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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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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적 예수 탐구는 18세기부터 시작되어,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학문적 시도를 의미한다. 1차 탐구(18세기 말~20세기 초)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다양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시도되었으나, 낭만적 미화나 심리적 해석이 더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2차 탐구(1950년대~1970년대)는 에른스트 케제만의 강연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유사성 기준, 난처함 기준 등 새로운 방법론이 도입되었다. 3차 탐구(1980년대 이후)는 예수의 팔레스타인적, 유대교적 배경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으며, 다중 증언 기준, 차이점 기준 등 다양한 기준이 개발되었다. 2021년에는 '넥스트 퀘스트'가 제시되며, 종교, 문화 비교, 계급 관계 등 더 넓은 관점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다양한 해석과 방법론적 문제, 자료 부족, 편향성 문제 등의 비판을 받지만,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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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탐구
역사적 예수 탐구
분야예수 연구
시작 시기18세기 후반
핵심 인물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스트라우스
에른스트 레난
알버트 슈바이처
루돌프 불트만
요아힘 예레미아스
귄터 보른캄
제임스 던
방법론역사적 비평
자료 비평
양식 비평
편집 비평
사회과학적 접근
목표신약성서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과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구별
역사적 근거에 기반한 예수의 삶과 가르침 재구성
주요 결과
예수의 모습1세기 유대교 맥락 안에서 이해
종말론적 설교가
사회적 변혁 추구
하나님 나라 선포
논쟁점
복음서의 신뢰성복음서가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해석을 어떻게 혼합하는가
예수의 자기 이해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했는가
예수의 기적기적의 역사적 사실 여부
예수의 죽음과 부활죽음의 역사적 의미와 부활의 해석
영향
신학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성서 해석의 다양성
교회전통적 교리에 대한 도전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재고
문화예술, 문학,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
비판
객관성 문제연구자의 주관적 편견 개입 가능성
자료의 한계1세기 자료 부족
방법론적 문제비평 방법론의 적용에 대한 이견
관련 문서
관련 문서역사적 예수
예수의 역사성
알베르트 슈바이처
역사적 예수의 탐구

2. 역사적 예수 탐구

전통적으로 18세기 이래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탐구가 구분되어 왔으며, 각 탐구는 각기 다른 특징과 연구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2] 그러나 터커 페르다에 따르면, 현재 "예수에 대한 탐구의 전통적인 세 가지 구분은 [...] 결함이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6] 이러한 구분은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라이마루스 이전부터 기독교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으로 시작된, 소위 첫 번째 탐구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잘못된 연구 기간 설정을 제시한다.[7][8][9][10]

2. 1. 제1차 탐구 (18세기 말 ~ 20세기 초)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유럽의 여러 학자들이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라 불리는 예수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1][2] 이 전기들은 복음서 기록을 조화시킨 것에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려 했다.[1][2] 이러한 시도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의 역사적 예수 탐구: 비판적 연구''를 통해 "역사적 예수 탐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36]

19세기 말까지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는데, 이 중 일부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이는 새로운 자료가 아닌, 복음서를 새롭게 읽고 해석한 결과였다.[1][2] 이 "예수의 생애" 이야기들은 낭만적으로 미화되거나,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다른 역사적 문서에 없는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타는 사건을 바탕으로, 목수였던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가지고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마크 파웰은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거대한 계획(예: 예수를 개혁가로 보는 것)을 부과하고 복음서를 해석하는 것, 둘째, 그 계획에 맞지 않는 복음서 기록을 제외하는 것, 셋째,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복음서에 없는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는 것이다.[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이러한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말했다.[12]

첫 번째 탐구 동안 다양한 "예수의 생애" 저자들은 기독교를 칭찬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를 사용했다.[1] 초기 주목할 만한 출판물 중 하나는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1694–1768)의 저작으로,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을 세우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 덜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묘사했다.[1] 라이마루스는 기적을 거부하고 성경 저자들을 사기라고 비난하는 논문을 썼지만 출판하지 않았다.[13] 후에 고트홀트 레싱(1729–1781)이 라이마루스의 논문을 사후에 출판했다.[14] 바론 돌바크(1723–1789)는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에케 호모!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탐구; 복음서의 합리적 분석''을 저술하여 1769년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판했다.[15][16] 이 책은 조지 휴스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1799년과 1813년에 출판되었으며, 휴스턴은 자신이 저자임을 자백하여 신성 모독죄로 2년간 감옥에 갇혔다.[17]



다비드 슈트라우스(1808–1874)는 27세의 나이에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을 신화적인 과장으로 거부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1835년 저서인 ''예수의 생애''[18]는 예수의 생애를 편견 없는 역사적 연구에 기반을 두려는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체계적인 분석 중 하나였다.[1][2] 슈트라우스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일들을 공동체가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묘사하면서 생겨난 신화로 보았다.[1][19]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1906; 1910)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장에 대해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련의 설명에 대한 사망 진단서를 채웠다"고 썼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학문적 연구에는 두 가지 광범위한 기간, 즉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전 시대와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후 시대"가 있다고 덧붙였다. 슈트라우스 이후에 등장한 작품 중 에르네스트 르낭의 저서 ''예수의 생애''는 학문성과 감상적이고 소설적인 심리적 해석을 결합하여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석 달 만에 여덟 번이나 재판되었다.[1] 르낭은 복음의 서술과 자신의 심리적 해석을 결합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랑의 달콤한 신학"을 설교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기득권 세력과 마주치자 혁명가로 변했다는 것이다.[1]

요하네스 바이스(1863–1914)와 빌헬름 브레데(1859–1906)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종말론적 측면을 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20] 바이스와 브레데는 모두 열정적으로 자유주의에 반대했고, 그들의 발표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0] 브레데는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메시아 비밀을 주제로 글을 썼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1]

알베르트 칼트호프(1850–1906)는 1904년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리스도 문제에 대한 새로운 기여''(1907년 영어로 출판, ''기독교의 부상'')의 "역사적 예수가 있었는가?"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주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죽음에서 부활한 자와 혁명적 사상을 가진 작은 건축업자의 아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만약 하나가 역사적 예수였다면, 다른 하나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22]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역사적 예수 탐구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1906, 1판)에서 예수의 생애를 탐구해 온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주관성을 비난했다.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스의 두 자료 가설과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빌케의 빌케 가설에 대한 한 장(10장),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세 장(7, 8, 9장), 그리고 브루노 바우어에 대한 한 장(11장)이 있다. 브루노 바우어(1809–1882)는 예수의 비역사성을 주장한 최초의 학문적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독일 학계에 의해 묻혔고, 그는 알베르트 칼트호프가 그의 저작을 방치와 무명에서 구출하기 전까지 부랑자로 남아 있었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비역사성에 관한 그의 후기 저작과 결론에 앞서 바우어의 초기 저작을 높이 평가했다.[23]

아서 드류스의 ''그리스도 신화''(1909)는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그리스도 신화론에 관한 내용이었다. 드류스는 브루노 바우어가 처음 제시한 주장을 공론화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24] 1912년 셜리 잭슨 케이스는 지난 10년 동안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지만, 독일만큼 강하게 제기된 곳은 없다고 지적했다.[25][26][27]

드류스의 주장을 논의하기 위해, 슈바이처는 1913년 ''예수의 역사적 탐구'' 2판에 두 개의 장을 추가했다.

