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강 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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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절강 편씨는 명나라 절강 출신 무관 편갈송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편갈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전라도 나주와 만경 등지에 정착했으며, 편씨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명나라 수군과 연관되어 있다. 절강 편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10,678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주요 인물로는 의병 편영표, 편성대, 독립운동가 편강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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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강 편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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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지역 | 저장성 |
기원 | 저장성, 중국 |
창립자 | 편갈송(片碣頌) |
저명한 인물 | 편혜영 |
씨족 정보 | |
한자 표기 | 浙江 片氏 |
로마자 표기 | Jeolgang Pyeon ssi |
주요 거주지 | 서울특별시 평양직할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황해도 평산군 |
2000년 인구 | 10,678명 |
순위 | 352위 |
2. 역사
절강 편씨의 시조 '''편갈송'''(片碣頌)은 명나라 절강 출신의 무관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되어 큰 공을 세웠다.[1][2]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간신 정응태의 무고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경주시 금오산에 은거하였다.[5] 이후 그의 아들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전라도 지역에 정착하면서 절강 편씨가 시작되었다.
편갈송은 울산 서생포 창표당에 배향되었으며, 전라도 유림의 요청으로 나주에 감명사가 세워져 그의 공적이 기려졌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평양성과 전주성을 되찾고, 남원과 해남군을 포함한 전라도와 경주 지역을 수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 전투에서 여섯 번 연속 승리한 어양부대가 바로 편갈송의 군대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조명 연합군의 승첩비가 모두 뽑혀 나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편갈송은 25000여 명의 절강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그의 휘하에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수군들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친필 간찰에서 명나라 수군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편갈송은 조선에 머물며 시를 남기기도 했으며, 그의 업적은 《금고실기》와 《동원기략》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동원기략》은 일본의 도쿠토미 소호가 임진왜란을 연구할 때 참고한 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10]
2. 1. 시조 및 기원
시조는 '''편갈송'''(片碣頌)이며, 자(字)는 경수(景修), 호(號)는 모헌(慕軒)이다. 명나라 신종 조에 어양총절사[6]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동정명군총병사[7], 정유재란 당시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으로 큰 공을 세웠다. 중국 당나라 황족 외척의 후손이라고 한다.[5] 전란이 끝난 후 간신 정응태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시 금오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편풍세, 편풍원, 편산보 3형제가 금오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등진 후였다. 아버지를 안장한 후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시로, 편산보는 전라도 만경읍으로 가서 세거하였다.편갈송의 선조는 절강 사람으로 고조 할아버지 편지는 명나라에서 태자태사를 역임했으며 원래는 당나라 황실의 이씨의 종친이었으나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인정받아 일편단심의 편자를 성으로 하사 받았으며 증조 할아버지 편일은 절강백에 봉해졌다고 한다. 주희(주자)의 청년 시절부터 10년간 스승인 이통(이연평) 또한 선조이다. 이통은 주희(주자)의 7년간의 대화와 서신을 기록한 연평답문 등을 남겼으며, 주자는 이통을 배향하였다, 이통은 나중에 공자묘에 배향된다. 주자는 "연평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 처참한 심정이 되었고, 나의 깨달음을 연평(이통) 선생에게 묻지 못함이 한이 된다."라고 하였다.
시조 편갈송은 울산 서생포 창표당에 배향되었으며, 200여 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으로 나주에 감명사를 세워 공을 기렸다. 편갈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평양성과 전주성을 되찾고, 남원과 해남군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과 경주를 수복하고 울산 서생포왜성을 탈환하였다.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에 세워진 〈흠차 병부상서 총독 제독군문 편갈송 승첩비〉와 《문소만록》에는 편갈송의 직산전투 승리가 기록되어 있다. 소사평 전투에서 여섯 번 연속으로 승리한 어양부대가 편갈송의 군대이다. 조선에 있던 조명 연합군의 승첩비는 일제가 모조리 뽑아 버렸다. 편갈송은 동정명군총병사로 25000여 병력의 절강군을 이끌고 참전한다. 마지막까지 조선에서 왜적과 싸우고 돌아가지 못한 명장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정승첩비문[8]이 있다.
