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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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는 1812년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에 따라 창설된 핀란드 대공국 군대의 일부로, 핀란드 자원병과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1829년 러시아 황실 근위대로 승격되어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폴란드 11월 봉기(1831년), 헝가리 혁명(1849년), 크림 전쟁(1854~1856년),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년) 등 주요 전쟁에 참전했다. 1901년 징병제 폐지와 핀란드 자치 탄압으로 인해 1905년 해산되었으며, 핀란드 독립 이후에는 핀란드 백위대와 근위 보병 연대로 그 역사가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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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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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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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명칭 |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 |
원어 명칭 (핀란드어) | Henkikaartin 3. Suomen Tarkk’ampujapataljoona (헨키카르틴 3. 수오멘 타르카암푸야파탈요오나) |
원어 명칭 (스웨덴어) | Livgardets 3:e finska skarpskyttebataljon (리브가르데트 3:에 핀스카 스카르프스퀴테바탈욘) |
원어 명칭 (러시아어) | Лейб-гвардии 3-й стрелковый Финский батальон (레이브-그바르디 3-이 스트렐코비 핀스키 바탈욘) |
별칭 (핀란드어) | Suomen kaarti (수오멘 카르티), Kaartin kasarmi (카르틴 카사르미) |
활동 기간 | 1829년–1905년 |
국가 | 러시아 제국 |
병과 | 경보병 |
종류 | 경보병 |
규모 | 400–600명 |
군가 | Suomi-marssi (수오미 행진곡) |
참전 전투 |
2. 창설 배경 및 초기 역사 (1812년 ~ 1829년)
1827년 3월 황제의 칙령에 의해 핀란드 군대는 6개의 소총 대대로 재편성되었다. 헬싱키 대대는 핀란드 훈련 소총 대대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규모는 400명에서 500명으로 증가했다. 이 변경 이후 2개월 이내에 다른 핀란드 부대의 징집이 중단되었고, 결국 1830년에 해산되었다. 이후 헬싱키 대대는 1812년에 편성된 군대의 유일한 잔재가 되었다.[8] 1870년대 말까지 대대는 자원 입대한 핀란드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핀란드 하층 계급 출신이었다.[9]
1829년 7월, 핀란드 훈련 대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서쪽에 위치한 크라스노예 셀로에 있는 황실 근위대 훈련 캠프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를 검열한 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는 이 부대를 청년 근위대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음 날의 일일 명령에서 부대의 이름은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로 지정되었으며, 황실 근위대의 제2 보병 사단, 제4 여단에 배속되었다. 안데르스 에드바르드 램지가 대대장으로 계속 근무했다. 비록 이 부대가 이제 황실 근위대의 일부가 되어 감찰관의 관할 아래에 있었지만, 핀란드에 주둔하는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핀란드 총독의 지휘도 받았다. 핀란드 소총 대대의 비용은 여전히 핀란드 원로원의 계정에서 지불되었다. 새로운 이름과 계급과 함께, 이 부대는 새로운 제복과 기를 받았으며, 1829년 9월 17일에 헌납되어 부대에 기 수여되었다.[10]
부대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병력도 600명으로 증강되었다. 동시에 신병은 키가 168cm 이상인 사람만 모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헬싱키 훈련 대대는 대대장과 부관, 단 두 명의 정규 장교만 있었으며, 다른 장교들은 육군의 다른 부대에서 임시로 파견되었다. 근위대 부대로 승격되면서 이 부대는 17명의 정규 장교를 받았다. 게다가 이 부대는 장교 공석이 생겨서 장교로 승진할 때까지 자신의 생활비를 지불할 수 있는 한 군 복무를 원하는 자격을 갖춘 핀란드 귀족들을 부사관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 결과, 이 부대는 장교가 되려는 젊은 귀족들에게 경력의 지름길이 되었다.[11] 1829년, 부대의 지휘 언어는 이전의 스웨덴어를 대체하여 러시아어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일일 명령과 서신은 부대의 전체 작전 역사 동안 여전히 스웨덴어로 작성되었다. 또한, 부대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병행 일기가 핀란드어로 작성되었다.[12]
