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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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킴 왕국은 1642년 푼초 남겔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아 닝마파 고승과 티베트인들이 망명하여 건립되었다. 18세기에는 네팔과 부탄의 침략을 받았고, 19세기에는 영국령 인도의 보호국이 되었다. 20세기 중반, 인도의 보호령으로 남아있던 시킴은 1975년 국민 투표를 통해 인도에 합병되어 멸망하고 시킴 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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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킴 왕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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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및 위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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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시킴 왕국 |
다른 이름 | འབྲས་ལྗོངས། (드렌종) འབྲས་མོ་གཤོངས། (드레모숑) ᰕᰚᰬᰯ ᰜᰤᰴ (마옐 량) |
지위 | 티베트의 청나라 보호령 (1890년까지) 부탄의 지배 (1680년/1700년–1792년) 네팔의 지배 (1776년–1792년) 네팔-부탄의 공동 영향력 (1792년–1816년) 영국의 영향력 (1816년–1890년) 영국 제국의 보호령 (1890년–1947년) 인도의 보호령 (1950년–1975년) |
정부 형태 | 절대 군주제 (1973년까지) 의회 입헌 군주제 (1973년–1975년) |
수도 | 요크솜 (1642년–1670년) 랍덴체 (1670년–1793년) 툼롱 (1793년–1894년) 강토크 (1894년–1975년) |
건국 | 1642년 |
멸망 | 1975년 5월 16일, 인도와의 합병 |
표어 | 연꽃 안에 창조의 보석이 있도다 |
국가 | "드렌종 실레 양 착파 칠로" (왜 시킴은 저렇게 신선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가?) |
공용어 | 초케 시킴어 |
통용어 | 레프차어 (초기) 종카어 네팔어 (후기) |
종교 | 티베트 불교 네팔 힌두교 |
통화 | 루피 |
입법부 | 시킴 주 의회 |
현재 국가 | 인도 |
ISO 3166-1 | SK |
민족 | 드렌좁, 시킴인 |
국기 | |
국장 | |
정치 및 통치자 | |
최고 통치자 | 초걀 |
초대 초걀 | 푼초그 남걀 (1642년–1670년) |
마지막 초걀 | 팔덴 톤두프 남걀 (1963년–1975년) |
역사적 사건 | |
부탄의 1차 침공 | 1680년 |
부탄의 2차 침공 | 1700년 |
네팔의 침공 | 1776년 |
티탈리아 조약 체결 | 1817년 |
다질링을 영국령 인도에 양도 | 1835년 |
팔덴 톤두프 남걀의 강제 퇴위 | 1975년 |
2. 역사
시킴 왕국은 14세기 동티베트 캄 지역 미냐크 가문의 왕자 큄 붐사의 후손인 푼초 남걀이 1642년 유크솜에서 세 명의 라마에 의해 초대 초걀(승왕)로 즉위하면서 시작되었다. 레프차인이 거주하던 시킴에는 1642년 티베트가 간덴포탕(달라이 라마 정권)에 의해 통일되면서, 겔룩파와 대립하던 닝마파 고승과 그 종파를 믿는 일부 티베트인(후일의 부티야인)이 망명하여 푼초 남걀을 추대하고 욕삼을 수도로 세웠다.[16][17] 티베트인의 망명 정권이었던 탓에 티베트는 시킴을 속국으로 삼았고, 청나라 역시 시킴을 자신의 속국으로 간주했다.
푼초 남걀은 중앙집권적 행정 기구를 확립했고, 1670년 아들 텐숭 남걀에게 왕위를 계승했다. 텐숭 남걀은 수도를 라브덴체로 옮겼다.
18세기 중반, 시킴은 네팔(당시 고르카 왕국)과 부탄의 침략을 받았다.[10] 1706년 부탄이 칼림퐁 일대를 탈취했고, 1717년에도 부탄군의 잦은 침공이 있었다. 1769년 고르카 왕국이 네팔 왕국을 건국하고 동쪽으로 진출하면서 림부족이 네팔군에 협력하여 시킴의 일부 영토를 점령했다. 1788년부터 1789년에는 네팔군이 수도 랍덴체를 기습하여 텐진 남겔 왕이 티베트로 망명했다.[22] 1793년 츠구프 남겔 왕이 수도를 툼롱으로 옮겼다.
