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만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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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1282년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에 시칠리아 팔레르모에서 프랑스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봉기이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통일을 방해하려는 프랑스의 야망과 시칠리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봉기는 팔레르모의 성령 교회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프랑스인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반란군은 시칠리아 섬 대부분을 장악하고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으며,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여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이 사건은 이후 20년간의 시칠리아 만종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시칠리아의 분열과 문화적 영향을 남겼다. 또한, 미국 마피아, 예술 작품, 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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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만종 사건 - 나폴리 왕국
나폴리 왕국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성립되어 다양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1816년 시칠리아 왕국과 통합되어 양시칠리아 왕국이 되었다.
시칠리아 만종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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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시칠리아 만종 사건 |
일부 | 궬프와 기벨린 및 시칠리아 만종 전쟁의 일부 |
시기 | 1282년 3월 30일 – 1282년 4월 28일 |
장소 | 시칠리아 |
결과 | 반란군의 승리 앙주 가문 정권 타도 나폴리 왕국 분리 수립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시칠리아 파벌 (슈타우펜 가문 충성파) |
교전 세력 2 | [[File:Coa Italy Country History Charles I of Naples (1277).svg|20px]] 시칠리아 왕국 (앙주 가문 정권)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조반니 다 프로치다 루제로 마스트란젤로 보니파시오 데 카메라나 [it] |
지휘관 2 | 샤를 1세 장 드 생레미 |
전력 | |
교전 세력 2 | 사망자 4,000명 |
관련 전투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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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시칠리아 왕국은 호엔슈타우펜가를 단절시킨 프랑스 왕족인 앙주 가문의 샤를 당주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계 주민들 사이에는 불만이 쌓여 있었다. 샤를 당주는 인척 관계를 통해 멸망한 옛 라틴 제국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로마 교황과 손잡고 동로마 제국 정복을 계획하면서 주민들로부터 강압적으로 식량이나 가축을 조달했고, 이것이 주민들의 반발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35]
2. 1. 교황령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대립
13세기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고, 이탈리아 남부는 마찬가지로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다스리는 시칠리아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두 영토 사이에 끼어 있던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갈등을 일으켰다. 한편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콘라트 4세가 1254년 사망함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비게 되었다. 이 사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4][5]만프레디는 교황령과 화해를 시도했으나, 교황 우르바노 4세와 후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만프레디를 인정할 수 없었다. 우르바노 4세는 앙주 백작 샤를(나폴리의 샤를 1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계승권이 있다고 선언했다.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앙주 백작 샤를은 만프레디를 전사시키고 승리하여 시칠리아의 카를루 1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1268년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이 왕위를 요구하며 시칠리아를 침공했으나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함에 따라, 카를루 1세의 왕권은 확고한 것이 되었다.[6]
2. 2. 앙주 가문의 샤를 1세와 시칠리아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앙주 백작 샤를은 만프레디를 전사시키고 승리하여 시칠리아의 카를루 1세로서 왕위에 올랐다.[7] 1268년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이 왕위를 요구하며 시칠리아를 침공했으나 패배하여 카를루 1세의 왕권은 확고해졌다.[7]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이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몰아내고,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여 지중해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7] 카를루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시칠리아를 식민지처럼 다루었는데, 시칠리아 귀족들은 왕국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고, 해외 식민지에서 쏟아지는 부는 카를루와 그의 프랑스 및 나폴리 출신 신하들이 독차지했다.[7] 또한 카를루는 시칠리아 왕국과 관계없는 해외 원정을 위해 시칠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7]
스티븐 런시먼은 "[시칠리아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방인 독재자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을 정복을 할 수 있도록 통치받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였다.[7]
2. 3. 아라곤 왕국의 개입 배경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이용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를 몰아내고, 서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차지하여 지중해를 제패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카를루는 시칠리아를 식민지처럼 다뤘으며, 시칠리아 귀족들은 왕국 정부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또한 카를루는 시칠리아 왕국과 관계없는 해외 원정을 위해 시칠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7]한편, 카를루의 위협을 느끼던 비잔티움 황제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왕비 쿠스탄차를 통해 시칠리아 왕위를 노리고 있던 아라곤 연합 왕국의 페로 3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반란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스티븐 런시먼은 동로마 제국의 개입 여부와 관계없이 이 사건은 팔레르모 민중이 카를루의 야망을 분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7]
3. 반란
1282년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 팔레르모 외곽의 성령 교회에서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봉기가 시작되었다.[8][9] 이 사건으로 6주 이내에 시칠리아 내 수천 명의 프랑스인들이 학살당했다.
