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강원용은 함경남도 출신의 목사이자 사회운동가로,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 유학 후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에서 활동하며, 1972년 유신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사회 문제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으며, 말년에는 참여 정부의 정책과 일부 좌파 운동가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한신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와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교, 뉴 스쿨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에는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94년 세계종교인평화회의 공동의장, 1998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내가 믿는 그리스도》 등이 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 만해상 등을 수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메이지 학원 동문 - 김상돈
김상돈은 일제 강점기 언론인 출신으로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창당 참여, 민의원의원,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으며, 군사 정권 시절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반독재 운동을 전개한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방송위원회 위원장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대한민국의 방송위원회 위원장 - 정희택
정희택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으로 검사, 중앙수사국장 등 요직을 거쳐 제11대 국회의원, 감사원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언론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권위주의 정권과의 협력에 대한 비판도 있다. - 몽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이찬혁 (가수)
이찬혁은 악동뮤지션으로 데뷔하여 성공을 거둔 후 솔로 활동을 시작, 실험적인 음악과 다양한 협업을 통해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며 음악적 성취를 인정받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작사, 작곡가이다. - 몽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설송웅
설송웅은 4.19 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한 시민 대표 중 한 명이자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경호실 경호원이었으며, 용산구청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자 행정가이지만 잦은 당적 변경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역사 강사 설민석의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 강원용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강원용 |
| 로마자 표기 | Gang Won Yong |
| 출생일 | 1917년 7월 3일 |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
| 사망일 | 2006년 8월 17일 |
| 사망지 |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병원 |
| 국적 | 한국 |
| 직업 | 목사 정치가 철학자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저술가 |
| 종교 | 개신교(장로회) |
| 배우자 | 김명주 |
| 자녀 | 강혜자(장녀) 강혜원(차녀) 강대인(막내아들) |
| 아명 | 강원용 |
| 호 | 여해(如海) |
| 웹사이트 | (재)여해와함께 |
| 활동 | |
| 주요 활동 | 기독교 지도자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옹호자 |
| 활동 기간 | 1936년 ~ 2006년 |
| 주요 경력 | 한국기독교협의회 명예회장 통일민주당 고문 |
| 학력 | |
| 학력 | 미국 뉴스쿨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
| 수상 | |
| 수상 | 제17회 니와노 평화상 |
2. 이력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고 1945년 이후에는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이 전개한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53년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유학했다가 1957년에 귀국한 뒤 미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 이후 기독교 단체 활동과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의 김수환 추기경·윤보선 前 대통령·월남 퀘이커 교도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포럼 등을 조직했다.
3. 학력
4. 생애
강원용은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6]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31년 보통학교 재학 시절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조모는 슬퍼하였다고 한다.[7] 그는 농민의 자녀로서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7]
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6] 1935년 소를 판 돈 70JPY을 들고 가출[7],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영문과에서 공부하였다.[8] 이후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9] 1940년 일본 메이지 학원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북한에서 맞았다. 치안유지위원회에서 일제 때 감옥에 갔다 온 애국자라며 그에게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을 맡겼으나, 노동자들의 데모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곧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남아 있으면 죽겠다 싶어 회령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12]
1945년 12월 경동교회를 설립했으며, 김재준 목사를 초빙해 초대목사 추대에 가담하였다.[13] 이어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6년 이후 김규식과의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여운형 암살 이후 1947년 12월 김규식 등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자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14] 좌우합작위원회와 민족자주연맹에서 활동하며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민주주의독립전선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라는 의혹을 받고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14] 전북지방 강연에 갔다가 테러를 당할 뻔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가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 되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댔다.[14]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그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정치 문제에서 한발 물러났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안수를 받았고 1949년 11월 김재준 목사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전향하여 반공노선을 선택하였고[13],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냈다.
1953년 도미(渡美)하였다. 당시 대통령 후보가 되려던 조봉암은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많이 영입했다. 그는 1953년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15]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1954년)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언신학대학(1956년)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산업사회와 종교 등의 주제로 많은 강의와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개최, 주관하였으며[10] 이후 종교 간의 대화, 여성운동, 노동자 계몽운동 등에 나섰다.
