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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소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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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소니우스는 4세기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교사, 정치가였다. 310년경 오늘날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난 그는 수사학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황제의 아들인 그라티아누스의 가정교사를 지냈다.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퀘스토르, 갈리아의 프라에토리안 총독,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은 시, 산문, 편지 등 다양한 형식을 아우르며, 특히 《모젤라》는 높이 평가받지만, 독창성 부족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아우소니우스는 395년경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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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소니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데키무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
아우소니우스의 초상화 (출처 불명)
출생기원후 310년경, 부르디갈라
사망기원후 395년경
국적로마
직업시인, 교사
친척아에밀리아 힐라리아 (고모)
아에밀리우스 마그누스 아르보리우스 (삼촌)
파울리누스 펠라에우스 (손자)
이름
라틴어Decimus Magnus Ausonius (데키무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

2. 생애

데키미우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는 310년경 갈리아 (현재 프랑스)의 부르디갈라(현재 보르도)에서 태어났다.[2][3]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계 혈통의 의사였고, 어머니는 갈리아 로마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보르도와 툴루즈에서 문법과 수사학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고향 보르도의 수사학 학교에서 30년간 강사 및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놀라의 주교가 된 시인 파울리누스가 있다.

367년경, 아우소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트리어로 부름받아 당시 황태자였던 그라티아누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는 그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학문적 명성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퀘스토르 직위를 시작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으며, 375년 제자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더욱 승승장구했다. 그라티아누스는 스승에게 갈리아의 프라에토리안 총독 직위를 부여했으며, 379년에는 로마 제국 최고의 영예인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이 시기 아우소니우스와 그의 가문은 제국 내 여러 요직을 차지하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으로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되자 아우소니우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 보르도 근처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며 시를 쓰고 여러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아우소니우스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395년경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당시 로마 제국이 직면했던 여러 위기에 대한 깊은 인식은 부족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의 손자 펠라의 파울리누스 역시 시인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데키미우스 마그누스 아우소니우스는 310년경 부르디갈라(현재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아우소니우스(290년경–378년)는 의사였으며 그리스 혈통을 지녔다.[2][3] 어머니 아에밀리아 아에오니아는 카에킬리우스 아르기키우스 아르보리우스의 딸로, 양쪽 모두 갈리아 로마인 가문 출신이었다. 아우소니우스는 이름이 같은 숙모와 할머니 아에밀리아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보르도와 툴루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는데, 툴루즈에서는 외삼촌인 아에밀리우스 마그누스 아르보리우스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아우소니우스는 문법과 수사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대 그리스어 실력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328년 아르보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막내 아들 콘스탄스의 가정교사가 되어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자, 아우소니우스는 보르도로 돌아와 수사학자 미네르비우스 알키무스 밑에서 교육을 마쳤다.

학업을 마친 후 그는 잠시 변호사로 훈련을 받았지만, 가르치는 일을 더 선호했다. 334년 그는 보르도의 수사학 학교에서 문법학자(강사)가 되었고, 이후에는 수사학자(교수)가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였으며, 그중 일부는 공직에서 유명해졌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시인 파울리누스로, 그는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어 놀라의 주교가 되었다.

2. 2. 교수 경력과 황실과의 인연

학업을 마친 후 잠시 변호사로 활동했으나, 가르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334년, 고향 보르도의 수사학 학교에서 '문법학자'(grammaticus, 강사)로 교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수사학자'(rhetor, 교수)로 승진했다. 그의 강의는 명성이 높아 많은 제자들을 끌어들였고, 그들 중 일부는 훗날 공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아우소니우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 중 한 명은 훗날 기독교인이 되어 놀라의 주교가 된 시인 파울리누스였다.

약 30년간 교육에 헌신한 후, 367년 아우소니우스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그를 트리어로 불러들여 황태자 그라티아누스의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이는 아우소니우스의 학문적 명성이 황실에까지 알려졌음을 보여준다. 368년에서 369년 사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그라티아누스를 동행시켰을 때 아우소니우스도 이들을 따라나섰다. 아우소니우스는 자신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판 삼아 정치적인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의 공헌을 인정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그에게 퀘스토르 직위를 수여했다. 황궁에 머무르면서 아우소니우스는 당대의 여러 유력 인사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으며, 369년에는 로마의 저명한 문인이자 정치가인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를 만나 깊은 우정을 쌓았다.[4]

375년, 제자였던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아우소니우스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라티아누스는 스승을 깊이 신뢰하고 존경했으며, 황제가 된 후 아우소니우스와 그의 가족에게 로마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아우소니우스는 갈리아의 프라이토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알레마니족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한 후 전리품으로 얻은 노예 소녀 비스술라에게 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은 가족에게도 미쳐, 90세에 가까운 그의 아버지는 일리리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376년에는 아들 헤스페리우스가 아프리카의 프로콘술(총독)이 되었으며, 379년 아우소니우스 자신은 로마 제국 최고의 영예인 집정관 직위에 올랐다. 이 시기는 아우소니우스 개인과 가문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최정점에 도달했던 때였다.

