이다. 외할아버지는 홍계남이며, 외할머니는 강릉 김씨이다. 숙빈 최씨에게는 순흥 안씨 안씨 부인과 결혼한 오빠 최후와 서전과 결혼한 언니 해주 최씨 부인이 있었다.숙빈 최씨의 본관은 해주 최씨이나, 시조 최온과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최태일, 최말정, 최억지는 해주 최씨 족보에 실리지 못했고, 최온, 최충과의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다. 외가 쪽으로는 외할아버지 홍계남은 남양 홍씨 당홍 홍은열의 후손이며, 외증조부 홍인백, 외고조부 홍수정, 외5대조 홍전까지 이름이 전한다. 외할머니 강릉김씨는 홍계남 묘비문에 강릉김씨 대봉(大鳳)의 딸이라고 하나 강릉김씨 시조 김주원과 어떤 관계인지 알려진 것이 없다.
1936년 장봉선 등이 편찬한 정읍군지에 따르면 숙빈 최씨는 정읍현 태인면에서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14] 그때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 송씨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인현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할 때 대동시켰다고 한다.[14] 다른 설에 의하면 숙빈의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 마을이라고도 한다.[14] 그러나 외할아버지 홍계남(洪繼南)이 한성 출신이었다 한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현재의 서울 세종로 일대)이다. 영조는 이 곳 생가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의 자손이 대대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다.
2. 2. 입궐과 궁중 생활
7세 때 무수리로 궁에 입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다만,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에는 숙빈이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16] 그녀의 아들 연잉군은 숙빈이 침방나인 시절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17]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고,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18]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는데,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이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의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
최씨는 조선 시대 최하층 신분인 천민 출신이었다. 그녀가 국왕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옥정이 왕비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어느 날 밤, 최씨는 인현왕후의 안녕을 빌고 있었는데, 여행에서 돌아오던 숙종이 그녀의 말을 우연히 듣고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문정(1656–1726)이 저술한 책 ''수문록'' (수문록/隨聞錄한국어) [1]에는 장희빈의 사형에 이르게 된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어느 날 밤, 국왕 [숙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녀들의 처소를 지나다 작은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갑자기 들었다. 궁금해진 그는 방 안을 들여다보았고, 깨끗하고 정돈된 방 안에서 연회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고는 공식 유니폼을 입은 젊은 궁궐 무수리가 제사상 앞에서 통곡하는 것을 보았다. 제사상은 폐위된 인현왕후를 위해 차려져 있었다. 숙종은 인현왕후가 폐위되었기에 놀랐다. (중략) 숙종은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누군가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인현왕후를 기리고 그녀의 안녕을 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무수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자 왕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중략) 무수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 저는 인현왕후가 왕비였을 때 모셨습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인데, 제가 그녀를 모셨을 때 인현왕후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을 수 없어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저를 죽음으로 벌하여 주십시오.' 그런 극단적인 청을 듣고 숙종은 깜짝 놀라며 경악했다. (중략) 칭찬할 만하고 훌륭하다고 여긴 숙종은 이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 그는 젊은 무수리를 침실로 데려갔다. 그의 감정은 동정심에서 애정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바뀌었고, 그는 그녀와 많은 밤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무수리는 최숙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최씨의 궁궐 내 지위는 급속도로 상승했다. 1693년, 그녀는 요절한 왕자를 낳은 후 ''숙원''으로 정4품의 후궁이 되었다. 1년 후, 이금(李昑), 연잉군(延礽君)을 낳은 후 정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 1695년에는 다시 종1품 ''귀인''으로 진봉되었다. 1698년, 사산된 왕자를 낳았다. 1699년, "순수/현숙"을 의미하는 ''숙(淑)'' 자를 받아 정1품 ''빈''으로 다시 승진했다.
최씨는 인현왕후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역사적으로 악하고 잔인한 여성으로 묘사된 장옥정에게 반대했다. 1693년까지, 국왕은 장씨와 남인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1694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귀시키고 장옥정(희빈 장씨)을 이전 품계인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1701년, 인현왕후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독살되었다고 믿지만,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 버전에 따르면, 숙종은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에서 무당과 함께 흑마술을 통해 왕비의 죽음을 축하하며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했다.[2][3] 또 다른 해석은, 조선왕조실록의 모호한 구절을 바탕으로, 왕비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마법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왕에게 알린 것은 최숙빈이라고 주장한다. "왕비의 유언"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최숙빈은 평소처럼 왕비[인현]에게 조의를 표하고, 왕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를 위해 울면서, 왕에게 그 비밀을 알렸다."''