봉기가 시작된 정확한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스티븐 런시먼은 시칠리아인들이 축제를 즐기던 중 프랑스 관리들이 합류하여 술을 마셨고, 이때 드루에라는 하사가 젊은 기혼 여성에게 추파를 던져 남편이 그를 칼로 살해했다고 기록했다. 다른 프랑스인들이 복수하려 하자 시칠리아 군중이 덤벼들어 그들을 모두 죽였고, 이 순간 팔레르모의 모든 교회에서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1416)는 팔레르모 사람들이 도시 밖에서 축제를 열고 있을 때 프랑스인들이 무기를 확인한다며 여성들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폭동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은 섬의 구전 전통으로도 전해지는데, 프로치다의 조반니가 음모의 배후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현대 자료에서는 그의 역할이 과장되었거나[12]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13] 보기도 한다.
3. 1. 반란의 전개
1282년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 팔레르모 주민들은 도시 성벽 밖에서 축제를 열고 있었다. 카를루 1세를 대신하여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프랑스인들은 이 축제가 위협적인 사태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보냈다. 그 순간, 시칠리아인들에게 봉기를 알리듯, 팔레르모 성령 교회의 저녁 기도의 종소리가 팔레르모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팔레르모에서 반란 지도자가 선출된 후, 시민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반란군은 2주 만에 시칠리아 섬 대부분을 장악했고, 6주 뒤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했다. 4월 28일 메시나까지 함락시킨 반란군은 항구에 있던 카를루 1세의 함대를 불태웠다.[39]
섬을 점령한 시민들은 자신들을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자유민으로 선언했다. 시민 지도자들은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카를루가 실권했음을 알리고,[40]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자유민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시칠리아 시민들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도시국가들처럼 정치적으로 독립된 정부를 세우고 종교적, 도덕적인 영역에서만 교황의 명령을 받는 지위를 원했다. 그러나 프랑스 출신 교황은 카를루의 편이었고, 시민들에게 카를루를 왕위에 복귀시킬 것을 명령했다.
이 사건은 1282년 3월 30일 부활절 월요일 밤 저녁기도가 시작될 때 팔레르모 외곽의 성령 교회에서 시작된 봉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8][9] 그날 밤부터 6주 이내에 수천 명의 시칠리아 내 프랑스인들이 학살당했다.
스티븐 런시먼에 따르면, 교회에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축제에 참여하고 있었고, 프랑스 관리들이 합류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드루에라는 이름의 하사가 한 젊은 기혼 여성을 군중에서 끌어내어 추파를 던졌고, 그녀의 남편이 칼로 드루에를 공격하여 죽였다. 다른 프랑스인들이 복수하려 하자, 시칠리아 군중이 그들에게 덤벼들어 모두 죽였다. 그 순간 팔레르모의 모든 교회 종이 저녁기도를 위해 울리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1416)에 따르면, 팔레르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이 무기를 확인하기 위해 다가왔을 때 도시 밖에서 축제를 열고 있었고, 이를 핑계로 여성들의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폭동을 일으켰다. 프랑스인들은 처음에는 돌로, 그 다음에는 무기로 공격을 받았고, 모두 죽었다. 이 소식이 다른 도시로 퍼져 시칠리아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팔레르모에서 지도자들이 선출된 후, 반군이 프랑스가 저항을 조직할 시간을 갖기 전에 공격하도록 메신저들이 섬 전역에 소식을 퍼뜨렸다. 2주 만에 반군은 섬 대부분을 장악했고, 6주 만에 메시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반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메시나는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지도 가문인 리소는 샤를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4월 28일, 메시나 역시 인민 대장의 지휘 아래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섬 주민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이 항구에 있던 샤를의 함대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14]
샤를의 대리인 허버트와 그의 가족은 마테그리폰 성 안에 안전하게 있었지만, 협상 끝에 반군은 허버트와 그의 가족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섬을 떠날 수 있는 안전 통행증을 부여했다. 도시의 질서가 회복된 후, 시민들은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자유 코뮌임을 선언했다. 그들은 지도자들을 선출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르톨로메우스 데 네오카스트로였다. 또한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다음으로 한 행동은 제노바 상인 알라프란코 카사노를 통해 황제 미카엘에게 그의 숙적인 샤를이 무력해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16] 그 후, 섬의 각 도시가 성 교회의 유일한 종주권 하에 자유 코뮌으로 인정받도록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대사들을 보냈다. 섬 주민들은 자체 정부를 구성할 자유가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교황에게만 복종하며, 교황은 모호하고 불안정한 종주권을 갖는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다른 도시들과 유사한 지위를 원했다.[17] 그러나 프랑스 출신 교황은 샤를 편에 확고히 서서 시칠리아인들에게 샤를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도록 지시했다.[18]
