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슐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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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슐 문화는 셸기 다음 시기의 전기 구석기 시대 문화로, 프랑스 생타슐을 대표 유적으로 한다. 제2간빙기에서 제3빙기로의 전환기에 나타났으며, 매머드, 코뿔소 등 한랭계 동물이 출현하고 동굴을 주거로 사용했다. 정교한 형태의 석기들이 제작되었으며, 팔레스타인 타분 동굴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아슐리안 석기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어 아시아, 유럽으로 확산되었으며, 한반도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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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슐 문화 | |
|---|---|
| 개요 | |
| 이름 | 아슐 문화 |
| 원어 표기 | Acheulean culture |
| 지도 정보 | |
![]() | |
| 문화적 맥락 | |
| 지역 |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
| 시대 | 구석기 시대 |
| 연대 | 176만 년 전 – 13만 년 전 |
| 표지 유적 | 아미앵 생아슐 |
| 이전 문화 | 올도완 |
| 이후 문화 | 무스티에, 클랙턴, 미코퀴, 아테르, 소안, 상고, 아슐-야브루드 복합 문화, 포레스미스 산업 |
| 기타 정보 | |
| 관련 인류 | 호모 에렉투스 |
| 중요 유적지 | 생아슐 (아미앵) 테라 아마타 |
2. 연구사
아슐 문화는 셸기 다음의 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기로, 프랑스의 생타슐을 표준 유적으로 한다. 제2간빙기에서 제3빙기로 전환되는 시기로, 매머드, 코뿔소와 같은 한랭계 동물이 출현하였다. 동굴이 주거로 사용되고, 화덕이 만들어졌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삼각형, 타원형의 악부(握斧, 손도끼)·첨두기(尖頭器)·스크레이퍼·송곳이 만들어졌다.[3] 팔레스타인의 카르멜산 타분 동굴에서 8천 개 이상의 악부가 출토되었으며, 인류는 시난트로푸스형의 구인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슐리안 문화는 1859년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솜주의 주도인 아미앵의 교외 지역인 생타슐에서 처음 발견되었다.[3]
2. 1. 최초 발견과 인정
존 프레어는 아슐리안 손도끼의 매우 오래된 연대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1797년 영국 런던의 왕립 학회에 서퍽주 호크스니에서 발견한 두 개의 손도끼 표본을 보냈다. 그는 멸종된 동물의 뼈와 함께 선사 시대 호수 퇴적물에서 이것들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매우 오래된 시대, 심지어 현재의 세계를 넘어서는 시대"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4]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다윈주의 이전의 인류 진화관을 믿던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이후 자크 부셰 드 크레브쿠르 드 퍼르는 1836년부터 1846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아브빌 근처 솜강의 자갈 강변 테라스에서 손도끼와 화석화된 동물 뼈를 추가로 수집했다. 그의 발견에 고대성을 부여하는 그의 이론은 동료들에게 무시당했는데, 마르셀 제롬 리골로가 생타슐 근처에서 더 많은 도구들을 발견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러했다. 지질학자 조셉 프레스위치가 아브빌과 생타슐을 방문한 후에야 도구들의 연대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5]
1872년, 루이 로랑 가브리엘 드 모르티예는 특징적인 손도끼 도구들을 '생타슐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 문화는 1925년에 아슐리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슐리안 문화의 대표적인 발견지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솜주의 주도인 아미앵의 교외 지역인 생타슐이며, 이곳에서는 1859년에 유물들이 발견되었다.[3]
2. 2. 명칭의 유래
아슐 문화의 대표적인 발견지는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 솜주의 주도인 아미앵의 교외 지역인 생타슐이다. 이곳에서는 1859년에 유물들이 발견되었다.[3]존 프레어는 아슐리안 손도끼의 매우 오래된 연대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1797년에 영국 런던의 왕립 학회에 서퍽주 호크스니에서 발견한 두 개의 손도끼 표본을 보냈다. 그는 멸종된 동물의 뼈와 함께 선사 시대 호수 퇴적물에서 이것들을 발견하고, 이것들이 "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매우 오래된 시대, 심지어 현재의 세계를 넘어서는 시대"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4]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다.
