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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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창 봉기는 1911년 10월 10일, 청나라의 신군이 우창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청나라의 쇠퇴와 철도 국유화 정책에 대한 반발, 혁명 사상의 확산이 배경이 되었으며, 쑨원은 봉기 당시 해외에 있었으나 봉기 소식을 접하고 혁명에 참여했다. 봉기 이후 호북군정부가 수립되고, 전국 각지로 혁명이 확산되어 18개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을 선포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우창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국경절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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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 봉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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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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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무창 봉기 |
로마자 표기 | Wuchang qiyi |
광둥어 | Mou5 coeng1 hei2 ji6 |
영어 | Wuchang Uprising |
전투 정보 | |
관련 사건 | 신해혁명 |
시기 | 1911년 10월 10일 ~ 1911년 12월 1일 |
장소 | 청나라 후베이성 우창 |
결과 | 중국 동맹회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청나라 |
교전 2 | 중국 동맹회 후베이 군정부 |
지휘관 및 지도자 | |
청나라 | 루이청 장후 |
중국 동맹회 및 후베이 군정부 | 황싱 슝빙쿤 리위안훙 |
병력 규모 | |
청나라 | 10,000명 |
중국 동맹회 | 2,000명 |
사상자 규모 | |
청나라 | 약 4,000명 사망 |
중국 동맹회 | 약 1,000명 사망 |
2. 배경
1900년, 청나라 정부는 군대를 현대화하기 위해 이른바 "신군(新軍)"을 창설하고 현대식 장비로 무장시켜 훈련했다. 당시 우창은 현대식 군사 산업이 발달한 도시였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현대적 무기들이 신군에 보급되었다. 이 시기 우창에 주둔하던 신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쑨원의 혁명 이념이 널리 퍼져 있었고, 많은 병사들이 비밀리에 혁명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
2. 1. 청조의 위기
1895년,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며 큰 충격에 빠졌다. 이 패배 이후 청나라 지식인 사회는 분열되었는데, 처음에는 강유위와 양계초가 이끄는 입헌군주제 개혁파가 힘을 얻어 무술변법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개혁은 보수파의 핵심인 서태후가 일으킨 무술정변으로 좌절되었다.[2] 개혁 실패와 청나라 황실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면서, 손문, 송교인 등 혁명 지도자들은 1905년 도쿄에 모여 여러 혁명 단체를 통합하여 중국동맹회를 결성했다.1906년 청나라는 마지못해 "입헌정부" 원칙을 발표했지만, 실제 권력은 어린 선통제(푸이)를 중심으로 한 황족과 궁정 관료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1910년 각 성에 자문 기관인 성자의국(省諮議局)이 설치되었으나, 이 기구는 황제가 미리 정한 안건만 논의할 수 있는 등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1911년 5월에는 대부분 황족으로 구성된 내각이 출범했고, 즉각적인 국회 개설을 요구하던 입헌파 인사 온세림(温世霖)을 신강으로 좌천시키는 등 입헌주의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한편, 1911년 3월부터 동맹회는 탐인봉을 장강 유역에 파견하여 무한거사 계획에 맞춰 각지에서 봉기할 것을 독려했다. 하지만 호남과 호북 지역의 혁명 단체들은 동맹회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있지는 않았다. 이 지역 군대 내에서의 혁명 활동은 기독교 전도를 활용했던 일지회가 시작했고, 이후 도쿄에서 조직된 공진회 등이 그 활동을 이어받았다. 우창 봉기 직전, 무창 지역 신군 내에는 혁명 결사 조직인 "군치사(진무사)"에 가입한 군인들이 상당수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서구 열강들은 중국 내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철도 건설 투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산둥, 장강 유역, 쿤밍, 만주 등지에서 철도 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청나라 조정의 허가를 받은 지방 정부들도 자체적으로 철도 건설에 나섰는데, 광동, 후난, 후베이, 쓰촨 등이 감독하는 광한선(광저우-한커우)과 천한선(쓰촨-한커우) 건설 사업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베이징 의정서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지급 등으로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던 청나라 조정은 1910년, 소위 "고전적 관료 자본가"로 불리던 성선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외국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철도 노선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민간 자본, 특히 지방 신흥 자본가들과 지주들의 자금으로 건설되던 철도를 강제로 빼앗는 것이었기에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쓰촨성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쓰촨-한커우 철도(사한철도)는 지역 자본가들의 주식 투자와 지주들에게 부과된 특별세로 자금을 조달했으며, 지주들에게도 철도 회사 주식이 배분된 상태였다.