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잘랄 웃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잘랄 웃딘은 13세기 호라즘 제국의 마지막 술탄으로, 몽골 제국 침략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한 인물이다. 그는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몽골군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칭기즈 칸의 추격을 받아 인도로 도주했다. 이후 이란으로 돌아와 세력을 확장했지만, 주변 국가와의 갈등과 연합군의 공격으로 세력을 잃고 쿠르드족에게 암살당했다. 그는 뛰어난 전사로 칭송받았지만, 외교적 능력 부족으로 제국 재건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99년 출생 - 페르난도 3세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와 레온을 통합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레콩키스타를 추진하여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함락하고 1671년 시성되었다.
  • 1199년 출생 - 교황 알렉산데르 4세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1254년부터 1261년까지 재임하면서 동방 정교회와의 재통합 시도, 프랑스 내 종교 재판 설립, 탁발 수도회 우대 정책, 요아킴 피오레 이론 단죄, 몽골에 대항하는 십자군 조직 시도, 옥스퍼드 규정 면제 칙서 발표, 호엔슈타우펜 왕조와의 정치적 어려움 등을 겪었다.
  • 1231년 사망 - 안토니오 디 파도바
    안토니오 디 파도바는 13세기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회 수사이자 가톨릭 성인, 교회학자로, 웅변과 성경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 1231년 사망 - 쓰치미카도 천황
    고토바 천황의 아들이자 제83대 천황인 쓰치미카도 천황은 고토바 상황의 인세이 하에서 재위하다 준토쿠 천황에게 양위 후 조큐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고사가 천황을 낳아 그의 혈통이 황위 계승을 이어나갔다.
  • 살해된 13세기 군주 - 쿠투즈
    쿠투즈는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 제국을 격퇴하여 이슬람 세계를 보호하는 데 기여한 맘루크 왕조의 인물이다.
  • 살해된 13세기 군주 -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찬탈당한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기 위해 제4차 십자군을 끌어들였으나, 약속 불이행과 과도한 세금으로 폐위되어 살해당했고, 그의 통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과 비잔티움 제국 쇠퇴를 야기했다.
잘랄 웃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잘랄 웃딘을 기념하는 우즈베키스탄 25 소ʻm 동전 초상화
출생지구르간지
사망 날짜1231년 8월
사망 장소실반, 디야르바크르
아버지무함마드 2세
어머니아이-치체크
배우자쿠틀루비카 하툰
술라파 하툰
종교수니 이슬람
통치
재위1220년 - 1231년 8월
계승호라즘샤
왕조아누슈테긴 왕조
이름
페르시아어جلال الدین مِنکُبِرنی
페르시아어 (로마자 표기)Jalāl al-Dīn Menguberdī
페르시아어 (다른 표기)جلال الدین خوارزمشاه
기타 이름
일본어ジャラールッディーン・メングベルディー
아랍어جلال الدين منكبرتي
영어Jalal al-Din Menguberdi

2. 생애

잘랄 웃딘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지만, 궁정 내 권력 다툼으로 테르켄 카툰에게 소외되어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화레즘 제국 남부 가즈니(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동부) 총독으로 부임했다.[2] 1215년 아버지 무함마드 2세가 제국을 분할하여 남서부(구 고르 왕조 일부)를 잘랄 웃딘에게 주었다.[2]

12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화레즘 제국이 멸망하고, 1220년 아버지 무함마드가 카스피해에서 병사하면서, 1221년 우르겐치에서 술탄으로 즉위했다. 잘랄 웃딘은 가즈나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며 현지 유력자들을 규합하고 군사를 모았다. 같은 해 카불 근교 파르완 전투에서 시키 쿠투크가 이끄는 몽골군 선봉 부대를 격파하여 몽골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인더스강까지 후퇴하여 딘코트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잘랄 웃딘은 인더스강을 말을 타고 건너 도주하는 용맹함을 보였고, 칭기즈 칸은 이를 칭찬하며 추격을 중단시켰다.[46]

1224년 인도에서 이란 지역으로 돌아와 이스파한에 들어갔다. 그러나 호라산에 주둔하던 몽골군에게 공격받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도피했고,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후 조지아 트빌리시를 정복하는 등 남캅카스에서 동부 아나톨리아, 시리아 방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지나치게 활발한 활동과 주변 제국에 대한 약탈로 룸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 관계가 악화되었고, 1230년 에르진잔 근교 야스치멘에서 케이쿠파드 1세가 이끄는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세력을 잃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 우구데이가 파견한 추격군에게 배후에서 공격당해 아제르바이잔으로 쫓겨났다.

