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의 멍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타타르의 멍에"는 13세기 몽골 제국이 루스 지역을 침략하여 시작된 약 200년간의 지배를 의미한다. 몽골군은 루스를 침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으며, 킵차크 칸국을 세워 루스를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몽골은 루스 공들에게 권한을 위탁하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루스인들은 몽골을 위해 병역에 복무하기도 했다. 몽골의 지배는 루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으며, 모스크바 대공국의 부상과 러시아 제국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고타이 칸 - 다니시멘지
다니시멘지는 카이두의 손자이며, 1346년 카잔 칸이 살해된 후 차가타이 칸국의 군주로 추대되었으나 튀르크계 아미르의 괴뢰였고, 카자간에게 살해되었다. - 벨라루스 -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세기 중반부터 1795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로, 발트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고,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원으로 존속하며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벨라루스 - 키예프 루스
키예프 루스는 9세기부터 13세기 동유럽에 존재했던 동슬라브족의 중세 국가로, 키예프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블라디미르 1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몽골 침략으로 멸망, 현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공통된 역사적 기반으로 여겨진다.
타타르의 멍에 | |
---|---|
지도 | |
명칭 | |
한국어 | 타타르의 멍에 |
러시아어 | Монголо-татарское иго |
타타르어 | Татар-монгол игосы |
영어 | Mongol-Tatar Yoke |
로마자 표기 | Mongol-Tatar igo |
개요 | |
정의 |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킵차크 칸국이 루스 공국들을 지배한 시기 |
다른 명칭 | 몽골-타타르 멍에 |
역사적 배경 | |
시작 시기 | 13세기 |
종료 시기 | 15세기 |
주요 세력 | 킵차크 칸국 |
영향 받은 지역 | 루스 공국들 |
이전 시대 | 키예프 루스 |
이후 시대 |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 |
주요 사건 | |
킵차크 칸국 침입 | 1237년 - 1242년 |
루스 공국들의 저항 | 지속적인 저항 시도 |
특징 | |
정치적 특징 | 루스 공국들은 킵차크 칸국에 종속되어 조공을 바침 |
문화적 특징 | 일부 루스 문화에 영향 |
사회적 특징 | 농민과 도시민에게 가혹한 착취 |
경제적 특징 | 킵차크 칸국에 대한 조공 부담 |
결과 | |
정치적 결과 | 루스 공국들의 정치적 분열 심화 및 모스크바 대공국 성장 |
장기적 영향 | 러시아 정체성 형성 및 발전 과정에 큰 영향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바투 칸, 마마이 칸 |
기타 | |
관련 항목 | 킵차크 칸국, 모스크바 대공국, 타타르 |
2. 몽골의 루스 침공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 명의 병력을 주어 루스로 보냈다. 이로써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바투의 유럽 원정이 시작되었다. 바투의 원정군에 맞선 루스 군대는 용감히 싸웠으나 몽골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군은 당시 어느 군대도 따를 수 없는 조직력과 무기,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군은 우랄산맥을 넘어 먼저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했다. 그리고 1237년 북쪽에서 랴잔 대공국으로 진격했다. 랴잔의 군인과 시민들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5일 만에 도시는 함락되고 군인들은 몰살당했다.[19]
다음 차례는 블라디미르 대공국이었다. 1237~1238년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강을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며 블라디미르 대공국의 여러 도시들을 휩쓸었다. 역사상 루스를 겨울에 침략하여 성공한 유일한 예이다.
이어서 야로슬라블과 트베르, 볼가 강변의 여러 루스 국가들이 몽골군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만은 유일하게 화를 면했는데, 얼음이 풀려 그 일대가 뻘수렁으로 변하면서 몽골군이 진격을 포기하고 초원 지대로 말머리를 돌렸기 때문이다.[19]
초원 지대를 평정한 몽골군은 1240년 키예프를 점령하여 주민들을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몽골군은 이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휩쓸고 루스의 국경을 넘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폴란드에 침입한 몽골군은 발슈타트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크게 무찔렀고, 헝가리를 침략한 몽골군 선발대는 오스트리아 동부까지 진출했다.
