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조선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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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 조선인 문학은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일본어로 창작한 문학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수연의 한문 작품을 시작으로 유학생들의 한국어 문학 활동이 활발했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에도 참여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달수, 김석범 등 여러 작가들이 등장하여 재일 조선인의 삶과 민족 분단의 아픔을 다루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 문학 소개 및 번역, 재일 조선인의 다양한 정체성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재일 조선인 문학은 한국 문학이자 일본 문학으로 평가받으며, 민족과 언어, 정체성 등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며 발전해왔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어로 창작된 재일 조선인 문학은 "조선 민족 문학인 동시에 일본 문학의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1] 이는 민족, 언어, 문학 간의 복잡한 관계를 내포하며, 작가들은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삶, 정체성, 조국 및 동포 조직과의 관계 등을 작품에 담아내며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883년 이수연은 현대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이 쓴 최초의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한문을 중심으로 쓰였다. 1905년 전후부터 1930년까지 이광수, 최남선, 전영택 등 유학생들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국어 소설, 시, 수필 등을 발표했다.
2. 역사
2. 1. 일제강점기 (1883년~1945년)
1883년 이수연이 쓴 작품은 한문을 중심으로 쓰였다. 이수연은 조선 정부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했고, 4년간 체류하며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출판했다.[1] 또한 메이지 사전(1885년)의 편집자로 한음훈 표기를 담당했다. 1905년 전후부터 1930년까지는 유학생들이 한국어로 문학 활동을 많이 했다. 친목회회보(1896년)부터 학지광(1914년 - 1930년)까지 6종 100권 남짓이 출판되었고,[2][3] 이광수, 최남선, 전영택 등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국권 회복과 구습 타파를 목적으로 한국어 소설, 시, 수필 등을 발표해 동포 계몽과 한국 근대 문학 창조에 힘을 바쳤다.
김동인, 주요한 등이 조선에 자연주의 문학 사조를 도입하고자 낸 문예 잡지 "창조"(1919년)에는 일본어에서 중역된 모파상, 투르게네프, 구르몽 등의 번역이 실려 유럽 문학이 일본어를 통해 소개되었다.[4] 해외문학(1927년) 등의 간행도 유학생들이 발간했다.[5] 김소운은 "조선 민요집"을 시작으로 조선 동요, 현대시 소개에 활약했다.
1920년대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인들도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학 잡지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로는 정연규, 한식 등이 있고, 시인으로는 김용제, 백철, 강문연 등이 있다. 장혁주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해체되기 시작할 무렵 「아귀도」(1932년)로 일본 문단에 등장해[6][7] 식민지 조선 농민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호평을 받았지만, 이후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
1939년 가을, 김사량이 "빛 가운데로"로 등장했고, 이은직의 "ながれ"와 함께 1939년 제10회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8] 김사량은 뛰어난 작품을 많이 썼고, "빛 가운데로", "고향" 두 권의 작품집을 냈다. 태평양 전쟁 중 검거되어 석방된 후 귀국해 옌안으로 망명했고, 이후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홍종우의 장편 소설 "월은산", 한식의 시집 "고려마을" 등이 간행되었다.[6][9]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예술과"(일본 대학 예술과 발행)에서 공부하던 김달수, 이형직 등 젊은 세대가 등장해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일본 제국에 대항해 반일주의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켰고, 재일 한국인 문학자의 다양한 투쟁의 기초를 의식적으로 열게 했다.
이 시기, 일제 식민지 지배에 의해 형성된 재일 조선인 문학이 형성되었다.