4. 아라곤의 개입
교황이 시칠리아 시민들의 자유민 지위 요구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만프레디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인 쿠스탄차 왕비와 국왕 페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페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와 함께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41]
반란 직전, 페로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교황이 함대의 목적을 묻자, 페로는 아라곤의 교역을 방해하는 북아프리카 해적 소탕을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왕위를 제안했을 때, 페로와 그의 함대는 시칠리아 섬에서 300km 떨어진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로는 교황의 뜻을 존중하는 척하며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했으나, 며칠 후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페로는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41]
시민들은 처음에는 페로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자유민 지위를 원했던 시민들에게 페로의 즉위는 외국인 왕이 다른 외국인 왕으로 바뀐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로가 옛 노르만인계(오트빌가) 시칠리아 왕 구기에르무 2세가 주었던 특권을 약속하자, 시민들은 페로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페로는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페트루 1세로 즉위했다.[41]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축복 하에 앙주의 카를루 1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나폴리 왕국에서 함대를 보내 메시나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카를루의 군대는 페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해야 했다.
5. 시칠리아 만종 전쟁
교황이 시칠리아 시민들의 자유민 지위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만프레디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인 아라곤 왕비 쿠스탄차, 그리고 국왕 페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페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와 함께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41]
반란 직전 페로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황이 함대의 목적을 묻자 페로는 아라곤의 교역을 방해하는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왕위를 제안했을 때 페로와 그의 함대는 편리하게도 시칠리아 섬에서 300km 떨어진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로는 교황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 했으나, 며칠 후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페로는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페로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자유민의 지위를 바랐던 시민들에게 페로의 즉위는 외국인 왕이 다른 외국인 왕으로 바뀐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로가 옛 노르만인계(오트빌가) 시칠리아 왕 구기에르무 2세가 주었던 것과 같은 특권을 시민들에게 약속함에 따라, 시민들은 페로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페로는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페트루 1세로 즉위했다.[41]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축복 하에 카를루 1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나폴리에서 함대를 보내 메시나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카를루의 군대는 페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된다.[35]
이후 20년 동안, 앙주 카페가 및 교황 세력이 한 편이 되고 아라곤 왕들이 다른 한 편에 서서 벌인 '''시칠리아 만종 전쟁'''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이 싸움은 1302년 Paci di Cataviddotta|칼타벨로타 평화협정scn을 맺으면서 끝이 났다. 조약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섬과 남부 이탈리아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두 왕국 전부 시칠리아 왕국으로 주장하지만 학계에선 이를 분리시켜 전자는 트리나크리아 왕국, 후자는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된다.
