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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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평은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장군으로, 원래 조조 휘하에 있다가 한중 전투에서 유비에게 투항했다. 그는 문맹이었지만, 뛰어난 전략가였으며, 제갈량의 북벌과 위연의 난 진압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244년 조상이 이끄는 위나라 군대의 침공을 흥세산에서 성공적으로 막아내 한중을 지켜냈다. 진수는 그를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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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은 고구려의 제10대 왕으로, 위나라와 외교 및 전쟁을 벌이고 신라와 관계를 맺었으며, 위나라 침략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으로 천도하려다가 248년에 사망하고 아들 중천왕이 즉위했다. - 248년 사망 - 히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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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상산군 출신으로 유비의 부하가 되어 창술에 능한 용맹함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유선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고, 사후 대장군 순평후의 시호를 받았다. - 촉한의 후작 - 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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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는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자 정치인으로,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로서 유비를 보좌하며 뛰어난 무예와 충절로 이름을 알렸으나, 손권의 계략으로 최후를 맞이한 후 동아시아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대중문화에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강직함과 자만심이 정치적 판단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도 받는 인물이다.
왕평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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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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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왕평 |
로마자 표기 | Wang Ping |
자 | 자균 |
로마자 표기 | Zijun |
이명 | 하평 왕평 |
로마자 표기 | He Ping Wang Ping |
출생지 | 취현, 쓰촨 성 |
사망일 | 248년 |
작위 | 안한후 |
관직 | |
섬긴 세력 | 조조 → 유비 → 유선 |
관직 | 교위 아문장 토구장군 안한장군 한중도독 진북대장군 |
임관 시작 | 215년 (교위) 219년 (아문장) 228년 (토구장군) 234년 (안한장군) 237년 (한중도독) 243년 (진북대장군) |
임관 종료 | 219년 (교위) 228년 (아문장) 234년 (토구장군) 238년 (안한장군) 238년 (한중도독) 248년 (진북대장군) |
군주 | 헌제 (교위) 유비 / 유선 (아문장) 유선 (토구장군, 안한장군, 한중도독, 진북대장군) |
승상 | 조조 (교위) 제갈량 (토구장군) |
후임 | 호제 (한중도독) |
선임 | 오의 (한중도독) |
자녀 | 왕훈 |
2. 생애
왕평은 파서군 탕거현 사람으로, 원래 조조를 섬겼으나 219년 한중 전투에서 유비에게 투항했다.
228년 가정 전투에서 마속에게 산 위에 진을 치지 말 것을 여러 번 간했으나, 마속은 듣지 않고 장합에게 패배했다. 이때 왕평은 휘하 군사 1천 명으로 북을 울리며 자리를 지켜 장합의 접근을 막고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왔다. 제갈량은 왕평을 치하하며 참군(參軍),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오부(五部)를 통솔하게 했다.
231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 왕평은 남쪽을 지켰으며, 장합의 공격을 굳게 수비하여 막아냈다.
234년 제갈량이 죽고 양의와 위연이 대립했을 때, 왕평은 양의의 명을 받들어 위연을 토벌했다. 왕평은 위연의 병사들에게 "승상(제갈량)께서 막 돌아가셨는데 승상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이 어찌 이런 더러운 일에 몸을 담았는가!"라고 소리쳐 위연의 군대를 와해시켰다.
제갈량 사후 왕평은 후전군(後典軍), 안한장군(安漢將軍)에 봉해져 오의의 부장이 되어 한중을 지켰고, 237년 오의 사후 한중을 지켰다. 243년 전감군(前監軍),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에 임명되었다.
244년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침공해오자, 왕평은 유민과 두 참군을 파견하여 흥세산(興勢山)을 점거하고 자신은 후원을 담당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유민만은 이에 동의하여 함께 1천 명의 군사로 흥세산에서 비의의 지원이 올 때까지 위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248년 왕평은 병사하였고, 적자 왕훈(王訓)이 그의 뒤를 이었다. 왕평은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엄격한 생활 방식을 유지한 인물로, 황권, 이회, 여개, 마충, 장익과 함께 촉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다.