  • 제22장(pp. 451–499),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부정"은 드류스의 주장과 예수의 비존재에 대한 드류스의 주장을 지지하는 8명의 작가를 분석한다.
  • 제23장(pp. 500–560),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논쟁"은 드류스에 대한 40명의 신학자/학자들의 출판물을 검토하고, 1910년 2월 공개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을 언급한다.


슈바이처는 19세기에 제시된 예수에 대한 발표가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최소화하거나 무시했다고 주장했으며, 유대교 종말론적 맥락에서 예수의 프로필에 대한 자신의 버전을 개발했다.[2][31]

카헬러(Martin Kähler)의 저서 『역사적 예수라고 불리는 자와 역사적 성서의 그리스도』(1896년 출판)가 슈바이처의 연구에 앞서 출판되었다.[2] 카헬러는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서 분석의 주요 목표는 역사에 영향을 미친 신앙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 카헬러의 저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졌으며, 슈바이처의 저서와 함께 제1차 예수 탐구를 사실상 종결시켰다.[2]

2. 2. 탐구 중단기 (20세기 초 ~ 1950년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1906년 비판은 이전의 "역사적 예수 탐구" 시도를 훼손했고, 종종 1953년 에른스트 케제만의 강연까지 이어진 "탐구 없음" 시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24][32] 벤 위더링턴은 첫 번째 탐구의 끝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종말을 맞이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24]

폴 자흐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슈바이처의 책 마지막 두 단락에서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서 현대화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온다"라고 말하며 첫 번째 탐구의 종말을 적절하게 요약한다고 주장한다.[33] 그러나 스탠리 포터나 데일 앨리슨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그러한 평가나 이러한 단계의 분리에 동의하지 않는다.[36][34][35]

스탠리 포터는 슈바이처의 비판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낭만적이고 과도하게 심리화된" 연구만 종식시켰을 뿐, 다른 연구는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데일 앨리슨은 소위 탐구 없음 단계에서도 다른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19년을 제외한 매년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학술서가 출판되면서 지속적인 진전이 있었다고 말한다.[15] 모리스 케이시는 처음에 이 시기를 "탐구 없음"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특징은 정확하지 않으며 이 시기에 B. H. 스트리터의 마가 복음 우선설과 Q 자료에 대한 연구와 같이 중요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이는 미래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36]

1906년부터 1953년까지 비교적 조용한 시기의 주요 인물은 루돌프 불트만이었는데,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관련성과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예수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거나 알아야 할 유일한 것은 그의 존재의 "그것(thatness)"(Dassde)이며 그 외에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38] 불트만은 중요한 것은 "그것"이지 "무엇"이 아니며, 예수의 존재, 설교, 십자가형으로 죽음만이 중요하고, 그의 생애 동안 일어난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또한 복음을 전파한 구전 복음 전승 연구를 지지했다.[37]

불트만은 예수에 대해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만 알 수 있다고 믿었으며, 예수를 통해 몇 가지를 알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실존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예수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탐구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38] 불트만은 초기 기독교 문헌이 특정 장소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역사적 분석을 통한 예수 연구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38] 그러나 결국 불트만은 역사 연구의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고, 1948년까지 추가적인 조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38]

2. 3. 제2차 탐구 (1950년대 ~ 1970년대)

전통적으로 18세기 이래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탐구가 구분되어 왔으며, 각 탐구는 각기 다른 특징과 연구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각 특정 단계에서 개발되었다.[2] 터커 페르다에 따르면, 현재 "예수에 대한 탐구의 전통적인 세 가지 구분은 [...] 결함이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6] 세 가지 용어는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라이마루스 이전부터 기독교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으로 시작된, 소위 첫 번째 탐구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잘못된 연구 기간 설정을 제시한다.[7][8][9][10]

2. 4. 제3차 탐구 (1980년대 이후)

전통적으로 18세기 이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탐구가 구분되어 왔으며, 각 탐구는 서로 다른 특징과 연구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각 특정 단계에서 개발되었다.[2] 터커 페르다에 따르면, 현재 "예수에 대한 탐구의 전통적인 세 가지 구분은 [...] 결함이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6]

다중 증언 기준, 차이점 기준(단절성이라고도 함), 문맥(언어 및 환경), 당혹 기준 외에도 제3의 탐구를 통해 여러 다른 기준이 개발되었다.[66][67] 이 중 주요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 거부 및 처형 기준(1985년 개발): 이 기준은 다른 기준과 상당히 다르며, 예수의 진정성 있는 개별적인 말씀이나 행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지 않고, 예수께서 유대인에게 거부당하고 로마인에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다음, 어떤 말씀과 행위가 이 시나리오에 부합하는지 질문한다.[66][67] 존 P. 메이어는 이 기준이 당시 권위에 도전하지 않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하며, 따라서 그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말씀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67]
  • 역사적 개연성 기준(1997년 게르트 타이센 도입): 이 원칙은 맥락적 개연성 및 결과적 개연성과 같은 구성 요소 측면에서 사건의 개연성을 분석한다. 즉, 역사적 맥락이 적절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결과도 적절해야 한다. 최근 연구에서 개연성 기준은 차이점 기준보다 학자들 사이에서 더 선호되었으며, 역사적 맥락에 맞는 설명이 유효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68]
  • 일치성 기준(누적 정황 증거라고도 함): 더 오래된 일관성 기준의 특별한 경우이다. 일관성 기준은 일관성 및 적합성 기준이라고 하며, 이미 역사적인 것으로 확립된 것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설이 이미 알려진 것과 일치하고 일관성이 있는지 테스트한다.[66] 따라서 이 기준은 고대 텍스트에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분석 결과를 되돌아보고 그 일관성과 일관성을 고려한다.[67] 일치성 기준은 다른 데이터의 관찰이 유사한 결론을 시사하는 경우 가설을 뒷받침한다.[69]


다른 여러 제안된 기준은 제3의 탐구 학자들에게 의심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66] 여기에는 서술의 생생함 기준이 포함되는데, 이는 나머지 주변 텍스트보다 더 생생한 언어로 표현된 말씀이 목격자의 선언일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이 기준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거부된다.[66][67]

2. 5. 넥스트 퀘스트 (2021년 ~ 현재)

전통적으로 18세기 이래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세 가지 학문적 탐구가 구분되어 왔으며, 각 탐구는 각기 다른 특징과 연구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각 특정 단계에서 개발되었다.[2] 터커 페르다에 따르면, 현재 "예수에 대한 탐구의 전통적인 세 가지 구분은 [...] 결함이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6] 세 가지 용어는 문헌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며,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라이마루스 이전부터 기독교 기원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으로 시작된, 소위 첫 번째 탐구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잘못된 연구 기간 설정을 제시한다.[7][8][9][10]

3.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

역사적 예수 연구는 크게 성경 비평, 진정성 기준, 고고학적 방법론으로 나눌 수 있다.