6. 결과 및 영향
1282년 3월 30일, 팔레르모에서 앙주 가문의 병사들이 시칠리아 주민 여성에게 폭행을 가한 것에 분노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시칠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4,000명이나 되는 프랑스계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동로마 제국 원정용 함선도 다수가 파괴되었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가 준비하던 원정 계획은 크게 빗나가게 되었다.[35]
사건 발생일은 부활절 다음 날인 월요일이었고, 교회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만도(저녁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여 있었다. 폭동이 시작되었을 때 만도를 알리는 종이 울렸기 때문에 "시칠리아의 만종(만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5]
로마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십자군 작전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섬 전체 주민을 파문하는 조치를 취했다. 샤를 측도 반격에 나섰으나,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샤를의 군대를 격파하고 시칠리아의 왕위에 즉위했다.[35]
당시 시칠리아 왕국은 호엔슈타우펜가를 단절시킨 프랑스 왕족인 앙주 가문의 샤를 당주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계 주민들 사이에는 불만이 쌓여 있었다. 샤를 당주는 동로마 제국 정복을 계획하면서 주민들로부터 강압적으로 식량이나 가축을 조달했고, 이것이 주민들의 반발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35]
몇 년 후, 비잔틴 제국 황제 미하일 8세는 자서전에서 "내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고 감히 주장한다면, 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22] 그러나 런시먼은 비잔틴 제국의 금화 유무에 관계없이, 무장한 압제자에게 맞서 싸운 것은 오직 자부심 강한 시칠리아인들이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어떻게 계획되고 준비되었든 간에, 샤를 왕의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팔레르모의 그날 저녁 만종 사건이었다."라고 덧붙였다.[23]
팔레르모에서 지도자들이 선출된 후, 반군은 프랑스가 저항을 조직할 시간을 갖기 전에 공격하도록 메신저들이 섬 전역에 소식을 퍼뜨렸다. 2주 만에 반군은 섬 대부분을 장악했고, 6주 만에 메시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반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메시나는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지도 가문인 리소는 샤를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4월 28일, 메시나 역시 인민 대장 Alaimo da Lentini|알라이모 다 렌티니it의 지휘 아래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섬 주민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항구에 있던 샤를의 함대에 불을 지른 것이었다.[14] 함대 파괴 소식을 들은 샤를은 "주여, 당신이 제 운명을 망치셨으니, 조금씩 천천히 무너지게 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15]
샤를의 대리인 허버트와 그의 가족은 마테그리폰 성 안에 안전하게 있었지만, 협상 끝에 반군은 허버트와 그의 가족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섬을 떠날 수 있는 안전 통행증을 부여했다. 도시의 질서가 회복된 후, 시민들은 교황에게만 복종하는 자유 코뮌임을 선언했다. 그들은 지도자들을 선출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르톨로메우스 데 네오카스트로였으며, 그는 사건 전개에 두드러진 인물이었고, 나중에 반란의 많은 부분을 역사가들에게 중요하지만 때로는 모순적인 정보원인 ''Historia Sicula''에 기록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지도자들이 다음으로 한 행동은 제노바 상인 알라프란코 카사노를 통해 황제 미하엘에게 그의 숙적인 샤를이 무력해졌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16] 그 후, 섬의 각 도시가 성 교회의 유일한 종주권 하에 자유 코뮌으로 인정받도록 교황 마르티노 4세에게 대사들을 보냈다. 섬 주민들은 자체 정부를 구성할 자유가 있지만 도덕적으로는 교황에게만 복종하며, 교황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다른 도시들과 유사한 지위를 원했다.[17] 그러나 프랑스 출신 교황은 샤를 편에 확고히 서서 시칠리아인들에게 샤를을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도록 지시했다.[18]
6. 1. 시칠리아 왕국의 분열
교황이 시칠리아 시민들의 자유민 지위를 거절하자, 시민들은 만프레디의 딸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후계자인 아라곤 왕비 쿠스탄차와 국왕 페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페로 3세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와 함께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41]반란 직전 페로 3세는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교황이 함대의 목적을 묻자 페로는 아라곤의 교역을 방해하는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시칠리아인들이 왕위를 제안했을 때 페로와 그의 함대는 편리하게도 시칠리아 섬에서 300km 떨어진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페로는 교황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 했으나, 며칠 후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다. 페로는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페로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자유민의 지위를 바랐던 시민들에게 페로의 즉위는 외국인 왕이 다른 외국인 왕으로 바뀐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로가 옛 노르만인계(오트빌가) 시칠리아 왕 구기에르무 2세가 주었던 것과 같은 특권을 시민들에게 약속함에 따라, 시민들은 페로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페로는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페트루 1세로 즉위했다.[41]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축복 하에 카를루 1세는 왕위를 회복하기 위해 나폴리에서 함대를 보내 메시나 항을 봉쇄했다. 그러나 카를루의 군대는 페로가 이끄는 아라곤 군의 습격을 받아 시칠리아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20년 동안, 앙주 카페가 및 교황 세력이 한 편이 되고 아라곤 왕들이 다른 한 편에 서서 벌인 시칠리아 만종 전쟁이 지중해 전역을 휩쓸었다. 이 싸움은 1302년 Paci di Cataviddotta|칼타벨로타 평화협정scn을 맺으면서 끝이 났다. 조약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섬과 남부 이탈리아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두 왕국 전부 시칠리아 왕국으로 주장하지만 학계에선 이를 분리시켜 전자는 트리나크리아 왕국, 후자는 나폴리 왕국으로 불리게 된다.[35]