그러나, 1701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망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과 민진후가 장희빈의 마법을 숙종에게 알렸으며, 이는 인현왕후가 죽기 전에 그들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진원에 따르면, 궁궐 내 소문은 장희빈이 무당을 사용하여 왕비를 저주하고 있었고, 그녀는 이 소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왕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든, 그는 이 문제를 조사하기로 결정했고 장희빈이 자신의 처소 안에 무당 제단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왕비의 이름이 적힌 초상화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의 진실을 밝혀냈다. 나중에는 그녀의 시녀들이 장희빈이 매일 세 번 인현왕후의 초상에 화살을 쏘도록 명령했고, 그녀의 궁궐 정원에 죽은 동물을 묻었다고 진술했다.[4] 소론의 많은 탄원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그녀의 행위가 너무 사악하다고 느껴 1701년, 장씨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사약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녀에게 형을 선고한 후, 숙종은 정1품 ''빈''의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양반 출신인 다른 두 후궁, 1699년에 왕자를 낳은 미양 박씨 귀인(후일 ''명빈 박씨'')과 최씨와 같은 노론에 속했던 김귀인(후일 ''영빈 김씨'')이 왕비의 자리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최숙빈의 낮은 신분은 그녀가 왕비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었는데, 조선은 유교 사회였고 신분 제도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아들 영조의 삶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통치 초기에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위협을 받았다. 나중에, 그의 통치가 확고해졌을 때, 그는 어머니의 노비 출신이 언급되는 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여겼다.[5]
2. 3. 인현왕후와의 관계 및 장희빈과의 갈등
숙빈 최씨가 처음 승은을 입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숙종 19년(1693년)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18] 그해 10월 6일 아들 영수(永壽)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해(1694년) 숙종의 특명으로 종2품 숙의(淑儀)가 되었고,[18] 그해 9월 13일 연잉군(延礽君) 금(昑)을 낳았다. 숙종 21년(1695년)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고, 숙종 25년(1699년)에는 단종 복위(숙종 24년(1698년)) 기념으로 정1품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휘호를 얻어 숙빈(淑嬪)이 되었다.[18]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지지했으며, 장희빈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2. 4. 생애 후반
1716년(숙종 42년) 숙빈 최씨는 병환으로 사가에 나가 치료를 받았다.[19]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창의동 사가에서 49세로 사망하였다.[20] 왕, 왕비, 세자는 중궁의 관원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했으며, 특히 부의를 두텁게 하였다.[20] 같은 해 5월 양주의 고령동 옹장리 서쪽 언덕에 예장으로 장사지냈다.[20]1699년에서 1702년 사이에 숙빈 최씨는 화엄사 각황전의 주요 후원자였다. 1703년, 인원왕후는 연잉군을 자신의 아들처럼 여겨 양자로 삼았다.[5] 1704년,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잉군의 혼례를 위해 국왕이 매우 성대하고 값비싼 의식을 거행하도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하들은 세자도 아닌 후궁의 아들에게 과도한 특혜를 준다며 불만을 제기했다.[6]
그해 늦가을 숙종은 숙빈 최씨에게 이현궁을 하사했다. 이현궁은 한성부(현재의 서울)에 위치한 크고 넓은 건물이었다.[6] 1711년, 인원왕후가 천연두에 걸리자 숙빈 최씨는 궁녀들에게 궁궐 밖에서 치료법을 찾도록 명했고, 왕후는 결국 살아남았다. 1717년, 숙종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아들 세자 이윤에게 국정을 맡겼다.[7]
숙빈 최씨의 신주에 적힌 그녀의 인품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그녀의 성품과 지위는 절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해 꺼리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존경심을 갖고 항상 인현왕후와 이후 인원왕후를 섬겼다. 그녀의 지혜와 총명함은 타인과의 소통에서 빛을 발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와 규율을 지켰다. 그녀는 궁중 다툼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녀의 묘 '''소령원'''은 대한민국 파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358호로 지정되었다. 숙종은 1720년에 사망했는데, 이이명에게 연잉군을 경종의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다.
그녀의 아들은 왕이 되자, 그녀의 무덤 근처에 제실(을 세워 그의 깊은 효심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무덤 주변 네 곳에 신주를 모시는 집을 짓고, 그녀를 기리는 비석을 세웠으며, 그 내용은 그가 직접 썼다. 그녀의 신주는 칠궁(사적 제149호)에 안치되었다.
최숙빈은 '''화경''' (和瓊/화경한국어)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이후 ''휘덕''과 ''안순''으로 추존되었다.