이후 시킴은 영국령 인도와 동맹을 맺고 네팔과 대립했다. 영국-네팔 전쟁 이후 수가울리 조약과 티탈리아 조약에 따라 네팔은 영토를 할양했고, 시킴은 영국령 인도에 할양되었다.[11]
1861년 툼롱 조약에 따라 시킴은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12] 영국은 티베트와의 교역을 원했고, 실크로드에 위치한 시킴은 중계지로서 이상적이었다.
1890년 청나라는 영국과의 협정으로 티베트와 시킴의 국경을 정했고, 영국은 시킴의 내정과 외정을 장악했다.[25] 영국은 행정관 클로드 화이트를 파견하여 농업 개발을 위해 네팔에서 많은 이민자를 이주시켰고, 이는 네팔인이 시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25]
1947년 인도 연방 독립 후, 1950년 시킴은 인도-시킴 조약을 맺고 외교, 방위, 통신을 인도에 맡기는 보호국이 되었다.[27]
1973년 참의원 선거에서 왕실을 지지하는 시킴 국민당(SNP)이 승리했지만, 네팔계 정당들은 "부정 선거"라고 규탄하며 전국적인 시위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팔덴 톤둡 남걀 국왕은 인도의 보호를 요청했지만, 그 결과 시킴은 더욱 강화된 인도 속국화를 위한 "인도-시킴 3자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1975년 인도군이 침공하여 왕궁 군대를 무장 해제하고 국왕을 유폐했다.[30] 입법 의회는 왕정 폐지와 인도 편입을 의결했고, 국민 투표에서도 인도 합병이 승인되었다. 1975년 5월 16일, 시킴 왕국은 멸망하고 시킴 주로서 인도에 편입되었다.
2. 1. 왕국의 성립과 발전 (1642년 ~ 18세기)
전설에 따르면, 14세기 동티베트 캄(Kham) 지역 미냐크(Minyak) 가문의 왕자 큄 붐사(Khye Bumsa)는 남쪽으로 가서 운을 시험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큄 붐사의 5대손인 푼초 남걀(Phuntsog Namgyal)은 1642년 유크솜(Yuksom)에서 세 명의 존경받는 라마(lama)들에 의해 시킴의 초대 초걀(Chogyal, 승왕)로 즉위하면서 시킴 왕국의 기틀을 마련했다.원래 시킴에는 레프차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1642년 티베트가 티베트 불교 겔룩파가 주도하는 정권인 간덴포탕(달라이 라마 정권)에 의해 통일되면서, 겔룩파와 대립했던 닝마파 고승과 그 종파를 믿는 일부 티베트인(후일의 부티야인)이 시킴 땅으로 망명하여 푼초 남걀을 추대하고, 욕삼을 수도로 하여 시킴 왕국(남겔 왕조)을 건국하였다.[16][17] 하지만 티베트인의 망명 정권이었던 까닭에 티베트는 시킴을 속국으로 삼았고, 티베트를 속국으로 두었던 청나라 역시 시킴을 자신의 속국으로 간주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푼초 남걀은 왕위에 오른 후 중앙집권적 행정 기구 확립에 힘썼다. 중앙(수도 욕삼)에는 12명의 대신으로 구성된 평의회를 설치했으며, 지방에는 12개의 현(종)을 두고 국내 명문가 출신을 현령(종퐁)으로 임명하였다.[16][17] 초기 시킴 왕국은 현재 인도의 시킴 주보다 훨씬 넓었는데, 그 권위는 북쪽으로는 탕라 산맥을 넘어 동쪽은 타곤 고개(부탄의 파로 근처), 남쪽은 티타리아(벵골과 비하르의 경계 근처), 서쪽은 네팔의 티말 강변까지 미쳤다.[18]
1670년 푼촉 남걀은 그의 아들 텐숭 남걀(Tensung Namgyal)에게 왕위를 계승했고, 텐숭 남걀은 수도를 유크솜에서 라브덴체(Rabdentse)(현재 펠링(Pelling) 근처)로 옮겼다. 시킴 왕국이 건국될 당시 시킴은 티베트의 보호령이었다. (당시 티베트는 1717년 준가르 칸국(Dzungar Khanate)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전까지 호슈트 칸국(Khoshut Khanate)의 일부였으며, 1720년 청나라(Qing Dynasty)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2. 2. 네팔, 부탄과의 갈등 (18세기 ~ 19세기 초)
