슘슈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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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슘슈섬은 쿠릴 열도에서 가장 낮은 섬으로, 비소카야산이 최고봉이다. 캄차카반도와 슘슈 해협을 사이에 두고, 파라무시르섬과 파라무시르 해협을 사이에 둔다. 18세기 초 코사크인들이 처음으로 슘슈섬에 도착했으며,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일본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점령되었다. 현재는 러시아 사할린주의 일부로, 1945년 슘슈섬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슘슈섬은 쿠릴 열도 전체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섬으로, 최고봉은 비소카야산(해발 189m)이다. 섬의 지형은 전반적으로 저지대이며 수많은 호수와 습지가 덮여 있다.
본래 아이누족이 '마이룹포'(Mairuppo|마이룹포ain)라는 거주지를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1644년 일본 마쓰마에 번의 지도에 등장하며, 18세기 초에는 캄차카 반도에서 온 러시아 상인들이 쿠릴 열도에서 가장 먼저 접촉한 섬 중 하나가 되었다. 1855년 시모다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임이 확인되었으나,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따라 사할린섬과 교환되어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은 이곳에 '가타오카'(片岡)라는 정착지를 건설하고 홋카이도 슈무슈군에 편입시켰다. 이후 어업이 발달하여 통조림 공장이 세워지는 등 번성하여 한때 여름철 인구가 1,000명에 달하기도 했다.
2. 지형
2. 1. 주요 지형


슘슈섬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폭은 최대 20km 크기의 타원형 섬이다. 면적은 388km2이다.[1] 쿠릴 열도 전체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섬으로, 최고봉은 비소카야산(гора Высокая|고라 비소카야ru, 189m)이다. 고지대에 있는 시레이 산의 해발고도는 171m이다.
섬의 북동쪽은 캄차카반도의 로팟카 곶과 슘슈 해협(러시아어: 제1 쿠릴 해협, Первый Курильский пр.|페르비 쿠릴스키 프롤리프ru)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서쪽은 파라무시르섬과 파라무시르 해협(러시아어: 제2 쿠릴 해협, Второй Курильский пр.|프토로이 쿠릴스키 프롤리프ru)으로 나뉜다.
지형은 전반적으로 저지대이며, 해발 200m 정도의 완만한 구릉이 이어진다. 섬에는 수많은 호수와 습지, 늪지, 초원이 덮여 있다. 섬 북쪽 일부는 모래 해변이지만, 그 외 해안은 대부분 절벽이며 많은 암초가 있다. 섬을 흐르는 벳토부 강에서는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기도 한다.
주요 호수 및 만3.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일본군의 중요 군사 기지가 되었으며, 1945년 8월 18일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소련군이 상륙하여 8월 23일까지 슘슈섬 전투가 벌어졌다. 이는 쿠릴 열도에서 벌어진 유일한 소련-일본 간 전투였다. 종전 후 소비에트 연방이 점령하였고, 일본인 주민들은 추방되거나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가타오카는 '바이코보'(Байково|바이코보rus)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 소련은 이 섬을 자국 영토로 공식 편입했으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일본은 슘슈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이 실효 지배를 계승하여 현재 사할린주 세베로쿠릴스키군에 속해 있다. 현재 상주 인구는 없다.
3. 1. 초기 역사
선사 시대부터 아이누족이 거주했으며, 풍부한 어류, 해양 포유류, 조류 등을 이용해 생활을 유지했다. 섬에는 '마이룹포'(Mairuppo|마이룹포ain)라는 아이누족 거주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44년 에도 시대 일본의 마쓰마에 번이 제작한 공식 지도에 슘슈섬이 나타난다. 1700년에는 마쓰마에 번이 막부에 제출한 겐로쿠 국회도의 마츠마에 시마고초에 '시이모시'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1715년 마쓰마에 번주는 막부에 홋카이도 본섬, 사할린, 쿠릴 열도, 캄차카 반도 등이 마쓰마에 번의 영토라고 보고하기도 했다.
