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르키아누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르키아누스는 392년경 트라키아 또는 일리리아 속주에서 태어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군 복무를 거쳐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이 풀케리아와 결혼하여 황위에 올랐다.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아틸라에게 지불하던 공물을 폐지하고, 칼케돈 공의회를 열어 그리스도 단성론 논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그의 치세는 동로마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서로마 제국에 관여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457년에 사망했으며,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457년 사망 - 야즈데게르드 2세
    야즈데게르드 2세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로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 키다리테스와의 전투를 통해 제국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조로아스터교 강화와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다른 종교를 탄압하여 논란이 되었다.
  • 457년 사망 - 아비투스 (로마 황제)
    아비투스는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후 서로마 황제로 추대된 갈로-로마 귀족 출신으로, 서고트족과의 관계를 강화하려 노력했지만 로마 시민들의 불만과 군대의 반란으로 폐위된 인물이다.
  • 5세기 동로마 황제 - 아나스타시우스 1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491년부터 518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서, 검소한 통치와 대외 위협 대응, 화폐 및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종교적 갈등과 반란으로 불안정한 통치를 겪다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 5세기 동로마 황제 - 테오도시우스 2세
    테오도시우스 2세는 408년부터 450년까지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 시대를 거쳐 누이 풀케리아의 영향력 아래 통치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 설립과 테오도시우스 법전 제정 등의 내정 성과와 훈족과의 굴욕적인 평화협정, 신학 논쟁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평가가 엇갈리다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사망하여 동로마 제국의 권력 재편을 초래했다.
마르키아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르키아누스 금화
마르키아누스의 솔리두스
이름마르키아누스
로마자 표기Marcianus
그리스어 표기Μαρκιανός
그리스어 음역Markianos
통치
작위동로마 황제
칭호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재위 기간450년 8월 25일 – 457년 1월 27일
선임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
후임 황제레오 1세
서방 황제발렌티니아누스 3세 (450–455)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455)
아비투스 (455–456)
개인 정보
출생기원후 392년경
출생지트라키아 또는 일리리아
사망457년 1월 27일 (65세)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튀르키예이스탄불)
매장지성 사도 교회
배우자풀케리아 (450년 결혼, 453년 사망)
자녀마르키아 에우페미아
왕조테오도시우스 왕조
종교칼케돈 기독교
기타 정보
숭배동방 정교회
축일2월 17일
속성황제의 복장
주요 업적칼케돈 공의회 소집

2. 생애

마르키아누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반달족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431년 북아프리카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가이세리크에게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424년경에 주조된 아엘리아 풀케리아의 솔리두스 금화


그 뒤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승마 중 사고로 급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는 아스파르와 그의 아버지인 아르다부르에게 충실하게 봉사해 왔고, 아스파르는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교회 회의를 소집한다는 조건으로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에 동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풀케리아는 413년 14세에 세운 처녀 맹세를 마르키아누스와의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계속 지켰다.