3. 사후
영조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 최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었다.[21]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의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숙빈이 여경방에서 태어났다는 기록과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다. 영조는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조작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1]
영조는 즉위 원년에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 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21]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중국어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21] 숙빈은 역대 후궁과는 달리 많은 존호가 붙여져 있는데, 이 또한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21]
영조 29년 육상궁에 관제(官祭)를 지낸 후, 명나라 효종(孝宗)이 생모를 추존하여 모비(某妣)라 하였다가 다시 황모(皇母)라고 칭한 예에 따라 숙빈은 왕의 사친(私親)이 아닌 선비(先妣)로 정호되었다.[22] 영조는 살아생전 '사친은 항상 소심(小心)하고 신중하였다.'고 자주 회고했다.[23]
영조는 최숙빈을 다른 후궁들처럼 왕의 어머니이자 "사사로운 부모"로 여겨지는 대신, 공적인 어머니로 인정받기 위해 조정과 싸웠다. 1739년, 최숙빈 묘소를 방문하기로 예정된 날의 전날, 그는 예조가 마련한 의식 절차에 불만을 품고, 그들을 직접적으로 책임지는 두 명의 관리를 질책했다. 또 다른 경우, 국왕은 그녀의 묘소를 떠나 궁궐로 향하던 중 가마에 오르려던 그는 대신 병조판서 김성응을 불러 흐느끼며 관리들이 자신의 명령을 무시했다고 말했다.[5] 결국,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최숙빈은 그의 공적인 어머니로 인정받았다.
3. 1. 추존 과정
영조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 최씨를 왕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무산되었다.[21]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소령원에 있는 기록과 신도비의 내용들은 영조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숙빈이 여경방에서 태어났다는 기록과 어머니가 7살에 입궁했다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있다. 영조는 어머니의 출생과 신분을 상승시키거나 조작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1]영조는 즉위 원년에 어머니 최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하였고, 영조 20년(1744년)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영조 29년(1753년) 육상궁(毓祥宮)으로 승격시켰다.[21] 육상궁은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있다. 묘소 또한 영조 20년에 소령묘(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년에 소령원(昭寧園)으로 다시 승격시켰으며, 사당과 무덤에 궁호와 원호를 올릴 때 함께 화경(和敬)의 시호를 올렸다. 후일 여러 차례에 걸쳐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의 존호가 더 올려졌다.[21] 숙빈은 역대 후궁과는 달리 많은 존호가 붙여져 있는데, 이 또한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21]
영조 29년 육상궁에 관제(官祭)를 지낸 후, 명나라 효종(孝宗)이 생모를 추존하여 모비(某妣)라 하였다가 다시 황모(皇母)라고 칭한 예에 따라 숙빈은 왕의 사친(私親)이 아닌 선비(先妣)로 정호되었다.[22] 영조는 살아생전 '사친은 항상 소심(小心)하고 신중하였다.'고 자주 회고했다.[23]
영조는 최숙빈을 다른 후궁들처럼 왕의 어머니이자 "사사로운 부모"로 여겨지는 대신, 공적인 어머니로 인정받기 위해 조정과 싸웠다. 1739년, 최숙빈 묘소를 방문하기로 예정된 날의 전날, 그는 예조가 마련한 의식 절차에 불만을 품고, 그들을 직접적으로 책임지는 두 명의 관리를 질책했다. 또 다른 경우, 국왕은 그녀의 묘소를 떠나 궁궐로 향하던 중 가마에 오르려던 그는 대신 병조판서 김성응을 불러 흐느끼며 관리들이 자신의 명령을 무시했다고 말했다.[5] 결국,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최숙빈은 그의 공적인 어머니로 인정받았다.
4. 가족 관계
숙빈 최씨의 아버지는 최효원(1638 ~ 1672)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1639년 10월 17일 ~ 1673년 12월 18일)이다. 남편은 숙종(1661 ~ 1720)이다.
숙빈 최씨는 슬하에 3남을 두었으나, 장남 영수(1693 ~ 1693)와 삼남(1698 ~ 1698)은 요절하였고, 차남 영조(1694 ~ 1776)만이 성장하여 조선의 제21대 왕이 되었다.
5. 평가 및 대중문화
숙빈 최씨는 여러 드라마에서 다양한 배우들이 연기했다. 1981년 MBC 드라마 《역사의 여인들: 장희빈》에서는 이미영이,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에서는 견미리가 연기했다.[9]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남주희가,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김영애가 연기했다.[10] 2002-2003년 KBS2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박예진이, 2010년 MBC 드라마 《동이》에서는 한효주와 김유정이 연기했다.[11]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한승연이, 2016년 SBS 드라마 《대박》에서는 윤진서가 숙빈 최씨를 연기했다.
