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비투스 (로마 황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비투스는 455년 서고트족의 지원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된 인물이다. 갈로-로마 귀족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하고 군 경력을 쌓았다. 451년 훈족의 침략 당시 테오도리크 1세에게 동맹을 설득하여 샬롱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황제 즉위 후, 로마 원로원과 동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달족의 해상 수송로 통제와 외국 군대의 요구로 인한 식량 부족, 재정난, 갈리아계 귀족의 공직 임명 등으로 로마 시민들의 불만을 샀다. 결국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의 반란으로 폐위되었고, 피아첸차 전투에서 패배한 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갈리아 대관구장 - 아우소니우스
    아우소니우스는 4세기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학자로, 보르도 수사학 학교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스승을 지냈고, 《모젤라》를 통해 모젤강의 풍경과 삶을 묘사하여 문학적 가치와 역사적 사료로서 평가받는다.
  • 457년 사망 - 야즈데게르드 2세
    야즈데게르드 2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로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키다리테스와의 전투를 통해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조로아스터교 강화와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다른 종교를 탄압하여 논란이 되었다.
  • 457년 사망 - 마르키아누스
    마르키아누스는 5세기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풀케리아와의 결혼을 통해 황위에 올라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하고 훈족에 대한 공물 지급을 중단하는 등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 385년 출생 - 모용희
    모용희는 후연의 황족으로, 모용수의 아들이자 모용보의 조카이며, 조카 모용성 사망 후 16세에 천왕으로 즉위했으나 폭정을 일삼다 풍발의 반란으로 처형되었다.
  • 385년 출생 - 사영운
    사영운은 동진 시대의 명문가 출신 시인으로, 중국 산수시를 창시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반야경주》를 저술했으나, 유송 건국 후 작위 강등과 유배를 겪었다.
아비투스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비투스 금화
아비투스의 솔리두스 금화. 명문: avitus }}
이름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
전체 이름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
지위
작위로마 황제 (서방)
통치 시기455년 7월 9일 – 456년 10월 17일
이전 통치자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다음 통치자마요리아누스
동방 황제마르키아누스
생애
출생4세기 후반, 아르베르니스, 갈리아
사망456년/457년, 아르베르니스, 갈리아
매장지브리바스
가족
자녀아그리콜라
엑디키우스
파피아닐라
아버지아그리콜라 (추정)
종교
종교칼케돈 기독교

2. 초기 생애와 경력

아비투스는 법학 등 당대 귀족 자제들이 받는 교육을 받았다.[1] 421년 이전, 고향의 세금 감면을 요청하기 위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에게 사절로 파견되어 성공을 거두었다.[1] 425-426년에는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1세의 궁정을 방문하여 교류했고, 테오도리크 2세에게 라틴어 시를 가르치기도 했다.[1]

군 경력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유퉁기와 노릭을 상대로 한 알프스산맥에서의 아에티우스 원정(430-431년), 부르군트족과의 전투(436년)에서 시작되었다.[1] 437년, ''vir illustris''로 승진한 후 아베르니아로 돌아와 고위직을 맡았다.[1] 같은 해 훈족 침략자들을 클레르몽 근처에서 격퇴하고, 테오도리크에게 나르본 포위를 풀도록 했다.[1] 439년에는 갈리아 프라에토리우스 지사가 되어 서고트족과의 우호 조약을 갱신했다.[1]

2. 1. 가문 배경

아비투스는 클레르몽페랑의 갈로-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다.[1] 그의 아버지는 421년에 집정관을 지낸 아그리콜라로 추정된다.[1] 아비투스는 아들 아그리콜라(''vir illustris'', 455년경 - 507년 생존)와 에키디우스 아비투스(율리우스 네포스 황제 휘하 ''patricius'' 및 ''magister militum'') 그리고 딸 파피아닐라를 두었다.[1] 파피아닐라는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결혼했는데, 시도니우스가 남긴 편지와 찬양시는 아비투스의 생애와 당시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1]

2. 2. 초기 경력

아비투스는 클레르몽의 갈로-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421년 집정관을 지낸 아그리콜라로 추정된다. 아비투스에게는 아그리콜라와 에키디우스 아비투스, 그리고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와 결혼한 딸 파피아닐라가 있었다.