2. 3. 정치 경력

보르도의 수사학 학교에서 30년간 교사로 재직한 후, 아우소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발탁되어 당시 황태자였던 아들 그라티아누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367년경 트리어의 황궁으로 부름받은 그는, 368년에서 369년 사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그라티아누스를 데리고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나섰을 때 이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아우소니우스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그의 공헌을 인정하여 퀘스토르 직위를 수여했다. 궁정 생활은 아우소니우스에게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와 같은 당대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369년에 시작된 심마쿠스와의 우정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다.[4]

375년 그라티아누스가 황제로 즉위하자, 그는 스승이었던 아우소니우스와 그의 가족에게 로마 제국 최고의 시민 명예와 관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아우소니우스는 갈리아의 프라에토리안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알레마니족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승리한 후 전리품으로 노예 소녀 비스술라를 얻기도 했다. 그는 비스술라에게 시를 헌정했다. 또한, 90세에 가까웠던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아우소니우스는 일리리쿰 총독이라는 명예로운 직위를 받았다. 376년에는 아들 헤스페리우스가 아프리카 속주의 프로콘술로 임명되었으며, 379년 아우소니우스 자신은 로마 최고의 영예인 집정관(콘술)직에 올랐다. 이 시기 아우소니우스와 그의 가문은 갈리아 장관, 아프리카 속주 장관 등 제국 내 여러 요직을 거치며 큰 번영을 누렸다.

연도주요 경력 및 사건
367년경그라티아누스 황태자 가정교사 임명 (발렌티니아누스 1세 발탁)
368년-369년게르만족과의 전쟁에 그라티아누스와 동행
369년 이후퀘스토르 임명
375년갈리아 프라에토리안 총독 임명 (그라티아누스 즉위 후)
375년아버지 율리우스 아우소니우스, 일리리쿰 총독 임명
376년아들 헤스페리우스, 아프리카 프로콘술 임명
379년집정관 (콘술) 임명



그러나 383년, 브리타니아 주둔군 사령관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리옹에서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혼란 속에서 발렌티니아누스 2세마저 이탈리아에서 쫓겨나자, 아우소니우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갈리아의 부르디갈라(현재 보르도) 근처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이곳을 "노년의 둥지"(nidus senectutisla)라 부르며 여생을 보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진압했지만, 아우소니우스는 은둔 생활을 계속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으나, 그의 작품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이 직면했던 여러 위협에 대한 깊은 위기의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다.

2. 4. 은퇴와 죽음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브리타니아 군대가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는 리옹에서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이탈리아에서 쫓겨나자, 아우소니우스는 갈리아의 부르디갈라(현재 보르도) 근처, 생테밀리옹 인근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은퇴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아우소니우스는 자신의 영지에 계속 머물렀다. 그는 이곳을 자신의 '노년의 둥지'(nidus senectutis|니두스 세넥투티스la)라 칭하며 여생을 보냈다. 은퇴 후 그는 시를 쓰고, 과거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저명한 동시대 인물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머물렀던 영지에는 현재 샤토 오존이 소유한 땅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우소니우스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신앙이 매우 열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395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자인 펠라의 파울리누스도 시인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아우소니우스 사후 갈리아 지역이 겪게 될 혼란과 파괴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3. 작품 목록


