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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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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1519년에 태어난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 이마가와 씨의 수장이었다. 그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개국을 지배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요시모토는 뛰어난 정치, 군사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지만, 오케하자마 전투의 패배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사후 이마가와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의 생애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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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와 요시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마가와 요시모토
별명도카이도 제일의 무사 (海道一の弓取り)
본명요사키마루
관직
관위종4위하 치부대보
쇼군아시카가 요시하루 → 요시테루
직위무로마치 막부 스루가, 도토미 슈고
가문세이와 겐지 요시쿠니류 아시카가 씨계 기라 씨 지류 이마가와 씨
소속이마가와 씨
이마가와 씨
계급다이묘
지휘슨푸 성
생애
출생1519년
출생지스루가 국 슨푸
사망1560년 6월 12일
사망지오와리 국 덴가쿠하자마
가족 관계
아버지이마가와 우지치카
어머니주케이니
배우자조케이인
형제이마가와 우지테루
자녀5명 (이마가와 우지자네 포함)
친척호조 우지야스 (처남), 다케다 신겐 (처남), 하야카와 도노 (조카이자 며느리)
기타 정보
법명센가쿠 쇼호
계명덴타쿠지덴 시혼 마에라이부지로우 슈호 텟코 다이코지
묘소아이치현 도요카와시 다이쇼지 (동총),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오케하자마 고전장 전승지,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고토쿠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오이와초 린자이 사, 도쿄도 스기나미구 간센지, 아이치현 니시오시 도코지 (수총)
주요 전투
전투 목록하나구라 소동 (1536년)
아즈키자카 전투 (1542년)
아즈키자카 전투 (1548년)
무라키 성 전투 (1554년)
오케하자마 전투 (1560년) 전사

2. 생애

태평기영웅전 삼: 이마가와 지부 다이유 요시모토 (오치아이 요시이쿠 작)


1519년,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3] 어릴 적 이름은 芳菊丸|호기쿠마루일본어였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어린 시절 절에 보내져 梅岳承芳|바이가쿠 쇼호일본어 또는 栴岳承芳|센가쿠 쇼호일본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1536년 형 우지테루가 갑자기 사망하자, 이복형 玄広恵探|겐코 에탄일본어과의 가독 계승 분쟁(하나쿠라의 난)이 발생했다. 이 분쟁에서 승리한 후 환속하여 이름을 요시모토(義元)로 바꾸고 이마가와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4]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마가와 우지치카
어머니주케이니1568년 사망
부인조케이인1519–1550
측실이이 나오히라의 딸
자녀이마가와 우지자네조케이인 소생
자녀초토쿠 이치게츠조케이인 소생, 1625년 사망
자녀레이쇼인조케이인 소생, 다케다 요시노부와 결혼, 1612년 사망
자녀딸 (隆福院|류후쿠인일본어)
자녀무레 카츠시게와 결혼


2. 1. 가독 상속과 내란

1519년(에이쇼 16년),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아들로 태어났다.[3] 어머니는 우지치카의 정실인 나카미카도 노부타네의 딸 주케이니이다. 어릴 적 이름은 芳菊丸|호기쿠마루일본어였다. 당시 후계자로는 형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이마가와 히코고로가 있었기 때문에, 요시모토는 4세 때 불문에 들어가 스루가 국 후지 군의 젠토쿠지에 맡겨졌다. 이때 법명은 梅岳承芳|바이가쿠 쇼호일본어 또는 栴岳承芳|센가쿠 쇼호일본어였다.[18] 이후 이마가와씨 출신 승려인 다이겐 셋사이와 함께 교토로 가서 겐닌지, 묘신지 등에서 수학하며 학식을 쌓았다.[17][19]

1536년(덴분 5년), 형 우지테루가 급사하고 같은 날 히코고로마저 사망하면서 요시모토에게 가독 계승권이 돌아왔다. 중신들의 요청으로 환속한 그는 당시 세이이타이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아 요시모토(義元)로 개명했다.