  • 성경 비평: 계몽주의 이후, 역사적 예수 연구의 주요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 본문 비평, 자료 비평, 형식 비평, 편집 비평 등 다양한 세부 방법론이 발전했다.
  • 진정성 기준: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복음서 내용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제시한 기준이다. 다중 증언 기준, 차이성 기준, 언어 및 환경 기준, 당혹성 기준, 일치성 기준 등이 대표적이다.
  • 고고학: 제임스 찰스워스는 고고학적 발견이 예수 시대 갈릴리와 유대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가버나움 유적 발굴 등은 예수 시대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방법들은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데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되며, 각 방법론은 시대에 따라 발전하고 변화해 왔다.

3. 1. 성서 비평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유럽의 다양한 학자들이 성경 비평 및 복음서 조화 개발을 넘어, 일반적으로 "예수의 생애"라고 불리는 예수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1][2] 이 전기들은 복음서 기록의 조화된 버전에 몇 가지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려 시도했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개요를 제시했다.[1][2] 예수의 전기를 구성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처음으로 "역사적 예수 탐구"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 용어는 원래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의 역사적 예수 탐구: 비판적 연구''라는 제목의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2][36]

1778년에 시작된 제1의 탐구는 거의 전적으로 성서 비평에 기반했다. 이는 원래 본문 비평과 자료 비평의 형태를 취했으며, 1919년에는 형식 비평이, 1948년에는 편집 비평이 추가되었다.[56] 형식 비평은 현재의 형태로 기록되기 전, 구전 시대 동안 성서 자료의 역사를 추적하려는 시도로 시작되었으며, 본문 비평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56] 형식 비평은 복음서 저자를 저자가 아닌 편집자로 본다. 편집 비평은 자료 비평과 형식 비평의 자식으로 볼 수 있으며,[57] 복음서 저자를 저자이자 초기 신학자로 간주하고, 편집자가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서술을 다듬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57]

3. 2. 진정성 기준



계몽주의 이후, 유럽 학자들은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를 쓰기 시작했다.[1][2] 이들은 복음서 기록을 조화시키고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예수 탐구"로 알려졌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의 역사적 예수 탐구: 비판적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2][36]

19세기 말에는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는데, 이 중 일부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이는 새로운 자료가 아닌, 복음서를 새롭게 해석한 결과였다.[1][2] 이들은 낭만적으로 미화되거나,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역사적 문서에 없는 요소를 포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탄 사건을 바탕으로, 목수였던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타고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이러한 "예수의 생애"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지적했다.[12]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은 거대한 계획의 부과, 복음서 기록의 일부 배제, 새로운 자료의 추가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1] 초기 탐구에서 "예수의 생애" 저자들은 다양한 주제를 사용했는데, 기독교를 칭찬하거나 공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는 예수를 실패한 정치인으로 묘사했고,[1] 고트홀트 레싱이 그의 논문을 사후에 출판했다.[14] 바론 돌바크는 종교 비판을 위해 ''에케 호모!''를 익명으로 출판했고,[15][16] 조지 휴스턴이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17]

다비드 슈트라우스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신화적인 과장으로 거부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1835년 저서 ''예수의 생애''[18]는 예수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체계적인 분석 중 하나였다.[1][2]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슈트라우스의 주장에 대해 "사망 진단서"라고 썼다.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는 학문성과 감상적이고 소설적인 심리적 해석을 결합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1]

요하네스 바이스와 빌헬름 브레데는 예수 사역의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했다.[20] 브레데는 마가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1] 알베르트 칼트호프는 역사적 예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22]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다양한 작가들이 자신의 선호를 예수의 성격에 주입했다고 비난했다. 브루노 바우어는 예수의 비역사성을 주장한 최초의 학문적 신학자였다.[23]

제2의 탐구에서 개발된 난처함 기준은 후안 페르난데스 나바레테의 그림에 묘사된 예수의 세례에 적용되었다.


제2의 탐구는 1953년 10월 20일 에른스트 케제만의 강연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39] 케제만은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을 강조했지만, 복음서가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2] 귄터 본캄의 ''나사렛 예수''는 제2의 탐구에 추진력을 제공했다.[2][41] 제임스 M.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를 위한 새로운 탐구''는 여러 번 재판되었다.[2][42] 케제만은 유사성 기준을, 제2의 탐구에서는 난처함 기준이 도입되었다. 마르첼로 크라베리는 사해 문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예수가 주장한 신성은 제한적이었다고 주장했다.[44]

제임스 티소의 그림 "예수는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다"


1970년대 초, 제2의 탐구는 추진력을 잃었다.[2][40] 1977년 E.P. 샌더스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출판은 제3의 탐구를 시작하게 했다.[3] 1982년, N. T. 라이트는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3의 탐구"라고 명명했다.[47][48]

제3의 탐구는 예수의 팔레스타인적이고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으며, 예수보다는 그 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진정성 기준이 이 탐구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형식 비평이 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학자들은 다른 기준들을 찾기 시작했다. 자료 비평과 같은 다른 연구 분야에서 가져온 "진정성 기준"이 점차 등장했다.[58][59]

1987년까지 D. 폴코프는 학자들이 역사적 진정성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하는 25개의 개별 기준을 나열했다.[58] 다중 증언 기준, 차이점 기준(단절성), 문맥(언어 및 환경), 당혹 기준 외에도 제3의 탐구를 통해 여러 기준이 개발되었다.[66][67]

  • 거부 및 처형 기준 (1985년 개발): 예수의 개별적인 말씀이나 행위보다는 유대인에게 거부당하고 로마인에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66][67]
  • 역사적 개연성 기준 (1997년, 게르트 타이센 도입): 맥락적 개연성 및 결과적 개연성 측면에서 사건의 개연성을 분석한다.[66]
  • 일치성 기준 (누적 정황 증거): 이미 역사적인 것으로 확립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66]


서술의 생생함 기준 등 여러 제안된 기준은 제3의 탐구 학자들에게 의심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66][67]

3. 2. 1. 다중 증언 기준

다중 증언 기준(독립 증언)은 "단면 방법"이라고도 불리며, 1906년 F. C. 버킷이 처음 개발한 일종의 출처 비평이다.[61] 이 방법은 간단히 말해 여러 출처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으로, 어떤 사건이나 언급을 보고하는 출처가 많을수록 그 사건이나 언급이 역사적으로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는 가정을 따른다. 버킷은 마가복음과 Q자료에서 31개의 독립적인 언급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공관 복음 연구에서 이는 사원 가설을 개발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러 출처는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성을 뒷받침한다. 신약학자 게르트 타이센은 "우리가 공관 복음 전통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게 가장 잘 접근할 수 있다는 광범위한 학문적 합의가 있다"고 말한다.[61][62]

