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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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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미는 306년 유백근의 반란에 가담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유연에게 귀순하여 전조(前趙)의 장군으로 활약했다. 낙양 함락에 기여했으나, 유요와의 갈등과 석륵과의 불화로 인해 결국 석륵에게 살해당했다. 그는 유연의 신임을 얻어 정동대장군, 동래공에 봉해졌으며, 낙양 점령 후에는 유요와 대립하고 석륵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2. 초기 생애

306년(광희 원년),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가동(家僮)을 이끌고 그를 따라 장사(長史)가 되었다.[32][33] 유백근이 죽은 후에는 무리를 모아 산으로 들어가 청주(靑州)·서주(徐州)·곤주(袞州)·예주(豫州) 등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듬해, 왕미는 유연에게 귀순하여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으며, 그 공으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동래공(東萊公)에 봉해졌다.

311년(영가 5년), 유요와 함께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병사들을 풀어 궁궐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이때 회제(懷帝)는 사로잡혀 유폐되었고, 양황후(羊皇后)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전(司馬銓)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陵墓)가 파헤쳐지고 궁묘(宮廟)는 불태워졌으며, 백관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의 남녀가 살해되었다.

이후 왕미는 유요와 대립하고 석륵(石勒)을 주살하려 했으나, 오히려 석륵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고, 그의 무리는 석륵에게 흡수되었다.[32][34]

2. 1. 배경

왕미는 교동반도 동래군의 관리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왕기는 조위 시대에 현도군 태수를 지냈으며, 고구려-위 전쟁과 촉한 정복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했다. 진 무제 치세 동안 왕기는 여남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젊은 시절의 왕미는 용감하고 박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책과 기록으로 주변을 채웠다. 또한 한때 협객으로 활동하며 낙양 주변에서 봉사했다. 동중도(董仲道)[3]라는 은둔자는 길에서 왕미를 만나 "그대는 늑대처럼 말하고 표범처럼 생겼소. 혼란에 능하고 불행을 즐기며, 천하가 혼란스럽고 동요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학자나 귀족의 행동이 아니오!"[4]라고 말했다. 왕미는 2천 석 (관직의 급료 액수. 나아가 군 태수 등의 고관을 지칭함)의 관료를 대대로 배출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왕미는 낙양으로 유학을 갔다. 훗날 한 왕조를 세우는 흉노 연제부유연과 매우 사이가 좋았으며, 유연이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후에 왕미는 낙양에서 고향인 청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때 유연은 구곡의 강가까지 배웅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2. 2. 젊은 시절

왕미는 교동반도 동래군의 관리 가문 출신으로, 2천 석 (관직의 급료 액수. 나아가 군 태수 등의 고관을 지칭함)의 관료를 대대로 배출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왕기는 조위 시대에 현도군의 태수였으며, 고구려-위 전쟁에서 크게 기여했고, 위나라의 경쟁국인 촉한 정복에 참여했다. 진 무제 치세 동안 왕기는 여남군의 태수로 임명되었다.[3]

젊은 시절의 왕미는 용감하고 박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책과 기록으로 주변을 채웠다. 그는 또한 한때 협객(遊俠, 유협)으로 활동하며 낙양 주변에서 봉사했다. 동중도(董仲道)라는 은둔자가 길에서 왕미를 만나 "그대는 늑대처럼 말하고 표범처럼 생겼소. 혼란에 능하고 불행을 즐기며, 천하가 혼란스럽고 동요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는 학자나 귀족의 행동이 아니오!"라고 말했다.[4]

왕미는 젊은 시절 낙양으로 유학을 갔다. 훗날 한 왕조를 세우는 흉노 연제부유연과는 매우 사이가 좋았으며, 유연이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후에 왕미는 낙양에서 고향인 청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 때 유연은 구곡의 강가까지 배웅하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3. 반란 활동

유백근이 죽은 후, 왕미는 남은 무리를 모아 산으로 들어가 청주, 서주, 연주(兗州), 예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전투를 벌였다. 왕미의 무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307년 유연에게 귀순하여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으며, 그 공으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동래공(東萊公)에 봉해졌다.

