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르칸드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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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르칸드 칸국은 1514년 술탄 사이드 칸이 건국한 동투르키스탄의 칸국이다. 차가타이 칸국의 분열 이후 타림 분지 서부를 중심으로 카슈가르, 야르칸드 등을 지배했다. 술탄 사이드 칸은 티무르 왕조의 왕족 바부르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후 수피즘의 영향력이 커졌다. 1678년 준가르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왕족과 호자 세력 간의 권력 다툼이 있었으며, 준가르의 침입과 청나라의 영향으로 1705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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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르칸드 칸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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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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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야르칸드 칸국 |
원어 명칭 | 야르칸드 사이디예 칸리이 (يَارْكَنْد سَئِيدِيَه خَانْلِيغِي) 예르켄 세이디예 칸리키 (يەركەن سەئىدىيە خانلىقى) 葉爾羌汗國 (예얼창 한궈) |
일반 명칭 | 야르칸드 칸국 |
국가 유형 | 제국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언어 | 차카타이어 |
수도 | 야르칸드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칸 | 이름: 술탄 사이드 칸 통치 시작: 1514년 통치 종료: 1533년 (최초) |
칸 | 이름: 술탄 무함마드 무민 칸 통치 시작: 1695년 통치 종료: 1705년 (최후) |
칭호 | 칸 |
역사 | |
건국 | 1514년 |
멸망 | 1705년 |
이전 | 모굴리스탄 |
이후 | 준가르 칸국 |
현재 국가 |
2. 역사
모굴리스탄 칸국(동차카타이 칸국)의 칸 아흐마드 아락의 차남 술탄 사이드는 티무르 왕조의 왕족 바부르의 보호를 받아 카불에서 3년을 보냈다. 모굴리스탄으로 귀환한 술탄 사이드는 동투르키스탄 서부를 지배하는 두글라트 부의 유력자 미르자 아바 바크르를 추방하고 1514년에 칸을 칭했다[13]。당시 모굴리스탄 동부의 투르판에는 사이드의 형 만수르가 세운 위구리스탄 칸국이 존재하여, 양자는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다투었으나, 이내 화해하여 모굴리스탄에 두 개의 정권이 병립했다[13]。사이드 칸은 초원 지대의 확보를 시도했으나, 우즈베크, 카자흐에게 압박당하여, 지배 영역은 카슈가르, 야르칸드를 중심으로 하는 타림 분지 서부의 오아시스 지대로 제한되었다[14]。만수르가 명나라에 대한 성전(지하드)을 행하고 있었을 무렵, 북방의 초원 지대를 상실한 사이드는 라다크, 발루치스탄에 성전을 감행했다[15]。사이드의 뒤를 이은 압두라시드 칸 1세는 강대한 세력을 가진 두글라트 부와 대립하여, 두글라트 부의 유력자 사이드 무함마드 미르자는 처형되었고, 사이드의 치세에 공적을 세운 미르자 하이다르 두글라트는 국외로 망명한다[16]。
사이드의 치세 이후, 많은 마와라안나흐르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수행승)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순례하게 되었으며, 사이드와 압두라시드는 수피에게 귀의했다[17]。압둘 카림의 치세에, 수피 아흐마드 카사니 (마흐두미 아잠)의 아들 호자 이스하크가 카슈가르를 방문했다[18]。압둘 카림의 귀의를 받지 못한 이스하크는 호탄, 아크수, 쿠차를 역방하고, 압둘 카림의 동생 무함마드에게 도통을 수여하고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18]。