이후 자크 부셰 드 크레브쿠르 드 퍼르는 1836년부터 1846년 사이에 프랑스 북부 아브빌 근처 솜강의 자갈 강변 테라스에서 손도끼와 화석화된 동물 뼈를 추가로 수집했다. 그의 발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던 그의 이론은 동료들에 의해 무시되었다. 마르셀 제롬 리골로가 생타슐 근처에서 더 많은 도구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지질학자 조셉 프레스위치가 아브빌과 생타슐을 방문한 후에야 도구들의 연대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5]
1872년, 루이 로랑 가브리엘 드 모르티예는 특징적인 손도끼 도구들을 ''생타슐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 문화는 1925년에 아슐리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3. 연대 측정
아슐리안의 연대 측정은 크게 상대 연대 측정과 절대 연대 측정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상대 연대 측정은 아슐리안 도구가 이전의 더 조잡한 도구 제작 방법을 따랐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그러나 초기 선사 시대 석기 산업에는 연대적 중복이 많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슐리안 도구 사용 집단이 클락토니안과 같은 덜 정교한 산업이나, 이후의 더 정교한 무스테리안과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증거도 있다.
절대 연대 측정에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 포타슘-아르곤 연대 측정법, 고지자기층서학 등 다양한 지질학적 기법이 사용된다.
3. 1. 지질학적 연대 측정
초기 석기 제작 연구에서 연대를 제시하고 연대순을 정리하는 것은 종종 방사성 연대 측정법과 같이, 자주 사용되는 포타슘-아르곤 연대 측정법 및 고지자기층서학과 같은 하나 이상의 지질학적 기법을 통해 이루어진다.[6] 에티오피아 콘소 지층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손도끼는 화산재를 포함하는 퇴적층의 방사성 연대 측정을 통해 약 1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남아시아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도구 또한 15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7] 그러나 2003년 케냐 서투르카나 지역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유물은[8] 고지자기층서학을 통해 약 176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고,[9] 2023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유물은 19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보고가 있었다.[2]퇴적층의 지질학적 연대 측정에 따르면, 아슐리안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150만 년 전에서 약 80만 년 전 사이에 아시아, 중동 및 유럽 지역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11][12] 각 지역에서 이 연대는 상당히 정밀하게 측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아슐리안 기술이 약 50만 년 전에야 대륙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발견된 손도끼는 90만 년 전 이상의 것으로 밝혀졌다.[12]
상대 연대 측정 기법은 아슐리안 도구가 이전의 더 조잡한 도구 제작 방법을 따랐음을 시사하지만, 초기 선사 시대 석기 산업에는 상당한 연대적 중복이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슐리안 도구 사용 집단이 클락토니안과 같은 다른 덜 정교한 산업과 동시대에 존재했고, 그 후에는 더 정교한 무스테리안과도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따라서 아슐리안을 명확하게 정의된 시대 또는 명확한 순서의 일부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히 초기 선사 시대에 번성한 하나의 도구 제작 기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슐리안의 지역적으로 세분화된 종말 시기는 여러 대륙 지역에서 중석기 기술이 확산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아프리카와 근동에서는 175,000~166,000년 전, 유럽에서는 141,000~130,000년 전, 아시아에서는 57,000~53,000년 전에 걸쳐 종결되었음을 보여준다.[13][14]
3. 2. 아슐리안기의 기원과 확산
