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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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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즈키 간타로는 1868년 출생하여 1948년 사망한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해군 병학교를 졸업하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어뢰 전술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해군 차관, 해군 참모 총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부터 추밀고문관과 궁내대신을 지냈으며, 1936년 2·26 사건 당시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45년 77세의 나이로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위해 노력했고, 포츠담 선언 수용을 결정하여 쇼와 천황의 항복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종전 후 추밀원 의장을 역임하다가 1948년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1960년 종1위가 증위되었다. 그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특히 포츠담 선언에 대한 대응과 본토 결전 준비, 천벌 발언 사건 등이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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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간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즈키 간타로 정장
스즈키 간타로 1940년대
본명스즈키 간타로
출생일1868년 1월 18일
출생지일본 제국 이즈미국 구제
사망일1948년 4월 17일
사망지일본 지바현 노다시
배우자스즈키 타카
자녀스즈키 하지메
친척스즈키 타카오 (동생), 스즈키 스구루 (조카)
서명
경력
소속 정당대정익찬회 (1940–1945), 무소속 (1940년 이전 및 1945년 이후)
출신 학교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
최종 계급해군 대장
복무 기간1887–1929
참전 전투청일 전쟁 (웨이하이 전투)
러일 전쟁 (여순항 해전, 쓰시마 해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수상금치훈장 (3급)
정치 경력
작위종1위, 남작
소속 정당대정익찬회 (1940년–1945년)
주요 직책
직책제42대 내각총리대신
임기 시작1945년 4월 7일
임기 종료1945년 8월 17일
이전 수상고이소 구니아키
다음 수상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천황쇼와 천황
직책제20대, 22대 추밀원 의장
임기 시작1944년 8월 10일, 1945년 12월 15일
임기 종료1945년 4월 7일, 1946년 6월 13일
이전 의장하라 요시미치, 히라누마 기이치로
다음 의장히라누마 기이치로, 시미즈 도루
추밀원 부의장추밀원 부의장
임기 시작1940년 6월 24일
임기 종료1944년 8월 10일
이전 부의장하라 요시미치
다음 부의장시미즈 도루
겸임 직책제70대 외무대신, 제3대 대동아대신 (총리 겸임)
임기 시작1945년 4월 7일
임기 종료1945년 4월 9일
이전 외무대신시게미쓰 마모루
다음 외무대신도고 시게노리

2. 생애

1868년 1월 18일(메이지 원년), 스즈키 간타로는 이즈미 국(현재의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세키야도 번의 관리인(다이칸)이었던 스즈키 요시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시모사 국의 세키야도(현재의 지바현 노다시)에서 성장했다.[4]

1884년 일본 제국 해군 병학교 14기생으로 입학하여 1887년에 졸업했다. 이후 코르벳 쓰쿠바, 텐류, 순양함 다카치호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했다.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코르벳 아마기, 순양함 다카오, 코르벳 진게이, 철갑함 공고, 포함 마야에서 복무했다. 1892년 해군 대위로 진급한 후에는 코르벳 카이몬, 히에이, 공고의 항해장으로 복무했다.[5]

청일 전쟁에 참전하여 어뢰정을 지휘했으며, 1895년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야간 어뢰 공격에 참여했다. 이후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해군 소령으로 진급, 1901년부터 1903년까지 독일 주재 해군무관을 포함한 여러 참모직을 맡았다.[6] 귀국 후 1903년 해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일본 제국 해군에서 최고의 어뢰 전술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6]

러일 전쟁 동안 1904년 제2 구축대대를 지휘했으며, 뤼순 항 봉쇄 함대에서 생존자를 구출했다. 같은 해 2월 26일 순양함 카스가의 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황해 해전에 참여했다. 쓰시마 해전에서는 제2함대 휘하 제4 구축대대 지휘관으로, 러시아 전함 나바린을 격침하는 데 기여했다.[6]

전쟁 후 1907년 해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구축함 아카시(1908), 순양함 소야(1909), 전함 시키시마(1911), 순양함 쓰쿠바(1912)를 지휘했다. 1913년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이즈루 해군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년부터 1917년까지 해군성 차관을 역임했다.[6] 1917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6] 1918년 초 순양함 아사마와 이와테를 샌프란시스코로 이끌고 1,000명의 사관 후보생을 데려갔으며, 미국 해군 준장 윌리엄 풀람의 영접을 받았다. 그 후 일본 순양함은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일본 제국 해군 병학교장, 제2함대 사령관, 제3함대 사령관, 구레 해군 구역 사령관을 거쳐 1923년 8월 3일 해군 대장이 되었다. 1924년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었고,[6] 1925년 4월 15일부터 1929년 1월 22일까지 해군 군령부장을 역임한 후 은퇴하여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추밀고문관 및 시종장 직을 맡았다.