1231년 디야르바크르에 머물던 중, 잘랄 웃딘에게 원한을 가진 현지 쿠르드족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했다.[18]

2. 1. 초기 생애

잘랄 웃딘은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궁정 내 권력 다툼에서 테르켄 카툰에게 소외되어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화레즘 제국 남부 가즈니(현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총독으로 부임했다.[2] 그의 어머니는 아이치체크(Ay-Chichek)라는 투르크멘 출신의 첩이었다.[4] 어머니의 낮은 신분 때문에, 그의 할머니 테르켄 하툰은 그를 왕위 계승자로 지지하지 않았다.[2]

1215년 아버지 무함마드 2세가 제국을 분할하여 남서부(구 고르 왕조 일부)를 잘랄 웃딘에게 주었다.[2] 히즈라력 614년(서기 1217년 - 1218년) 알라 웃딘의 바그다드 원정 이후, 구 골 왕조 영토인 가즈니, 바미얀, 골 등 현재의 이란 동부에서 아프가니스탄에 걸친 지역을 영지로 받았다.[27]

1219년 초,[29] 메르키트족 잔당과 그들을 추격하는 몽골군이 호라즘 제국 영토에 침입했다. 알라 웃딘은 두 군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했고, 잘랄 웃딘은 한 군을 이끌고 아버지에게 종군했다. 호라즘군과 몽골군이 접촉하기 전, 메르키트족은 추 강변에서 몽골군에게 궤멸되었고, 호라즘군과 접촉한 몽골군은 우호의 뜻을 보이며 노획품 일부를 주었다.[30] 그럼에도 알라 웃딘은 몽골군에 전투를 걸었고, 잘랄 웃딘은 호라즘군 우익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했다. 알라 웃딘이 지휘하는 중군은 위기에 빠졌지만, 잘랄 웃딘이 아버지를 구원하여 양군은 결착을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31] 이 "카라쿰 전투"에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실력을 파악하고 자신감을 높였고, 호라즘군은 야전에서 몽골군의 강함을 깨닫고 이후 양국의 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32]

2. 2. 몽골 제국의 침입과 저항

1219년 몽골 제국의 화레즘 제국 침공 때, 알라 웃딘트란스옥시아나를 포기하고 도망쳤으나, 잘랄 웃딘은 이에 반대하며 군 지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33] 알라 웃딘이 카스피해 섬으로 피신할 때 잘랄 웃딘도 동행했으며,[34][35] 알라 웃딘은 임종 직전 잘랄 웃딘을 후계자로 지명했다.[36]

1221년 잘랄 웃딘은 구르겐치에서 술탄으로 즉위했으나, 칸클리족의 음모로 가즈나로 돌아가[38] 현지 병력을 모아 6만-7만 명의 군대를 조직했다.[34] 같은 해 봄, 왈리얀을 구원하고 카불 근교 파르완 전투에서 시기 쿠투크가 이끄는 3만 몽골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전리품 분배 문제로 군대가 분열되었고,[44][34]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자 잘랄 웃딘은 남쪽으로 퇴각했다.[45] 인더스강에서 몽골군에게 따라잡힌 잘랄 웃딘은 인더스강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말을 타고 강을 건너 도주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칭기즈 칸은 이를 칭찬하며 추격을 중단시켰다.[46]

2. 2. 1. 파르완 전투와 인더스 강 전투

1219년 몽골 제국의 화레즘 제국 침공과 1221년 아버지 무함마드의 사망으로 잘랄 웃딘은 술탄이 되었다. 그는 가즈나를 거점으로 군사를 모아, 카불 근교 파르완에서 시키 쿠투크가 이끄는 몽골군 선봉 부대를 격파하여 몽골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다(파르완 전투).[42]

그러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잘랄 웃딘은 인더스강까지 후퇴하여 딘코트에서 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잘랄 웃딘은 인더스강을 말을 타고 건너 도주하는 용맹함을 보였고, 칭기즈 칸은 이를 칭찬하며 추격을 중단시켰다.[46]

인더스 전투: 잘랄 웃딘 호라즘샤가 인더스 강을 건너 칭기즈 칸과 몽골군으로부터 도망치는 모습.