역사가 더그 리는 아스파르와 군사적 권력 측면에서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제논과의 협상도 필요했다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더그 리에 따르면, 제논은 450년 마르키아누스가 즉위하자 파트리키의 지위를 받았는데, 이는 제논이 자신의 제위를 주장하는 대신 마르키아누스를 지지함으로써 보상을 얻는 거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마르키아누스는 450년 8월 25일에 즉위했고, 즉위식에서 임페라토르카이사르플라비우스・마르키아누스・아우구스투스la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마르키아누스는 392년경 트라키아 또는 일리리아 속주에서 태어났다. 요하네스 말랄라스(578년 사망)는 마르키아누스가 키가 크고 발에 장애가 있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마르키아누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마르키아누스는 젊은 시절 트라키아의 필리포폴리스에서 군에 입대했다. 그 후 421년에서 422년에 일어난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전쟁까지는 트리부누스 지위에 올랐을 것으로 보이며, 테오파네스(817/8년 사망)는 마르키아누스가 군대를 지휘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는 리키아에서 병에 걸려 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했다. 리키아에서 그는 나중에 마르키아누스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총독(lat: Praefectus urbila)으로 임명된 타티아누스와 그의 형제 율리우스에게 간호를 받았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제국군의 magister militum|마기스터 밀리툼la(총사령관)인 아스파르의 Domesticus (Roman Empire)|도메스티쿠스la(개인 보좌관)로 승진했다. 아스파르는 알란족과 고트족의 혼혈 출신이었음에도 제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르키아누스는 430년대 초 아프리카 속주에서 아스파르를 섬겼지만, 431년 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프로코피우스(565년경 사망)와 Evagrius Scholasticus|에우아그리우스 스콜라스티쿠스la(594년 사망)는 마르키아누스가 포로 생활 중에 반달족 왕 가이세리크를 만났고, 가이세리크가 마르키아누스가 나중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아마도 허구적인 이야기를 남겼다. 포로가 된 이후의 마르키아누스에 대해서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2년-450년) 사후까지 사료에 언급이 없다. 마르키아누스는 가이세리크에게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테오도시우스 2세의 흉상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의 동로마 제국은 외부의 위협에 시달렸다. 429년에는 가이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이 아프리카 속주 정복에 나섰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즉시 대책을 강구하여 431년 여름 아스파르를 포함한 4명의 군 사령관을 파견하여 반달족을 격퇴하려 했다. 북쪽에서는 훈족이 동로마 제국의 전력에 여유가 없을 때마다 제국을 공격하고, 제국 군대가 돌아오면 철수하는 전략을 취했다. 431년 훈족은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보조금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매년 350파운드(160킬로그램)의 을 지불하는 훈족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434년 동로마군은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과 싸우고 있었지만, 서로마군 병사들은 첫 번째 패배 당시 이미 대부분 철수했다. 훈족은 동로마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요구를 두 배로 늘려 연간 700파운드(320킬로그램)의 금을 요구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요구도 받아들였다. 동로마 제국의 취약한 방어력에 직면한 훈족의 위협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북아프리카에서 많은 군대를 불러들이기에 충분했다. 훈족 연합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아틸라가 북방의 군사 활동에 몰두하게 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9년까지 훈족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에서 전력이 약화된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439년 10월 19일 주요 도시인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동서 로마 제국은 각각 대규모 반격을 준비했지만, 발칸반도 방면의 방어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440년 봄 콘스탄티노플에서 북아프리카로 1,100척에 달하는 배가 출항했지만, 이렇게 많은 제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큰 도박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다뉴브 강 연안의 여러 요새 도시들이 훈족의 침입을 지연시켜 북아프리카로 진격한 군대가 현지에서 안전한 발판을 마련할 충분한 시간을 벌고, 군대를 북방 변방으로 철수시킬 여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도박은 442년까지는 성공적이었다. 마르구스의 주교가 습격대를 이끌고 훈족의 영토에 침입하여 왕가의 무덤을 더럽히기까지 했다. 이 신성 모독 행위에 대해 아틸라는 주교의 인도를 요구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던 주교는 아틸라와 거래하여 목숨을 보장받는 대신 마르구스 마을을 아틸라에게 넘겨주었다. 아틸라는 마르구스를 장악함으로써 다뉴브 강을 횡단하는 발판을 얻었고, 싱기두눔 및 시르미움 등의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스파르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여 반격을 개시했지만, 아스파르의 군대는 훈족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450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지불을 계속했다.

2. 2. 황제 즉위

마르키아누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였다. 사산조 페르시아반달족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431년 북아프리카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에게 다시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그 뒤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가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자 황제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 서약을 한 몸이었으므로 마르키아누스는 단지 형식적인 남편일 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의 동로마 제국은 외부의 위협에 시달렸다. 429년에는 가이세릭이 이끄는 반달족이 아프리카 속주 정복에 나섰고, 431년 훈족은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보조금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매년 160kg의 을 지불하는 훈족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434년 훈족은 요구를 두 배로 늘려 연간 320kg의 금을 요구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요구도 받아들였다.

반달족은 439년 10월 19일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440년 봄 콘스탄티노플에서 북아프리카로 1,100척에 달하는 배가 출항했지만, 다뉴브 강 연안의 방어가 약화되었다. 442년 마르구스 (현재의 포자레바츠)의 주교가 훈족의 영토에 침입하여 왕가의 무덤을 더럽혔다. 아틸라는 주교의 인도를 요구했고, 주교는 목숨을 보장받는 대신 마르구스를 아틸라에게 넘겨주었다. 아틸라는 마르구스를 장악하고, Viminacium영어, Singidunum영어 (현재의 베오그라드) 및 시르미움 등의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스파르를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여 반격을 개시했지만, 아스파르의 군대는 훈족에게 패배했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에게 매년 보조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450년에 사망했다.