해군 대장 시대의 스즈키 간타로(1923년경)


1929년 쇼와 천황데이메이 황후의 희망에 따라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추밀고문관 겸 시종장에 취임했다. 스즈키는 궁중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시종장이 군령부장보다 궁중 서열이 낮아 격이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여 천황을 섬기는 명예로운 직을 거절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시종에게 대부분을 위임하면서, 만약의 경우의 지휘 및 쇼와 천황의 말동무에 전념하여 "대시종장"이라고 불렸다. 1930년 가토 간지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대한 정부의 회훈안에 반대하여 단독 유악상주를 하려고 했을 때, 후배인 가토를 설득하여 생각을 돌리게 했다.[1] 원래 유악상주를 중개하는 것은 시종무관장이며, 당사자인 나라 다케지가 "시종장의 이 처치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스즈키의 행동은 월권 행위의 우려가 있었다.[10]

쇼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반면, 국가주의자·청년 장교들에게서는 마키노 노부아키와 함께 "군주의 측근의 "으로 여겨져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2] 궁내성 측에서도 청년 장교들의 동향을 우려하여, "만약 군인이 궁중에 무장하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의되었을 때, 스즈키는 "군인이든 누구든 무법자는 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11]

2. 1. 초기 생애와 해군 경력

1868년 1월 18일(메이지 원년), 스즈키 간타로는 이즈미 국(현재의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세키야도 번의 관리인(다이칸)이었던 스즈키 요시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그는 시모사 국의 세키야도(현재의 지바현 노다시)에서 성장했다.[4]

1884년 일본 제국 해군 병학교 14기생으로 입학하여 1887년에 45명 중 13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스즈키는 코르벳 쓰쿠바, 텐류, 순양함 다카치호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했다.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코르벳 아마기, 순양함 다카오, 코르벳 진게이, 철갑함 공고, 포함 마야에서 복무했다. 1892년 12월 21일 해군 대위로 진급한 후에는 코르벳 카이몬, 히에이, 공고의 항해장으로 복무했다.[5]

청일 전쟁에 참전하여 어뢰정을 지휘했으며, 1895년 웨이하이웨이 해전에서 야간 어뢰 공격에 참여했다. 이후 해군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6월 28일 해군 소령으로 진급, 1901년부터 1903년까지 독일 주재 해군무관을 포함한 여러 참모직을 맡았다.[6] 귀국 후 1903년 9월 26일 해군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일본 제국 해군에서 최고의 어뢰 전술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6]

러일 전쟁 동안 스즈키는 1904년 제2 구축대대를 지휘했으며, 뤼순 항 봉쇄 함대에서 생존자를 구출했다. 그는 1904년 2월 26일 순양함 카스가의 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황해 해전에 참여했다. 결정적인 쓰시마 해전에서 스즈키는 제2함대 휘하 제4 구축대대 지휘관으로, 러시아 전함 나바린을 격침하는 데 기여했다.[6]

전쟁 후 스즈키는 1907년 9월 28일 해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구축함 아카시(1908)를 지휘했으며, 이어 순양함 소야(1909), 전함 시키시마(1911), 순양함 쓰쿠바(1912)를 지휘했다. 1913년 5월 23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이즈루 해군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즈키는 제1차 세계 대전1914년부터 1917년까지 해군성 차관을 역임했다.[6] 1917년 6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6] 1918년 초 1,000명의 사관 후보생과 함께 순양함 아사마와 이와테를 샌프란시스코로 데려갔으며, 미국 해군 준장 윌리엄 풀람의 영접을 받았다. 그 후 일본 순양함은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일본 제국 해군 병학교장, 제2함대 사령관, 제3함대 사령관, 구레 해군 구역 사령관을 거쳐 1923년 8월 3일 해군 대장이 되었다. 스즈키는 1924년 연합함대 사령관이 되었다.[6] 1925년 4월 15일부터 1929년 1월 22일까지 해군 군령부장을 역임한 후 은퇴하여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추밀고문관 및 시종장 직을 맡았다.