러시아에서 근위대는 러시아 황제인 군주의 근위대를 지칭했다. 핀란드 소총 대대는 육군 및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황제를 보호하는 임무를 포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공적인 임무에도 참여했다. 러시아 근위 연대는 정규 보병에 비해 훨씬 더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누렸고, 근위대 부대는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황실 가족 구성원은 근위대 부대의 명예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근위대에서 일반 정규 연대로 파견된 장교는 자동으로 다음 계급으로 진급했다. 핀란드에서 근위대 대대는 러시아 제국의 방어에 핀란드의 역할을 대표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특별한 감사를 받았다.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의 첫 전투 배치는 1831년 11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었다. 핀란드에서는 대대의 동원에 대해 언론과 대대 내부에서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반응이 있었다. 핀란드 군대를 국외로 파병하거나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핀란드인들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대대는 1월 12일 746명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출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도보로 행군했으며, 3월에는 폴란드까지 진군했다. 대대는 4월 초에 다른 제국군과 함께 첫 실전을 치렀고, 핀란드 군인들은 곧 뛰어난 사격수로서 명성을 얻었다. 대대의 임무는 러시아 주력이 남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부그강과 나레프강 사이 지역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5월에는 폴란드의 효과적인 반격으로 인해 비아위스토크까지 후퇴해야 했다. 그 후, 비스와 강을 건너 바르샤바를 서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서쪽에서 먼 길을 행군해 온 오스트로엥카에서 러시아군에 합류했다. 1831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근위 소총병들은 바르샤바를 점령한 제국군에 합류했다.[13]
대대는 1831–32년 겨울을 라트비아의 비르자이에서 보낸 후 헬싱키로 귀환했다. 1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전투에서 10명만 잃었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질병과 전염병으로 인해 399명이나 사망했다. 11월 봉기 이후, 1831년 12월 18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작전에서 기여한 공로를 기려 대대 휘장을 둘러싸고 "1831년 폴란드 봉기 진압을 기리며"라는 문구가 새겨진 성 게오르기 근위 깃발을 대대에 수여했다. 이 깃발은 해산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2. 1. 핀란드 대공국 군대 창설 (1812년)
핀란드 대공국 군대는 1812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이 날이 대대의 기념일이 되었다.[3] 황제의 칙령에 따라 핀란드는 각각 600명으로 구성된 2개 대대로 이루어진 3개의 소총 부대를 편성해야 했으며, 총 3,600명에 달했다.[3] 핀란드 총독 구스타프 모리츠 아르펠트와 핀란드의 많은 다른 관리들은 핀란드에 주둔한 러시아군 외에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응할 수 있는 국내 군사력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3] 이 부대는 자원 입대자뿐만 아니라 떠돌이들을 징집하여 구성되었다.[3] 이 부대는 핀란드 영토 내에서만, 그리고 발트해 해안 방어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핀란드 국경 밖의 분쟁에는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3] 부대 자금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하려 했지만, 모금된 기금은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3] 결국 러시아 국가가 무기 및 기타 군사 장비의 자본 비용을 부담하고, 핀란드 원로원이 유지 관리 비용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다.[3] 병사들은 6년의 군 복무 기간 동안 60 러시아 루블과 매년 1.5배럴의 호밀을 지급받았다.[3]세 연대 중 가장 먼저 작전을 시작한 부대는 제3연대로, 비보르크 연대로도 알려져 있다.[4] 이 부대의 첫 임무는 1813년 3월 31일부터 1814년 8월 3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대부분이 나폴레옹과의 전투로 서유럽과 중유럽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4] 1813년 여름까지 다른 두 연대도 편성되었는데, 첫 번째 연대는 투르쿠와 헤메린나 대대로, 두 번째 연대는 헤이놀라와 쿠오피오 대대로 구성되었다.[5] 그러나 몇 천 명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핀란드의 방어에 큰 의미가 없었다.[5] 이 군대는 포병, 기병 및 기술 부서가 부족했다.[5] 또한, 다른 연대의 병력은 1년에 한 번 4주간의 군사 훈련을 위해서만 소집되었고, 장교들은 이 훈련 전에 6주 동안 회의를 가졌기 때문에 비보르크 부대만 지속적으로 복무했다.[5] 두 개의 연대는 정규 보병 연대로 변경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소총 연대로 지정되었다.[6]