311년 (영가 5년) 유요와 함께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병사들을 풀어 궁궐을 약탈했다. 이때 회제는 사로잡혀 유폐되었고, 양황후(羊皇后)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전(司馬銓)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가 파헤쳐지고 궁묘는 불탔으며, 백관을 포함하여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유요와 대립하고 석륵을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석륵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으며, 그의 무리는 석륵에게 흡수되었다.[32][34]

3. 1. 유백근의 난 가담 (306년)

306년(광희 원년), 유백근이 현현령(惤縣令)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가동(家僮)을 이끌고 가담하여 장사(長史)가 되었다.[32][33] 유백근은 짐공을 자칭하고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었으며, 왕미의 종제 왕상 또한 동중랑장에 임명되었다. 유백근 군은 임치를 공격하여 사마략이 파견한 장군 유돈을 격퇴하고, 유돈을 낙양으로, 사마략을 요성으로 철수시켰다.

하지만, 안북장군 왕준이 파견한 군대에 패배하여 유백근은 전사했다. 왕미는 패잔병을 모아 해안가를 따라 도주했지만, 구희의 동생 구순에게 토벌당했다. 결국 왕미는 장광산(현재의 산둥성 옌타이시 라이양시 동쪽)으로 도주하여 몸을 숨겼다.[7]

3. 2. 산적 두목 시절 (307년 ~ 308년)

306년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가동(家僮)을 이끌고 유백근을 따라 장사(長史)가 되었다.[32][33] 유백근이 죽자 왕미는 무리를 모아 산으로 들어가 청주(靑州)·서주(徐州)·곤주(袞州)·예주(豫州) 등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가 원년(307년) 2월, 왕미는 스스로 정동대장군이라 칭하고 청주와 서주를 침략하여 군 태수를 쳐 죽였다. 당시 조정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부 사마월은 국선(鞠羨)을 동래군 태수로 발탁하여 토벌을 명했지만, 왕미는 오히려 국선을 격파하고 그의 수급을 획득했다. 그러나 연주 자사 구희[28]가 토벌군을 파견하자 대패하여 병력이 흩어졌다.

이듬해(307년 12월) 왕미는 옛 친구였던 유연서진에 반란을 일으켜 한(후의 전조)을 건국한 것을 알고, 조·의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령과 합류하여 함께 유연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공순의 뜻을 나타냈다. 유연은 왕미로부터의 사신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왕미를 진동대장군·청서이주목·도독연해제군사에 임명하고, 동래공에 봉하는 뜻을 전했다.[29]

영가 2년(308년) 3월, 왕미는 흩어진 병력을 다시 결집하여 세력을 회복하고, 구희와 다시 교전하여 여러 차례 격파했다. 더 나아가 제 장수를 나누어 청·서·연·예의 사주의 제 군으로 침공하게 하여, 태산·····여남·영천·상성 등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키고, 태수·현령을 많이 살해했다. 이로 인해 왕미의 병력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고, 조정의 힘으로는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4. 전조(한) 건국과 활동

306년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가동(家僮)을 이끌고 그를 따라 장사(長史)가 되었다.[32][33] 유백근이 죽자 무리를 모아 산으로 들어가 청주(靑州)·서주(徐州)·곤주(袞州)·예주(豫州) 등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로 불렸다.

307년 유연에게 귀순해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으며, 전공으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되고 동래공(東萊公)에 봉해졌다. 308년 3월,[11] 여러 장군들을 보내 청주, 서주, 연주 및 예주를 약탈하게 했고, 그곳에서 많은 지역 관리들과 태수들을 살해했다. 구희는 왕미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왕미는 허창에 도착하여 도시의 무기고에 있던 무기와 장비를 비웠다.[12]

309년 4월, 왕미는 시중, 도독 청서연예형양 6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청주목에 임명되었고, 유총・석륵과 함께 호관을 공격했다.