  • ''다양한 주제에 대한 아우소니우스의 에피그램'' (''Epigrammata Ausonii de diversis rebus''): 다양한 주제에 관한 약 120개의 짧은 풍자시(에피그램) 모음이다.
  • ''에페메리스'' (''Ephemeris''): 다양한 운율을 사용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의 일과를 묘사한 작품이다. 367년 이전에 쓰였으며, 시작 부분과 끝 부분만 현재까지 전해진다.
  • ''파렌탈리아'' (''Parentalia''): 작가가 영사직을 수행한 후, 아내와 사별한 지 36년이 지난 시점에 쓰였다. 사망한 친척들을 기리는 30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 애가(哀歌) 형식이다.
  • ''부르디갈렌시스 교수 기념'' (''Commemoratio professorum Burdigalensium'') 또는 ''교수들'' (''Professores''): 고향 보르도에서 작가가 알고 지냈던 유명한 스승들에 대해 다룬 작품으로, ''파렌탈리아''의 연장선상에 있다.
  • ''묘비명'' (''Epitaphia''):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에 대한 26개의 묘비명으로, 그리스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 ''카이사레스'' (''Caesares''):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저술한 황제들의 전기에 등장하는 12명의 황제에 관한 작품이다.
  • ''유명 도시의 목록'' (''Ordo urbium nobilium''): 로마에서 보르도에 이르는 17개 유명 도시에 대해 쓴 14편의 시 모음이다. 막시무스가 몰락한 388년 이후에 헥사미터(6보격) 운율로 쓰였다.
  • ''루두스 VII 사피엔티움'' (''Ludus VII Sapientium''):[5] 고대 그리스의 일곱 현자가 차례로 등장하여 각자의 격언을 말하는 형식의 짧은 극이다.
  • 이른바 ''이딜리아'' (''Idyllia''): 특정 기준 없이 묶인 20개의 작품집으로,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모젤라'' (''Mosella'')이다.[6] 포함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 ''그리푸스 테르나리 수메리'' (''Griphus ternarii numeri'')
  • * ''헤시오돈의 시대'' (''De aetatibus Hesiodon'')
  • * ''헤라클레스의 고뇌에 대한 단시'' (''Monosticha de aerumnis Herculis'')
  • * ''삶을 선택하는 모호함에 관하여'' (''De ambiguitate eligendae vitae'')
  • * ''선한 사람에 관하여'' (''De viro bono'')
  • * ''있다 그리고 없다'' (''EST et NON'')
  • * ''장미의 탄생에 관하여'' (''De rosis nascentibus'') (아우소니우스의 작품인지 불확실함)
  • * ''부활절의 시'' (''Versus paschales'')
  • * ''아버지에 대한 비가'' (''Epicedion in patrem'')
  • * ''테크노파이그니온'' (''Technopaegnion'')
  • * ''결혼식 켄토'' (''Cento nuptialis''): 베르길리우스의 시 구절들을 조합하여 만든 작품이다.
  • * ''비스술라'' (''Bissula'')
  • * ''프로트렙티쿠스'' (''Protrepticus'')
  • * ''게네탈리아콘'' (''Genethliacon'')
  • ''에글로가룸 리베르'' (''Eglogarum liber''): 천문학과 점성술을 주제로 한 다양한 형식의 시들을 모은 작품집이다.
  • ''에피스톨라룸 리베르'' (''Epistolarum liber''): 다양한 운율로 쓰인 25편의 편지 형식의 시 모음이다.
  • ''그라티아누스에게 쓴 영사직 축하 연설'' (''Ad Gratianum gratiarum actio pro consulatu''): 379년 트리어에서 영사직에 임명된 것을 기념하여 황제 그라티아누스에게 바친 산문 연설문이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요약'' (''Periochae Homeri Iliadis et Odyssiae''):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내용을 산문으로 요약한 글이다. 아우소니우스의 저작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 ''프라이파티운쿨레'' (''Praefatiunculae''): 자신의 시집에 쓴 서문들을 모은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그의 시를 요청한 것에 대한 답변도 포함되어 있다.

4. 작품 특징

아우소니우스는 동시대인들에게 존경받았지만, 그 이후 그의 작품은 라틴 문학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그의 문체는 쉽고 유려하며, 대표작 《모젤라》는 모젤강을 따라 펼쳐지는 삶과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독창성이 부족하고 다른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아우소니우스의 시적 명성은 그의 시대의 취향을 비난한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7]

하지만 아우소니우스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가지고 있다.


  • 그의 작품은 카르페 디엠이라는 주제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음 시는 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Collige, virgo, rosas, dum flos novus et nova pubesla
  • :et memor esto aevum sic properare tuum.la
  • :-- ''Epigrammata: «Rosae» 2:49''
  • :소녀여, 꽃이 싱싱하고 젊음이 싱싱할 때 장미를 모아라,
  • :너의 시간도 이와 같이 빠르게 지나감을 기억하라.

  • 그의 독특한 작품 중 하나인 ''Cento Nuptialis''[8]는 황제가 에피탈라미움(결혼 축시)을 쓰라는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사랑은 전쟁이다"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베르길리우스의 구절들을 조합한 첸토(일종의 매시업)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 :Itque reditque viam totiens uteroque recussola
  • :transadigit costas et pectine pulsat eburno.la
  • :Iamque fere spatio extremo fessique sub ipsamla
  • :finem adventabant: tum creber anhelitus artusla
  • :aridaque ora quatit, sudor fluit undique rivis,la
  • :labitur exsanguis, destillat ab inguine virus.la
  • :-- ''Cento Nuptialis''
  • :그는 왔다가 다시 길을 가며, 격렬하게 흔들리는 자궁,
  • :뼈 사이를 밀어넣고, 상아 빗으로 두드린다.
  • :그리고 이제, 여정을 마치고, 지친 채로 그들은 다다랐다
  • :그들 자신의 목표점에: 그러자 빠른 숨결이 그의 사지를 흔든다
  • :그리고 바짝 마른 입, 땀은 강물처럼 흐른다;
  • :그는 핏기 없이 쓰러진다; 액체가 그의 사타구니에서 떨어진다.