두 번째 관련 이론은 '다중 형태'이다. C. H. 도드가 개발했으며, 한 가지 이상의 문학적 형태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말씀이나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성경 학자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선포하신 예를 든다. 그는 그것이 "격언 (마태 5:17), 비유 (마태 9:37–38 및 마가 4:26–29), 시적 언급 (마태 13:16–17), 대화 (마태 12:24–28)"에서 발견되므로 예수의 가르침의 진정한 주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63][64][65][66][67]

3. 2. 2. 차이성 기준

비유사성 기준은 1901년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예수와 동시대 다른 출처의 말이나 가르침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어구는 역사적 예수의 증거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인자"라는 어구는 유대교에 이미 존재했지만(1 에녹 46:2; 48:2–5,10; 52:4; 62:5–9; 69:28–29 및 4 에스드라 13:3ff 참고), 유대인이 이를 예수에게 적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자신을 칭할 때 가장 흔히 사용한 표현이지만, 신약 서신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제자나 초기 교회가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면 예수가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온다.[66]

다중 증언 기준, 차이점 기준(단절성), 문맥(언어 및 환경), 당혹 기준 외에도 제3의 탐구를 통해 여러 기준이 개발되었다.[66][67]

  • 거부 및 처형 기준 (1985년 개발): 예수의 개별적인 말씀이나 행위보다는 유대인에게 거부당하고 로마인에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어떤 말씀과 행위가 이러한 상황에 부합하는지 질문한다.[66][67] 존 P. 메이어는 당시 권위에 도전하지 않은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 기준이 예수의 말씀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67]
  • 역사적 개연성 기준 (1997년, 게르트 타이센 도입): 맥락적 개연성 및 결과적 개연성 측면에서 사건의 개연성을 분석한다. 역사적 맥락과 결과가 모두 적절해야 한다.[66] 최근 연구에서는 차이점 기준보다 선호되며, 역사적 맥락에 맞는 설명이 유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68]
  • 일치성 기준 (누적 정황 증거): 더 오래된 일관성 기준의 특별한 경우로, 일관성 및 적합성 기준이라고도 한다. 이미 역사적으로 확립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66] 고대 텍스트뿐만 아니라 현대 분석 결과를 고려하며, 다른 데이터의 관찰이 유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경우 가설을 지지한다.[67][69]


제3의 탐구 학자들은 서술의 생생함 기준(생생한 언어로 표현된 말씀이 목격자의 증언일 수 있다는 기준) 등 여러 제안된 기준을 의심스럽고 신뢰할 수 없다고 본다.[66][67]

3. 2. 3. 언어 및 환경 기준

요아힘 예레미아스(1947)와 같은 학자들은 '팔레스타인 환경 기준'을 도입하여, 아람어 어휘 또는 문법의 존재 유무로 성경 내용을 평가하는 '아람어 흔적 기준'과 함께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 환경에 부합하는 내용을 진실로 간주했다.[66][67] 신약성서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지만, 셈족어라고 불리는 많은 단어와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셈족어는 시적 또는 방언적 ''코이네''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및 아람어의 영향을 조합한 것이다. 셈족어는 히브리어나 아람어 특유의 표현이나 구성을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이다. 환경적 기준은 팔레스타인에서 기원을 나타내는 출처에 언급된 특징을 관찰한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1에서 예수는 "다윗의 아들, 아브라함의 아들"로 칭해지는데, 히브리어로 다윗의 이름의 수치적 가치는 14이다. 그래서 이 족보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세대, 다윗에서 바빌론 유배까지 14세대, 유배에서 그리스도까지 14세대를 거친다(마태복음 1:17). 이러한 언어적 특이성은 신약성서 본문을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연결한다.

일부 학자들은 언어적 기준과 환경적 기준을 별도로 취급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셈족어와 팔레스타인 배경의 기준'과 같이 함께 취급하기도 한다.[63] 존 P. 메이어는 '아람어 흔적 기준'과 '팔레스타인 환경 기준'을 정의하면서, 이 둘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의 죽음 이후 팔레스타인의 언어, 사회, 문화적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준들을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경고했다. 바트 D. 어먼은 이를 '맥락적 신뢰성 기준'으로 결합했다. 이것은 '전통이 1세기 팔레스타인과 같은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잘 부합할 경우 신뢰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63][64] 예를 들어, 어먼은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를 인용한다. 그들의 혼란은 그리스어 단어 ανωθεν/''anothen''('다시'와 '위로부터')의 다중 의미에 근거하지만,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같은 이중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는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므로, 그 대화는 서술된 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3. 2. 4. 당혹성 기준

당혹성 기준은 제2차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제시된 기준이다.[43][66] 이 기준은 초기 교회가 저자에게 당혹감을 주거나 반대자와의 논쟁에서 입지를 약화시킬 뿐인 역사적 자료를 굳이 "만들어내거나"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66] 역사학자 윌 듀런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러한 사건들과 더불어 여인들에 의한 빈 무덤 발견, 요한에 의한 예수의 세례, 그리고 십자가형 그 자체와 같이 당혹스러운 다른 사건들은, 복음서가 어느 정도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추론에 신빙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이 기준에 의해 여겨진다.[66] 십자가형의 기준은 당혹감의 기준과 관련이 있다. 1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범죄자들만 십자가에 매달렸다. 초기 교회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스캔들로 언급했다. 따라서 그들이 그것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낮다.[65]

신약학자 게르트 타이센과 신학자 다그마 빈터는 당혹감의 기준의 한 측면은 "전통의 경향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66] 그것은 초기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에 반하는 것이 역사적이라는 가정 하에 작용한다. 예를 들어, 예수에 대한 비판은 그를 숭배하려는 초기 교회의 경향에 반하며, 예수에 대해 사탄과 결탁했다는 비난 (마태오 12:24), 또는 폭식가이자 술꾼이었다는 (마태오 11:19) 진술을 초기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냈을 가능성을 낮춘다. 타이센과 빈터는 이것을 '적의 증언'으로 요약하는데, 친구와 적 모두가 동일한 사건을 언급할 때, 그 사건들은 역사적일 가능성이 높다.[66]

3. 2. 5. 일관성 기준

1950년대에는 일관성 기준(일치성 기준 또는 부합성 기준이라고도 함)이 추가되었다. 이 기준은 다른 자료가 진본으로 확인되었을 때만 사용할 수 있으며, 예수에게 귀속된 말이나 행동이 이미 진본으로 확립된 다른 말과 행동에 일치하면 진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준은 단독으로 사용할 수는 없지만, 학자들이 예수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범위를 넓힐 수 있다.[69] 예를 들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마가복음 12:18-27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마태복음 8:11-12/누가복음 13:28-29에 보고된 사후 세계에 대한 Q의 예수 말씀, 그리고 동일한 주제에 대한 예수의 다른 가르침과 잘 일치한다.

