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흐 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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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흐 칸국은 15세기 남러시아에 존재했던 킵차크 칸국의 후계 국가로, 킵차크 칸국의 붕괴 이후 등장하여 1502년 멸망했다. 킵차크 칸국의 전통을 계승하며, 수도는 사라이였다. 1470년대에는 노가이 족과 적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 칸국과의 대립, 내분으로 인해 약화되었고,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에 의해 멸망했다. 이흐 칸국의 멸망 이후 크림 칸국 등 여러 국가가 조치 울루스의 후계 국가를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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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흐 칸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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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공식 명칭 (아랍어) | اولوغ اوردا (Uluğ Orda) |
일반 명칭 | 대orde |
국가 유형 | 칸국 |
존속 기간 | 중세 시대 |
시작 연도 | 15세기 |
종료 연도 | 1502년 |
정부 형태 | 세습 군주제 |
수도 | 사라이 |
종교 | 수니 이슬람 |
공용어 | 킵차크어 |
현재 국가 | 카자흐스탄, 러시아 |
역사 | |
성립 시기 | 15세기 중반 |
주요 사건 | 우그라 강변 대치 (1480년) |
멸망 원인 | 크림 칸국의 사라이 약탈 (1502년 6월) |
선행 국가 | 황금Orde |
후계 국가 |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
정치 | |
통치자 칭호 | 칸 |
주요 지도자 | 마흐무드 빈 쿠추크 (1459년-1465년) 셰이크 아흐메드 (마지막 칸, 1481년-1502년)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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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킵차크 칸국의 해산과 대 오르다의 등장
킵차크 칸국은 14세기부터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1390년대 토흐타미쉬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티무르의 침략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1419년 에디구 (킵차크 칸국을 통일했던 마지막 인물)의 죽음은 킵차크 칸국의 붕괴를 가속화했다.[4] 이후 칸국은 노가이 칸국, 카잔 칸국, 카시모프 칸국 등으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모두 킵차크 칸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4]
킵차크 칸국의 주변 지역은 1438년 카잔 칸국, 1441년 크림 칸국, 1466년 아스트라한 칸국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남은 이흐 칸국(대 오르다)은 드니프로 강과 야이크 강 사이의 초원 지대로, 수도는 사라이였다. 이 국가는 킵차크 칸국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대 칸국"이라는 명칭은 킵차크 칸국의 행정 중심지가 축소되었지만, 본래의 위대함과 연결시키기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
1470년대, 이흐 칸국은 북쪽 카스피 해의 노가이 칸국과 적대하게 되었고,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따라 드니프르 강까지 확대되었다. 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 칸국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고 이흐 칸국과 적대했다. 같은 해, 이흐 칸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아흐메드 칸 빈 퀴취크는 노가이 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샤이크 아흐메트가 칸 지위를 이었으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이흐 칸국은 약화되었다.
1491년 봄, 크림 칸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이흐 칸국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했다. 모스크바는 기병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2,000명을 보냈다. 11월 말, 칸국 영토 일부가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노가이 족이 점령했다. 1500년, 이흐 칸국은 쿠반 인근으로 이동했으나 카바르디니안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1501년, 샤이크 아흐메트와 20,000명의 사람들은 돈 강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으나, 백성 상당수가 버려졌다.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흐 칸국의 백성 대부분을 사로잡아 모스크바로 옮겼다. 샤이크 아흐메트는 달아나 카잔 지역에서 모스크바와 협상했다. 1504년, 노가이 족에게 추방당한 후 아스트라한으로 갔다. 이후 키예프의 폴란드 국왕과 협상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으나, 빌냐에서 리투아니아의 죄수가 되었다.
3. 대 오르다의 통치자들과 내부 갈등
칭기즈 칸의 가계(조치 가문)는 대대로 남러시아를 "조치 울루스"로 지배하며, 남러시아의 여러 나라 영주들에게 공납을 요구하는 간접 지배를 계속했다. 이를 남러시아에서는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렀다. 조치 울루스의 지배층이었던 타타르인(여기서는 순수 몽골계 사람들을 가리킨다)들은 튀르크어족으로 언어가 변화하고 이슬람교로 종교가 바뀌었다. 15세기 무렵 조치 울루스는 약화되어 해체와 재편성이 진행되었다. 후계 정권에는 카자흐 칸국, 크림 칸국, 시비르 칸국, '''대 오르다''' 등 여러 정권이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될 때까지 중앙아시아 등에서 조치 울루스의 명맥을 유지했다.
조치부터 대 오르다까지의 계보는 다음과 같다.