2. 2. 초기 부대 편성 및 활동 (1813년 ~ 1827년)
핀란드 대공국 군대는 1812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이 날이 대대의 기념일이 되었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핀란드는 각각 600명으로 구성된 2개 대대로 이루어진 3개의 소총 부대를 편성해야 했으며, 총 3,600명에 달했다.[3] 핀란드 총독 구스타프 모리츠 아르펠트를 비롯한 핀란드의 많은 관리들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핀란드에 주둔한 러시아군 외에 국내 군사력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3] 이 부대는 자원 입대자와 떠돌이들을 징집하여 구성되었으며, 핀란드 영토 내에서만, 그리고 발트해 해안 방어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핀란드 국경 밖의 분쟁에는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3] 부대 자금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조달하려 했지만, 모금된 기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러시아 국가가 무기 및 기타 군사 장비의 자본 비용을 부담하고, 핀란드 원로원이 유지 관리 비용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다. 병사들은 6년의 군 복무 기간 동안 60 러시아 루블과 매년 1.5배럴의 호밀을 지급받았다.[3]이 세 연대 중 가장 먼저 작전을 시작한 부대는 제3연대로, 비보르크 연대로도 알려졌다. 이 부대의 첫 임무는 1813년 3월 31일부터 1814년 8월 31일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러시아군의 대부분이 나폴레옹과의 전투로 서유럽과 중유럽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4] 1813년 여름까지 다른 두 연대도 편성되었는데, 첫 번째 연대는 투르쿠와 헤메린나 대대로, 두 번째 연대는 헤이놀라와 쿠오피오 대대로 구성되었다.[5] 그러나 몇 천 명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핀란드의 방어에 큰 의미가 없었는데, 포병, 기병, 기술 부서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연대의 병력은 1년에 한 번 4주간의 군사 훈련을 위해서만 소집되었고, 장교들은 이 훈련 전에 6주 동안 회의를 가졌기 때문에 비보르크 부대만 지속적으로 복무했다.[5] 두 개의 연대는 정규 보병 연대로 변경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소총 연대로 지정되었다.[6]
1817년 가을, 비보르크 연대는 두 개의 대대로 분할되었고, 그 중 하나는 바사로 이동했다. 이 새로운 대대의 일부는 274명으로 구성된 특별 지휘부로 분리되어 참모 대위 닐스 질링의 지휘하에 헤메린나에 남겨졌다. 이것이 핀란드 훈련 대대의 기초가 되었고, 1818년 여름에 작전을 시작했다. 대대는 헬싱키에 배정되어 헬싱키 대대로 명명되었다. 첫 번째 지휘관은 중령 헤르만 바른헬름에게 배정되었다. 당시 헬싱키에는 적절한 기존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대대는 칼 루드비히 엥겔이 설계한 카르틴 카사르미 건물이 1822년에 완공되어 훈련 대대가 1824년 12월 23일에 입주할 때까지 헤메린나에서 훈련을 받았다.[7] 대대 명칭은 1819년에 헬싱키 훈련 대대로, 1824년에 핀란드 훈련 대대로 변경되었다.[6]
핀란드 군대는 1827년 3월 황제의 칙령에 의해 6개의 소총 대대로 재편성되었다. 헬싱키 대대는 핀란드 훈련 소총 대대로 이름이 변경되었고, 규모는 400명에서 500명으로 증가했다. 이 변경 이후 2개월 이내에 다른 핀란드 부대의 징집이 중단되었고, 결국 1830년에 해산되었다. 이후 헬싱키 대대는 1812년에 편성된 군대의 유일한 잔재가 되었다.[8]
2. 3. 헬싱키 훈련 대대 (1818년 ~ 1829년)
1812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의 칙령에 의해 핀란드 대공국 군대가 창설되었다. 핀란드는 각각 600명으로 구성된 2개 대대로 이루어진 3개의 소총 부대를 편성해야 했으며, 총 3,600명에 달했다.[3] 이 부대는 핀란드 영토 내에서만, 그리고 발트해 해안 방어를 위해서만 사용하고, 핀란드 국경 밖의 분쟁에는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3]1817년 가을, 비보르크 연대는 두 개의 대대로 분할되었고, 그 중 하나는 바사로 이동했다. 이 새로운 대대의 일부는 274명으로 구성된 특별 지휘부로 분리되어 참모 대위 닐스 질링의 지휘하에 헤메린나에 남겨졌다. 이것이 핀란드 훈련 대대의 기초가 되었고, 1818년 여름에 작전을 시작했다. 대대는 헬싱키에 배정되어 헬싱키 대대로 명명되었다. 첫 번째 지휘관은 중령 헤르만 바른헬름에게 배정되었다. 당시 헬싱키에는 적절한 기존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대대는 칼 루드비히 엥겔이 설계한 카르틴 카사르미 건물이 1822년에 완공되어 훈련 대대가 1824년 12월 23일에 입주할 때까지 헤메린나에서 훈련을 받았다.[7] 대대 명칭은 1819년에 헬싱키 훈련 대대로, 1824년에 핀란드 훈련 대대로 변경되었다.[6]