그때 몽골 본국의 카라코룸에서 오고타이 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투는 군대를 초원 지대로 불러들여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 이후 거의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 칸에게 무릎을 꿇고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19]
2. 1. 몽골군의 전략과 전술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을 중심으로 중장 기마대와 경장 기마대를 함께 운용했다. 군대는 10명, 100명, 1,000명 단위로 편성되었고, 지휘부에는 참모부를 두는 등 잘 조직되어 있었다.[19] 몽골군은 정찰과 첩보 공작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투석기와 파벽기를 이용한 공성술도 뛰어났다.몽골군은 야전에서 보조 부대를 진의 중앙에 두고 양측방에 활을 가진 주력 부대를 배치했다. 적병이 돌격해 오면 중앙이 후퇴하면서 양측방에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적은 처음에는 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게 된다.
2. 2. 루스의 저항과 피해
1236년 오고타이 칸의 명을 받은 바투가 이끄는 15만 몽골군은 루스를 재침공했다. 몽골군은 뛰어난 조직력, 기병 중심의 기동성, 다양한 전략, 투석기와 파벽기를 이용한 공성술을 갖추고 있었다. 몽골군은 자비심이 없었고, 칭기즈칸은 '후회는 동정의 열매'라고 가르쳤다.[13]바투는 우랄산맥을 넘어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하고, 1237년 랴잔 대공국을 공격했다. 랴잔 시민과 군인들은 5일간 격렬히 저항했으나, 도시는 함락되고 몰살당했다. 블라디미르 대공국 역시 1237년~1238년 겨울, 몽골군의 공격에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다. 야로슬라블, 트베르 등 볼가 강변의 루스 국가들도 초토화되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얼음이 풀려 진흙 수렁이 되자 몽골군이 진격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240년 몽골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이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휩쓸고 폴란드와 헝가리를 공격, 발슈타트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대파하고 오스트리아 동부까지 진출했다. 유럽 전체가 위기에 처했으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에 바투는 회군하여 1243년 사라이를 수도로 킵차크 칸국을 세웠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루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량 학살, 약탈, 파괴, 포로 발생은 엄청난 규모였다.[13] 조세 수취로 토지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극빈에 시달렸다. 키예프 루스의 유산은 거의 사라지고 문화는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이 해체되면서 상업, 산업, 과학, 공업 기술, 공학 등이 붕괴되고 농업 중심 사회로 바뀌었다.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시민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키예프가 붕괴하고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새로운 루스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타타르의 멍에(татарское иго)"는 몽골의 가혹한 지배와 루스의 불행한 시대를 암시하는 용어이다.[13] 그러나 실제로는 초기 정복 시기를 제외하면 가혹한 통치가 아니었다는 지적도 있다.[14]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타타르의 멍에"가 지나치게 애국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14] 쿠리우즈와 타케오는 13세기 루스 연대기의 기록이 적고, 몽골에 의한 파괴, 학살 기록도 거의 없으며, 오히려 시대가 내려갈수록 피해 기록이 늘어나는 점을 지적하며 후대 러시아 연대기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14]
킵차크 칸국의 칸은 루스의 공들을 폐하지 않고 간접 통치했다.[13] 몽골 지배 시기에도 루스와 유럽, 중앙아시아 간 무역은 성장했다.[15] 루스는 몽골 제국의 동서 무역 혜택을 받았다.[4] 몽골인들은 스텝 지대는 직접 통치했지만, 정주 농민이 사는 지역은 간접 통치를 선호했다.[19] 이는 몽골인들이 농경민화되어 약해지는 것을 우려한 칭기즈칸의 유훈과 관련이 있지만, 몽골인들이 볼가 강에서 크리미아를 거쳐 흑해에 이르는 대상 루트와 호라즘, 볼가 불가리아, 카프카스 등으로부터의 경제적 수입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19] 가토 이치로는 킵차크 칸국에서 루스의 위치가 원나라에서 고려의 위치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19]
쿠빌라이는 고려에 공물, 병력 제공, 잼치(역전) 설치를 의무화하고 달가치를 두어 감독하게 했는데, 킵차크 칸국도 루스에 대해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19] 루스인들은 공납과 군역을 다하면 일상생활을 간섭받지 않고 농업, 상업 등을 계속할 수 있었다.[19] 칸은 충성을 맹세하고 납세와 군역 의무를 지는 루스 공들에게 특별 증서인 "얄리크(서임령서)"를 주어 통치권과 기득권을 인정했다.[1][19] 단, 칸이 파견한 바스카크(징세 및 감찰 대관)와 치슬렌니크(인구 조사관)의 임무에는 협력해야 했다.[1]
루스에서는 관개 시설 파괴와 같은 영구적인 농업 불능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루스와 중앙아시아 간 무역로는 정비되고, 몽골 제국의 무역 보호 정책으로 동서 무역이 활발해져 루스도 이익을 얻었다. 북동 루스의 공들은 남서 루스 공들에 비해 자발적으로 복종했는데, 이는 폴란드나 헝가리 등으로 피신할 곳이 없었고, 풍토적으로도 전제 지배를 받아들이기 쉬운 환경이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19]
킵차크 칸국은 루스에 간접 통치를 시행하고, 정해진 세금을 사라이에 납부하는 것과 전시에 종군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공들의 임면 결정권은 칸에게 있었고, 공들은 공납을 위해 자주 사라이를 방문, 궁정 실력자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납세나 종군 의무를 태만히 하면 침공을 받고 권력을 잃을 수 있었다.[13] 얄리크 수여 제도는 몽골 지배층의 루스 통제 수단이었고, 공들의 사라이 방문과 얄리크 제도는 루스가 칸국에 복속했음을 보여준다.[19][13] 단, 몽골 지배자는 루스 공위 계승 관습을 존중했다.[16]