450년 7월 28일, 테오도시우스 2세가 승마 중 사고로 급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후계자 문제에 직면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계자도 지명하지 않았다. 몇몇 후대 사료에는 임종 직전에 마르키아누스에게 제위를 유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마르키아누스가 황제로 선출된 후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선전으로 여겨진다. 마르키아누스는 15년 동안 아스파르와 그의 아버지인 Ardabur (consul 427)영어에게 충실하게 봉사해 왔다. 아스파르는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앉히려고 획책하여 다른 유력자들과 협상하여 비교적 무명이었던 그를 황제로 선출할 수 있었다.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협상은 한 달에 걸친 공석 기간 동안 이루어졌는데, 그 협상 내용 중 하나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이인 Pulcheria영어와의 결혼 문제였다. 이때 풀케리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종교 정책을 포기하고 교회 회의를 소집한다는 조건으로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에 동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풀케리아의 출신 가계인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제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마르키아누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한편 풀케리아는 413년 14세에 세운 처녀 맹세를 마르키아누스와의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계속 지켰다.

역사가 더그 리는 아스파르와 군사적 권력 측면에서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Zeno (consul 448)영어과의 협상도 필요했다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더그 리에 따르면, 제논은 450년 마르키아누스가 즉위하자 권위 있는 파트리키의 지위를 받았는데, 이는 제논이 자신의 제위를 주장하는 대신 마르키아누스를 지지함으로써 보상을 얻는 거래의 존재를 시사한다. 그러나 제논은 마르키아누스 즉위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한편 아스파르의 아들인 아르다부리우스는 마르키아누스 즉위 후 곧바로 신임 magister militum per Orientemla으로서 오리엔스 도의 군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마르키아누스는 450년 8월 25일에 즉위했고, 대관식에서 임페라토르카이사르플라비우스・마르키아누스・아우구스투스la라는 즉위명을 사용했다. 마르키아누스가 즉위하자 동로마 제국의 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환관이자 Spatharios영어 (시종장)인 Chrysaphius영어가 살해 또는 처형되었다. 풀케리아와 제논은 모두 크리사피우스의 영향력에 반발했기 때문에, 이것이 마르키아누스의 행동 동기에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통치

마르키아누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였다. 사산 왕조반달족과의 전투에 참전했으며 431년 북아프리카히포 레기우스 근처에서 반달족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뒤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가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죽자 황제의 누나인 풀케리아와 결혼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풀케리아는 이미 독신 서약을 한 몸이었으므로 마르키아누스는 단지 형식적인 남편일 뿐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황제가 된 직후, 훈족의 아틸라에게 공물을 바치던 정책을 폐지했다. 또한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하여 그리스도 단성론을 둘러싼 이단 논쟁을 해결하려 했으며,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더불어 내정 개혁을 통해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였다.

3. 1. 훈족과의 관계

마르키아누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전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훈족아틸라와 맺었던 조약을 파기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그는 아틸라가 우호적이라면 선물을 줄 수도 있지만,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려 한다면 격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의 이러한 조치에 분노하면서도 침략 계획은 변경하지 않았다.

451년 봄, 아틸라는 판노니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서로마 제국으로 진격했다.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Comes et Magister Utriusque Militiaela로서 방어를 조직하고 여러 부족의 지원을 요청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게피드족, 알란족, 스키르족, 헤룰리족, 루기족과 일부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오스트고트족으로 구성되었다.

아틸라는 메츠를 약탈하고 오를레앙 포위를 시도한 후, 카탈라우니아 평원 전투에서 아에티우스의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아틸라는 헝가리 대평원으로 후퇴했다. 452년 봄, 아틸라는 다시 이탈리아를 급습하여 아퀼레이아를 함락시키고 메디오라눔(밀라노) 등 북부 이탈리아를 약탈했다.

