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자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정강자는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아방가르드 미술가이다. 홍익대학교에서 박서보에게 사사하며 팝아트, 소프트 조각, 개념 미술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탐구했다. 1960년대 후반 신전그룹과 제4그룹 창립 멤버로 퍼포먼스, 해프닝 등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여성의 몸과 정체성을 다룬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1970년대 싱가포르 체류 이후 회화에 집중했으며, 2017년 신장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개인전 30회를 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싱가포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강원용
강원용은 함경남도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경동교회 설립과 대화문화 아카데미 창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했으며, 언론, 사회,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싱가포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홍석천
홍석천은 대한민국 배우이자 사업가로, 2000년 국내 연예인 최초로 커밍아웃 후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태원 레스토랑 운영 성공과 방송 활동, LGBT 권리 신장 활동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사회적 수용을 얻고 용산구청장 출마를 고려하기도 했다. - 대한민국의 화가 - 윤석남
윤석남은 자연과 여성을 주제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실험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는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가로, 1985년 '시월모임' 결성을 통해 한국 여성주의 미술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국제적인 무대에서도 활동하며 여성의 삶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대한민국의 화가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홍익대학교 동문 - 최영미 (시인)
최영미는 1992년 등단하여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의 시집을 출간하고 이수문학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괴물'이라는 시로 대한민국 미투 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서울시 성평등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시는 사회 풍자가 특징이다. - 홍익대학교 동문 - 윤형근
윤형근은 격변의 시대를 거치며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한 한국의 추상화가이자 단색화 운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어두운 기둥 형태와 여백을 활용한 독특한 기법으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정강자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정강자 |
출생일 | 1942년 2월 8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대구부 |
사망일 | 2017년 7월 23일 |
국적 | 대한민국 |
성별 | 여성 |
학력 | 홍익대학교 |
직업 | |
직업 | 화가, 행위예술가 |
2. 생애
정강자(Jung Kang-ja)는 194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2] 홍익대학교에서 정강자의 스승이었던 박서보는 앵포르멜(Art Informel) 운동과 단색화의 선구자로, 정강자가 팝아트, 소프트 조각, 개념 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탐구하도록 격려했다.[3] 정강자는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와 ''미즈에''(Mizue)와 같은 미술 잡지 이미지를 통해 외국 미술 운동에서 영감을 받았다.[4]
1967년, 정강자는 주로 홍익대학교 동기들로 구성된 신전그룹(Shinjeon Group)의 창립 멤버였다.[2] 이후 제4그룹의 창립에도 참여했다. 1970년 정강자의 개인전은 조기 종료되었고, 제4그룹은 해체되었다. 정강자는 "한국에서 여성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자신의 경력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다고 느꼈다."[2] 억압적인 정치 상황, 혹독한 여론, 그리고 매춘부라는 끊임없는 암시는 그녀의 아방가르드 추구를 약화시켰다.[5] 사립 미술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반발로 학생들을 잃었다.[6]
1977년 정강자는 결혼하여 싱가포르로 이주, 5년 동안 머물면서 바틱(batik)이라는 현지 기법을 자신의 예술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초현실적이고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통해 내면의 주관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회화와 2차원 작품을 주로 탐구했다. 1982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동료들이 얻은 명성에 비해 완전히 잊혀졌다.[5]
1990년에는 이집트, 감비아, 니제르, 케냐, 세네갈, 수단,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등 아프리카 8개국을 여행하며 회화에 큰 영감을 받았다. 그 직후 태국,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남서아시아 6개국도 방문했다. 이 여행에서 그린 스케치를 "남아시아 삽화 여행 기록 시리즈"라는 제목으로 잡지에 발표했다. 2004년에는 남태평양을 여행하며 회화 이미지에 영감을 주었다.