파르완 전투는 몽골 기병에게 불리한 좁은 계곡에서 벌어졌으며, 잘랄 웃딘이 직접 지휘하는 무슬림 군대가 몽골군을 격퇴했다.[12] 하지만 이 전투 후 전리품 분배 문제로 내분이 발생하여 군대의 절반을 잃었다.[2]

바미얀에서 패배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은 직접 잘랄 웃딘을 상대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9][7] 잘랄 웃딘은 칭기즈 칸에게 맞설 수 없음을 알고 인도로 진격했으나, 1221년 11월 인더스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되어 패배했다.[8] 잘랄 웃딘은 갑옷을 입은 채 강으로 뛰어들어 반대편 강둑에 도달했으나,[5] 그의 생존 병력은 후궁과 자녀들과 함께 학살되었다.[9]

2. 3. 인도 망명과 귀환

12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화레즘 제국이 멸망한 후, 아버지 무함마드카스피해에서 병사하자, 1221년 우르겐치로 돌아와 술탄으로 즉위했다.[51][52] 곧바로 가즈나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며 현지 유력자들을 규합하고 군사를 모았다. 같은 해 카불 근교 파르완에서 시키 쿠투크가 이끄는 몽골군 선봉 부대를 격파하여 몽골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이 직접 아프가니스탄으로 남하하자, 잘랄 웃딘의 병력은 각지에서 흩어지고 줄어들었다. 결국 인더스강까지 남하한 잘랄 웃딘은 딘코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인더스강을 말을 타고 건너 살아남은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인도로 도주했다.[4][13] 칭기즈 칸은 이 모습을 보고 "저런 용맹한 아들을 둔 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라며 감탄하며 추격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인도에서 잘랄 웃딘은 맘루크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시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바스 칼리프와의 관계 때문에 거절당했다.[5] 그러나 일투트미시는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 중 하나를 잘랄 웃딘에게 주었다. 1222년 초, 칭기즈 칸은 여전히 잘랄 웃딘을 위협으로 여겨 도르베이 도크신에게 두 개의 투멘을 주어 추격하게 했다. 도크신은 잘랄 웃딘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갔고, 칭기즈 칸은 이에 분노하여 그에게 즉시 같은 임무를 다시 맡겼다는 기록이 있다.[9] 한편, 잘랄 웃딘은 현지 군주들과 다퉜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13]

도크신의 지휘 아래 몽골군은 잘랄 웃딘의 부관 중 한 명으로부터 난다나를 빼앗아 약탈한 후, 물탄을 포위했다. 몽골군은 성벽을 뚫었지만, 호라즘인들이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했다. 더운 날씨로 인해 몽골군은 42일 만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피터 잭슨은 도크신이 실패하면 돌아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고, 결국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잘랄 웃딘에게 합류했다고 추측한다.[13]

1222년 잘랄 웃딘은 노예 왕조의 술탄 샴스 웃딘 일투투미쉬에게 보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펀자브로 돌아가 적대 관계에 있던 카바차를 공격했다.[49] 그러나 일투투미쉬와 카바차 등 북인도 세력들이 연합하자, 부하들의 권유에 따라 페르시아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 몽골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인도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한 장군 우즈베크도 있었지만, 잘랄 웃딘은 우즈베크에게 인도의 통치를 맡기고 3년간의 체류를 마친 뒤 귀국길에 올랐다.[50]

1223년 잘랄 웃딘의 군대는 사막을 횡단하여 케르만 지방에 도착했다.[53] 케르만 카라히타이 왕조의 건국자인 케르만의 영주 바라크 하지브를 귀순시키고, 시라즈를 통치하던 아타베크 정권 살갈 왕조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들 세력은 모두 기야스 웃딘과 적대 관계였다. 잘랄 웃딘은 기야스 웃딘이 통치하는 이스파한으로 진군하여 장교들의 지지를 받아 지배자 지위를 되찾았다.[54] 기야스 웃딘의 일파와 몽골 침입 후 혼란기에 이라크, 호라산, 마잔다란에서 독립한 영주들이 잘랄 웃딘에게 출두하자, 그는 그들의 행위에 따라 사면 또는 징벌을 가했고, 그의 권위가 영내에 미치게 되었다.[54]

