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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스탈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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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스탈린주의는 1948년 할 드레이퍼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로, 스탈린주의의 새로운 발전과 연관된 반동적 경향을 지칭한다. 1960년대에는 중앙정보국(CIA)이 스탈린주의와 구분하여 사용했으며, 카테리나 클라크는 1960년대 소련 문학에서 스탈린 지지 조류를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역사가 로이 메드베데프는 요제프 스탈린의 정치적 재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 등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데니스 J. B. 쇼는 소련을 계획 경제와 군사-산업 복합체를 가진 정치 체제로, 프레데릭 코플스턴은 슬라브주의적 강조로 묘사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정치적 탄압 없는 완화된 스탈린주의 국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신스탈린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비교하여 집단 지도 체제, 당 조직 개편, 군·치안 기관의 발언권 강화, 연고주의, 소련의 지도력 강조 등의 특징을 보인다. 흐루쇼프 시대, 브레즈네프 시대, 고르바초프 시대를 거치면서 신스탈린주의는 소련 및 러시아 정치에 영향을 미쳤으며,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신스탈린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 시리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여러 국가에서도 신스탈린주의적 특징이 나타났다.

2. 정의

1948년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 할 드레이퍼는 "신스탈린주의"를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정의하며, 소련 정책의 변화를 언급했다. 그는 이를 1930년대 중반의 인민 전선 시기와 연관된 반동적 경향으로 보고, "신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그들은 신야만주의의 사회적, 정치적 형태를 보여주는 현상, 즉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 의해 뻗어나온 촉수일 뿐이다"라고 썼다.[4]

1960년대 중앙정보국(CIA)은 스탈린주의와 신스탈린주의를 구별하며, 소련 지도자들이 스탈린 시대의 1인 독재와 대량 학살로는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신스탈린주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평가했다.[5]

카테리나 클라크는 1960년대 소련 문학계의 흐루쇼프 반대, 스탈린 지지 경향을 설명하면서 "신스탈린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스탈린 시대와 그 지도자들... 통일, 강력한 통치, 국가의 명예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으로 묘사했다.[6] 로이 메드베데프는 이 용어가 요제프 스탈린의 정치적 재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 스탈린주의 정책 복원, 대숙청공포 정치로의 회귀를 설명하지만, 최악의 과잉 행위는 피한다고 보았다.[7]

1999년 정치 지리학자 데니스 J. B. 쇼는 소련을 1985년 이후 자본주의로 전환하기 전까지 신스탈린주의로 간주했다. 그는 신스탈린주의를 계획 경제와 고도로 발달된 군사-산업 복합체를 가진 정치 체제로 규정했다.[9] 1986년 철학자 프레데릭 코플스턴은 신스탈린주의를 "러시아와 그녀의 역사에 대한 슬라브주의적 강조"로 묘사하며, "서방의 과학과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서방의 '타락한' 태도에 오염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는 러시아의 열망 표현"이라고 말했다.[10] 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신스탈린주의를 대규모 정치적 탄압은 없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박해하고 국가의 모든 정치 활동을 완전히 통제하는 완화된 스탈린주의 국가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11]

2. 1. 스탈린주의와의 비교

할 드레이퍼는 1948년에 "신스탈린주의"를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정의하며, 이를 1930년대 중반 인민 전선 시기와 관련된 반동적 경향으로 보았다. 그는 신스탈린주의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연장선에 있다고 주장했다.[4]

1960년대 중앙정보국(CIA)은 스탈린주의와 신스탈린주의를 구분하며, 소련 지도자들이 스탈린 시대의 1인 독재와 대량 학살로는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신스탈린주의'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평가했다.[5]

카테리나 클라크는 1960년대 소련 문학계에서 나타난 흐루쇼프에 대한 반대와 스탈린 지지 경향을 설명하며, "신스탈린주의" 작가들이 스탈린 시대를 "통일, 강력한 통치, 국가의 명예"가 있던 시대로 묘사했다고 분석했다.[6] 로이 메드베데프는 1975년에 이 용어가 요제프 스탈린의 정치적 재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 스탈린주의 정책 복원, 그리고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과 같은 공포 정치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스탈린 시대의 최악의 과잉 행위는 피한다고 덧붙였다.[7]

1999년, 정치 지리학자 데니스 J. B. 쇼는 1985년 이전까지의 소련을 신스탈린주의 체제로 규정하며, 계획 경제와 고도로 발달된 군사-산업 복합체를 가진 정치 체제로 정의했다.[9] 철학자 프레데릭 코플스턴은 1986년에 신스탈린주의를 "러시아와 그녀의 역사에 대한 슬라브주의적 강조"로 묘사하며, 서방의 과학과 기술은 활용하지만 서방의 '타락한' 태도에는 오염되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0]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2006년에 이 용어를 사용하며, 넓은 의미에서 신스탈린주의는 대규모 정치적 탄압은 없지만 정치적 반대자들을 박해하고 국가의 모든 정치 활동을 완전히 통제하는 완화된 스탈린주의 국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11]