중군 제독 편갈송 휘하의 중군 수군 이천상, 양천윤, 노득, 복일승, 진잠 등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 친필 간찰을 보면 명나라 수군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중에 온 진린에 대한 평가와는 상반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워 선조의 친서를 받고 조선에 머물며 쓴 편갈송의 시는 다음과 같다.
> 우연히 처음으로 발디딘 이 땅, 해 돋는 동해가 바로 저긴데
>
> 끝없이 일렁이는 큰물결 작은 파도 억겁의 세월에 밀려왔는가
>
> 서북쪽엔 산들이 줄을 이으니 하늘 끝이 여기인가 의심스럽고
>
> 동남으론 바닷물이 하도 높으니 땅덩이가 그 위에 떠있는 것 같으이
역대 인물의 사적을 모아놓은 책인 《금고실기》 1905년(광무 9) 규장각본의 충훈에 편갈송이 실려있고[9], 철종 때 편갈송의 업적을 집대성한 《동원기략》이 있다. 도쿠토미 소호가 임진왜란을 연구하려고 참고했던 조선의 책 목록에 동원기략이 존재한다.[10] 편씨 가문은 명나라 절강 출신의 무관 편갈송(片碣頌)에 의해 창시되었다.[1][2] 그는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지역 사령관(都督|도독중국어)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배신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조선에서 귀화했다. 그의 세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건너와 전라남도 나주에 정착했다.
2. 2. 조선 정착
시조는 '''편갈송'''(片碣頌)이며, 자(字)는 경수(景修), 호(號)는 모헌(慕軒)이다. 명나라 신종 조에 어양총절사[6]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동정명군총병사[7], 정유재란 당시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으로 큰 공을 세웠다. 중국 당나라 황족 외척의 후손이라고 한다.[5] 전란이 끝난 후 간신 정응태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시 금오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편풍세, 편풍원, 편산보 3형제가 금오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등진 후였다. 아버지를 안장한 후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시로, 편산보는 전라도 만경읍으로 가서 세거하였다.[1][2]2. 3. 조선시대 활동
시조는 '''편갈송'''(片碣頌)이며, 자(字)는 경수(景修), 호(號)는 모헌(慕軒)이다. 중국 당나라 황족 외척의 후손이라고 한다.[5] 명나라 신종 조에 어양총절사[6]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동정명군총병사[7], 정유재란 당시 제독군문섭병부상서중군제독으로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후 간신 정응태의 무고로 귀국하지 못하고, 경주시 금오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편풍세, 편풍원, 편산보 3형제가 금오산으로 가서 아버지를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세상을 등진 후였다. 아버지를 안장한 후 편풍세와 편풍원은 전라도 나주시로, 편산보는 전라도 만경읍으로 가서 세거하였다.편갈송은 울산 서생포 창표당에 배향되었으며, 200여 년이 지나 공적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전라도 유림의 계청으로 나주에 감명사를 세워 공을 기렸다. 편갈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평양성과 전주성을 되찾고, 남원과 해남군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과 경주를 수복하고 울산 서생포왜성을 탈환하였다. 충청도 직산면 소사평에 세워진 〈흠차 병부상서 총독 제독군문 편갈송 승첩비〉와 《문소만록》에는 편갈송의 직산전투 승리가 기록되어 있다. 소사평 전투에서 여섯 번 연속으로 승리한 어양부대가 편갈송의 군대이다. 조선에 있던 조명 연합군의 승첩비는 일제가 모조리 뽑아 버렸다. 편갈송은 동정명군총병사로 25000여 병력의 절강군을 이끌고 참전한다. 마지막까지 조선에서 왜적과 싸우고 돌아가지 못한 명장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정승첩비문[8]
중군 제독 편갈송 휘하의 중군 수군 이천상, 양천윤, 노득, 복일승, 진잠 등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 친필 간찰을 보면 명나라 수군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중에 온 진린에 대한 평가와는 상반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워 선조의 친서를 받고 조선에 머물며 쓴 편갈송의 시는 다음과 같다.