이러한 약탈에도 불구하고 아틸라는 동·서로마 제국의 행동으로 인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금 부족에 시달렸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군대가 고갈되었다. 또한 아틸라의 고향은 동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아 훈족이 패배하기도 했다. 결국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고향으로 후퇴했다. 그는 다음 해 봄에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마르키아누스와 아스파르는 그의 위협을 무시했다. 그들은 아틸라가 이전에 맺었던 조약들을 어겼던 것을 근거로, 금으로도 그를 영구적으로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아틸라


453년, 아틸라는 결혼식 축하 후 출혈이나 알코올성 질식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사망 후, 훈족 연맹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동로마 제국이 야만인들을 서로 이용하는 정책을 재개할 수 있게 했다. 게피드족 왕 아르다릭은 연합을 결성하여 455년 네다오 전투에서 아틸라의 장남인 엘락을 물리쳐 그를 죽였다. 이 전투 후 훈족 연맹은 이전과 같은 결속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훈족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자 마르키아누스는 판노니아 프리마와 발레리아에 정착한 오스트고트족을 foederatila로 받아들였다. 마르키아누스의 후계자들은 여러 민족에게 foederatila의 지위를 부여하고 땅을 할양했다. 이러한 종속 민족 네트워크는 동로마 제국에 유익했다. 부족들은 서로의 권력을 견제했고, 동로마 제국은 선물, 보조금, 조약을 통해 그들을 제국의 적에 대항하여 봉사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아틸라 사후 훈족 제국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마르키아누스는 비교적 평화로운 통치를 누렸다.

451년 유럽의 세력 분포. 아틸라가 지배하는 훈족의 세력권은 굵은 흰색 선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동·서 로마 제국의 세력권은 보라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3. 2. 칼케돈 공의회

449년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예수가 하나의 신성한 통합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miaphysitism|미아피시티즘la이라고 불리는 견해가 선포되었다. 그러나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이 견해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부인하기 위해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소집했다. 풀케리아는 이 결정에 영향을 미쳤거나, 마르키아누스와의 결혼 조건으로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공의회는 처음에는 니케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더 가까운 칼케돈으로 장소를 옮겼다. 칼케돈 공의회는 451년 10월에 열렸으며, 약 500명의 주교가 참석했는데, 대부분 동로마 주교였고, 두 명의 아프리카 주교와 레오 1세가 파견한 두 명의 교황 특사도 참석했다. 이 공의회는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규탄하고 예수는 신성(physis|피시스la)과 인성(hypostasis|히포스타시스la)을 가지고 있으며, 한 인격 안에서 "혼돈, 변화, 분열 또는 분리 없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는 데 동의했다.

이 공의회는 또한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를 주재했던 콥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 1세를 규탄하고, 에데사의 이바스와 테오도레토스에 대한 규탄을 취소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중요성을 되풀이하여 로마 주교좌 다음으로 확고히 제2위에 두었고, 교황 레오 1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제국에서 주교를 임명할 권리를 부여했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들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승격에 반대했다. 이 공의회는 451년 11월에 끝났고, 그 후 마르키아누스는 공의회의 결과를 확인하는 수많은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는 공의회의 결과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공의회의 반(反) 미아피시티즘 결의안은 시리아와 이집트 동부 지방에서 시민 불안을 크게 증가시켰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서 상당한 유혈 사태 후 군사력으로 여러 차례의 폭력적인 반란이 진압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프로테리우스의 임명을 보장하기 위해 군대가 배치되었다. 알렉산더 바실리예프에 따르면, 이러한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미아피시티즘파와 네스토리우스파 인구 사이에서 국교에 대한 불만이 남아 있었고, 동부 지방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필요성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공의회와 그 이후의 칙령의 또 다른 결과는 많은 기독교인, 특히 많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 사산 왕조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칼케돈 교리를 받아들이는 교회로부터 미아피시티즘의 분리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치하에서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칼케돈 공의회 (바실리 수리코프 작, 1876년)