헨리 레이히만은 '스탈린주의'라는 용어의 다양하고 변화하는 관점을 논하며, 스탈린 사후 소련 역사를 재평가한 역사학자 스티븐 코헨의 연구를 인용하여 "반스탈린주의 개혁주의와 신스탈린주의 보수주의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을 언급했다. 그러나 코헨이 스탈린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12]

'신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는 '스탈린주의' 자체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깊다. 탈스탈린화 이후에도 소련형 사회주의(중국 등을 포함)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반스탈린주의 입장과, 탈스탈린화 이후의 소련 등의 노선을 "수정주의"로 간주하는 반수정주의 입장에서는 "신스탈린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의미가 없다. 공산주의 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아나키즘이나 반공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의 "신스탈린주의"는 당사자에게 자각적인 사상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현상과 그 배경에 있는 구조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평가라는 특징이 있다. 해당 국가의 정치 지도층은 자국의 사상 체계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여기며, 스탈린의 개인적인 오류는 있었지만 그 후 원칙을 회복했고[80] 자신들은 그 정통한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엔베르 호자가 "우리는 스탈린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81]처럼, 동시대 반수정주의자나 소련 붕괴 후 "신스탈린주의"로 불리는 일파가 스탈린을 자국 사상 체계의 불가분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신스탈린주의의 현상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국가 원수, 당 지도자, 총리에 다른 인물이 취임하는 "집단 지도 체제" 원칙이 강조되었지만, 당 지도자가 다른 두 직책 중 하나 또는 둘 다를 겸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 당 조직에서는 1940~50년대에 공산당이 사회당, 사회민주당을 흡수 합병하여 "노동당" 등으로 개칭했던 헤게모니 정당의 당명이 다시 "공산당"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제1서기"가 "서기장"으로, "간부회"가 "정치국"으로 복귀되었다.
  • 군, 치안 기관의 발언력이 강해지고, 반체제 세력이나 사상, 문예 활동에 대한 단속도 강화되었다.
  • 최고 지도자의 친족을 비롯한 지도자층의 연고주의가 만연했다.[82]
  •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에서 각국의 자주성보다 소련의 "지도성"이 더욱 강조되었다.[83]

3. 역사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개인 숭배와 대숙청을 비판했다.[29]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의 뒤를 이어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집권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스탈린에 대한 논란이 축소되었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 소련 반체제 인사들이 추방되었다.[35]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후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공개 토론이 장려되었으나, 소련은 붕괴되었다.[39]

러시아 연방 공산당(CPRF)은 신스탈린주의를 열렬히 지지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 승인하에 CPRF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 전역에 스탈린 찬양 기념비를 설치했고, 크렘린 벽 묘지에서 매년 기념식을 연다.[43][44]

블라디미르 푸틴과 CPRF 대표 겐나디 주가노프. 둘 다 소련 이후 러시아에서 신스탈린주의의 영향력 있는 지지자였다.


1992년 고르바초프 반대파인 CPSU 강경파가 결성한 CPRF는 1990년대 사유화에 반대하며, 러시아 국경을 "부자연스럽다"고 비난했다. CPRF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 쇠퇴를 서방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고, 소련 부활을 제안한다. 이 당은 소련 이후 국가들의 재통합을 통한 "사회주의 유라시아 고향" 건설을 옹호하는 공산주의 유라시아주의를 지지한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통해 공산주의를 러시아 세계와 서방 세계("부르주아 가치"와 시장 개인주의)를 구별하는 "러시아 공동체와 집단주의 전통"의 표현(소보르노스트)으로 묘사한다. CPRF는 러시아의 초강대국 지위 부활이 러시아인에게 소련 애국심과 신스탈린주의를 주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으며, 볼셰비키 혁명, 소련 기술력 찬양, "대조국 전쟁" 신화 조장, 스탈린 시대 미화로 특징지어진다.[45][46]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재스탈린화를 거쳤다. 대중 매체, 영화, 학계, 교육, 군사 선전, 역사 기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2014년 러시아 국가 두마는 스탈린 시대 잔혹 행위 논의나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비교를 범죄화하는 "기억법"을 통과시켰다. 국제 역사 학회의 비난에도 불구, 러시아 형법 조항으로 삽입되었고, 통합 러시아당과 공산당이 지지했다.[44][47]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함께, 신스탈린주의는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성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탈린 숭배 재등장을 지지하며, 스탈린을 유럽 파시즘에서 세계를 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로 이끈 선구자로 묘사했다.[48][49] 동부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지원 분리주의자 통제 지역에 스탈린 흉상과 초상화가 설치되었다.[50]

러시아 공산당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의 지지자 중 하나이며, 침공을 신스탈린주의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43]

반스탈린주의 입장과 반수정주의 입장에서는 "신스탈린주의" 용어 자체가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 시대 "신스탈린주의"는 자각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현상과 구조에 대한 외부 평가이다. 해당 국가 정치 지도층은 자국 사상 체계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여기며, 스탈린 오류는 있었지만 원칙을 회복했고, 자신들은 정통한 후계자로 위치한다.

