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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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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할린 한인은 19세기부터 사할린 섬으로 이주한 한민족을 지칭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 징용 등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남겨지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현재 사할린에는 3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며, 유즈노사할린스크에 가장 많이 분포한다. 사할린 한인들은 한국어, 러시아어, 일본어를 사용하며, 한국 문화와 러시아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1990년 수교 이후 개선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과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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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집단명사할린 한인
언어러시아어, 한국어
종교기독교 (러시아 정교회, 개신교)
관련 민족한국계 디아스포라, 재일 한국인, 고려인
로마자 표기사할린 한인: Sahallin Hanin
사할린 한인 (러시아어): Sakhalinskiye Koreytsi 또는 Koreytsi Sakhalina
사할린 잔류 한국인 (일본어): Saharin Zanryū Kangokujin
한자 표기사할린 韓人
러시아어 표기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 또는 Корейцы Сахалина
일본어 표기サハリン残留韓国人
인구
전체 인구55,000명 이상
러시아35,000명
사할린주24,993명
대한민국1,500명
북한1,000명
민족 정보 (한국어)
민족사할린 한인
언어러시아어, 한국어
종교동방 정교회, 개신교
민족 계통한민족

2. 역사

19세기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섬 북부로 이동했다.[60][61]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사할린 섬 남부를 차지하여 가라후토 청이 설치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가라후토로 가기도 했다.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기 전, 일본이 조선반도를 지배하던 시기에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본 국적을 가진 조선반도 사람들은 노동자로서 남사할린(南樺太)으로 돈을 벌거나 징용에 의해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소련이 대일 참전하여 남사할린을 침공(사할린 전투)하고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1945년 이후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소련 통치 시기, 러시아 연방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거나 이주한 한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소련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으로의 귀환이 거부되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송환하지 않아 무국적 상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 한국과 소련(이후 러시아) 간 국교 수립 이후, 한인들의 한국 국적 취득과 귀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시대를 그리워하며 일본 노래를 흥얼거리고 '항상 일본(시대)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하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라고 말하는 일본 시대를 아는 전 사할린 거주 조선인(로스토프로 이주)도 있다.[66]

일본어한국어를 구사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어를 배우며 3개 국어를 구사하게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러한 세대는 사망하고 있으며, 전후 세대는 기본적으로 러시아어만 구사한다.[68]

2007년 한국은 “아직 사할린에는 한국으로의 영주 희망자가 3000명 이상 남아 있다. 수백 명 단위로 순차적으로 귀국시키고 싶다”며 일본 측에 지원을 요청했다.[71]

2. 1. 일제 강점기 (1910년대~1945년)

1910년대 초, 미쓰이 그룹 등 일본 기업들이 광산, 건설 노동자로 한반도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하면서 사할린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다.[7] 1920년 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 10년 후, 가라후토현 전체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1,000명도 채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남성이었다.[8]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전시 상황에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가라후토 (사할린 남부)로 강제 징용하였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탄광,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당했으며, 이중징용으로 인해 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했다.[73] 1924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남용석 등 인신매매 상인들에 의해 사할린 북부 (북화태 아항)으로 팔려간 조선인 여성들이 이미 3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일본군 점령지의 석탄 생산지 및 어업 항구에서 악마의 밥이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일본은 소련과의 정보전에서 오로크족, 니브흐족, 아이누족 등 현지 소수 민족을 이용하였고,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경계로 인해 한국인 활용은 드물었다.[12]

2. 1. 1. 일본의 한인 학살

1945년 소련의 사할린 침공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민간인에 의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카미시스카 (현 레오니도보)와 미즈호 마을 (현 포자르스코예)에서의 학살 사건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15][16][12]

카미시스카에서는 일본 경찰이 간첩 혐의로 한국인 19명을 체포했고, 그중 18명이 다음 날 경찰서 안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나카타라는 일본식 이름으로만 알려진 한국인 한 명만이 화장실에 숨어 살아남아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마오카(현 홀름스크)에 상륙한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적군과 협력하여 일본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즈호 마을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은 농장과 건설 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했지만, 일본 민간인들은 한국인 이웃들을 공격하여 8월 20일부터 23일 사이에 27명을 살해했다.

2008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간부가 조선인 학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출간하면서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이 추가로 알려졌다.[75] 2012년에는 일본이 사할린 한인들을 대량학살했을 것이라는 1946년의 소련 정부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었다.[76] 일본군이 사할린 섬 수용소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의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한국인들이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7]

2. 2. 소련 통치 시기 (1945년~199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가라후토는 소련에 반환되었다. 가라후토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송환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방치했다.[60][61] 광복 이후 대한민국은 이들을 송환할 여력이 없었으며, 한국 전쟁 이후 냉전으로 대한민국과 소련이 적대 관계에 있어 사할린 한인들은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들을 회유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경상도, 전라도한국 남부 출신으로 대한민국에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송환을 거부하였다.