다중 증언 기준, 차이점 기준(단절성이라고도 함), 문맥(언어 및 환경), 당혹 기준 외에도 제3의 탐구를 통해 여러 다른 기준이 개발되었다.[66] 이 중 주요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66][67]

  • 일치성 기준(누적 정황 증거라고도 함)은 더 오래된 일관성 기준의 특별한 경우이다.[69] 일관성 및 적합성 기준이라고도 하는 일치성 기준은 이미 역사적인 것으로 확립된 것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설이 이미 알려진 것과 일치하고 일관성이 있는지 확인한다.[66] 따라서 이 기준은 고대 텍스트에 단순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분석 결과를 되돌아보고 그 일관성과 일관성을 고려한다.[67] 다른 데이터의 관찰이 유사한 결론을 시사하는 경우 가설을 뒷받침한다.[69]

3. 3. 고고학

참고:성서 고고학

가버나움의 고대 회당


제임스 찰스워스는 현대 학자들 중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의 갈릴리와 유대의 삶의 모습을 밝혀주는 고고학적 발견을 간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70] 제3의 탐구의 현대적 특징 중 하나는 고고학의 역할이다.[71] 21세기에는 예수 시대의 사회 경제적, 정치적 배경을 밝혀 역사적 예수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추가 연구 요소로서 고고학의 통합적 사용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증가했다.[72][73][70][77][74]

조나단 리드(Jonathan Reed)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고고학의 주요 기여는 예수의 사회적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드가 언급하는 고고학적 유물의 예로는 예수가 처형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는 1961년 빌라도 석비의 발견이 있다.[75][76]

데이비드 가울러(David Gowler)는 고고학, 텍스트 분석, 역사적 맥락에 대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조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77] 예를 들어 가버나움에서의 고고학적 연구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가버나움은 자주 언급되지만, 그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거의 없다.[78]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전의 추정과는 달리 가버나움은 포럼이나 광장조차 없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이었다.[77][79]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은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상호적인 나눔을 옹호했다는 학술적 견해와 잘 부합한다.[77] 다른 고고학적 발견들은 1세기 초 유대에서 지배적인 제사장들의 부를 뒷받침한다.[73][80]

4. 역사적 예수에 대한 다양한 해석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유럽의 여러 학자들은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라 불리는 예수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1][2] 이 전기들은 복음서 기록을 조화시킨 버전에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 생애에 대한 새로운 개요를 제시하려 했다.[1][2]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예수 탐구"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2][36]

19세기 말까지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다. 이 중 일부는 새로운 자료가 아닌, 복음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쓰여진 선정적인 내용이었다.[1][2] 이 "예수의 생애" 이야기들은 종종 낭만적으로 미화되었고, 매우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다른 역사적 문서에는 없는 새로운 요소들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타는 사건을 바탕으로, 목수였던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가지고 다니며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마크 파웰은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복음서를 해석하는 거대한 계획(예: 예수를 개혁가로 보는 것)의 부과, 둘째, 그 계획에 맞지 않는 복음서 기록 부분의 배제, 셋째,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자료의 추가이다.[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많은 경우 이러한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말했다.[12]

첫 번째 탐구 동안 "예수의 생애" 저자들의 기저 주제는 다양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를 칭찬하기 위해, 다른 경우에는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 이 분야의 초기 주목할 만한 출판물 중 하나는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을 세우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 덜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묘사한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1694–1768)의 저작이었다.[1] 라이마루스는 기적을 거부하고 성경 저자들을 사기라고 비난했지만, 이를 출판하지 않았다.[13] 후에 고트홀트 레싱(1729–1781)은 라이마루스의 논문을 사후에 출판했다.[14] 바론 돌바크(1723–1789)는 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에케 호모!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탐구; 복음서의 합리적 분석''을 저술하여 1769년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판했다.[15][16] 이 책은 조지 휴스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1799년과 1813년에 출판되었으며, 휴스턴은 자신이 저자임을 자백하여 신성 모독죄로 2년간 감옥에 갇혔다.[17]

다비드 슈트라우스(1808–1874)는 27세의 나이에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을 신화적인 과장으로 거부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1835년 저서 ''예수의 생애''[18]는 예수의 생애를 편견 없는 역사적 연구에 기반을 두려는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체계적인 분석 중 하나였다.[1][2] 슈트라우스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일들을 공동체가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묘사하면서 생겨난 신화로 보았다.[1][19]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1906; 1910)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장에 대해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련의 설명에 대한 사망 진단서를 채웠다"고 썼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학문적 연구에는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전 시대와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후 시대"라는 두 가지 광범위한 기간이 있다고 덧붙였다. 에르네스트 르낭의 저서 ''예수의 생애''는 학문성과 감상적이고 소설적인 심리적 해석을 결합하여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석 달 만에 여덟 번이나 재판되었다.[1] 르낭은 복음의 서술과 자신의 심리적 해석을 결합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랑의 달콤한 신학"을 설교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기득권 세력과 마주치자 혁명가로 변했다는 것이다.[1]

요하네스 바이스(1863–1914)와 빌헬름 브레데(1859–1906)는 예수 사역의 종말론적 측면을 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20] 바이스와 브레데는 자유주의에 반대했고, 그들의 발표는 예수 사역과 가르침의 특이성을 강조했다.[20] 브레데는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메시아 비밀을 주제로 글을 썼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1]

알베르트 칼트호프(1850–1906)는 1904년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리스도 문제에 대한 새로운 기여''(1907년 영어 출판)의 "역사적 예수가 있었는가?"라는 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주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죽음에서 부활한 자와 혁명적 사상을 가진 작은 건축업자의 아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 만약 하나가 역사적 예수였다면, 다른 하나는 분명히 그렇지 않았다."라고 썼다.[22]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역사적 예수 탐구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1906, 1판)에서 예수 생애 탐구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주관성을 비난했다.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스의 두 자료 가설과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빌케의 빌케 가설에 대한 한 장(10장)과 다비드 슈트라우스에 대한 세 장(7, 8, 9장), 그리고 브루노 바우어에 대한 한 장(11장)이 있다. 브루노 바우어(1809–1882)는 예수의 비역사성을 주장한 최초의 학문적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독일 학계에 의해 묻혔고, 그는 알베르트 칼트호프가 그의 저작을 구출하기 전까지 부랑자로 남아 있었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비역사성에 관한 그의 후기 저작과 결론에 앞서 바우어의 초기 저작을 높이 평가했다.[23]

1977년 E.P. 샌더스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출판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였고, 제3의 탐구를 시작하게 했다.[3] 제2의 탐구와는 달리, 제3의 탐구는 명확한 시작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여러 학자들이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서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시하면서 등장했다. 1982년, N. T. 라이트는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제3의 탐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47][48]