2. 4. 서부 이란과 캅카스에서의 활동

12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화레즘 제국이 멸망한 후, 1221년 아버지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술탄으로 즉위한 잘랄 웃딘은 가즈나를 거점으로 재기를 도모했다. 그는 현지 유력자들을 규합하고 군사를 모아 1221년 카불 근교 파르반에서 시키 쿠투크가 이끄는 몽골군 선봉 부대를 격파하며 몽골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다.[14]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잘랄 웃딘의 병력은 흩어졌고, 그는 인더스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딘코트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패배했지만, 인더스강을 건너 인도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1224년 인도에서 이란 지역으로 돌아온 잘랄 웃딘은 이스파한에 들어갔다. 그러나 호라산에 주둔하던 몽골군에게 공격받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도피했고, 타브리즈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후 조지아트빌리시를 정복하는 등 남캅카스에서 동부 아나톨리아, 시리아 방면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1225년 7월 25일에는 타브리즈를 수도로 삼고 조지아를 공격하여 가르니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격파하고 트빌리시를 정복했다. 이때 10만 명의 시민들이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14]

1227년, 칭기즈 칸이 사망한 후 초르마간이 지휘하는 새로운 몽골 군대가 침략해 왔으나, 다메간 근처에서 이들을 격파했다.[15] 1228년 8월, 타임스 노얀이 이끄는 새로운 몽골 군대가 재건된 왕국을 침략했지만, 잘랄 웃딘은 이스파한 근처에서 이들을 만나 전투를 벌였다. 몽골군은 이 전투에서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더 이상 진격할 힘이 없었다.[15]

1227년 8월 26일 이스파한 교외에서 몽골군과 전투를 벌여 몽골군의 좌익을 패주시켰지만, 이어진 돌격이 몽골군의 복병에 저지되어 호라즘 군은 궤멸되었다.[66]

한편,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잘랄 웃딘에 대항하기 위해 조지아인, 킵차크인, 알란인 등이 연합군을 결성했다.[69] 잘랄 웃딘은 이들과 정면 충돌하는 대신, 킵차크인들에게 과거의 은혜를 설득하여 철수시키고, 조지아에는 일기토를 제안했다.[72] 다음 날 열린 시합에서 잘랄 웃딘은 5명의 조지아 병사를 직접 베었고, 그 여세를 몰아 조지아 군에게 승리했다.[73]

1227년 볼니시 전투에서 조지아인 (왼쪽)과 호라즘인 (오른쪽)의 모습. 1438년 이란 시라즈에서 제작된 ''Tarikh-i Jahangushay'' 필사본에서 발췌.

2. 4. 1. 룸 셀주크 왕조와의 갈등

1224년부터 1225년까지 잘랄 웃딘은 후제스탄(티그리스강 하류 인근 지역)의 아바스 왕조 영토에 침입하여[34] 약탈하고 후제스탄의 중심 도시 슈슈타르를 포위했다. 후제스탄 침입 후 바그다드로 진군했지만, 그에 앞서 잘랄 웃딘은 다마스쿠스·아이유브 왕조의 왕후 알 무아잠에게 아바스 왕조 공격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안 나시르가 몽골군을 선동하여 호라즘 제국을 공격하게 한 것에 대한 비난이 적혀 있었지만, 무아잠은 공격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55] 결국 잘랄 웃딘은 단독으로 군사 행동에 나섰고, 적은 병력으로 장교 쿠슈 티무르가 이끄는 20,000명의 아바스 왕조 군을 격파하고 이라크 북부의 다쿠카를 공략했다.[55] 아바스 왕조의 원군 요청에 응한 에르빌의 지배자 무자파르[56]의 진군 소식을 듣고,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기습하여 무자파르를 포로로 잡았다.[57] 바그다드 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잘랄 웃딘은 공격 대상을 아제르바이잔으로 변경했다.[58]

아제르바이잔으로 행군하던 중 숙부 야간 타이시의 군대를 병합하고,[59] 1225년에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는 아타베크 정권 일데니즈 왕조(일·두구즈 왕조, 일데기즈 왕조)를 멸망시켰다.[60] 일데니즈 왕조의 군주 무자파르 웃딘 유즈베크의 아내에게 점령지 통치를 위임하고,[61] 이어서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왕국 원정에 나섰다.

지나치게 활발한 활동과 주변 제국에 대한 약탈로 인해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는 룸 셀주크 왕조와 시리아를 지배하는 아이유브 왕조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230년 에르진칸 근교의 야스치멘에서 케이쿠파드 1세가 이끄는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세력을 잃었다.

2. 5. 죽음

1230년 에르진잔 근교의 야스치멘에서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세력을 잃었다.[78] 게다가 몽골 제국의 대칸 우구데이가 파견한 추격군에게 배후에서 공격당해 아제르바이잔으로 쫓겨났다.