3. 러시아 제국 근위대 편입 (1829년 ~ 1878년)
황실 근위대의 일원으로서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는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누렸다. 황실 가족 구성원이 명예 사령관으로 복무했고, 근위대에서 일반 연대로 파견된 장교는 자동 진급했다. 핀란드에서 이 대대는 러시아 제국 방어에 핀란드의 역할을 대표했기 때문에 대중의 특별한 감사를 받았다.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는 여러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참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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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봉기 (1831년) | 핀란드 대대는 1831년 1월 746명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출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폴란드까지 진군했다. 4월 초 첫 실전을 치렀고, 뛰어난 사격수로 명성을 얻었다. 부크 강과 나레프 강 사이 지역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내는 임무를 수행했고, 바르샤바 점령에 참여했다. 전투에서 10명이 사망하고, 질병으로 399명이 사망했다. 1831년 12월 18일, 니콜라이 1세는 성 게오르기 근위 깃발을 수여했다.[13] |
헝가리 혁명 (1849년) | 핀란드 대대는 1849년 5월 헬싱키를 출발하여 리가를 거쳐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헝가리군 패배로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질로 고통받았다.[23] |
크림 전쟁 (1854~1856년) | 핀란드 대대는 1854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여 궁궐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라트비아, 백러시아 등지로 이동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콜레라 유행으로 많은 병사가 사망했다. 1856년 9월 헬싱키로 귀환했다.[24] |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1878년) | 핀란드 대대는 1877년 8월 동원되어 루마니아를 거쳐 불가리아에 도착했다. 요제프 블라디미로비치 구르코 중장 휘하에서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에 참여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소피아 점령, 필리포폴리스 전투에 참여했다. 장티푸스 유행으로 많은 병사가 사망했다. 1878년 5월 헬싱키로 귀환했다.[26] |
평화 시기에는 크라스노예 셀로에서 열리는 군사 훈련에 참여했다. 니콜라이 1세는 핀란드 대대의 도착을 간절히 기다렸으며, 훈련 후에는 병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병사들에게 청어와 술을 제공하는 전통을 폐지했다.[19]
3. 1.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로의 승격 (1829년)
1829년 7월, 핀란드 훈련 대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서쪽에 위치한 크라스노예 셀로에 있는 황실 근위대 훈련 캠프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를 검열한 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는 이 부대를 청년 근위대로 승격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음 날 부대의 이름은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로 지정되었으며, 황실 근위대의 제2 보병 사단, 제4 여단에 배속되었다. 안데르스 에드바르드 램지는 대대장으로 계속 근무했고, 핀란드 소총 대대의 비용은 여전히 핀란드 원로원의 계정에서 지불되었다.[10] 새로운 이름과 계급과 함께, 이 부대는 새로운 제복과 기를 받았으며, 1829년 9월 17일에 헌납되어 부대에 기 수여되었다.[10]부대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병력도 600명으로 증강되었다. 동시에, 신병은 키가 168cm 이상인 사람만 모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11] 근위대 부대로 승격되면서 이 부대는 17명의 정규 장교를 받았다. 게다가, 장교 공석이 생겨서 장교로 승진할 때까지 자신의 생활비를 지불할 수 있는 한 군 복무를 원하는 자격을 갖춘 핀란드 귀족들을 부사관으로 받아들여야 했다.[11] 1829년, 부대의 지휘 언어는 이전의 스웨덴어를 대체하여 러시아어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일일 명령과 서신은 부대의 전체 작전 역사 동안 여전히 스웨덴어로 작성되었다.[12]
러시아에서 근위대는 러시아 황제인 군주의 근위대를 지칭했다. 핀란드 소총 대대는 육군 및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황제를 보호하는 임무를 포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공적인 임무에도 참여했다. 러시아 근위 연대는 정규 보병에 비해 훨씬 더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누렸으며, 근위대 부대는 특별한 특권을 누렸다.
