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사오 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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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메사오 다다오는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문명론의 선구자이다.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정보화 사회'를 예측한 '정보산업론'을 발표했으며, 국립민족학박물관 설립에 기여하여 초대 관장을 역임했다. '지적 생산의 기술'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으며, 1988년 아사히상, 문화공로자, 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64세에 시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술을 통해 저술 활동을 이어갔으며, 한자 폐지론과 일본어 로마자 표기론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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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사오 다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우메사오 다다오 |
원어 이름 | 梅棹 忠夫 |
로마자 표기 | Umesao Tadao |
출생 | 1920년 6월 13일 |
출생지 | 일본, 교토부 |
사망 | 2010년 7월 3일 |
직업 | 인류학자 |
학력 | |
출신 대학 | 교토 대학 |
경력 | |
주요 근무지 | 국립민족학박물관 |
2. 생애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교토제국대 이학부 동물학과와 교토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44년 몽골 연합 자치 정부의 수도 장자커우에 설립된 재단법인 몽골 선린 협회 서북연구소의 촉탁(후에 소원)이 되었다.[2][15][16] 1949년 오사카 시립 대학이공학부조교수(1959년에 이학부와 공학부로 분리)가 되었다.[2] 1955년 교토대학 카라코람 힌두쿠시 학술 탐험대원으로 활동했다.[9] 1957년 오사카 시립 대학 동남아시아 학술 조사 대장을 맡았다. 1961년 교토대학에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2] 1963년 교토대학 아프리카 학술 조사 대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제1차 주부논쟁'에 '여자와 문명'이라는 글을 쓰며 참여, '처 무용론'을 주장했다. 1963년에는 '정보산업론'을 발표했다. '정보산업'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앨빈 토플러에 앞서서 '정보화 사회'의 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5년 교토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조교수가 되었고,[2] 1969년 교수가 되었다.[2] 국립민족학박물관 설립에 애썼고, 1973년 창설 준비실장을 거쳐[2] 1974년 초대 관장에 취임했다.[2]
1986년 원인 불명의 실명으로 인해, 그 이후의 저술은 우메사오의 구술 필기에 의한 것이다. 1988년 교토 대학 인문과학연구소 명예 소원이 되었다. 1993년 국립 민족학 박물관 고문[2], 명예 교수[2], 종합 연구 대학원 대학 명예 교수[2]가 되었다. 1996년 교토 대학 명예 교수가 되었다.[2] 일본어 로마자화 추진론자이며, 1994년부터 일본 로마자회 제7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자 폐지론을 주장해 왔으며, 실명 후에는 한어의 동음이의어를 중대한 결점으로 주장했다. 에스페란토 운동가(에스페란티스트)이며,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명예 위원이었다.
2010년 7월 3일, 오사카부 스이타시 자택에서 노쇠로 인해 사망했다.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1920년 6월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에서 아버지 기쿠지로와 어머니 에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2년 3월 교토 시립 쇼신 초등학교 제5학년을 수료하고[2], 4월 교토부립 교토 제1 중학교에 입학하여[2] 박물 동호회와 산악부에 들어갔다. 1936년 4월 제3고등학교 이과 갑류에 입학하고[2][14] 산악부에 입부하였다. 1937년과 그 다음 해에 등산 일수가 100일을 넘어 낙제하기도 했다.1939년 1월 교토 탐험 지리학회에 입회하였으며, 1940년 7월부터 9월까지 제3고등학교 산악부원으로서 한반도의 함경북도·함경남도의 산들을 탐험하고, 관모봉 연산·마천령 산맥을 넘어 백두산에 올랐다. 1941년 4월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에 입학하여[2] 동물학을 전공하였다. 같은 해 7월부터 10월까지는 교토 탐험 지리학회 폰페이 섬 조사대 (대장: 이마니시 긴지)에 참가하여 생태학적 조사를 실시했다.
1943년 9월 교토 제국대학 이학부[2]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징병 검사에서 제1을종 합격(전차병)을 받았다[15]. 10월에는 교토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특별 연구생 제도로 입영이 연기되었다[15].