18세기 중반, 시킴은 네팔(당시 고르카 왕국)과 부탄의 침략을 받아 40년 이상 지배를 받았다.[10] 1775년부터 1815년까지 약 18만 명의 네팔인이 시킴으로 이주했다.[10]1706년, 차돌 남겔 치세에 부탄 왕이 칼림퐁 일대를 탈취했다. 이는 부탄 왕의 부인이 텐순의 부탄인 왕비 출신 공주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개입했기 때문이었다.[17] 차돌은 티베트로 망명했으나, 달라이 라마 6세가 사망하자 부탄에 항복했고 부탄군은 철수했다. 이 기간 동안 많은 부탄인들이 이주한 칼림퐁 지역은 시킴 영토로 돌아오지 못했다.[21]
1717년, 규르메 남겔 치세에도 부탄군의 잦은 침공으로 랍덴체의 성곽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초웅족에게 강제 노역을 부과했고, 이들은 동족인 림부족의 영역으로 도망쳤다.[22]
1769년, 고르카 왕국의 프리트비 나라얀 샤가 네팔 왕국을 건국하고 동쪽으로 진출했다.[22] 이 과정에서 굴메 왕의 강제 징용에 반발하던 림부족이 네팔군에 협력했고, 네팔군은 신갈릴라 산맥 서쪽 영토와 타라이 지방에서는 티스타 강까지 점령했다.[22]
1788년부터 1789년에 걸쳐 네팔군은 치야 고개를 넘어 수도 랍덴체를 기습했다.[23] 텐진 남겔 왕은 티베트로 망명하여 달라이 라마 8세의 보호를 받았다.[22] 이 침략으로 시킴의 티스타 강 서안 지역은 네팔에 정복당했다.[22]
1793년, 텐진 남겔 왕은 망명지 라사에서 죽고, 아들 츠구프 남겔이 왕위를 계승하고 시킴으로 귀국했다.[22] 츠구프 남겔 왕은 수도를 랍덴체에서 툼롱으로 옮겼다.[22]
이후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 이후, 시킴은 공동의 적인 네팔과 싸우기 위해 영국령 인도와 동맹을 맺었다. 네팔은 시킴을 공격하여 테라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이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14년 네팔을 공격하여 영국-네팔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령 인도와 네팔 간의 수가울리 조약과 시킴과 영국령 인도 간의 티탈리아 조약에 따라 네팔은 영토를 할양했고, 그 결과 시킴은 영국령 인도에 할양되었다.[11]
2. 3. 영국의 보호령 시기 (19세기 ~ 1947년)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이어진 영국-네팔 전쟁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팔 사이에 수가울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네팔은 메치 강과 티스타 강 사이의 지역을 포기했다.[22] 이듬해인 1815년, 시킴은 영국과 티타리아 조약을 체결하여 다르질링을 포함한 티스타 강 서안 전역을 할양받았지만, 동시에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22]1861년 툼롱 조약에 따라 시킴은 공식적으로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12] 영국은 티베트와의 교역을 원했고, 실크로드에 위치한 시킴은 중계지로서 이상적이었다. 이는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이 티베트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840년 청이 아편전쟁을 일으키자, 완충 지대 서쪽에 위치한 라다크에서 시크 왕국과 티베트 사이에 청-시크 전쟁(1841년-1842년)이 일어났다. 이후 영국과 시크 왕국 사이에 제1차 시크 전쟁(1845년-1846년) 및 제2차 시크 전쟁(1848년-1849년)이 발발했고, 시크 왕국은 멸망하고 잠무 카슈미르 藩王国이 탄생했다.