1231년 디야르바크르에 머물던 중, 잘랄 웃딘에게 원한을 가진 현지 쿠르드족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했다.[18]

3. 유산

디르함 자랄 웃딘의 디르함, 압바스 칼리프 알-무스탄시르 빌라 623–628 AH (1226–1231 AD).


우르겐치에 있는 자랄 웃딘의 기마상


우즈베키스탄의 25숨 동전에 새겨진 잘랄 웃딘상


잘랄 웃딘은 메흐메트 보즈다그가 우즈베키스탄 문화체육부와 협력하여 제작한 우즈베크-터키 TV 시리즈 ''멘디르만 잘롤리딘''의 주인공으로, 엠레 키빌짐이 그를 연기했다.[25] 사라그트 바바예프가 조각한 그의 조각상은 2015년 전국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로부터 상을 받았다.[26]

3. 1. 평가

자랄 웃딘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는 지휘관이자 위대한 전사로 여겨졌다. 그의 전기 작가인 시합 알-딘 무하마드 알-나사위는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는 구릿빛 피부(검은 피부)를 가졌고, 키가 작았으며, "행동"과 말투가 튀르크적이었지만, 페르시아어도 구사했다. 그는 사자 중의 사자였고, 용감한 기병 중 가장 용감했다. 그는 성격이 온화했고, 쉽게 화를 내지 않았으며, 결코 나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19]

주즈자니는 알-딘을 "뛰어난 영웅심, 용맹함, 높은 재능과 업적을 갖춘" 인물로 묘사했다.[20] 야쿠트 알-하마위는 자랄 웃딘이 호전적인 전사로 알려졌으며, 야스치멘 전투 이후 자랄 웃딘의 소극적인 태도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언급했다.

현대 역사가들 또한 그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 긍정적이다. 칼 스베드루프는 자랄 웃딘을 "용감하고 정력적"이라고 묘사했고,[21] 티모시 메이는 그를 맘루크 술탄 시대까지 서아시아에서 몽골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묘사한다.[6] 몽골에 저항한 그의 명성 때문에 자랄 웃딘은 일반적으로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의 예술 작품에 묘사되며, 그는 신화 속 전사 로스탐과 연관된다.[2]

자랄 웃딘의 동시대인 이븐 와실은 몽골이 무슬림 국가들을 정복한 것을 자랄 웃딘의 몰락에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다시 자랄 웃딘의 배신적인 행동 때문이라고 했다. 이븐 와실은 자랄 웃딘의 군대가 이슬람 국가와 몽골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22] 칭기즈 칸은 인더스 전투에서 자랄 웃딘을 격파한 후에도 자랄 웃딘의 위력을 알고 몽골 제국과 자랄 웃딘이 재건한 왕국의 경계를 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평화를 유지하려 했다.[23]

성공적인 전사이자 장군으로 여겨졌지만, 자랄 웃딘은 형편없는 통치자로 여겨졌고, 재건한 제국이 몽골에게 멸망한 것은 그의 형편없는 외교와 통치력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믿을 수 없고 호전적인 인물로 여겨졌다.[24] 그의 많은 이웃과의 적대감은 쵸르마칸의 몽골 군대에 대한 그의 고립을 초래했다.[15] 바실리 바르톨드는 자랄 웃딘이 칭기즈 칸보다 더 잔인하고 비이성적인 만행을 저질렀다고 믿었다. 알-나사위조차 자랄 웃딘의 통치와 그의 군인들의 행동이 백성들에게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정당화할 수 없었다.[2] 자랄 웃딘은 이란 관료이자 역사가인 아타-말리크 주바이니(1283년 사망)에 의해 "페르시아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싸운 영웅으로 묘사되었지만, 그는 실제로는 자랄 웃딘이 자신의 생존과 이기적인 동기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후, 이르빌의 무자파르에 의해 유골과 유품이 찾아져 묘소에 안치되었다.[87] 몽골에 대항하여 항전한 잘랄 웃딘의 죽음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고,[34] 살해된 직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잘랄 웃딘이 재기를 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88] 사후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특히 그가 생전에 통치했던 페르시아 지방에서 많이 들려왔다.[89] 잘랄 웃딘의 이름을 칭하는 자들도 종종 나타났으나, 그들은 몽골군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89]