현상 면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집단 지도 체제" 원칙 강조에도 불구, 당 지도자가 국가 원수·당 지도자·총리 중 하나 또는 쌍방을 겸임하는 경향.
  • 1940~50년대 공산당이 사회당·사회민주당을 흡수 합병하여 "노동당" 등으로 개칭했던 헤게모니 정당의 당명이 "공산당"으로, "제1서기"가 "서기장"으로, "간부회"가 "정치국"으로 복귀.
  • 군·치안 기관 발언력 강화, 반체제 세력 및 사상·문예 활동 단속 강화.
  • 최고 지도자 친족 등 지도자층 연고주의 만연.[82]
  • 사회주의 국가 간 관계에서 각국 자주성보다 소련 "지도성" 강조.[83]

3. 1. 흐루쇼프 시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쇼프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스탈린주의는 크게 위축되었다.[29] 1956년 2월, 흐루쇼프는 4시간에 걸친 연설인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를 통해 스탈린 정권의 개인 숭배와 대숙청 기간에 저질러진 범죄를 규탄했다.[29]

역사학자 로버트 V. 다니엘스는 "스탈린이 세상을 떠난 후 25년 이상 동안 정치적으로 신스탈린주의가 우세했다"고 주장한다.[29] 조지 노바크는 흐루쇼프의 정치를 "신스탈린주의 노선"에 의해 인도된 것으로 묘사했는데, 그 원칙은 "사회주의 세력이 내부 계급 권력의 예시가 아닌, 소련의 외부 권력의 예시를 통해 제국주의 중심지에서도 모든 반대 세력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30] 그는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의 혁신은 스탈린의 수정주의적 관행을 공식 교리로 만들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적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혁명적 계급 투쟁 정책을 폐기했다."라고 설명했다.[31] 1950년대 후반 유럽으로 방송된 미국의 방송에서는 "구 스탈린주의자"와 "신스탈린주의자 흐루쇼프" 사이의 정치적 투쟁을 묘사하기도 했다.[32][33][34]

3. 2. 브레즈네프 시대

1964년 10월, 니키타 흐루쇼프레오니트 브레즈네프로 교체되었고, 그는 1982년 11월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29]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논란은 축소되었다. 안드레스 라이아페아는 이를 "특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포함한 많은 소련 반체제 인사의 추방"과 연결시켰다.[35] 빅토르 자슬라프스키는 브레즈네프 시대를 인격 숭배 없이 스탈린과 관련된 정치적 분위기의 본질을 유지하는 "신스탈린주의적 타협"의 시기로 특징지었다.[36] 알렉산드르 둡체크에 따르면, "[브레즈네프 정권]의 등장은 신스탈린주의의 도래를 알렸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조치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및 기타 국가에서 신스탈린주의 세력의 최종 통합이었다."[37]

3. 3. 고르바초프 시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5년 3월 집권한 후, 소련 시스템을 자유화하기 위해 공개 토론 정책 ''글라스노스트''를 도입했다. 6년 이내에 소련은 붕괴되었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는 2000년에 "오늘날 러시아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있다. 사람들이 톱니바퀴로 변하고 권력자들이 그들을 위해 모든 결정을 내리던 스탈린주의와 신스탈린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인정했다.[39] 고르바초프의 국내 정책은 일부 서방 출처에 의해 신스탈린주의로 묘사되었다.[40][41][42]

4. 소련 및 러시아

러시아 연방 공산당(CPRF)은 신스탈린주의와 스탈린 복원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 세력 중 하나이다. 푸틴 정부의 승인 아래, CPRF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 전역에 스탈린을 찬양하는 수백 개의 기념비를 설치했다. CPRF는 스탈린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그의 묘에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43][44]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국가 지원 하에 재스탈린화를 추진했다. 이는 대중 매체, 영화, 학계, 교육 기관, 군사 선전 및 역사 기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회학자 디나 카파예바는 스탈린 복원에 있어 대다수의 러시아 시민, 학자 및 당국 사이에 "사회적 합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44][47]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함께, 신스탈린주의는 국가의 확고한 지원 속에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성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탈린 숭배의 재등장을 개인적으로 지지하며, 소련의 독재자를 유럽 파시즘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러시아인들을 승리로 이끈 선구자로 묘사했다.[48][49]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자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스탈린의 다양한 흉상과 초상화가 설치되었다.[50]

4. 1. 소련 붕괴와 신스탈린주의의 부상

1953년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서기장이 되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비난하면서 스탈린주의는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는 1990년대 말 심각한 문화적, 경제적 위기에 시달렸다. 이러한 시기에 러시아 사람들이 강력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은 당연했고, 결국 강력한 지도자였던 스탈린주의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08년 말 러시아 정부는 스탈린의 지지도를 알아보기로 했는데 절반이 스탈린을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들은 스탈린이 소련을 최고의 나라로 이끌어 나갔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은 러시아의 경제난에 있다고 학자들은 분석하였다.[80]

4. 2. 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CPRF)은 신스탈린주의와 스탈린 복원에 가장 열렬한 지지 세력 중 하나이다. 푸틴 정부의 승인 아래, CPRF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 전역에 스탈린을 찬양하는 수백 개의 기념비를 설치했다. CPRF는 스탈린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그의 묘에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43][44]