3. 2. 지위 및 특권
1829년 7월, 핀란드 훈련 대대는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청년 근위대로 승격되었고, 부대 명칭은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로 변경되었다. 이 부대는 황실 근위대의 제2 보병 사단, 제4 여단에 배속되었으며, 안데르스 에드바르드 램지가 대대장으로 계속 근무했다.[10] 핀란드 소총 대대는 핀란드 총독의 지휘를 받았으며, 비용은 핀란드 원로원에서 지불했다. 새로운 지위와 함께 새로운 제복과 기를 받았으며, 1829년 9월 17일에 기 수여를 받았다.[10]부대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병력은 600명으로 늘었고, 신병은 키 168cm 이상인 사람만 모집하도록 규정되었다.[11] 헬싱키 훈련 대대는 대대장과 부관 단 두 명의 정규 장교만 있었지만, 근위대 부대로 승격되면서 17명의 정규 장교를 받았다. 또한, 자격을 갖춘 핀란드 귀족들을 부사관으로 받아들여, 장교가 되려는 젊은 귀족들에게 경력의 지름길이 되었다.[11] 1829년, 부대의 지휘 언어는 스웨덴어에서 러시아어로 변경되었지만, 일일 명령과 서신은 계속 스웨덴어로 작성되었다.[12]
러시아에서 근위대는 황제의 근위대를 지칭했으며, 핀란드 소총 대대는 황제 보호 임무를 포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공적인 임무에 참여했다. 러시아 근위 연대는 정규 보병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고, 특별한 특권을 받았다. 황실 가족 구성원은 근위대 부대의 명예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근위대에서 일반 정규 연대로 파견된 장교는 자동으로 다음 계급으로 진급했다. 핀란드에서 근위대 대대는 러시아 제국 방어에 핀란드의 역할을 대표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특별한 감사를 받았다.
3. 3. 주요 참전 (1831년 ~ 1878년)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는 1831년 11월 봉기, 1849년 헝가리 혁명,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 등 여러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평화 시기에는 크라스노예 셀로에서 열리는 군사 훈련에 참여했다. 황제가 직접 훈련을 감독했으며, 최대 8만 명의 병력이 참여했다. 니콜라이 1세는 핀란드 대대의 도착을 간절히 기다렸으며, 훈련 후에는 병사들에게 상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병사들에게 청어와 술을 제공하는 전통을 폐지했다.[19]
3. 3. 1. 폴란드 11월 봉기 (1831년)
제3친위 핀란드 소총대대는 1831년 11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핀란드에서는 대대의 동원에 대해 언론과 대대 내부에서 긍정적이고 자랑스러운 반응이 있었다. 핀란드 군대를 국외로 파병하거나 폴란드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은 핀란드인들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13] 대대는 1월 12일 746명의 병력으로 핀란드를 출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도보로 행군했으며, 3월에는 폴란드까지 진군했다. 4월 초에 다른 제국군과 함께 첫 실전을 치렀고, 핀란드 군인들은 곧 뛰어난 사격수로서 명성을 얻었다.[13] 대대의 임무는 러시아 주력이 남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부크 강과 나레프 강 사이 지역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5월에는 폴란드의 효과적인 반격으로 인해 비아위스토크까지 후퇴해야 했다. 그 후, 비스와 강을 건너 바르샤바를 서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서쪽에서 먼 길을 행군해 온 오스트로웽카에서 러시아군에 합류했다. 1831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 근위 소총병들은 바르샤바를 점령한 제국군에 합류했다.[13]대대는 1831–32년 겨울을 라트비아의 비르자이에서 보낸 후 헬싱키로 귀환했다. 전투에서 1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10명만 잃었으나, 최전선에서 질병과 전염병으로 인해 399명이나 사망했다. 11월 봉기 이후, 1831년 12월 18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작전에서 기여한 공로를 기려 대대 휘장을 둘러싸고 "1831년 폴란드 봉기 진압을 기리며"라는 문구가 새겨진 성 게오르기 근위 깃발을 대대에 수여했다. 이 깃발은 해산될 때까지 사용되었다.[13]
3. 3. 2. 헝가리 혁명 (1849년)
헝가리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니콜라이 1세가 12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을 때, 핀란드 친위 소총 대대가 다시 파견되었다. 1849년 5월 31일 헬싱키를 출발하여 라트비아 뒤나뮌데(현재 다우가브그리바)로 항해했다. 6월과 7월을 리가에서 보낸 후, 8월 8일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헝가리군이 패배하고 작전이 종료되기 전까지 헝가리에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핀란드 대대는 10월 17일에 귀국했다. 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행 중에 이질로 고통받았다.[23]3. 3. 3. 크림 전쟁 (1854년 ~ 18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이후, 크림 전쟁 동안 핀란드 친위 소총 대대는 다시 파견되었다. 전쟁이 핀란드와 헬싱키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지만, 대대는 1854년 3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하여 궁궐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24]