그러나 이복형인 玄広恵探|겐코 에탄일본어과 그를 지지하는 유력 가신 후쿠시마씨가 이에 반발하여 가독 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일어났다. 이를 하나쿠라의 난(花倉の乱)이라 부른다. 겐코 에탄 측은 이마가와 관을 공격하는 등 공세를 펼쳤으나, 다이겐 셋사이, 오카베 치카츠나 등 요시모토 측 가신들의 활약과 사가미 국의 고호조 씨[4] 및 가이 국의 다케다 가문[4]의 지원을 받은 요시모토 측이 점차 우세를 점했다. 결국 하나쿠라 성이 함락되고 겐코 에탄은 자결하였다.[4]

내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요시모토는 이마가와씨 제9대 당주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보인 가신들을 중용하며 스루가 지역의 지배 체제를 정비했다.[4]

2. 2. 호조, 오다 가문과의 대립

1537년 2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이전 당주 이마가와 우지테루 시대부터 적대 관계였던 가이 국의 슈고(守護) 다케다 노부토라의 딸(조케이인)과 혼인하여 다케다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고슌 동맹'''). 이 동맹은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오랜 동맹 관계였으며 요시모토의 가문 계승을 도왔던 호조 우지쓰나의 분노를 샀다('''준소 동맹''' 파기). 같은 해, 호조군은 스루가 국 후지 군 요시와라(시즈오카현 후지시)를 침공했다('''제1차 가토의 난'''). 하나쿠라의 난으로 인한 내부 갈등이 수습되지 않아 가신단 통제가 미흡했던 이마가와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가토 지방(현재 시즈오카현 동부)을 호조군에게 빼앗겼다. 요시모토는 다케다의 원군과 함께 영토 탈환을 시도했으나, 하나쿠라의 난 당시 에탄 규쇼(恵探休) 편에 섰던 호리코시 씨, 이이 씨 등 도토미 국의 반 요시모토 세력이 이탈하면서 가신들의 반란과 호조군의 침공이라는 양면 공격에 시달렸고, 가토 지방은 호조 가문에 점령된 채 장기화되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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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와리 국(아이치현 서부)의 오다 노부히데1540년부터 미카와 국(아이치현 동부)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요시모토는 미카와에 원군을 보내 현지 호족들과 연합하여 1542년 오다군과 결전을 벌였으나, 오다 노부히데의 맹공에 패배했다(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 다만 이 전투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후세의 창작이라는 의혹도 있다.

1541년, 호조 우지쓰나가 사망하고 호조 우지야스가 뒤를 이었다. 같은 해 5월 25일, 가이의 다케다 노부토라는 아들 다케다 하루노부(후의 신겐)와 함께 시나노 국의 스와 요리시게,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과 시나노 사쿠 군을 침공했다(우노쿠치 전투). 6월 14일, 노부토라는 요시모토를 만나기 위해 스루가로 향했으나, 하루노부가 국경을 봉쇄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추방당했다. 요시모토는 노부토라의 신병을 인수하는 한편, 가독을 계승한 하루노부와도 동맹 관계를 유지했으며, 다카토 전투에서는 다케다 측에 원군을 파견하기도 했다.[5]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요시모토는 1545년, 호조 우지야스와 적대하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동맹을 맺고 호조 가문을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제2차 가토의 난'''). 같은 해 8월 22일, 이마가와-우에스기 동맹으로 인해 호조군은 가토 지방과 간토 양쪽으로 전력이 분산되었다. 요시모토는 다케다의 원군과 함께 가토 지방을 침공했고, 간토에서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 등이 연합한 8만의 대군으로 가와고에 성을 포위했다. 가토 지방에서 이마가와군이 호조군을 격파하고, 간토에서 우에스기 연합군이 가와고에 성을 포위하면서 호조군은 서쪽의 이마가와와 동쪽의 우에스기 연합군에게 협공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궁지에 몰린 우지야스는 다케다 하루노부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요시모토는 가토 지방을 반환받는 조건으로 화의에 응하여 호조 가문과의 싸움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서쪽의 위협을 던 우지야스는 간토 방면에 전력을 집중하여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후 가토 지방 영유권을 둘러싼 긴장은 계속되었지만, 호조 가문이 간토 공략에 집중하면서 점차 완화되었다.