1992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반대파인 CPSU 강경파에 의해 결성된 CPRF는 1990년대 사유화 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며, 러시아 연방의 현재 국경을 "부자연스럽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의 쇠퇴를 서방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 CPRF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의 위상 회복을 위해 소련 부활을 제안했다. 이 당은 공산주의 유라시아주의를 옹호하며, 소련 이후 국가들의 재통합을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 유라시아 고향"을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가 "역사를 다시 만들고" 사회주의 블록을 다시 이끌 선구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포용함으로써, 이 당은 공산주의를 러시아 세계를 서방 세계와 그 "부르주아 가치와 시장 개인주의"와 구별하는 "오래된 러시아 공동체와 집단주의 전통"의 유기적인 표현 또는 공동의 영혼("소보르노스트")으로 묘사한다. CPRF는 러시아의 "'데르자바'"(초강대국 지위) 부활이 러시아인들에게 소련 애국심과 신스탈린주의를 주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련의 기술력에 대한 찬양, "대조국 전쟁"을 둘러싼 신화 조장, 스탈린 시대에 대한 미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45][46]

2014년, 러시아 국가 두마는 스탈린 시대에 저질러진 잔혹 행위에 대한 논의나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비교를 범죄화하는 논란 많은 "기억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네오나치즘에 맞서 싸우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의 역사적 기억"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역사 학회를 비롯한 전 세계 국제 역사 학회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통과되어 러시아 형법에 조항으로 삽입되었다. 이 법안은 집권 통합 러시아당과 동맹 공산당의 지지를 받았다.[44][47]

러시아 공산당은 2022년 푸틴이 명령한 우크라이나 침공의 가장 큰 지지 세력 중 하나였으며, 침공을 그들의 신스탈린주의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43]

2005년, 공산당 정치인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건설과 인류 문명을 나치 재앙으로부터 구하는 데 기여한 스탈린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말했다.[70] 주가노프는 "위대한 스탈린은 재활이 필요 없다"고 말했고 볼고그라드의 이름을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71] 2010년, 공산당 지도자는 "오늘날 스탈린 시대의 위대함은 가장 격렬한 비난자들에게도 자명하다. 우리는 온 세상을 해방시켰다!"라고 말했다.[72]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알베르트 마카쇼프 등은 신스탈린주의자로 여겨진다.[84][85]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 등 여러 정당은 1999년 선거를 위해 "스탈린 블록 - 소련을 위해"를 결성했다. 스탈린의 손자 예브게니 주가슈빌리도 이 블록의 멤버로 참여했다.

4. 3. 블라디미르 푸틴과 신스탈린주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탈린 숭배의 재등장을 개인적으로 지지하며, 소련의 독재자를 유럽의 파시즘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러시아인들을 승리로 이끈 선구자로 묘사했다.[48][49] 2008년 말 러시아 정부는 스탈린의 지지도를 조사했는데, 절반이 스탈린을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들은 스탈린이 소련을 최고의 나라로 이끌었다고 믿었으며,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러시아의 경제난에 있다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광범위한 국가 지원 프로그램인 재스탈린화를 거쳤다. 이는 대중 매체, 영화, 학계, 교육 기관, 군사 선전 및 역사 기술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회학자 디나 카파예바는 스탈린을 복원하는 데 있어 대다수의 러시아 시민, 학자 및 당국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44][47]

러시아 공산당(CPRF)은 신스탈린주의와 스탈린 복원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이다. 푸틴 정부의 승인하에, CPRF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 전역에 스탈린을 찬양하는 수백 개의 기념비를 설치했다. CPRF는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스탈린의 묘에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43][44] 1992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반대파인 CPSU 강경파에 의해 결성된 CPRF는 1990년대 사유화 정책에 대한 격렬한 반대 세력이 되었고, 러시아 연방의 현재 국경을 "부자연스럽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의 쇠퇴를 서방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며, CPRF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소련 부활을 제안한다.[45][46]

2014년, 러시아 국가 두마는 스탈린 시대에 저질러진 잔혹 행위에 대한 논의나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비교를 범죄화하는 논란이 많은 "기억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네오나치즘에 맞서 싸우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의 역사적 기억"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역사 학회를 비롯한 전 세계 국제 역사 학회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통과되어 러시아 형법에 조항으로 삽입되었다. 이 법안은 집권 통합 러시아당과 동맹 공산당의 지지를 받았다.[44][47]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함께, 신스탈린주의는 국가의 확고한 지원 속에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성장을 겪었다. 스탈린의 다양한 흉상과 초상화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자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설치되었다.[50]

러시아 공산당은 2022년 푸틴이 명령한 우크라이나 침공의 가장 큰 지지자 중 하나였으며, 침공을 그들의 신스탈린주의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43]

2009년, 러시아 정부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한 소련의 승리나 동유럽 해방에서의 역할을 부인하는 진술과 행위를 범죄화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61] 2009년 5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전쟁 당시의 소련을 "우리 국가"라고 묘사하고, 크렘린이 러시아 역사의 날조라고 칭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대통령 역사 진실 위원회를 설립했다.[61][62][63]