정강자의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계에서의 위치가 남성 동료들에 비해 과소평가되었다고 주장되어 왔다.[2] 평생 30회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2016년 부산 비엔날레의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전시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5] 정강자는 3기 신장암 진단을 받은 직후인 2017년에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42-1967)
2. 2. 아방가르드 미술 활동 (1967-1977)
정강자는 신전 및 제4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미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스타일을 따른 해프닝을 통해 한국 미술에서 퍼포먼스 작업을 개척했다.[7]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몸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사용하여 당시 여성들에게 대한 사회적 성 역할 기대를 넘어섰다.[8]2. 3. 해외 체류와 회화로의 전환 (1977-1982)
2. 4. 한국 귀국과 후기 활동 (1982-2017)
3. 주요 그룹 활동 및 초기 작품
정은 신전 그리고 이후 제4그룹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해프닝을 통해 한국 미술에서 퍼포먼스 작업을 개척했다.[7]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정은 자신의 몸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사용하여 당시 여성들에게 대한 사회적 성 역할 기대를 넘어섰다.[8]
1967년 설립된 신전동인(新展同人, New Exhibition Group영어)은 퍼포먼스와 해프닝을 탐구했다. 정강자가 참여했던 그룹이다.[4]
《투명 풍선과 누드》(1968)는 신전그룹이 주최한 '해프닝 쇼'라는 제목의 젊은 예술가 연합 제4회 현대미술 세미나에서 공개되었다. 정강자와 정찬승이 이 작품의 주요 제작자였다. 정찬승은 이브 클랭의 '누드 해프닝'을 시도해 볼 것을 그룹에 제안했다. 이 작품은 오노 요코의 '컷 피스'와도 유사성을 지닌다.[9] 수린동에 위치한 '쎄시봉' 음악다방은 당시 젊은이들이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자주 찾는 유명한 곳이었다. 350명의 관객이 참석했으며, 존 케이지의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삼색 조명 시스템이 다채로운 색깔로 번갈아 비추는 가운데 공연이 진행되었다. 정강자는 흰 바지, 흰 셔츠, 흰 스카프를 착용하고 무대에 올랐다. 의자에 앉자 남성 출연자들이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속옷만 남겼다. 그 후, 남성들은 끈적이는 접착제가 묻은 투명 풍선을 불어 정강자의 몸에 붙였다. 그녀의 몸이 투명 풍선으로 완전히 뒤덮이자 정찬승, 강국진과 일부 관객들이 풍선을 눌러 터뜨리거나 바람을 빼면서 정강자의 몸을 다시 드러냈다. 공연 후에는 침묵이 흘렀다. 정강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접착제가 묻은 플라스틱 풍선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4] 이 작품은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정강자의 행위에 대해 언론의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0] 참여적인 측면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환상을 '터뜨리기' 위한 의도였지만, 대중의 반응은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는 여성의 치마 길이와 남성의 머리카락 길이 등 신체 관련 정부의 탄압이 있던 시대였다.[11] 정강자는 한국 최초의 반누드 해프닝인 '투명 풍선과 누드'(1968) 참여로 언론의 부정적인 공격을 받았다.[12] 이 중요한 작품은 2016년 'an/other avant-garde 전시회'에서 재현되었다.[13]
처음에 그룹은 공연을 위해 여성 모델을 고용하기로 합의했지만, 공개적인 나체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모델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강자가 대신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강자는 공연에서 완전히 나체가 될 의도였지만, '쎄시봉' 주인은 당시 경찰이 현장에 있었기에 예술가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작품을 통해 정강자와 신전 그룹은 몸을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표현력이 높은 것으로 제시하고, 시간적이며 참여적인 예술을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예술 창작에 대한 개념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했다. 결코 만져지거나 드러내지 않는 한국 여성의 몸의 순결한 이미지와는 달리, 정강자의 작품은 여성의 몸을 대중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예술적 매체이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언론은 정강자의 나체를 비난하고 그룹이 전달하고자 했던 개념적인 아이디어를 훼손했다.[14]