2. 2. 추밀고문관 및 시종장 시절

1929년 (쇼와 4년) 쇼와 천황데이메이 황후의 희망에 따라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추밀고문관 겸 시종장에 취임했다. 스즈키는 궁중의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시종장이 군령부장보다 궁중 서열이 낮아 격이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여 천황을 섬기는 명예로운 직을 거절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중책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시종에게 대부분을 위임하면서, 만약의 경우의 지휘 및 쇼와 천황의 말동무에 전념하여 "대시종장"이라고 불렸다. 1930년 (쇼와 5년) 가토 간지가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 대한 정부의 회훈안에 반대하여 단독 유악상주를 하려고 했을 때, 후배인 가토를 설득하여 생각을 돌리게 했다.[1] 원래 유악상주를 중개하는 것은 시종무관장이며, 당사자인 나라 다케지가 "시종장의 이 처치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스즈키의 행동은 월권 행위의 우려가 있었다.[10]

쇼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반면, 국가주의자·청년 장교들에게서는 마키노 노부아키와 함께 "군주의 측근의 "으로 여겨져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2] 궁내성 측에서도 청년 장교들의 동향을 우려하여, "만약 군인이 궁중에 무장하고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의되었을 때, 스즈키는 "군인이든 누구든 무법자는 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11]

3. 내각총리대신 취임과 종전

1945년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총사퇴한 이후, 스즈키 간타로는 77세의 나이로 총리에 취임했다. 스즈키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그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종전을 모색했으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4]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스즈키는 다음 날인 27일 새벽 이 사실을 외무성을 통해 알게 되었고, 최고 전쟁 지도 회의 및 각의를 소집하여 대응을 협의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포츠담 선언이 사실상 조건부 강화 제안이므로, 즉각적인 거부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공식 견해 발표를 보류하고 소련의 태도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30]

7월 28일, 일본 주요 신문들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 "아무런 중대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이를 묵살할 것이다"라는 논평을 실었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메즈 요시지로, 아나미 고레치카, 도요다 소에무 등 군부 강경파는 정부에 공식적인 비난 성명을 요구했고, 결국 요나이가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무시한다는 성명을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하여 인정받았다. 같은 날 오후 기자 회견에서 스즈키는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로서는 중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묵살하며, 단호히 전쟁 완수에 매진한다"라고 발표했다.[30]

스즈키는 '묵살'이라는 표현을 통해 'no comment영어'(찬반 표명 보류)의 의도를 담으려 했으나,[30] 언론은 이를 '무시'로 해석했고, 연합국 측은 'reject영어'(거부)로 받아들였다. 동맹 통신사는 이를 'ignore it entirely영어'(전면 무시)로 번역했고, 로이터와 AP 통신은 'reject영어'(거부)로 보도했다. 스즈키는 훗날 이 발언이 "매우 유감스러운 점"이었다고 회고했다.[30]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하자,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 수용이 불가피함을 각의를 통해 밝혔다. 그는 이를 정리하여 이미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려던 쇼와 천황에게 상신했고 쇼와 천황은 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계속을 주장하는 일부 청년 장교들은 이에 반발하여 8월 15일 새벽 스즈키를 암살하려는 쿠데타 음모가 있었으나, 스즈키는 관저에 들어오지 않아 암살을 피하였다.

항복이 공포된 이후 스즈키는 사임했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차기 총리로 취임했다.

3. 1. 내각총리대신 취임

1945년 4월 7일, 내각총리대신 고이소 구니아키가 사임하자, 추밀원 의장이었던 스즈키 간타로는 77세의 나이로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동시에 외무대신과 대동아 대신 직을 겸임했다.[14]

중신 회의에서는 와카쓰키 레이지로, 고노에 후미마로, 오카다 게이스케,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이 스즈키를 총리로 추천했다. 하지만 스즈키는 "군인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총리직을 고사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멸망, 카이저의 몰락,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을 예로 들며, 군인의 정치 관여에 대한 반대 신념을 분명히 했다.[14]

도조 히데키는 일본 육군이 본토 방위의 주체라는 이유로 하타 슌로쿠를 총리로 추천하며, 육군이 등을 돌리면 내각이 붕괴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에 오카다 게이스케는 "국토를 방위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육해군 아니오."라고 반박했고, 도조는 침묵했다.[15]

쇼와 천황은 스즈키에게 "이 국가 위급의 중대한 시기에, 더 이상 사람은 없다."며 간곡히 부탁했고, 결국 스즈키는 "곰곰이 생각해보겠습니다"라며 총리직을 수락했다.[16]

총리 취임 후, 스즈키는 테이메이 황후를 방문했다. 황후는 "지금, 나이 어린 폐하께서 국운 흥폐의 기로에 서서 밤낮으로 고뇌하고 계십니다."라며, "부디, 친 대신이 되어, 폐하의 가슴속의 고뇌를 씻어 주고, 또한 다수의 국민을 도탄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스즈키는 이 이야기를 종전까지 비밀로 간직했다.[15]