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이 운동은 "보로운동"(保路運動, 철도를 보호하는 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5] 쓰촨성에서는 청두에서 자주, 영천을 거쳐 중경에 이르는 지역에서 상점들이 문을 닫고 학교가 휴교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8월 11일에는 청두에서 대규모 파업과 집회가 열렸고, 포전준이 쓰촨 보로 동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9월 초, 새로 부임한 쓰촨 총독 조이풍은 시위 확산에 놀라 철도 국유화 시한 연기를 조정에 요청했으나, 오히려 무능하다는 질책만 받았다. 9월 7일, 강경 대응을 지시받은 조이풍은 보로 동지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이에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9월 15일에는 철도 주주 대표들이 파병 중지를 호소하러 총독부를 찾았으나, 조이풍은 이들 중 5명을 구금했고, 석방을 요구하며 몰려든 군중에게 또다시 발포하여 약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조정은 단방에게 호북의 신군 병력을 이끌고 쓰촨으로 가서 시위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난민 폭동이니 살해해도 좋다"는 식의 강경한 정부 명령은 오히려 쓰촨 각지의 시위를 더욱 격화시켰다. 단방이 이끄는 군대는 내강에서 저지당했고, 지원군으로 파견된 전 쓰촨 총독 역시 상황에 겁을 먹고 한커우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쓰촨에서의 격렬한 저항과 청조의 무력 진압은 정부에 대한 민중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쓰촨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후베이성의 군대가 이동하면서 우창 지역의 군사력이 약화된 것은 이후 우창 봉기 성공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2]
한편, 후난과 호북 지역에서는 철도 국유화에 대한 별다른 저항 움직임이 없자, 지역 언론들은 이를 비판했다. 철도 국유화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면서 청나라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더욱 깊어만 갔다.
2. 2. 혁명 운동의 성장
1895년, 청나라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1] 이 패배 이후 중국의 지식인 사회는 여러 파벌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강유위와 량치차오가 이끄는 입헌군주제 개혁파가 백일개혁을 주도했으나, 이는 서태후의 무술정변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군주제와 청나라 왕조에 대한 환멸감이 커지면서, 전국적으로 여러 혁명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5년, 쑨원과 쑹자오런 등 혁명 지도자들은 도쿄에서 만나 여러 혁명 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했고, 그 결과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다.한편, 청나라 정부는 1900년 군대 현대화를 목표로 "신군(新軍)"을 창설했다. 당시 우창은 현대식 군사 산업이 발달한 도시였기에 신군을 위한 무기 생산이 활발했고, 이곳에 주둔한 신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쑨원의 혁명 이념이 널리 퍼져 많은 이들이 혁명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다. 1906년 청나라는 “입헌정부” 원칙을 인정했지만, 세 살짜리 선통제(부의)를 중심으로 한 황족과 궁정의 권력은 강력했다. 1910년 각 성에 성자의국이 생기긴 했지만, 엄격히 제한된 것으로, 황제가 미리 정한 의제만을 논의할 권한만 부여받았을 뿐이었다. 1911년 5월, 청나라는 황족 내각을 조직하고, 국회 즉시 개설을 요구했던 을 신강으로 좌천시켜 입헌주의자들을 실망시켰다.
의화단 사건 이후 많은 서구 열강은 철도 투자를 중국 내 영향권 강화의 일환으로 간주했다. 청나라 조정의 허가를 받은 지방 정부도 자체적으로 철도 건설을 시작했는데, 광둥-한커우 철도와 쓰촨-한커우 철도가 대표적이다. 의화단 의정서로 인한 지속적인 배상금 지급 등으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청나라는 1910년 승선회에게 의존하여 모든 철도 노선의 국유화를 통한 외국 차관 확보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은 특히 쓰촨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저항은 빠르게 "철도보호운동"으로 알려진 운동으로 변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청나라는 무력으로 소요를 진압하여 정부의 인기 하락에 기여했다. 8월 11일까지 청두에서 대규모 파업과 집회가 열렸다. 9월 7일 쓰촨 총독 조이풍은 철도보호동맹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후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청두 주변에서의 싸움으로 중국 중부에서 쓰촨으로 군대가 이동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신해혁명의 성공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2] 한편, 후난과 후베이 양 지역의 철도 국유화에 대한 무대응은 지역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 민중 사이의 청나라 정부에 대한 신뢰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우한은 장강 중류에 위치한 곳으로 당시 수륙 교통의 중심지였다.[6] 이곳은 서구열강이 중국을 침략하는 주요 거점이자 청 정부의 통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자산계급 혁명당이 활발히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1904년, 우한 최초의 혁명단체인 과학보습소가 설립되었고 뒤이어 일지회, 文學社|문학사중국어, 공진회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다.[6] 그 가운데 공진회와 문학사의 활동이 컸다.