《한강에서의 살인》(1968)은 상업주의의 모순과 기존 문화의 헤게모니를 비판하기 위해 기획된 야외 공연이었다.[13]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한강대교 2교 아래 구덩이에 자신들을 묻었다. 관객과 기자들은 그들에게 물을 뿌렸고, 그들은 젖은 몸으로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젖은 몸 위에 그들은 "문화 사기꾼"(가짜 예술가), "문화 눈먼 자"(문화 사기꾼), "문화 회피자"(이상주의자), "문화 불법 돈벌이꾼"(가짜 거장), "문화 행상인"(정치 예술가), "문화곡예사(시대의 편승자)" 와 같은 단어가 적힌 비닐을 덮었다. 그들은 이 메시지를 큰 소리로 읽은 후 태워서 묻었다. 이 공연을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은 정강자가 옷을 벗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렇지 않자 실망했다. 예술가들은 공연이 끝날 무렵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싶다!"고 외쳤다. 대중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부패한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낡고 단조로운 문화 시스템을 불태우고 한국 현대 미술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그들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15]
정강자가 기획에 참여했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그녀의 작품이 포함되었다.[2]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인 《Kiss Me》(키스 미)는 한국 사회의 성별 규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정강자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예시이며, 이 주제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정강자의 입술 모양 조형물 《Kiss Me》(1967)는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형물의 "이빨" 안에는 빨간 고무장갑, 마네킹 머리 및 기타 물건들이 설치되어 있다. 석고를 사용하여 여성의 입술 모양을 만들었고, 얇은 나무를 사용하여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이빨 모양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빨간 고무장갑은 여성들이 맡도록 강요받았던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상징하며, 작품 제목은 그러한 전통적인 역할과 도발적으로 대조된다.[3]
1967년 12월 14일, 전시회 셋째 날, 제로(Zero)와 신전 그룹(New Exhibition Group)의 10명의 예술가들이 《비닐 우산과 촛불과 함께 하는 해프닝》을 공연하였다. 김영자는 의자에 앉아 머리 위에 투명 플라스틱 우산을 들고 있었고, 정강자를 포함한 다른 9명의 공연자들이 그녀 주위를 돌았다.[9]
실험적인 예술 집단인 제4그룹의 창립 멤버로서 그녀는 그들의 여러 그룹 작품에 참여했다. 정강자는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백남준의 작품 《피아노 위의 섹스(1969)》의 무대 연출에 협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강자가 《투명 풍선과 누드》에 대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명희 차가 대신 참여했다.[18]
정강자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1970)에도 참여했다.[12] 영화 상영 첫날은 공교롭게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날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상영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림과 정강자는 흰색의 타이트한 의상을 입고 영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4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19]
1969년, 정운형은 제4집단의 동료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손일광과 협업하여 손일광이 디자인한 화장지로만 만든 드레스를 입고 분수대에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6]
정강자는 4인조 그룹의 공연 ''문화와 예술계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 공연에서 예술가들은 상징적으로 억압적인 사회, 그리고 간접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했다. 그룹 구성원들은 꽃으로 장식된 관을 매고 묻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관은 "모든 모순"을, 꽃은 "위선"을 각각 상징했다.[7]
1970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제4집단이 주최한 무체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정향의 퍼포먼스 작품 〈무체〉는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몸/예술을 단순한 주제나 객체가 아닌 범주적 경계가 없는 무엇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5] "무체" 또는 "무체"(무체/無體한국어)라는 제목의 그녀의 1970년 데뷔 개인전은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2] 정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조기 폐쇄는 제4집단 구성원들이 "사회 질서 위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20] "무체"는 "무형의 존재"로 번역되며, 제4집단의 작품에 깔려 있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개념으로, 그들의 선언문에도 등장한다.[7]
3. 1. 신전 그룹 (新展同人)
1967년 설립된 신전동인(新展同人, New Exhibition Group영어)은 퍼포먼스와 해프닝을 탐구했다. 정(鄭)이 참여했던 그룹이다.[4]3. 1. 1. 《투명 풍선과 누드》 (1968)