2. 2. 해방 이후 (1945년~현재)
일본의 식민 지배로 형성된 재일 조선인의 문학은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종전 직후 "민주조선", "조선문운" 등의 잡지가 간행되었고, 김달수, 박원준, 장두식, 윤자원, 허남기 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10]
김달수는 "현해탄"(1954년)을 통해 해방 전 조선인 지식인의 민족적 자각과 일제 식민 통치의 비인간성을 묘사했다. 장두식은 "어느 재일 조선인의 일기"(1966년)를 발표하여 재일 조선인의 고난으로 가득 찬 생활사를 기록했다. 1960년대에는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이 테마는 "화산섬"으로 이어짐), 김달수의 "태백산맥" 등 민족 분단의 근원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나왔다.[10]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이회성, 김학영, 고사명, 김태생, 정승박, 정귀문, 유광석, 이춘목, 양석일, 시인 김시종, 갑유인, 비평가 안우직, 윤학준 등이 등장했다. 이회성은 1972년 "다듬이 질을 하는 여자"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고, 재일 한국인 2세의 민족적 주체 확립과 조국 통일 운동 참여를 주제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는 장편 소설 "이루지 못한 꿈"(1979년)으로 결실을 맺었다.[11]
1980년대에는 이승옥, 김병두 등이 민족 분단의 상처와 민주화 투쟁을 그린 한국 문학 번역·소개에 힘썼다. 이양지(1989년 "유희"로 아쿠타가와 상 수상), 이기승(1985년 "제로한"으로 군조 신인 문학상 수상) 등은 일본뿐만 아니라 조국을 생각하며 한국을 포함한 자아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재일 조선인 2세의 이중적 소외감을 묘사했다. 시인 최화국은 1985년 "묘담의"로 H씨 상을 수상했다.[12][13]
1980년대부터 1990년대는 재일 조선인 문학에 다양하고 큰 변화가 나타난 시기였다. 1980년 5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는 재일 조선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1987년 6·29 민주화 선언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로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고 국제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재일 조선인 문학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김석범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화산도』(전 7권)를 완성했고(1984년 오사라기 지로 상, 1998년 마이니치 예술 상 수상), 이회성은 김대중 정권 출범 후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그린 "유역으로"(1992년), "백년의 여행자들"(1994년)을 발표했다.[11]
이양지는 서울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유희"(1988년)를 쓰고 재일 유학생의 갈등을 그렸으나, 198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후 "돌의 소리" 집필 중 37세에 사망했다.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 "개나리도 꽃, 벛꽃도 꽃"(1994년)을 발표했다.[12][13]
세대 교체도 이루어져, 김학영은 "향수는 끝나고 우리들은-"(1983년)을 쓴 뒤 1985년 자살했고, 김태생(1986년 사망), 허남기(1988년 사망), 김달수(1997년 사망) 등 1세대 작가들이 세상을 떠났다. 한편, 유미리, 현월, 원수일, 김중명, 이기승, 사기사와 메구무 등 신세대 작가들이 등장했다. 유미리는 1992년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을 수상하고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1994년)로 소설가로 데뷔, "풀하우스"로 이즈미 교카 문학상·노마 문예 신인상, "가족 시네마"로 1996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현월도 "蔭の棲みか"로 1999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양석일은 "택시 드라이버의 일지"(1984년)를 시작으로 "족보의 과て"(1989년), "피와 뼈"(1996년) 등 재일 조선인의 역사를 담은 가족사 작품을 발표했다. 임전혜는 연구 결과 "일본에 있어서의 조선인 문학사-1945년부터"(1994년)를 발표했다.[14][13][15][16][17]
재일 조선인 사회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면서 재일 조선인 문학도 다원화되었다. 강신자는 "극히 보통의 재일 조선인"(1987년)에서 기존 재일론과 다른 생각을 나타냈고, 가네시로 가즈키는 2000년 "GO"로 나오키 상을 수상하며 자신을 "한국계 일본인"으로 칭하며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를 요구했다.[18]
2016년에는 최실이 「지니의 퍼즐」로 군상 신인상을 수상하고,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도 올랐다.
2017년에는 김무라 시온이, 한국에 대한 헤이트 사이트 사건을 계기로 『나의 엣지에서 보고 있는 풍경』을 출판했다.
3. 주요 작가 및 작품
1920년대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정연규 등 조선인 작가들은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했다. 장혁주는 「아귀도」(1932년)로 일본 문단에 등단했으나, 이후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 1939년 김사량은 "빛 가운데로"로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
1945년 광복 후, "민주조선" 등 잡지가 간행되었고, 김달수, 이회성, 김학영 등 여러 작가들이 활동했다. 1972년 이회성은 "다듬이 질을 하는 여자"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 문학 번역과 소개가 이루어졌고, 1987년 6·29 민주화 선언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1980년대 후반, 이양지는 서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유희"(1988년)를 써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지만, 1992년 사망했다. 유미리, 현월 등 새로운 작가들이 등장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재일 조선인 문학은 다원화되었다. 강신자는 "극히 보통의 재일 조선인"(1987년)에서 기존 재일론과 다른 관점을 제시했고, 가네시로 가즈키는 2000년 "GO"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3. 1. 일제 강점기
1883년 이수연이 쓴 작품은 현대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이 쓴 문학 작품으로, 한문을 중심으로 쓰였다. 이수연은 조선 정부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했고, 4년간 체류하며 성서를 한국어로 번역·출판했다. 또한 메이지 사전(1885년) 편집을 맡아 한음훈 표기를 담당했다.[1]
1905년 전후부터 1930년까지는 유학생들이 한국어로 문학활동을 활발히 했다. 친목회회보(1896년)부터 학지광(1914년 - 1930년)까지 6종·100권 남짓 출판되었고, 이광수, 최남선, 전영택 등 당시 일본 유학생들은 국권 회복과 구습 타파를 목적으로 한국어 소설, 시, 수필 등을 발표해 동포 계몽과 한국 근대문학 창조에 힘을 쏟았다.[2][3]
김동인, 주요한 등이 조선에 자연주의 문학 사조를 도입하고자 낸 문예잡지 "창조"(1919년), "해외문학"(1927년) 등도 유학생들이 발간했다.[4] 김소운은 "조선 민요집"을 시작으로 조선 동요, 현대시 소개에 힘썼다.[5]
1920년대 일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인들도 일본어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정연규, 한식 등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고, 김용제, 백철, 강문연 등은 시인이었다. 장혁주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해체될 무렵 「아귀도」(1932년)로 일본 문단에 등장, 식민지 조선 농민의 현실을 그려 호평받았으나 이후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6][7]
1939년 가을, 김사량이 "빛 가운데로"로 등장, 이은직의 "ながれ"와 함께 1939년 제10회 아쿠다가와 상 후보에 올랐다. 김사량은 뛰어난 작품을 많이 썼고, 작품집 "빛 가운데로", "고향" 2권을 펴냈다. 태평양 전쟁 중 검거되었다가 석방 후 귀국, 옌안을 거쳐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홍종우의 장편 소설 "월은산", 한식의 시집 "고려마을" 등이 간행되었다.[6][8][9]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예술과"(일본 대학 예술과 발행)에서 공부하던 김달수, 이형직 등 젊은 세대는 일본어 사용 강요에 맞서 반일 제국주의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재일 한국인 문학자들의 다양한 투쟁 기반을 의식적으로 열었다.