참조

[1] 웹사이트 Jalāl-Al-Din Kwārazmšāh (I) Mengübirni https://iranicaonlin[...] 2021-08-28
[2] 간행물 Jalāl al-Dīn Mangburnī https://referencewor[...] Brill 2022-02-08
[3] 서적 Conflict and Conquest in the Islamic World: A Historic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11-07-22
[4] 웹사이트 Description of life of Jalal ad-Din Mingburnu. Chapter 38 https://www.vostlit.[...] 2022-11-02
[5] 서적 Genghis Khan: His Conquests, His Empire, His Legacy Da Capo Press
[6] 서적 The Mongol Empire Edinburgh University Press
[7] 서적 Gosudarstvo Khorezmshakhov-Anushteginidov: 1097–1231 Nauka
[8] 서적 Turkestan Down to the Mongol Invasion Gibb Memorial Trust
[9] 서적 Tarikh-i Jahangushay 1260
[10] 학술지 Inner Asia c.1200
[11] 학술지 Sübe'etei Ba'atur, Anonymous Strategist Harrassowitz Verlag
[12] 서적 Genghis Khan: Life, Death, and Resurrection St. Martin's Press
[13] 학술지 Jalāl Al-Dīn, the Mongols, and the Khwarazmian Conquest of the Panjāb and Sind British Institute of Persian Studies
[1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Rutgers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Mongol Empire: Chormaquan and the Mongol Conquest of the Middle East https://www.historyn[...] 2022-02-05
[16]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7] 학술지 Les Mongols et la Papauté https://catholicaped[...] 2020-03-21
[18] 서적 Sîret-i Celâleddîn-i Mingburnî Tehran
[19] 서적 Shikhab an-Nasawi. Sirat as-sultan Jalal al-Din Mankburni (Biography of sultan Jalal ad-Din Mingburnu) Vostochnaya Literatura, Russian Academy of Sciences
[20] 서적 Tabakat-i Nasiri
[21] 서적 The Mongol Conquests The Military Operations of Genghis Khan and Sübe'etei. Helion & Co.
[22] 서적 A History of the Khorezmian State Under the Anushteginids, 1097–1231 Buniyatov, Z. M. 2015
[23] 서적 Gosudarstvo Khorezmshakhov-Anushteginidov: 1097–1231 Buniyatov, Z. M. 2015
[24] 서적 Jalal al-Din Khwarazmshah and his era Publications of the Ministry of Culture
[25] 웹사이트 New Turkish series about Sultan Jalaluddin Khwarazmshah to release in Uzbekistan https://www.thenews.[...] 2021-04-07
[26] 웹사이트 Hormatly Prezidentimiz Gurbanguly Berdimuhamedow Türkmen bedewiniň baýramyna bagyşlanan dabaralara gatnaşdy https://turkmenistan[...] 2021-09-12
[27] 서적 몽골제국사
[28] 서적 몽골제국사
[29] 서적 몽골제국사
[30] 서적 몽골제국사
[31] 서적 몽골제국사
[32] 서적
[33] 서적 몽골제국사
[34] 서적 세계전기대사전 세계편
[35] 서적 몽골제국사
[36]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37] 문서 現在の[[マンギスタウ州]]に属する。
[3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39]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1] 서적 バクトリア|トハリスタンに存在した城砦
[42]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3] 서적 インダス川、ガンジス川の間で遊牧生活を営んでいた民族。テュルク系民族と混血したアラブ人|アラブ系民族といわれている
[4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5]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6]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7]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49]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1]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2]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3]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5]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6] 서적 トゥルクマーン系国家であるベクテギン朝の最後の君主
[57]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59]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0] 논문 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
[61]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2] 문서 ヴァン湖北岸の都市
[63]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4]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5]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6]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7]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69] 문서 アラス川北岸の内陸部を指す
[7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71]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36-37頁
[72]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37-38頁
[73]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38頁
[74]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39-40頁
[75]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44-45頁
[76]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42頁
[77]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43-44頁
[78] 서적 井谷「トルコ民族の活動と西アジアのモンゴル支配時代」『西アジア史 2 イラン・トルコ』、160頁
[79]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49-50頁
[80] 서적 アッラーン地方の一地区。現在のアゼルバイジャン東部。(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52-53頁)
[81]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53頁
[82]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56頁
[83]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56-57頁
[84]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59-61頁
[85]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60,62頁
[86]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64-65頁
[87]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67頁
[88]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1巻、12頁
[89]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4巻、68頁
[90]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1巻、11頁
[91]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1巻、11-12頁
[92] 서적 C.M.ドーソン『モンゴル帝国史』1巻、10,12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