제3의 탐구는 예수의 팔레스타인적이고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으며, 예수의 인물 자체보다는 그 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예수에 관한 모든 자료가 초기 교회에 의해 전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으며, 차이점 기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초기 교회가 아닌 예수에게만 자료를 귀속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 기준이 이 탐구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예수가 역사적 인물로 존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학계에 광범위한 합의가 있지만, 세 번의 탐구를 통해 구성된 예수의 초상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 묘사된 이미지와도 종종 달랐다.[81][14] 에이미-질 레빈은 이처럼 다른 초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예수에 대한 기본적인 윤곽에 대해 일반적인 학문적 합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즉,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세례자 요한에게 받았고, 유대교 당국과 신에 관해 논쟁했으며, 몇 가지 치유를 행하고, 비유로 가르쳤으며, 제자들을 모았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점에 동의한다.[82]

제3의 탐구에서 주류 해석 간의 많은 강조점의 차이는 예수의 여러 가지 주요 해석에 따라 묶을 수 있다. 즉, 종말론적 예언자, 카리스마적 치유자, 냉소적 철학자, 유대교 메시아 또는 사회 변혁의 예언자 등으로 묶을 수 있다.[83] 그러나 그의 생애에 대한 단일 해석이나 그것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방법에 대해서는 학문적 합의가 거의 없다.[84][85] 또한 계정 간에 중복되는 속성이 있으며, 일부 속성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 있는 학자 쌍도 다른 속성에는 동의할 수 있다.[86][83] 이러한 그룹화는 각 초상의 본질적인 특징을 반영하며, 계정은 종종 중복되는 요소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크로산과 라이트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이 서로 비판적이지만, 예수에 대한 해석은 예수께서 "주로 종말론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여전히 예수께서 그러한 메시지를 설파했다고 믿는 반면, 다른 학자들 (예: 보그와 맥)은 그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86] 따라서 제3의 탐구는 학문적 해석의 단편화를 목격했으며, 예수에 대한 통일된 그림을 전혀 얻을 수 없다.[84]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1906년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예수의 초상이 그것을 구성한 학자들과 유사하며, 종종 그들 "자신의 희미한 반영"이라고 언급했다.[87][88] 존 도미닉 크로산은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었다고 말하며, 예수의 생애에 대해 글을 쓰는 많은 저자들이 "자서전을 쓰고 그것을 전기라고 부를 것"이라고 요약했다.[89] 최근 학문에서는 예수 재구성이 자기 초상일 수밖에 없다는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했다. 예를 들어, 제임스 크로슬리와 로버트 J. 마일스는 엄격하고 냉철한 유물론적 접근 방식이 역사적 예수 연구를 할 때 시대착오와 학자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90]

5.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비판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 자료 부족, 연구자 편향성 등 여러 비판에 직면해 있다.


  • 방법론적 문제점: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구 방법의 엄격함 부족과 특정 목표에 맞게 고대 자료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91][92][108][109] 특히, 진정성 기준 적용의 통일성 부족과 방법론적 문제에 대한 합의 부재가 문제점으로 지적된다.[110]
  • 자료 부족 문제: 예수는 물리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없고, 예수의 저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1세기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은 예수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료 부족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을 어렵게 만든다.
  • 편향성 문제: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 과정에서 연구자들이 자신의 선호와 주관성을 예수의 성격에 투영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많은 "예수의 생애" 저술들이 낭만적,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다른 역사적 문서에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요소들을 포함하여,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5. 1. 방법론적 문제점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유럽의 다양한 학자들이 성경 비평 및 복음서 조화 개발을 넘어, 이른바 "예수의 생애"라고 불리는 예수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1][2] 이 전기들은 복음서 기록의 조화된 버전에 몇 가지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려 시도했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개요를 제시했다.[1][2] 예수의 전기를 구성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예수 탐구"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 용어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저서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의 역사적 예수 탐구: 비판적 연구''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2][36]

19세기 말까지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는데, 이 중 일부는 순전히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복음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읽고 해석했기 때문에 쓰여졌다.[1][2] 이러한 "예수의 생애" 이야기는 종종 낭만적으로 미화되었고, 매우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다른 역사적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요소들을 포함했다.[1]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타는 사건을 사용하여, 목수였던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가지고 다니며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마크 파웰은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일반적으로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복음서를 해석하는 거대한 계획(예: 예수를 개혁가로 보는 것)을 부과하는 것, 둘째, 그 계획에 맞지 않는 복음서 기록의 부분을 배제하는 것, 셋째,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는 것이다.[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많은 경우 이러한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말했다.[12]

첫 번째 탐구 동안 다양한 "예수의 생애" 저자들이 사용한 기저 주제는 다양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를 칭찬하기 위해, 다른 경우에는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

다비드 슈트라우스(1808–1874)는 27세의 나이에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을 신화적인 과장으로 거부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1835년 저서 ''예수의 생애''[18]는 예수의 생애를 편견 없는 역사적 연구에 기반을 두려는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체계적인 분석 중 하나였다.[1][2] 슈트라우스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일들을 공동체가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묘사하면서 생겨난 신화로 보았다.[1][19]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 (1906; 1910)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장에 대해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련의 설명에 대한 사망 진단서를 채웠다"고 썼다.

요하네스 바이스(1863–1914)와 빌헬름 브레데(1859–1906)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종말론적 측면을 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20] 바이스와 브레데는 모두 열정적으로 자유주의에 반대했고, 그들의 발표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0] 브레데는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메시아 비밀을 주제로 글을 썼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1]

알베르트 칼트호프(1850–1906)는 "역사적 예수가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22]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역사적 예수 탐구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1906, 1판)에서 예수의 생애를 탐구해 온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예수의 성격에 자신의 선호를 주입한 다양한 작가들의 주관성을 비난했다. 브루노 바우어(1809–1882)는 예수의 비역사성을 주장한 최초의 학문적 신학자였다.[23]

아서 드류스는 ''그리스도 신화''를 통해 예수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그리스도 신화론에 관한 내용을 주장했다.[24] 슈바이처는 드류스의 주장을 논의하기 위해, 1913년 그의 저서 ''예수의 역사적 탐구'' 2판에 두 개의 새로운 장을 추가했다.[28] 슈바이처는 19세기에 제시된 예수에 대한 발표들이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최소화하거나 무시했다고 주장했으며, 유대교 종말론적 맥락에서 예수의 프로필에 대한 자신의 버전을 개발했다.[2][31]

마르틴 켈러는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성서 분석의 주요 목표는 역사에 영향을 미친 신앙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

1953년 10월 20일 에른스트 케제만의 강연 "역사적 예수의 문제"는 제2의 탐구의 시작을 알렸다.[39] 케제만은 복음서가 신학적 목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전히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는 입장을 내세웠다.[2] 케제만의 유사성 기준은 복음서 구절을 당시의 유대교적 맥락과 비교하여 유사하지 않을 경우 안전한 근거를 둔다는 데 무게를 둔다. 제2의 탐구 동안 난처함 기준도 도입되었는데, 이 기준은 어떤 집단이 자신들에게 난처한 이야기를 지어낼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 제2의 탐구의 초기 추진력은 거의 사라졌다.[2][40] 1977년 E.P. 샌더스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 출판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였고, 제3의 탐구를 시작하게 했다.[3] 1982년, N. T. 라이트는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제3의 탐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47][48] 제3의 탐구는 예수의 팔레스타인적이고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으며, 예수의 인물 자체보다는 그 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진정성 기준의 유용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제임스 D. G. 던의 2003년 연구인 『기억된 예수』는 "기억 이론과 목격자 증언에 대한 [...] 관심 증가"의 시작이었다.[53][54] 던은 기독교가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가졌던 영향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그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형성했고, 이는 구전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크리스 키스, 레 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사회적 기억" 접근 방식을 주장한다.[55]

