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폴란드 군인으로, 제10기갑기병여단과 제1 폴란드 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발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 프랑스 전역,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하여 연합군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했지만,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명예를 얻었으며, 1994년 폴란드 백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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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마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전후에도 사단장으로써 직책을 맡은 마체크 장군. 그의 계급장이 왼쪽 어깨에 붙어있다.
별명
바차
출생일
1892년 3월 31일
출생지
우크라이나 리비우주 시치레츠 근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현재의 시치레츠)
백수리 훈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기사 십자장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대십자장 용맹 십자장 검이 달린 금 공로 십자장 전체 목록
기타 정보
이후 활동
바텐더
2. 가족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1892년 3월 31일 리비우 교외의 마을에서 태어났다.[23] 그가 태어난 곳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치아 지방에 속해 있었다.[2] 그의 아버지는 드로호비치에서 은퇴한 후 공공 회의실을 연 변호사였다.[23] 그의 가족은 먼 친척 크로아티아 혈통이었다.[3] 그는 크로아티아 정치인 블라드코 마체크의 사촌이었다.
3. 교육
1910년드로호비치의 문법 학교를 졸업하고 리비우 대학교 철학 강좌에 참여하여 폴란드 문헌학(언어와 문학)을 공부했다.[23] 그의 강사들 중에는 빌헬름 브루츠나르스키, 유제프 칼렌바흐와 같은 폴란드 문헌학의 대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23] 그는 또한 카지미에시 트바르도프스키의 수업에도 참석했다.[24] 공부 기간 동안 그는 소총수 연합 의회 기구에 들어가 기초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휘하의 폴란드 지역군에 참여하기를 희망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되었다.[23]
4. 제1차 세계 대전과 이후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리보프 근처 슈체제츠 출신으로, 리비우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격병 동맹 활동에 참여했으며,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단기 장교 훈련을 받은 후,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티롤 연대[2]의 부사관이었으나, 1916년에 소위로, 1918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알프스 연대에서 유일한 폴란드인 대대장이었던 마체크는 산악전 경험을 쌓았고, 이는 이후 그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대한 내용은 각각의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4. 1.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1918-1919)
1918년 11월 11일, 휴전 협정 소식을 접한 마체크는 자신의 대대를 해산하고 새로 부활한 폴란드로 돌아갔다. 사흘 뒤 그는 크로스노에 도착하여 폴란드군에 입대했다. 크로스노 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된 마체크는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군대에 대한 제한적인 공세를 시작하여 포위된 고향을 구출하려 했다. 그러나 충분한 지원 부족으로 인해 우스트르지키 돌네, 키루프, 펠슈틴에서의 초기 성공 이후 폴란드 공세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은 겨울의 나머지 기간 동안 참호전으로 변했다.
1919년 4월 마체크는 부대에서 철수하여 프란치셰크 알렉산드로비치 장군의 폴란드 제4 보병 사단의 일환으로 소위 '비행' 중대(lotna kompaniapl)의 조직자이자 지휘관이 되었다. 마체크의 주도로 창설된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돌격대(Sturmbataillone)를 모델로 하여 오스트리아군 창고에서 가져온 말 끄는 차량(단수형: ''taczanka'', ''podwoda'')과 중기관총으로 잘 무장하여 기동성이 뛰어났다. 이 부대는 대부분 크로스노 대대의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전투 가치는 당시 폴란드군의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따라서 방어선에 생긴 구멍을 메우는 "소방수" 역할도 했지만, 폴란드 봄 공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이 부대는 드로호비치, 스타니슬라부프, 부차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ZUNR의 수도인 스트리를 포함한 전쟁의 가장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다.