한편, 미카와에서는 서부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이마가와 가문에 귀순하면서 그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내기로 약속했다. 요시모토는 오다 가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카와 세력을 꾸준히 복속시켜 나갔다. 그러나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미카와 다하라 성(아이치현 다하라시)의 영주 도다 야스미쓰가 배신하여 다케치요를 적대 세력인 오다 가문에 넘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전년도에 요시모토가 도다 가문의 일족인 도다 노부나리, 도다 요시미쓰 등을 멸했기 때문에 도다 종가의 당주였던 야스미쓰가 반발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시모토는 이에 즉각 대응하여 도다 종가를 무력으로 멸망시키고, 다하라 성에는 유력 가신인 아사히나 야스토모를 배치했다. 다만 최근에는 이 사건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도다 야스미쓰 연합과 마쓰다이라 가문 내 반대파(마쓰다이라 노부타카, 사카이 다다나오)의 요청을 받은 이마가와 요시모토-오다 노부히데 연합군 사이의 전투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전투 결과 도다 가문은 요시모토에게 멸망당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은 노부히데에게 오카자키 성을 빼앗긴 뒤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용서받았다고 한다.

1548년, 요시모토의 미카와 진출에 위협을 느낀 오다 노부히데가 다시 침공해왔으나, 요시모토의 군사다이겐 셋사이와 중신 아사히나 야스요시가 이끄는 이마가와군은 오다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6] 이 전투 이후, 이전에 마쓰다이라 노부타카를 멸망시켰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도 다시 이마가와 가문에 복속했다.

1549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사망하자, 요시모토는 영주를 잃은 마쓰다이라 가문의 영지인 서부 미카와를 이마가와 가문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려 했다. 당시 마쓰다이라 가문의 후계자인 다케치요는 오다 가문의 인질이었으므로, 요시모토는 오카자키 성(현재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 가신을 파견하여 사실상 마쓰다이라 영지를 장악하고, 미카와 국의 고쿠진(国人) 영주들을 이마가와 가문의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오다 가문 측의 미카와 안조 성을 공략(제3차 안조 전투, 현재 아이치현 안조시)하여 오다 세력을 미카와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가문 계승 직후부터 이어진 오다 가문과의 싸움은 이마가와 가문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이때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庶長子) 오다 노부히로를 사로잡아, 다케치요와의 인질 교환을 통해 다케치요를 되찾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둠으로써 오와리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만, 친족 후견이 없는 어린 다케치요를 오카자키 성에 두어 마쓰다이라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으며, 요시모토가 다케치요를 인질로 삼은 것은 사실상 보호를 통해 이마가와 산하 세력으로서 가문을 존속시키려 했다는 견해도 있다.) 1551년 오다 노부히데가 사망하자, 요시모토는 오와리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1554년, 요시모토는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호조 우지야스의 딸(하야카와도노)을 혼인시키고, 다케다 가문, 호조 가문과 상호 혼인 관계를 맺어 '''고소슨 삼국 동맹'''을 결성했다(젠토쿠지 회맹). 이로써 동쪽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고 서쪽으로의 진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고지 원년(1555년)에는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 사이를 중재하여 화해를 성사시켰다. 또한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국에서 검지(検地,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영지 지배를 강화했다. 그러나 미카와를 둘러싼 오다 가문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기라 요시아키, 오쿠다이라 사다카쓰 등이 이마가와 가문에 반기를 드는 사건(미카와 소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에이로쿠 원년(1558년), 요시모토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카와 가모 군 데라베 성의 스즈키 시게타쓰를 공격하게 하여 항복시켰다. (다른 기록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보낸 원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도 한다.) 같은 해, 요시모토는 아들 우지자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이후 이마가와 가문의 본국인 스루가와 도토미에서 발급되는 문서는 우지자네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요시모토는 새로 편입한 미카와 국의 안정화와 경영에 집중하는 한편, 오와리 및 그 서쪽 지역으로의 침공을 준비했다.

