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즈데게르드 2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즈데게르드 2세는 438년부터 457년까지 사산 제국의 샤였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훈족과의 대립, 종교 정책,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의 반란 등 다양한 사건을 겪었다. 특히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아바라예르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통치 스타일과 평가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며, 화폐 주조를 통해 제국의 이념을 드러냈다.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여 내전이 발생했으며, 호르미즈드 3세, 페로즈 1세, 발라시 등 여러 아들을 두었다.
야즈데게르드(Yazdegerd)라는 이름은 고대 이란어의 "신성한 존재"를 의미하는 ''야자드 야자타''(yazad yazata)와 "만들어진"을 의미하는 ''-카르타''(-karta)의 합성어로, "신이 만든"을 의미하며, 이란어의 ''바그카르트''(Bagkart)와 그리스어의 ''테옥티스토스''(Theoktistos)와 유사하다. 야즈데게르드라는 이름은 다른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438년, 바흐람 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야즈데게르드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이후 확장을 위해 페르시아에 가까운 하란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 모두에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یزدگرد دومfa (야즈데게르드 2세)는 샤푸르 2세() 치세 이후, "이란 훈족"으로 알려진 동쪽의 유목민 침략자들(에프탈족, 키다르, 키오니트 및 알칸)에 대처해야 했다. 그들은 샤푸르 2세와 그의 쿠샤노-사산 왕조의 지배자들로부터 토하리스탄과 간다라를 빼앗았고, 결국 샤푸르 3세()로부터 카불을 빼앗았다. 고고학, 화폐학, 인장학적 증거는 훈족이 사산 왕조만큼 정교한 영역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재빨리 이란 제국의 상징과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동전 또한 사산 제국 주화를 모방했다. 현대 역사가 리처드 페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란의 기록에서 파괴적인 '자이온'이나 로마 역사가들의 약탈 야만인과는 거리가 멀게, 이란 이후 중앙 아시아의 훈족 왕국은 도시 기반, 세금 징수, 이념적으로 혁신적인 국가였으며, 왕의 왕들은 그들을 몰아내기가 어려웠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동로마 제국과 키다리테스(Kidarites)와의 전쟁 중 군대와 귀족들에게 퍼진 기독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군대와 귀족 내 기독교인들을 퇴출시켰고, 아시리아인과 유대인 등 소수 종교를 탄압했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질문하고, 검토하고, 보라. 최선을 선택하고 유지하자."라는 좌우명을 가진 예리하고 박식한 군주였다. 그는 페르시아 자료에서 일반적으로 칭찬받으며, 자비롭고 관대한 통치자로 묘사된다. 그는 아버지의 사냥, 연회, 긴 알현 시간의 과도한 탐닉을 버린 것에 대해 칭찬을 받았다. 중세 역사가 이븐 알-발키와 함자 알-이스파하니에 따르면, 그는 "온화한 야즈데게르드"(''Yazdegerd-e Narm'')로 알려졌다. 그러나 야즈데게르드 2세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제국 내 비조로아스터교도들을 박해하는 그의 정책 때문이며, 이는 이란 귀족, 특히 사산 제국을 이용하여 국민의 종교적, 문화적 삶에 대한 권위를 강요하려 했던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달랬다. 이는 그의 할아버지이자 동명의 인물인 야즈데게르드 1세("죄인"으로 알려짐)의 정책과 정반대였는데, 그는 비조로아스터교 신민에 대한 관대한 정책과 귀족 및 사제들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페르시아 자료에서 적대시의 대상이 되었다.
야즈데게르드 2세의 통치 시기, 사산 왕조의 동전에는 "mazdēsn bay kay"(마즈다를 숭배하는 왕, 왕)라는 새로운 문구가 새겨졌다. 이는 전설적인 아베스타 왕조인 카야니안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은 "카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는 서방을 지향하던 사산 제국의 정치적 관점이 동방으로 변화한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야즈데게르드 1세와 바흐람 5세 시대에 시작되어 야즈데게르드 2세와 그의 아들 페로즈 1세 때 절정에 달했다. 이는 이란 동부 전선에 적대적인 부족들이 출현했기 때문일 수 있다. 훈족과의 전쟁은 이란 카야니안 통치자들과 투라니안 적들 간의 신화적 경쟁심을 일깨웠을 수 있다.
야즈데게르드 2세는 457년에 사망했다. 그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으며, 중세 역사가 알-사알라비에 따르면, 대신 그 임무를 엘리트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곧 내전이 벌어졌다. 그의 장남인 호르미즈드 3세는 이란 북부의 레이에서 왕위에 올랐고, 페로즈는 제국 북동부로 도망쳐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국은 왕조 간의 투쟁에 휩싸여 분열되었다. 두 형제의 어머니인 데나그는 수도 크테시폰에서 잠시 제국의 섭정으로 통치했다.