영국은 시킴에 할양했던 다르질링을 다시 요구했고, 연간 3000루피의 보상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1841년에 첫 지불이 이루어졌다.[22] 그러나 티베트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경계했고, 다르질링 할양에 격분했다.[22] 티베트는 영국과 인접하는 영토가 늘어나는 것에 위협을 느꼈고, 툭푸 왕도 점차 반영적인 태도를 보였다.[24]
1849년, 툭푸 왕은 다르질링 총독 캠벨 박사, 후커 박사 등 영국인 2명을 체포, 감금했다.[25] 영국은 즉시 출병했고, 툭푸 왕은 항복했지만 보복을 받았다. 왕국은 다르질링 할양 보상금이 중단되고, 타라이 지방의 대 랑짓 강과 랑만 강 이남의 시킴 영토를 몰수당했다.[25]
1860년 다르질링 거주민이 시킴 주민에게 납치되자 영국은 출병했다. 1861년 툭푸 왕은 퇴위당하고 아들 시케온 남겔이 왕위를 계승했다.[19][25] 시케온 왕은 영국과 툼롱 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영국에 양도했고, 시킴의 종속성은 더욱 강화되었다.[25] 같은 해, 청나라와의 협정으로 시킴은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1866년 프랑스가 운남성 경유 통상로를 조사하면서 운남 문제로 알려진 영국, 프랑스, 중국 간 분쟁이 시작되자, 영국의 관심은 운남 지방으로 옮겨갔고, 시킴은 인도 총독부의 피서지가 되었다.
1874년 시킴 국왕이 서거하고 동생 투토브 남걀이 왕위를 계승했다.[19]

영국은 투토브 왕에게 항의했지만, 투토브 왕은 티베트와 청나라의 힘을 배경으로 거부했다.[25] 영국은 티베트 군대를 격퇴하고 춤비 계곡을 점령했다.[25] 이것이 1888년의 시킴 원정이며, 영국의 티베트 원정의 전초전이었다.
1890년 청나라는 영국과의 회담 결과, 티베트 및 시킴에 관한 영국-청나라 협정을 체결했다.[25] 이 협정으로 티베트와 시킴의 국경이 정해졌고, 영국은 시킴의 내정과 외정을 장악하며 보호국임을 확인했다.[25]
영국은 행정관 클로드 화이트를 시킴 담당으로 파견하여 갬톡에 주재시켜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25] 그는 농업 개발을 위해 네팔에서 많은 이민자를 이주시켜 농지를 개척하게 했다.[25] 그 결과, 네팔인이 급증하여 시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25] 이는 왕국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투토브 왕은 칼림퐁으로 옮겨져 왕권을 박탈당했다.[25] 그는 티베트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영국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수도는 툼롱에서 갬톡으로 옮겨졌다.[25]
티베트는 영국-청나라 협정에서 무시당했기 때문에 북시킴의 갸오강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25] 영국은 1902년 출병하여 격퇴한 후, 1903년 티베트 원정을 실시하여 라사를 점령했다. 이후 네팔 총리 찬드라 샴셰르 장가 바하두르 라나의 중재로 시킴을 경유하는 무역 중심지가 두 곳 개설되어 영국의 티베트와의 무역 목표는 달성되었다.[26]
2. 4. 인도의 보호국 시기 (1947년 ~ 1975년)

1947년 인도 연방이 독립하면서 시킴에서 영국의 지위는 인도가 계승하게 되었다. 1950년 시킴은 인도-시킴 조약을 맺고 외교, 방위, 통신을 인도에 맡기는 보호국이 되었다.[27] 이 조약에 따라 시킴 왕국은 민주화를 진행해야 했으며, 참사원(입법부)과 행정 참사회(내각)의 설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왕국을 지지하는 부티야·레프차·티베트계 인구가 25%인 반면, 노동력으로 유입된 네팔계가 75%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네팔계가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시킴 왕국 정부는 참사원 의석을 공동체별로 할당했다. 총 17석 중 6석은 "부티야·레프차계"에, 6석은 "네팔계"에 할당하고, 나머지 5석은 국왕이 임명하는 방식이었다. 네팔계 주민 중심의 정당들은 불평등한 선거 제도에 불만을 가졌지만, 타시 남걀은 친인도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인도는 그의 치세 동안 공동체 선거 제도를 지지했다.[27]
2. 5. 인도 합병과 시킴 왕국의 종말 (1975년)
1973년 참의원 선거에서 왕실을 지지하는 부티야 레프차계 시킴 국민당(SNP)이 18석 중 11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29] 그러나 이 승리는 공동체 선거 제도의 혜택에 따른 것이었고, 네팔계 정당들은 "부정 선거"라고 규탄하며 전국적인 시위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던 팔덴 톤둡 남걀 국왕은 인도의 보호를 요청하여 위기를 넘겼지만, 그 결과 시킴은 시킴 국민회의당(SNC) 등 정당과 함께 이전보다 강화된 인도 속국화를 위한 "인도-시킴 3자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3자 협정에 따라 시킴 입법 의회(선거 의석 30석)가 설립되었고, 1974년에 선거가 실시되었다. 3자 협정 체결 직후, 친인도 성향의 네팔계 정당인 SNC 등이 합병하여 시킴 회의당(SC)을 결성했다. 인도식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것도 영향을 미쳐, 인구 구성에서 우세한 SC가 29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SNP는 단 1석으로 추락했다. 새로 수상에 취임한 SC 총재 카지 렌둡 돌지는 인도의 의중을 받들어 국왕의 권한을 대폭 제한하는 새로운 헌법(1974년 시킴 통치법)을 제정했다.