- 공진회 (共進會중국어): 1907년 8월 일본에서 각 성의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조직한 것으로, 이들은 혁명의 중심으로 화남 지역에 두고 있는 쑨원의 활동에 다소 불만을 갖고 혁명의 중심을 장강 유역에 두고자 하였다. 1908년에 쑨우(孫武) 등이 차례로 귀국하여 1909년 4월에 한커우 프랑스 조계에서 공진회 호북(鄂)부총회를 설립하고 우창에 분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장강 중하류의 회당(會黨)과 연락하여 '중화산'(中華山)을 조직하였다.[7]
- 문학사 (文學社중국어): 호북의 중국동맹회가 신군의 사병들 사이에서 발전시킨 하나의 혁명조직 단체였다. 1906년 일지회(日知會)가 해산되고, 1908년에 '군대동맹회'를 조직하였다가 이를 '군치학사'(君治學社)로 개조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군대 안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회당과도 연락하였으며 그 조직도 대단히 잘 되어 있었고 행동도 신중하였다.[7] 1910년 9월에 군치학사의 기초 위에 '진무학사'(振武學社)를 조직하여 회원이 1천 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활동이 상부에 보고되어 주요간부들은 제대 조치되어 공백이 되어버렸다. 이에 蔣翊武|장이우중국어, 유복기 등이 사무(社務)를 맡아 주축이 되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문학을 연구하는 단체'라는 이름을 표방하여 '문학사'로 고쳤다. 이들은 1911년 초에 정식으로 성립되어 쑨원의 혁명주장을 옹호하면서 신군 안으로 계속 발전하였으며 또한 학계와도 연락하고 《대강보》를 통하여 혁명을 선전하였다.[7]
공진회와 문학사의 활동목표가 거의 비슷하고 활동무대도 같은 신군 안이었다. 1911년에 호북 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군 안에 공진회와 문학사 두 단체의 회원은 합해서 5~6000명으로 신군의 1/3을 차지하였다. 이리하여 우창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신군의 3분의 1 가량의 사병이 혁명군에 참가하여 봉기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이 무렵 '황화강 사건'이 실패했을 때, 이들 두 단체들은 서로 연합하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5월 11일에 대표들이 함께 회의를 열어 연합 문제를 토의하였다.[7]
바로 이러한 때에 쑹자오런, 담인봉, 천치메이 등이 7월 31일에 상하이에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를 성립시켰다. 목적은 장강 유역에서 적극적으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각계와 연락하여 호남분회(湖南分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휘분회(安徽分會)의 조직을 준비하면서, 후베이성 지역에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담인봉을 호북에 파견하기로 하고, 거정에게 공진회와 문학사를 연합해 호북분회를 조직하는 일을 맡겼다.[7]

蔣翊武|장이우중국어(문학사)와 쑨우(공진회)가 각각 이끌던 이 단체들은 우한에서의 혁명 활동에서 사령관과 참모총장으로 긴밀히 협력했다. 1911년 9월, 호북 신군의 일부가 쓰촨의 철도보호운동 진압을 위해 파견되어 호북 지역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호북 지역의 혁명가들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문학사와 공진회는 다음 봉기에 대한 협력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중국동맹회와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 날짜는 추석인 10월 6일로 정해졌으나 준비 부족으로 연기되었다. 10월 9일, 쑨우가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발물 제작을 감독하던 중 예상치 못한 폭발이 발생하여 쑨우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 직원들은 그의 신분을 알아채고 청나라 당국에 알렸다.