3. 1. 쿠추크 무함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의 공동 통치 (1433–1459)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는 1430년대부터 사라이 호르드에서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동안, 호르드는 하지 1세 기라이(과거 골든 호르드로부터 크림 반도의 지배권을 빼앗았던 데블렛 베르디의 형제)가 1449년 8월 사라이로부터 권력을 몰아내면서 크림 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는 크림 칸국이 독립하게 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크림과 대호르드 간의 경쟁을 촉발했다.[5] 1438년 쿠추크 무하마드는 골든 호르드의 심장부에서 울루그 무하마드를 몰아내고 사라이에서 칸으로 선포되었다.[6] 울루그 무하마드는 초원을 떠나 그의 호르드와 함께 볼가 중류 지역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카잔 칸국을 세웠다.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타타르족은 러시아 신민들에게 세금을 강요하려 했으며, 1449년, 1450년, 1451년, 1452년에 그들을 침략했다. 이러한 공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보복을 초래했으며, 이들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폴란드 지배의 연방에 불만을 품은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사절들이 사이드 아흐마드에게 선물을 가져왔으며, 그는 1453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략했다. 1455년, 크림군은 다시 사라이를 공격하여 사이드 아흐마드가 키예프로 도망가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안제이 오드로봉시가 이끄는 군대가 키예프로 진격하여 그를 포획했고,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1457년 타타르족의 포돌리아 습격 (타타르족의 승리로 끝남)과 1459년 모스크바 습격 (모스크바의 승리로 끝남)이 있었다.[6]
3. 2. 마흐무드와 아흐마드의 통치 (1459–1481)
쿠추크 무하마드는 1459년 그의 아들 마흐무드 빈 쿠추크가 계승했다. 마흐무드는 1465년 그의 형제 아흐메드 칸 빈 쿠추크에 의해 찬탈당했다. 마흐무드는 아스트라한으로 가서 분리하여 아스트라한 칸국을 세웠다. 이로 인해 두 칸국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고, 1502년 아흐메드의 후손들이 아스트라한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끝을 맺었다.[5]
1469년 아흐메드는 우즈베크 아불-카이르 칸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1470년 여름, 아흐메드는 몰다비아,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에 대한 공격을 조직했다. 슈테판 3세가 이끄는 몰다비아군은 립니크 전투 (1470년 8월 20일)에서 타타르족을 격파했다.
1470년대에 이르러 모스크바는 사라이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중단했지만, 외교 관계는 계속 유지했다. 1474년과 1476년, 아흐메드는 이반 3세에게 칸을 자신의 지배자로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1480년, 아흐메드는 모스크바에 대한 군사 작전을 조직하여 우그라 강 대치로 알려진 두 반대 군대 간의 대치로 이어졌다. 아흐메드는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 대한 "타타르 멍에"가 공식적으로 끝났다.[7] 1481년 1월 6일, 아흐메드는 시비르 칸국의 공작 이바크 칸과 노가이에 의해 도네츠 강 어귀에서 살해되었다.
그 후, 대 오르다의 제국은 조치 울루스의 명맥을 1502년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아흐마드 칸의 사망 후 일어난 형제들의 제위 계승 다툼 등으로 인해 급속히 약화되었다.
4. 대 오르다와 주변국들의 관계
킵차크 칸국은 15세기에 들어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었다. 1438년 카잔 칸국, 1441년 크림 칸국, 1466년 아스트라한 칸국이 독립하면서, 킵차크 칸국의 남은 영토는 드니프로 강과 야이크 강 사이의 대초원 지대로 축소되었다. 이 국가는 사라이를 수도로 삼고 킵차크 칸국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알려진 '''이흐 칸국(대 오르다)'''이다.
1470년대 이흐 칸국은 북쪽 카스피 해의 노가이 족과 적대하게 되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따라 드니프르 강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 칸국이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흐 칸국과 대립하게 되었다.
1430년대부터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는 사라이에서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동안, 이흐 칸국은 1449년 크림 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는데, 이는 크림 칸국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1438년 울루그 무하마드가 카잔 칸국을 세우면서, 이흐 칸국은 여러 칸국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타타르족은 러시아에 공납을 강요하며 여러 차례 침략했다. 이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어 반격했다. 1455년 크림 군은 사라이를 공격하여 사이드 아흐마드를 키예프로 몰아냈고, 이후 그는 포로로 잡혀 사망했다.