1957년 10월 오산 비행장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오산 비행장에는 이명하, 김기철 등 진보당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김기철은 한국독립당에 관여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통일론이 급진적이어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15] 그는 조봉암 측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그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했다. 한번은 이명하의 속임수에 빠져 조봉암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강원용은 "가다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 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16]"라고 회고한다. 그는 조봉암에게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16] 했고, 장내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과 중앙위원이 되었다.[6] 1962년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퇴계로 보훈처회관을 방문, 5.16 군사정변의 2인자였던 박정희를 만나 독재할 생각을 말고 민생을 챙길 것을 충고하였다.[17]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는 강원용에게 계속 들어왔다. 동아대학교의 러시아어문학 교수인 지인이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위험인물로 보고 추적한 뒤, 그 내용을 알려오자 강원용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을 조사해서 미국측 인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18] 5.16 군사정변이후, 동아대학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기를 들고 박정희 주변의 대화를 녹음 녹취록을 작성한 것을 강원용에게 전달하였다.[18] 박정희측이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함경도파를 제거하고, 장도영 일파마저 축출하자 강원용은 그에 대한 의심과 감시를 강화하였다.
1965년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영화제를 주관하였다.[8]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할 때와 베트남 전쟁 파병을 반대할 때는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7년 국무총리로부터 방송윤리 향상 공로로 표창장을 수여받았다.[8]
사상계의 경영난으로 장준하는 그를 찾아와 '사상계를 계속 꾸려갈 수가 없으니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강원용은 돈도 없고 잡지를 만들 생각도 없다며 거절하였다.[19] 강원용은 장준하의 사상계 창간 등의 활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평가하였다.[19]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윤보선, 함석헌, 김수환, 김영삼 등과 더불어 유신에 반대하였다.[20] 1974년 김수환, 함석헌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했고 이어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13] 그러나 박정희가 자신과 장준하를 미워하면서도, 그와 김수환의 설교는 듣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20]
1979년 3월 9일 중앙정보부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졸업생 중 노조활동가가 증가하는 것을 주시하고, 크리스천 아카데미 수강생들을 연행하고 아카데미 간부 6명을 체포하였다. 3월 27일 원장으로 있던 강원용도 중앙정보부로 출두하게 되었다.[21] 강원용은 2004년 월간 신동아 기자 박태균과의 인터뷰에서 직원 6명이 금서(금지된 책)를 읽었는데, 이것을 정부가 확대, 과장해서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풀린 것이라고 회고하였다.[21]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진압 명목으로 등장하자 그는 전두환이 사태를 수습할 것이라고 보았다.[22] 12월 12일 저녁 연세대학교 이기택 교수의 연락을 받았다. 이기택으로부터 국방부 정보과로부터 계속 정보를 듣고 있는데, 12·12 사태가 진압되고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22]
12·12 사태가 터진 12월 12일 오전, 강원용은 김영삼에게 전화를 걸어 12월 13일 아침 남산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 김영삼에게 김대중, 김종필과 함께 계엄을 해제시키고, 그 뒤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가게 하고, 김대중과 손을 잡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강원용의 타협안을 거절하였다.[22]
12월 14일 아침 강원용은 김대중을 방문, 대통령을 김영삼에게 양보를 요구하였다.[22] 박정희가 사상공세를 한 상황에서 대통령 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영삼을 대통령에 앉히고 대신 당권을 쥔 다음 4년 후에 나가라고 권유하였다.[22] 그러나 김대중은 군(軍)이란 세계를 모른다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며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23] 이후 강원용은 계엄령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원인을 민족의 미래보다 개인적인 야심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잘못이라 하며 이를 질타하였다.[23]
1980년 5월 김영삼이 가택연금되자, 강원룡은 김영삼의 집을 찾아가 장남 김은철의 약혼식을 주례해 주었다.[24]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병석에 누워있던 정일형으로부터 김대중을 살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981년 4월 23일 다시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다. 이때 강하게 거절하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김대중 석방과 자신의 국정자문위원직을 맞교환하기로 했다.
1980년 11월 25일, 청와대에서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고 전두환과 1시간 10분 동안 면담하였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새 정부의 첫 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라며 전두환에게 김대중 사면을 건의했다.