2. 1. 초기 생애와 조조 휘하 시절
왕평은 현재의 쓰촨성 취현에 해당하는 파서군 당거현 출신으로, 촉한의 장군 구부와 같은 군 출신이다. 그는 외가에서 자랐으며, 외가의 성씨인 하(何)를 따라 '''하평'''(何平)으로도 불렸다. 사서에 그의 이름이 일관되게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말년에 성씨를 다시 왕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1]왕평은 지방 부족 지도자인 두호(杜濩)와 박호(朴胡) 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215년, 양평 전투 이후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두호와 박호를 후작으로 봉하고 파동(巴東)과 파서(巴西) 지역 방어를 맡겼다.[3] 그러나 이들은 황권에게 패배하여 파 지역을 포기해야 했다.[4] 이후 왕평은 그들과 함께 낙양 조정에 방문하여 하후연 휘하의 대행 교위(校尉)로 임명되었다.[4]
한중 공방전 동안 왕평은 조조 군 소속으로 유비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219년, 유비는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을 죽이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 소모전을 펼쳤다. 조조 군 병사들이 죽거나 탈영하는 상황에서 왕평도 유비에게 투항했다.[5] 유비는 왕평을 환영하며 아문장(牙門將)과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다.[6]
2. 2. 유비에게 투항과 한중 전투
219년 한중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 군과 싸울 때, 왕평은 유비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조조 군에 합류했다. 정군산 전투에서 유비가 하후연을 죽이고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여 조조 군에 대한 소모전을 집중하자, 조조 군의 병사들은 죽거나 탈영했다.[5] 왕평도 탈영하여 유비에게 투항했고, 유비는 왕평을 아문장(牙門將)과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다.[6]유비가 한중을 공격할 때, 왕평은 서황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서황은 물을 건너서 싸우자고 했으나 왕평은 반대했다. 결국 서황은 황충과 조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서황은 지원을 하러 오지 않은 왕평을 꾸짖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왕평은 진채에 불을 지른 뒤 조운에게 찾아가 유비에게 항복하여 편장군이 되었다.
2. 3. 제갈량의 북벌과 활약
228년, 마속을 따라 가정 전투에 참전했다. 마속이 산에 진을 치자 여러 번 간했으나 마속은 듣지 않았고, 결국 장합에게 패배한다. 이때 왕평은 휘하 군사 1천 명으로 북을 울리며 자리를 지켜 장합의 접근을 막고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왔다.[7] 제갈량은 왕평을 치하하며 참군(參軍),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오부(五部)를 통솔하게 했다.[8]231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 남쪽을 지켰으며, 장합의 공격을 굳게 수비하여 막아냈다.[9]
234년, 제갈량 사후 양의와 위연이 대립했을 때, 왕평은 양의의 명을 받들어 위연을 토벌했다. 왕평은 위연의 병사들에게 “승상(제갈량)께서 막 돌아가셨는데 승상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이 어찌 이런 더러운 일에 몸을 담았는가!”라고 소리쳐 위연의 군대를 와해시켰다.[10]
2. 4. 제갈량 사후와 위연의 난 진압
234년 제갈량이 죽고 양의(楊儀)가 제갈량의 명을 받들어 퇴각을 결정했으나, 양의와 사이가 매우 나빴던 위연(魏延)은 양의의 명을 어기고 독자적인 행동을 했다.[10] 양의와 위연은 조정에 서로 상소를 하여 상대방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지만, 조정은 결국 양의의 편을 들어주었고 양의는 마대와 왕평에게 위연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추격 끝에 위연의 군대를 만난 왕평은 직접 나아가 병사들에게 “승상(제갈량)께서 막 돌아가셨는데 승상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너희들이 어찌 이런 더러운 일에 몸을 담았는가!”라고 소리쳤다.[10] 그의 말에 위연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뿔뿔이 흩어졌고 위연의 군대는 쉽게 진압되었다. 진수는 이때의 싸움을 "일전하여 (위연을) 격파하고 이를 평정하는데, 왕평의 공적이다."라고 칭찬했다.2. 5. 한중 방어와 흥세 전투
244년 위나라 대장군 조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침공해오자, 왕평은 현재 병력으로는 대항하기 어렵다는 의견에 반박했다.[26] 그는 유민과 두 참군을 파견하여 흥세산(興勢山)을 점거하고 자신은 후원을 담당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만약 적군이 황금(黃金)으로 향하면, 1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직접 공격할 것이며, 그 틈을 타 부현의 군대가 나아갈 수 있다는 상책을 내놓았다.[26]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으나, 유민만은 이에 동의하여 함께 1천 명의 군사로 흥세산에서 비의의 지원이 올 때까지 위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왕평의 참모는 "현재 우리 군의 전력으로는 저렇게 강한 적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니, 즉시 퇴각하여 한성(漢城)과 낙성(雒城) 두 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그들이 관문을 통과하게 놔둔 다음, 우리가 충분히 강해졌을 때 부(涪)군이 그들을 격파하고 관문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14]
그러나 왕평은 "나는 그대의 계획에 동의하지 않소. 한중에서 부까지는 거의 천 ''리''나 되는 거리요. 적이 관문을 점령하게 되면, 그들은 쉽게 관문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 게다가 그들은 관문을 다음 침략의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재앙을 자초할 수 있소. 그러나 지금 올바른 행동은 먼저 유민과 군사 자문관 두(杜)를 보내 흥세산(興勢山)을 점령하게 하고, 나는 후위(後衛)를 맡는 것이오. 만약 적이 황진곡(黃金谷)으로 군대를 보낸다면, 나는 1천 명을 이끌고 그곳으로 내려가 그들을 격파할 것이오. 나는 부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킬 것이오. 이것이 최선의 계획이오."라고 답했다.[15]