2. 3. 세력 확대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가문 계승 후, 가이의 다케다 신겐 여동생과 혼인했다.[2] 이를 통해 1540년 신겐이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추방하는 것을 도우며 다케다 가문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다.[5] 1541년 호조 우지쓰나가 사망하고 호조 우지야스가 가독을 잇자, 요시모토는 우지야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우에스기 노리마사1545년 동맹을 맺고 연합하여 우지야스를 공격했다. 이 분쟁은 다케다 하루노부(후의 신겐)의 중개로 화친이 이루어졌으며, 그 조건으로 호조 가문에 빼앗겼던 가토 군을 돌려받았다. 이후 1551년 우지야스에게 고코쿠지성을 잠시 빼앗기기도 했으나 곧 탈환하고 기세강을 양측의 경계로 삼았다.

한편, 요시모토는 미카와 국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했다. 1542년, 미카와에서 영향력을 키우던 오다 노부히데와 충돌하여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로부터 압박을 받던 니시미카와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귀순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히로타다의 아들 다케치요(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보내도록 했으나, 호송을 맡았던 미카와 다하라성의 영주 도다 야스미쓰가 배신하여 다케치요를 적대국인 오다 가문으로 보내버렸다. 이는 전년에 요시모토가 도다 가문의 일족인 도다 노부나리, 도다 요시미쓰 등을 처벌한 것에 원한을 품은 도다 종가의 당주 야스미쓰가 일으킨 반란이었다. 격노한 요시모토는 도다 종가를 멸문시키고 다하라 성을 가신인 아사히나씨에게 넘겨주었다.

1548년, 요시모토의 미카와 진출에 위협을 느낀 오다 노부히데가 다시 미카와를 침공했으나, 요시모토는 중신 다이겐 셋사이와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총대장으로 내세워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오다 군에 대승을 거두고 오다 가문의 세력을 사실상 미카와에서 몰아냈다.[6] 1549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암살당하자, 요시모토는 즉시 이마가와 군을 오카자키성으로 보내 영주를 잃은 마쓰다이라 가문의 영지를 사실상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이로써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3개 국을 아우르는 대영주로 성장하여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오다 가문의 미카와 안쇼성을 공략하여 노부히데의 서장자 오다 노부히로를 사로잡고, 그를 오다 가문에 인질로 잡혀있던 다케치요와 교환하여 다케치요를 되찾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다.

1551년 오다 노부히데가 사망하고 오다 가문 내에서 가독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지자, 요시모토는 이 기회를 틈타 오와리 동부의 치타군과 아이치군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이 시기 요시모토의 고쿠다카는 약 90만 석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정 면에서는 1553년 아버지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제정한 분국법 이마가와 가나모쿠로쿠에 가나모쿠로쿠 추가 21개조를 추가했다. 여기서 그는 이마가와 영국의 질서 유지는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아닌 이마가와 씨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이라 명시하며, 무로마치 막부가 정한 수호사 불입지 폐지를 선언했다. 이는 이마가와 가문이 막부의 권위에 의존하는 수호 다이묘가 아니라, 스스로의 실력으로 영토를 다스리는 센고쿠 다이묘임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

외교적으로는 1552년 다케다 신겐의 아들 다케다 요시노부와 자신의 딸을 혼인시켰고, 1554년에는 적자 이마가와 우지자네호조 우지야스의 딸 하야카와도노와 혼인시켰다. 또한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 사이의 혼인을 중개하여 세 가문 간의 동맹, 이른바 고소슨 삼국 동맹을 성사시켰다(젠토쿠지 회맹). 이를 통해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서쪽으로의 진출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같은 해, 서쪽으로 진출하여 오와리 동남부에 무라키 성을 쌓고,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은 미즈노 노부모토(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숙부)를 오가와 성에서 포위했다.