정일형과의 약속으로 그는 김대중의 사면을 전두환에게 건의해서 성사시켰다. 1981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모인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82년 WCC 대표로 구성된 소련 방문단원으로 18일간 소련 각지를 순방하고 돌아왔다.[8] 1983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WCC 총회에 참석하였다. 1985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8]
강원용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8년 2월 출범한 제6공화국에서 민주화와 사회 통합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6공화국에서도 종교계와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00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에서 물러났다.[6]
2006년 8월 10일 더위로 서울특별시 일원동 강남삼성의료원에 입원하였고, 8월 11일 오전 병원에서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38][39] 8월 17일 서울특별시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 서울특별시 서울대 병원 영안실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되었고, 발인 후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남한강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6]
4. 1. 생애 초기
강원용은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6]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31년 보통학교 재학 시절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조모는 슬퍼하였다고 한다.[7] 그는 농민의 자녀로서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7]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6] 1935년 소를 판 돈 70JPY을 들고 가출[7],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영문과에서 공부하였다.[8] 이후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9] 1940년 일본 메이지 학원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다.
4. 1. 1. 출생과 유년기
강원용은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6]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931년 보통학교 재학 시절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조모는 슬퍼하였다고 한다.[7] 유교적 가풍이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 가계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농민의 자녀로서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7]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6] 1935년 소를 판 돈 70JPY을 들고 가출[7],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영문과에서 공부하였다.[8]
4. 1. 2. 학창 시절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6]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31년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가 심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조모는 슬퍼했다고 한다.[7] 유교적 가풍이 있는 집안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 가계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농민의 자녀이기도 했던 그는 농민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7]1931년 차호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6] 1935년 소를 판 돈 70JPY을 들고 가출[7],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영문과를 수학하였다.[8]
농촌 계몽 운동에 감화된 그는 이후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9] 1935년 만주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으로 진학, 윤동주, 문익환을 만나 인연을 맺었고, 브 나로드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그 뒤 만주 북간도 은진중학교에 입학, 졸업했다.[10] 은진중학교 2학년 당시 학년 학생부장과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며 동급생들을 데리고 마을 계몽운동을 하였고, 연극부 활동도 즐겨 하였으며 웅변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7] 또한 은진중학교 은사였던 김재준 목사를 통해 개신교(장로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됐다 한다.[9]
1940년 일본 메이지 학원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만주에서 전도사 활동을 했다. 그 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명예문학박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명예철학박사 학위 등을 수여받았다.
4. 2.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북한에서 맞았다. 치안유지위원회에서 일제 때 감옥에 갔다 온 애국자라며 그에게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을 맡겼으나, 노동자들의 데모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곧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남아 있으면 죽겠다 싶어 회령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12]1945년 12월 경동교회를 설립했으며, 김재준 목사를 초빙해 초대목사 추대에 가담하였다.[13] 이어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6년 이후 김규식과의 인연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여운형 암살 이후 1947년 12월 김규식 등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자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14]
좌우합작위원회와 민족자주연맹에서 활동하며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독립전선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라는 의혹을 받고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14] 전북지방 강연에 갔다가 테러를 당할 뻔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가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 되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댔다.[14]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그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정치 문제에서 한발 물러났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안수를 받았고 1949년 11월 김재준 목사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전향하여 반공노선을 선택하였고[13],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냈다.
1953년 도미(渡美)하였다. 당시 대통령 후보가 되려던 조봉암은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많이 영입했다. 그는 1953년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15]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1954년)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언신학대학(1956년)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산업사회와 종교 등의 주제로 많은 강의와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개최, 주관하였으며[10] 이후 종교 간의 대화, 여성운동, 노동자 계몽운동 등에 나섰다.
1957년 10월 오산 비행장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오산 비행장에는 이명하, 김기철 등 진보당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김기철은 한국독립당에 관여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통일론이 급진적이어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15]
그는 조봉암 측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그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했다. 한번은 이명하의 속임수에 빠져 조봉암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강원용은 "가다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 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16]"라고 회고한다.
그는 조봉암에게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16] 했고, 장내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변하였다.
4. 2. 1. 군정기 활동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북한에서 맞았다. 치안유지위원회에서 일제 때 감옥에 갔다 온 애국자라며 그에게 부위원장 겸 선전부장을 맡겼으나, 노동자들의 데모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곧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남아 있으면 죽겠다 싶어 회령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20일 서울에 도착했다.[12]1945년 12월 경동교회를 설립했으며, 김재준 목사를 초빙해 초대목사 추대에 가담하였다.[13] 이어 한신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46년 이후 김규식과의 인연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여운형이 한지근에게 암살된 뒤 김규식 등이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자 민족자주연맹 기획담당 책임자로 참여했다.[14]
좌우합작위원회와 민족자주연맹에서 활동하며 좌우 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누군가에 의해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라는 의혹을 받고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14] 전북지방에 자주 강연하러 갔다가 테러를 당할 뻔 하였는데, 한모 장로에게 이유를 묻자 사람들은 그가 공산당 조직의 중앙위원이 되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댔던 것이다.[14] 한편 그를 전북지방 강연에 초대한 이승만의 사람 김춘호는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14]
4. 2. 2. 정부 수립 이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자 그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정치 문제에서 한발 물러났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안수를 받았고 1949년 11월 김재준(金在俊) 목사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뒤 전향하여 반공노선을 선택하였고[13],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냈다.1953년 도미(渡美)하였다. 당시 대통령 후보가 되려던 조봉암은 선거에 나오면서 그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많이 영입했다. 그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던 1953년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15]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1954년)학위를 받았고, 미국 유니언신학대학(1956년)을 거쳐 19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산업사회와 종교 등의 주제로 많은 강의와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개최, 주관하였으며[10] 이후 종교 간의 대화, 여성운동, 노동자 계몽운동 등에 나섰다.