셸기 다음의 전기 구석기시대 문화기로, 프랑스의 생타슐을 표준 유적으로 한다. 제2간빙기에서 제3빙하기로의 전환 시기로, 온난계 동물에서 매머드, 코뿔소와 같은 한랭계 동물이 출현하였다. 동굴이 주거로 사용되고, 화덕이 만들어졌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삼각형, 타원형의 악부(握斧)·첨두기(尖頭器)·스크레이퍼·송곳이 만들어졌다.[6] 팔레스티나의 카르멜산 타분 동굴에서 8천 개 이상의 악부가 출토되었다. 인류는 시난트로푸스형의 구인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초기 석기 제작 연구에서 연대를 제시하고 연대순을 정리하는 것은 종종 방사성 연대 측정법과 같이, 자주 사용되는 포타슘-아르곤 연대 측정법 및 고지자기층서학과 같은 하나 이상의 지질학적 기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에티오피아 콘소 지층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손도끼는 화산재를 포함하는 퇴적층의 방사성 연대 측정을 통해 약 1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 남아시아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도구 또한 15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7] 그러나 2003년 케냐 서투르카나 지역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유물은[8] 고지자기층서학을 통해 약 176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고,[9] 2023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유물은 19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보고가 있었다.[2]
퇴적층의 지질학적 연대 측정에 따르면, 아슐리안은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150만 년 전에서 약 80만 년 전 사이에 아시아, 중동 및 유럽 지역으로 퍼져 나간 것으로 보인다.[11][12] 각 지역에서 이 연대는 상당히 정밀하게 측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아슐리안 기술이 약 50만 년 전에야 대륙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스페인에서 발견된 손도끼는 90만 년 전 이상의 것으로 밝혀졌다.[12]
아슐리안 도구를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약 180만 년 전에 처음 등장한 호모 에르가스터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호미닌 종, 예를 들어 호모 하빌리스도 이 시기에 동아프리카에 살았기 때문에 호모 에르가스터가 초기 아슐리안 도구의 유일한 제작자였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10]
상대 연대 측정 기법은 아슐리안 도구가 이전의 더 조잡한 도구 제작 방법을 따랐음을 시사하지만, 초기 선사 시대 석기 산업에는 상당한 연대적 중복이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아슐리안 도구 사용 집단이 클락토니안과 같은 다른 덜 정교한 산업과 동시대에 존재했고, 그 후에는 더 정교한 무스테리안과도 동시대에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따라서 아슐리안을 명확하게 정의된 시대 또는 명확한 순서의 일부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특히 초기 선사 시대에 번성한 하나의 도구 제작 기법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초기의 아슐리안 집합체에는 수많은 올도완 스타일의 석편과 핵 형태가 포함되어 있으며, 아슐리안이 이보다 오래된 산업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산업은 발달된 올도완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의 확실히 올도완과 아슐리안 사이의 과도기적 단계이다.
아슐리안의 지역적으로 세분화된 종말 시기는 여러 대륙 지역에서 중석기 기술이 확산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아프리카와 근동에서는 175,000~166,000년 전, 유럽에서는 141,000~130,000년 전, 아시아에서는 57,000~53,000년 전에 걸쳐 종결되었음을 보여준다.[13][14]
3. 3. 아슐리안기의 종말
아슐리안의 지역별 종말 시기는 여러 대륙에서 중석기 기술이 확산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프리카와 근동에서는 175,000~166,000년 전, 유럽에서는 141,000~130,000년 전, 아시아에서는 57,000~53,000년 전에 걸쳐 종결되었음을 보여준다.[13][14]4. 아슐리안 석기
아슐리안 석기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석기 제작 기술로, 셸기 다음 시기에 나타났다. 프랑스의 생타슐 유적을 표준으로 하며, 무스테리안 문화의 모드 3 기술보다는 덜 정교하지만, 올도완 문화의 모드 1 도구보다는 발전된 형태인 모드 2로 분류된다.