311년 유요와 함께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병사를 풀어 궁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는데, 이때 회제는 사로잡혀 유폐되고 양황후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전(司馬銓)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가 파헤쳐지고 궁묘가 불살라졌으며, 백관을 포함해 3만여 명의 남녀가 살해되었다.[32][34] (영가의 난)

이후 유요와 대립하고 석륵의 주살을 도모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석륵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으며, 무리는 석륵에게 흡수되었다.[32][34]

4. 1. 유연에게 귀순 (308년)

306년 현현령(惤縣令) 유백근(劉柏根)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미는 가동(家僮)을 이끌고 그를 따라 장사(長史)가 되었다.[32][33] 유백근이 죽은 후 왕미는 무리를 모아 산으로 들어가 청주(靑州)·서주(徐州)·곤주(袞州)·예주(豫州) 등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였는데,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라는 별명을 얻었다.

307년, 왕미는 유연에게 귀순하여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다. 유연은 왕미의 귀순을 크게 환영하며, 그를 동래공(東萊公)에 봉하고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14] 유연은 왕미를 두융, 제갈량, 등우에 비유하며 칭찬했다.[14]

왕미는 유연에게 귀순하기 전, 유령(劉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진(晉)나라 군대는 아직 강하고, 이대로는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유연(劉淵)이 일찍이 인질이었을 때, 저는 그와 낙양에서 교류하며 약속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금 (유연은) 한왕(漢王)을 칭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 귀순하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유령은 이에 동의했고, 왕미는 랑당과 유령, 왕상(王桑) 등과 함께 황하를 건너 훤원관(轘轅關)에서 유연에게 망명했다.[30] 유연은 왕미의 도착을 크게 기뻐하며, 시중, 어사대부를 보내 길까지 마중하게 하고, 서신을 보내 환영의 뜻을 전했다.

이후 왕미는 유연과 접견하여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했다. 유연은 왕미를 사례교위로 임명하고 시중, 특진을 더하려 했으나, 왕미는 굳이 사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30]

4. 2. 낙양 공략 (308년 ~ 311년)

306년 유백근의 반란에 가담했던 왕미는 유백근이 죽은 후, 무리를 모아 청주, 서주, 연주(兗州), 예주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의 무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비표(飛豹)'라는 별명으로 불렸다.[32][33]

308년 3월,[11] 왕미는 여러 장군들을 보내 청주, 서주, 연주 및 예주를 약탈하게 했고, 그곳에서 많은 지역 관리들과 태수들을 살해했다. 구희는 왕미의 군대와 여러 번 싸웠지만, 이길 수 없었다. 왕미는 허창에 도착하여 도시의 무기고에 있던 무기와 장비를 비웠다.[12]

유연에게 귀순한 왕미는 존호를 칭할 것을 권했으며, 전공으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진되고 동래공(東萊公)에 봉해졌다.

308년 6월 23일, 왕미가 마침내 낙양에 도착했을 때, 사공(司空) 왕연이 그를 상대로 군대를 지휘하도록 임명되었다. 낙양의 방어는 성공적으로 왕미를 압도하고 몰아냈다. 6월 26일, 왕미는 퇴각하기 전에 성문을 불태웠지만, 왕연은 왕병(王秉)을 보내 그를 추격했고, 그는 칠리간(七里澗)에서 다시 패배했다.[13]

309년 4월, 왕미는 시중, 도독 청서연예형양 6주 제군사, 정동대장군, 청주목에 임명되었고, 초왕(楚王) 유총・전봉도독 석륵과 함께 호관을 공격했다. 유곤은 호군 황숙(黃叔)・한술(韓述)을 호관 구원을 위해 파견했지만, 한군은 모두 격파했다. 태부 사마월은 회남 내사 왕광(王曠), 안풍군 태수 위건(韋乾), 장군 시융(施融), 조초(曹超)에게 요격을 명했지만, 왕미는 고도(古都), 장평(長平) 사이에서 그들과 싸워 이를 대파하고 6, 7할의 병사를 쳐 죽였으며, 시융, 조초의 수급을 얻었다. 더욱이 둔류(屯留)・장자(長子)를 공략하여 1만 9천 명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만들자, 상당군 태수 방춘(龐春)은 호관과 함께 한(漢)에 항복했다.