4. 2. 3. 귀국과 조봉암과의 관계
1957년 10월에 오산 비행장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오산 비행장에는 이명하, 김기철 등 진보당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다. 이 중 김기철은 우익 정당인 한국독립당에 관여했던 인물이지만 그가 쓴 통일론이 좀 급진적이어서 진보당 사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다.[15]그와 개인적으로 친했던 이들이라 비행기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그 중에 전혀 얼굴을 모르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손을 잡더니만 “아이구, 강 동지 오래간만이야” 하는 것이었다.[15] 그가 당황해하니까 마중나온 아내가 “인사 그만하고 얼른 차를 타라”고 하였다.[15] 차 안에서 그는 경찰이 그의 귀국 직전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김명주의 말에 의하면 "며칠 전에 경찰 정보과에서 누군가가 찾아와서 “당신 남편이 귀국할 때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간다고 하더라. 만약 조봉암이 비행장에 나가면 당신 남편은 한국에 와서 아무것도 못한다. 경찰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귀띔을 하고 갔다는 것"이었다.[16] 그의 아내는 조봉암의 집에 찾아가서 제발 남편을 만나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한다.
그때 이미 진보당 인사 주변에 경찰이 쫙 깔려 있었다.[16] 이후 그는 조봉암 측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그는 여러번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가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이명하가 찾아왔다. 이명하와는 인연이 오래되었는데 그들의 부모님들 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16] 이명하는 “오랜만에 귀국했다고 부모님이 당신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시는데, 여기에 앉아서 인사를 받겠냐, 아니면 나랑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리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 내가 인사를 드려야지” 하면서 제가 따라나섰다.[16] 그러나 그의 속임수에 빠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조봉암의 집이었다.
강원용 역시 "그런데 가다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 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16]"라고 회고한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윤길중, 김기철 등이 죽 앉아 있었다. 그래서 같이 밥을 먹는데, 조봉암 씨가 “강 동지가 돌아와 정말 반갑다”고 하였다. 제가 “작년(1956년 대통령선거)에 상당히 잘 했는데, 선생은 아직도 대통령 꿈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내가 이긴 건데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해서 떨어졌다”고 했다.[16] 그에 의하면 조봉암은 자신이 부정선거로 떨어졌다는 사실도 이미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16] 했고, 이내 장내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변하였다.
4. 3. 신앙, 시민사회 활동
강원용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1945년 광복 이후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에서 활동했으며,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에는 기독교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등과 함께 반유신 운동을 이끌었다.[20]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포럼 등을 조직하여 활동했다.4. 3. 1. 5.16 군사 정변 전후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과 중앙위원이 되었다.[6] 1962년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퇴계로 보훈처회관을 방문, 5.16 군사정변의 2인자였던 박정희를 만나 독재할 생각을 말고 민생을 챙길 것을 충고하였다.[17]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는 강원용에게 계속 들어왔다. 동아대학교의 러시아어문학 교수인 지인이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목격하고 위험인물로 보고 추적한 뒤, 그 내용을 알려오자 강원용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을 조사해서 미국측 인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18] 5.16 군사정변이후, 동아대학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기를 들고 박정희 주변의 대화를 녹음 녹취록을 작성한 것을 강원용에게 전달하였다.[18] 박정희측이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함경도파를 제거하고, 장도영 일파마저 축출하자 강원용은 그에 대한 의심과 감시를 강화하였다.