1459년 쿠추크 무하마드의 아들 마흐무드 빈 쿠추크가 칸위를 계승했으나, 1465년 그의 형제 아흐메드 칸 빈 쿠추크에게 찬탈당했다. 마흐무드는 아스트라한으로 가서 아스트라한 칸국을 세웠고, 이후 두 칸국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1469년 아흐메드는 우즈베크인의 아불-카이르 칸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1470년에는 몰다비아,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를 공격했으나 립니크 전투에서 패배했다.
1470년대에 모스크바는 사라이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지만, 외교 관계는 유지했다. 1480년 아흐메드는 모스크바에 대한 군사 작전을 조직했으나, 우그라 강 대치에서 상황이 불리해지자 물러났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에 대한 "타타르의 멍에"는 공식적으로 끝났다.[7] 1481년 아흐메드는 시비르 칸국과 노가이에 의해 살해되었다.
4. 1. 대 오르다와 리투아니아, 모스크바, 크림 칸국의 관계 (1486-1502)
1438년 카잔 칸국, 1441년 크림 칸국, 1466년 아스트라한 칸국이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이흐 칸국(대 오르다)은 드니프로 강과 야이크 강 사이의 초원 지대를 중심으로 사라이를 수도로 삼아 킵차크 칸국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1470년대에는 북쪽 카스피 해의 노가이 족과 적대 관계가 되었고,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따라 드니프르 강까지 세력을 확장했다.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 칸국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흐 칸국과 적대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이흐 칸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공했으나 우그라 강 진격에서 실패했다. 아흐메드 칸 빈 퀴취크는 노가이 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아들 샤이크 아흐메트가 칸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아흐메트의 자식들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이흐 칸국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491년 봄, 크림 칸국은 모스크바에게 "모든 칸국의 말을 탈취"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 이흐 칸국을 멸망시킬 적기라고 제안했다. 모스크바는 기병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2,000명을 보냈다. 11월 말, 칸국 영토의 일부가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노가이 족이 점령했다. 1500년 들어 이흐 칸국은 쿠반 인근으로 이동했으나 카바르디니안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501년, 샤이크 아흐메트와 20,000명의 사람들은 돈 강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으나, 그들 백성 중 상당수가 버려졌다.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흐 칸국의 백성 대부분을 사로잡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버렸다. 샤이크 아흐메트는 달아났다. 이후 그는 4,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카잔 지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과 협상했다. 그는 1504년 노가이 족에게 추방당한 이후 아스트라한으로 갔다. 이후 키예프의 폴란드 국왕과 협상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빌냐에서 리투아니아의 죄수가 되었다고 한다.
1430년대부터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는 사라이에서 공동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동안, 이흐 칸국은 하지 1세 기라이가 1449년 8월 사라이에서 권력을 몰아내면서 크림 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는 크림 칸국의 독립으로 이어졌고, 크림 칸국과 이흐 칸국 간의 경쟁을 촉발했다.[5] 쿠추크 무하마드는 1438년 골든 호르드의 중심부에서 울루그 무하마드를 몰아내고 사라이에서 칸으로 선포되었다.[6] 울루그 무하마드는 초원을 떠나 볼가 중류 지역으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카잔 칸국을 세웠다.
쿠추크 무하마드와 사이드 아흐마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타타르족은 러시아 신민들에게 세금을 강요하려 했으며, 1449년, 1450년, 1451년, 1452년에 그들을 침략했다. 이러한 공격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부터 보복을 초래했으며, 이들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폴란드 지배에 불만을 품은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사이드 아흐마드에게 선물을 가져왔으며, 그는 1453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략했다. 1455년, 크림 군은 다시 사라이를 공격하여 사이드 아흐마드가 키예프로 도망가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안제이 오드로봉시가 이끄는 군대가 키예프로 진격하여 그를 포획했고, 그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추가적인 공격으로는 1457년 타타르족의 포돌리아 습격 (타타르족의 승리로 끝남)과 1459년 모스크바 습격 (모스크바의 승리로 끝남)이 있었다.[6]
1486년부터 1491년까지, 사라이를 수도로 둔 대 오르다와 1475년에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 된 크림 칸국 사이의 분쟁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공작 이반 3세는 크림 칸 멩리 1세 기레이의 편을 들었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카지미에르 4세 야기에우워는 대 오르다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리투아니아-모스크바 전쟁 (1487–1494)은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데르 야기에우워와 헬레나 오브 모스크바 사이의 평화 조약과 결혼 동맹으로 해결되었다.