1591년에 압둘 카림이 사망한 후, 무함마드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 무함마드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이스하크의 수제자였으며, 이스하크의 유아인 호자 무함마드 야흐야는 카슈가르의 무함마드에게 의지하여, 그를 통해 아버지의 도통을 계승했다[18]。야흐야는 무함마드를 포함한 7명의 칸의 스승이 되어, 칸위 계승 문제에도 개입했다[18]。주요 오아시스 지대를 지배하는 왕족의 칸위를 둘러싼 다툼은 야흐야의 정치 개입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7명의 칸 중에는 그에게 독살당한 자도 있었다[19]。
야흐야의 사촌 무함마드 유수프도 카슈가르를 방문했으나, 야흐야와 대립하여 동쪽의 숙주, 서녕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20]。이스하크의 후손인 이스하키야 (흑산당)과 무함마드 유수프의 아들 히다야트 알라(호자 아파크)의 후손인 아파키야 (백산당)는 야르칸드 칸국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고, 히다야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21]。
1636년에 아부 알-아흐마드 하지 칸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동투르키스탄의 여러 세력과 청나라 사이의 조공 무역이 성립된다[22]。1648년부터 1649년에 걸쳐 감숙에서 발생한 무슬림의 반란 이후, 일시적으로 동투르키스탄과 청나라의 교류는 단절되었으나, 1655년부터 무역이 재개된다[23]。
1678년에 준가르의 갈단 칸에 의해 하미, 투르판이 점령되었고, 1680년에 카슈가르, 야르칸드가 함락된다. 갈단은 이스마일을 폐위하고, 종군했던 투르판의 총독 압두라시드를 칸으로 옹립했다[24]。갈단의 침공 전, 카슈가르에서 추방된 히다야트가 티베트에 가서 달라이 라마 5세의 친서를 가지고 갈단의 곁으로 간 사실이 이스하키야 측에서 편찬된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25][26]。압두라시드 칸 2세가 준가르에 의해 일리로 납치된 후, 형제 무함마드 아민이 칸으로 옹립되지만, 1692년에 무함마드 아민은 아파키야에게 살해된다。
준가르의 지배 하에 놓인 후에도 이스하키야를 지지하는 칸과 아파키야의 항쟁은 계속되었고, 무함마드 아민 다음 칸이 된 무함마드 무민은 1696년・1697년에 아파키야와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또한 1696년에 갈단이 청군에게 패배한 후, 이리의 압두라시드 2세는 청나라에 항복했다[20]。베이징으로 이주한 압두라시드의 후손[27][28][29][30]을 제외하고 모굴리스탄 칸국의 왕통은 끊어졌으며, 모굴리스탄 칸가의 공주를 할머니로 둔 히다야트 알라의 손자 아흐마드가 칸을 칭했다[20]。
2. 1. 건국 배경
14세기 중엽, 차가타이 칸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3] 동쪽의 모굴리스탄 칸국은 15세기 말, 여러 세력으로 다시 분열되었다.[13] 1509년, 타림 분지의 봉신 통치자였던 두글라트 가문이 모굴리스탄에 반기를 들고 독립했다.[3]1514년, 모굴리스탄 칸의 형제였던 술탄 사이드 칸은 두글라트를 정복하고 야르칸드 칸국을 건국했다.[3] 이로써 카슈가르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두글라트 가문의 통치는 종식되었다.[3] 술탄 사이드 칸은 티무르 왕조의 왕족 바부르의 보호를 받으며 카불에서 3년을 보냈고, 모굴리스탄으로 귀환한 후 1514년에 칸을 칭했다.[13] 당시 동부 투르판에는 사이드의 형 만수르가 세운 위구리스탄 칸국이 존재하여 양측은 서로 대립했으나, 곧 화해하여 모굴리스탄에 두 개의 정권이 병립했다.[13]
2. 2. 술탄 사이드 칸의 통치 (1514년 ~ 1533년)
술탄 사이드 칸은 모굴리스탄 칸국의 칸 아흐마드 아락의 차남으로, 티무르 왕조의 왕족 바부르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다.[13] 1514년, 동투르키스탄 서부를 지배하던 두글라트부의 미르자 아바 바크르를 몰아내고 칸을 칭하며 야르칸드 칸국을 건국했다.[13]술탄 사이드 칸의 통치 기간 동안, 무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3] 또한, 1527년부터 1528년 사이에는 발로리스탄을 원정하고,[4][5] 1529년에는 바다흐샨을 침략했으며, 1532년에는 라다크와 카슈미르를 약탈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6] 그러나 1533년, 라다크와 카슈미르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다울라트 베그 올디에서 고산 폐부종으로 사망했다.[6][7][8][9]