《투명 풍선과 누드》(1968)는 신전그룹이 주최한 '해프닝 쇼'라는 제목의 젊은 예술가 연합 제4회 현대미술 세미나에서 공개되었다. 정강자와 정찬승이 이 작품의 주요 제작자였다. 정찬승은 이브 클랭의 '누드 해프닝'을 시도해 볼 것을 그룹에 제안했다. 이 작품은 오노 요코의 '컷 피스'와도 유사성을 지닌다.[9] 수린동에 위치한 '쎄시봉' 음악다방은 당시 젊은이들이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자주 찾는 유명한 곳이었다. 350명의 관객이 참석했으며, 존 케이지의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삼색 조명 시스템이 다채로운 색깔로 번갈아 비추는 가운데 공연이 진행되었다. 정강자는 흰 바지, 흰 셔츠, 흰 스카프를 착용하고 무대에 올랐다. 의자에 앉자 남성 출연자들이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속옷만 남겼다. 그 후, 남성들은 끈적이는 접착제가 묻은 투명 풍선을 불어 정강자의 몸에 붙였다. 그녀의 몸이 투명 풍선으로 완전히 뒤덮이자 정찬승, 강국진과 일부 관객들이 풍선을 눌러 터뜨리거나 바람을 빼면서 정강자의 몸을 다시 드러냈다. 공연 후에는 침묵이 흘렀다. 정강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을 보고 접착제가 묻은 플라스틱 풍선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다.[4] 이 작품은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정강자의 행위에 대해 언론의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10] 참여적인 측면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환상을 '터뜨리기' 위한 의도였지만, 대중의 반응은 오히려 이를 강화하고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는 여성의 치마 길이와 남성의 머리카락 길이 등 신체 관련 정부의 탄압이 있던 시대였다.[11] 정강자는 한국 최초의 반누드 해프닝인 '투명 풍선과 누드'(1968) 참여로 언론의 부정적인 공격을 받았다.[12] 이 중요한 작품은 2016년 'an/other avant-garde 전시회'에서 재현되었다.[13]처음에 그룹은 공연을 위해 여성 모델을 고용하기로 합의했지만, 공개적인 나체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모델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강자가 대신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정강자는 공연에서 완전히 나체가 될 의도였지만, '쎄시봉' 주인은 당시 경찰이 현장에 있었기에 예술가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작품을 통해 정강자와 신전 그룹은 몸을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표현력이 높은 것으로 제시하고, 시간적이며 참여적인 예술을 선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예술 창작에 대한 개념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했다. 결코 만져지거나 드러내지 않는 한국 여성의 몸의 순결한 이미지와는 달리, 정강자의 작품은 여성의 몸을 대중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예술적 매체이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언론은 정강자의 나체를 비난하고 그룹이 전달하고자 했던 개념적인 아이디어를 훼손했다.[14]
3. 1. 2. 《한강에서의 살인》 (1968)
《한강에서의 살인》(1968)은 상업주의의 모순과 기존 문화의 헤게모니를 비판하기 위해 기획된 야외 공연이었다.[13]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은 한강대교 2교 아래 구덩이에 자신들을 묻었다. 관객과 기자들은 그들에게 물을 뿌렸고, 그들은 젖은 몸으로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젖은 몸 위에 그들은 "문화 사기꾼"(가짜 예술가), "문화 눈먼 자"(문화 사기꾼), "문화 회피자"(이상주의자), "문화 불법 돈벌이꾼"(가짜 거장), "문화 행상인"(정치 예술가), "문화곡예사(시대의 편승자)" 와 같은 단어가 적힌 비닐을 덮었다. 그들은 이 메시지를 큰 소리로 읽은 후 태워서 묻었다. 이 공연을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은 정강자가 옷을 벗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렇지 않자 실망했다. 예술가들은 공연이 끝날 무렵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고 싶다!"고 외쳤다. 대중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공연은 부패한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낡고 단조로운 문화 시스템을 불태우고 한국 현대 미술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그들의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15]3. 2. 청년작가연립전 (The Union Exhibition of Korean Young Artists) (1967)
정강자가 기획에 참여했던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그녀의 작품이 포함되었다.[2]전시된 작품 중 하나인 《Kiss Me》(키스 미)는 한국 사회의 성별 규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정강자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예시이며, 이 주제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정강자의 입술 모양 조형물 《Kiss Me》(1967)는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형물의 "이빨" 안에는 빨간 고무장갑, 마네킹 머리 및 기타 물건들이 설치되어 있다. 석고를 사용하여 여성의 입술 모양을 만들었고, 얇은 나무를 사용하여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이빨 모양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빨간 고무장갑은 여성들이 맡도록 강요받았던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상징하며, 작품 제목은 그러한 전통적인 역할과 도발적으로 대조된다.[3]
