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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포르투갈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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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포르투갈 동맹은 1147년 리스본 공방전에서 영국 십자군이 포르투갈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1373년 영-포르투갈 조약과 1386년 윈저 조약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이 동맹은 1387년 필리파 데 랭커스터와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결혼으로 강화되었으며, 600년 이상 포르투갈 외교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이베리아 연합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나, 1640년 포르투갈 복고 전쟁에서 재개되었다. 이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지속되었고, 2022년 양국은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여 동맹을 강화했다. 영국과 포르투갈은 현재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회원국으로 군사 동맹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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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70년대 조약 - 노이베르크 조약
    노이베르크 조약은 1379년 오스트리아 공국 분할을 위해 알브레히트 3세와 레오폴트 3세가 체결한 조약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을 알브레히트계와 레오폴트계로 분열시켰다.
  • 14세기 군사 동맹 - 올드 동맹
    올드 동맹은 1295년 파리 조약으로 공식화된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동맹으로, 잉글랜드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체결되어 군사적 지원과 문화 교류에 영향을 미쳤으나 종교 개혁 이후 1560년대 에든버러 조약으로 공식 종료되었지만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영국-포르투갈 동맹
개요
명칭영포 동맹
유형군사 동맹
체결1373년, 1386년 5월 9일 (윈저 조약)
장소영국 윈저 성
관련 국가영국, 포르투갈
역사적 배경
배경1294년: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간의 최초의 해상 무역 협정.
1373년: 페르난두 1세와 랭커스터 공 존 간의 상호 지원 조약.
주요 사건백년 전쟁: 잉글랜드 지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포르투갈의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지원.
반도 전쟁: 영국군의 포르투갈 지원.
제1차 세계 대전: 포르투갈의 연합군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아조레스 제도 사용.
존속현존
윈저 조약 (1386년)
주요 내용양국 간의 영원한 우호, 동맹 및 상호 지원.
상대국의 적에 대한 공동 방어.
자유로운 상업 활동 보장.
영향 및 중요성
영향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동맹 중 하나.
양국 간의 긴밀한 정치, 경제, 군사적 협력 관계 유지.
다양한 전쟁 및 분쟁 상황에서 상호 지원.
현대의 관계
관계유럽 연합 및 나토 회원국으로서 협력.
경제, 문화,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활발.
브렉시트 이후 새로운 협력 관계 모색.

2. 역사

영국과 포르투갈의 동맹은 중세 시대에 시작되어 1386년 윈저 조약으로 공식화되었고, 이는 포르투갈 외교의 오랜 기반이 되었다. 이베리아 연합(1580-1640) 시기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동맹은 재확인되고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등 주요 역사적 국면을 거치며 지속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포르투갈은 영국의 중요한 동맹국으로서 프랑스에 맞섰고[15],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16]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식적인 중립을 유지했지만, 영국과의 동맹 관계는 유효했으며 실질적으로 연합국에 협조했다.[17] 현대에도 양국은 NATO 회원국으로서 군사 동맹을 이어가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 관계로 평가받는다.

2. 1. 중세 시대

영국포르투갈의 협력 관계는 1147년 리스본 공방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및 북유럽 십자군제2차 십자군 원정 중 포르투갈의 초대 국왕 아폰수 엔히크스를 도와 무어인으로부터 리스본을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양국 간의 동맹 관계는 1373년 조약을 통해 공식화되었고, 1386년 5월 윈저 조약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이 조약은 1294년부터 시작되어 1372년 타길드 조약(Tagilde Treaty)으로 갱신되었으며, 알주바로타 전투(1385)를 거쳐 양국 간의 영구적인 우호 관계로 발전했다. 조약은 한쪽이 다른 쪽의 지원을 필요로 할 경우, 요청에 따라 상호 원조를 제공할 것을 명시했다.[2]

1386년 7월,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잉글랜드의 헨리 4세의 아버지)는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원정군을 이끌고 갈리시아에 상륙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귀족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경쟁자로부터 보상을 받은 뒤 영국으로 돌아갔다.[13]

존 오브 곤트가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접대를 받고 있다.