같은 해 8월, 유총과 함께 1만 기병을 이끌고 낙양으로 침공했으며, 용양대장군 유요, 안북장군 조고 등이 후속 부대가 되었다. 한나라는 동해왕 사마월이 파견한 평북장군 조무(棗穆) 등을 격파하고, 연이어 평창공 사마모가 파견한 순우정 등도 격퇴하면서 진군을 계속하여 의양(宜陽)까지 도달하여, 이학(국학, 태학)을 불태웠다. 9월, 유총은 승리에 도취되어 대비를 게을리 하였고, 홍농군 태수 원연의 위장 투항으로부터 야습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이로 인해, 한나라는 평양으로 철수했다.

10월, 유총, 유요, 여음왕 유경 등과 함께 정예 5만 명을 이끌고 다시 낙양으로 침공했고, 대사공 호연익이 보병을 이끌고 후속 부대가 되었다. 서진 조정은 한나라 군대를 격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다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한나라 군대는 하남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의양에서 서명문으로 진격하여 주둔했다. 서진의 호군 가윤과 북궁순 등은 밤을 틈타, 용사 천여 명을 이끌고 야습을 가했고, 대하문에서 한나라 군대는 패배하여 정로장군 호연호가 참살되었다. 그 때문에 남쪽으로 군대를 후퇴시켜 낙수에 진영을 구축했지만, 호연익이 부하의 반역으로 살해당하면서, 그 부대는 궤멸되었다. 그럼에도 유총은 공세를 늦추지 않고 다시 선양문에 진주했고, 왕미는 광양문에 주둔하며, 유요, 유경 등과 함께 각 문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유총은 전장을 시찰하기 위해 본진을 비운 틈을 타, 사마월 휘하의 태부 참군 손순(孫順), 구광, 루포 등에게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했다.

이에 왕미는 유총에게 "지금 (우리) 군은 이점을 잃었고, 낙양의 수비도 여전히 견고합니다. 게다가 수레 운송을 하려 해도 길이 좁고, 식량은 며칠도 버티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용양(용양대장군 유요)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식량을 징발한 후에 다시 거병합시다. 하관(자신의 일)도 병사와 식량을 모아 연주와 예주에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올 날을 대비해두겠습니다. 이것을 어찌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진언했다. 유총은 이제 와서 귀환은 안 된다며 군대를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유연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도착하자, 마침내 군대를 귀환시켰다.

310년 1월 6일,[18] 왕미는 군대를 이끌고 화원관(轘轅, 허난성 소림사에서 북서쪽으로 약 3km 지점)을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여 상성현을 침략했지만, 신급(新汲, 현대 푸거우현)에서 보성(薄盛)에게 패했다. 그러나 동시에 영천군, 상성, 여남군, 남양군, 하남군의 많은 난민들이 왕미에 합류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전쟁을 피해 도망쳤던 이 난민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왕미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도시와 마을을 불을 지르고, 서기와 현지 관리들을 살해했다.[19]

11월, 왕미 또한 환원관에서 철수했지만, 사마월 휘하의 박성, 이운 등에게 추격을 받았고, 신급에서 이를 맞아 싸웠으나 패배했다. 그 후, 2천 기병을 이끌고 상성의 여러 현으로 침공했다. 당시, 하동, 평양, 홍농, 상당에 살던 수만 가구의 백성들이, 영천, 상성, 여남, 남양, 하남으로 피난해왔었다. 그들은 원래 살던 주민들에게 냉대를 받았기 때문에, 성과 촌락을 불태우고, 2천석의 장리를 살해하여 왕미에게 호응했다.