6. 2. 마피아 기원설
도시 전설에 따르면 마피아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작되었으며, 마피아라는 단어 자체는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ia!''"("프랑스에 죽음을, 이탈리아의 외침!")의 거꾸로 만든 약어라고 한다.[25]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13세기에 자신들을 이탈리아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다. 마피아라는 용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26]마피아가 1282년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는 비밀 결사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마피아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마피아의 자긍심을 외국 압제자로부터 평범한 시칠리아인을 보호하는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수호자로서 홍보하기 위해 퍼뜨린 것이다.[27] 이러한 기원 이야기는 마피아 스스로 믿게 되었고, 예를 들어 미국 마피아 조지프 보난노는 마피아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마피아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친구와 가족에게 말했다.[28]
많은 시칠리아인들이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등장한 피에몬테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국가를 일종의 외국 점령으로 간주했다. 마피아는 피에몬테가 새로운 국가에서 권력을 독점하는 방식에 대해 ''메초조르노''의 사람들이 느끼는 광범위한 분노를 이용하기 위해 이러한 이미지를 홍보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공했다.[29] 따라서 마피아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의 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으며, 이는 이탈리아 국가가 일련의 외국 압제자 중 가장 최근의 존재였고, 시칠리아인들이 마피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 국가와 협력하는 것은 비열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했다.[30] 이 폭동을 일으킨 주민들이 외친 암호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프랑스에 죽음을, 이것은 이탈리아의 외침이다)의 각 단어의 머리글자가 "마피아(mafia)"의 어원이라는 설이 그럴듯하게 이야기될 정도로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다.[37]
7. 문화적 영향
시칠리아 만종 사건은 여러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아이예츠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을 주제로 세 작품을 그렸으며, 첫 번째 작품은 1821년에 그려졌다.[24] 도메니코 모렐리, 에룰로 에롤리, 미켈레 라피사르디 등도 시칠리아 만종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작가 | 작품명 | 제작 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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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아이예츠 | 시칠리아 만종 | 1821-1823년 |
도메니코 모렐리 | 시칠리아 만종 | 1859-1860년 |
미켈레 라피사르디 | 시칠리아 만종 | 1865년 |
에룰로 에롤리 | 시칠리아 만종 | 1890-1891년 |
펠리시아 헤만스의 비극 ''팔레르모의 만종''(1823)은 주인공 라이몬드 디 프로치다가 봉기를 지지하지만 무고한 프랑스 시민 살해에는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24] 독일 작곡가 페터 요제프 폰 린드페인트너는 오페라 ''Die Sizilianische Vesper''를 작곡했으며, 1843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초연되었다.[24] 주세페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1855)는 원래 파리 오페라를 위해 외젠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쓰여졌지만, 이탈리아어 버전인 ''I vespri siciliani''로 더 널리 알려졌다.[24]
도시 전설에 따르면 마피아는 시칠리아 만종 사건에서 시작되었으며,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ia!''"("프랑스에 죽음을, 이탈리아의 외침!")의 거꾸로 만든 약어가 마피아라는 단어라고 한다.[25]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13세기에 자신들을 이탈리아인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가능성이 낮다.[26] 마피아라는 용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8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26] 마피아가 1282년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는 비밀 결사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19세기와 20세기에 마피아가 스스로를 낭만적이고 기사도적인 수호자로 홍보하기 위해 퍼뜨린 것이다.[27] 조지프 보난노는 마피아의 기원에 대한 질문에 마피아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했다.[28] 많은 시칠리아인들이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등장한 피에몬테가 지배하는 이탈리아 국가를 일종의 외국 점령으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마피아가 이러한 이미지를 홍보해야 할 강력한 이유를 제공했다.[29]
1594년,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는 스페인 대사에게 "내 군대는 너무 빨리 움직여서 밀라노에서 아침을 먹고 로마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스페인 대사는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분명히 저녁 기도 시간에 맞춰 시칠리아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31]
럭키 루치아노는 살바토레 마란차노와 그의 카포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는데, 이 사건은 뉴욕 시에서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사건이었고, 미국 마피아 용어로는 "시칠리아 만종의 밤"으로 알려져 있다.[32] 시칠리아 만종 작전 (1992–98)은 시칠리아의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싸움에서 이탈리아군과 지역 경찰의 협력 부대가 참여한 내부 보안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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