선사시대 석기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때, 아슐리안 유물은 모드 2로 분류된다. 이는 클락토니아 또는 올도완/아브빌 문화의 (일반적으로 초기의) 모드 1 도구보다 발전된 것이지만, 무스테리안 문화에서 보이는 (일반적으로 후기의) 모드 3 중기 구석기 기술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4. 1. 제작 단계
아슐 문화의 제작 단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모드 1 방식으로, 적절한 돌에 망치돌을 쳐서 거친 돌조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때 떨어져 나온 조각은 자연스러운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가지며, 필요에 따라 추가 가공을 통해 더 날카롭게 만들 수 있었다.두 번째는 모드 2 방식으로, 모드 1의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뼈, 뿔, 나무 등을 망치로 사용하여 돌도구의 모양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특히, 핵에서 나온 조각보다 핵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양면을 대칭적으로 가공하여 최종 도구 제작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모드 3 기술은 아슐 문화 말기에 등장하여 르발루아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무스테리안 문화에서 주로 활용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60만 년을 기준으로 도구의 두께와 대칭성에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전 시기의 도구는 두껍고 대칭성이 덜한 반면, 이후 시기의 도구는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15]
아슐 문화의 찍개는 양면에서 대칭적으로 가공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찍개는 큰 조각 자체나 준비된 핵에서 제작될 수 있는 양면 가공 도구였다.[16]
아슐 문화층에서 발견되는 도구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종류 | 뾰족한 것, 심장형, 계란형, 피크론, 부쿠페 찍개, 찍는 도구, 손질된 조각, 긁개, 부채꼴 자르는 도구 |
|---|
사용된 재료는 지역에 따라 달랐는데, 규암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서유럽에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암, 현무암과 같은 퇴적암과 화성암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칼세도니, 규암, 안산암, 사암, 처트, 셰일 등도 사용되었다. 석회암과 같은 비교적 무른 암석도 사용되었다. 도구 제작자들은 원료 근처에서 찍개를 만들었는데, 이는 아슐리안 기술이 개별 집단 간에 전수되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도구들은 석핵에서 떼어낸 큰 조각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조각 도구와 아슐리안 도구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폐기 조각들은 도구 제작자들이 여러 도구를 만들기 위해 단계적 순서를 따랐음을 보여준다.
도구 제작 과정은 먼저 단단한 망치돌을 사용하여 큰 조각을 제거하고, 남은 석핵의 둘레를 따라 작업하면서 작은 조각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후 뼈나 뿔과 같은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여 도구를 더 얇게 만들고, 최종적으로 사용 가능한 절삭날에 모양을 부여했다. 일부 아슐리안 도구는 트랑셰 박편을 제거하여 날카롭게 만들기도 했다.
4. 2. 주요 특징
아슐 문화는 셸기 다음의 전기 구석기 시대 문화기로, 프랑스의 생타슐을 표준 유적으로 한다. 제2간빙기에서 제3빙하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매머드나 코뿔소 같은 한랭계 동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동굴을 주거지로 사용하고, 화덕을 만들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삼각형, 타원형의 악부(握斧, 손도끼)·첨두기(尖頭器, 찌르개)·스크레이퍼(긁개)·송곳 등이 제작되었다.[16]아슐 문화의 찍개는 돌을 양면에서 대칭적으로 가공했다는 중요한 혁신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찍개는 큰 조각 자체나 미리 준비된 핵에서 제작될 수 있는 양면 가공 도구였다. 아슐 문화층에서는 뾰족한 것, 심장형, 계란형, 피크론, 부쿠페 찍개(최종 도구의 모양을 나타냄), 찍는 도구, 손질된 조각, 긁개, 부채꼴 자르는 도구 등 다양한 유형의 도구가 발견된다. 사용된 재료는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의 종류에 따라 달랐는데, 규암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지만 서유럽에 집중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이암, 현무암과 같은 퇴적암과 화성암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칼세도니, 규암, 안산암, 사암, 처트, 셰일 등이 사용되었으며, 석회암과 같이 비교적 무른 암석도 사용되었다. 