4. 3. 2. 1960년대 활동
1965년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으로 영화제를 주관하였다.[8]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할 때와 베트남 전쟁 파병을 반대할 때는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1967년 국무총리로부터 방송윤리 향상 공로로 표창장을 수여받았다.[8]사상계의 경영난으로 장준하는 그를 찾아와 '사상계를 계속 꾸려갈 수가 없으니 인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강원용은 돈도 없고 잡지를 만들 생각도 없다며 거절하였다.[19] 강원용은 장준하의 사상계 창간 등의 활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평가하였다.[19]
4. 3. 3. 반 유신 활동
1972년 10월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윤보선, 함석헌, 김수환, 김영삼 등과 더불어 유신에 반대하였다.[20] 1974년 김수환, 함석헌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했고 이어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13] 그러나 박정희가 자신과 장준하를 미워하면서도, 그와 김수환의 설교는 듣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20]4. 3. 4.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1979년 3월 9일 중앙정보부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졸업생 중 노조활동가가 증가하는 것을 주시하고, 크리스천 아카데미 수강생들을 연행하고 아카데미 간부 6명을 체포하였다. 또한 아카데미 산업사회 교육과정을 수료한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외 5명이 추가 연행되었고, 중앙정보부는 압수수색영장 없이 학원과 집안의 모든 자료를 압수해갔다. 3월 27일 원장으로 있던 강원용도 중앙정보부로 출두하게 되었다.[21]강원용은 2004년 월간 신동아 기자 박태균과의 인터뷰에서 직원 6명이 금서(금지된 책)를 읽었는데, 이것을 정부가 확대, 과장해서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풀린 것이라고 회고하였다.[21]
4. 3. 5. 유신 붕괴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암살당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진압 명목으로 등장하자 그는 전두환이 사태를 수습할 것이라고 보았다.[22] 12월 12일 저녁 연세대학교 이기택 교수의 연락을 받았다. 이기택으로부터 국방부 정보과로부터 계속 정보를 듣고 있는데, 12·12 사태가 진압되고 정승화를 체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아니라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22]12·12 사태가 터진 12월 12일 오전, 강원용은 김영삼에게 전화를 걸어 12월 13일 아침 남산에 있는 식당에서 만나 김영삼에게 김대중, 김종필과 함께 계엄을 해제시키고, 그 뒤 김종필은 김종필대로 가게 하고, 김대중과 손을 잡도록 권고하였다. 손을 잡는 조건으로 대통령은 김영삼이 먼저 하고 그 대신 당총재는 김대중에게 주며, 4년 후에 가서 경선을 하자고 조건을 제시하였다.[22] 그러나 김영삼은 우리는 민주주의 신봉자니까 대통령후보든 당 총재든 전당대회에서 민주적으로 결정해야지, 우리끼리 약속을 하고 말고 하는 게 아니라며 강원용의 타협안을 거절하였다. 강원용은 당에서는 절대 다수가 김영삼 세력이었으니까 조건을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김영삼을 비난하였다.[22]
12월 14일 아침 강원용은 김대중을 방문, 대통령을 김영삼에게 양보를 요구하였다.[22] 박정희가 사상공세를 한 상황에서 대통령 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김영삼을 대통령에 앉히고 대신 당권을 쥔 다음 4년 후에 나가라고 권유하였다.[22] 그러나 김대중은 군(軍)이란 세계를 모른다며, 군은 통수권자에게 절대 복종한다. 박정희가 있을 때는 박정희가 통수권자니까 거기에 충성했지만 이제 박정희는 죽었다. 장군들이 그 다음엔 내가 대통령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충성하고 들어올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23] 이후 강원용은 계엄령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원인을 민족의 미래보다 개인적인 야심을 앞세운 정치인들의 잘못이라 하며 이를 질타하였다.[23]
4. 3. 6. 제5공화국 시절
1980년 5월 김영삼이 가택연금되자, 강원룡은 김영삼의 집을 찾아가 장남 김은철의 약혼식을 주례해 주었다.[24]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병석에 누워있던 정일형으로부터 김대중을 살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981년 4월 23일 다시 국정자문회의 의원에 위촉되었다. 이때 강하게 거절하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어 김대중 석방과 자신의 국정자문위원직을 맞교환하기로 했다."국정자문위원이 되는 것이 나로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만약 두 가지 전제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그 제의를 수락하겠습니다. 우선 전 대통령과 한 시간 동안 단독 면담을 하고 싶고 그리고 이 일을 신문에는 절대로 보도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1980년 11월 25일, 청와대에서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고 전두환과 1시간 10분 동안 면담하였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새 정부의 첫 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라며 전두환에게 김대중 사면을 건의했다.