1967년 12월 14일, 전시회 셋째 날, 제로(Zero)와 신전 그룹(New Exhibition Group)의 10명의 예술가들이 《비닐 우산과 촛불과 함께 하는 해프닝》을 공연하였다. 김영자는 의자에 앉아 머리 위에 투명 플라스틱 우산을 들고 있었고, 정강자를 포함한 다른 9명의 공연자들이 그녀 주위를 돌았다.[9]
3. 2. 1. 《Kiss Me》 (1967)
전시된 작품 중 하나인 《Kiss Me》(키스 미)는 한국 사회의 성별 규범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정강자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예시이며, 이 주제는 그녀의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2] 정강자의 입술 모양 조형물 《Kiss Me》(1967)는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조형물의 "이빨" 안에는 빨간 고무장갑, 마네킹 머리 및 기타 물건들이 설치되어 있다. 석고를 사용하여 여성의 입술 모양을 만들었고, 얇은 나무를 사용하여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이빨 모양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빨간 고무장갑은 여성들이 맡도록 강요받았던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을 상징하며, 작품 제목은 그러한 전통적인 역할과 도발적으로 대조된다.[3]3. 2. 2. 《비닐 우산과 촛불과 함께 하는 해프닝》 (1967)
1967년 12월 14일, 전시회 셋째 날, 제로(Zero)와 신전 그룹(New Exhibition Group)의 10명의 예술가들이 《비닐 우산과 촛불과 함께 하는 해프닝》을 공연하였다. 김영자는 의자에 앉아 머리 위에 투명 플라스틱 우산을 들고 있었고, 정강자를 포함한 다른 9명의 공연자들이 그녀 주위를 돌았다.[9]3. 3. 기타 "여성주의적" 작품
1960년대 한국 여성 운동이 성차별적 현상 유지를 문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정강자는 한국 사회를 규정짓는 성 정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작품 활동을 펼쳤다. 당시 다른 단체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계되거나 그 활동을 위해 제작된 작품은 아니었다.[17] 당시 "예술가"에 대한 영웅적이고 남성적인 이미지는 여성 예술이 남성 표현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강화했다. 정강자를 포함한 여성 예술가들은 예술계와 대중의 더욱 날카로운 비판에 직면하며 압력을 받았다. 일부 여성 예술가들이 작품에서 자신의 성을 다루는 것을 피했지만, 정강자는 당시 억압적인 성 정치에 대한 예리한 인식으로 이 주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안타깝게도 사회의 제한적인 시각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은 관음증적 성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혹독한 반응으로 인해 정강자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사회 공포증을 앓게 되었다.[16]정강자의 작품 중에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억압에 저항하는 작품들이 있다.
- 《살인자》(1967)는 예술적 매체와 가정 용품을 혼합하여 제작되었다. 구멍이 뚫린 한국식 방문에는 여성의 신발과 다리가 콜라주되어 있다. 이 조각 작품은 여성의 자주권을 저해하는 한국의 성차별적인 관습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틀"에서 벗어나는 여성을 보여준다.[17]
- 《STOP》 (1968)은 정강자가 느꼈던 여성 정체성에 대한 긴장감을 부각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벤치에 걸터앉은 여성을 묘사했는데, 여성의 가슴에는 째깍거리는 시계가 걸려 있고, 엉덩이에는 만화처럼 크게 확대된 심장 모양의 아이콘이 있다.[17]
- '억압'(1968)은 성 불평등에 맞선 설치 작품이었지만,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작품은 사람 크기의 철 파이프가 퀸 사이즈 매트리스 크기의 솜 덩어리에 깊은 움푹 들어간 자국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근을 상징하는 무거운 파이프는 부드러운 솜에 골짜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여성의 몸과 삶을 짓누르는 억압적인 남성 중심 사회, 즉 가부장제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14]
3. 3. 1. 《살인자》 (1967)
《살인자》(1967)는 정강자의 작업으로, 예술적 매체와 가정 용품을 혼합하여 제작되었다. 구멍이 뚫린 한국식 방문에는 여성의 신발과 다리가 콜라주되어 있다. 이 조각 작품은 여성의 자주권을 저해하는 한국의 성차별적인 관습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틀"에서 벗어나는 여성을 보여준다.[17]3. 3. 2. 《STOP》 (1968)
정강자가 느꼈던 여성 정체성에 대한 긴장감을 부각시킨 또 다른 작품으로 1968년 작품인 《STOP》이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벤치에 걸터앉은 여성을 묘사했는데, 여성의 가슴에는 째깍거리는 시계가 걸려 있고, 엉덩이에는 만화처럼 크게 확대된 심장 모양의 아이콘이 있다.[17]3. 3. 3. 《여성 분수》 (1969)
《여성 분수》(1969)는 한국 남성들의 욕망과 여성성에 대한 이상에 따라 성적으로 묘사되고 통제되어 왔던 여성의 신체 부위를 확대하여 보여주었다.[17]3. 3. 4. 《억압》 (1968)
'억압'(1968)은 성 불평등에 맞선 설치 작품이었지만,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작품은 사람 크기의 철 파이프가 퀸 사이즈 매트리스 크기의 솜 덩어리에 깊은 움푹 들어간 자국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근을 상징하는 무거운 파이프는 부드러운 솜에 골짜기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여성의 몸과 삶을 짓누르는 억압적인 남성 중심 사회, 즉 가부장제의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14]3. 4. 제4그룹