존 오브 곤트는 자신의 딸 랭커스터의 필리파를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1387년 2월 결혼시켜 영-포르투갈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이 결혼을 통해 주앙 1세는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가 "빛나는 세대(Ínclita Geração)"라고 부르는 왕자 세대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이 세대는 대항해 시대 동안 포르투갈을 황금기로 이끌었다.

필리파는 궁정에 앵글로-노르만 귀족 문화와 교육 방식을 도입했으며, 자녀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다. 그녀의 개인적인 자질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궁정을 개혁하고 엄격한 도덕적 행동 기준을 부과했다. 반면에 더 관대한 포르투갈 귀족들은 그녀의 방식을 너무 전통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필리파는 또한 영국의 대구와 직물에 대한 수요와 포르투갈의 와인, 코르크, 소금, 기름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양국 간 상업적 이익 증진을 위해 왕실의 후원을 제공했다.

그녀의 장남 포르투갈의 에두아르두는 도덕 관련 저술을 남겼고 1433년 왕위에 올랐다.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폭넓은 여행 경험과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에두아르두가 1438년 흑사병으로 사망한 후 섭정(1439–1448)을 맡았다. 성자 페르디난드 왕자 (1402–1443)는 십자군에 참여하여 1437년 탕헤르 공격에 나섰으며, 항해 왕자 엔히크 (1394–1460)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마스터가 되어 포르투갈 초기 탐험 항해의 발기인이자 조직가로 활동했다.

2. 2. 이베리아 연합 시기 (1580-1640)

이베리아 연합(1580년~1640년)은 포르투갈스페인 사이의 60년간 이어진 왕조 연합으로, 이 시기 영국-포르투갈 동맹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펠리페 2세 국왕에 맞서면서, 포르투갈과 잉글랜드는 영-스페인 전쟁 (1585-1604)과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에서 서로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외교 정책은 스페인의 대(對)잉글랜드 적대 정책과 연계되었다. 또한 잉글랜드는 1622년 페르시아만에서 포르투갈령 오르무즈를 점령하기도 했다.

2. 3. 동맹의 재개와 강화 (17세기-19세기)

이베리아 연합(1580–1640) 시기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왕조 연합을 이루면서 영국과의 오랜 동맹 관계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외교 정책에 묶여 영-스페인 전쟁 (1585–1604) 등에서 영국과 적대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1640년 포르투갈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맞서 포르투갈 복고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가인 브라간사 왕가를 지지하며 동맹 관계를 회복했다. 영국 왕정 복고 이후인 1662년,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공주와 잉글랜드의 찰스 2세 국왕의 결혼은 양국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포르투갈은 탕헤르뭄바이를 영국에 지참금으로 할양했다. 영국은 포르투갈 복고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리스본과 포르투 등 포르투갈 연안 및 지중해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한 후, 영국은 1668년 리스본 조약 체결을 중재하여 포르투갈의 완전한 독립과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의 왕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도록 도왔다. 이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였다.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네덜란드로부터 되찾은 영토 대부분을 영국에 양도하고, 계피 무역의 절반을 공유하며, 고아, 코친, 디우, 바이아, 페르남부쿠, 리우데자네이루 등 주요 도시에 영국인들이 포르투갈인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며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영국에 상당한 경제적 이권을 제공했다.