3. 타타르의 멍에: 몽골의 지배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1236년 조카 바투에게 15만 명의 병사를 주어 루스로 보냈다. 바투의 원정군은 우랄산맥을 넘어 볼가 불가르인을 침략하고, 1237년 랴잔 대공국을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대공국, 야로슬라블, 트베르 등 루스 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노브고로드 공화국만이 유일하게 화를 면했다.[19]
1240년 키예프가 점령되고 주민들은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몽골군은 폴란드와 헝가리로 쳐들어갔으나,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에 1243년 볼가 강변의 사라이를 도읍으로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이후 대부분의 루스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19]
루스인들은 킵차크 한국을 '졸로타야 오르다(금장한국, 金帳汗國)'라 불렀고, 몽골족의 루스 지배를 '타타르의 멍에'라 했다. 몽골의 지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강도가 달랐으며, 루스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대량 학살, 약탈, 파괴로 인한 재산 손실은 물론, 조세 수취로 인해 땅은 척박해지고 사람들은 극빈에 시달렸다. 키예프 루스의 문화는 거의 뿌리 뽑히고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19]
몽골은 루스를 지배하면서 처음에는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하여 행정, 징세, 징병 등의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직접 통치 방식을 택했으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부터 간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했다. 킵차크 칸은 루스 공들에게 통치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발급하고, 그들 중 가장 유력한 대공에게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부여하여 루스 공국들을 통제했다.[19]
3. 1. 몽골의 간접 통치 방식
몽골은 루스를 지배하면서 처음에는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하여 행정, 징세, 징병 등의 업무를 직접 처리했다.[19] 세금 징수를 위해 세 차례 인구 조사를 실시했고, 1275년 세 번째 조사에서는 루스 인구가 약 1,000만 명으로 파악되었다.[19] 세금은 납세 능력과 관계없이 머릿수대로 징수되었으며, 저항하는 주민들은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인구조사 결과는 징병에도 활용되어 많은 루스 청년들이 몽골군에 복무했다.[19]그러나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13세기 말부터 간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했다. 킵차크 칸은 루스 공들에게 공국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허가장인 야를리크를 주고 세금을 받았으며, 가장 신뢰하는 대공에게는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부여했다. 루스 공들은 야를리크와 대공 칭호를 얻기 위해 킵차크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경쟁했으며, 칸은 이러한 경쟁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강화했다.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이 야를리크와 대공 칭호를 독점하면서 루스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했다.[19]
몽골은 루스 지역에 역참 제도인 "야무치(ямчи)"를 도입했다. 몽골 제국은 수도 카라코룸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 10리마다 역참을 설치하고, 관리와 사자의 호송, 물자 수송에 활용했다. 루스에도 이 제도가 전래되어 러시아어로는 "야암(ям)"이라 불렸다.[19]
초기에는 몽골의 대관이 루스 각지에서 대략적인 금액을 징수했지만, 1257년 쿠빌라이의 사위 키타트가 루스 지역의 다루가로 임명되면서 인구 조사, 징병, 과세, 징세, 법 집행, 질서 유지를 담당하게 되었다.[19] 같은 해 루스에서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고, 1259년경부터는 인구 조사를 기반으로 조공액이 정해졌다. 바스카크는 징세, 징병, 치안 유지를 감독하는 지방관으로, "타타르의 멍에"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9]
14세기 초까지 바스카크에 대한 언급이 많았지만,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 루스 제후들이 스스로 조공을 거두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바스카크 제도가 폐지되고 제후가 그 직무를 계승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반면, 1327년 트베리 반란을 계기로 억압적인 바스카크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후에는 사라이 등 칸국 내 도시에 머물던 다루가가 루스 각지를 통치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칸의 의지를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13]

3. 2. 몽골 지배의 영향
몽골의 지배는 루스 지역에 광범위하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루스는 큰 변화를 겪었다.인구 감소와 경제 피폐:몽골군의 침략 과정에서 대량 학살과 파괴가 자행되어 수많은 루스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끌려가거나 약탈당해 재산을 잃었다. 조세 수취로 인해 토지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19] 어떤 역사가는 몽골의 수탈을 "한 거대한 기생충이 루스인 대중의 생체에 달라붙어 그 즙을 빨아먹었다. 그리하여 그 생명력을 고갈시켰고 때때로 그 생체 안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라고 표현했다.