3. 3. 서로마 제국과의 관계

마르키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의 일에 가능한 한 개입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유지했다. 455년 반달족로마를 약탈했을 때,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반달족과의 약혼 조약을 깨자, 마르키아누스는 아스파르의 영향 때문인지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사절을 보내 반달족에게 황태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그녀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들인 플라키디아와 에우도키아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 마르키아누스는 사로잡힌 사람들을 돌려받기 위해 여러 차례 외교적 시도를 했고, 죽기 직전에 반달족 영토 침략을 계획하기도 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이후 어떤 서로마 황제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사절을 보내 인정을 요청했을 때 거절했고, 막시무스의 뒤를 이은 아비투스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가 아비투스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로마 역사가 히다티우스는 455년에 아비투스가 "권력의 일치를 위해" 마르키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냈고, "마르키아누스와 아비투스는 조화롭게 로마의 권력을 사용한다"고 언급했다. '조화'(원래 라틴어로는 concordiala)의 정확한 사용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키아누스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어떠한 협의도 없이 선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통치 이전보다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분리가 더욱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발렌티니아누스는 나중에 마르키아누스를 동로마 황제로 인정했지만, 이 인정 시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리는 발렌티니아누스가 452년 3월에 마르키아누스를 인정했다고 주장하지만, 역사가 티모시 E. 그레고리는 마르키아누스가 451년 3월 30일에 발렌티니아누스에게 인정받았다고 주장한다. 마르키아누스의 즉위는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간 분리의 또 다른 단계를 의미했다.

3. 4. 내치

마르키아누스는 전임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훈족아틸라에게 바치기로 한 연례공물을 폐지했다. 당시 훈족은 서로마 제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에게 위협을 가하지 못했고, 이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동로마 제국은 국고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일관하여 서로마가 아틸라의 침공을 받을 때에도 돕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단 논쟁에 휩싸였다. 그리스도 단성론을 둘러싸고 성부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자, 451년 10월 칼케돈 공의회를 열어 논란을 종식시키려 하였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단성론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시리아이집트주교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을 계속 주장하여 향후 비잔티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마르키아누스 통치 초기에 동로마 제국의 국고는 테오도시우스가 아틸라에게 바친 막대한 공물로 인해 거의 파산 직전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지출을 줄여 파산 위기를 극복했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국가에 대한 모든 채무를 탕감하는 조치를 선포했다. 그는 20개의 법률을 포함하는 칙령을 발표해 법 개혁을 제시했는데, 이 중 많은 법률은 테오도시우스 치세 동안 존재했던 부패와 직권 남용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그중 5개는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마르키아누스는 재판관직(공공 행사 및 공공 사업 담당관)은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상원의원에게만 부여될 수 있도록 명령했고, 행정직 판매 관행을 억제하려고 시도했으며, 집정관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수도교 유지를 책임지도록 명령했다. 그는 상원의원 재산에 대한 세금인 follisla(폴리스)를 폐지했는데, 이 세금은 연간 약 3.18kg의 금에 달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집정관과 재판관의 재정적 책임, 즉 각각 공공 행사 및 경기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책임을 없앴다. 그는 또한 vir illustrisla(고위 인사)만이 그러한 직책을 가질 수 있도록 명령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정한 결혼 법률을 부분적으로 폐지했는데, 이 법률은 상원 계급의 남성이 노예, 해방녀, 여배우 또는 사회적 지위가 없는 여성(humilisla)과 결혼할 수 없도록 규정하여 상원 계급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마르키아누스는 사회적 지위나 부유함에 관계없이 품성이 좋은 여성은 제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법률을 조정했다. 마르키아누스는 사망할 때까지 지출 삭감과 대규모 전쟁 회피라는 현명한 정책으로 동로마 제국 국고에 약 45359.20kg의 금을 남겼다.

451년에 마르키아누스는 이교 의식을 거행하는 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형에 처해지며, 이전에 폐쇄되었던 이교 사원은 다시 열 수 없다고 명령했다. 이 법의 시행을 확보하기 위해 그는 법을 집행하지 않는 판사, 주지사 또는 관리에게 약 22.68kg의 금을 벌금으로 부과했다.