2. 2. 연구 활동 및 사회 참여
1957년 '제1차 주부 논쟁'에 '여자와 문명'을 써서 참전하여 "아내 무용론"을 주장했다. 1963년에는 '정보 산업론'을 발표, 앨빈 토플러보다 먼저 정보화 사회의 틀을 제시했다. 우메사오는 "정보 산업"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후 문명학적 비전은 '정보의 문명학'에 정리되었다. 1969년 현장 연구와 교토대 인문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지적 생산의 기술'(이와나미 신서)은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책에서 소개된 정보 카드는 "교토대식 카드"로 상품화되었다. 이후 "지적 생산의 기술" 연구회가 오랫동안 운영되었다(우메사오는 고문).1972년 중앙 교육 심의회 위원이 되었다. 1974년 국립 민족학 박물관 설립에 헌신하여 초대 관장이 되었다.
1986년 3월 12일 원인 불명으로 실명, 이후 저술은 우메사오의 구술 필기로 이루어졌다. 투병기 '밤은 아직 오지 않는가'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작가 시바 료타로와는 몽골 연구로 오랜 친구였다.
일본어 로마자화 추진론자이며, 1994년부터 일본 로마자회 제7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자 폐지론을 주장했으며, 실명 후에는 한어의 동음이의어를 중대한 결점으로 주장했다. 에스페란토 운동가(에스페란티스트)이며,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명예 위원이었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사람과 신이 직접 접할 수 있는 종교로서 공감을 느꼈다.
1963년 말, 우메사오를 중심으로 사적 연구회가 결성되었고, 고마쓰 사쿄도 참여했다. 일본의 미래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지만, 딱딱한 모임이 아닌 지적인 놀이 같았다. 하야시 유지로, 가와조에 노보루, 가토 히데토시, 고마쓰가 멤버였으며, 하야시는 경제기획청 경제연구소 소장, 가와조에는 건축 평론가, 가토는 교토대 교육학부 조교수였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 돈벌이, 출세를 생각하지 않고, 지적 호기심에 따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는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를 재미있게 이야기했다. 이듬해 도쿄 올림픽이 화제가 되었고, "올림픽 다음은 오사카 만국박람회"라는 정보가 들려왔다.[3]
이들을 중심으로 1964년 7월, '''만국박람회를 생각하는 모임'''이 발족했다. 개발도상국도 고려했다.[4] 우메사오 등은 처음에는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사적인 연구였으며, 국가 프로젝트인 만국박람회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4]
1965년 봄, 비공식적인 접촉이 있었다. 오사카부 공무원이 만국박람회 준비에 관여하며 우메사오에게 "진행 방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지혜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우메사오를 존경했고, 조언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고마쓰와 제3고등학교, 교토대 동기였다.[4]
"자발적인 연구회"는 "비공식 브레인"이 되었고, 공식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4]
1967년 오카모토 타로가 테마 전시 프로듀서가 되었다. 우메사오는 국가 공무원이라 움직일 수 없어, 고마쓰에게 돕도록 의뢰했다.[4]
2. 3. 실명과 만년
1986년 3월 12일 원인 불명으로 실명한 후, 우메사오의 저술은 구술 필기로 이루어졌다. 투병기 '밤은 아직 오지 않는가'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으며, 작가 시바 료타로와는 몽골 연구를 계기로 오랜 친구가 되었다.로마자화 추진론자로, 1994년부터 사단법인 일본 로마자회 제7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자 폐지론을 오래전부터 주장해 왔으며, 특히 실명 후에는 한자어에 동음이의어가 많은 것을 중대한 결점으로 보았다. 에스페란토 운동가(에스페란티스트)로서,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명예 위원이기도 했다.
2010년 7월 3일, 오사카부 스이타시 자택에서 노쇠로 사망했다.
3. 학문적 업적 및 사상
우메사오 다다오는 일본 문화인류학의 개척자로, '우메사오 문명학'이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문명론을 주창하여 다방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토 대학에서 이마니시 긴지의 제자였으며, 생태학에서 출발하여 동물사회학을 거쳐 민속학(문화인류학), 비교문명론으로 연구 분야를 넓혔다. 수리생태학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유카와 히데키의 제자인 데라모토 히데시가 이를 발전시켰다.