4. 2.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1919-1921)
1919년 4월, 마체크는 부대에서 철수하여 프란치셰크 알렉산드로비치 장군의 폴란드 제4 보병 사단 소속으로 '비행' 중대(lotna kompaniapl)를 창설하고 지휘하게 되었다. 마체크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돌격대(Sturmbataillone)를 모델로 삼았으며, 오스트리아군 창고에서 가져온 말 끄는 차량(단수형: ''taczanka'', ''podwoda'')과 중기관총으로 무장하여 기동성이 뛰어났다. 이 부대는 크로스노 대대에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전투력이 당시 폴란드군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방어선에 생긴 구멍을 메우는 "소방수"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폴란드 봄 공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드로호비치, 스타니슬라부프, 부차치, 그리고 ZUNR의 수도 스트리 등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다.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6월 1일부로 마체크는 소령 계급을 승인받았다. 이후 와츠와프 이바슈키에비치 장군의 폴란드 제2군에서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 참모 업무에 지루함을 느낀 마체크는 상관에게 최전선 부대 지휘를 여러 차례 요청했다. 그의 소원은 폴란드-볼셰비키 전쟁 발발 후 세묜 부됸니의 제1 기병군과의 초기 교전에서 제2군이 패배하면서 이루어졌다. 야로스와프에서 마체크는 신병과 말을 잃은 울란으로 구성된 새로운 '비행' 소총 대대를 창설했다. 훈련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대는 전선으로 이동했고, 마체크는 다시 "소방수" 역할을 맡아 필요한 곳에 신속하게 부대를 이동시켰다. 모스티 비엘키에에서 폴란드군 철수를 지원한 후, 율리우시 롬멜 장군의 폴란드 제1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다. 자모시치 근처 바렌시에 대한 폴란드 공격에 참여했으며, 코마로프 전투 직전 부됸니의 코사크 부대 후방에 대한 전술적 반격을 감행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적대 행위 종료 후, 마체크의 대대는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으나, 리가 조약 체결 직후 해산되었다.[3]
5. 전간기
마체크는 리비우 대학교에서의 공부를 재개하지 않고 군에 남기로 결정했다. 1918년폴란드군에 입대하여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전,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갈리시아군과 적군과 싸웠다. 종전 후,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리비우에 본부를 둔 폴란드 제26보병여단 예하 보병 대대를 지휘했다. 1924년바르샤바의 고등 군사 학교를 졸업했다. 1923년 8월 1일 중령으로 진급하여 바르샤바 고등 군사 학교에 들어갔다. 이듬해 졸업 후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리비우에 위치한 폴란드 정보부 역사관의 수장으로 복무했다.
이후 그로드노로 이동하여 제76보병 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제81보병 연대장을 맡았다. 1931년 1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1935년 쳉스토호바로 전출되어 제7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전 사단의 부사령관이었다.
1938년 가을, 제10 자동차화 기병 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 여단은 개전 당시 폴란드군 내에서 유일하게 완전 기계화가 이루어진 정예 부대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형 독일군 헬멧, 검은 가죽 코트라는 독특한 군장으로 '흑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6. 제2차 세계 대전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1944
1944년 11월 25일 브레다에서 영국 육군 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경이 제1 폴란드 기갑사단 본부를 방문하여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소장과 대화하고 있다.
1945년 5월, 제1 캐나다 육군 고급 지휘관들. 왼쪽부터 앉아 있는 사람들: 스타니스와프 마체크(폴란드 육군), 가이 시몬즈, 해리 크레러, 찰스 포울크스, 버트 호프마이스터. 왼쪽부터 서 있는 사람들: 랄프 홀리 키플러, 브루스 매튜스, 해리 윅와이어 포스터, 로버트 몬셀 (크리스 복스 대신 참석), 스튜어트 블런델 롤린스 (영국 육군).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폴란드 침공, 프랑스 공방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서유럽 전선에서 폴란드군을 이끌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제10기갑기병여단과 제1폴란드기갑사단을 지휘하며 독일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고, 폴란드군의 전격전 전술 발전에 기여했다.