조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스즈키는 조각 본부를 자신의 자택으로 정하고, 절친한 오카다 게이스케에게 군수 대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전화 거는 방법조차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뿐이었기에, 오카다는 사위인 사코미즈 히사토모를 불러들여 도움을 요청했다.[17][18][19]

육군 대신은 아나미 고레치카로 결정되었다. 스즈키는 육군 삼장관 회의에서 제시된 세 가지 조건(전쟁 완수, 육해군 일체화, 본토 결전 필승을 위한 정책 실행)을 수락했다.[20] 해군 대신은 요나이 미쓰마사를 유임시키기로 결정했다. 요나이는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스즈키의 강력한 요청에 결국 유임을 받아들였다.[21]

대장 대신에는 가쓰다 가즈토를 낙점했지만, 가쓰다는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사위인 히로세 토요사쿠를 추천했고, 스즈키는 이를 받아들였다.[22] 농상 대신에는 이시구로 타다아쓰를 임명했고, 국무대신 겸 정보국 총재에는 시모무라 히로시를 임명했다.[23]

1945년 4월 7일 밤, 친임식을 마치고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발족했다. 스즈키는 비 국회의원,[24] 에도 시대 출생[25]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내각총리대신이었다. 만 77세 2개월의 내각총리대신 취임은 일본 최고령 기록이다.[26]

스즈키는 총리 취임에 즈음하여, "1억 국민 여러분의 맨 앞에 서서, 죽음으로써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표명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저의 시신을 밟고 넘어, 국운의 타개에 매진해 주실 것"을 부탁하며, 필사의 각오로 전쟁에 임할 것을 다짐했다.[27][28]

스즈키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에 기여했다.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에 대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두 번의 어전 회의를 소집했고, 쇼와 천황에게 무조건 항복 조건을 설명했다.

3. 2. 종전 과정

1945년 4월 7일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총사퇴한 이후, 스즈키 간타로는 77세의 나이로 총리에 취임했다. 스즈키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했다. 스즈키는 소련의 중재를 통한 종전을 모색했으나,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4]

1945년 7월 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스즈키는 다음 날인 27일 새벽 이 사실을 외무성을 통해 알게 되었고, 최고 전쟁 지도 회의 및 각의를 소집하여 대응을 협의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은 포츠담 선언이 사실상 조건부 강화 제안이므로, 즉각적인 거부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공식 견해 발표를 보류하고 소련의 태도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30]

7월 28일, 일본 주요 신문들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 "아무런 중대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이를 묵살할 것이다"라는 논평을 실었지만, 정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메즈 요시지로, 아나미 고레치카, 도요다 소에무 등 군부 강경파는 정부에 공식적인 비난 성명을 요구했고, 결국 요나이가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무시한다는 성명을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제안하여 인정받았다. 같은 날 오후 기자 회견에서 스즈키는 "공동 성명은 카이로 회담의 재탕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로서는 중대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묵살하며, 단호히 전쟁 완수에 매진한다"라고 발표했다.[30]

스즈키는 '묵살'이라는 표현을 통해 'no comment영어'(찬반 표명 보류)의 의도를 담으려 했으나,[30] 언론은 이를 '무시'로 해석했고, 연합국 측은 'reject영어'(거부)로 받아들였다. 동맹 통신사는 이를 'ignore it entirely영어'(전면 무시)로 번역했고, 로이터와 AP 통신은 'reject영어'(거부)로 보도했다. 스즈키는 훗날 이 발언이 "매우 유감스러운 점"이었다고 회고했다.[30]

8월 6일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하자, 스즈키는 포츠담 선언 수용을 결정했다. 8월 10일8월 14일, 두 차례의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쇼와 천황의 '성단'을 이끌어냈다.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이 공식 발표되었다. 같은 날 새벽, 아나미 고레치카 육군 대신이 할복했다. 스즈키 내각은 총사퇴하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차기 총리로 취임했다.

3. 3. 퇴임 이후

1945년 12월, 히라누마 기이치로가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되자 추밀원 의장에 다시 취임했다.[35] 1946년 6월 3일, 공직 추방령 대상이 되면서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세키야도 정(현 노다시)으로 돌아갔다.