1960년대1970년대를 거치면서 일부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으로 귀환을 바라던 1세대들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68]

1946년 미소 송환 협정에 따라 사할린에서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일본인들은 귀환하게 되었지만, 귀환자의 선택은 소련 당국이 하도록 되어 있었다.[62] 조선인에 대해서는 북한[63]으로의 귀환을 희망하는 사할린 거주 조선인 중 북위 38도 이북 출생자만이 대상이었으나, 대부분 북위 38도 이남 출신이었기에 해당자가 거의 없었다.[68]

1948년 건국된 한국 정부반공을 국시로 삼아 오랫동안 소련과 국교를 맺지 않았고,[65] 건국 초기 경제적 빈곤으로 한국인 유입에 부정적이었다. 사할린 거주 조선인들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소련은 1990년까지 한국과 국교를 맺지 않아 한국 국적은 부여되지 않았지만, 소련 및 북한 국적 취득은 허용되어 남한 출신이라도 북한 국적자가 되거나 소련 국적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68]

1956년 일소 국교 정상화로 소련에 억류된 일본인 귀환(1957~1959년) 때, 일본인 아내를 둔 조선인 남편과 자녀가 함께 귀환(일본인 아내 766명, 조선인 남편과 자녀 1541명)하거나 1970년대 몇 명이 소련 출국을 허가받은 경우는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할린 거주 조선인은 귀환하지 못했다.[65]

1990년 한국과 소련(후의 러시아)의 국교 수립으로, 한러 간 직접 한국 국적 부여나 귀환이 가능해졌다.[68]

1956년 일소 국교 정상화에 따른 사할린 귀환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박로학[67]과 호리에 카즈코 부부가 1958년경부터 귀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75년 다카기 켄이치 변호사 등이 ‘사할린 잔류자 귀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며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68][69]

한국은 1948년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재외 한국인 수용 거부 태도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 기본 조약 이후 일본 자금과 기술 지원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 신흥국이 되었고, 조약 체결 후 기존 정부가 재외 동포에게 무관심했다며 수용을 표명했다.

소련 당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6년 중반까지 남한 출신 귀환 희망자의 귀환 신청에 대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으면 출국을 허용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1976년 4월부터 중재를 시작했지만, 소련은 같은 해 7월부터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1976년 10월까지 일소 간 귀환 협상에서 재사할린 조선인의 일본 입국 신청자는 331명이었고, 이 중 일본 체류 후 한국 귀환 희망자가 330명, 일본 영주 희망자가 1명이었다.[70] 일본 측 입국 허가자 19명 중 소련이 출국 허가한 사람은 1명, 한국 정부 수용 허가 대기자는 5명이었다. 출국자는 일본 입국 후 한국 귀국 1명, 일본 잔류 2명이었다.[68]

1983년 박로학 부부와 쿠사카와 쇼조 의원을 중심으로 가족 재회 사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일본변호사연합회(日弁連), 일본교직원조합(日教組), 지방자치노동조합(自治労), 일본사회당 등은 한국을 독재 정권, 북한을 우방국으로 여겨 한국 귀환에 반대했다.[68]

1987년 일본사회당 이가라시 히로조 의원 중심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 간담회”가 만들어져 인도적 지원 사업으로 외무성에 예산이 책정되었다. 이 사업은 매년 1억 정도였지만 1994년 무라야마 내각에서 예산이 대폭 증액, 2007년도 “재사할린 한국인 지원” 명목 3억 예산, 2007년까지 정부 지원 70억에 달했다.[71]

2. 3. 러시아 연방 시기 (1991년~현재)

1988년 이후 대한민국소련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사할린 한인들의 고향 방문이 추진되었고, 일부는 대한민국에 정착하였다.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러시아 간의 상업, 통신, 직항편 개설로 남북한 모두 사할린 한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경쟁했다.[68] 대한민국과 일본은 공동으로 대한적십자사 주관 하에 사할린 한인 노인들을 위한 안산시 고향마을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민국 투자자들은 사할린 대륙붕 개발 사업 계약 입찰에 참여하는 등 경제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3. 거주 지역 및 현황