술탄 사이드 칸의 시대에는 마와라안나흐르 출신의 이슬람 신비주의 수행승(수피)들이 동투르키스탄을 방문하면서 호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2]
2. 3. 후계자들의 통치와 내분 (1533년 ~ 1678년)
압두라시드 칸(1533년 ~ 1565년)은 술탄 사이드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두글라트 가문을 탄압했다.[10] 그는 키르기스족과 카자흐족에 맞서 모굴리스탄의 지배권을 두고 싸웠으나, 결국 모굴리스탄을 상실했다.[10] 그 후 모굴족은 타림 분지를 소유하는 데 국한되었다.[10]술탄 사이드 칸의 통치 이후, 마와라안나흐르의 수피들이 동투르키스탄을 순례하게 되었고, 사이드와 압두라시드는 수피에 귀의했다.[17] 압둘 카림 통치 시기, 수피 아흐마드 카사니(마흐두미 아잠)의 아들 호자 이스하크가 카슈가르를 방문했다.[18] 압둘 카림의 귀의를 받지 못한 이스하크는 호탄, 아크수, 쿠차를 거쳐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18]
1591년 압둘 카림이 사망한 후, 무함마드가 칸의 자리에 올랐다.[18] 무함마드는 동투르키스탄에서 이스하크의 수제자였으며, 이스하크의 아들 호자 무함마드 야흐야는 카슈가르의 무함마드에게 의지하여 아버지의 도통을 계승했다.[18] 야흐야는 무함마드를 포함한 7명의 칸의 스승이 되어 칸위 계승 문제에 개입했으며, 그에게 독살당한 칸도 있었다.[19]
야흐야의 사촌 무함마드 유수프도 카슈가르를 방문했으나, 야흐야와 대립하여 동쪽의 숙주, 서녕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20] 이스하크의 후손인 이스하키야(흑산당)와 무함마드 유수프의 아들 히다야트 알라(호자 아파크)의 후손인 아파키야(백산당)는 야르칸드 칸국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21] 히다야트 알라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21]
1636년 아부 알-아흐마드 하지 칸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동투르키스탄의 여러 세력과 청나라 사이의 조공 무역이 성립되었다.[22] 1648년부터 1649년 사이 감숙에서 발생한 무슬림 반란으로 인해 교류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1655년부터 무역이 재개되었다.[23]
1678년 준가르의 갈단 칸이 하미, 투르판을 점령하고,[24] 1680년에는 카슈가르, 야르칸드가 함락되었다.[24] 갈단은 이스마일을 폐위하고, 투르판의 총독 압두라시드를 칸으로 옹립했다.[24] 압두라시드 칸 2세가 일리로 납치된 후, 무함마드 아민이 칸으로 옹립되었으나, 1692년 아파키야에게 살해되었다.[20]
준가르의 지배 이후에도 이스하키야를 지지하는 칸과 아파키야의 항쟁은 계속되었고, 무함마드 아민 다음 칸이 된 무함마드 무민은 1696년과 1697년 아파키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20] 1696년 갈단이 청군에게 패배한 후, 일리의 압두라시드 2세는 청나라에 항복했다.[20] 베이징으로 이주한 압두라시드의 후손[27][28][29][30]을 제외하고 모굴리스탄 칸국의 왕통은 단절되었으며, 모굴리스탄 칸가의 공주를 할머니로 둔 히다야트 알라의 손자 아흐마드가 칸을 칭했다.[20]
2. 4. 준가르 칸국의 침입과 멸망 (1678년 ~ 1705년)
1678년, 준가르의 갈단 칸에 의해 하미, 투르판이 점령되었고, 1680년에는 카슈가르, 야르칸드가 함락되었다.[11] 갈단은 이스마일을 폐위하고, 투르판의 총독 압두라시드를 칸으로 옹립했다.[24] 갈단의 침공 전, 카슈가르에서 추방된 히다야트는 티베트에 가서 달라이 라마 5세의 친서를 가지고 갈단에게 간 사실이 이스하키야 측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25][26]준가르의 지배 하에서도 이스하키야(흑산당)와 아파키야(백산당)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압두라시드 칸 2세가 준가르에 의해 일리로 납치된 후, 무함마드 아민이 칸으로 옹립되었으나, 1692년에 아파키야에게 살해되었다.[20] 무함마드 아민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무민은 1696년과 1697년에 아파키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1696년, 갈단이 청나라 군대에 패배한 후, 일리의 압두라시드 2세는 청나라에 항복했다.[20] 베이징으로 이주한 압두라시드의 후손[27][28][29][30]을 제외하고 모굴리스탄 칸국의 왕통은 단절되었으며, 히다야트 알라의 손자 아흐마드가 칸을 칭했다.[20]