1555년, 다케다 신겐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 사이의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를 중재하여 양측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또한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에서 검지를 실시하여 영지 지배를 강화했다. 그러나 미카와를 둘러싼 오다 가문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기라씨, 오쿠다이라씨 등이 이마가와에 반기를 드는 '미카와 소극'이라 불리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1558년, 휘하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다케치요가 원복 후 개명한 이름)에게 미카와 가모군데라베성을 공격하게 하여 성주 스즈키 시게노리를 항복시켰다. 같은 해, 요시모토는 아들 우지자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 이후, 이마가와 씨의 본국인 스루가, 도토미에 발급되는 문서의 명의는 우지자네가 되었고, 요시모토는 새로 편입한 미카와 국의 안정화와 경영에 집중하며 오와리 방면으로의 추가적인 진출을 준비했다.

2. 4. 오케하자마 전투와 죽음

1555년 다이겐 셋사이, 1557년 아사히나 야스요시와 같은 유능한 보좌관들이 잇따라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마가와 가문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560년 요시모토는 미카와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음력 5월, 그는 약 2만 5천 명(일설에는 2만 2천 명 또는 4만 명이라고도 함[7][8])의 대군을 이끌고 교토 상경을 목표로 오와리 침공을 시작했다.[21] 이는 다케다 가문, 호조 가문과의 삼국 동맹을 맺은 후의 일이었다.[7] 이때 선봉에는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는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섰다.[7]

이마가와군은 오다 노부나가 세력에게 포위된 오다카성(현재 나고야시 미도리구)을 구원하기 위해 성 주변의 오다 측 요새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21]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은 요시모토는 구쓰카케 성에 있던 본대를 이끌고 오다카 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동 도중 덴가쿠하자마(현 아이치현 도요아케시)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10] 방심하여 군사들이 노래와 사케를 즐기며 축하하는 사이에[10] 오다 노부나가가 이끄는 약 3천 명의 병력[9]이 폭우를 틈타 감행한 기습 공격을 받았다(오케하자마 전투).[10]

오케하자마에 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묘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몸 무덤 (아이치현 도요가와시)


이 전투에서 요시모토는 마쓰이 무네노부 등과 함께 분전했으나, 오다 가신 모리 요시카쓰(또는 모리 신스케)와 핫토리 코헤이타에게 결국 살해당했다.[5][11][21] 이때 그의 나이는 향년 42세였으며, 아끼던 칼인 요시모토 사몬지와 수급을 빼앗겼다.[21] 이 사건은 신조코키에도 기록되어 있다.

요시모토의 수급은 나루미 성에서 항전하던 중신 오카베 모토노부가 노부나가와 성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교섭하여 반환받아 스루가로 돌아갔다.[21] 하지만 목 없는 시신은 슨푸로 운구하려 했으나 부패가 심해 미카와 호이군매장되었다.[21]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은 현대 아이치현 도요카와시의 사찰 다이세이-지로 알려져 있다.

요시모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마가와 가문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아들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가문을 계승했지만,[12] 이 틈을 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니시미카와에서 독립했다. 이에 동조하여 히가시미카와의 토다씨, 사이고 씨 등도 이마가와 가문을 떠나 마쓰다이라 씨 휘하로 들어갔다.[21]

미카와 지역의 동요는 인접한 도토우미까지 번져 '엔슈 착란'이라 불리는 혼란 상태에 빠졌다. 어린 우지자네는 인심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이 나오치카나 이이오 렌류 등을 숙청하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가신들의 이반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1] 결국 많은 영주들의 지지를 잃고 영지 통제력마저 상실한 이마가와 가문은 급격히 쇠퇴하여, 요시모토 사후 9년 만인 에이로쿠 12년(1569년),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스루가와 도토우미에서 쫓겨나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잃었다.[21]

이후 우지자네는 아내 하야카와도노의 친정인 호조씨에게 의탁했으나, 다케다와 호조의 동맹이 부활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이마가와 씨는 고케 하타모토로서 막신의 지위를 얻었다. 요시모토의 조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내인 쓰키야마 부인이었다.