도구 제작자들은 원료 근처에서 찍개를 만들었으며, 이는 아슐리안 기술이 개별 집단 간에 전수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부 작은 도구는 석핵에서 떼어낸 큰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조각 도구와 아슐리안 도구 제작 과정에서 생산된 독특한 폐기 조각은, 도구 제작자가 한 번에 여러 도구를 만들기 위해 명확한 단계적 순서를 따르고 한두 단계 앞을 내다보는 더욱 신중한 기술을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도구 제작은 먼저 단단한 망치돌을 사용하여 큰 조각을 제거하여 돌에서 도구의 대략적인 모양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큰 조각은 다른 도구를 만드는 데 재사용될 수 있었다. 도구 제작자는 남은 석핵의 둘레를 따라 작업하면서 각 면에서 번갈아 가며 작은 조각을 제거했다. 앞서 조각을 제거하여 생긴 자국은 다음 조각을 제거하기 위한 타격대를 제공했다. 대략적인 모양이 만들어지면, 도구를 더 얇게 만들기 위해 뼈나 뿔과 같은 더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여 추가적인 박편 제거 단계를 거쳤다.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타격대를 더욱 신중하게 준비해야 했는데, 이는 거친 돌을 사용하여 마모시켜 망치가 타격 시 미끄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다음 도구의 사용 가능한 절삭날에 최종 모양을 부여했는데, 이때도 조각을 미세하게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일부 아슐리안 도구는 트랑셰 박편을 제거하여 날카롭게 했다. 이것은 찍개의 측면 가장자리에서 의도된 절단 영역 가까이에서 떼어내어, 도끼날과 평행하게 뻗는 조각을 제거하여 깔끔하고 매우 날카로운 작업 가장자리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러한 독특한 트랑셰 박편은 아슐리안 유적지의 석기 제작 잔해 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3. 용도
로렌 아이즐리(Loren Eiseley)는 아슐리안 석기의 평균 사용 가능 날카로운 가장자리가 20cm로, 올도완(Oldowan) 석기의 평균 5cm보다 훨씬 효율적이라고 계산했다.사용마모 분석(Use-wear analysis) 결과, 아슐리안 석기는 다양한 유형에서 특수화 없이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나무를 찍거나 동물 사체를 자르고, 가죽을 긁고 자르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일부 도구는 뿌리 채취나 동물 해체에 더 적합했을 수 있다.
타원형 손도끼를 사냥용 원반(discus)처럼 던졌다는 이론도 있다. 그러나 멜카 쿤투레(Melka Kunture) (에티오피아(Ethiopia)), 케냐의 올로르게사일리(Olorgesailie), 이시밀라 (탄자니아(Tanzania)), 잠비아(Zambia)의 칼람보 폭포(Kalambo Falls) 등에서는 비실용적으로 크거나 사용 흔적이 없는 수백 개의 손도끼가 발견되어, 기능적 목적 외의 다른 용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근에는 아슐리안 석기가 사회적 유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손도끼 제작 기술은 귀중한 기술이었으며, 정교한 도구는 소유자의 정체성과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는 일부 유물의 과도한 정교함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부 특별한 손도끼는 짝짓기 상대를 찾는 수컷이 자신의 힘과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고 전시했다는 이론도 있다. 이들은 집단 모임에서 암컷을 유인한 후 도끼를 버렸을 것이며, 이는 많은 도끼가 함께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멸종된 유기체 간의 성적 선택을 가정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17]
제한된 손가락 능력으로 돌을 떼어낼 때, 질량 중심이 조각 제거 방향을 결정한다. 물리학 법칙에 따라 조각 생산 후 남은 중심부는 손도끼와 유사한 원형 또는 타원형 패턴을 갖게 된다. 이는 아슐리안 유물의 풍부함, 광범위한 분포, 원천과의 근접성, 일관된 모양, 실제 사용 부족을 설명할 수 있다.[18]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미미 람(Mimi Lam)은 아슐리안 손도끼가 "최초의 상품: 가치 있고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는 시장성 있는 재화 또는 서비스"였다고 주장했다.[19]
5. 아슐리안 석기 사용자
프랑스의 산타 아슐을 표준 유적으로 하는 아슐 문화는 전기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기이다. 이 시기는 제2간빙기에서 제3빙기로 넘어가는 전환기로, 온난한 기후에 살던 동물들 대신 매머드나 코뿔소와 같은 한랭한 기후에 적응한 동물들이 나타났다.