1948년 4월 17일, 간암으로 인해 세키야도마치에서 사망[37], 향년 81세였다. 사망 직전, "영원한 평화, 영원한 평화"라고 매우 뚜렷한 목소리로 두 번 반복했다고 한다. 짓소지에 매장되었으며, 유해 속에는 2·26 사건 당시 맞았던 탄환이 섞여 있었다. 유품 대부분은 노다시의 스즈키 간타로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묘(지바현 노다시 세키야도마치 짓소지)

4. 평가 및 논란

스즈키 간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 천황의 항복 결정을 이끌어내 전쟁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1] 그의 결단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평소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포츠담 선언에 대한 '묵살' 발언은 연합국 측에 일본이 항복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해석되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2] 또한 '본토 결전'을 준비하며 국민 의용 전투대를 조직하고, 죽창과 같은 빈약한 무기를 지급하려 한 점은 국민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0] 일본 우익 세력은 스즈키 간타로를 '패전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4. 1. 긍정적 평가

스즈키 간타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당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쇼와 천황의 항복 결정을 이끌어내어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1] 그의 결단은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스즈키는 평소 "군인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1943년 추밀원 의장 시절, 회의 석상에서 해군 대신 시마다 시게타로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해군 갑 사건, 당시 국민에게는 비밀)를 보고하자, 스즈키는 "그것은 도대체 언제 일인가?"라고 물었다. 시마다가 "해군의 기밀 사항이므로 답변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평소 온화하고 과묵한 스즈키가 "'나는 제국의 해군 대장이다! 네놈의 지금 그 답변은 무엇인가!'"라고 큰 소리로 질책했다. (스즈키는 1928년에 예비역, 1932년에 후비역, 1937년에 퇴역했다.[39] 다만, 제국 해군 장교는 종신관이었으므로, 해군 대장 계급은 유지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귀신 간타로"가 건재함을 깨닫고 경악했다.

같은 무렵, 스즈키는 이전에 교장을 맡았던 해군병학교를 방문하여 교장 이노우에 시게토에게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20년 뒤야, 이노우에 군"이라고 말했다. 이노우에는 크게 끄덕였다고 한다.[75] 30여 년 전, 병학교를 졸업한 이노우에가 소위 후보생으로 승선했던 순양함 "소야"의 함장이 바로 스즈키였다.[75] 이노우에는 전쟁 반대파였으며, 교장 취임 후 병학교의 제도와 관습을 개정하여 명교장으로 칭송받았다. 당시 병학교 기획 과장은 "스즈키가 멀리 히로시마현 에타지마의 병학교까지 온 것은, 이 한 마디를 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77]

4. 2. 부정적 평가 및 논란

스즈키 간타로는 총리 재임 시절, 포츠담 선언에 대한 '묵살'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31] 이 발언은 연합국 측에 일본이 항복 의사가 없다는 신호로 해석되었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2] 스즈키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 발언이 군부의 압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31]

스즈키 내각은 '본토 결전'을 준비하며 국민 의용 전투대를 조직하고, 죽창과 같은 빈약한 무기를 지급하려 했다.[30] 이는 국민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본 우익 세력은 스즈키 간타로를 '패전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비난하기도 한다.

5. 기타

2·26 사건 당시 스즈키 간타로는 습격을 받아 몸속에 총알이 박힌 채로 여생을 보냈으며, 이 총알은 그의 화장 후에 발견되었다.[71] 그의 유훈 "정직하게 화내지 말고 굽히지 않고 힘쓰라"는 마에바시 시립 모모이 초등학교의 기본 목표가 되었다.

스즈키 간타로의 차녀 미츠코가 남편 아다치 히토시와 함께 살았던 타이베이 시 쇼와마치의 주택은 현재도 그 자리에 보존되어 레스토랑 "아오타 76"으로 영업 중이다. 증손으로는 와카야마 대학 부학장이자 경제학부 교수 아다치 모토히로, TV 도쿄 뉴욕 특파원 아다치 마리가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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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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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문서 一般に江戸時代の終わりは大政奉還とされるが、これは鈴木が生まれる前の1867年11月15日(慶応3年10月14日)である。一方、明治への改元は1868年10月23日(慶応4年9月8日)であるが、改元に際して「慶応4年をもって明治元年とする(正月までさかのぼって改元)」とされたことから、1868年1月25日(慶応4年1月1日)が明治の始まりとなり、鈴木の誕生日の一週間後となる。したがって、厳密には「明治改元前に生まれた最後の総理大臣」である。なお、「大政奉還前に生まれた最後の総理大臣」は平沼騏一郎。
[26] 문서 退任時の年齢では大隈重信(満78歳6か月)が最高齢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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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문서 鈴木貫太郎を御祭神とした鈴木神社創建の実現には至っていない。
[39] 서적 null 2005
[40] 간행물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93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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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카이브 鈴木貫太郎
[4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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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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