2009년 7월 3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연례 의회 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단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는 데 동일한 역할을 했다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회의장을 나갔다. 이 결의안은 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 대표가 작성했다. 이 결의안은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중립 조약을 체결하고, 비밀 의정서를 통해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일부를 영향력 분할 구역으로 나눈 날인,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희생자를 위한 기념일을 매년 8월 23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콘스탄틴 코사체프 러시아 하원 외교 위원회 위원장은 이 결의안을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코즐로프스키(1944년생 정치인) 러시아 대표단장은 이 결의안을 "모욕적인 반 러시아 공격"이라고 부르며,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동일 선상에 놓는 자들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해방하는 데 가장 큰 희생과 기여를 한 것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고 덧붙였다.[64][65] 총 385명의 의회 구성원 중 8명만이 이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66]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유럽 연구소의 독립국가연합 연구 센터 소장인 학자 드미트리 푸르만은 러시아 정권의 신스탈린주의를 "세계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통제를 위한 통제를 추구하는" "비이념적 스탈린주의"로 본다.[69]

2005년, 공산당 정치인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건설과 인류 문명을 나치 재앙으로부터 구하는 데 기여한 스탈린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말했다.[70] 주가노프는 "위대한 스탈린은 재활이 필요 없다"고 말했고 볼고그라드의 이름을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71] 2010년, 공산당 지도자는 "오늘날... 스탈린 시대의 위대함은 가장 격렬한 비난자들에게도 자명하다... 우리는 온 세상을 해방시켰다!"라고 말했다.[72]

2008년, 드미트리 푸치코프는 당국이 대중의 관심을 시급한 문제로부터 돌리기 위해 반스탈린 선전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 파동은 대중의 여론을 시급한 문제로부터 돌리기 위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연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당신은 교육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주의의 공포입니다"라고 대답했다.[73]

러시아 작가 세르게이 카라-무르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러시아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것이 좋은 사업이며, 과거 소련을 악마화하는 것도 좋은 사업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왜 폴란드에 화를 내야 하는가, 우리 나라에도 같은 (그리고 우리에게는 충분히 더 위험하고 유해한) 옹호자, 철학자, 역사가 집단이 있는데, 그들은 국가가 정한 최대의 유리한 체제를 누리고 폴란드인과 똑같은 일을 한다?".[74]

2016년, 정치학자 토마스 셜록은 러시아가 신스탈린주의 정책을 다소 철회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크렘린은 국가 쇼비니즘, 과도한 민족주의, 재스탈린화를 조장하는 역사적 서사를 개발하여 사회에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제가 현직 엘리트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대신, 정권은 이제...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소련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지원하고 있다. 소련의 과거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비판은 서방과의 재결합을 포함하여 지도부의 여러 가지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를 위해 크렘린은 최근 소련의 과거를 비판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와 소련의 억압 희생자를 기념하는 중요한 프로그램을 승인했다."[75]

4. 4. 여론



상트페테르부르크 버스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를 기념하는 몽타주에 포함된 스탈린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2009년 스탈린 묘에 헌화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활동가들


2008년 말 러시아 정부의 스탈린 지지도 조사에서 절반이 스탈린을 찬성했는데, 그들은 스탈린이 소련을 최고의 나라로 이끌었다고 믿었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러시아의 경제난에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CPRF)은 신스탈린주의와 스탈린 복원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 하나이다. 푸틴 정부의 승인하에, CPRF는 2000년대 이후 러시아 전역에 스탈린을 찬양하는 수백 개의 기념비를 설치했다. CPRF는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크렘린 벽 묘지에 있는 스탈린의 묘에서 매년 기념식을 열고 있다.[43][44]

1992년 고르바초프의 반대파인 CPSU 강경파에 의해 결성된 CPRF는 1990년대 사유화 정책에 대한 격렬한 반대 세력이 되었고, 러시아 연방의 현재 국경을 "부자연스럽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의 쇠퇴를 서방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며, CPRF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소련 부활을 제안한다. 이 당은 공산주의 유라시아주의를 옹호하며, 이는 소련 이후 국가들의 재통합을 통해 새로운 "사회주의 유라시아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믿는다. 새로운 국가를 "역사를 다시 만들고" 사회주의 블록을 다시 이끌 선구자로 상상한다. 러시아 민족주의를 포용함으로써, 이 당은 공산주의를 러시아 세계를 서방 세계와 그 "부르주아 가치와 시장 개인주의"와 구별하는 "오래된 러시아 공동체와 집단주의 전통"의 유기적인 표현 또는 공동의 영혼("소보르노스트")으로 묘사한다. CPRF는 러시아의 "'데르자바'"(초강대국 지위) 부활이 러시아인들에게 소련 애국심과 신스탈린주의를 주입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과 소련의 기술력에 대한 찬양, "대조국 전쟁"을 둘러싼 신화의 조장, 스탈린 시대에 대한 아첨으로 특징지어진다.[45][46]

블라디미르 푸틴 치하의 러시아는 광범위한 국가 지원 프로그램인 재스탈린화를 거쳤다. 사회학자 디나 카파예바는 스탈린을 복원하는 데 있어 대다수의 러시아 시민, 학자 및 당국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가 나타났다고 주장한다.[44][47]