청년기부터 등산과 탐험을 즐겼으며, 현지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B6 카드를 활용한 정보 정리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을 정리한 『지적 생산의 기술』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몽골 현지 조사 직후 원인 불명의 시력 장애로 64세에 실명했지만, 실명 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72년 중앙 교육 심의회 위원을 역임했고, 1974년 국립 민족학 박물관 설립에 헌신하여 초대 관장을 지냈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사람과 신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종교라는 점에서 공감을 표했다.
3. 1. 문명의 생태사관
일본의 문화인류학 선구자이며, '우메사오 문명학'이라고도 불리는 독특한 문명론을 전개하여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생태학에서 출발하여 동물사회학을 거쳐 민족학(문화인류학), 비교 문명론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대표작 『문명의 생태사관』 외에도 수리 생태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종교의 바이러스 설을 주장하며 사상·개념의 전파, 정신 형성을 논했다.우메사오는 종교 바이러스 설을 전개했으며, 후계 연구도 있어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종교 바이러스 설은 문명 요소(기술·사상·제도)가 선택에 의해 천이해 간다는 천이 이론을 기둥으로 하는 문명의 생태사관의 한 예이며, 기초 중 하나이다.
1955년 전후 최초의 본격적인 해외 학술 조사였던 교토 대학 카라코람·힌두쿠시 학술 탐험대에 참가했다. 몽골에서의 유목민과 가축 무리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생물지리학적인 역사관을 제시한 '문명의 생태사관'에서는 "서구 문명과 일본 문명은 병행 진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며 일본 문명의 세계사적 위치에 독특한 시점을 도입하여 큰 반향을 일으킴과 동시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3. 2. 정보산업론
1963년 '정보산업론'을 발표했다. 우메사오 다다오는 앨빈 토플러보다 먼저 '정보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정보화 사회의 큰 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그의 문명학적 관점은 '정보의 문명학'(중공총서, 후일 문고)에 정리되었다.3. 3. 정보화 사회론
1963년 '정보산업론'을 발표했다. 이는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보다 앞서 정보화 사회의 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메사오는 '정보산업'이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그의 문명학적 비전은 '정보의 문명학'에 정리되어 있다.3. 4. 종교 바이러스 설
우메사오는 종교의 바이러스 설을 주장하며 사상·개념의 전파, 정신 형성을 논했다. 이후에도 종교 바이러스 설을 전개했으며, 후계 연구도 있어 일정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종교 바이러스 설은 문명 요소(기술·사상·제도)가 선택에 의해 천이해 간다는 천이 이론을 기둥으로 하는 문명의 생태사관의 한 예이며, 기초 중 하나이다.3. 5. 한자 폐지론과 일본어 로마자 표기론
우메사오 다다오는 한자 폐지론을 주장했고, 일본어를 로마자로 표기하자는 주장을 폈다. 특히 실명 후에는 한어에 많은 동음이의어를 중대한 결점으로 주장했다. 에스페란토 운동가(에스페란티스트)이며,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명예 위원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사단법인 일본 로마자회 제7대 회장을 역임했다.3. 6. 에스페란토어 운동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의 명예 회원이기도 했던 에스페란토 운동가(에스페란티스트)였다.4. 주요 저서
출판 연도 | 저서 |
---|---|
1956 | 모골족 탐험기 |
1957 | 문명의 생태사관 서설 |
1960 | 일본 탐험 |
1962 | 일본인의 지혜 (공저) |
1964 | 동남아시아 기행 |
1965 | 사바나의 기록 |
1967 | 문명의 생태사관 인간에게 과학이란 무엇인가 (공저) |
1969 | 지적 생산의 기술 |
1970 | 현대의 모험 1 사막과 밀림을 넘어 (책임 편집) |
1974 | 지구 시대의 일본인 |
1975 | 민족학 박물관 |
1976 | 수렵과 유목의 세계 자연 사회의 진화 산악 삼림 생태학 이마니시 긴지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공저) 역사와 문명의 탐구 (공저) |