성서학자들이 사용하는 역사적 분석 기법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91] 제임스 던에 따르면, "이용 가능한 자료만으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트 어만과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라도 예수의 삶의 기본적인 요소를 넘어 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을 구성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사용된 다양한 접근 방식과 기술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비판을 제기해왔다.[91][92][108][109]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삶을 쓰는 것만큼 한 인간의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역사적 과업은 없다"고 말했다.[117]

5. 2. 자료 부족 문제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자신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36] 계몽주의 이후, 유럽 학자들은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전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를 "예수의 생애"라고 불렀다.[1][2] 이 전기들은 복음서 기록에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의 생애에 대한 새로운 개요를 제시하려 했다.[1][2]

19세기 말까지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는데, 이 중 일부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이는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서가 아니라, 복음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1][2] 이 "예수의 생애" 이야기들은 낭만적으로 미화되거나,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다른 역사적 문서에 없는 새로운 요소들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타는 사건을 바탕으로, 목수였던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가지고 다니며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마크 파웰은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거대한 계획의 부과, 계획에 맞지 않는 복음서 기록의 배제,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자료의 추가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1]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이러한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말했다.[12]

바트 어만과 쾨스텐베르거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라도 예수의 삶의 기본적인 요소를 넘어 역사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예수의 모습을 구성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N. T. 라이트와 루크 티모시 존슨과 같은 학자들은 복음서에 제시된 예수의 모습이 대체로 정확하며, 반대하는 학자들은 고대 시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물리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없으며, 예수의 저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1세기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은 예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텍스트 학자 바트 어먼은 로마인들이 모든 것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보관했다는 것은 신화라고 적고 있지만,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1세기 이내에 예수를 언급하는 세 개의 로마 자료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예수 생전에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이는 고대 인물에게는 드문 일이 아니다. 요세푸스는 1세기의 로마-유대 학자로서 예수를 두 번 언급한다. 어먼은 예수의 존재에 대한 독립적인 증언이 충분하며, 이는 "어떤 종류의 고대 인물에게도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다.[119]

예수에 대한 2세기와 3세기의 추가적인 언급이 있지만, 게리 하버마스는 성경 외 자료의 품질과 신뢰성이 다양하며 예수의 삶에 대한 개략적인 윤곽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교부들과 같은 기독교 비신약 자료들이 데이터의 많은 부분을 신약에 의존하므로 독립적인 자료로 간주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120]

예수에 대한 주요 자료는 복음서이므로, 역사 속의 예수는 이 글들의 역사적 신뢰성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121]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신의 진정성과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복음서에 언급된 사건 중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바트 어먼은 "역사 기록에서 복음서를 무시하는 것은 공정하거나 학문적이지 않다"고 말한다.[122] 그는 덧붙여 "복음서에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정보가 있다."라고 말한다.[122]

5. 3. 편향성 문제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역사적 예수 탐구 과정에서의 편향성 문제를 지적했다.[36] 계몽주의 시대 이후, 유럽 학자들은 성경 비평과 복음서 조화를 넘어 예수의 생애, 즉 "예수의 생애"를 쓰기 시작했다.[1][2] 이들은 복음서 기록을 조화시키고 역사적 기법을 적용하여 예수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하려 했다.[1][2]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 예수 탐구"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슈바이처의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2][36]

19세기 말에는 수백 권의 "예수의 생애"가 쓰여졌는데, 이 중 일부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1][2] 이들은 새로운 자료가 아닌, 복음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쓰여졌다.[1][2] 이러한 "예수의 생애"는 낭만적으로 미화되거나, 심리적이거나, 복음서나 역사적 문서에 없는 요소를 포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르네스트 르낭은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를 탄 사건을 바탕으로, 예수가 갈릴리에서 나귀를 타고 다니며 여러 마을을 여행하는 온화한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1][11]

마크 파웰은 이러한 "예수의 생애" 저술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말한다.[1]

#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복음서를 해석하는 거대한 계획 (예: 예수를 개혁가로 보는 것)

# 그 계획에 맞지 않는 복음서 기록 부분의 배제

# 이야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자료의 추가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베르거는 이러한 이야기가 1세기 유대인 인물보다는 "탐구자 자신과 같은" 예수를 묘사했다고 말했다.[12]

첫 번째 탐구 동안, "예수의 생애" 저자들은 다양한 주제를 사용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기독교를 칭찬하기 위해, 다른 경우에는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 초기 주목할 만한 출판물 중 하나는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1694–1768)의 저작으로,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을 세우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 덜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묘사했다.[1] 라이마루스는 기적을 거부하고 성경 저자들을 사기라고 비난했지만, 그의 논문은 출판되지 않았다.[13] 후에 고트홀트 레싱(1729–1781)이 라이마루스의 논문을 사후에 출판했다.[14] 바론 돌바크(1723–1789)는 종교 비판을 위해 ''에케 호모!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 탐구; 복음서의 합리적 분석''을 저술하여 1769년 암스테르담에서 익명으로 출판했다.[15][16] 이 책은 조지 휴스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휴스턴은 신성 모독죄로 2년간 감옥에 갇혔다.[17]

다비드 슈트라우스(1808–1874)는 27세의 나이에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을 신화적인 과장으로 거부하며 "역사적 예수" 탐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1835년 저서 ''예수의 생애''[18]는 예수의 생애를 편견 없는 역사적 연구에 기반을 두려는 최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체계적인 분석 중 하나였다.[1][2] 슈트라우스는 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일들을 공동체가 이야기를 다시 말하고 자연 현상을 기적으로 묘사하면서 생겨난 신화로 보았다.[1][19]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탐구'' (1906; 1910)에서 슈트라우스의 주장에 대해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일련의 설명에 대한 사망 진단서를 채웠다"고 썼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는 학문적 연구에는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전 시대와 다비드 슈트라우스 이후 시대" 두 가지 광범위한 기간이 있다고 덧붙였다. 슈트라우스 이후에 등장한 작품 중 에르네스트 르낭의 저서 ''예수의 생애''는 학문성과 감상적이고 소설적인 심리적 해석을 결합하여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석 달 만에 여덟 번이나 재판되었다.[1] 르낭은 복음의 서술과 자신의 심리적 해석을 결합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갈릴리에서 "사랑의 달콤한 신학"을 설교했지만, 예루살렘에서 기득권 세력과 마주치자 혁명가로 변했다는 것이다.[1]