3. 사후

오다 측에 의해 베어진 수급은 나루미성에서 항전하던 요시모토의 중신 오카베 모토노부가 오다 노부나가와의 교섭 끝에 성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반환받아 스루가로 돌아갔다.[22]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적자인 이마가와 우지자네가 가독을 승계했지만, 이 혼란을 틈타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립하였다. 우지자네는 이에야스의 장인이었던 세키구치 지가나가에게 책임을 물었고, 지가나가는 결국 자결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마가와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에야스의 자립은 히가시미카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토다 씨, 사이고 씨 등이 이마가와 가문을 이반하고 마쓰다이라 씨 휘하로 들어갔다. 이러한 미카와의 동요는 인접한 도토미까지 번져나가, 영지 내에서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 상태(엔슈 착란)에 빠졌다. 당시 젊었던 우지자네는 인심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고, 이이 나오치카나 이이오 렌류 등을 숙청하는 강경책을 썼으나 이는 오히려 가신들의 이반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많은 국인 영주의 지지를 잃고 영지 통제력마저 상실한 이마가와 가문은 급격히 쇠퇴하여, 요시모토 사망 9년 후인 에이로쿠 12년(1569년), 다케다 신겐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스루가도토미에서 쫓겨나면서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이마가와 가문은 멸망했다.

스루가에서 추방된 우지자네는 아내 하야카와 도노의 친정인 호조 가문에 의탁했으나, 이후 다케다 가문과 호조 가문의 동맹이 부활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이마가와 가문은 고케 하타모토로서 막신의 반열에 올랐다.

'''묘소 및 기념물'''

구분위치비고
묘소아이치현 도요카와시 우시쿠보정 다이쇼지동총(胴塚), 잇시키 도키이에의 묘 옆
아이치현 니시오시 코마바정 도코지목 무덤(首塚)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오이와정 린자이지이마가와 가문 보제사, 목상, 이마가와 신묘[22]
위령탑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오이와 혼마치 후슌인[23]
기념비 (이마가와즈카)아이치현 도카이시
아이치현 키요스시 쇼가쿠지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오케하자마 고전장 전설지메이지 9년(1876년) 5월 건립
동상아이치현 나고야시 미도리구 오케하자마 고전장 공원헤이세이 22년(2010년) 5월, 오케하자마 전투 450주년 기념 건립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JR 시즈오카역 북쪽 출구 광장레이와 2년(2020년) 5월 19일 제막 (요시모토 탄생 500년제 기념)



린자이지 (2016년 8월 14일 촬영)

4. 인물 및 평가

요시모토는 굵은 다리 때문에 말을 타지 못하고 가마를 이용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신빙성이 낮은 에도 시대 중기의 기록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쓴 신장공기에는 오케하자마 전투 패배 후 말을 탔다는 기록이 있으며, 설령 가마를 탔더라도 이는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일문으로서 받은 특별한 영예였다. 어릴 적 불문에 들어가 무예를 익히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이 역시 근거가 부족한 추측이다. 실제로는 만년에 체중이 늘었음에도 무예 수련을 계속했고, 세 사람이 들어야 할 만큼 무거운 칼을 휘둘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도카이도 최고의 무사라는 평가도 받았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직접 칼을 들고 핫토리 하루야스에게 부상을 입히고 모리 요시카츠와 겨루다 전사한 기록으로 보아 무예 소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장 개인의 무용과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별개로 평가해야 한다.

구게(公家) 문화에 정통하여 교토에서 피난 온 구게들을 보호했으며, 야마구치의 오우치 씨, 이치조다니의 아사쿠라 씨와 함께 전국 3대 문화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4] 스스로 오하구로(치아 염색), 오키마유(눈썹 그리기), 옅은 화장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이는 당시 슈고 다이묘 이상에게만 허용된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지 연약함의 상징은 아니며, 오히려 전장에 나서는 무사가 화장을 하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25] 와카(和歌)에도 조예가 깊어 아버지 이마가와 우지치카처럼 전문가(레이제이 다메카즈)에게 직접 지도를 받고 정기적인 가회(歌会)를 열었으나, 렌가는 선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와카 실력 자체가 당대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있다.[26]