이베리아 연합 해체 이후, 영국과 포르투갈은 유럽과 해외 식민지에서 공동의 경쟁 상대였던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에 맞서 협력하며 동맹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주요 협력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포르투갈은 전쟁 초기 사보이 공국과 함께 프랑스 측에 가담했으나, 블레넘 전투 이후 영국이 주도하는 동맹 측으로 전환하여 함께 싸웠다.
  • 7년 전쟁 (1756–1763): 1762년 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 당시 영국은 동맹으로서 즉각 개입했다. 수적으로는 불리했지만, 포르투갈-영국 연합군은 포르투갈 민병대 및 농민들과 힘을 합쳐 세 차례에 걸친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 나폴레옹 전쟁 (1803–1815): 유럽 대륙 대부분이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도, 포르투갈은 영국의 중요한 교역 상대였기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거부하고 영국과의 무역을 계속 유지했다. 이로 인해 1807년 포르투갈 침공을 당했지만, 영국은 반도 전쟁에서 포르투갈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나폴레옹 군대를 몰아내고 포르투갈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 당시 포르투갈 왕실(주앙 6세가 섭정)은 영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식민지 브라질로 피신하기도 했다.

영국조지 3세포르투갈주앙 6세의 동맹을 상징하는 알레고리 그림 (호아킴 카르네이루 다 실바, 1810). 그림에는 "조지 왕의 왕좌를 둘러싼 불멸의 트로피: 여기 질투가 짓눌리고, 저기 야망이 결박되었네. 브라간사 왕가는 감사의 마음으로 결합하여 브런즈윅 가문과 더욱 긴밀하게 얽히어 있네."라는 시가 곁들여져 있다.

  • 자유주의 전쟁 (1828–1834): 포르투갈 내부의 왕위 계승 분쟁 및 내전 과정에서 영국은 자유주의 세력에게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아프리카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경쟁 속에서 양국 동맹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 1890년 영국 최후 통첩: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영국은 포르투갈이 앙골라모잠비크를 연결하려는 소위 '분홍색 지도'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세실 로즈와 같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영국 정부는 포르투갈에게 현재의 짐바브웨잠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식민지 확장을 중단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는 알렉산드르 드 세르파 핀토 등의 탐험으로 확보된 지역에 대한 영국의 노골적인 간섭이었다.[3]
  • 포르투갈은 군사력의 열세로 영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포르투갈 국민들에게 큰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이 사건은 포르투갈 내에서 군주제에 대한 불신과 공화주의 운동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20년 후인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공화정이 수립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3]

2. 4. 20세기

20세기에도 영국과 포르투갈의 동맹 관계는 여러 차례 중요한 국면을 맞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이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모잠비크)를 침공하자, 포르투갈은 1916년 연합국에 가담하여 영국과 함께 싸웠다.[16][4] 포르투갈 원정군은 서부 전선에서 연합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4] 이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웃 국가인 스페인이 중립을 지킨 것과 대조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1939년 9월 1일, 영국-포르투갈 동맹이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면서도 영국의 지원 요청이 없었으므로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7] 영국 정부 역시 9월 5일 각서를 통해 이를 확인했으며, 포르투갈의 중립이 스페인추축국 가담을 막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17] 당시 포르투갈 총리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연합국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1940년 7월에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제도가 약 2,500명의 지브롤터 피난민을 수용하도록 했다. 같은 해 9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살라자르에게 편지를 보내 포르투갈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한 능력을 축하하며 "영-포르투갈 동맹의 수많은 세기 동안 그래왔듯이, 영국과 포르투갈의 이익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일치한다"고 언급했다. 1940년 5월에는 옥스퍼드 대학교가 살라자르에게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마드리드 주재 영국 대사였던 새뮤얼 호어 경은 살라자르가 전쟁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중립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나치즘파시즘을 혐오하고 나치의 패배를 바랐다고 평가했다.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였던 로널드 휴 캠벨 역시 살라자르가 동맹에 충실하며 "그[살라자르]는 절실한 필요가 있다면 영국의 요청에 응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1943년 8월, 영국이 600년 이상 지속된 동맹을 근거로 아조레스 제도의 기지 시설 사용을 요청하자 살라자르는 즉시 호의적으로 응답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호르타(파이알 섬)와 폰타델가다(상미겔 섬) 항구, 그리고 라제스 비행장(테르세이라 섬)과 산타나 비행장(상미겔 섬)을 해군 및 공군 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캠벨 대사는 살라자르의 말을 인용하며, 포르투갈의 엄격한 중립이 스페인의 추축국 가담을 막아 연합국에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으며, 만약 포르투갈이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면 전쟁의 양상이 추축국에 유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아조레스 기지는 대서양 전투에서 연합군의 대잠수함전 작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3년 11월부터 1945년 6월까지 8,689대의 미국 항공기가 라제스 기지를 이용했다. 이를 통해 미국과 북아프리카 간의 비행 시간이 70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되어 전쟁 물자 및 인력 수송 효율을 크게 높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들어서도 양국의 협력은 계속되었다. 영국과 포르투갈은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또한, 1960년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을 창설한 7개국 중 하나였으나, 영국은 1973년, 포르투갈은 1986년에 각각 EFTA를 탈퇴하고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포르투갈은 다시 한번 아조레스 제도의 시설을 영국 해군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며 동맹 관계를 확인했다.[9]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 변화와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동맹 관계에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1961년 인도포르투갈령 인도(고아, 다만, 디우)를 병합했을 때 포르투갈은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다. 또한 1966년 마카오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에도, 포르투갈은 인접한 홍콩에 주둔한 영국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 역시 사실상 거절당했다.