3. 봉기
1911년 쓰촨성에서 보로운동이 격화되자, 청나라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후베이성의 신군 병력을 파견했다. 이로 인해 우창 지역의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혁명파에게는 봉기를 일으킬 좋은 기회가 마련되었다.[8] 당시 우창에는 혁명 단체인 공진회(共進會)와 문학사(文學社)가 활동하며 신군 내부에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있었다. 1911년 7월에는 쑹자오런을 중심으로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설립되어 이들 단체와 연합을 추진했다.[9]
1911년 가을, 우창 신군 약 15,000명 중 1/3에 달하는 5,000여 명이 혁명파에 가담한 상태였다. 9월, 문학사와 공진회는 연합하여 통합 지휘부를 설립하고, 문학사의 장이우를 총사령관으로, 공진회의 쑨우를 참모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헌장을 만들고 깃발과 폭탄을 제조하는 등 봉기 준비에 착수했으며, 상하이의 쑹자오런, 황싱 등과 연락하여 봉기 후 계획을 논의하고 봉기일을 10월 16일로 정했다.[10]
그러나 봉기 예정일 전인 10월 9일,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에서 폭탄을 만들던 중 사고가 발생하여 쑨우가 크게 다쳤다. 이 사고로 봉기 계획이 청나라 당국에 누설되었고, 관련 문서와 명단이 발각되면서 혁명파에 대한 체포가 시작되었다. 10월 10일 아침에는 군 소속이었던 팽초번, 류복기, 양홍승 등 3명이 참수당하는 등 위기 상황이 고조되었다.
계획이 드러나고 동지들이 희생되자, 혁명파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10월 10일 밤 즉시 봉기를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밤 9시경, 신군 공병대 소속 병사들이 봉기의 첫 총성을 울렸고, 곧이어 다른 부대들도 호응하여 봉기에 가담했다. 혁명군은 호광총독 관저 등을 공격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총독 서정은 한커우의 조계로 도주했다. 다음 날인 10월 11일 정오 무렵, 우창 전역은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만주족 병사 500명 이상이 살해되고 3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3. 1. 봉기의 전개

1911년 10월 9일, 한커우의 러시아 조계 안에서 혁명파가 봉기에 사용할 폭탄을 제조하던 중 실수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11] 이 사고로 쑨우가 크게 다쳤고, 병원에서 그의 신원이 발각되어 청나라 당국에 알려졌다. 사고 현장에서 봉기 계획 문서, 깃발, 참가자 명단 등이 청나라 당국에 넘어가면서 관련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11][10] 10월 10일 새벽에는 체포된 혁명파 중 팽초번, 류복기, 양홍승 3명이 참수되었다.[10]

계획이 누설되고 동지들이 체포되자, 우창의 혁명파 지도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즉시 봉기하기로 결정했다.[12] 그러나 호광총독 서징이 이미 경계를 강화하고 검문을 철저히 하면서 명령 전달에 어려움이 생겼고, 도시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9]

10월 10일 저녁 7시 이후, 우창의 공병 제8영에서 웅병곤 등이 봉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12] 이들은 즉시 부대 내 무기고를 점령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성 밖에 주둔하던 제21혼성여단 제11연대와 성 안의 제29표 채제민 부대 등이 호응하여 봉기에 가담했고, 함께 초망대(楚望台)의 주요 무기고를 장악했다.[12] 혁명군은 이곳에서 다량의 마우저, 아리사카 소총 등 최신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여 전투력을 크게 강화했다.
봉기 초기 혁명군에는 통합된 지휘 체계가 부족했으나, 신군 포병영의 대대관(대대장급)이었던 오조린을 찾아내 설득과 약간의 강압을 통해 임시 총지휘관으로 추대했다.[12] 오조린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혁명군의 기세와 무장 상태를 보고 지휘를 수락했다. 그의 지휘 아래 혁명군은 헌병영 등 주요 거점을 점령했으며, 상황을 지켜보던 청군 병사들이 속속 혁명군에 합류하면서 병력은 약 2,000명으로 불어났다.[12]
10월 10일 밤 10시 30분경, 혁명군은 호광총독 서징의 관저를 공격했다.[12] 혁명군의 격렬한 공격에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서징은 측근들만 데리고 관저 뒷문으로 빠져나와 장강에 정박 중이던 군함 '초예호'를 타고 한커우로 도주했다.[9][12] 서징은 평소 교류가 있던 영국 영사에게 군함의 지원 사격을 요청했으나, 영국 측은 국제 분쟁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9][12] 총독이 도망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저를 지키던 청나라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고, 혁명군은 총독 관저를 완전히 장악하고 불을 질렀다.[12]