1500년부터 1502년까지, 몇몇 리투아니아 공작들이 모스크바로 망명한 후 동일한 두 동맹은 전쟁을 벌였고, 이반 3세는 그의 딸 헬레나가 1494년 결혼 협정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했다는 구실로 알렉산데르에게 선전포고했다. 그 동안, 크림 칸국은 대 오르다의 남은 영토를 정복하여 1502년 사라이를 약탈했다. 대 오르다는 마침내 붕괴되었고,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에 대항할 동맹을 잃었다. 리투아니아와 모스크바는 1503년에 휴전에 합의했고, 후자는 더 많은 영토를 얻었다. 리투아니아로 피신한 마지막 오르다의 칸인 셰이크 아흐메드는 1504년 이후 카우나스의 감옥에서 사망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는 1527년에 리투아니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후 대 오르다는 조치 울루스의 명맥을 1502년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아흐마드 칸의 사망 후 일어난 형제들의 제위 계승 다툼 등으로 인해 급속히 약화되었다. 크림 칸국에 수도 사라이를 함락당해 멸망한 후, 멸망시킨 크림 칸국은 오랫동안 사라이를 영토로 편입하지 못했고, 사라이는 타타르인의 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또한, 대 오르다 소멸 후 대 칸위를 유지했던 크림 칸국도 후에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었고, 마침내 1783년에는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4. 2. 셰이크 아흐메드의 최후
1480년 아흐메드 칸 빈 퀴취크는 노가이 족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인 샤이크 아흐메트가 칸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아흐메트의 자식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이흐 칸국이 약화되기 시작했다.[1]1491년 봄, 크림 칸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에게 "모든 칸국의 말을 탈취"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 이흐 칸국을 멸망하기 적격이라고 제안했다. 모스크바에서는 기병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2,000명을 보냈다. 11월 말 칸국 영토의 일부가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노가이 족이 점령했다.[1] 1500년 들어 쿠반 인근으로 옮겼고 카바르디니안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매우 안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1501년 샤이크 아흐메트와 20,000명의 사람들이 돈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으나, 그들 백성 중 상당수가 버려졌다.[1]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 이흐 칸국의 백성 거의 대부분을 사로잡았고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버렸다. 샤이크 아흐메트는 달아났다. 이후 그는 4,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카잔 지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과 협상을 하였다. 그는 1504년 노가이 족에게 추방당한 이후 아스트라한으로 갔다. 이후 키예프의 폴란드 국왕과 협상한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빌냐에서 리투아니아의 죄수가 되었다고 한다.[1]
5. 대 오르다의 경제
황금 군단과 마찬가지로, 대 오르다의 주요 수입원은 볼가강 하류를 따라 흐르는 상업 교통에서 얻는 통행료와 관세 징수였다.[1] 사라이의 칸들은 이전 세기로부터 점차 줄어드는 조공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남서쪽의 루스(Ruthenian) 공국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빼앗겼고, 1470년대에는 북쪽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모스크바가 더 이상 조공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 칸국은 더 이상 볼가강 하류의 무역을 제대로 통제하고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1]
트베리 출신 상인 아파나시 니키틴은 그의 유명한 여행기 ''세 개의 바다를 넘어''에서 1466년부터 1468년까지 트베리에서 볼가강을 따라 하류로 항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아스트라한 근처에서 상인 일행이 강도들에게 공격을 받아 약탈당했다고 기록했다.[2]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던 베네치아 외교관 암브로지오 콘타리니는 1475년부터 1476년까지 아스트라한을 통과할 때 소지품을 압수당했으며, 되찾기 위해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3] 콘타리니는 '아스트라한과 모스크바 사이의 국토는 ... 끊임없는 사막'이라고 묘사했다.[3] 경유지도, 물품을 구매할 장소도 없었으며, 신선한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3] 그는 이전에 불행한 일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상의 낙타와 말 몇 마리를 발견했다.[3]
아흐마드 칸은 수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그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귀중한 물품을 운송하는 상인 대상들을 약탈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이로 인해 이 지역의 상업은 더욱 불안정해졌다.[3] 게다가, 대 칸국은 1440년대 후반부터 명목상 속국이었던 모스크바와의 오카강 경계를 포함하여, 추가 전리품을 위해 인접 국가의 영토를 약탈했다.[3] 1460년 사라이 칸의 랴잔 공격도 같은 목적이었다.[3] 1472년, 아흐마드 칸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었고, 리투아니아는 상호 적대국인 모스크바 영토를 공격할 것을 촉구했는데, 대 칸국은 알렉신 마을을 불태우고 오카강을 건넜지만 격퇴되었다.[4]
6. 대 오르다의 문화
조치 울루스의 명맥을 유지한 정권이었기 때문에 조치 울루스의 문화와 국정을 계승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화가 거의 완료되었고, 결국 왕족의 문화가 (과거의 몽골 계의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이슬람교화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내에는 러시아 정교회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몽골계 샤머니즘을 계속 믿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영내에는 주로 다음과 같은 종교들이 있었다.