동로마 제국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아스파르와 그의 아들 알다브리우스가 묘사된 은으로 만든 플레이트(434년경 제작)


마르키아누스는 황제가 되었을 때 플라비우스 제노, 풀케리아, 아스파르의 영향을 받았다. 플라비우스 제노는 마르키아누스 즉위 직후인 451년 말경에 사망했고, 풀케리아는 453년 7월에 사망하여, 아스파르가 동로마 제국의 궁정에서 유일한 주요 영향력자로 남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알다브리우스가 magister militum per Orientemla로 승진하면서 이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아스파르와 알다브리우스가 마르키아누스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지배 엘리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매우 신중했을 것이다. 아스파르의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엘리트들은 여전히 게르만에 대한 반감을 상당 부분 유지했다. 마르키아누스의 주요 고문은 풀케리아, magister officiorumla(궁정 관리 장관)인 에우페미우스, 법무관인 팔라디우스,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나톨리우스였다. 453년에 마르키아누스는 이전 결혼에서 낳은 딸인 마르시아 에우페미아를 귀족이자 재능 있는 장군인 안테미우스와 결혼시켰다.

마르키아누스는 두 개의 서커스 팀 중 하나였던 청색당을 후원했다. 두 팀은 그의 시대가 되면 스포츠 팀이라기보다 정당에 가까워져 제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서로 권력을 다투었다. 녹색당이 그의 후원에 분노로 반응하자, 마르키아누스는 그들을 질책하고 3년 동안 공직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 마르키아누스가 청색당을 후원한 것은 한때 권력이 있었던 크리사피우스가 녹색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사망과 유산

마르키아누스는 457년 1월 27일, 괴저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65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낭송자 테오도루스와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궁전에서 헤브도몬까지의 긴 종교 행렬을 마친 후 사망하였다. 이때 마르키아누스는 통풍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 심한 발의 염증으로 거의 걸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로 걸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교회에 아내 풀케리아와 나란히 매장되었다. 10세기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재위: 913년 - 959년)는 저서 『의례서』에서 마르키아누스의 시신이 반암 석관에 안치되었다고 설명한다. 마르키아누스는 700만 솔리두스의 금화를 동로마 제국 국고에 남겼는데,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 치하에서 훈족에게 지불된 막대한 보조금과 훈족과의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붕괴를 고려하면 놀라운 업적이었다.

마르키아누스의 죽음을 묘사한 14세기 『마나세스 연대기』 삽화. 오른쪽에는 후계자인 레오 1세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마르키아누스에게는 의붓아들 안테미우스가 있었지만, 안테미우스는 마르키아누스가 풀케리아와의 결혼을 통해 얻은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연관성이 전혀 없었고,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스파르가 다시 황제를 선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스파르는 프라이센탈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외를 근거지로 하는 두 개의 야전군 중 하나의 부대를 지휘하던 50세의 장교 레오 1세(재위: 457년 - 474년)를 선택하였다. 후대의 자료에 따르면, 동로마 제국 원로원은 아스파르 자신을 선출하도록 제안했지만, 아스파르는 "통치에 있어서 관습이 나를 통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수수께끼 같은 발언과 함께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 발언은 종종 아스파르가 아리우스파 또는 알란족 혈통이라는 사실에 대한 암시로 해석된다.

안테미우스는 나중에 레오 1세에 의해 서로마 황제로 서쪽으로 보내졌다. 레오 1세는 465년 리비우스 세베루스(재위: 461년 - 465년)가 사망한 이후 공석이었던 서방의 황위를 채우기 위해 467년에 안테미우스를 서로마 황제로 지명했다. 안테미우스 파견 시에는 달마티아의 마기스터 밀리툼인 마르켈리누스를 사령관으로 하는 군대도 함께 파견했다. 안테미우스는 로마 교외에서 467년 4월 12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제국 및 비잔티움 자료에서 호의적으로 평가되어, 종종 콘스탄티누스 1세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비견되곤 했다. 많은 후대 비잔티움 학자들, 예를 들어 테오파네스 수도사는 마르키아누스의 통치를 황금기로 여겼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을 정치적, 재정적으로 안정시켰고, 미래 황제들이 따를 정통적인 종교적 기조를 확립했으며, 수도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했다. 일부 후대 학자들은 그의 성공을 단순히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풀케리아의 도움으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행운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로마에 가장 큰 외부 위협이었던 사산 제국과 훈족이 내부 문제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자연재해나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대 황제 즉위식 때 시민들은 "마르키아누스처럼 통치하라!"고 외쳤다.