10월 11일 정오 무렵에는 우창 전역이 혁명군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청군은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혁명군은 10월 11일 즉시 호북 군정부(湖北軍政府)를 수립하고, 신군 제21혼성협(여단급)의 협통(여단장)이었던 리위안훙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3. 2. 봉기 이후
10월 11일 새벽까지 우창 시내의 주요 지역은 대부분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사산' 북쪽의 번서(경찰서)도 혁명군의 포격으로 함락되었다. 우창 시내의 청나라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고, 모든 관공서는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우창 봉기가 성공한 것이다.[9]
혁명군은 즉시 ‘호북 군정부’(또는 '''호군도독부'''鄂軍都督府)를 수립했다. 그러나 봉기는 성공했지만 혁명군을 통솔할 만한 지도자가 없었다. 논의 끝에 혁명군은 신군의 제21혼성여단장인 리위안훙을 찾아내어 설득하고 때로는 위협하며 도독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리위안훙은 처음에는 참여를 거부했지만, 결국 혁명군의 설득에 넘어가 잠정적인 도독(군정부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수락했다.[13][12]
호북 군정부는 그날 밤 한양을, 다음 날인 10월 12일 아침에는 한커우를 함락하여 이른바 ‘우한 3진’(武漢三鎭)을 확보하였다. 우창 봉기의 성공에는 지식인이나 학생뿐만 아니라 신군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군사적 힘을 보탠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새로 수립된 군정부는 외국 열강들이 봉기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른 성에도 봉기를 촉구하며 "철혈 18성기"라 불리는 깃발을 내걸었다. 10월 13일에는 한커우의 외국 영사관들이 혁명군을 교전 단체로 인정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10월 16일에는 도독부 임시 조직령이 발표되었고, 리위안훙은 총사령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10월 18일, 혁명군은 장표(張彪)가 이끄는 청 정부군을 공격하여 한커우 대지문(大智門) 역에서 염구(灄口)로 몰아냈고, 우창의 포대는 정부 함대를 장강 하류로 격퇴했다.

봉기 소식을 접한 청 조정은 북양군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위안스카이에게 지휘를 맡겼다. 북양군은 우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한편, 혁명군 측에서는 11월 초 황흥이 우한에 도착하여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후 북양군은 혁명군 진지를 공격하여 11월 1일에 한커우를, 11월 27일에 한양을 탈환했다. 이 전투를 양하 전투라고 부른다. 그러나 두 도시를 탈환한 후 북양군의 공세는 갑자기 멈추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혁명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4. 봉기의 영향
10월 11일 새벽, 우창 시내의 주요 지역은 대부분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경찰서도 혁명군의 포병 지원 아래 함락되었다. 우창 시내의 청나라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고, 모든 관공서는 혁명군의 손에 들어갔다. 하룻밤 사이에 우창 봉기가 성공한 것이다.[9]
봉기에 성공한 혁명군은 ‘호북 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혁명군을 이끌 만한 지도자가 없어, 논의 끝에 당시 혁명파와는 관련이 없던 신군 제21혼성여단의 여단장 리위안훙을 찾아내어 설득과 위협을 통해 군정부의 도독으로 추대했다.[13] 군정부는 그날 밤 한양(漢陽)을, 다음 날인 10월 12일 아침에는 한커우를 함락시켜 이른바 ‘우한 3진(武漢三鎭)’을 완전히 장악했다. 우창 봉기의 성공에는 지식인이나 학생뿐만 아니라 신군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군사적인 힘을 보탠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우창 봉기의 성공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가며 전국을 혁명의 열기 속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었다.
한편, 쑨원은 당시 해외에서 혁명 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기 때문에 봉기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신문을 통해 봉기 소식을 처음 접했다.
4. 1. 신해혁명으로의 확산
우창 봉기의 성공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호북 성의 봉기 이후 약 40일 사이에 산시성을 포함한 북방 2개 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 장쑤성 등 남방 14개 성이 청조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에 동참하였다. 1911년 12월 말까지 남부와 중국 중부의 총 18개 성이 청나라 정부로부터 분리 독립하는 데 동의했다.