영국 고위 지휘부는 처음에는 재건된 폴란드군을 스코틀랜드 해안 방어에만 사용하려 했으나, 마체크의 도착과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장군의 설득으로 폴란드 기갑 부대 창설이 결정되었다.[7] 1942년 2월, 마체크는 제1 폴란드 기갑 사단을 창설하고 블레어고리 훈련장에서 2년간 훈련을 진행했다. 이후 처칠 전차와 M4 셔먼 전차를 장비받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6. 1. 폴란드 침공 (1939)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발발 시, 제10 기갑 기병 여단은 크라쿠프군[5]에 배속되어 소폴란드와 실롱스크를 방어했다. 이 여단은 경전차와 탱크로만 장비되었고, 단 8문의 중포로 구성된 포병 대대만 있었지만, 전쟁 첫날 전투에 돌입했다. 요르다누프 전투 이후, 마체크 부대는 에우겐 바이어 장군의 독일 제18군단 전체와 맞서 베스키드 산맥을 따라 폴란드군의 남쪽 측면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단지 몇 개 대대의 국경 수비대와 국방군의 지원만 받으면서 마체크의 기갑 여단은 2개의 기갑 사단[5](폰 후비키 휘하의 독일 제4 경보병 사단과 파이엘 휘하의 독일 제2 기갑 사단), 그리고 에두아르트 디틀 휘하의 독일 제3 산악 사단과 맞서 싸웠다.
5일 동안 마체크의 여단은 용감하고 효율적으로 싸웠고, 독일군의 ''전격전''의 속도를 늦췄다. 수적,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하루에 10킬로미터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마체크의 부하들은 산악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많은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때때로 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크라쿠프군의 전선이 여단의 위치 북쪽에서 붕괴된 후, 마체크의 부대는 전선에서 철수했다.
그 후 여단은 소폴란드의 다리와 여울을 방어하는 차단 부대로 싸웠고, 르비우에 도착하여 도시 방어에 합류했다. 르비우 전투 동안 기동 예비대로서 다른 폴란드 부대가 루마니아 교두보로 철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9월 17일 소련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쓸모없게 되었다. 이틀 후, 폴란드 원수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글리는 여단에게 헝가리 국경을 넘으라고 명령했다. 마체크의 여단은 헝가리에 억류되었다. 부대는 병력의 절반 정도를 잃었지만, 정면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며,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다. 1939년에 단 한 번의 전투도 패배하지 않은 유일한 폴란드 부대로 여겨진다. 마체크는 그의 상관들뿐만 아니라 그의 병사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으며, 병사들은 그를 폴란드 고지대인들이 목동을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인 바차|Bacapl라고 불렀다.
6. 2. 프랑스 전역 (1940)
9월 작전이 끝난 후, 마체크는 프랑스로 건너가 재건된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여단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Coëtquidan에 있는 폴란드 군사 기지의 지휘관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독일의 전격전 전술의 작동 방식과 이에 대한 가능한 예방 조치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준비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프랑스 참모부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고, 독일군은 봉인된 상태로 이를 압수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에 도착한 제10기병여단 생존자들을 Paimpont와 Campeneac의 두 캠프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이전 부대의 통합성을 유지하고, 훈련이 가장 잘 된 폴란드 군인들이 경험이 낭비될 가능성이 있는 일반 보병 부대에 징집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사령부는 처음에는 폴란드 기갑 부대 형성에 관심이 없었고, 폴란드 제10기갑기병여단은 장비를 거의 받지 못했다. 1940년 3월이 되어서야 마체크는 훈련용으로 12대의 구식 FT-17 전차와 수십 대의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받았다.