정일형과의 약속으로 그는 김대중의 사면을 전두환에게 건의해서 성사시켰다. 1981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모인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82년 WCC 대표로 구성된 소련 방문단원으로 18일간 소련 각지를 순방하고 돌아왔다.[8] 1983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WCC 총회에 참석하였다. 1985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8]
4. 3. 7. 제6공화국 시절
강원용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1988년 2월 출범한 제6공화국에서 민주화와 사회 통합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제6공화국에서도 종교계와 시민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4. 2000년대 이후
2000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에서 물러났다.[6]4. 5. 비판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투신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윤보선과 같은 반공주의자, 보수주의자로서 의식에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으며, 일제 강점기부터의 활동 경력에서도 실제로 위험을 부담한 일은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19]특히 말년에 급격히 보수화되었다는 지적도 있으나, 보수적인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목회자로서 불가피한 한계였다는 옹호도 있다.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재야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중 장준하에 대한 재평가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조명해야 된다며 객관성이 떨어지는 점을 지적하였다.[19] 장준하에 대한 평가로 존경받아 마땅하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동하였다고 선을 긋기도 하였다.[19]
4. 6. 사후
2006년 8월 10일 더위로 서울특별시 일원동 강남삼성의료원에 입원하였고, 8월 11일 오전 병원에서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38][39] 8월 17일 12시 5분 서울특별시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 서울특별시 서울대 병원 영안실 1호실에 빈소가 마련되었고, 발인 후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남한강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6]5. 저서
| 제목 | 출판 연도 |
|---|---|
| 내가 믿는 그리스도 | |
| 새시대의 건설자 | 1949년 |
| 폐허에의 호소 | |
| 자유케 하는 진리 | |
| 인생과 종교 | |
| 빈들에서 | 1993년 |
| 믿는 나 믿음 없는 나 | 1998년 |
| 역사의 언덕에서 | 2003년 |
| 강원용과의 대화 | |
| 여해 강원용 전집 |
6. 기타 경력
일제강점기 후반 일본 유학, 1945년 김규식,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 참여,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활동.[1] 1953년 미국 경유 캐나다 유학 후 1957년 귀국, 미국 관련 활동.[1] 기독교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 활동,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 김수환 추기경, 윤보선, 함석헌 등과 반유신 운동 주도.[1]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포럼 등 조직.[1]
7. 상훈
8. 가족 관계
姜元龍|강원용중국어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부인 | 김명주 | 1918년 ~ 2011년 4월 16일, 기독교 장로회 여신도회 회장 역임 |
| 장녀 | 강혜자 | |
| 차녀 | 강혜원 | |
| 장남 | 강대인 |
9. 인물평 및 관계
강원용은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탁월한 정략가라고 평가했고,[40] 조봉암에 대해서는 5.10 선거 참여, 이승만 정부 농림부 장관 역임 등의 이력을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40] 미국이 조봉암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이승만과 조봉암 사이를 저울질했다는 증언도 했다.[41]
박정희에 대해서는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했지만, 나중에 변질되었다고 평가했다.[42] 그러나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보고 좌파로 의심하기도 했다.[18] 장준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활동했다고 평가했다. 사상계 등의 활동이나 야당 활동이 반(反) 박정희 노선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고 보았다.[19] 노무현 정부와 386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소통 부족과 비판 언론 탄압을 비판했다.[36]
9. 1. 이승만
이승만에 대해서는 탁월한 정략가라는 평을 남겼다.[40]9. 2. 조봉암
그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한 조봉암의 제의를 거절했다.[16]그가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있는데 이명하가 찾아왔다. 이명하와는 인연이 오래되었는데 그들의 부모님들끼리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16] 이명하는 “오랜만에 귀국했다고 부모님이 당신한테 인사를 하고 싶다시는데, 여기에 앉아서 인사를 받겠냐, 아니면 나랑 같이 가서 인사를 드리겠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 내가 인사를 드려야지” 하면서 따라나섰다.[16] 그러나 그의 속임수에 빠져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조봉암의 집이었다.