2. 어원
언어 표기 파흘라비어 야즈데케르트(Yazdekert) 신 페르시아어 야즈드(에)게르드(Yazd(e)gerd) 시리아어 야즈데게르드(Yazdegerd), 이즈데게르드(Izdegerd), 야즈데게르(Yazdeger) 아르메니아어 야즈케르트(Yazkert) 탈무드 이즈데게르(Izdeger), 아즈게르(Azger) 아랍어 야즈데이제르드(Yazdeijerd) 그리스어 이스디게르데스(Isdigerdes)
3. 로마와의 전쟁
동로마 제국은 남부 지역에서 반달족의 침략을 받는 상황이었다. 439년에는 카르타고를 정복당하는 등, 강한 압력을 받았다. 이에 441년,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평화를 제의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 아나톨리우스를 야즈데게르드 2세의 진영에 파견하였다. 440년에 이어진 협상에서 두 나라는 서로의 국경선 근처에 새로운 요새를 짓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고, 사산 제국은 코카서스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금전적 지원을 받기로 합의하였다.
4. 훈족과의 전쟁
훈족에 의해 압박받은 이란은 북쪽과 북동쪽 변경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며, 특히 바흐람 5세와 یزدگرد دومfa 치세에 토하리스탄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바르샤흐르를 지키는 데에만 성공했다. 사산 왕조의 노력은 5세기 초 키다르에 의해 방해받았고, 이들은 야즈데게르드 1세(), 바흐람 5세, 그리고/또는 یزدگرد دومfa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이란의 재무부에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굴욕적인 일이었다. یزدگرد دومfa는 결국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다.
443년, یزدگرد دومfa는 키다리테스(Kidarites)를 정벌하기 위해 니샤푸르에 군대를 모으고 기나긴 원정을 시작하였다. 450년에 그는 중앙 아시아의 깊숙한 키다르 영토로 원정을 시작하여 요새와 도시를 습격하고 점령했으며, 그 결과 많은 포로와 재물이 쌓였다. 결국 수많은 전투를 거쳐온 450년에 페르시아군은 키다리테스를 격퇴하였으며 그들을 아무다리야강 너머로 몰아내었다.
453년, یزدگرد دومfa는 키다르의 위협에 직면하기 위해 그의 궁정을 니샤푸르로 옮겼고, 그의 대신(''와주르그 파라마다르'') 미르 나르세에게 사산 제국을 맡겼다. 그는 키다르와 전쟁을 하며 여러 해를 보냈다. 그의 군대는 처음에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지만, 전투는 계속되었다. ''샤흐레스타니하 이 에란샤흐르''( "이란의 지방 수도")에 따르면, یزدگرد دومfa는 담간을 요새화하고 키다르에 대한 강력한 국경 초소로 만들었다. 이 시기에 یزدگرد دومfa는 에란-콰라-야즈데게르드( "이란, 야즈데게르드의 영광") 주를 만들었는데, 이는 히르카니아 주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키다르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의 동쪽 부분을 확보한 후, یزدگرد دومfa는 코카서스 알바니아와 아르메니아로 초점을 옮겨 로마와 함께 증가하는 훈족의 위협에 대항하여 코카서스를 방어했다.
5. 종교 정책
야즈데게르드 2세의 기독교 박해는 446년 메소포타미아 카르크의 기독교 귀족들에서 시작되어, 이베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귀족들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대체로 귀족들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조로아스터교 귀족들 역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현장 군대에서 남성들을 거세하여 자신의 가족보다 그에게 더 충실한 환관을 만들었다.
451년, 야즈데게르드 2세는 아두르-호르미즈드를 아르메니아의 새 총독('''마르즈반''')으로 임명하여 아르메니아에서 비조로아스터교인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 이는 종교적 광신자가 내렸을 법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현대 역사학자 스콧 맥도너는 조로아스터교가 야즈데게르드 2세에게 "개인적인 충성심의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야즈데게르드 2세의 종교 정책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자료는 그의 개인적인 경건함과 귀족에 대한 적대감을 강조하는 반면, 아르메니아어와 시리아어 자료는 그를 종교적 광신자로 묘사한다. 현대 역사학에서는 후자의 측면이 자주 강조된다.
5. 1. 아르메니아 반란 (아바라예르 전투)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자신의 조로아스터교 정책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아바라예르 전투).