도시와 문화 파괴:키예프 루스의 거의 모든 유산이 파괴되었고, 찬란했던 문화는 뿌리 뽑혀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 도시와 마을이 해체되면서 상업, 산업, 과학, 공업기술, 공학 등이 붕괴되고, 루스는 농업 중심 사회로 변화했다.[19][7] 보로네시는 16세기에 이르러서야 재건되었고, 랴잔은 재건을 포기하고 55킬로미터 떨어진 페레스라블리의 도시로 중심을 옮겼다.
정치적 분열 심화와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몽골은 루스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를 파견하여 행정, 징세, 징병 등의 업무를 집행했다. 이후 루스인의 반발을 고려하여 간접 지배 방식으로 전환하고, 루스 공들에게 통치권을 인정하는 야를리크를 발급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야를리크와 '전 루스의 대공' 칭호를 독점하면서 새로운 루스의 중심지로 성장했다.[19][13]
종교의 관용과 동방 정교회의 발전:몽골은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여 동방 정교회는 면세 특권을 받고 재산을 보호받았다. 사라이에 주교 관구가 설치되고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루스 공들은 교회에 많은 재산을 기증했다. 몽골 지배 말기에는 경지의 약 1/4이 교회 소유가 되었다.
문화적 변화와 예술의 발전:'타타르의 멍에' 치하에서 문화·예술은 붕괴되었으나, 조각과 회화 부문에서는 큰 변화를 보였다. 특히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활동한 루블료프의 회화는 조화로움과 평온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칭송받는다.
몽골 지배 방식:
- 초기: 직접 통치. 다루가치(총독)와 바스카크(사정관) 파견, 인구 조사 실시.
- 13세기 말 이후: 간접 지배. 루스 공들에게 권한 위탁, 야를리크(허가장) 발급.
결론:몽골의 지배는 루스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미쳤다. 긍정적인 영향으로는 동방 정교회의 발전, 새로운 예술 양식의 등장 등이 있었지만, 부정적인 영향이 훨씬 컸다. 몽골의 침략과 지배는 루스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고, 이후 러시아 역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몽골 지배에 대한 저항과 극복
킵차크 칸국은 궁정 내부의 분열과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루스 공국들의 저항으로 인해 점차 쇠퇴하였다. 루스 제후들은 몽골 세력에 저항하기 시작하면서 킵차크 칸국의 지배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1395년에는 티무르 제국의 침공으로 수도 사라이가 파괴되면서 킵차크 칸국은 급격하게 쇠퇴하였고, 루스에 대한 지배력도 상실하였다. 결국 루스 공국들을 통일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이반 3세에 의해 킵차크 칸국이 1502년에 멸망하면서 타타르의 멍에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킵차크 칸국 성립 이후, 루스의 정치적 중심은 남서 루스의 키예프에서 북동 루스의 블라디미르로 이동했다.[20] 그러나 몽골군의 침입으로 루스의 여러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트베리 대공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이 새롭게 성장하였다. 특히, 모스크바는 몽골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권력을 키웠다.