러시아 사할린주에는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3만여 명의 사할린 한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중 절반가량은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다.[25][26] 대한민국으로 영주 귀환한 사람은 3,500여 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환한 사람은 1,000여 명 정도이다.[25][26]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사할린 한인들의 상황은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개선되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일본인 아내를 통해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박노학은 일본 정부에 사할린 한인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25][26] 그의 노력은 50만 명의 한국인들이 본국 송환 운동 단체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들을 위한 방송을 시작했다.[25][26]

1990년 한국과 소련(이후 러시아) 간의 국교 수립 이후, 한국 국적 부여 및 한국으로의 귀환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68] 그 결과, 한국으로 귀환하는 사람, 북한 또는 한국 국적으로 사할린에 영주하는 사람,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등 다양한 선택이 나타났다.[68]

사할린 한인 중에는 여전히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존재한다. 1976년까지 사할린을 떠날 수 있었던 사람은 2,000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소련 당국은 출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3개 국어 구사자로 성장했으며, 일부는 일본 시대를 그리워하며 일본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66] 그러나 전후 세대는 주로 러시아어만 사용한다.[68]

4. 문화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 징용 등으로 사할린으로 이주한 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광복 이후에도 여러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게 되면서 독특한 문화를 형성해 왔다.[60][61][62][63][64][65][68]

이들은 일본어, 한국어, 러시아어를 배우며 3개 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세대는 사망하고 있으며, 전후 세대는 기본적으로 러시아어만 구사한다.[68]

1990년 한국과 소련(후의 러시아)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한국 국적 부여나 한국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한국으로 귀환하는 사람, 북한 국적 또는 한국 국적으로 사할린에 영주를 원하는 사람, 조선계 러시아인(고려인)으로 사는 사람 등이 있다.[68] 일본 시대를 그리워하며 일본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다.[66]

4. 1. 언어

사할린 한인들은 한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3개 국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세대는 사망하고 전후 세대는 기본적으로 러시아어만 구사한다.[68]

사할린 한인들의 한국어는 전라 방언과 경상 방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함경 방언이나 고려말과는 차이가 있다.[51] 1980년대까지 남한은 소련과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어 교육 자료는 북한에서 제공되거나 국내에서 개발되었다. 그 결과 사할린 한인들은 독특하게 북한 표준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남한의 서울 방언과 유사한 방식으로 말한다.[51]

1949년부터 주간 한국어 신문인 ''새코리아신문''이 발행되었고, 1956년에는 사할린 한국어 방송이 개국했다.[32] 한국어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현지에서 방송되지만, 일반적으로 러시아어 자막이 함께 제공된다.[50]

4. 2. 이름

사할린 한인은 한국식 이름과 러시아식 이름을 혼용하며, 일부는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어 성씨는 키릴 문자로 표기될 때 로마자 표기와 달라질 수 있다.[68]

4. 3. 종교

Советский Союз|소볘트스키 소유스ru 해체 이후 사할린 한인들 사이에서 종교 활동이 크게 증가하였다.[52] 개신교와 천주교 등의 종교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사도좌구역의 성 야고보 대성당과 홀름스크, 아니다의 가톨릭 선교부에는 한국계 신자들이 많이 있다. 1990년대 초부터 교회 설립이 언급되었으며,[52] 기독교 찬송가는 러시아, 서구 및 케이팝 음악과 함께 인기 있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53] 한국 교회는 사할린 한국어 방송을 통해 종교 콘텐츠를 방송하기도 하고, 한국계 교인들이 운영하는 침례교 교회는 현지에 기자를 후원하기도 한다.[54]

하지만, 대규모 종교 행사는 정부 당국의 제한을 받을 수 있다. 1998년 6월, 사할린 지역 행정부와 러시아 정교회는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구소련 지역의 100명 이상의 장로교와 다른 개신교 선교사들의 회의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55]

4. 4. 요리

사할린 한인들은 한국 요리에서 유래한 독특한 요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음식은 사할린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높으며, 표얀세와 같은 요리는 모스크바블라디보스토크에서 널리 소비된다.[56] 표얀세는 사할린 섬에 남아 있는 사할린 한인들과 사할린 러시아인들에게 널리 소비되는 음식이다. 2012년 9월 조사에 따르면 사할린 한국인의 90%, 비한국인의 63%가 이 음식을 자주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57]

2015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의 노점에서 판매되는 ''표얀세''