야즈데게르드 2세가 기독교 귀족을 관료제에 통합하려는 정책은 문제가 있는 결과를 낳았다. 아두르-호르미즈드를 아르메니아의 새 총독('''마르즈반''')으로 임명하기 전에, 아르메니아는 주요 반란에 휩싸였다. 반란의 원인은 미르 나르세가 아르메니아에 주르반교 조로아스터교 변종을 강요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의 의도는 야즈데게르드 2세의 의도와는 달랐다. 그 결과, 많은 아르메니아 귀족(전부는 아님)이 아르메니아의 최고 사령관(''스파라페트'')인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아르메니아 반군들은 로마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편, 바사크 시우니가 이끄는 또 다른 아르메니아 파벌은 사산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451년 6월 2일, 사산 왕조와 반군 세력은 아바라예르 전투에서 격돌했으며, 사산 왕조가 승리했다. 바르단 마미코니안을 포함한 9명의 장군이 사망했고, 많은 수의 아르메니아 귀족과 병사들이 같은 운명을 맞았다. 그러나 사산 왕조 또한 아르메니아 반군의 단호한 투쟁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다. 비록 야즈데게르드 2세가 이후 그 나라의 박해를 종식시켰지만, 긴장은 510년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친족인 바르드 마미코니안이 야즈데게르드 2세의 손자인 카바드 1세에 의해 ''마르즈반''으로 임명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5. 2. 유대교 탄압
야즈데게르드 2세는 군대와 귀족 사회에 퍼져있던 기독교를 의심하여, 기독교인들을 군대와 귀족에서 퇴출시켰다. 아시리아인과 유대인들의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또한, 451년에는 자신의 조로아스터교 정책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아바라예르 전투)
야즈데게르드 2세의 기독교 박해는 446년 메소포타미아의 기독교 귀족들이 있던 카르크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이후 이베리아와 아르메니아의 기독교 귀족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대체로 귀족들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451년, 야즈데게르드 2세는 아르메니아에서 비조로아스터교인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키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기도 했다. 이는 종교적 광신자가 내렸을 법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현대 역사학자 스콧 맥도너는 조로아스터교가 야즈데게르드 2세에게 "개인적인 충성심의 시험"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유대인들 역시 야즈데게르드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박해를 받았다. 그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공개적으로 지키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고, 여러 유대교 지도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스파한의 유대인 공동체는 두 명의 조로아스터교 사제를 산 채로 가죽을 벗기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보복했으며, 이는 다시 유대인에 대한 더 많은 박해로 이어졌다.
6. 통치 스타일 및 평가
7. 화폐 주조와 제국 이념
이 시기에 사산 왕조는 이란 영웅 왕 페레이둔의 전설을 포함한 전설적이고 서사적인 텍스트를 수집했을 가능성이 높다. 페레이둔은 왕국을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장남 살름은 서쪽의 로마, 차남 투르는 동쪽의 투란, 막내 이레지는 제국의 심장부인 이란을 받았다. 카야니안의 영향을 받은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자신을 페레이둔과 이레지의 후계자라고 믿었으며, 서쪽의 로마 영토와 동쪽의 훈족 영토 모두 이란에 속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사산 왕조는 "카이"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 했을 수 있다. "왕 중의 왕"이라는 전통적인 칭호는 야즈데게르드 2세의 주화에는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사산 왕조 동전 뒷면에는 두 명의 시종이 옆에 있는 불의 제단이 더욱 숭배하는 방식으로 묘사된 새로운 디자인이 나타났다. 이는 야즈데게르드 2세가 조로아스터교에 충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아소리스탄과 후제스탄 주는 서쪽에서, 고르간과 마르 주는 동쪽에서 야즈데게르드 2세를 위한 조폐소를 가장 많이 제공했으며, 이는 두 전선에서 사산 왕조의 전쟁을 지원했을 것이다.
8. 죽음과 계승
9. 가족
관계 이름 비고 아내 데나그 이란 공주, 사산 왕조 출신 추정. 아들 호르미즈드 3세 사산 제국의 17대 샤 (재위: 457년 - 459년) 아들 페로즈 1세 사산 제국의 18대 샤 (재위: 459년 - 484년) 아들 자레르 485년에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려 했던 사산 왕자. 아들 발라시 사산 제국의 19대 샤 (재위: 484년 - 488년) 아들 바차간 3세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왕 (재위: 485년 - 510년). 야즈데게르드 2세와의 정확한 관계는 불분명하며, 아들이거나 조카였을 것으로 추정. 딸 이름 미상 코카서스 알바니아 왕 아스웨겐(재위: 415년 - 440년)과 결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