1975년 4월 9일, 팔덴 톤둡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왕궁 군대가 발포한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인도군이 침공했고, 왕궁 군대는 무장 해제되었으며, 팔덴 톤둡 국왕은 유폐되었다.[30] 다음 날 입법 의회는 왕정 폐지와 인도 편입을 만장일치로 의결했고,[31] 14일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도 인도 합병이 승인되었다.
15일에는 시킴을 인도의 22번째 주로 하는 헌법 개정안이 인도 의회에 제출되어 26일에 양원을 통과했다. 같은 해 5월 16일, 대통령이 헌법 개정안을 승인하면서 시킴 왕국은 멸망하고 시킴 주로서 인도에 편입되었다.
1975년, 시킴 내 네팔계 힌두교도에 대한 차별 주장이 제기되면서 네팔인들 사이에서 촉얄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13][14] 이러한 반감을 이용하여 인도군이 강톡으로 진입했다. ''데일리 스테이츠먼''의 수난다 K. 닷타-레이(Sunanda K. Datta-Ray)에 따르면, 인도군은 1975년 4월 궁궐 경비병들을 살해하고 궁궐을 포위했다.[12] 궁궐 무장 해제 후, 의문스러운 상황 속에서 왕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시킴 국민들은 압도적으로 왕정 폐지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카지 렌둡 도르제(Kazi Lhendup Dorjee)가 이끄는 시킴의 새로운 의회는 시킴을 인도의 주로 만들자는 법안을 제출했고, 인디라 간디 총리 휘하의 인도 정부는 이를 즉각 수용했다.[12][15]
3. 역대 시킴 왕국의 초걀
이름 | 재위 기간 |
---|---|
푼초그 남걀 | 1642년 ~ 1670년 |
텐숭 남걀 | 1670년 ~ 1700년 |
차크도르 남걀 | 1700년 ~ 1717년 |
규르메드 남걀 | 1717년 ~ 1733년 |
푼초그 남걀 2세 | 1733년 ~ 1780년 |
텐징 남걀 | 1780년 ~ 1793년 |
추드푸드 남걀 | 1793년 ~ 1863년 |
시드케옹 남걀 | 1863년 ~ 1874년 |
투토브 남걀 | 1874년 ~ 1914년 2월 11일 |
시드케옹 툴쿠 남걀 | 1914년 2월 11일 ~ 1914년 12월 5일 |
타시 남걀 | 1914년 12월 5일 ~ 1963년 12월 2일 |
팔덴 톤두프 남걀 | 1963년 12월 2일 ~ 1975년 4월 10일 |
4. 문화와 종교
시킴은 최초의 왕이 이주해 온 티베트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부탄과 문화 및 종교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시킴에는 주로 네팔 동부와 중부 출신의 네팔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네팔과도 문화적 연관성을 보인다.
5. 1975년 당시 시킴 왕국의 기초 정보
인구 | 면적 | 수도 |
---|---|---|
19만 4천 명 | 7107km2 | 강토크 (1만 2천 명) |
민족 구성 | 언어 | 종교 |
네팔인(75%), 레프차인, 부티아족 | 네팔어, 렙차어, 힌디어 (문맹률 84%) | 힌두교(60%), 불교 등 |
국민총생산(GNP) | 1인당 국민소득 | 비자 |
1200만달러 | 60USD | 필요 |
당시 군주 | 당시 수상 | 당시 입법부 |
팔덴 톤둡 남걀 | I.S. 초프라 | 임명직 6명과 선출직 18명, 총 24명의 국가평의회가 담당.[32] |
6. 시킴 왕국의 국기
참조
[1]
서적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
Encyclopaedia Britannica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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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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