4. 1. 모스크바 대공국의 부상
1263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사망하자 그의 막내아들 다닐이 모스크바 대공국을 계승했다.[21]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시대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북동 루스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몽골 칸에 의해 엄격하게 지배, 관리되게 된 루스 제후들 중에서 몽골과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것이 블라디미르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북동 루스의 여러 공국에 분봉된 그의 자손들이었다. 다닐은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삼촌 야로슬라프 3세의 후견을 받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대공의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21]모스크바 공 유리 다닐로비치는 사라이에 2년 동안 머물면서 칸과 인척 관계를 맺고 블라디미르 대공의 자리를 인정받았지만, 그전 대공이었던 트베리 공 미하일 야로슬라비치는 이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21] 미하일과 전투를 벌이고 사라이로 도망친 유리는 미하일의 반역을 킵차크 칸국의 10대 군주인 우즈벡 칸에게 고발했다.[21] 미하일은 사라이로 소환되어 처형되었고, 유리는 1318년에 블라디미르에 들어가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3세가 되었지만, 1325년 미하일의 아들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에 의해 살해되었다. 드미트리도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우즈벡 칸에 의해 칸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21]
유리 3세의 동생 이반 1세는 이 분쟁에서 벗어났다. 1327년 우즈벡 칸이 의도한 바스칵(代官) 제도 부활에 대해 트베리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나고, 트베리 공 알렉산드르가 킵차크 칸국에 대한 반란 세력에 가담하자,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놓고 다시 대립 관계에 있던 트베리의 최대 라이벌인 모스크바 공 이반 1세는 몽골 측에 가담하여, 우즈벡 칸과 함께 트베리를 격파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이반 1세는 트베리 공을 추방하고 블라디미르 대공 자리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22] 이후 역대 모스크바 공은 블라디미르 대공을 독점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모스크바 대공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이반 1세는 칸을 위해 징수한 세금의 일부를 착복하여 부유해졌고, 그 재력으로 영토를 사들였으며, 결혼 정책과 무력을 사용하여 영토 확장에 힘썼다.[22] 1326년 모스크바에 최초의 석조 교회당인 우스펜스키 교회당을 건립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도 간청하여, 전 루스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당시 블라디미르에 있던 키예프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맞이했다.[22] 그리고 1328년에는 모스크바에 "키예프 및 전 루스의 대주교"를 천좌시키는 데 성공했다.[22] 이로써 모스크바는 정신적으로도 키예프를 대신하여 루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1359년부터 시작되는 이반 1세의 손자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대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시련을 맞았다. 드미트리는 선량하기로 알려진 트베리 공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를 모스크바로 불러 감옥에 가두고 복종을 강요했다.[21]
1380년 돈 강 유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드미트리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 계 정권(마마이 오르다) 및 리투아니아 등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쿨리코보 전투"이며, 드미트리가 "돈스코이(돈 강의)"라는 칭호를 얻은 것도 이 업적에 기인한다.[21]
4. 2. 킵차크 한국의 쇠퇴와 멸망
1357년 벨디벡이 부자상극으로 칸의 지위를 빼앗은 후, 킵차크 칸국은 반대파에 대한 숙청으로 시작되는 끝없는 혼란의 시기를 맞았다. 수년간의 내분으로 통일은 훼손되었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전을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25] 이 시기에는 마마이와 토크타미시 두 사람이 칸국의 주도권 쟁탈을 계속하고 있었다.[21]1380년, 돈 강 유역에서 쿨리코보 전투가 벌어져,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모스크바 대공국군은 마마이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 계 정권(마마이 오르다) 및 리투아니아 등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디뎠다.[21] 그러나 킵차크 칸국을 재통일한 토크타미시의 공격으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다시 킵차크 칸국에 복속했다.
1395년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티무르 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 사라이가 잿더미로 변하면서, 킵차크 한국은 급격히 쇠퇴하고 루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갔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킵차크 칸국에 대한 공납을 그만둔 것은 1480년 우그라 강변의 대치에서 이반 3세가 큰 오르다의 아흐마트 칸의 군세를 우그라 강에서 철수시킨 이후였다.
1502년 이반 3세에 의해 킵차크 칸국이 멸망하면서 타타르의 멍에는 종결되었다. 킵차크 칸국은 분열되었지만, 그 후예가 된 국가에는 카잔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크림 칸국, 시비르 칸국, 노가이 오르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발전한 러시아 차르국, 또는 그 이후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당했다.