이후 라트비아, 라키슈키, 빌코미르 등지로 이동했다. 크림반도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서부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배치했다. 핀란드 대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콜레라 유행으로 많은 병사가 사망했다. 1855년 봄과 여름 동안 부대는 백러시아에서 이동했지만, 콜레라 유행은 계속되었다.[24]
1855년 9월 세바스토폴 함락 후, 러시아군은 연합군이 발트해로 이동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해 핀란드 대대를 귀환시켰다. 그러나 유행병 때문에 헬싱키에 들어가지 못하고 카렐 지협에 주둔했다. 그동안 알렉산드르 2세가 평화에 동의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핀란드 대대는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황제의 대관식에 참여한 후, 1856년 9월 29일 헬싱키로 돌아왔다. 전투는 없었지만, 대대는 654명의 병력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었고, 실제 숫자는 더 많을 수 있다.[25]
3. 3. 4.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대대의 가장 유명한 활동은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불가리아에서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다. 1877년 가을, 러시아의 공세가 플레벤 요새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면서 멈추자, 대대는 다른 여러 부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대대원 중 일부는 전쟁 초기에 이미 알렉산드르 2세의 친위대에 복무했다. 핀란드 대대는 1877년 8월 3일에 동원되었으며, 병력은 200명 증가했다. 9월 6일 헬싱키를 떠날 당시 대대에는 사수 719명, 부사관 72명, 군악대 54명, 장교 21명, 그리고 몇 명의 군무원이 있었다. 대대의 전쟁 참가는 다시 한번 국가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여겨졌으며, 헬싱키를 떠날 때 수도의 상류층이 참여한 대규모 환송회가 열렸다. 대대는 철도로 루마니아 프라테스티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다뉴브강을 건너 짐니체아에서 10월 3일 도보로 행진하여 불가리아에 도착했다.[26]
근위 소총 여단은 알렉산드르 엘리스(Alexander Ellis) 소장 휘하에 있었고, 핀란드 근위 소총 대대는 전쟁 기간 동안 요제프 블라디미로비치 구르코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구르코의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종종 막대한 사상자를 초래했다. 10월에 구르코의 임무는 소피아로 가는 고속도로에 있는 터키군 진지를 점령하여 서쪽에서 플레벤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고르니 두브니크의 요새였다. 1877년 10월 24일 승리한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는 수십 년 만에 핀란드 대대가 참여한 첫 번째 전투였으며, 가장 유명한 전투가 되었다. 핀란드군은 요새의 주요 요새에 대한 공격을 수행하는 부대에 속했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장교 8명, 부사관 5명, 군악대 5명을 포함하여 22명이 사망하고 95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 중 2명은 전투 직후 사망했다. 총 3,300명의 러시아군이 작전에서 사망했다.[27][28]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 이후, 대대 지휘관 게오르크 에드바르드 람세이는 세묘노프 연대 지휘를 맡게 되어 빅토르 나폴레옹 프로코페 대령으로 교체되었다. 프로코페는 1878년 1월까지 지휘권을 인수할 수 없었으므로, 율리우스 순드만 중령이 그동안 대대를 지휘했다. 11월, 구르코의 군대는 소피아로 진격했다. 12월 플레벤을 점령한 후, 구르코는 방어가 강화된 아라바코나크 고개를 피하기 위해 겨울 한가운데에 병력을 발칸 산맥을 넘어 우회하기로 결정했다. 자원 부족으로 인해 산맥을 건너는 것은 어려워졌다. 당시 대대는 드미트리 필로소포프 소장 휘하의 부대에 배속되었지만, 산을 건너고 나서는 엘리스의 근위 여단으로 다시 이동했다. 대대는 1월 5일 소피아의 평화로운 점령과 1월 15일에서 17일 사이에 벌어진 필리포폴리스 침공에 참여했다. 이것이 대대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필리포폴리스 전투는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보다 규모가 컸지만, 핀란드 근위대는 단 4명의 부상자만 냈다.