강원용은 "그런데 가다 보니까 길이 좀 달라요. 대문도 다르고. 알고 보니 조봉암 씨 집이었어요. 자기 부모를 만나게 한다면서 조봉암한테 데려간 겁니다.[16]"라고 회고했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니 윤길중, 김기철 등이 앉아 있었다. 같이 밥을 먹는데, 조봉암은 “강 동지가 돌아와 정말 반갑다”고 하였다. 강원용은 “작년(1956년 대통령선거)에 상당히 잘했는데, 선생은 아직도 대통령 꿈을 갖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내가 이긴 건데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해서 떨어졌다”고 했다.[16] 조봉암은 자신이 부정선거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이미 인식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인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목도한 매카시즘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당신이 대통령 되기는 틀렸다”고[16] 했고, 장내의 분위기는 썰렁하게 변하였다.
강원용은 조봉암을 싫어하게 된 원인으로 조봉암이 5·10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공산당에서 탈당하더니 5·10 선거에도 참여하여 당선된 것과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하는 등의 이력을 보고 너무 왔다 갔다 한다 싶었다며 비판하였다.[40] 한편 미국이 조봉암을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를 주며 이승만과 조봉암 사이를 저울질했다는 증언도 내놓았다.[41]
9. 3. 박정희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과 중앙위원이 되었다.[6] 196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퇴계로 보훈처회관을 방문, 5.16 군사정변의 2인자였던 박정희를 만나 독재할 생각을 말고 민생을 챙길 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17]
강원용은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보기도 하였다. 수시로 그에게 박정희가 과거 좌파 전력의 인사들과 접촉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동아대학교의 러시아어문학 교수인 지인이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목격, 위험인물로 보고 추적한 뒤, 그 내용을 알려오자 강원용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을 조사해서 미국 측 인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18] 박정희 등이 5.16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동아대학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기를 들고 박정희 주변의 대화를 녹음, 녹취록을 작성한 것을 전달받았다.[18] 박정희 측이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함경도파를 제거하고, 장도영 일파마저 축출하자 그에 대한 의심과 감시를 강화하였다.
강원용은 박정희에 대해서는 경제를 살린 점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나중에 뜻이 변질된 것으로 평가하였다.[42] 그러나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경계하였고 좌파로 의심하기도 하였다.[18]
그는 박정희가 극좌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며 독재도 할 것으로 전망했다. 1961년의 5.16 군사 정변 이후 그는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보고 주시하였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미국 측에 알리기도 했다. 196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퇴계로 보훈처회관에서 박정희를 만나 독재할 생각을 말고 민생을 챙길 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17] 그러나 박정희는 장도영 등을 숙청하면서 권력에 다가섰고, 그가 극좌파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를 추적하게 된다.
동아대학교의 러시아어문학 교수로 있던 어느 지인에게서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목격, 위험인물로 보고 추적한 뒤, 그 내용을 알려왔다. 이에 강원용은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활동을 조사해서 미국 측 인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18] 박정희 등이 5.16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동아대학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기를 들고 박정희 주변의 대화를 녹음, 녹취록을 작성한 것을 전달받았다.[18] 이후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 인물이자 극좌파로 규정하고 윤보선을 지지하였다.
9. 4. 장준하

장준하는 잡지 사상계의 경영난으로 강원용을 찾아와 '사상계를 계속 꾸려갈 수가 없으니 인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강원용은 돈도 없고 잡지를 만들 생각도 없다며 거절하였다.[19] 강원용은 장준하의 사상계 창간 등의 활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평가하였다.[19]
강원용은 장준하에 대해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사상계 등의 활동은 정치적인 목적이며, 장준하의 야당 활동은 반(反) 박정희 노선으로 정치적 목적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19]
9. 5. 윤보선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하면서 윤보선과 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은 유진산을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유진산)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43], 윤보선은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노선 문제로 윤보선과 유진산은 사이가 틀어졌고 강원용은 후에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이 인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72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그는 윤보선 등과 더불어 시월유신에 반대하였다.
1971년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다. 그러자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며 반대했다.[44]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44]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9. 6. 권태양
강원용은 여러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탁월한 정략가라고 평가했다.[40] 조봉암에 대해서는 5.10 선거 참여, 이승만 정부 농림부 장관 역임 등의 이력을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40] 미국이 조봉암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이승만과 조봉암 사이를 저울질했다는 증언도 했다.[41]박정희에 대해서는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은 높이 평가했지만, 나중에 변질되었다고 평가했다.[42] 그러나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보고 좌파로 의심하기도 했다.[18] 장준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활동했다고 평가했다. 사상계 등의 활동이나 야당 활동이 반(反) 박정희 노선을 위한 정치적 목적이었다고 보았다.[19] 노무현 정부와 386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소통 부족과 비판 언론 탄압을 비판했다.[36]
9. 7. 노무현
노무현 정권 출범 후 재야 인사들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장준하에 대한 평가에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19] 장준하는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활동했다고 평가했다.[19] 2005년 7월 15일 역사와 미래를 위한 범국민자문위원회 위촉직 위원으로 선임되었다.[29]노무현 정권과 386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의사소통이 부족하고 비판 언론을 탄압한다고 비판했다.[36]
참조
[1]
웹사이트
Tribute to Rev. Dr Kang Won Yong
http://www.oikoumene[...]