실험적인 예술 집단인 제4그룹의 창립 멤버로서 그녀는 그들의 여러 그룹 작품에 참여했다. 정강자는 김구림, 정찬승과 함께 백남준의 작품 《피아노 위의 섹스(1969)》의 무대 연출에 협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강자가 《투명 풍선과 누드》에 대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명희 차가 대신 참여했다.[18]정강자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1970)에도 참여했다.[12] 영화 상영 첫날은 공교롭게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날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상영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림과 정강자는 흰색의 타이트한 의상을 입고 영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4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19]
1969년, 정운형은 제4집단의 동료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손일광과 협업하여 손일광이 디자인한 화장지로만 만든 드레스를 입고 분수대에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6]
정강자는 4인조 그룹의 공연 ''문화와 예술계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 공연에서 예술가들은 상징적으로 억압적인 사회, 그리고 간접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했다. 그룹 구성원들은 꽃으로 장식된 관을 매고 묻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관은 "모든 모순"을, 꽃은 "위선"을 각각 상징했다.[7]
1970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제4집단이 주최한 무체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정향의 퍼포먼스 작품 〈무체〉는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몸/예술을 단순한 주제나 객체가 아닌 범주적 경계가 없는 무엇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5] "무체" 또는 "무체"(무체/無體한국어)라는 제목의 그녀의 1970년 데뷔 개인전은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2] 정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조기 폐쇄는 제4집단 구성원들이 "사회 질서 위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20] "무체"는 "무형의 존재"로 번역되며, 제4집단의 작품에 깔려 있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개념으로, 그들의 선언문에도 등장한다.[7]
3. 4. 1. 《24분의 1초의 의미》 (1969-1970)
정강자는 《24분의 1초의 의미》(1969-1970)에도 참여했다.[12] 영화 상영 첫날은 공교롭게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날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상영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구림과 정강자는 흰색의 타이트한 의상을 입고 영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4대의 슬라이드 프로젝터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19]3. 4. 2. 《화장지 드레스》 (1969)
1969년, 정운형은 제4집단의 동료이자 패션 디자이너인 손일광과 협업하여 손일광이 디자인한 화장지로만 만든 드레스를 입고 분수대에 들어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6]3. 4. 3. 《문화와 예술계의 장례식》 (1970)
정은 4인조 그룹의 공연 ''문화와 예술계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이 공연에서 예술가들은 상징적으로 억압적인 사회, 그리고 간접적으로 권위주의 정부를 비판했다. 그룹 구성원들은 꽃으로 장식된 관을 매고 묻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관은 "모든 모순"을, 꽃은 "위선"을 각각 상징했다.[7]3. 4. 4. 《무체전》 및 개인 작품 (1970)
1970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제4집단이 주최한 무체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정향의 퍼포먼스 작품 〈무체〉는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었고, 그녀의 몸/예술을 단순한 주제나 객체가 아닌 범주적 경계가 없는 무엇으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5] "무체" 또는 "무체"(무체/無體한국어)라는 제목의 그녀의 1970년 데뷔 개인전은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2] 정부 직원의 말에 따르면, 조기 폐쇄는 제4집단 구성원들이 "사회 질서 위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20] "무체"는 "무형의 존재"로 번역되며, 제4집단의 작품에 깔려 있는 도가 사상의 영향을 받은 개념으로, 그들의 선언문에도 등장한다.[7]4. 후기 작품 (1980년대-2017)
1977년 이후 정강자는 회화에 집중했다.[2] 수년에 걸쳐 그녀의 회화 스타일은 가족과 개인 여행으로 인한 거주지 변화와 함께 변모했다. 초현실적인 풍경, 그녀가 방문한 곳의 문화적 모티프, 멕시코 벽화가들의 영감 등이 그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요소와 스타일이다.