아비투스는 법학 등 당대 귀족 자제들이 받는 교육을 받았다. 421년 이전, 고향의 세금 감면을 청원하기 위해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에게 파견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425-426년에는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1세의 궁정을 방문하여 교류했고, 테오도리크 2세에게 라틴어 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군 경력은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휘하에서 유퉁기와 노릭을 상대로 한 알프스 원정(430-431년), 부르군트족과의 전투(436년)에서 시작되었다. 437년, vir illustris로 승진한 후 아베르니아로 돌아와 고위직을 맡았다. 같은 해 훈족 침략자들을 클레르몽 근처에서 격퇴하고, 테오도리크에게 나르본 포위를 풀도록 했다. 439년에는 갈리아 프라에토리우스 지사가 되어 서고트족과의 우호 조약을 갱신했다.

440년 여름 이전에 클레르몽 근처의 영지 아비타쿰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

2. 3. 은퇴와 복귀

440년 여름, 아비투스는 클레르몽 근처 자신의 영지인 아비타쿰에서 은퇴하여 사생활을 즐겼다.[1]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서로마 제국을 침략한 451년까지 이곳에 살았다.[1] 아비투스는 테오도리크 1세를 설득하여 로마와 동맹을 맺게 하였고, 테오도리크 1세와 아에티우스의 연합군은 샬롱 전투에서 아틸라를 격파했으나, 테오도리크 1세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1]

3. 황제 즉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발렌티니아누스 3세 사후 즉위하여 아비투스를 서고트족에 파견했으나, 막시무스가 죽자 서고트족은 아비투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455년,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암살당하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해 봄, 아비투스는 막시무스 황제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중앙군 사령관(''마기스터 밀리툼 프라에센탈리스'')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툴루즈에 있는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2세에게 파견되어 동맹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았다.[2]

아비투스가 툴루즈에 머무는 동안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가 사망(455년 5월 31일)하고 반달족의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테오도리크 2세는 아비투스를 황제로 추대했고, 이후 갈리아 지도자들과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다.[4][5]

아비투스는 즉위 후 3개월 동안 자신의 지지 기반인 갈리아에서 권력을 공고히 한 후, 갈리아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로 향했다. 도중에 노리쿰 지역의 제국 통치를 재건하고, 라벤나를 거쳐 455년 9월 21일 로마에 입성했다.[6]

3. 1. 서고트족의 추대

아비투스를 황제로 추대한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2세


455년 봄, 아비투스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마기스터 밀리툼 프라에센탈리스'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2세의 툴루즈 궁정에 파견되어, 새로운 왕의 승인과 동맹 부족으로서의 지위 확인, 그리고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았다.[2]

아비투스가 톨로사에 머무는 동안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황제가 사망(455년 5월 31일)하고 반달족의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테오도리크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툴루즈에서 아비투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455년 7월 9일,[3] 아비투스는 아를라테 근처 비에르눔에서 열린 갈리아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황제로 추대되었고,[4] 이후 8월 5일경 로마 원로원의 인정을 받았다.[5]

3. 2. 로마 원로원의 승인

455년 8월 5일경, 아비투스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 원로원의 인정을 받았다.[5]

4. 통치

아비투스는 5세기 중반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그의 권력은 시민, 원로원,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 군대와 그 지휘관들(마요리아누스, 리키메르), 그리고 반달족 왕 가이세릭의 지지에 달려 있었다. 456년 1월 1일, 아비투스는 집정관에 올랐으나, 동로마 궁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집정관을 임명하여[29] 두 제국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442년 가이세릭과 맺은 조약에도 불구하고 반달족의 이탈리아 해안 침입은 계속되었다. 아비투스는 동계 휴전을 성립시켰으나, 456년 3월 반달족이 카푸아를 파괴하자 리키메르를 보내 시칠리아를 방어하게 했고, 리키메르는 아그리젠토와 코르시카 해전에서 반달족을 격파했다.[30]

아비투스 치세에 서고트족은 히스파니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455년 아비투스는 사절을 보내 평화를 요청했으나,[31] 수에비족이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를 침입하자 서고트족이 이들을 공격하여 456년 아스토르가 근처 캄포스 파라모스 전투에서 격파하고[32] 제국의 동맹 부족(''foederati'') 자격으로 점령했다.

