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 (13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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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변은 1391년에 태어나 1473년에 사망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그는 14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정자로 관직을 시작했으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왕을 섬기며 외교, 학문,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중국어에 능통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파견되어 외교에 기여했고, 신숙주와 함께 훈세평화를 저술하여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이변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함을 유지하며, 겉과 속이 같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는 곧은 신하로 평가받았다. 그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문반으로 활동하며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 덕수 이씨 중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이변은 1391년 7월 23일 의정공 이공진(李公晉)의 아들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보승별장 정광조의 딸이다.
이변은 고려 말 무인 집권 시기에 활동했던 이돈수를 시조로 하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문반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가문을 반석 위에 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공헌으로 덕수 이씨 가문에서 중시조로 추앙받고 있다.[1]
2. 생애
1407년(태종 7년) 태학에 입학하고, 1417년(태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419년(세종 1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정자가 되었다.[1] 이후 이변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왕을 섬기며, 특히 중국어와 이문(吏文, 공문서 작성에 쓰이는 특수 문체)에 능통하여 40여 차례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
1428년(세종 10년) 겨울, 아버지 의정공 이공진이 별세하였다.[1] 1435년(세종 17년) 8월에는 어머니 증 정경부인 초계 정씨가 별세하였다.[1] 1436년(세종 18년) 이변은 모친의 3년상을 치르도록 간청하였으나, 기복시켜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1]
1461년(세조 7년) 9월 24일, 부인 정경부인 양성이씨(陽城李氏, 순찰사 이현신의 딸)가 별세하였다.[1]
1473년(성종 4년) 10월 9일, 이변은 서울 근교 금천(衿川)의 본가에서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1] 정정(貞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 묘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덕수공원에 있으며, 부인 정경부인 양성이씨와 함께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장남은 봉례공 이효조, 차남은 판관공 이효종이다.[1]
2. 1. 관직 생활
태종 7년(1407년), 17세에 태학(太學)에 입학하였다.[1] 태종 17년(1417년)에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1] 세종 1년(1419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정자에 임명되었다.[1]
세종 5년(1423년) 승문원 박사가 되었고,[1] 세종 9년(1427년)에는 사역원 판관 겸 승문원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변은 임명될 때마다 반드시 승문원과 사역원 두 벼슬을 겸임하였다.[1] 세종 10년(1428년) 겨울, 전농시 판관을 역임하였다.[1] 세종 11년(1429년) 사역원의 역학 훈도로 삼기 위하여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1]
세종 14년(1432년) 첨지 승문원사를 거쳐,[1] 세종 16년(1434년)에는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질문하기 위하여 요동에 갔다가 돌아왔다.[1] 세종 18년(1436년)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고, 봉상시 윤을 역임하였다.[1] 세종 20년(1438년)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1]
세종 21년(1439년), 사은사 종사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1] 당시 문관 출신으로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이변과 김하(金何)뿐이었으므로, 조선의 대명 외교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1] 세종 22년(1440년) 사간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역임하였다.[1]
세종 23년(1441년) 호조참의, 공조참의,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1] 세종 24년(1442년) 주문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1] 세종 29년(1447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중추원 부사(副使)가 되었다.[1]
세종 30년(1448년) 예조참의, 중추원사를 거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1] 세종 31년(1449년) 형조참판, 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1]
문종 1년(1451년) 중추원부사, 이조참판을 거쳐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갔다.[1] 문종 2년(1452년)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1]
단종 1년(1453년) 경창부(慶昌府) 윤(尹)을 지내고 가정대부(嘉靖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다.[1]
세조 1년(1455년) 공조판서, 중추원사를 역임하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1] 세조 4년(1458년) 공조판서에 전임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1] 세조 6년(1460년) 중추원 판사(判事)가 되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1]
세조 8년(1462년) 행 첨지 중추원사를 거쳐,[1] 세조 11년(1465년) 지중추원사 로 내구마 1필을 하사 받았다.[1] 세조 12년(1466년)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1] 세조 13년(1467년) 궤장을 하사받고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이변은 나이가 들었으므로 서반(西班)의 한직(閒職)에 머물렀으나, 명나라 사신이 오면 어전통사(御前通事)로 활약하거나, 명나라에 주문(奏聞)할 중요한 문서를 초안할 경우에는 승문원 제조로서 역할을 하였다.[1]
세조 14년(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1] 성종 3년(1472년)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가 되었다.[1]
2. 2. 사망 및 평가
성종 4년(1473년) 10월 9일, 이변이 83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성종은 조정의 정사를 멈추고 국가 예장으로 장례를 모시도록 했다. 또한 금천현(현재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일대를 하사하여 무덤으로 쓰게 하였다.[2] 이후 후손들이 묘소를 계승하여 현재까지 관리하고 있으며, 묘 아래에는 사설 덕수공원을 조성하여 후손들의 배움터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도 1년에 1~2회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2] 묘소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덕수공원에 있으며, 부인 정경부인 양성이씨(순찰사 이현신의 딸)와 함께 쌍분으로 모셔져 있다.