5. 몽골 지배의 유산과 역사적 의의
몽골의 지배는 루스 사회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우선, 동양적인 요소가 유입되었다. 몽골의 지배 시스템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계승되어 중앙 집권적인 국가 건설 및 러시아 제국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29] 몽골 제국의 지배 시스템에서 귀족의 봉건적 계층 제도인 문지 제도, 넓은 국토에 명령과 통신을 전달하는 역전제, 인구 조사, 재정 제도, 군사 조직 등이 계승되었다.[29]
몽골 지배 시기의 경험은 러시아의 민족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년이 넘는 몽골 지배로 러시아에는 동양적인 요소가 유입되었고,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인의 가죽을 벗기면 타타르인이 나온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30] 몽골 지배의 영향으로 루스는 유럽의 전통에서 벗어나,[32] 이후 서유럽에서 일어난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과 과학 발전에서 뒤처졌다는 의식이 생겼다.
현대 러시아어에는 타타르어 등 튀르크어나 몽골어로부터 유입된 단어가 많다. 특히 재정 및 금융 관련 단어에서 두드러지는데, Деньгиru(데니기, 돈), Казнаru(카즈나, 국고), Таможенныеru(타모지니예, 세관), Барышru(바르시, 이익), Башмакru(바슈막, 신발) 등이 그 예이다.[34][38] "중국"을 의미하는 Китайru(키타이)도 몽골어에서 도입되었다.
법 분야에서는 키예프 루스 시대에 노예에게만 적용되던 사형이 몽골의 영향으로 널리 시행되었고, 범죄 수사에 고문이 사용되었다. 몽골이 모스크바 대공국에 도입한 형벌로는 반역자에 대한 참수나 도둑에 대한 낙인이 있다. 그러나 동시대 서유럽의 형벌은 몽골이나 러시아보다 더 가혹했다.[39]
모스크바 대공국이 1480년 공납을 폐지하고 다른 지역들도 몽골로부터 독립하면서 200년 이상 지속된 "타타르의 멍에"는 끝났다. 이후에도 크림반도, 볼가 강 유역, 시베리아 등지의 튀르크-몽골계 사람들은 "타타르"로 불렸다.
참조
[1]
서적
阿部(1970)
[2]
문서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3]
웹사이트
몽골의 역사 칭기스칸 이전의 몽골 - 타타르(타타르)
http://www.mongoljoh[...]
몽골국 정부 공인 관광·비즈니스 정보센터
[4]
서적
和田(2001)
[5]
서적
岩村(1975)
[6]
서적
岩村(1975)
[7]
서적
土肥(2007)
[8]
웹사이트
History of Russia from Early Slavs history and Kievan Rus to Romanovs dynasty
http://www.parallels[...]
[9]
웹사이트
Mongol Conquests
http://users.erols.c[...]
[10]
문서
사라이
[11]
서적
栗生沢(2002)
[12]
서적
The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13]
서적
栗生沢(2002)
[14]
서적
杉山(2008)
[15]
서적
Ostrowski (1996)
[16]
서적
栗生沢(2002)
[17]
서적
Magocsi (1996)
[18]
서적
土肥(2007)
[19]
웹사이트
加藤「ロシア古代中世史」
http://www.bunkyo.ac[...]
[20]
서적
栗生沢(2002)
[21]
서적
和田(2001)
[22]
서적
阿部(1970)
[23]
서적
Pipes (1995)
[24]
서적
阿部(1970)
[25]
서적
阿部(1970)
[26]
서적
Boris Rybakov (1993)
[27]
서적
中井(2006)
[28]
문서
보리스 고두노프
[29]
서적
Ostrowski (1996)
[30]
서적
岩村(1975)
[31]
서적
井上&栗生沢(1998)
[32]
서적
ロバーツ(2003)
[33]
서적
O'Neill (2006)
[34]
서적
Vernadsky (1970)
[35]
서적
Vernadsky (1970)
[36]
문서
家系の源流に関する調査結果
[37]
웹사이트
Website of the Orthodox Church calendar
http://www.holytrini[...]
2008-07-06
[38]
문서
土肥(2007)
[39]
문서
Vernadsky. (1970)
[40]
문서
岩村(1974)
[41]
문서
杉山(20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