아슐 문화의 사람들은 주로 동굴에서 거주했으며, 화덕을 만들어 사용했다. 이들은 정교하게 제작된 삼각형, 타원형의 손도끼(악부), 첨두기(뾰족끝 석기), 스크레이퍼(긁개), 송곳 등을 사용했다. 팔레스타인의 카르멜산 타분 동굴에서는 8천 개 이상의 손도끼가 출토되기도 했다.[21] 이 시기의 인류는 시난트로푸스형의 구인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 1. 사회와 문화
아슐리안 석기 집합체는 거의 전적으로 아슐리안 양식인 초기 *호모 에르가스터*(때때로 초기 *호모 에렉투스*라고 불림)가 사용했다는 점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나중에, 관련 종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모두의 공통 조상)가 이를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후기 아슐리안 석기는 *H. 에렉투스*에서 유래한 종,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 및 초기 네안데르탈인에 의해서도 여전히 사용되었다.손도끼의 대칭성은 아슐리안 석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미세한 조절과 움직임과 관련된 뇌 부분은 언어를 조절하는 부분과 같은 영역에 있다. 이전 시대의 석기보다 더 다양한 석기 유형과 기능적, 미적으로 즐거운 형태는 아슐리안 석기를 사용한 사람들이 이전 호미닌보다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석기 제작의 공간 능력과 언어 행동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으며, 언어는 인공물 제작과 같은 방식으로 학습되거나 개념화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베렉하트 람의 비너스와 같이 아슐리안 손도끼와 함께 발견된 구석기 시대 초기 유물은 석기 제작자들 사이의 예술적 표현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었다. 독일 빌칭슬레벤의 새겨진 코끼리 정강이뼈와 케냐 캅투린과 남아프리카 공화국 두이네폰테인의 적토 발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초기의 미적 감각의 예로 종종 인용된다. 이러한 인공물의 생성에 대해 제시된 수많은 다른 설명이 있지만, 인간 예술의 증거는 현생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이후 약 5만 년 전까지는 흔하지 않았다.
영국의 박스그로브의 사냥터는 또 다른 유명한 아슐리안 유적지이다. 1970년대까지 이러한 사냥터들은 종종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모이는 물웅덩이에서 아슐리안 석기 사용자들이 사냥감을 죽이고, 사체를 해체하고, 사용했던 석기를 버렸던 곳으로 해석되었다. 동물고고학의 등장으로 고고학 유적지에서 동물 뼈를 연구하는 데 더 큰 중점을 두게 되면서 이러한 견해는 바뀌었다. 이러한 사냥터의 많은 동물들은 다른 포식 동물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당시의 인류는 이미 죽은 동물에서 얻은 고기를 사냥으로 보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 북부 훌라 계곡 남부의 사해 단층을 따라 위치한 브놋 야코브 다리 유적지 발굴 조사는 75만 년 전부터 이 지역에 인간이 거주했던 증거를 밝혀냈다.[21]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지가 이전에 추정되었던 것보다 50만 년 전의 "진보된 인간 행동"의 증거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보고서는 수많은 석기, 동물 뼈 및 식물 유적이 발견된 이 유적지의 아슐리안 지층을 설명한다.[22]
아제르바이잔에 위치한 아지흐 동굴은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된 또 다른 유적지이다. 1968년, 이 동굴의 5번째 지층(소위 아슐리안 지층)에서 새로운 유형의 영장류의 아래턱이 발견되었다. 전문가들은 이 유형을 "아지흐안트로푸스"라고 명명했다.[23][24][25]
석기 자체를 제외하고 아슐리안 석기를 사용한 사람들에 대한 유물 증거는 제한적이다. 동굴 유적지는 거주지로 이용되었지만, 구석기 시대의 수렵 채집인들은 프랑스 니스 근처 라자레 동굴 및 테라 아마타에서 아슐리안 석기와 관련하여 확인된 것과 같은 막집을 건설했을 가능성도 있다. 막집의 존재는 유적지의 큰 바위로 추론되는데, 이 바위는 천막과 같은 구조물의 바닥을 무겁게 하거나 오두막이나 방풍벽의 기초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돌은 자연적으로 퇴적되었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부실한 나무나 동물 가죽 구조물은 거의 고고학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불은 *호모 에르가스터*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아프리카에서 더 추운 유라시아로 이주하는 데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른 시기에 불을 다루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6. 아슐리안 유적의 분포
아슐 문화 석기는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콩고 강 주변의 밀집된 열대 우림 지역은 제외된다. 이 지역은 후대까지 호미닌이 정착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프리카에서 아슐 문화 석기 사용은 북쪽과 동쪽으로 아시아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나톨리아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오늘날의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판노니아 분지와 서지중해 지역, 오늘날의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서독일, 영국 남부와 중부에 이르렀다.