요하네스 바이스(1863–1914)와 빌헬름 브레데(1859–1906)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종말론적 측면을 학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20] 바이스와 브레데는 모두 열정적으로 자유주의에 반대했고, 그들의 발표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의 특이성을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20] 브레데는 마가 복음서에 나오는 메시아 비밀을 주제로 글을 썼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21]

알베르트 칼트호프(1850–1906)는 1904년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리스도 문제에 대한 새로운 기여'' (1907년 영어로 출판, ''기독교의 부상'')의 "역사적 예수가 있었는가?"라는 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주님,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죽음에서 부활한 자와 혁명적 사상을 가진 작은 건축업자의 아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라고 썼다.[22]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역사적 예수 탐구 -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 (1906, 1판)에서 예수의 생애를 탐구해 온 역사를 중요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제시했으며, 예수의 성격에 자신의 선호를 주입한 다양한 작가들의 주관성을 비난했다. 브루노 바우어(1809–1882)는 예수의 비역사성을 주장한 최초의 학문적 신학자였으나, 그의 학문은 독일 학계에 의해 묻혔다.[23]

제2의 탐구는 1953년 10월 20일 에른스트 케제만의 강연 "역사적 예수의 문제"에서 시작되었다.[39] 케제만은 복음서가 신학적 목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전히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다는 입장을 내세웠다.[2]

케제만의 관점은 많은 학자들이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개발하도록 영감을 주었다.[2] 귄터 본캄의 1956년 저서 ''나사렛 예수''는 "복음서가 예수의 메시지, 행위, 역사에 대해 보고하는 것은 여전히 진정성으로 구별되며... 이러한 특징들은 우리를 직접 예수라는 지상적 인물에게로 이끈다"는 진술로 1960년대 제2의 탐구에 추진력을 제공했다.[2][41] 제임스 M. 로빈슨의 1959년 저서 ''역사적 예수를 위한 새로운 탐구''는 여러 번 재판되었다.[2][42]

케제만은 유사성 기준을 도입했는데, 이는 복음서 구절을 당시의 유대교적 맥락과 비교하여 유사하지 않을 경우 안전한 근거를 둔다는 데 무게를 둔다. 제2의 탐구 동안 난처함 기준도 도입되었다. 이 기준은 어떤 집단이 자신들에게 난처한 이야기를 지어낼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기준은 초기 기독교예수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를 결코 지어내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 사함을 위해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는 죄가 없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43] 마르첼로 크라베리의 1967년 저서는 사해 문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예수가 주장한 신성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그 시대의 유대인에게는 특이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44]

1970년대 초, 제2의 탐구의 초기 추진력은 거의 사라졌다.[2][40] 벤 위더링턴은 "불트만의 압도적인 영향력과 실존주의에 대한 열정이 약해지면서 제2의 탐구에 대한 열정도 식었다"고 말했다.[2] 게자 버르메스는 불트만의 영향력이 끝난 후에야 진정한 역사적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고 언급했다.[40][45] 폴 자흘은 제2의 탐구가 당시 상당한 기여를 했지만, 그 결과는 현재 대부분 잊혀졌지만 반증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46]

1977년 E.P. 샌더스의 저서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출판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였고, 제3의 탐구를 시작하게 했다.[3] 1982년, N. T. 라이트는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 "제3의 탐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47][48]

제3의 탐구는 예수의 팔레스타인적이고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으며, 예수의 인물 자체보다는 그 배경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진정성 기준이 이 탐구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윌리엄 아르날과 제임스 크로슬리는 예수의 "유대인성"에 대한 학문적 담론과 학자들이 자신의 예수를 "매우 유대인적"이라고 제시하면서 암묵적으로 기독교적이고 문화적인 대체 신학을 지속하는 배후의 다양한 요인들을 살펴본다.[94] 로버트 J. 마일스는 현대 학자들이 예수를 "전복적"이라고 주장하는 방식과 실제로 그가 비전복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을 옹호하는 방식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힙스터 현상과 유사하다.[95] 엘리자베스 슐러 피오렌자는 다양한 형태의 가부장제가 남성적 이미지로 학문적인 예수를 왜곡해 왔음을 보여주었다.

성서 학자 클라이브 마시[96]는 예수의 초상 구성이 종종 다양한 "특정 의제"와 이념에 의해 추진되어 왔다고 말했다.[92] 그는 관련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요소들이 종종 특정 목표에 맞게 해석된다고 주장한다.[92] 마시는 예수의 신성을 확인하려는 신학적 의제, 기독교를 폄하하거나 반증하려는 의제, 사회 변화를 일으키려는 희망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해석하려는 정치적 의제를 열거한다.[92][97]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는 형이상학적 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 회의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한다.[98]

존 P. 메이어는 "많은 혼란이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100] 메이어는 또한 과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진정한 역사적 탐구보다는 대안적인 기독론을 생산하려는 욕구에 의해 동기 부여된 경우가 많다고 썼다. 어떤 사람들은 현대 성서 학문이 때때로 충분히 비판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은밀한 변증법에 해당한다고 주장해 왔다.[101][102]

반대편에는 역사학자 마이클 리코나가 "그러한 믿음이 ...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간주될 때 종종 인지되지 않는 세속적 편견"이 있다고 말한다. 신약 학자 스콧 맥나이트는 편견이 보편적인 비판이라고 지적하며, "모두가 자신의 신념 체계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역사학자 마이클 그랜트는 예수 연구의 삶에서 "악명 높은 문제가 절정에 달한다"고 지적한다. 리코나는 "편견 없는 독자/저자란 없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모든 학자는 "철학적 짐을 지니고 있으며" "공정한 역사학자"는 없다고 말한다. 스티븐 포터는 "우리는 모두 매우 편견 있는 관찰자이며, 얼마나 편견이 있는지 감안할 때, 우리의 기준이 종종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03] 라고 말한다.

신약 학자 니콜라스 페린은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특정'' 편견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큰 문제로 보지 않는다.[104][105]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는 다양한 배경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성서 문학 협회에는 6,900명의 회원이 있으며, 그중 절반은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기독교인,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불교도, 불가지론자, 무신론자"로 구성된 신약 학자들로, 전 세계 수많은 국가와 민족 출신이다.

역사학자 토머스 L. 해스켈은 "심지어 깊고 고정적으로 헌신하는 논객조차도" "그러한 사람이 라이벌의 사고방식에 성공적으로 들어가 잠재적으로 매력적인 주장을 제시할 수 있는 한, 잠재적으로 같은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객관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106] 리코나는 편견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되는 다음 6가지 도구/방법을 제시했다.

  • 방법론
  • 관점(지평)과 방법을 공개
  • 동료 압력
  • 비우호적인 대상에게 제출
  • 관련 역사적 기반 고려
  • 편견으로부터의 분리


에이미-질 레빈은 학문에서 수많은 예수의 초상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 학자들의 "복음서" 대신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예수에 대한 출발점과 근거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107]

6. 한국적 관점에서의 역사적 예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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