4. 1. 권력 기반 강화

아비투스는 즉위 후 3개월 동안 갈리아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후 갈리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이동했다.[7] 456년 1월 1일, 아비투스는 전통에 따라 집정관직을 맡았다.[7]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그의 단독 집정관직을 인정하지 않고, 요하네스와 바라네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아비투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8]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 2. 외교 정책

가이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마르키아누스 황제 시대의 조약과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가 맺은 442년 조약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해안을 계속 침략하고 약탈했다. 아비투스는 반달족과 겨울 휴전을 맺었지만, 456년 3월 반달족은 카푸아를 파괴했다. 이에 아비투스는 리키메르시칠리아 방어에 파견하여 아그리젠토 근처 육상 전투와 코르시카 해전에서 반달족을 격파했다.[9]

아비투스 재위 기간 동안 서고트족은 로마의 승인 하에 히스파니아로 세력을 확장했다. 455년, 아비투스는 사절인 ''코메스'' 프론토를 수에비족과 테오도리크 2세에게 보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수에비족이 로마 속주인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를 침략하자, 서고트족은 456년 10월 5일 아스토르가에서 12마일 떨어진 오르비고 강 유역의 캄푸스 파라무스에서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했다.[10] 이후 서고트족은 명목상 제국의 ''포에데라티''로서 이 속주를 점령했다.

4. 3. 몰락

피아첸차의 주교좌.
두오모의 정면.


아비투스는 이탈리아 백성과 원로원의 반발에 직면했는데, 이는 그의 출신 배경과 정책, 그리고 로마의 식량 부족 문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키메르와 ''comes domesticorum(군사령관)'' 마요리아누스는 아비투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아비투스는 로마를 떠나 갈리아에서 군대를 모아 피아첸차에서 리키메르의 군대와 맞섰으나 패배했다. 리키메르는 아비투스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피아첸차의 주교가 되도록 강요했다.[14]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이 아비투스의 사형을 명하자 아비투스는 갈리아로 도망쳤지만, 여행 중에 죽었다고 한다.[42] 다른 사료에서는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아비투스를 교살하거나 굶겨 죽였다고 전한다.[43] 아비투스는 456년 말 또는 457년에 사망하여 브리우드의 성 율리아누스 묘소 옆에 매장되었다.[44]

4. 3. 1. 이탈리아 주민들의 불만

이탈리아 주민들은 "외국인" 아비투스를 불만스럽게 여겼다. 로마 약탈로 황폐해진 로마는 반달족의 해상 수송로 통제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아비투스의 서고트 경비병 유지 비용도 부담이 되었다. 황실 재정은 거의 바닥나, 아비투스는 대중의 압력으로 경비대를 해산하고 그들의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일부 조각상의 청동을 녹여 팔아야 했다.[11]

4. 3. 2.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의 반란

마요리아누스
리키메르와 함께 황제 아비투스에 반기를 들었다.]]

"외국인" 아비투스에 대한 이탈리아 주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로마 약탈로 황폐화된 로마 시민들은 반달족의 해상 수송로 통제로 인해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아비투스와 함께 도착한 외국 군대의 요구로 더욱 악화되었다. 황실 재정은 거의 바닥났고, 아비투스는 대중의 압력으로 자신의 서고트족 경비대를 해산한 후, 그들의 막대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일부 조각상들의 청동을 녹여 팔아야 했다.[11]

마요리아누스리키메르는 대중의 불만, 황실 경비대의 해산, 그리고 자신들의 승리를 통해 얻은 위신을 믿고 아비투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초가을에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리키메르는 로마 원로원에서 아비투스를 폐위시키도록 했고, 456년 9월 17일 클라세에 있는 ''Palatium''(궁전)에서 ''magister militum(군사령관)'' 레미스투스의 살해를 명령했다.[12]

아비투스는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서고트족에게 보낸 자신의 대사 중 한 명인 메시아누스를 새로운 ''magister militum''(군사령관)으로 선택했고, 갈리아(히다티우스는 아렐라테라고 말한다)[13]로 가서 가능한 모든 군대를 모았으며, 아마도 그가 해산했던 서고트 경비대였을 것이다. 그는 피아첸차 근처에서 리키메르의 군대에 맞서 군대를 이끌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도시에 진입하여 리키메르가 이끄는 거대한 군대를 공격했지만, 메시아누스를 포함한 그의 병사들이 대규모 학살을 당한 후, 아비투스는 456년 10월 17일 또는 18일에 도망쳤다. 직후 리키메르는 그의 목숨을 살려줬지만, 그를 피아첸차의 주교가 되도록 강요했다.[14]

4. 3. 3. 피아첸차 전투와 폐위

마요리아누스리키메르는 아비투스 황제에 반기를 들고 피아첸차 근처에서 그를 격파한 후 도시의 주교가 되도록 강요했다.[11] 아비투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마요리아누스였다.