- 이슬람교
- 기독교
- 샤머니즘
- 기타 소규모 종교
언어적으로도 튀르크화를 이루어 행정 명령 문서도 이전의 몽골어에서 현지 여러 민족의 영향을 받아 튀르크계로 변화했다.
7. 대 오르다 멸망 이후
킵차크 칸국의 주변 지역은 1438년 카잔 칸국, 1441년 크림 칸국, 1466년 아스트라한 칸국 등으로 붕괴되었다. 오늘날 이흐 칸국으로 알려진 국가는 드니프로와 야이크 사이의 대초원 지대에 위치했으며, 수도는 사라이였다. 이 국가는 킵차크 칸국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1] 1470년대에는 북쪽 카스피 해의 노가이 족과 적대 관계였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따라 드니프르 강까지 세력을 확장했다.[1]
1480년 모스크바 대공국과 크림 칸국은 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흐 칸국과 적대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이흐 칸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해 아흐메드 칸 빈 퀴취크는 노가이 족에게 살해당했다.[1] 그의 아들인 샤이크 아흐메트가 칸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아흐메트의 자식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이흐 칸국은 약화되기 시작했다.[1]
1491년 봄, 크림 칸국은 모스크바에게 "모든 칸국의 말을 탈취"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내 이흐 칸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안했다. 모스크바는 기병을 보냈고, 오스만 제국은 예니체리 2,000명을 보냈다.[1] 11월 말, 칸국 영토의 일부가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노가이 족이 점령했다. 1500년 들어 쿠반 인근으로 이동했고 카바르디니안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매우 안 좋은 상황이 되었다.[1] 1501년 샤이크 아흐메트와 20,000명의 사람들이 돈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으나, 그들 백성 중 상당수가 버려졌다.[1]
1502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이 이흐 칸국의 백성 거의 대부분을 사로잡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옮겨버렸다. 샤이크 아흐메트는 달아났다.[1] 이후 그는 4,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카잔 지역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과 협상했다. 그는 1504년 노가이 족에게 추방당한 이후 아스트라한으로 갔다. 이후 키예프의 폴란드 국왕과 협상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 향했다. 이후 그는 빌냐에서 리투아니아의 죄수가 되었다고 한다.[1]
대 오르다는 아흐마드 칸의 사망 후 일어난 형제들의 제위 계승 다툼 등으로 인해 급속히 약화되었다. 크림 칸국에 수도 사라이를 함락당해 멸망한 후, 멸망시킨 크림 칸국은 오랫동안 사라이를 영토로 편입하지 못했고, 사라이는 타타르인의 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
8. 대 오르다의 칸 목록
통치 기간 | 이름 |
---|---|
1435년~1459년[8] | 쿠추크 무함마드 |
1459년~1465년[8] | 마흐무드 빈 쿠추크 |
1465년~1481년[8] | 아흐메드 칸 빈 쿠추크 |
1481년~1498년[8] | 무르타자 칸, 셰이크 아흐메드 공동 통치 |
1498년~1499년[8] | 무르타자 칸 |
1499년~1502년[8] | 셰이크 아흐메드 |
참조
[1]
서적
Cahiers du monde russe
Centre d'études sur la Russie, l'Europe orientale et le domaine turc de l'E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2]
서적
The Imperial Moment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3]
서적
Encyclopedia of the Ottoman Empire
https://books.google[...]
Infobase
2010
[4]
논문
Preliminary remarks on the role of disease in the history of the Golden Horde
1993
[5]
서적
Das frühneuzeitliche Krimkhanat (16.-18. Jahrhundert) zwischen Orient und Okzident
Wiesbaden
[6]
서적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to the 19th Century
https://books.google[...]
Burt Franklin
[7]
서적
Encyclopedia of Russian History
https://books.google[...]
Macmillan Reference USA
2004
[8]
서적
The History of Central Asia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9]
서적
Documents of the Crimean khanate from the collection of Huseyn Feyzkhanov / comp. and the transliteration. R. R. Abdujalilov; scientific. edited by I. Mingaleev
LLC "Konstanta"
[10]
서적
Letters of khans Islam Giray III and Muhammad Giray IV to Tsar Alexey Mikhailovich and king Jan Kazimir, 1654-1658: Crimean Tatar diplomacy in polit. post-Pereyaslav context
Humanita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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