《부흥개혁에 대한 시위》(1973)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집단적이고 주관적인 좌절을 보여주는 그림이다.[5] 어둡고 거칠게 그려진 그림에는 박정희 정권의 압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표현한 붉은색 현수막이 포함되어 있다.[5]
정강자는 「예술 스튜디오」(Art Studio, 1977)에서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등에 아이 하나를 업고 다른 아이 하나는 바닥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술과 자녀 양육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예술가이자 어머니로서의 정강자의 상황을 보여주며, 모성과 직업이라는 불가능한 두 가지 과업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21]
《싱가포르의 방》(The Room in Singapore, 1979)은 불안감을 자아내는 정강자의 자화상으로, 주인공은 이국적인 실내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21] 배경의 어수선함과 공포에 질린 표정은 정강자가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 느꼈을 불편함과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21] 정강자는 붉은색 바탕의 그림을 위해 '바틱'(batik)이라는 싱가포르의 염색 기법을 사용했다.[21]
《밤에 피는 꽃》(1988)은 정강자가 밤하늘 아래 붓과 팔레트를 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21] 과외 교사, 어머니, 주부로서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강자는 주로 밤에 그림을 그렸다.[21]
Untitled영어(2001)은 여성의 입술을 묘사한 그림으로, 달리풍의 초현실적인 사막 풍경 속에서 못으로 막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의 조립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그림 왼쪽에는 3명의 누드 여성 인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롤러 블레이드를 신은 옷을 입은 여성이 있다. 말하지 못한 말들과 좌절감이 입을 다문 모습을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입이 열리고 미소 짓는 모습에 많은 물건들이 박혀 있는 작품인 Kiss Me영어와는 대조적이다.
《사하라》(2011)는 정강자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거대한 벽화이다. 전경에는 낙타 대상이 보이고, 대부분의 공간은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초현실적인 모래 언덕으로 채워져 있다. 저 멀리, 태양은 지평선 너머를 내다보는 여자의 눈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지용/정지용한국어의 '내 장례식 초대장. 수술 후 71일(2015)'은 신장암과 싸우던 그녀가 죽음에 대해 숙고한 작품이다.[21] 사망 2년 전에 제작된 이 작품에서 정지용은 자신의 장례식을 묘사했다.[21]
4. 1. 《부흥개혁에 대한 시위》 (1973)
《부흥개혁에 대한 시위》(1973)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집단적이고 주관적인 좌절을 보여주는 그림이다.[5] 어둡고 거칠게 그려진 그림에는 박정희 정권의 압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표현한 붉은색 현수막이 포함되어 있다.[5]4. 2. 《예술 스튜디오》 (1977)
정(鄭)은 「예술 스튜디오」(Art Studio, 1977)에서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등에 아이 하나를 업고 다른 아이 하나는 바닥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예술과 자녀 양육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예술가이자 어머니로서의 정강자의 상황을 보여주며, 모성과 직업이라는 불가능한 두 가지 과업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21]4. 3. 《싱가포르의 방》 (1979)
《싱가포르의 방》(The Room in Singapore, 1979)은 불안감을 자아내는 정강자의 자화상으로, 주인공은 이국적인 실내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21] 배경의 어수선함과 공포에 질린 표정은 정강자가 한국에서 싱가포르로 이주한 후 느꼈을 불편함과 내면의 갈등을 보여준다.[21] 정강자는 붉은색 바탕의 그림을 위해 '바틱'(batik)이라는 싱가포르의 염색 기법을 사용했다.[21]4. 4. 《밤에 피는 꽃》 (1988)
《밤에 피는 꽃》(1988)은 정강자가 밤하늘 아래 붓과 팔레트를 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21] 과외 교사, 어머니, 주부로서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정강자는 주로 밤에 그림을 그렸다.[21]4. 5. 《제목 미상》 (2001)
Untitled영어(2001)은 여성의 입술을 묘사한 그림으로, 달리풍의 초현실적인 사막 풍경 속에서 못으로 막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의 조립 작품과 매우 유사하다. 그림 왼쪽에는 3명의 누드 여성 인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롤러 블레이드를 신은 옷을 입은 여성이 있다. 말하지 못한 말들과 좌절감이 입을 다문 모습을 특징짓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입이 열리고 미소 짓는 모습에 많은 물건들이 박혀 있는 작품인 Kiss Me영어와는 대조적이다.4. 6. 《사하라》 (2011)