이변은 이돈수 이래로 무반 가문의 성향이 강했던 덕수 이씨 충무공 이순신 가계에서 문반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집안을 반열에 올린 인물로, 덕수 이씨 중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후손은 정정공파로 분류되며, 함종공파, 참판공파, 율리공파, 충무공파, 판관공파 등 5개 소파로 나뉜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는 이변에 대해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 ‘경골지신(硬骨之臣, 뼈대가 굳은 신하)’이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 남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항상 겉과 속이 같았다. 남의 과실을 보면 바로 면전에서 꾸짖었고, 아무리 윗사람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2]
이러한 강직한 성품은 몇몇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이조참의 시절, 인사 문제로 판서와 자주 충돌했으며, 지방관이 보낸 뇌물을 받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하루는 판서가 이변에게 고기를 대접했는데 이변은 "이것이 바로 뇌물로 받은 고기인가"라고 물었고, 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변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왕을 섬기며, 특히 중국어와 이문(吏文, 공문서 작성에 쓰이는 특수 문체)에 능통하여 40여 차례나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대명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2]
이변은 승문원 제조와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신숙주와 함께 한국의 명현과 절부의 행적을 담은 『훈세평화』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관리들에게 가르쳤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최근 나고야시의 봉좌문고에서 발견되었으며,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증조부 이윤번(李允蕃) 증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행 도사 조부 이현(李玄)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부친 이공진(李公晉) 통의대부 사재시사 모친 초계 정씨(草溪鄭氏) 증 정경부인, 보승별장 정광조의 딸 본인 이변(李邊) 1391년 - 1473년 배우자 양성 이씨(陽城李氏) 정경부인, 순찰사 이현신의 딸 장남 이효조(李孝祖) 통훈대부 통례원 봉례 장남 배우자 행주 기씨(幸州奇氏) 숙인, 진사 기자환(奇自煥)의 딸 차남 이효종(李孝宗) 통훈대부 황주판관 차남 배우자 성양 박씨(成陽朴氏) 숙인, 봉례 박분의 딸
4. 평가
김종직은 이변이 "나는 평생에 아직껏 남을 속인 일이 없고 벼슬을 한 이래 한번도 거짓 병으로 퇴직한 일이 없었다."고 한 말에 대해 "참으로 이 말 같다면 상공의 덕은 진실로 존경할 일이다. 그러나 옛날 벼슬 한 사람들도 임금에게 병을 핑계대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평했다.[1]
이변의 행적은 가승(家乘)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여지승람, 추강냉화, 하곡집 등에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1]
4. 1. 긍정적 평가
이변은 강직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면전에서 꾸짖을 정도로 대쪽같은 성격이었다.[2] 이조참의 시절에는 인사 문제로 판서와 자주 충돌했는데, 지방관이 보낸 뇌물을 판서가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판서에게 "이것이 바로 뇌물로 받은 고기인가"라고 대놓고 말할 정도였다.[1]
스스로 '뼈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했으며,[2] "평생에 남을 속인 일이 없고, 벼슬을 한 이래 거짓 병으로 퇴직한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정직함에 자부심을 가졌다.[1]
뛰어난 외교적 능력 또한 이변의 긍정적인 면모 중 하나이다. 특히 중국어를 잘하고 이문(각종 공문서에 쓰는 특수한 문체)에 능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40여 차례나 다녀왔으며, 중국인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대명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1]
학문적인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신숙주와 함께 고금의 명현과 절부의 행적을 한어로 번역한 『훈세평화』를 저술하여 승문원과 사역원 관리들에게 가르쳤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해 갔으나, 최근 일본 나고야 도쿠가와 집안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서 발견되었다. 『훈세평화』는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1]
이러한 업적들을 바탕으로 이변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왕을 모셨고, 문신들의 부러움을 받는 대제학,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참판을 두루 거쳤다. 70세가 넘어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도 들어갔으며,[1] '해동명신록'에도 이름을 올렸다.[1]
4. 2. 부정적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변의 성품에 대해 "사람됨이 편협하고 성급하여 요좌(僚佐: 속관)가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문득 꾸짖었다"라고 평가했다.[2]
4. 3. 후대의 평가