2014년, 러시아 국가 두마는 스탈린 시대에 저질러진 잔혹 행위에 대한 논의나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비교를 범죄화하는 "기억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네오나치즘에 맞서 싸우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발생한 사건들의 역사적 기억"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졌다. 역사 학회를 비롯한 전 세계 국제 역사 학회의 강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통과되어 러시아 형법에 조항으로 삽입되었다. 이 법안은 집권 통합 러시아당과 동맹 공산당의 지지를 받았다.[44][47]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함께, 신스탈린주의는 국가의 확고한 지원 속에 러시아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성장을 겪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탈린 숭배의 재등장을 개인적으로 지지하며, 소련의 독재자를 유럽 파시즘으로부터 세계를 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러시아인들을 승리로 이끈 선구자로 묘사했다.[48][49] 스탈린의 다양한 흉상과 초상화가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자들이 통제하는 지역에 설치되었다.[50]

러시아 공산당은 2022년 푸틴이 명령한 우크라이나 침공의 가장 큰 지지자 중 하나였으며, 침공을 그들의 신스탈린주의적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았다.[43]

레바다 센터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스탈린에 대한 호감도가 2015년 이후 증가하여, 2017년에는 러시아인의 46%, 2019년에는 51%가 그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2021년 여론 조사에서는, 기록적인 70%의 러시아인이 스탈린에 대해 대체로/매우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51] 같은 해, 레바다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요시프 스탈린은 러시아인들로부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국가 인물"로 39%의 지명을 받았으며, 과반수를 얻은 사람은 없었지만 스탈린은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소련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30%,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23%를 기록했다.[52] 동시에, 러시아에서는 스탈린 옹호 문헌이 증가했으며, 이는 자료의 왜곡 또는 조작에 크게 의존했다. 이 문헌에서 스탈린의 탄압은 "인민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필요한 조치이거나, 스탈린의 지시 없이 행동한 하급 관리들의 결과로 여겨진다.

과거 소련에서 스탈린에 대한 존경이 지속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곳은 러시아 외에 조지아뿐이지만, 조지아의 태도는 매우 분열되어 있다. 많은 조지아인들은 자국 근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스탈린에 대한 비판에 분개한다. 2013년 트빌리시 국립 대학교의 설문 조사에서 조지아인의 45%가 그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2017년 퓨 리서치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조지아인의 57%가 그가 역사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답한 반면, 고르바초프에 대해 같은 답변을 한 사람은 18%였다.

과거 소련의 다른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 카네기 재단이 의뢰한 2012년 설문 조사에서 아르메니아인의 38%가 자국이 "항상 스탈린과 같은 지도자가 필요할 것"에 동의했다. 2010년 초, 우크라이나 자포리자에 스탈린의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졌다. 2010년 12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그것의 머리를 잘라냈고, 2011년 폭탄 공격으로 파괴되었다.[53] 2016년 키예프 국제 사회학 연구소의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38%가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26%는 중립적인 태도를, 17%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는 응답을 거부했다.

2007년 6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역사 교재인 ''러시아 현대사: 1945–2006: 역사 교사 지침서''를 홍보하기 위해 역사 교사들을 위한 회의를 조직했다. 이리나 플리게(인권 단체 메모리얼의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 교재는 스탈린을 "합리적으로 행동"한 잔혹하지만 성공적인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이 교재가 스탈린의 공포 정치를 "발전의 도구"로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54][55] 푸틴은 이 회의에서 새로운 교재가 "젊은이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으며, 스탈린의 숙청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푸틴은 스탈린 희생자 추모식에서 러시아인들이 "과거의 비극을 기억해야 하지만, 국가의 모든 좋은 점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56]

러시아 연방의 공식 정책은 교사와 학교가 허용된 목록에서 역사 교과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목록에는 초등학교용 역사 교과서 48권과 다양한 저자가 쓴 고등학교용 역사 교과서 24권이 포함되어 있다.[57][58]

2009년 9월, 러시아 교육부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러시아 고등학생의 필독서가 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책은 한때 소련에서 수용소 시스템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 금지된 책이었다. 그 전에는 러시아 학생들이 솔제니친의 단편 소설 ''마트료닌 드보르''와 수용소 죄수의 하루를 묘사한 중편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공부했다.[59][60]

2009년, 러시아 정부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한 소련의 승리나 동유럽 해방에서의 역할을 부인하는 진술과 행위를 범죄화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61] 2009년 5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전쟁 당시의 소련을 "우리 국가"라고 묘사하고, 크렘린이 러시아 역사의 날조라고 칭하는 것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 대통령 역사 진실 위원회를 설립했다.[61][62][63]

2009년 7월 3일,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연례 의회 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단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는 데 동일한 역할을 했다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회의장을 나갔다. 이 결의안은 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 대표가 작성했다. 이 결의안은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중립 조약을 체결하고, 비밀 의정서를 통해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일부를 영향력 분할 구역으로 나눈 날인,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희생자를 위한 기념일을 매년 8월 23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콘스탄틴 코사체프 러시아 하원 외교 위원회 위원장은 이 결의안을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코즐로프스키(1944년생 정치인) 러시아 대표단장은 이 결의안을 "모욕적인 반 러시아 공격"이라고 부르며,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동일 선상에 놓는 자들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해방하는 데 가장 큰 희생과 기여를 한 것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고 덧붙였다.[64][65] 총 385명의 의회 구성원 중 8명만이 이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66]

2009년 8월 말, 소련 국가의 구절인 금박 슬로건이 모스크바 지하철의 쿠르스카야 역에 8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조각상 아래에 다시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탈린은 인민에 대한 충성심으로 우리를 키웠다. 그는 우리에게 노동과 영웅심을 불어넣었다." 이 슬로건은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시대인 1950년대에 제거되었다. 또 다른 복원된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조국을 위하여! 스탈린을 위하여!"