5. 1. 평가
5. 2. 대중문화
숙빈 최씨는 여러 드라마와 소설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1961년 영화 《장희빈》에서는 배우 전계현이 숙빈 최씨를 연기했다.
-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방영된 MBC 드라마 《여인열전 - 장희빈》에서는 김용선이, 1981년 MBC TV 드라마 《역사(歷史)의 여인들: 장희빈(張禧嬪)》에서 이미영이 연기했다.
- 1988년 MBC 드라마 《인현왕후》와 MBC TV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仁顯王后)》,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1988년, MBC, 일본 미공개)에서 견미리가 숙빈 최씨 역을 맡았다.
-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 SBS TV 드라마 《장희빈(張禧嬪)》, 『요부 장희빈』(1995년, SBS)에서는 남주희가 연기했다.
-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 『대왕의 길』(1998년, MBC)에서는 김영애가 숙빈 최씨를 연기했다.
-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장희빈》, KBS2 TV 드라마 《장희빈》, 『장희빈』(2003년, KBS)에서는 박예진이 연기했다.
- 2010년 MBC 드라마 《동이》, 『동이』(2010년, MBC)에서는 한효주와 김유정이, (일본어 더빙판 성우: 가토 시노부) 연기했다.[9]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년, SBS)에서는 한승연이, (일본어 더빙판 성우: 후쿠엔 미사토) 연기했다.[10]
- 2016년 SBS 드라마 《대박》,『대박』(2016년, SBS)에서는 윤진서가 연기했다.[11]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는 김이영 글, 백철 그림의 《동이》(2010년, 이가서), 정재인, 김이영, 이병훈의 《동이》(2010년, MBC 프로덕션), 이준혁의 《동이》(2010년, 문예춘추사), 김종성의 《최숙빈》(2010년, 부키) 등이 있다.
6. 기타
6. 1. 신도비
숙빈 최씨 신도비(淑嬪崔氏神道碑)는 영조가 즉위한 해인 1725년(영조 1)에 세워졌다. 영조는 숙빈 최씨가 사망한 지 8년이 되던 해에 신도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비문은 문장을 담당하는 신하가 아닌 박필성(朴弼成)에게 짓도록 명하였는데, 과장된 표현은 쓰지 말 것과 숙빈 최씨의 평소 조심하고 삼가는 뜻을 잘 생각하여 지으라고 당부하였다.비문에는 숙빈 최씨의 가계, 품성, 숙종과의 관계, 영조를 낳기까지의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에 태어나 7세에 궁에 들어갔으며, 1693년(숙종 19) 숙원에 봉해진 이후 숙의, 귀인을 거쳐 1699년(숙종 25) 숙빈에 올랐다. 숙빈은 평소 과묵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인현왕후를 비롯한 윗사람들을 공경하고 아랫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였다. 숙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나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 등 처신에 신중하였다.
숙빈은 1716년(숙종 42) 병을 얻어 사가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1718년(숙종 44)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즉위 후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추모하며 신도비를 세우고, 직접 비문을 지어 그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신도비문은 수록대부 금평위 겸 오위도총부총관 신 박필성이 명을 받들어 짓고, 현록대부 여산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방은 명을 받들어 쓰고, 수덕대부 서평군 겸 오위도총보도총관 신 요는 명을 받들어 전각했다.
6. 2. 논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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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수문록 1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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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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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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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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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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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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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illok.histo[...]
[7]
문서
The Memoirs of Lady Hyegyŏng, page 22.
[8]
웹사이트
The history of Korea
https://archive.org/[...]
Seoul, Methodist Pub. House
[9]
웹사이트
Han Hyo-joo says she "hold fast" to her role in ''Dong Yi''
http://www.asiae.co.[...]
2010-05-07
[10]
웹사이트
KARA's Han to work with Kim Tae-hee
http://koreajoongang[...]
2013-02-04
[11]
웹사이트
Yoon Jin-seo cast as Choi Suk-bin in Daebak
http://news.chosun.c[...]
2016-02-04
[12]
뉴스
“태인에서 숙빈 최씨를 만나다!”
http://www.jsisa.net[...]
[13]
문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14]
서적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15]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숙빈최씨
http://people.aks.ac[...]
2010-05-18
[16]
문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17]
서적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
[18]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숙종 27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6월 2일(무술) 1번째기사
[19]
문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20]
문서
숙빈 최씨 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21]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22]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영조 80권, 29년(1753 계유 / 청 건륭(乾隆) 18년) 10월 22일(계묘) 1번째기사
[23]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
[24]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영조 120권, 49년(1773 계사 / 청 건륭(乾隆) 38년) 윤3월 28일(정해)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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