3. 사회와 문화
술탄의 칭호를 가진 왕족이 오아시스 지대에 할거한 야르칸드 칸국에서는 종전의 몽골 국가와 같은 통일된 군사 행동 전개가 어려워졌고, 또한 초원 지대를 잃은 유목 모굴의 정주화로 군사력이 저하되었다[12]。모굴의 유력자는 오아시스 농지를 영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칸의 칙령(야를리크)이 존재했다[31]。군사력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유목 집단이 편입되었고, 술탄 사이드의 대부터 야르칸드 칸국에 봉사했던 쿠르그즈는 압둘라의 치세에 들어서자 궁정·지방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32]。17세기 중반에는 카라얀추크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집단이 용병으로 칸을 섬겼다. 무캄에서 알 수 있듯이, 위구르 12무캄과 같은 음악과 문학이 발달했다.
3. 1. 정치
야르칸드 칸국은 술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국가였으나, 각 지역에 할거하는 왕족들과 호자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다. 칸의 권위는 점차 약화되었고, 왕족과 호자들의 권력 투쟁은 칸국의 불안정을 야기했다. 군사력은 유목민 전통을 유지했지만, 점차 정주화되면서 약화되었다.[12] 모굴의 유력자는 오아시스 농지를 영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칸의 칙령(야를리크)이 존재했다.[31] 군사력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유목 집단이 편입되었고, 술탄 사이드의 대부터 야르칸드 칸국에 봉사했던 쿠르그즈는 압둘라의 치세에 들어서자 궁정·지방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32] 17세기 중반에는 카라얀추크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집단이 용병으로 칸을 섬겼다.3. 2. 종교
야르칸드 칸국의 지배층과 백성들은 대부분 이슬람교 수니파에 속했다.[12] 수피즘 교단인 호자들은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술탄의 칭호를 가진 왕족이 오아시스 지대에 할거한 야르칸드 칸국에서는 종전의 몽골 국가와 같은 통일된 군사 행동 전개가 어려워졌고, 초원 지대를 잃은 유목 모굴의 정주화로 군사력이 저하되었다.[12] 모굴의 유력자는 오아시스 농지를 영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칸의 칙령(야를리크)이 존재했다.[31] 군사력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유목 집단이 편입되었고, 술탄 사이드의 대부터 야르칸드 칸국에 봉사했던 쿠르그즈는 압둘라의 치세에 들어서자 궁정·지방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32] 17세기 중반에는 카라얀추크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집단이 용병으로 칸을 섬겼다.3. 3. 문화
야르칸드 칸국은 튀르크-이슬람 문화를 바탕으로 위구르, 페르시아, 몽골 문화 등 다양한 요소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캄에서 알 수 있듯이, 위구르 12무캄과 같은 음악과 문학이 발달했다. 술탄의 칭호를 가진 왕족이 오아시스 지대에 할거하였고, 종전의 몽골 국가와 같은 통일된 군사 행동 전개가 어려워졌다.[12] 초원 지대를 잃은 유목 모굴의 정주화로 군사력이 저하되었으며,[12] 모굴의 유력자는 오아시스 농지를 영유하고 있었고, 그들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는 칸의 칙령(야를리크)이 존재했다.[31] 군사력 저하를 보충하기 위해 새로운 유목 집단이 편입되었고, 술탄 사이드의 대부터 야르칸드 칸국에 봉사했던 쿠르그즈는 압둘라의 치세에 들어서자 궁정·지방의 요직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32] 17세기 중반에는 카라얀추크라고 불리는 오이라트 집단이 용병으로 칸을 섬겼다.4. 역대 칸 목록
야르칸드 칸국의 칸 목록 문서를 참조.