2. 5. 21세기

2022년 6월 13일, 안토니우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런던에서 만나 '영국-포르투갈 양자 협력 공동 선언'으로 알려진 새로운 협정을 체결했다.[10] 이 선언은 기존의 영국-포르투갈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동맹 관계임을 재확인했다. 또한, 이 선언은 타길드 조약 6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11]

1373년 앙글로-포르투갈 조약 체결 650주년이 되는 2023년 6월 16일, 양국은 이를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영국 정부는 이 자리에서 "올해 말 서명될 새로운 양자 간 방위 협정을 통해 양국의 국방 협력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12]

영국과 포르투갈은 현재 더 넓은 범위의 군사 동맹인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이다.

3. 현대의 영국-포르투갈 관계

현대에도 영국과 포르투갈은 나토 회원국으로서 군사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관계는 과거의 여러 조약보다는 나토와 같은 국제 기구를 통해 주로 조정되지만, 전통적인 동맹 관계의 의의는 여전히 크다.

참조

[1] 웹사이트 Treaty of Windsor 1386 https://www.historic[...] 2020-07-04
[2] 서적 English historical documents. 4. (Late medieval). 1327–1485 https://books.google[...] A. R. Myers
[3] 논문 The Politics of Non-Translation: A Case Study in Anglo-Portuguese Relations 2000
[4] 웹사이트 British-Portuguese Alliance http://www.nzhistory[...] nzhistory 2016-04-06
[5] 뉴스 Madeira Gold Medal of Merit for Louis http://www.chronicle[...] 2014-04-17
[6] 간행물 12 October 1943 Statement in the House of Commons https://api.parliame[...]
[7] 문서 Kay, p. 123
[8] 문서 Leite, "Document 2: Telegram From Sir Ronald Campbell"
[9] 웹사이트 History's Unparalleled Alliance: the Anglo-Portuguese Treaty of Windsor, 9th May 1386 https://history.blog[...] gov.uk 2016-05-09
[10] 웹사이트 UK–Portugal Joint Declaration on Bilateral Cooperation https://portugal-uk6[...] 2022-07-22
[11] 웹사이트 Alliance https://portugal-uk6[...] 2022-11-25
[12] 웹사이트 UK and Portugal celebrate the world's longest diplomatic alliance https://www.gov.uk/g[...] 2023-06-15
[13] 문서 Ínclita geração
[14] 웹인용 Treaty of Windsor 1386 https://www.historic[...] 2020-07-04
[15] 서적 The Campaigns of Napoleon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2021-05-01
[16] 웹인용 British-Portuguese Alliance http://www.nzhistory[...] nzhistory 2016-04-06
[17] 저널 Neutrality by Agreement: Portugal and the British Alliance in World War II http://digitalcommon[...] Washington College of Law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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