《사하라》(2011)는 정강자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거대한 벽화이다. 전경에는 낙타 대상이 보이고, 대부분의 공간은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초현실적인 모래 언덕으로 채워져 있다. 저 멀리, 태양은 지평선 너머를 내다보는 여자의 눈으로 묘사되어 있다.4. 7. 《내 장례식 초대장. 수술 후 71일》 (2015)
정지용/정지용한국어의 '내 장례식 초대장. 수술 후 71일(2015)'은 신장암과 싸우던 그녀가 죽음에 대해 숙고한 작품이다.[21] 사망 2년 전에 제작된 이 작품에서 정지용은 자신의 장례식을 묘사했다.[21]5. 전시
5. 1. 개인전 (선별)
정강자는 아라리오갤러리에서 2023년 '친애하는 꿈, 환상, 그리고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2016년에는 갤러리 H에서 '책 출판 기념 특별 전시 - 정강이아; 디오, 라이브'를 열었고, 2015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관에서 '행복한 벽을 위한 예술가의 죽음' 전시를 진행했다. 2003년에는 종로에서 '큰형 증후군'이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개최했다.정강자는 1979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다.
5. 2. 단체전 (선별)
2016년 부산 비엔날레에서 정강자의 작품은 an/other avant-garde: 중국-일본-한국 전시에 출품되었다.[22] 같은 해, 제10회 남송국제미술제가 성남문화예술센터에서 개최되었다.[22]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해방 70주년 기념 전시 '시민과 함께하는 위대한 여정'에 '격렬한, 뜨거운, 넘실거리는' 작품이 전시되었다.[22]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KIAF에 참여했다.[22] 2008년에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초대 전시를 가졌다.[22]참조
[1]
웹사이트
[부고]1세대 여성 행위예술가 정강자 화백
https://www.donga.co[...]
2023-05-25
[2]
논문
Jung Kang-Ja
http://dx.doi.org/10[...]
Routledge
2023-05-26
[3]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4]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5]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6]
논문
Spanking Confucius: The Feminist Protest Art of Kang-ja Jung
http://dx.doi.org/10[...]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2023-05-26
[7]
논문
Never a Failed Avant-Garde
http://dx.doi.org/10[...]
Routledge
2023-05-26
[8]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9]
간행물
Performance Art of Korea 1960-70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2007
[10]
논문
Historicizing the Avant-Garde Contexts in Post-War Korea: From Experimental Arts to Collective Groups in the 1960s and 1970s
Phaidon
2020
[11]
논문
1970 nyeondae I Geonyongui haengwiyesulgwa momui bokgwon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Lee Kun-yong's performance art in the 1970s]
2020
[12]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13]
서적
AN/other avant-garde: China - japan - korea: Project 1 - busan biennale 2016: Busan Museum of Art
Busan Biennale Organizing Committee
2016
[14]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15]
문서
Murder at Han Riversides
[16]
서적
Korean Art 1900-2020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and Kungnip Hyundai Misulgwan
2022
[17]
논문
A Pioneer of Korean Experimental Art of the 1960s and 1970s
Routledge
2021
[18]
문서
Murder at Han Riversides
[19]
웹사이트
Aspiration For Films > Texts
http://kimkulim.com/[...]
2023-09-02
[20]
논문
Why Performance in Authoritarian Korea?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18
[21]
뉴스
A Closer Look at Jung Kang-Ja, Female Trailblazer in Korean Experimental Art
https://www.koreatim[...]
koreatimes
2023-08-10
[22]
논문
1970 nyeondae I Geonyongui haengwiyesulgwa momui bokgwon [1970년대 이건용의 행위예술과 몸의 복권 Lee Kun-yong's performance art in the 1970s]
2020
[23]
웹인용
[부고]1세대 여성 행위예술가 정강자 화백
https://www.donga.co[...]
2023-05-25
[24]
인용
Jung Kang-Ja
http://dx.doi.org/10[...]
Routledge
2023-05-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