World Council of Churches
2009-05-18
[2]
웹사이트
S. Korean church leader Kang Won-yong dies.
http://www.accessmyl[...]
Asia Pulse Pty Ltd
2009-05-18
[3]
뉴스
ASIANET: Dr. Kang Won Yong receives the 17th Niwano Peace Prize
http://www.ryt9.com/[...]
2000-05-12
[4]
웹사이트
Dr Kang Won Yong (letter from General Secretary Prawate Khid-arn)
http://www.ncca.org.[...]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Australia
2009-05-18
[5]
웹사이트
Why Dr. Kang Won Yong Was Selected for the Niwano Peace Prize
http://www.npf.or.jp[...]
Niwano Peace Foundation
2018-06-28
[6]
뉴스
개신교 원로 강원용 목사 타계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6-08-17
[7]
웹사이트
여해강원용기념사업회
http://www.yeohae.or[...]
[8]
웹사이트
강원용 이력 세부사항
http://www.yeohae.or[...]
[9]
뉴스
개신교 원로 강원용 목사 별세
http://koreaweeklyfl[...]
Korea Weekly
[10]
웹사이트
네이트 인명사전
http://100.nate.com/[...]
[11]
웹사이트
여해강원용기념사업회
http://www.yeohae.or[...]
[12]
뉴스
강원용목사 “지도자들 신탁안 라디오만 듣고 흥분”
http://news.donga.co[...]
동아닷컴
2004-01-18
[13]
뉴스
개신교 원로 강원용 목사 별세
http://koreaweeklyfl[...]
korea-weekly
2006-08-20
[14]
웹사이트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15]
웹사이트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5면)
http://shindonga.don[...]
[16]
웹사이트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6면)
http://shindonga.don[...]
[17]
잡지
'박정희 축출'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1페이지)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2
[18]
잡지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http://www.donga.com[...]
[19]
잡지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3
[20]
잡지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2월호(533호) 4면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2
[21]
잡지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2월호(533호) (5면)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4-02
[22]
웹인용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2009-04-08
[2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donga.com[...]
2012-02-23
[24]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4:미완성의 민주화
한길사
[25]
웹사이트
여해강원용기념사업회
http://www.yeohae.or[...]
[26]
웹인용
경동교회 강원용 소개
http://www.kdchurch.[...]
2009-04-08
[27]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4:미완성의 민주화
한길사
[28]
웹사이트
여해강원용기념사업회
http://www.yeohae.or[...]
[29]
뉴스
‘역사·미래… 범국민자문위’출범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0]
뉴스
('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 가나)강원용 목사에게 듣는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5-10-20
[31]
뉴스
강원용 목사 "무차별적 친일역사 청산 안된다"
http://www.christian[...]
크리스찬투데이
2005-11-21
[32]
뉴스
강원용 목사 “무차별적 친일역사 청산 안된다”
http://www.christian[...]
크리스찬투데이
2005-11-21
[33]
뉴스
"잘못한 것은 회개하지만 친일명단 성급했다"
http://www.christian[...]
크리스찬투데이
2008-05-03
[34]
웹인용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3월호(534호) 4면
http://www.donga.com[...]
2009-04-08
[35]
웹인용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 신동아 2004년 3월호(534호) 5면
http://www.donga.com[...]
2009-04-08
[36]
뉴스
강원룡 "참여정부는 참여가 없다"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02-24
[37]
뉴스
강원룡 "참여정부는 참여가 없다"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02-24
[38]
뉴스
개신교 원로 강원용 목사 타계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006-08-17
[39]
뉴스
강원용 목사 위독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6-08-16
[40]
간행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41]
간행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6면)
http://www.donga.com[...]
신동아
[42]
간행물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2월호(533호)
http://www.donga.com[...]
신동아
[43]
간행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1
http://shindonga.don[...]
신동아
[44]
간행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3
http://shindonga.don[...]
신동아
[45]
서적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