당시 이탈리아 주민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아비투스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로마 약탈로 황폐화된 로마 시민들은 반달족의 해상 수송로 통제로 인해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아비투스와 함께 도착한 외국 군대의 주둔은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황실 재정은 거의 바닥났고, 아비투스는 대중의 압력으로 자신의 서고트족 경비대를 해산한 후, 그들의 막대한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일부 조각상들의 청동을 녹여 팔아야 했다.[11]

리키메르와 ''comes domesticorum''(군사령관) 마요리아누스는 대중의 불만, 황실 경비대의 해산, 그리고 자신들의 승리를 통해 얻은 위신을 믿고 아비투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초가을에 로마를 떠나 북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리키메르는 로마 원로원에 아비투스를 폐위시키도록 했고, 456년 9월 17일 클라세에 있는 ''Palatium''(궁전)에서 ''magister militum''(군사령관) 레미스투스를 살해했다.[12]

아비투스는 이에 대응하기로 결정했다. 먼저 그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서고트족에게 보낸 자신의 대사 중 한 명인 메시아누스를 새로운 ''magister militum''으로 임명했고, 그 다음에는 갈리아(히다티우스는 아렐라테라고 말한다)[13]로 가서 가능한 모든 군대를 모았는데, 아마도 그가 해산했던 서고트 경비대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아첸차 근처에서 리키메르의 군대에 맞서 군대를 이끌었다. 황제와 그의 군대는 도시에 진입하여 리키메르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공격했지만, 메시아누스를 포함한 그의 병사들이 대규모 학살을 당한 후, 아비투스는 456년 10월 17일 또는 18일에 도망쳤다. 직후 리키메르는 그의 목숨을 살려줬지만, 그를 피아첸차의 주교가 되도록 강요했다.[14]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이 폐위된 아비투스의 사형을 명하자 아비투스는 고향 아바니아의 성 율리아누스 성당의 재정 모금을 명목으로 갈리아로 도망쳤지만, 그 여행 중에 죽었다고 한다.[42] 다른 사료에서는 폐위된 황제가 그의 후계자(마요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교살 또는 굶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43] 아비투스는 폐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56년 말 또는 457년에 사망했고, 브리우드의 성 율리아누스 묘소 옆에 매장되었다.[44]

5. 죽음

아비투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로마 원로원이 사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아로 도망치려 했다는 설, 고향인 클레르몽페랑의 생 줄리앙 대성당에 기증품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가 이 여정 중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18] 다른 자료들은 그의 후임자의 명령에 의해 목 졸려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19] 아비투스는 457년 또는 456년 말, 폐위된 직후 사망했으며, 브리우드에 묻혔다.[19]

5. 1. 갈리아로의 도피와 죽음

아비투스가 폐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갈리아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황제로 인정했을 수도 있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마르켈루스라는 인물이 갈리아에서 아비투스를 다시 황위에 앉히려는 실패한 쿠데타를 조직했다고 전한다.[15][16] 당시의 역사가인 히다티우스는 스페인에 거주하며 457년을 아비투스 통치의 3년째로 여겼다.[17] 아비투스 자신의 의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죽음에 대한 방식과 날짜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그는 로마 원로원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아로 도망치려 했으며, 공식적으로는 고향인 클레르몽페랑의 생 줄리앙 대성당에 기증품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그는 이 여정 중에 사망했다.[18] 다른 자료들은 그의 후임자의 명령에 의해 목 졸려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아비투스는 457년 또는 456년 말, 폐위된 직후 사망했으며, 생 줄리앙의 무덤 옆, 브리우드에 묻혔다.[19]

5. 2. 처형설

로마 원로원이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아로 도망치려 했으나,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의 후임자의 명령에 의해 목 졸려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도 한다.[19] 그는 공식적으로는 고향인 클레르몽페랑의 생 줄리앙 대성당에 기증품을 전달하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18]

5. 3. 매장

아비투스는 브리우드에 있는 성 율리아누스 묘소 옆에 묻혔다.[19]

6.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의 관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와 아비투스는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아니었지만, 인척 관계였다. 막시무스의 첫 번째 부인은 아비투스의 여동생인 에파르키아 아위타(397년 - 435년 이전 사망)였다.[1] 막시무스와 에파르키아 아위타 사이에는 아들 팔라디우스(415년경 혹은 425년 - 455년)가 있었다고 여겨진다.[1]