이처럼 재일 조선인 문학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 인해 형성된 재일 조선인들의 문학 작품으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3. 2.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재일 조선인들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전 직후 "민주조선", "조선문운"과 같은 잡지가 간행되었고, 김달수, 박원준, 장두식 등 여러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다.[10]
김달수는 "현해탄"(1954년)을 통해 해방 전 조선인 지식인의 민족적 자각과 일제 식민지 통치의 비인간성을 묘사했다. 장두식은 "어느 재일 조선인의 일기"(1966년)를 발표하여 재일 조선인의 고난으로 가득 찬 생활사를 기록했다. 1960년대에는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 등 민족 분단의 근원을 추구하는 작품들이 나왔다.[10]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는 이회성, 김학영 등이 등장했다. 이회성은 1972년 "다듬이 질을 하는 여자"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재일한국인 2세의 민족적 주체 확립과 조국 통일 운동 참여를 주제로 활동했다.[10]
1980년대에는 이승옥, 김병두 등이 한국 문학 번역과 소개에 힘썼다. 1980년 5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는 재일 조선인 사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1987년 6·29 민주화 선언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며 재일 조선인 사회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김석범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화산도』를 완성했고, 이회성은 사할린섬을 방문하여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그린 작품을 발표했다.[11]
1980년대 후반, 이양지는 서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유희"(1988년)를 써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지만, 1992년에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기사와 메구무 역시 한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김학영은 1985년에 자살했고, 김태생(1986년), 허남기(1988년), 김달수(1997년) 등 1세대 작가들이 사망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유미리, 현월, 양석일 등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이 등장하여 재일 조선인 문학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14][15][16]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재일 조선인 문학은 다원화되었다. 강신자는 "극히 보통의 재일 조선인"(1987년)에서 기존의 재일론과 다른 생각을 나타냈고, 가네시로 가즈키는 2000년 "GO"로 나오키 상을 수상하며 자신을 "한국계 일본인"으로 칭하며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를 요구했다.[18]
4. 재일 조선인 문학의 특징과 의의
재일 조선인 문학은 일본어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인지 일본 문학인지에 대한 문제가 재일 조선인 자신들 사이에서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다. 이는 민족과 문학, 언어와 문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45년 이후 일본어로 된 한국인 작가의 작품은 "조선 민족 문학인 동시에 일본 문학의 하나"[1]라고 하는 넓은 시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문학 국적이 언어에 귀속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적으로는 한편 국제적인 확대 아래에서 새로운 변화와 함께 유지되어 오면서, 작가의 관점에서 재일 조선인으로 사는 자세와 의미, 조국이나 동포 조직과의 관련 등이 문제로 대두되면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기며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5. 재일 조선인 문학의 과제
재일 조선인 문학은 일본어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인지 일본 문학인지에 대한 문제가 재일 조선인 자신들 사이에서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다. 이는 민족과 문학, 언어와 문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45년 이후 일본어로 된 한국인 작가의 작품은 "조선 민족 문학인 동시에 일본 문학의 하나"라는 넓은 시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문학 국적이 언어에 귀속된다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적으로는 한편 국제적인 확대 아래에서 새로운 변화와 함께 유지되어 온 것이다. 작가들은 재일 조선인으로 사는 자세와 의미, 조국이나 동포 조직과의 관련 등을 문제로 제기하며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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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城一紀ロングインタビュ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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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ディアファクトリ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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