고대 석주가 현대 건물과 주차된 차량 앞에 세워져 있는 컬러 사진. 기둥의 상단과 하단에는 조각이 새겨져 있으며, 중앙 부분에는 여러 개의 금속 띠가 일정한 간격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2011년 마르키아누스 기둥


콘스탄티노플 총독 타티아누스는 450년에서 452년 사이에 마르키아누스를 기리는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이스탄불의 메세 북쪽 지류 근처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원래 기둥 꼭대기에 있던 마르키아누스의 조각상은 사라졌다. 마르키아누스는 아르카디우스 광장에도 조각상이 있었는데, 이 광장에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여러 후계자들의 조각상도 있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의 크리소트리클리노스 건설에 후원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파트리아la는 마르키아누스가 건설했다고 명시하지만, 10세기 백과사전 수다la유스티누스 2세 황제가 건설했다고 명시하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비잔티움 역사가 요안네스 조나라스는 유스티누스 2세가 실제로 더 오래된 건물을 재건축했다고 말하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헵타콘크 홀로 간주한다.

5. 평가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제국 및 비잔티움 제국의 자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종종 콘스탄티누스 1세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비견되기도 한다. 테오파네스 수도사와 같은 많은 후대 비잔티움 학자들은 마르키아누스의 통치를 황금기로 여겼다.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을 정치적, 재정적으로 안정시켰고, 미래 황제들이 따를 정통적인 종교적 기조를 확립했으며, 수도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했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대 황제 즉위식 때 시민들은 "마르키아누스처럼 통치하라!"고 외쳤다.

일부 후대 학자들은 그의 성공이 단순히 그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풀케리아의 도움으로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행운을 누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 로마에 가장 큰 외부 위협이었던 사산 제국훈족이 내부 문제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는 자연재해나 전염병도 발생하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를 기리는 기둥은 450년에서 452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 총독 타티아누스에 의해 세워졌다. 이 기둥은 이스탄불의 메세 북쪽 지류 근처에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원래 기둥 꼭대기에 있던 마르키아누스의 조각상은 사라졌다. 마르키아누스는 아르카디우스 광장에도 조각상이 있었는데, 이 광장에는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여러 후계자들의 조각상도 있었다.

바를레타의 거상이라고 알려진 로마 황제의 모습을 한 동상. 일부 학자는 마르키아누스의 동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르키아누스는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어떠한 협의도 거치지 않고 황제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마르키아누스의 통치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분리가 더욱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마르키아누스의 즉위를 승인했지만, 451년 또는 452년 동로마 제국의 집정관은 승인하지 않았다.

마르키아누스는 가능한 한 서로마 제국의 여러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피했다. 455년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하고, 반달족과의 혼인 합의를 파기함으로써 반달족이 로마를 약탈했지만, 이때 마르키아누스는 아스파르의 영향도 있었던 탓인지 무력으로 나서지는 않고, 반달족에게 황태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에우독시아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의 사이에 낳은 딸인 플라키디아와 에우도키아의 송환을 요구하는 사절만을 파견했을 뿐이었다.

마르키아누스는 젊었을 때 반달족에게 붙잡혔는데, 다른 포로들이 땡볕에 고생하고 있는 가운데 한 마리 독수리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이야기에서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마르키아누스가 후에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석방의 대가로 황제가 된 후에는 반달족을 공격하지 않도록 마르키아누스에게 맹세하게 했다.

마르키아누스는 반달족에 대해 에우독시아 등의 포로를 송환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죽기 직전 시기에 방침을 바꾸어 반달 왕국에 대한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테오도루스 레크토르는 마르키아누스의 갑작스러운 방침 전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한편 에우아그리우스 스콜라스티쿠스는, 반달족이 마르키아누스에게 에우독시아, 플라키디아, 그리고 에우도키아를 석방한 것은 마르키아누스가 전쟁을 걸겠다고 위협한 후의 일이며, 456년 말이나 457년 초의 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르키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이후의 서방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서방 황제가 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승인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을 때에도 이를 거부했으며, 막시무스의 뒤를 이은 아비투스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가 제프리 네이선에 따르면, 칼케돈 공의회에 참석한 서방의 대표가 단 두 명이었다는 사실은, 동서 로마 제국의 분리가 진행되고, 서로마 제국이 자국의 정치적, 종교적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이 공의회에서 성립된 동방 전역의 교회의 감독권을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 부여한다는 교회법은, 동서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대립점이 되어, 후의 동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