행정가로서의 수완은 특히 뛰어나, 1553년 분국법인 이마가와 가나 목록을 정비하고 상업 보호, 유통 통제, 요리오야·요리코 제도를 통한 가신단 결속 강화 등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세우는 데 영향을 주었다. 금광 개발이나 교통망 정비에도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28]

1560년의 오와리 침공 목적에 대해서는 교토 상경설과 오다 노부나가 토벌 및 오와리 공략설이 있다. 당시 교토미요시 나가요시 정권의 전성기였으므로 이마가와 가문의 병력만으로 상경은 무리였다는 분석에 따라 후자의 설이 제기된다. 오케하자마 전투 직전, 가독을 다투었던 이복형 겐코 에탄이 꿈에 나타나 출진을 만류했으나 요시모토가 듣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당대기』). 『신장공기』에는 당시 요시모토가 화려한 갑옷과 투구, 진바오리를 착용하고 명마를 타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요시모토는 정치, 군사, 문화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역량을 지닌 센고쿠 다이묘였으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한 사실 때문에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정적 업적과 문화적 기여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며,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교토로 향할 때마다 오케하자마의 요시모토 무덤 앞에서 가마를 멈추게 하여 예를 표했다는 일화는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한편, 요시모토의 생모가 주케이니가 아닌 측실이라는 설이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기도 한다.[29][30][31] 이는 그가 서출이었기에 어린 시절 불문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생모로는 후쿠시마 씨[29], 아사히나 씨[30], 간바라 씨[32] 등이 거론되나 아직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여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5. 대중문화 속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더 자세한 내용은 센고쿠 시대 인물의 대중문화를 참조하십시오.''

5. 1. 게임

포켓몬 + 노부나가의 야망(일본명 ''포켓몬 컨퀘스트'')에서 플레이 가능한 무장으로 등장하며, 파트너 포켓몬은 애버라스와 해피너스이다.[13]

''무쌍 OROCHI'' 시리즈에서는 어리석고 구식인 귀족으로 묘사된다. 그의 무기는 아들 우지자네의 역사적인 케마리에 대한 집착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무쌍 OROCHI 5''에서는 워해머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일본도 사몬지를 사용하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끊임없이 위협이 되는 오만하지만 유능한 지도자로 그려진다.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물리치고 오다 군대를 물러나게 하지만, 결국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패배한다.

애니메이션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서는 요시모토의 여성 버전이 등장한다. 이 버전에서 요시모토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오다 노부나가 교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허수아비 쇼군으로 임명된다.

전국 바사라 게임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는 퇴각하면서 부하들을 미끼로 삼는 무능한 지도자로 묘사된다. 애니메이션 버전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한다.

5. 2. 만화

그는 포켓몬스터 + 노부나가의 야망 (일본에서는 ''포켓몬 컨퀘스트'')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파트너 포켓몬은 애버라스와 해피너스이다.[13]

''무쌍 OROCHI'' 시리즈에서 요시모토는 어리석고 구식인 귀족으로 묘사된다. 그의 무기는 그의 아들인 우지자네의 역사적인 축구에 대한 집착에서 영감을 받은 케마리이다. 그러나 ''무쌍 OROCHI 5''에서는 워해머와 그의 조상인 사몬지라는 일본도를 사용하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끊임없는 위협이 되는 오만하지만 유능한 지도자로 묘사된다. 그는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물리치고 오다 군대를 물러나게 한 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결국 패배한다.

요시모토의 여성 버전은 애니메이션 오다 노부나의 야망에 등장한다. 이 버전에서 요시모토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노부나의 교토에 대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허수아비 쇼군으로 임명된다.

전국 바사라 게임과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 그는 퇴각하려 하면서 가신들을 미끼로 사용하는 무능한 지도자로 묘사되었다. 애니메이션 버전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한다.