- 술탄 사이드 (재위: 1514년 - 1537년/1538년)
- 압두르 라시드 칸 1세 (재위: 1537년/38년 - 1559년/1560년) - 술탄 사이드의 아들
- 압둘 카림 (재위: 1559년/60년 - 1591년) - 압두르 라시드 1세의 아들
- 무함마드 (재위: 1591년/1592년 - 1609년/1610년) - 압두르 라시드 1세의 아들, 압둘 카림의 동생
- 슈자 웃딘 아흐마드 (재위: 1609년/10년 - 1618년/1619년) - 무함마드의 아들
- 쿠라이쉬 (재위: 1618년/19년?) - 슈자 웃딘 아흐마드의 사촌
- 압두라티프 (아파크) (재위: 1618년/19년? - 1630년/1631년) - 슈자 웃딘 아흐마드의 아들
- 아흐마드 (프라드) (제1차 재위, 재위: 1630년/31년 - 1632년/1633년) - 슈자 웃딘 아흐마드의 손자
- 마흐무드 (쿠르치) (재위: 1632년/33년 - 1635년/1636년) - 아흐마드의 형제
- 아흐마드 (프라드) (제2차 재위, 재위: 1635년/36년 - 1638년/1639년)
- 압둘라 (재위: 1638년/39년 - 1667년/1668년) - 슈자 웃딘 아흐마드와 쿠라이쉬의 사촌
- 요르바르스 (재위: 1667년/68년 - 1669년/1670년) - 압둘라의 아들
- 압두라티프 (재위: 1669년/70년) - 요르바르스의 아들
- 이스마일 (재위: 1670년 - 1680년) - 압둘라의 형제
- 압두르 라시드 칸 2세 (재위: 1680년 - 1682년) - 압둘라와 이스마일의 조카
- 무함마드 아민 (재위: ? - 1692년) - 압두르 라시드 2세의 형제
- 아크바쉬 칸 (무함마드 무민) (재위: 1692년 - 1700년)
- 술탄 아흐마드 (재위: 1700년 - 1700년 이후) - 아크바쉬 칸의 아들
5. 갤러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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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Battered but Resilient After China's Crackdown
https://www.nytimes.[...]
2020-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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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nd Architecture in Ladakh: Cross-cultural Transmissions in the Himalayas and Karako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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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akh – Changing, yet Unchanged
https://www.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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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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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sset, pp. 49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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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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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見、濱田、小松「中央ユーラシアの周縁化」『中央ユーラシア史』、300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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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見、濱田、小松「中央ユーラシアの周縁化」『中央ユーラシア史』、300-301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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濱田「モグール・ウルスから新疆へ 東トルキスタンと明清王朝」『東アジア・東南アジア伝統社会の形成』、10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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グルセ、794,79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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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見、濱田、小松「中央ユーラシアの周縁化」『中央ユーラシア史』、302-30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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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見、濱田、小松「中央ユーラシアの周縁化」『中央ユーラシア史』、30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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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朝の「駐京之回部一等台吉、定世襲二等台吉」
[28]
문서
ハシム(哈什木) 清朝、1760年 ヤルカンドを征服したのにともない[[1760年]]に「入覲」(「都」に上り「皇帝」の拝謁を賜ること)し、「一等台吉」の爵位を授かり、北京に駐する。[[1765年]]、死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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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ブル(阿布勒) ハシムの長氏。1765年、「二等台吉」の爵位を継承。[[1788年]]、「二等台吉」の爵位が降格なく子孫に受け継がれる「世襲罔替」となる。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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包桂芹,1995,p.97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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濱田「モグール・ウルスから新疆へ 東トルキスタンと明清王朝」『東アジア・東南アジア伝統社会の形成』、104-105頁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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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見、濱田、小松「中央ユーラシアの周縁化」『中央ユーラシア史』、302頁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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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ユーラシアを知る事典』、556-55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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