1977 | 생태학 입문 (기라 타츠오와 공저) |
1978 | 민박 탄생 관장 대담 지구 시대의 인류학 (대담집) |
1980 | 인류학 주유 박물관의 세계 관장 대담 |
1981 | 나의 삶의 보람론 인생에 목적이 있는가 박물관과 미술관 관장 대담 미의식과 신 |
1983 | 박물관과 정보 관장 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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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정보 관리론 |
1991 | 21세기의 인류상 - 민족 문제를 생각한다 회상의 몽골 지적 시민과 박물관 대담집 세상 관찰·여자와 남자의 최전선 대담집 세상 관찰·놀이와 일의 최전선 대담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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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 근대 세계에 있어서의 일본 문명 - 비교 문명학 서설 |
2001 | 문명의 생태사관은 지금 (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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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 산을 즐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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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우메사오 타다오의 "일본인의 종교" (나카마키 히로야 편) |
5. 수상 및 서훈
연도 | 수상 및 서훈 내역 |
---|---|
1980년 | 일본 문화 디자인상 대상 |
1988년 1월 | 아사히상[2][17] |
1988년 4월 | 프랑스 교육 공로 훈장 코망되르[9][18] |
1988년 5월 | 자수포장[2][9] |
1990년 10월 | 국제 교류 기금상[2] |
1991년 11월 | 문화 공로자[2][9] |
1994년 11월 | 문화 훈장[2][9] |
1995년 10월 | 교토시 명예 시민[19] |
1998년 7월 | 몽골 문화공로자 |
1999년 11월 | 훈1등 서보장[2][20] |
2002년 10월 | C&C상 |
2010년 7월 | 종3위 |
참조
[1]
웹사이트
Japan Foundation
http://www.jpf.go.jp[...]
[1]
웹사이트
Japan Foundation Award, 1990
http://www.jpf.go.jp[...]
[2]
간행물
梅棹忠夫略年譜・主要業績
人間文化研究機構[[国立民族学博物館]]
2010
[3]
서적
小松左京自伝ーー実存を求めて(第5章)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08-02-19
[4]
서적
SF魂
新潮社
2006-07-20
[5]
문서
梅棹忠夫『文明の生態史観』中央公論社 1967年、中公文庫、1974年。「ドーキンス1976と同種の枠組み、正確には、より広い枠組みを構築し、宗教を論じた。フランスの勲章をもらい、文明の生態史観は英訳・仏訳されたのだろうか」
[6]
문서
わずかだが、後継研究、思想要素のヒステリシス(履歴依存性)モデルがあり、流行のヒステリシス、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論が続き、一定の影響を及ぼす。
[7]
문서
自著『夜はまだあけぬか』
2018-11-30
[8]
간행물
カオスと分析――梅棹忠夫論
https://web.archive.[...]
サントリー
[9]
간행물
国立民族学博物館の創設者 梅棹忠夫先生
null
人間文化研究機構[[国立民族学博物館]]
2010
[10]
뉴스
有吉氏らが委員に 新中教審の18氏決る
朝日新聞
1972-05-30
[11]
문서
司馬との交流は、編著『日本の未来へ 司馬遼太郎との対話』(日本放送出版協会、2000年)に詳しい。
[12]
웹사이트
日本語とローマ字
https://www.asahi.co[...]
[[朝日新聞社]]
2023-05-30
[13]
웹사이트
"「日本語表記をローマ字に」運動100年超の全国組織解散 「漢字仮名交じりは非合理」|文化・ライフ|地域のニュース|京都新聞"
https://www.kyoto-np[...]
2023-04-24
[14]
간행물
『官報』第2779号、昭和11年4月10日、p.330
https://dl.ndl.go.jp[...]
[15]
웹사이트
梅棹忠夫関連略年表
http://nmearch.minpa[...]
[16]
서적
西北研究所要覧
蒙古善隣協会
1944-06-30
[17]
웹사이트
朝日賞 1971-2000年度
https://www.asahi.co[...]
2022-08-31
[18]
웹사이트
慶応義塾大学・理工学部理工研究科のホームページ
https://web.archive.[...]
[19]
웹사이트
京都市名誉市民 梅棹忠夫氏
https://www.city.kyo[...]
[20]
뉴스
99年秋の叙勲 勲三等以上と在外邦人、外国人、在日外国人の受章者一覧
読売新聞
199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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