프랑스 공방전이 시작된 1940년 봄에 마지노 선을 단순히 우회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체크 장군의 부대는 갑자기 요청했던 모든 장비를 받게 되었는데,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즉시 작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이는 불가능했는데, 많은 폴란드 군인들이 새로운 프랑스 장비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고 훈련을 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마체크 장군은 나머지 부대가 나중에 합류할 것을 희망하며, 가장 훈련이 잘 된 그의 부대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이끌기로 결정했다. 그 소규모 부대는 1939년의 "흑색 여단"을 기리기 위해 제10기갑기병여단(10 Brygada Kawalerii Pancernejpl)이라고 불렸다. 6월 6일, 제10여단은 1개 전차 대대, 2개 강력한 기동 기병대, 1개 대전차 포대, 1개 대공 포대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랭스 근처에서 프랑스 제4군에 배속되어 좌익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 그러나 마체크의 부대는 독일 기갑 사단을 상대로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 약했다. 폴란드 군인들은 Champaubert-Montgivroux에서 독일군을 공격하여 단 하나의 퇴각하는 프랑스 보병 사단을 엄호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여단은 나머지 프랑스군과 함께 철수하여 프랑스 제23군단에 합류했다. 6월 16일, 여단은 부르고뉴 운하를 넘어 몽바르 마을을 야간에 공격했다. 마체크의 군인들은 완전한 기습에 성공하여 많은 독일군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당시 여단은 고립된 상태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양쪽 측면에 있던 프랑스 부대는 궤멸되었거나 퇴각했다. 그 승리를 활용할 프랑스군은 없었고, 궤멸된 폴란드 부대는 포위되었고 연료가 고갈되었다. 6월 18일, 마체크는 사용할 수 없는 장비를 파괴하고 도보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늦게 그는 여단의 잔여 병력을 소규모 그룹으로 나누어 적의 방어선을 통과하도록 했다. 마체크 장군 자신을 포함한 많은 마체크의 부대원들은 비시 프랑스, 북아프리카, 포르투갈을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폴란드 기갑 부대가 재건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폴란드 및 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에 합류했다. 마체크는 런던으로 이주했다.
6. 3. 서유럽 전선 (1944-1945)
1944년 7월 말, 폴란드 제1 기갑사단은 노르망디에 도착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활약하였다. 제1 캐나다 육군에 배속된 마체크 부대는 8월 8일 토탈라이즈 작전에 참전했다. 이 사단은 미국 육군 항공대 항공기의 아군 오사 공격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몽 오르멜, 262 고지, 샹부아 전투에서 독일 국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일련의 공세 및 방어 작전은 팔레즈 포위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14개의 독일 국방군 및 SS 사단이 거대한 샹부아 포위망에 갇혀 파괴되었다. 마체크 사단은 독일 사단의 탈출로를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8]
이후 마체크 사단은 프랑스 북부,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 전장을 횡단하는 연합군의 선봉을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벨기에의 이프르, 오스트뉘우케르케, 루셀라레, 틸트, 루이슬레데, 겐트를 해방시켰다. 폴란드어 단어 "마체크"는 영어로 "양귀비"를 의미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프르 주변 지역과 관련된 기억의 상징이다. 측면 기동 덕분에 어려운 전투를 치르고도 마을 인명 피해 없이 네덜란드의 브레다를 해방하는 것이 가능했다. 브레다 주민 4만 명을 대신한 청원으로 마체크는 전쟁 후 명예 네덜란드 시민이 되었다. 사단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빌헬름스하펜의 독일 해군 기지 항복을 받아 히틀러의 크리그스마리네 소속 선박 약 200척과 함께 전체 수비대를 포획했을 때였다.
마체크는 유럽 전역의 적대 행위가 끝날 때까지 제1 기갑사단을 지휘했고, 소장으로 진급했다. 독일 항복 후 그는 폴란드 제1 군단을 지휘했으며, 1947년 해산될 때까지 영국에 주둔한 모든 폴란드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7. 전후
마체크의 묘, 폴란드 묘지, 브레다, 네덜란드
마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영국에 머물러야 했다. 1948년 군에서 퇴역했지만, 영국군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연금을 받지 못하고 1960년대까지 에든버러의 한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9][10]
7. 1. 망명 생활과 명예 회복
전후 마체크는 공산주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에 의해 폴란드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이로 인해 영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는 1948년 9월 9일에 군대를 떠났지만[9] 영국군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장군 연금을 거부당했다.[9] 그 결과, 마체크는 1960년대까지 에든버러의 한 호텔에서 바텐더로 일했다.[10]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장군, 에든버러 시의회 밖 벤치.