같은 해 10월, 하내왕 유찬과 시안왕 유요 등과 함께 4만 병력을 이끌고 다시 낙양을 공격했다. 도중에 석륵과 합류하여 서진의 감군 배막을 면지에서 격파하고 진군을 계속하여 낙수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대로 낙양성을 공격하지 않고 환원관에서 나와 양, 진, 여남, 영천의 4개 군을 공격했다.

311년 왕미는 유요와 함께 낙양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병사를 풀어 궁성을 대대적으로 약탈했는데, 이때 회제는 사로잡혀 유폐되고 양황후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전(司馬銓)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가 파헤쳐지고 궁묘가 불살라졌으며, 백관을 포함해 3만여 명의 남녀가 살해되었다.[32][34]

4. 2. 1. 영가의 난 (311년)

311년(영가 5년) 5월, 왕미는 유요와 함께 상성을 공격했다. 호연안이 한나라 황제 유총의 명으로 낙양을 공격하자, 왕미와 유요는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다.[21] 이때 낙양은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이었고,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관리들은 하음으로 도망쳤다.[34]

6월, 왕미는 낙양성 남쪽의 선양문에 도착하여 호연안과 함께 성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태극전에 들어가 병사들을 풀어 대대적인 약탈을 벌였다. 회제는 단문에 유폐되었고, 양황후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알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가 파헤쳐지고 궁전과 종묘가 불탔으며, 관리와 백성 3만여 명이 살해되었다. 회제는 평양으로 끌려갔으며, 이를 기점으로 서진은 사실상 멸망했다. (영가의 난)[34]

왕미는 유요와 갈등을 겪었다. 유요는 왕미가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도에 들어가 약탈한 것에 분개했다. 유요는 톱니문 장군 왕연(王延)의 목을 베는 것으로 응징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싸웠고, 왕미의 수석 서기 장숭(張嵩)이 화해를 권유하여 수천 명의 병사가 죽은 후에야 왕미는 유요와 화해했다. 그러나 왕미가 유요에게 한나라의 수도를 평양에서 낙양으로 옮기도록 유총에게 건의하라고 조언한 후, 그들은 다시 다퉜다. 유요는 듣지 않고 대신 도시를 불태웠다. 분노한 왕미는 그를 꾸짖었다. "이 초게 녀석아, 이게 왕이나 황제가 하는 짓이냐?" 왕미는 더 이상의 확전을 원치 않아 청주로 돌아갔다.[24]

5. 죽음

왕미는 유요석륵과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 ('유요와의 갈등', '석륵과의 갈등과 최후' 하위 섹션 참고)

왕미가 죽은 후, 석륵은 유총에게 탄원서를 보내 왕미를 반역자로 몰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유총은 석륵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그가 한(漢)에 충성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석륵에게 지위를 부여했다.[25] 왕미의 부하인 조니는 청주를 계속 통치했으며, 323년 석륵의 조카 석호에게 패배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왕미의 가족이 조니의 패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356년에 왕미의 조카 왕립(王立)이 생존했음이 확인되었다. 그는 조니의 손자 조암(曹巖)과 함께 전연의 신하 국은(鞠殷)에게 발견되었다. 국은의 아버지 국팽(鞠彭)은 동래에서 조니와 싸우다 요동반도로 도망쳐 모용외를 섬긴 장군이었다. 국팽의 아버지 국현은 307년에 왕미가 죽인 진나라 장군이었다. 국은이 동래를 다스릴 때, 국팽은 아들에게 왕미와 조니의 후손을 찾아 친분을 맺어 갈등을 해결하라고 권했다. 국은은 그렇게 했고 세 사람은 매우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의 관계는 당시 동래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했다.[26]