이 슬로건 복원은 지하철 책임자 드미트리 가예프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역의 역사적인 모습을 복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 "이 이야기에 대한 저의 입장은 간단하다. 이 비문은 쿠르스카야 역이 설립된 이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거기에 있을 것이다."[67]

인권 단체 메모리얼의 의장 아르세니 로긴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잠행하는 재스탈린화의 결과이며 ... 그들[당국]은 그의 이름을 온 세상이 두려워하는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싶어한다." 다른 인권 단체와 스탈린의 탄압 생존자들은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 시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장식을 제거할 것을 촉구했다.[68][67]

러시아 대통령의 국제 문화 교류 특별 대표인 미하일 슈비드코이는 이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제 생각에는 이러한 비문이 모스크바 지하철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모스크바 시장의 권한도, 심지어 모스크바 지하철 책임자의 권한도 아니다. 그럴 필요 없이 뜨거워지고 정치화된 사회를 깰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제 생각에는 쿠르스카야 지하철역 홀에 스탈린에 대한 구절이 있다는 것은 도시 시민들이 논의해야 할 문제이다."[67] 슈비드코이는 스탈린이 소련, 특히 러시아 국민에 대해 한 일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심지어 중립적인 태도를 가질 자격도 없고 칭찬할 자격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살자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그 기억 없이는 그들이 "우리 가운데 다시 자랄 수 있다"고 말했다. 슈비드코이는 사회가 "스탈린은 폭군"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하철의 비문은 단순히 올바르게 읽어야 하며, "스탈린의 인격에 대한 특정한 태도로 읽어야" 한다.[67] 슈비드코이는 또한 쿠르스카야 역 홀이 건축 및 문화 기념물이라면 "비문을 부수는 것은 반달리즘"이므로 비문을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67]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유럽 연구소의 독립국가연합 연구 센터 소장인 학자 드미트리 푸르만은 러시아 정권의 신스탈린주의를 "세계 혁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통제를 위한 통제를 추구하는" "비이념적 스탈린주의"로 본다.[69]

2005년, 공산당 정치인 겐나디 주가노프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건설과 인류 문명을 나치 재앙으로부터 구하는 데 기여한 스탈린에게 다시 한 번 존경을 표해야 한다"고 말했다.[70] 주가노프는 "위대한 스탈린은 재활이 필요 없다"고 말했고 볼고그라드의 이름을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바꾸자고 제안했다.[71] 2010년, 공산당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스탈린 시대의 위대함은 가장 격렬한 비난자들에게도 자명하다... 우리는 온 세상을 해방시켰다!".[72]

2008년, 드미트리 푸치코프는 당국이 대중의 관심을 시급한 문제로부터 돌리기 위해 반스탈린 선전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8년 12월 인터뷰에서 그는 질문을 받았다. "드미트리 유리에비치, 당신은 TV에서 '스탈린주의의 공포 폭로'라는 새로운 파동이 다가오는 위기의 결과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단순히 또 다른 [정신적] 악화인가?". 그는 "이 파동은 대중의 여론을 시급한 문제로부터 돌리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연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당신은 교육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주의의 공포이다"라고 대답했다.[73]

러시아 작가 세르게이 카라-무르자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체코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러시아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것이 좋은 사업이며, 과거 소련을 악마화하는 것도 좋은 사업이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왜 폴란드에 화를 내야 하는가, 우리 나라에도 같은 (그리고 우리에게는 충분히 더 위험하고 유해한) 옹호자, 철학자, 역사가 집단이 있는데, 그들은 국가가 정한 최대의 유리한 체제를 누리고 폴란드인과 똑같은 일을 한다?".[74]

2016년, 정치학자 토마스 셜록은 러시아가 신스탈린주의 정책을 다소 철회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크렘린은 국가 쇼비니즘, 과도한 민족주의, 재스탈린화를 조장하는 역사적 서사를 개발하여 사회에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제가 현직 엘리트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대신, 정권은 이제...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소련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지원하고 있다. 소련의 과거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비판은 서방과의 재결합을 포함하여 지도부의 여러 가지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를 위해 크렘린은 최근 소련의 과거를 비판하는 새로운 역사 교과서와 소련의 억압 희생자를 기념하는 중요한 프로그램을 승인했다."[75]

5. 다른 국가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대(1965~1989)의 루마니아 정권엔베르 호자 (1943~1985 집권)의 알바니아는 신스탈린주의로 분류되기도 한다.[13] 호자는 자신을 신스탈린주의자로 묘사했고, 그의 이념인 호자주의는 스탈린주의적 요소를 포함한다.[14]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비난하며 1950년대 중반 개정주의를 주장했고, 이로 인해 알바니아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했다.