이 봉기는 황흥(黃興)이나 송교런(宋教仁) 같은 주요 혁명 지도자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이들은 제때 우창에 도착하지 못했다. 쑨원(孫文) 역시 당시 해외 화교들에게 재정 지원을 호소하며 미국을 방문 중이었고, 신문을 통해 봉기 소식을 접했다. 그는 황흥으로부터 봉기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으나 암호를 해독하지 못해 다음 날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봉기 이후 청나라 정부는 정치범에 대한 사면을 단행했고, 이때 왕징웨이도 석방되었다.[3]
1911년 12월,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임시 대총통 선거에 참여하여 당선되었다.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의 대표들은 난징에 모여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새로 수립된 중화민국은 청나라 조정을 압박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와 협상에 나섰고, 그에게 대총통 자리를 제안하며 청나라의 항복을 유도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룡유황태후는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를 대신하여 퇴위 조서를 반포함으로써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우창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국경절(쌍십절)로 정하고, 타이완 지역과 세계 각지의 화교 사회에서는 매년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4. 2.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탄생
우창봉기의 성공은 곧바로 전국을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호북 성의 우창봉기 이후 약 40여일 사이에 산시성 등의 북방 2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 장쑤성 등 남방 14개 성(省)이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동참하였다.[9] 1911년 12월 말까지 남부와 중국 중부의 18개 성이 청나라 정부로부터 분리될 것을 동의했다.쑨원은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었는데, 신문을 통해 봉기 소식을 접했다.[9] 그는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심한 곳임을 파악하고, 이를 반청운동의 기폭제로 삼고자 했다.[9] 한편 봉기 해결 과정에서 청나라 정부는 정치범에 대한 전면 사면에 동의했으며,[3] 이에 따라 왕징웨이 등도 석방되었다.[3]
같은 해 12월,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임시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여 당선되었다. 1912년 1월 1일,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각 성의 대표자들이 모여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포했으며, 쑨원이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새로 건립된 공화국은 위안스카이와 협상에 나섰다.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제안하는 조건으로 청나라 정부에 항복을 압박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태후는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대신하여 청나라 황제의 퇴위를 선포했다. 이로써 268년간 존속했던 청나라는 멸망하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중화민국에서는 우창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국경절(쌍십절)로 기념하고 있으며, 타이완 지역과 전 세계 화교 사회에서 매년 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다.
5. 역사적 의의
우창 봉기는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중국 군주제 역사를 종식시키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탄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는 청나라의 멸망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5. 1. 동아시아 근대사에 미친 영향
우창 봉기의 성공은 곧바로 신해혁명으로 이어져 중국 전역을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호북 성 우창에서의 봉기 이후 약 40여일 만에 산시성 (산서성) 등 북방 2개 성과 윈난성, 구이저우성, 장쑤성 등 남방 14개 성이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에 동참했으며, 1911년 12월 말까지 남부와 중국 중부의 18개 성이 청나라 정부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며 해외 화교들에게 재정 지원을 호소하던 쑨원은 신문을 통해 봉기 소식을 접했다. 그는 봉기가 일어난 지역이 만주족에 대한 반감이 심한 곳임을 파악하고 이를 반청 운동의 기폭제로 삼고자 했다. 다른 혁명 지도자들인 황흥과 송교인 등은 즉시 우창에 합류하지는 못했다.
봉기 이후 청나라 정부는 왕징웨이를 포함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3]
같은 해 12월,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와 임시 대총통 선거에 참여하여 당선되었다. 1912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의 대표자들이 모여 중화민국의 건국을 공식 선포하고 쑨원을 초대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했다. 이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수립으로, 동아시아 근대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새로 수립된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제안하는 조건으로 청나라 황실의 퇴위를 압박하도록 협상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 황태후가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대신하여 퇴위 조서를 반포함으로써 청나라는 멸망하였고, 중국의 오랜 군주제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러한 중국의 급격한 변화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 출현은 주변 국가들의 민족 해방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2. 한국과의 관계
(작성할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한국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참조
[1]
서적
The Two Koreas and the Great Power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Whites are Enemies of Heaven: Climate Caucasianism and Asian Ecological Protection
Duke University Press
2020
[3]
서적
Poetry, History, Memory: Wang Jingwei and China in Dark Times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23
[4]
웹사이트
武昌起義(コトバンク。ブリタニカ国際百科事典)
https://kotobank.jp/[...]
[5]
웹사이트
保路運動(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6]
서적
중국역사를 뒤바꾼 100가지 사건
도서출판 채움
[7]
서적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
대명출판사
[8]
서적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9]
서적
근대중국:개혁과 혁명-중화제국 마지막 왕조의 몰락(下)
대명출판사
[10]
서적
세계각국사 중국사 (하)
미래엔(대한교과서)
2005-07-16
[11]
서적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12]
서적
중국 역사 박물관 10
범우사
[13]
서적
중국근현대사: 근대중국 개혁과 혁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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