5. 1. 유요와의 갈등

311년(영가 5년), 유요와 함께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병사를 풀어 궁궐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회제는 사로잡혀 유폐되었고, 양황후(羊皇后)는 욕을 당했으며, 황태자 사마전(司馬銓)은 살해되었다. 또한 능묘가 파헤쳐지고 궁묘는 불탔으며, 백관을 포함해 3만여 명의 남녀가 살해되었다.[32]

그러나 낙양 점령 과정에서 왕미는 유요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유요는 왕미가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수도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한 것에 분개했다. 유요는 왕미의 부하인 왕연(王延)을 처형했고, 이에 분노한 왕미는 유요의 진영을 공격하여 양측에서 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미의 장사(長史) 장숭은 왕미에게 유요가 황족이므로 물러서야 한다고 간언했고, 왕미는 이를 받아들여 유요에게 사죄하여 화해했다.

하지만 왕미가 유요에게 한의 수도를 평양에서 낙양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유요는 이를 따르지 않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이에 왕미는 크게 분노하며 "도각(흉노의 종족명)의 자식. 어찌 제왕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항관(項關)에 주둔했다.

이후 왕미는 석륵의 주살을 도모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석륵에게 습격당해 살해되었으며, 무리는 석륵에게 흡수되었다.[32][34]

5. 2. 석륵과의 갈등과 최후

왕미는 석륵과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지만, 속으로는 서로를 매우 경계했다. 왕미는 낙양에서 약탈한 미녀와 보물을 석륵에게 보냈지만, 석륵은 왕미의 용맹함을 경계했다.[32]

311년, 왕미는 부하 유돈을 조억에게 보내 함께 석륵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돈은 동아에서 석륵에게 붙잡혀 서신이 발각되었고, 석륵은 유돈을 살해하고 왕미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25]

같은 해 6월, 석륵은 몽성을 급습하여 연주자사 구희를 사로잡았다. 왕미는 석륵을 칭찬하는 척하며 비꼬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석륵은 참모 장빈과 함께 왕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25]

이후 석륵은 걸활의 진오와, 왕미는 걸활의 유예와 대치했다. 왕미가 열세에 놓이자 석륵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석륵은 유예를 죽였다. 왕미는 크게 기뻐하며 석륵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25]

311년 10월, 왕미는 석륵의 초대로 기오에서 열린 술자리에 참석했다. 장사 장숭은 전저와 손준의 예를 들며 만류했지만, 왕미는 이를 듣지 않았다. 왕미가 술에 취하자, 석륵은 직접 칼로 왕미를 찔러 죽이고 그의 군대를 흡수했다.[32][34][25]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0311-09-29
[2] 서적 Zizhi Tongjian 0311-10-29
[3] 서적 Book of Jin 0265
[4] 서적 Book of Jin
[5] 서적 Book of Jin 0306-03-31
[6] 서적 Book of Jin
[7] 서적 Book of Jin
[8] 서적 Book of Jin
[9] 서적 Zizhi Tongjian 0307-03-20
[10] 서적 Book of Jin
[11] 서적 Zizhi Tongjian 0308-03-09
[12] 서적 Book of Jin
[13] 서적 Zizhi Tongjian 0308-06-05
[14] 서적 Book of Jin
[15] 서적 Zizhi Tongjian 0308-10-02
[16] 서적 Book of Jin
[17] 서적 Book of Jin
[18] 서적 Zizhi Tongjian 0309-11
[19] 서적 Book of Jin
[20] 서적 Book of Jin
[21] 서적 Book of Jin
[22] 서적 Zizhi Tongjian 0311-06
[23] 서적 Book of Jin
[24] 서적 Book of Jin
[25] 서적 Zizhi Tongjian
[26] 서적 Zizhi Tongjian
[27] 서적 十六国春秋
[28] 서적 資治通鑑
[29] 서적 資治通鑑
[30] 서적 資治通鑑
[31] 서적 資治通鑑
[32] 서적 『진서』 「왕미전」
[33] 서적 『진서』 「혜제기」
[34] 서적 『진서』 「석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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