5. 3. 드라마

''더 자세한 내용은 센고쿠 시대 인물의 대중문화를 참조하십시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연도제목배우방송사
1965년태합기미쿠니 이치로NHK 대하드라마
1969년천과 지네가미 준NHK 대하드라마
1973년구니도리 이야기하나야기 키요카즈NHK 대하드라마
1981년온나 태합기신 미노루NHK 대하드라마
1983년도쿠가와 이에야스나리타 미키오NHK 대하드라마
1988년다케다 신겐나카무라 칸쿠로NHK 대하드라마
1992년노부나가 KING OF ZIPANGU시바타 코히코NHK 대하드라마
1996년히데요시요네쿠라 사이카넨NHK 대하드라마
2002년토시이에와 마츠~가가의 백만석 이야기~사사키 무츠미NHK 대하드라마
2006년공명의 갈림길에모리 토오루NHK 대하드라마
2007년바람의 숲 화산타니하라 쇼스케NHK 대하드라마
2014년노부나가 콘체르토나마세 카츠히사후지 TV
2017년온나 조슈 나오토라슌푸테이 쇼타NHK 대하드라마
2020년기린이 온다카타오카 아이노스케NHK 대하드라마
2023년어떻게 할까 이에야스노무라 만사이NHK 대하드라마


참조

[1] 웹사이트 織田信長「桶狭間の戦い」前夜に見せていた奇策 https://toyokeizai.n[...] 2020-11-04
[2]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今川義元」の解説 https://kotobank.jp/[...] Kotobank 2021-12-15
[3] 서적 Nihon no kassen: Monoshiri jiten Shufu-to-seikatsusha
[4] 웹사이트 Suruga Imagawa-shi http://www2.harimaya[...] 2008-07-12
[5] 서적 Battles of the Samurai Arms and Armour Press
[6] 서적 Nihonshi yōgoshū B Yamakawa shuppansha
[7] 서적 (unspecified)
[8] 서적 A History of the Japanese People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9] 서적 Nihonshi yōgoshū B
[10] 서적 (unspecified)
[11] 웹사이트 1560: The Spring Thunderstorm http://geocities.yah[...] 2009-10 (dead link)
[12] 서적 (unspecified)
[13] 웹사이트 Yoshimoto + Pineco – Pokemon Conquest characters http://www.pokemonco[...] 2012-06-17
[14] 간행물 二本松市史. 第5巻 二本松市
[15] 뉴스 【戦国こぼれ話】桶狭間の戦いで無念の死を遂げた戦国大名今川義元は、公家化した軟弱大名だったのか(渡邊大門) https://news.yahoo.c[...] Yahoo!ニュース 2021-04-28
[16] 간행물 桶狭間の戦い 小学館
[17] 논문 戦国大名今川氏と禅宗諸派
[18] 문서 梅岳承芳
[19] 논문 2017-12-19
[20] 문서 永禄11年3月10日付円良寺宛氏真判物
[21] 문서 桶狭間合戦当時の最盛期の義元の領国
[22] 뉴스 「今川義元もっと知って/来年生誕500年祭/静岡 地元で票世紀再評価・発信」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7-07
[23] 문서 かつては富春院の北側に氏真が父の菩提を弔うために建立した陽光山天澤院
[24] 뉴스 読売新聞 2019-06-05
[25] 서적 イラストで時代考証 日本合戦図図典 雄山閣
[26] 서적 武士はなぜ歌を詠むのか 鎌倉将軍から戦国大名まで 角川学芸出版
[27] 문서 岡部家は代々岸和田藩主
[28] 뉴스 軟弱もの、公家かぶれ…負のイメージ根強い今川義元 復権へ地元が全力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0-05-19
[29] 서적 花蔵の乱再考
[30] 서적 北条氏との婚姻と同盟
[31] 논문 花蔵の乱をめぐって
[32] 서적 徳川家康と今川氏真 朝日新聞出版
[33] 문서 軍師の太原雪斎が桶狭間前に亡くなったことも影響している
[34] 서적 NHK大河ドラマストーリーガイド「風林火山」前編 NHK出版
[35] 문서 異本の金吾利口書および宗滴夜話には、今川殿となっており、義元も指すかは不明瞭である。
[36] 뉴스 今川義元「一度の敗北だけで…」静岡市長ら復権宣言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7-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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