캄차카 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슘슈섬은 18세기 초 캄차카 반도에서 온 코사크인들이 쿠릴 열도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섬이 되었다. 1711년과 1713년에는 러시아의 모피 상인인 다닐라 안치페로프(Данила Яковлевич Анцыферов|다닐라 야코블레비치 안치페로프ru)와 이반 코지레프스키(Иван Петрович Козыревский|이반 페트로비치 코지레프스키ru)가 섬에 상륙하여 아이누족 주민들에게 야사크(모피세)를 징수했다. 러시아 상인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점차 쿠릴 열도의 다른 섬들과 사할린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러시아 제국은 슘슈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1855년 일본과의 시모다 조약(러일 화친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영토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3. 2. 일본 통치 시대 (1875년 - 1945년)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에 따라 사할린섬과 교환되어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로써 슘슈섬은 러시아 제국, 이후 소비에트 연방과 마주하는 최전선이 되었고, 홋카이도 치시마국 슈무슈군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로부터 섬을 인계받을 때의 인구는 33명[1] 또는 35명[2]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은 아이누족의 정착지였던 마이룹포(Mairuppo) 자리에 가타오카(片岡)라는 이름의 상업 중심지를 건설했다.
일본의 식민지 개척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06년 러일어업협정 체결 이후 북양 어업이 본격화되면서 슘슈섬은 상업적 어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1910년 소규모 게 통조림 공장이 세워졌고, 1914년에는 마루하 니치로(당시 마루하)가 본격적인 조업을 시작했다. 어업이 성행하면서 한때 여름철 인구가 약 1,000명에 달했으며, 1940년대 초에는 섬의 민간인 인구가 2,000명을 넘어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슘슈섬은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가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했지만, 소련군은 8월 18일 슘슈섬 북부 다케다하마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슘슈섬 전투를 벌였다. 이는 쿠릴 열도에서 유일하게 소련군과 일본군 간의 조직적인 전투가 벌어진 사례이다. 전투는 8월 23일까지 계속되었고, 결국 일본 수비대의 항복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하면서, 슘슈섬은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3. 3. 슘슈섬 전투 (1945년 8월)
1945년 8월 15일(모스크바 시간 8월 14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통고한 후, 극동 소련군 총사령관은 제2극동 방면군 사령부와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 캄차카 반도의 병력을 이용해 쿠릴 열도 북부를 점령하라는 작전 명령을 내렸다.[6]
소련군의 슘슈섬 상륙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일본군의 무장 해제가 진행되던 8월 18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섬 북부의 다케다하마 해안으로 상륙했으며, 이에 급히 무장 해제를 중단한 일본군 수비대(제91사단 등)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쿠릴 열도에서 소련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유일한 교전이었다.
전투 초기에는 일본군이 반격하여 소련군을 상륙 지점인 다케다하마까지 밀어내는 등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 제5방면군 사령부의 전투 중지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군사를 파견하여 소련군과 정전 협상을 시작했다. 8월 21일, 일본군 제91사단장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정전이 완전히 성립되었다. 이후 8월 24일까지 슘슈섬과 인근 파라무시르섬의 일본군은 모두 무장 해제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인한 사상자 수는 소련군이 약 1,567명으로, 일본군의 사상자 약 1,018명보다 많았다. 항복 후 무장 해제된 일본군 병사들은 시베리아 억류되었다.