우연히 처음으로 발디딘 이 땅, 해 돋는 동해가 바로 저긴데 끝없이 일렁이는 큰물결 작은 파도 억겁의 세월에 밀려왔는가 서북쪽엔 산들이 줄을 이으니 하늘 끝이 여기인가 의심스럽고 동남으론 바닷물이 하도 높으니 땅덩이가 그 위에 떠있는 것 같으이|偶然初足此方地, 日出東溟是處邊. 巨浪洪濤無盡際, 億年䨪劫幾曾湮. 西北列峀疑天末, 東南浮海覺地懸.중국어
역대 인물의 사적을 모아놓은 책인 《금고실기》 1905년(광무 9) 규장각본의 충훈에 편갈송이 실려있고[9], 철종 때 편갈송의 업적을 집대성한 《동원기략》이 있다. 도쿠토미 소호가 임진왜란을 연구하려고 참고했던 조선의 책 목록에 동원기략이 존재한다.[10]
3. 본관
절강은 중국 동남부 동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자강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다. 전당강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지고 항저우를 성도로 하고 있다. 족보학자 편홍기가 저술한 '성씨의 발생사 및 씨족별 인물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성씨 250개 중 130개가 중국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11]
4. 인물
- 편영표(1586년 ~ 1638년):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형지, 호는 소은.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청주로 진군하다 강화 소식을 듣고 자결. 병조참의로 추증되고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
- 편성대(1605년 ~ 1673년): 조선 중기 의병. 자는 형복, 호는 은림.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다 청군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움. 인조의 항복 소식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라도 화순에 은거.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
- 편운태: 조선 후기 유학자. 문과 급제 후 지평을 지냈으나, 벼슬을 사직하고 후학 양성에 힘씀.
- 편좌언: 조선 고종 때 정평부사, 함안군수를 지냄.
- 편호익: 조선 말기 유생, 의열. 자는 기준, 호는 모명재.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자 자결.
- 편군선: 충북 괴산 출신의 의병장. 의병 투쟁 중 체포되어 1910년 3월 교수형으로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
- 편강렬(1892년 ~ 1929년): 독립운동가
- 편무경(1893년 ~ 1961년): 독립운동가
- 편혜영(1972년 ~ ): 소설가
- 편동우
5. 인구 및 분포
절강 편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10,678명으로 나타났다. 편(片)씨는 총 29개 본관에 14,675명이었다. 당시 조사에서 나타난 편씨의 본관은 경주, 금강, 김천, 나주, 남양, 대전, 만경, 밀양, 보은, 석강, 세종, 수원, 순천, 신광, 안성, 양주, 언양, 영해, 의령, 이천, 인천, 장성, 전주, 절강, 정선, 창원, 통진, 평해, 해주, 홍주 등이었다.
경상북도 김천시, 성주군, 문경시 등지에는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이주해 온 종파의 6세 후손 약 160세대가 살고 있다. 서울특별시에는 90년 전 황해도 연안군에서 이주해 온 13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충청남도 서산시, 공주시, 홍성군, 당진시 등지에는 5세의 후손이, 전라남도 나주시, 무안군, 함평군, 영광군 등지에는 2, 3, 4세의 후손 약 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북한에는 황해도 평산, 신계, 송화, 평안남도 평양, 안주, 영변 등지에 몇 가구씩 흩어져 살고 있었다.
6. 족보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절강편씨 浙江片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간행물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7
[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LST_232_540_0743
[5]
서적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
http://book.naver.co[...]
역사의아침
2017-05-06
[6]
문서
명나라 수도 베이징 절사들의 최고 대장. 절사는 평시에는 학문과 무술을 익히다가 나라가 위급하면 소집되는 문무겸비한 황제의 친위부대
[7]
문서
동정명군의 총사령관
[8]
문서
제독중군섭병부상서 편갈송이 짓고 유격장군 시문용이 썼으며, 관진상지관 두사충, 운량사도총장 천만리, 총병파총 장해빈, 유격파총 서학 등이 지시하여 세웠다.
[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금고실기
https://terms.naver.[...]
[10]
웹인용
조선을 구한 한국성씨
http://dyyjy.zjgsu.e[...]
2017-05-06
[11]
뉴스
50년 연구 '성씨의 발생사…'출간 족보학자 편홍기옹
http://www.joongang.[...]
201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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