아드리아노플로 가는 길에 대대는 하르만리 학살의 비극을 목격했지만,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핀란드 대대는 산 스테파노까지 행진하여 콘스탄티노플 바로 앞에 위치했으며, 산 스테파노 조약이 발효되었다. 이곳에서 대대는 귀국할 때까지 이어진 장티푸스 유행병에 직면했다. 대대는 1878년 5월 9일 축제 분위기 속에서 헬싱키로 돌아왔다. 핀란드 대대는 투르크 전쟁에서 전투 중 24명이 사망했고, 나중에 부상자 6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유행병으로 총 15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12명은 장교였다.[29]
전쟁 기념비는 근위대 막사 부지에 세워졌으며,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이는 1881년 10월 24일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 기념일에 봉헌되었다.[30] 기념비에는 나중에 유행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27명의 이름이 있다.[31] 러시아-터키 전쟁은 불가리아 독립 전쟁이었기 때문에, 참전한 러시아군은 불가리아에서 특별한 감사를 받았다. 불가리아 교과서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쟁 노력이 러시아, 루마니아, 그리고 핀란드 군인들을 포함했다고 인정해 왔다. 이런 식으로 대대의 기억은 불가리아에서 보존되어 왔다.[32][33] 고르니 두브니크의 전장에는 현재 라브로프 공원이 있으며, 이곳에는 전쟁 기념비와 함께 핀란드 군인 기념비와 공동 묘지가 있다. 핀란드 국방군과 정치 기관은 여전히 고르니 두브니크 전투의 불가리아 기념 행사에 참여한다.[28] 핀란드에서는 1956년 우르호 케코넨 대통령이 러시아-터키 전쟁 기념비를 최초의 핀란드 유엔 평화 유지군 부대가 수에즈에 파병되는 것을 검열하는 장소로 사용했으며, 핀란드-불가리아 공동 기념식이 매년 두 번 기념비에서 열린다.[34][35]
4. 징병제 도입과 핀란드 자치 문제 (1878년 ~ 1905년)
1878년 징병제 도입 이후, 핀란드 군대는 러시아 제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9세기 말부터 핀란드 군대는 정규 러시아군과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1882년에는 러시아식으로 제복이 개혁되었고, 총독 니콜라이 보브리코프는 핀란드 군대의 조직, 핀란드 장교들의 러시아어 능력 부족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38]
핀란드 근위대는 알렉산드르 3세가 두 번 참관한 라펜란타에서 열리는 3년 주기 훈련에도 참여했다.[37]
4. 1. 징병제 도입 (1878년)
1878년 핀란드 의회에서 징병제를 시행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1881년에 첫 징집병들이 입대했다. 1880년 핀란드 근위대의 전 사령관 게오르그 에드바르드 램지 장군이 대공국의 군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새로 창설된 징집병 대대 사령관의 절반은 핀란드 근위대 장교였다. 부사관 훈련 대대의 모든 장교는 근위대 출신이었다. 핀란드 근위대 소총 대대(근위대)도 징병군에 포함되었고, 이전의 자원병 모집은 종료되었다.[36]초기에는 근위대 대대를 남부 우시마 주에서만 모집할 계획이었지만, 부대 전력 유지를 위해 대공국 전역에서 징집병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크라스노예 셀로에서 열리는 연례 훈련이 다른 부대보다 더 까다로운 복무를 요구했기 때문에 자원자가 충분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근위대는 징병군 중 핀란드 밖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될 수 있는 유일한 부대였다.[36]
4. 2. 러시아의 핀란드 자치 탄압과 대대의 해산 (1901년 ~ 1905년)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는 1901년 7월 새로운 징병법을 제정하여 핀란드 "징병군"을 폐지했다. 이 법에 따라 핀란드인들은 정규 러시아 부대에서 복무해야 했다. 이는 지역 자치에 대한 러시아 제국 정부의 탄압 정책의 일환이었다.[1]핀란드 용기병 연대는 니콜라이 보브리코프 총독이 지휘관 오스카 테오도르 쇼만 대령을 부당하게 대우한 것에 항의하여 장교단이 집단 사임하면서 해산되었다.[1] 이후, 근위 소총대대는 유일하게 남은 핀란드 군사 부대가 되었다.
