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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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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동도호부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평양에 설치한 도호부로, 고구려와 백제, 신라까지 통치하려는 의도로 설치되었다. 초대 도호는 설인귀였으며, 고구려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반격으로 한반도에서 축출되었으며, 요동, 신성 등으로 이전하다가 758년경 안사의 난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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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도호부
기본 정보
명칭
한자安東都護府
로마자 표기Andong Dohobu
위치 및 관할
위치요동
관할 지역고구려 유민
역사
설치 시기668년
설치 배경고구려 멸망 후
폐지 시기761년
주요 역할
군사적 역할고구려 유민 통제 및 방어
정치적 역할당나라의 동방 지배
관련 인물
초대 도호설인귀
기타
관련 항목당나라
고구려 부흥운동
계림도독부
안동진무대도독부
패강진

2. 역사

668년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후, 당나라한반도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를 초대 도호로 임명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를 9도독부(都督部) 42주(州) 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옛 백제와 고구려 땅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8]

669년 고구려 백성들은 당나라의 통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당나라는 수만 호의 고구려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주된 가구 수는 자료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는 3만 8천 3백 호, 『자치통감』에는 3만 8천 2백 호, 『구당서』와 『통전』에는 2만 8천 2백 호, 『신당서』에는 3만 호라고 기록되어 있다.[2]

이후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검모잠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사비성을 탈환하여 웅진 도독부를 몰아냈다. 이에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선포했지만,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신라는 676년(문무왕 16년)에 안동도호부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8]

폐위된 보장왕667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책봉되었으나, 말갈과 결탁하여 고구려를 부흥하려다 681년 당나라에 의해 유배되었다.[8]

736년 당나라는 공식적으로 대동강 이남의 한국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인정했다.[7]

2. 1. 설치 배경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후, 당나라한반도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초대 도호로 임명되었고, 고구려 영토를 9도독부(都督部) 42주(州) 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렸다.[8]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통해 옛 백제와 고구려 땅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신라는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였다.[8]

신라는 당나라의 음모에 대비하여 검모잠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사비성을 당나라 군에게서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웅진 도독부를 축출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선언하였으나, 군사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8]

2. 2. 신라와의 갈등

당나라백제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차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내자, 신라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 당나라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검모잠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사비성을 탈환하여 웅진 도독부를 몰아냈다. 이에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선포했지만,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신라는 676년(문무왕 16년)에 안동도호부를 한반도에서 몰아냈다.[8]

2. 3. 안동도호부의 이동과 폐지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평양에 설치되었던 안동도호부는 나당 전쟁으로 인해 신라가 당나라의 행정 지역을 침략하면서 옛 수도였던 평양을 포함한 고구려 유적지의 약 3할을 포기하고, 676년에 요동성으로 옮겨졌다.[8] 이후 677년에는 현재 푸순에 있는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6]

699년에는 안동도호부가 폐지되고 안동도독부가 설치되어, 멸망한 고구려 보장왕의 셋째 아들 고덕무가 안동도독에 임명되기도 하였다.[8] 705년경 다시 안동도호부로 복구되었고, 714년에는 평주(현재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루룽현)로 옮겨졌다.[7] 736년 당나라는 공식적으로 대동강 이남의 한국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인정했다.[7] 743년에는 요서군의 옛 성(아마 영주)으로 옮겨졌다.[7]

안동도호부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7]

2. 4. 고구려 부흥 운동

신라당나라의 음모에 대비하여 검모잠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1] 670년부터 675년까지,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와 연합하여 안동도호부 내외의 당군을 공격했다. 신라의 지원을 받은 고연무와 검모잠 등의 고구려 장수들은 오골, 개도량, 패서 등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여 옛 고구려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4] 670년 설오유와 함께 요동의 당군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674년까지 잠시 요동을 점령한 것은 고연무의 대표적인 업적이다.[4]

3. 역대 도호

안동도호부 역대 도호
관명인물임기생몰년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위철(魏哲)668년-669년616년-669년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설인귀(薛仁貴)669년-670년614년-683년
요동주행군총관, 안동도호(遼東州行軍悤管, 安東都護)고간(高侃)670년-676년?
안동도호굴돌전(屈突詮)671년 - 672년?
안동도호굴돌전(屈突詮)680년 - 682년?
유주 도독 겸 안동도호(幽州都督兼安東都護)설눌(薛訥)685년—696년, 698년 - 704년, 706년 - 710년649년—720년
안동도호(安東都護)배현규(裴玄珪)696년—??
유, 영등주 도독 겸 안동도호(幽, 營等州都督兼安東都護)당휴경(唐休璟)704년-705년627년-712년
유주도독 겸 안동도호배회고(裴懐古)712년?
안동도호(安東都護)선사경(單思敬)713년—??
안동도호(安東都護)허흠주(許欽凑)714년—??
안동도호(安東都護)허흠담(許欽澹)714년—??
안동도호(安東都護)설태(薛泰)720년—725년?
평로군절도대사요령안동도호(平盧軍節度大使遙領安東都護)영왕 이교(潁王 李璬)727년—?718년—783년
안동도호(安東都護)장부량(臧怀亮)727년—??
안동도호(安東都護)배민(裴旻)733년—??
안동부대도호부(安東副大都護)가순(賈循)742년—755년?—755년
안동부도호부몽령사(夫蒙霊詧)? - 756년?
안동도호(安東都護)왕현지(王玄志)756년—758년?—758년
평로절도사 겸 안동도호(平盧節度使兼安東都護)후희일(侯希逸)758년—761년?—781년
안동도호(安東都護)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고연(高連)??
안동도호(安東都護)고구려 보장왕의 증손 고진(高震)?—773년701년—773년


4. 부속 관할

안동도호부는 9개의 군(郡)과 42개의 현(縣)(나중에 14개로 줄어듬)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되었고, 100개의 현(縣)을 관할할 계획이었다.[1]

4. 1. 도독부(都督府)

도독부
신성주
요성주
가물주
위락주
사리주
거소주
월희주
거단주
건안주
남소주
개모주
대나주
창암주
마미주
적리주
여산주
연진주
목저주
안시주
제북주
식리주
불열주
배한주


5. 평가

이토 가즈히코(伊藤一彦)는 당나라가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676년 요동성으로, 웅진도독부가 677년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겨가고 신라가 지배하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당나라의 세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에 대해, “유사 이래 한반도, 적어도 북부에는 중국(인)의 지배가 직접 미쳤지만, 이 7세기 후반에 와서야 비로소 그 끝을 고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8]

참조

[1] 웹사이트 舊唐書 http://ctext.org/wik[...] 2017-08-03
[2] 웹사이트 Gaozong of Tang relocates Goguryeo refugees https://db.history.g[...] 2023-11-01
[3] 웹사이트 Goguryeo https://www.worldhis[...] 2023-11-01
[4] 논문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과 부흥운동의 전개 (The Restoration Movement of Koguryo) https://www.kci.go.k[...] 2009
[5]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Rowman & Littlefield
[6] 웹사이트 舊唐書 http://ctext.org/wik[...] 2017-08-03
[7] 웹사이트 舊唐書 http://ctext.org/wik[...] 2017-08-03
[8]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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