하피줄라 아민을 지도자로 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할크 정권 (1978년 4월 – 1979년 12월) 또한 신스탈린주의 정권으로 묘사되었다.[15] 아민은 책상에 요제프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어두었으며, 소련 관리들의 비판에 "스탈린 동지는 낙후된 국가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답했다. 그의 정책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16]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새로운 지도부 그룹 중 한 명(1953-1955 소련 총리)으로, 평화를 옹호하고 냉전 문제 협상을 통해 긴장을 완화하려 했으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다.[22] 그는 한국 정세 해결과 독일 통일을 옹호했다.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노동자 자유 연맹 등은 현대 중국을 "신스탈린주의"로 특징짓는다.[23]

2009년 러시아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한 소련의 승리나 동유럽 해방에서의 역할을 부인하는 행위를 범죄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61]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러시아 연방 대통령 역사 진실 위원회를 설립했다.[61][62][63]

2009년 7월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회의에서 러시아 대표단은 나치 독일과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하는 데 동일한 역할을 했다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회의장을 나갔다. 이 결의안은 리투아니아슬로베니아 대표가 작성했으며,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중립 조약을 체결하고 중앙 유럽과 동유럽 일부를 영향력 분할 구역으로 나눈 날을 스탈린주의와 나치즘 희생자 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콘스탄틴 코사체프 러시아 하원 외교 위원회 위원장은 이 결의안을 "제2차 세계 대전 역사를 다시 쓰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르 코즐로프스키(1944년생 정치인) 러시아 대표단장은 "모욕적인 반 러시아 공격"이라며,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를 동일 선상에 놓는 자들은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해방하는 데 가장 큰 희생과 기여를 한 것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고 덧붙였다.[64][65]

5. 1. 북한

일부 서방 출처는 북한을 신스탈린주의 국가로 묘사해 왔다.[17] 북한은 1970년대에 수정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인 주체사상으로 채택했으며, 1992년에 개정된 헌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관련 내용을 완전히 삭제했고, 2009년에는 공산주의 관련 내용을 삭제했다.[18]

5. 2. 시리아

바트 시리아는 오랫동안 신스탈린주의 국가로 여겨져 왔다. 1970년대 하페즈 알 아사드가 요제프 스탈린의 통치를 모델로 한 경찰 국가를 수립했기 때문이다.[19] 아사드의 군사 독재는 잔혹한 사법 외적 행위를 하는 보안 기구, 침투적인 비밀 경찰을 통한 사회의 대규모 감시, 지배 가문을 중심으로 한 만연한 국가 지원 인격 숭배 등 스탈린주의의 많은 특징을 차용했다.[19][20] 아사드 왕조는 통치 기간 동안 국가 테러, 학살, 도시 공중 폭격, 군사적 탄압 등 잔혹한 방식으로 시리아를 통치했으며,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21][20]

5. 3. 투르크메니스탄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투르크메니스탄 비공산주의 정권(20세기 말~21세기 초)은 종종 신스탈린주의 정권으로 여겨졌는데,[24][25] 특히 니야조프의 인격 숭배와 관련하여 그러했다.[26]

5. 4.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카리모프의 1989년부터 2016년까지 우즈베키스탄 권위주의 정권은 "신스탈린주의"로 묘사되어 왔다.[27][28]

6. 한국과의 관계

신스탈린주의는 대한민국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내 일부 극좌 운동권 세력이나 주체사상파 사이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기도 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대를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로 평가하며, 스탈린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 전반적으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정적이다. 스탈린주의는 북한의 독재 체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6.25 전쟁과 같은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이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주류 사회에서는 신스탈린주의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7. 비판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와 깊이 연관되어, '신스탈린주의'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반스탈린주의와 반수정주의 입장에서는 탈스탈린화 이후에도 소련형 사회주의의 본질이 변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수정주의로 변질되었다고 보아 '신스탈린주의'라는 용어를 무의미하게 여긴다. 공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반공주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80]

당시 '신스탈린주의'는 자각적인 사상 체계라기보다는, 외부에서 현상과 그 배경 구조를 평가하는 용어였다. 해당 국가 지도층은 자신들의 사상 체계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규정하고, 스탈린의 오류를 극복한 후 정통 후계자로 자처했다.[80] 이는 엔베르 호자처럼 스탈린을 긍정했던 반수정주의자나, 소련 붕괴 후 '신스탈린주의'로 불리는 이들과는 다른 점이다.[81]

'신스탈린주의' 현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국가 원수, 당 지도자, 총리에 다른 인물이 취임하는 '집단 지도 체제' 원칙이 강조되었지만, 당 지도자가 다른 두 직책 중 하나 또는 모두를 겸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 1940~50년대 공산당이 사회당, 사회민주당을 흡수 합병하여 '노동당' 등으로 개칭했던 헤게모니 정당의 당명이 다시 '공산당'으로 바뀌었다. 또한 '제1서기'가 '서기장'으로, '간부회'가 '정치국'으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 군, 치안 기관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반체제 세력 및 사상, 문예 활동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 최고 지도자의 친족을 비롯한 지도층의 연고주의가 만연했다.[82]
  • 사회주의 국가 간 관계에서 각국의 자주성보다 소련의 '지도성'이 더욱 강조되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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