왕평의 장수들 중, 호군장군() 유민은 위연이 한중군을 책임지고 있을 때 세워 놓았던 방어 배치를 따라 위나라의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평은 유민의 의견에 동의하여 군대에 흥세로 진격하여 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3만 명 미만의 병력밖에 없었지만, 적은 그의 군대의 규모를 알지 못했다. 유민은 또한 촉(蜀)나라 군대에게 산 전체에 깃발과 기를 꽂아 더 큰 군대의 인상을 주도록 명령했다.[16] 조상이 군대를 이끌고 촉나라 영토 깊숙이 들어오자, 왕평의 부대는 고지를 점령하고 산을 방어하여 그들의 진격을 막았다.[17] 이후, 부와 비의가 이끄는 성도(成都)에서 온 촉나라의 증원군이 흥세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위나라 군대는 왕평이 원래 계획했던 대로 퇴각 명령을 내렸다.[18]
2. 6. 사망과 평가
왕평은 248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왕순(王訓중국어)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아 안한후(安漢侯)가 되었다.[23]진수는 《삼국지》에서 왕평을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엄격한 생활 방식을 유지했다... 황권, 이회, 여개, 마충, 장익과 함께, 그들의 자질 덕분에 그들은 제국 전역에 걸쳐 명성을 떨쳤고,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았기에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라고 평가했다.[19]
왕평은 미천한 출신으로 평생을 군대에서 보냈기 때문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는 글자 하나 쓸 줄 몰랐고, 고작 10단어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보고서를 써야 할 때마다 그는 서기에게 구술했지만, 그 보고서들은 모두 합리적이고 통찰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문맹을 조롱할까 두려워,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업적과 명성을 깎아내렸다. 그러나 그는 여가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사기》와 《한서》의 여러 연대기 및 열전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그것에 대해 유창하게 논할 수 있었다.[20]
왕평은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규율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농담을 하거나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법이 없었다.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그의 행동은 올바랐다. 그는 군사 장군처럼 보이지 않았다.[21] 그는 성격이 편협하고 의심이 많으며 경솔한 사람이었기에, 그것이 결점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25]

3. 삼국지연의에서의 왕평
유비가 한중을 공격할 때 서황의 부장으로 참전했다. 서황은 물을 건너서 싸우자고 했으나 왕평은 반대했다. 결국 서황은 황충과 조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서황은 지원을 오지 않은 왕평을 꾸짖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왕평은 진채에 불을 지른 뒤 조운에게 찾아가 유비에게 항복하여 편장군이 되었다. 그 후 제갈량의 북벌 때 마대, 장익, 강유, 요화, 마충, 위연 등과 함께 크게 활약하였다.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평은 한중 전투에서 더 두드러지게 등장하여 서황의 전술에 반대하고 투항한다. 서황은 군대를 한수를 건너 반대편에서 유비의 군대와 싸우려 했다. 왕평은 강을 건너면 퇴각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강이 퇴각을 늦추고 적의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서황은 병사들이 절박한 상황에 처하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고 퇴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설적인 전한 장군 한신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일부러 강 근처에 군대를 배치한 전술과 결합하여).
왕평은 한신이 그 전술을 사용한 것은 상대가 그것을 간파할 책략가가 없었기 때문이며, 유비의 군대는 제갈량의 지원을 받아 이 전술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황은 말을 듣지 않았고, 예상대로 크게 패했다. 그는 왕평에게 어째서 구원하러 오지 않았냐고 물었고, 왕평은 "만약 제 군대와 함께 당신을 구원하러 갔다면, 우리 본진은 보호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 번 강을 건너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당신은 듣지 않았고, 그 결과 이런 패배를 맞이한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서황은 이에 크게 분노하여 그날 밤 왕평을 죽이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계획이 새어나가자 왕평은 진영에 불을 지르고 유비에게 투항했다.
삼국지연의에서 한중 공방전에 즈음하여 한중의 지리에 밝다는 이유로 조조에게 향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서황과 불화하여 죽을 뻔한 일을 겪고 유비에게 귀순하여 이후 촉의 무장으로 섬기게 되었다. 또한 남만 정벌(남정)에서도 활약했다. 제갈량은 임종 시, 충의로운 인물로서 요화와 마대 등과 함께 왕평의 이름도 거론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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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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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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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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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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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두 참군은 [[두기]](杜夔)인지 [[두경]](杜瓊)인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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