전투 이후에도 슘슈섬에는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14년부터 러시아 사할린주의 조사단이 슘슈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과 소련군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2015년 11월까지 27구의 유해가 일본 측에 인도되었으나, 신원이 확인된 것은 1구에 불과했다. 2016년 7월 조사에서는 유해와 함께 일본군의 카논포 등이 수습되었다.[7] 2017년 7월 19일에는 일본의 민간 단체 약 20명이 캄차카 반도에서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격전지였던 시레이 산을 방문해 위령제를 지냈다. 이는 2005년 일본 정부 주최 위령제 이후 12년 만에 열린 민간 차원의 위령 행사였다.[8]
3. 4. 소련/러시아 통치 시대 (1945년 - 현재)
1945년 8월 18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선언한 후 소련군이 섬 북부의 다케다하마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와 슘슈 전투를 벌였다. 이는 쿠릴 열도에서 소련과 일본군 간의 유일한 교전이었다. 전투는 8월 23일까지 이어졌고, 일본 수비대의 항복으로 끝났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소비에트 연방이 섬을 점령하였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조인하자 같은 날 발표된 일반 명령 제1호에 따라 슘슈섬은 소련 점령 하에 들어갔다. 소련은 일본인 전쟁 포로와 대부분의 일본 남성 민간인을 노동 수용소로 보냈으며, 나머지 일본인 민간인들은 강제로 이주시켰다. 기존의 일본인 정착지인 가타오카(片岡)는 '''바이코보'''(Байково|바이코보ru)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 사령관 지령 제677호(SCAPIN-677)에 의해 쿠릴 열도에 대한 일본의 행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지되었다. 같은 해 2월 2일, 소련은 슘슈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를 자국 영토(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로 편입한다고 선언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일본은 슘슈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해당 조약에서는 포기된 쿠릴 열도의 최종 귀속 국가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 지역의 귀속이 미정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쿠릴 열도 영토 문제 참조)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이 섬의 실효 지배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러시아 연방 사할린주 세베로쿠릴스키군(Северо-Курильский городской округ)에 속해 있다. 현재 슘슈섬에 상주하는 인구는 없다.
4. 현대
1945년 8월 18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발표한 이후 소련군이 섬 북부의 다케다하마에 상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슘슈섬 전투). 이는 쿠릴 열도에서 유일하게 소련과의 교전이 발생한 사례이다.[1][2]
같은 해 9월 2일, 일본 정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같은 날 발표된 일반 명령 제1호에 따라 슘슈섬은 소련 점령 하에 들어갔다.[1][2]
1946년 1월 29일, 연합국 최고 사령관 지령 제677호에 의해 쿠릴 열도에 대한 일본의 행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지되었다.[1][2] 같은 해 2월 2일, 소련은 슘슈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한다고 선언했다.[1]
1951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슘슈섬을 포함한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포기했다. 다만, 해당 조약에서는 포기된 쿠릴 열도의 최종 귀속 국가가 명시되지 않았기에, 일본 정부는 이 지역의 귀속이 미정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1]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가 실효 지배를 이어받았다.[1] 현재 러시아는 섬에 소규모 군사 시설을 설치하고 있다.[3] 2013년 기준으로, 러시아명 바이코보(Байковоru, 일본명: 가타오카) 취락에는 등대지기와 그의 가족 4명만이 거주하고 있다.[3]
5. 슘슈섬을 소재로 한 작품
wiki
5. 1. 소설
5. 2. 연극
- TEAM NACS 『PARAMUSHIR〜믿음을 지킨 사혼의 깃발을 들고』, 2018년
참조
[1]
웹사이트
International Kuril Island Project(IKIP)
http://www.washingto[...]
University of Washington Fish Collection or the respective authors
[2]
웹사이트
International Kuril Island Project(IKIP、国際千島調査、英文)
http://www.washingto[...]
University of Washington Fish Collection or the respective authors
2009-07-27
[3]
서적
千島縦断
北海道新聞社
1994
[4]
논문
馬場コレクションの再検討 : 北千島の竪穴住居・土器・石器の基礎的研究
https://hdl.handle.n[...]
北海道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5]
논문
北千島占守島の第二回考古學的調査報告
日本人類学会
[6]
서적
千島占領
[7]
뉴스
北海道新聞
2016-08-07
[8]
뉴스
占守島で日本人慰霊祭 12年ぶり、民間団体主催
https://www.sankei.c[...]
産経新聞フォト
201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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