빙하기 때문에 더 북쪽 지역은 훨씬 후까지 인간이 거주하지 않았다. 첸나이(Chennai)의 타밀나두주(Tamil Nadu) 아티람팍캄(Athirampakkam)에서는 아슐 문화 시대가 151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북인도와 유럽보다 앞선 시기이다.[20]
1980년대까지는 동아시아에 도착한 인류가 조상들의 손도끼 기술을 버리고 대신 찍개를 사용했다고 생각되었다. 할람 L. 모비우스는 북인도를 가로지르는 모비우스 선을 그렸으나, 대한민국 충청북도, 몽골, 중국에서 발견된 아슐 문화 석기는 모비우스의 구분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후로 로 라인(Roe Line)으로 알려진 다른 구분이 제안되었다. 이 선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스라엘을 거쳐 인도까지 이어지며, 아슐 문화 석기 제작자가 사용한 두 가지 다른 기술을 구분한다. 로 라인의 북쪽과 동쪽에서는 아슐 문화 손도끼가 큰 석재 결절과 핵에서 직접 만들어졌지만, 남쪽과 서쪽에서는 이러한 결절에서 떼어낸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6. 1. 주요 유적지
아슐 문화의 주요 유적지는 다음과 같다.| 유적지 | 설명 |
|---|---|
| 생타슐 | 프랑스에 위치하며, 아슐 문화의 표준 유적지이다. |
| 카르멜산 타분 동굴 | 팔레스타인에 위치하며, 8천 개 이상의 악부가 출토되었다. |
| 샤오창량 | 중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저우커우뎬 | 중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위안모 현 | 중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쿠비 포라 | 케냐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리차트 구조 | 모리타니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스터크폰테인 |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 보스 분지 | 중국에 위치한 유적지이다. |
아슐 문화의 석기는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콩고 강 주변의 밀집된 열대 우림 지역은 제외된다. 아프리카에서 아슐 문화 석기 사용은 북쪽과 동쪽으로 아시아로 확산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나톨리아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오늘날의 이란과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판노니아 분지와 서지중해 지역, 오늘날의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서독일, 영국 남부와 중부에 이르렀다.
인도 첸나이의 타밀나두주 아티람팍캄에서는 아슐 문화 시대가 151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북인도와 유럽보다 앞선 시기이다.[20]
1980년대까지는 동아시아에 도착한 인류가 조상들의 손도끼 기술을 버리고 대신 찍개를 사용했다고 생각되었다. 할람 L. 모비우스는 북인도를 가로지르는 모비우스 선을 그렸으나, 대한민국 충청북도, 몽골, 중국에서 발견된 아슐 문화 석기는 모비우스의 구분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후로 로 라인(Roe Line)으로 알려진 다른 구분이 제안되었다. 이 선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스라엘을 거쳐 인도까지 이어지며, 아슐 문화 석기 제작자가 사용한 두 가지 다른 기술을 구분한다. 로 라인의 북쪽과 동쪽에서는 아슐 문화 손도끼가 큰 석재 결절과 핵에서 직접 만들어졌지만, 남쪽과 서쪽에서는 이러한 결절에서 떼어낸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6. 2. 한반도의 아슐리안 유적
한반도에서는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연천 전곡리 유적과 공주 석장리 유적 등에서 아슐리안 석기와 유사한 형태의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등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은 유럽이나 아프리카 지역의 전형적인 아슐리안 석기와는 차이가 있어, 본격적인 아슐리안 문화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7. 한국의 관점: 아슐리안기와 한반도
아슐 문화는 셸기 다음의 전기 구석기 시대의 문화기이다. 프랑스의 생타슐을 표준 유적으로 한다.
제2간빙기에서 제3빙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따뜻한 기후에서 살던 동물 대신 매머드, 코뿔소와 같은 추운 기후에서 살던 동물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는 동굴을 주거지로 사용하고, 화덕을 만들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삼각형, 타원형의 악부(握斧, 손도끼)·첨두기(尖頭器, 찌르개)·스크레이퍼(긁개)·송곳이 만들어졌다.
팔레스타인의 카르멜산 타분 동굴에서 8천 개 이상의 손도끼(악부)가 출토되었다. 이 시기 인류는 시난트로푸스형의 구인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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