1901년부터 1902년 사이, 소총대대 장교 8명이 징병법에 항의하여 사임했지만, 다른 장교들로 충원되어 대대는 유지되었다. "징병 파업 운동"은 핀란드 징집병들의 러시아 부대 복무에 반대하는 대규모 운동을 조직했다. 핀란드 군 부대인 소총대대는 러시아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1]
보브리코프 총독 암살 이후, 핀란드에 대한 짜르 정책은 완화되었고, 핀란드 근위대의 미래는 불투명해졌다. 핀란드 여론은 대대가 자원 부대가 되기를 원했지만, 러시아 군 지도부는 거부했다. 1905년, 러시아는 핀란드의 국방 기여를 세금 형태로 전환하기로 결정했고, 핀란드 군사 부대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는 1905년 11월 21일에 해산되었다.[1]

1905년 혁명이 러시아에서 확산되면서 이반 미하일로비치 오볼렌스키 총독은 핀란드인들의 분리주의 반란을 우려했다. 1905년 4월 9일,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는 헬싱키를 떠나 크라스노예 셀로 훈련에 마지막으로 참가했다. 10일 후, 핀란드 군사 지구 해체가 발표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8월 7일에 대대 해산을 명령했다.[1]
오볼렌스키는 부대가 크라스노예 셀로 훈련 중 해산되기를 원했지만, 대대 지휘관 니콜라이 멕몬탄은 부대가 존경받는 방식으로 해산될 수 있도록 설득했다. 대대는 8월 9일 크라스노예 셀로에서 마지막 열병식을 거행하고 8월 28일 핀란드로 돌아와 해산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병들은 8월 31일과 9월 2일 사이에 퇴역했다. 부대의 최종 해체는 1906년 3월 14일에 완료되었고, 멕몬탄 대령은 핀란드 근위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일일 명령을 내렸다.[1]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 해산 후 핀란드는 1812년 이후 처음으로 국내 군대가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는 핀란드의 독립까지 이어졌다.[1]
5. 유산
1910년, 모든 근위 소총대대는 연대 규모로 증강되었다. 당시 1799년에 근위대 주둔 대대로 창설되어 예비 보병 연대로 운용되었던 러시아 부대는 폐지된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의 지위를 이어받아 "폐하의 근위 제3 소총 연대"라는 명칭을 받았다. 그러나 이 두 부대는 계보가 달랐으므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제3 근위 소총 연대는 1918년에 해산되었다.
핀란드 독립 이후, 핀란드 백위대(Suomen Valkoinen Kaartifi)라는 명칭의 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연대는 핀란드 근위대의 옛 막사에 주둔했으며, 그 계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 연대는 겨울 전쟁 이후 1940년 12월에 해산되었다. 이후 헬싱키에서의 경비 및 의장 임무는 야전군 소속의 헬싱키 주둔 대대(Helsingin varuskuntapataljoonafi)가 수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부대는 여러 번 명칭이 변경되었고, 1957년에 '카르틴 파탈료나'('근위대대')라는 명칭을 받았다. 동시에 이 부대는 핀란드 근위대의 휘장, 기념일, 행진곡을 포함한 계보와 전통을 물려받았다. 1996년, 근위대대는 근위 보병 연대(Guard Jaeger Regiment)의 일부가 되었지만, 이전 명칭을 유지했다. 현재, 근위대대는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의 후계 부대로 간주하며, 그 역사를 1812년부터 계산한다.[42][2]
핀란드 근위 소총대대의 원래 막사에는 현재 핀란드 국방부와 핀란드 국방참모부가 있다.[43]
5. 1. 불가리아와의 관계
주어진 소스에는 불가리아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은 작성할 수 없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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