영국에 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장군은 네덜란드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해방시킨 지역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브레다 시의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최근에 획득한 기록 보관 문서에 따르면, 폴란드 장군은 남은 생애 동안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비밀리에 매년 수당을 받았다. 1950년 브레다의 시장인 클라우디우스 프린센이[11] 마체크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정보를 받은 후, 네덜란드 정부는 마체크에게 비밀 예산에서 외무부가 지급하는 물가 연동 장군 연금을 수여했다. 폴란드 장군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숙련되지 않은 노동을 하고 있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가 필요한 만성 질환을 앓는 딸을 돌봐야 했다.[12]
브레다 시장은 전쟁 영웅의 재정적 어려움을 네덜란드 정부에 알리고, 네덜란드를 해방시킨 그를 돕기 위해 정부에 호소했다.[13] 네덜란드 정부는 민감한 특성상 이 사실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14]냉전 시대에 네덜란드가 비공산주의 폴란드 전직 장군에게 돈을 지급하고 있다는 발표는 공산주의 폴란드 정부 및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었고, 영국 정부에게도 불편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 대중은 마체크의 딸이 스페인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65년에 즉시 반응하여,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모금했다.[12]
1972년, ''네덜란드 폴란드 가톨릭 연합''은 네덜란드 의회에 네덜란드에 남아있는 폴란드 참전용사들의 연금 보상을 요구했다.[15] 그러나 네덜란드 국방부는 전시 연금을 받으려면 비네덜란드인이 전쟁 기간 동안 네덜란드군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Algemene Militaire Pensioenwet'' (1966)에 따라 이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했다.[12][16]
1989년,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 총리의 마지막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는 장군에게 공개 사과를 했고, 1994년에는 폴란드의 최고 국가 훈장인 백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17]
스타니스와프 마체크 중장은 1994년 12월 11일에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8] 그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그는 네덜란드 브레다에 있는 폴란드 군사 묘지에 그의 병사들과 함께 안장되었다.[18] 묘지 옆에는 2020년에 마체크 기념관 브레다가 개관했다. 매년 해방의 날 축제 기간 동안 브레다는 많은 폴란드 대표단이 방문하며, 시는 축제의 일부를 전몰한 폴란드 군인들에게 헌정한다.
마체크와 제1 폴란드 기갑 사단에 속한 많은 유물과 기념품은 런던의 폴란드 연구소 및 시코르스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18년에는 에든버러 시의회의 사각형 구역에서 마체크 장군을 기리는 청동상이 공개되었다. Bruntsfield Links를 가로질러 Marchmont의 아덴 스트리트에 있는 장군의 옛 집으로 이어지는 보도는 General Maczek Walk로 명명되었다.[19][20]
8. 유산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한 폴란드군 장성이다. 폴란드군 최초의 기계화 부대인 제10 자동차화 기병 여단과 제1 폴란드 전차 사단을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폴란드 공산 정권에 반대하며 망명 생활을 했고, 1994년 102세로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 독립의 상징으로 존경받았다.[1]
스타니스와프 마체크는 폴란드군 장성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여 폴란드와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폴란드군 최초의 기계화 부대인 제10 자동차화 기병 여단을 이끌고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공방전에서 용맹하게 싸웠다. '흑여단'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부대는 독특한 군장과 뛰어난 전투력으로 명성을 떨쳤다.[1]
마체크는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헝가리와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하여 계속해서 조국을 위해 싸웠다. 영국에서 제1 폴란드 전차 사단을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등지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1]
전쟁 이후에도 마체크는 폴란드 공산 정권에 반대하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지하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94년 10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 독립의 상징적인 인물로 존경받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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