참조

[1] 간행물 "The Birth of Ricimer" 1995
[2] 문서 Petronius Maximus ascended to the throne on 17 March 455, after Emperor [[Valentinian III]] had been killed by a conspiracy in which Petronius was involved.
[3]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record date about 10 July.
[4] 문서 According to [[Sidonius Apollinaris]], vii.571–579, Avitus was crowned with a [[torc]], the typical Gallic neck ring with which [[Julian (Roman emperor)|Julian]] had also been crowned.
[5]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n. 575; [[Cassiodorus]], 1264.
[6] 문서 ''Auctarium Prosperi'', 7.
[7] 문서 On this occasion, [[Sidonius Apollinaris]] declamed his panegyric.
[8] 문서 [[Hydatius]] writes (''Chronicle'', 166) that Avitus sent some ambassadors to Marcian to discuss the separation of their spheres of influences, and later (''Chronicle'', 169) adds that the two emperors ruled in agreement.
[9] 문서 See [[Priscus]], ''History'', fragment 24, and Hydatius, 176–177.
[10] 간행물 "The End of Roman Spain. Part II" 1977
[11] 문서 [[John of Antioch (chronicler)|John of Antioch]], fragment 202.
[12]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579; ''[[Auctarium Prosperi Havniense]]'', 1.
[13] 문서 Hydatius, 177.
[14]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580 (reporting 17 October as the day of the battle); ''Auctarium Prosperi'', ''s.a.'' 456 (reporting 18 October); Victor of Tuenna, ''s.a.'' 455 (reporting Avitus' consecration by the Bishop of Milan, Eusebius).
[15] 문서 Sidonius Apollinaris, ''Letters'', i.11.6.
[16] 문서 Mathisen.
[17] 문서 Hydatius, ''Chronicle'', 183.
[18] 문서 Gregory of Tours, ''Historia Francorum'', ii.11.
[19] 간행물 "The Third Regnal Year of Eparchius Avitus" 1985-10
[20] 문서 古い資料には''Marcus Maecilius Avitus''の名が見られるが、現代では''Eparchius'' のみが受け入れられている。ICVR-08, 20823: ''Locus Geronti presb(yteri) / depositus XIIII Kal(endas) Iul(ias) / cons(ulatu) Eparchi Aviti''.
[21] 간행물 "The Birth of Ricimer" 1995
[22] 문서 ''[[:en:Fasti vindobonenses priores|Fasti vindobonenses priores]]''は7月10日としている。
[23] 문서 "[[:en:Sidonius Apollinaris|Sidonius Apollinaris]], vii.571–579, によればアウィトゥスは[[フラウィウス・クラウディウス・ユリアヌス|ユリアヌス帝]]と同様にガリア人が首輪に用いる[[トルク (装身具)|トルク]]で戴冠した。"
[24] 서적 1996
[25] 서적 1958
[26] 문서 ''[[:en:Fasti vindobonenses priores]]'', n. 575; [[:en:Cassiodorus]], 1264.
[27] 문서 ''Auctuarium Prosperi'', 7.
[28] 서적 1996
[29] 문서 {{仮リンク|ヒダティウス|en|Hydatius}}の年代記によれば、アウィトゥス帝はマルキアヌス帝に使節を送り、両帝国の勢力圏について協議させた(『年代記』, 166章)。後に二人の皇帝は合意に達したという(『年代記』,169章)。
[30] 문서 See [[:en:Priscus]], ''History'', fragment 24, and Hydatius, 176–177.
[31] 서적 1996
[32] 간행물 "The End of Roman Spain. Part II" 1977
[33] 서적 1996
[34] 문서 "[[:en:John of Antioch (chronicler)|John of Antioch]], fragment 202."
[35] 문서 ''Fasti vindobonenses priores'', 579; ''[[:en:Auctuarium Prosperi Havniense]]'', 1.
[36] 서적 Hydatius
[37] 기타 Fasti vindobonenses priores
[38] 서적 ギボン 1996
[39] 서적 Sidonius Apollinaris, Letters
[40] 기타 Mathisen
[41] 서적 Hydatius, Chronicle
[42] 서적 Gregory of Tours, Historia Francorum
[43] 논문
[44] 서적 ギボン 199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