4. 1. 포도주 양조에 대한 언급

그의 포도주 양조에 대한 언급은, 현재 유명한 포도주 생산 지역인 그의 고향 보르도 주변에서 대규모 포도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초기 증거로서 역사학자들에게 자주 인용된다.

4. 2. 수차 제재소에 대한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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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소니우스의 저술은 모젤강의 지류에서 대리석을 켜는 수차의 작동을 언급한 것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영광스러운 물고기로 유명한 켈비스와, 그의 밀돌을 격렬하게 회전시키며 매끄러운 대리석 덩어리를 통해 비명을 지르는 톱을 돌리는 그는 양쪽 강둑에서 끊임없는 소음을 듣는다...

19세기 캘리포니아의 수력 제재소인 서터 제재소의 현대적 재건.


이 구절은 물의 힘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한 로마 기술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는 돌을 자르는 데 사용된 수차에 대한 로마 문학의 드문 언급 중 하나이지만, 돌과 아마도 나무의 기계적 톱질에 물의 힘을 적용한 것은 논리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물을 이용한 제분 기술, 즉 물레방아의 광범위한 사용에 대한 언급은 기원전 25년경 비트루비우스의 ''건축학''과 서기 77년에 출판된 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도 나타난다. 이러한 물레방아의 사용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중세 시대를 거쳐 근대 시대까지 더욱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남부의 바르베갈에 있는 제재소 단지는 서기 1세기에 건설되어 물의 힘으로 곡물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데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단지는 아를 근처 언덕에 16개의 제재소가 병렬로 배열된 구조였다.

제재소의 건설은 곡물 제분소보다 훨씬 간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서터 제재소처럼 기어가 필요 없고 회전 톱날을 수차 축에서 직접 구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 제재소는 크랭크와 커넥팅 로드에 의해 작동되는 프레임 톱을 포함하는 다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5. 평가

(내용 없음)

5. 1. 부정적 평가

아우소니우스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후대에 그의 작품이 라틴 문학에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그의 문체는 이해하기 쉽고 부드러우며, 대표작 《모젤라》는 모젤강 주변의 삶과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독창성이 부족하고 다른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아우소니우스의 시적 명성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학적 취향 수준을 보여줄 뿐이다"라고 다소 비판적으로 평가했다.[7]

그럼에도 아우소니우스의 작품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 그의 작품 속 포도주 양조에 대한 언급은 오늘날 유명한 포도주 산지인 그의 고향 보르도 지역에서 일찍부터 대규모 포도 재배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 자주 인용된다.
  • 만약 다음 시가 실제로 그의 작품이라면, '카르페 디엠(현재를 즐겨라)'라는 주제를 다룬 중요한 예시로 여겨진다:
  • : 소녀여, 꽃이 싱싱하고 젊음이 싱싱할 때 장미를 모아라,

:* 너의 시간도 이와 같이 빠르게 지나감을 기억하라.

  • :: ''(Epigrammata: «Rosae» 2:49)''
  • 다소 독특한 작품인 ''Cento Nuptialis''[8]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혼 축시(에피탈라미움)를 베르길리우스의 시구들을 조합하는 첸토 방식으로 쓴 것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사랑은 전쟁이다"라는 비유를 사용했다.

참조

[1] 논문 The Nomenclature of the Poet Ausonius 2016
[2] 간행물 Harvard Magazine, Harvard Alumni Association, University of Michigan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lassical Literatu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Paulinus of Nola: Life, Letters, and Poem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5] 웹사이트 Ausonius: Ludus Septem Sapientum https://archive.org/[...]
[6] 웹사이트 Ausonius Mosella http://wiki.dickinso[...] 2008-11-22
[7] 문서 Note 1 to chapter XXVII
[8] 문서 translated as A Nuptial Cento Loeb Classical Library
[9] 웹사이트 Ausonius and Proba on “love is war” and brutalizing men’s sexuality https://www.purplemo[...] 2020-07-01
[10] 간행물 2007
[11] 서적 世界大百科辞典 平凡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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