이변은 고려 말 무인 집권기에 활동했던 이돈수를 시조로 하는 무반 가문 출신이었으나, 문반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가문을 반석 위에 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공헌으로 덕수 이씨 가문에서 중시조로 추앙받고 있다.[1]
이변의 후손들은 정정공파로 분류되며, 함종공파, 참판공파, 율리공파, 충무공파, 판관공파의 5개 소파로 나뉜다.[1]
이변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왕을 섬겼으며, 특히 중국어와 이문(각종 공문서에 쓰이는 특수한 문체)에 능통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40여 차례나 파견되어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2] 조선왕조실록 졸기에는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뼈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2]
성종은 이변이 죽자 국가 예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금천현(현재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일대를 하사하여 묘소로 쓰게 하였다. 후손들은 묘소를 지키고 묘 아래에 덕수공원을 조성하여, 후손들의 배움터이자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순신도 1년에 1~2회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1]
이변은 『훈세평화』를 저술하여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약탈당했다가 일본 나고야 도쿠가와 가문의 봉좌문고에서 발견되었으며, 국내에는 영인본이 출간되었다.[1]
5. 저서 및 문헌
이변은 명현과 절부의 행적을 담은 『훈세평화』를 저술하여 승문원과 사역원 관리들에게 가르쳤다.[3]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유출되었다가 최근 나고야 도쿠가와 가문의 봉좌문고에서 발견되었고, 국내에는 영인본이 출간되었다.[3] 『훈세평화』는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변의 행적은 가승(家乘)에는 자세히 나타나지 않지만, 『여지승람』, 『추강냉화』, 『하곡집』 등에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1]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이변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어 그의 성품과 행적을 엿볼 수 있다.[2]
『조선왕조실록』의 이변 졸기에는 그가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 '뼈대 있는 신하'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 남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항상 겉과 속이 같았다. 남의 과실을 보면 바로 면전에서 꾸짖었고, 아무리 윗사람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6. 기타
이변은 이돈수 이래로 무인 가문의 성향이 강했던 이순신 가계에서 문반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지위를 세상에 드러내어 집안을 반열에 올린 인물로 덕수이씨 중시조로 평가받고 있다.[1]
이변의 후손은 정정공파로 분류되며 크게 함종공파(함종현령 이백복), 참판공파(이희신), 율리공파(이요신), 충무공파(이순신), 판관공파(황주판관 이효종)의 5개 소파로 나뉜다.[1]
사람됨이 정직하고 강직하여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고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남의 과실을 보면 면전에서 꺾어버렸다. 이조참의 때는 인사문제가 있을 때마다 판서와 자주 충돌했다. 하루는 지방관이 생선과 육류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는데 판서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판서가 맛있는 고기를 대접하자 "이것이 바로 뇌물로 받은 고기인가"하며 수저를 들자 판서가 입을 다물었다.[1]
항상 사람들에게 "나는 평생에 아직껏 남을 속인 일이 없고 벼슬을 한 이래 한번도 거짓 병으로 퇴직한 일이 없었다."고 말했는데 김종직은 "참으로 이 말 같다면 상공의 덕은 진실로 존경할 일이다. 그러나 옛날 벼슬 한 사람들도 임금에게 병을 핑계대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했다.[1]
조선왕조실록 이변의 졸기에는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뼈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 남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항상 겉과 속이 같았다. 남의 과실을 보면 바로 면전에서 꾸짖었고, 아무리 윗사람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다.", "사람됨이 편협하고 성급하여 요좌(僚佐 : 속관屬官)가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문득 꾸짖었다."라고 한다.[2]
이변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왕을 모셨고 문신들의 부러움을 받는 대제학, 이, 호, 예, 병, 형, 공조 참판을 두루 거쳤다. 특히 중국어를 잘하고 이문(각종 공문서에 쓰는 특수한 문체)에 능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40여 차례 다녀와서 중국인들이 모두 공의 이름을 알았다고 하며, 대명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1]
성종 4년(1473) 10월 9일 이변이 죽자 성종은 조정에서 정사를 멈추고 국가예장으로 장례를 모시었고 금천현(現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일대를 하사해 무덤으로 쓰게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계승하여 현재까지 묘소를 수호봉사하고 묘하에 사설로 덕수공원으로 조성하여 후손들의 배움의 터전과 아울러 이용시민의 건강증진과 여가 선용을 겸한 성스러운 장소로 운영되고 있다. 이순신도 1년에 1~2회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1]