4. 5. 음악

사할린 한인 인구의 3분의 1이 전통 한국 음악을 선호한다고 응답했는데, 이는 조사된 다른 어떤 한국계 공동체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53] 한국어 구사 능력이 더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음악의 보급률은 카자흐스탄의 한국계 사람들보다 낮았으며, 우즈베키스탄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또한 구소련 지역의 다른 한국인들보다 서양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을 훨씬 적게 듣는다고 보고했다.[53] 전통 한국 악기 연구 또한 모든 세대에 걸쳐 인기를 얻고 있다. 1991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에트노스 예술학교가 설립되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전통 한국 무용, 피아노, 청음가야금(가야연맹 시대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과 비슷한 악기)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58]

5. 대한민국과의 관계

1990년 대한민국소련(러시아)의 국교 수립 이후, 사할린 한인들의 대한민국 귀환 및 지원 사업이 본격화되었다.[68] 일본 정부는 1987년부터 사할린 잔류 한국인 지원 사업을 실시해 왔으며, 2007년까지 70억 엔을 지원했다.[71]

1948년 건국된 대한민국 정부는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아 오랫동안 소련과 국교를 맺지 않았고,[65] 건국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빈곤하여 식량 사정 등으로 한국인 유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사할린 거주 조선인을 조국으로 귀환시키려는 자세를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68]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기본조약 이후 일본으로부터 자금과 기술 지원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통해 1970년대 경제 신흥국으로 발돋움했고, 조약 체결 후 기존 정부가 재외 동포에게 무관심했다며 수용을 표명하는 등 일본을 통한 한국인 유입이 한일 간에 용이한 상태였다.

1983년에는 박로학 부부와 구사카와 쇼조 의원을 중심으로, 소련과 국교가 없는 한국 지역 출신자들이 일본에서 가족과 재회할 수 있도록 국가 사업으로 가족 재회 사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해 일본변호사연합회(日弁連), 일본교직원조합(日教組), 지방자치노동조합(自治労), 일본사회당 등 진보적 문화인, 시민 단체 및 좌파 노동조합은 “사할린의 조선인은 모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으로 인정되므로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협력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한국으로의 귀환에 반대했다.[68]

1987년에는 일본사회당이가라시 고조 의원을 중심으로 “사할린 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 간담회”가 만들어져 보상적인 측면을 보이면서 인도적인 지원 사업으로 외무성에 예산이 책정되었다. 이 사업은 매년 1억 엔 정도였지만 1994년 무라야마 내각에서 사회당이 예산 편성에 관여한 이후 예산이 대폭 증액되었다. 이에 따라 2007년도에는 “재사할린 한국인 지원” 명목으로 3억 엔의 예산이 계상되었고, 2007년까지 정부가 지원한 금액은 70억 엔에 달했다.[71]

대한민국 정부는 사할린 한인 1세대의 귀환을 지원하고 있지만,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2세 이하 자녀들은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이들을 대한민국 국적자로 판결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진영은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며,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강조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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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Priest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became Honorable Citizen of Seoul http://www.orthodox.[...]
[4] 뉴스 22 Koreans to be repatriated from Sakhalin http://vn.vladnews.r[...] The Vladivostok News 2004-03-30
[5] 논문 사할린 한인의 종교와 신앙 및 의례: 유즈노사할린스크의 경우를 중심으로 (Religion, Faith, and Ceremonies of Sakhalin Koreans: Focusing on the case of Yuzhno-Sakhalinsk) http://www.folklore.[...] 실천민속학회 2007-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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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논문 Корейцы на Сахалине (Koreans in Sakhalin) http://world.lib.ru/[...] Al-Farabi University 200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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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뉴스 Sakhalin Koreans celebrate 60th anniversary of liberation from Japanese bondage http://www.thesakhal[...] The Sakhalin Times 2005-08-26
[12] 학회발표 樺太における日本人の朝鮮人虐殺 (The Japanese Massacre of Koreans in Karafuto) Miraisha
[13] 서적 Burnt by the Sun: The Koreans of the Russian Far Eas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8-01-31
[14] 뉴스 What's in a Name? For the Koreans of Sakhalin, an Anguished History https://www.nytimes.[...] 2021-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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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証言・樺太(サハリン)朝鮮人虐殺事件 (Testimony: The Massacre of Karafuto/Sakhalin Koreans) Fubaisha
[17] 논문 Task Force Russia -- Biweekly Report 19 December 1982 - 8 January 1993 (12th Report) http://memory.loc.go[...] U.S.-Russian Joint Delegation on POWs/MIAs 1993-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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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뉴스 Stateless in Sakhalin http://times.hankook[...]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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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뉴스 러 FSB 간부가 日 사할린 한인학살 다룬 소설 출간 https://news.naver.c[...]
[76] 뉴스 日, 종전후 사할린 한인 학살했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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