성종 4년(1473) 이변이 승문원 제조와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우리나라의 명현(名賢)과 절부(節婦)의 행적을 『훈세평화』라는 책으로 엮어서 중국어로 번역하여, 승문원과 사역원 두 기관의 관리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후손 이단하는 「이변전기」에서 “일찍이 『훈세평화』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책을 약탈해 가는 바람에 최근 일본 나고야 도쿠가와 집안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 국내에는 영인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변의 『훈세평화』는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1]
6. 1. 묘소
이변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덕수공원에 있으며, 해좌(亥坐)[1]로 되어 있고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는 부인 정경부인 양성이씨(여주이씨라고도 함)와 함께 묻힌 쌍분이다.양성이씨는 순찰사 이현신(이거흥이라고도 하나 족보를 따름)의 딸이며, 외조부는 삼사좌윤 연안 이씨 이즐이다. 세조 7년(1461년)에 별세하였다. 묘소에는 쌍표석이 있으며, 음기에는 이변의 생몰 연월일이 새겨져 있는데, 성종 4년(1473년) 12월 3일에 예장[2]했고 부인은 세조 7년(1461년) 9월 24일에 장례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6. 2. 기타
이변은 이돈수 이래로 무인 가문의 성향이 강했던 이순신 가계에서 문반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지위를 세상에 드러내어 집안을 반열에 올린 인물로 덕수이씨 중시조로 평가받고 있다.[1]이변의 후손은 정정공파로 분류되며 크게 5개 소파로 나뉜다. 장손이자 증손자인 함종현령 이백복(李百福)은 함종공파, 5대손인 이희신(李羲臣)은 참판공파, 5대손인 이요신(李堯臣)은 율리공파, 5대손인 이순신은 충무공파, 차남이자 황주판관을 지낸 이효종(李孝宗)은 판관공파이다.[1]
사람됨이 정직하고 강직하여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고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남의 과실을 보면 면전에서 꺾어버렸다. 이조참의 때는 인사문제가 있을 때마다 판서와 자주 충돌했다. 하루는 지방관이 생선과 육류를 보내왔으나 받지 않았는데 판서가 이미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 판서가 맛있는 고기를 대접하자 공이 수저를 들면서 "이것이 바로 뇌물로 받은 고기인가"하니 판서가 입을 다물었다.[1]
항상 사람들에게 "나는 평생에 아직껏 남을 속인 일이 없고 벼슬을 한 이래 한번도 거짓 병으로 퇴직한 일이 없었다."고 말했는데 김종직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 말 같다면 상공의 덕은 진실로 존경할 일이다. 그러나 옛날 벼슬 한 사람들도 임금에게 병을 핑계대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그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했다.[1]
조선왕조실록 이변의 졸기에는 "성품이 엄격하고 정직하여,‘뼈대 있는 신하[硬骨之臣]’라고 자처할 만큼 강직하였다. 남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항상 겉과 속이 같았다. 남의 과실을 보면 바로 면전에서 꾸짖었고, 아무리 윗사람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구차스럽게 따르지 않았다.", "사람됨이 편협하고 성급하여 요좌(僚佐 : 속관屬官)가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문득 꾸짖었다."라고 한다.[2]
이변은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6왕을 모셨고 문신들의 부러움을 받는 대제학, 이, 호, 예, 병, 형, 공조 참판을 두루 거쳤는데 특히 중국어를 잘하고 이문(각종 공문서에 쓰는 특수한 문체)에 능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40여 차례 다녀와서 중국인들이 모두 공의 이름을 알았다고 하며 무엇보다도 대명 외교에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1]
성종 4년(1473) 10월 9일 이변이 죽자 성종은 조정에서 정사를 멈추고 국가예장으로 장례를 모시었고 금천현(現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탑곡) 일대를 하사해 무덤으로 쓰게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계승하여 현재까지 묘소를 수호봉사하고 묘하에 사설로 덕수공원으로 조성하여 후손들의 배움의 터전과 아울러 이용시민의 건강증진과 여가 선용을 겸한 성스러운 장소로 운영되고 있다. 이순신도 1년에 1~2회 이곳을 찾았다고 전해진다.[1]
성종 4년(1473) 이변이 승문원 제조와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우리나라의 명현(名賢)과 절부(節婦)의 행적을 『훈세평화』라는 책으로 엮어서 중국어로 번역하여, 승문원과 사역원 두 기관의 관리들에게 가르쳤다. 그의 후손 이단하는 「이변전기」에서 “일찍이 『훈세평화』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책을 약탈해 가는 바람에 최근 일본 나고야에 있는 도쿠가와 집안의 ‘봉좌문고(蓬左文庫)’에서 이 책이 발견되었다. 국내에는 영인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변의 『훈세평화』는 15세기 한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1]
참조
[1]
서적
덕수이씨 800년사
[2]
서적
조선왕조실록
[3]
서적
德水李氏世譜 덕수이씨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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