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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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좌우합작운동은 해방 후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남북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 수립을 목표로 중도파가 추진한 운동이다.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온건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하고 좌우합작 7원칙을 제정했으나, 미군정의 지원 철회, 좌우익 갈등 심화, 여운형 암살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좌우합작운동은 1947년 12월 공식 해산되었으며, 이후 남북 협상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민족 통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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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반도 신탁 통치안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민족 운동인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초기 좌우 합작에서 좌익의 찬탁 전환 후 우익 중심으로 전개되며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야기했다.
좌우합작운동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운동 명칭 | 좌우합작운동 |
로마자 표기 | Jwauhaptjak Undong |
한자 표기 | 左右合作運動 |
배경 | |
주요 원인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대립 격화, 분단 위기 심화 |
목표 | 통일된 민족 국가 수립,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정부 구성 |
주도 세력 | 여운형, 김규식 등 중도 좌파 및 중도 우파 정치인 |
주요 내용 | |
합작 7원칙 | 토지개혁 실시 (미 군정안 기반)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 처리 민주주의적 임시 정부 수립 정치적 자유 보장 군정에서 자치 정부로의 이양 전국적 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 반대파와의 협력 |
핵심 주장 | 좌우익의 극단적인 대립을 지양하고 민족 통합을 우선 |
추진 과정 | 미국의 지원과 함께 여운형과 김규식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나, 좌우익 양측의 강경파의 반발과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실패 |
주요 인물 | |
주도 인물 | 여운형 김규식 |
관련 인물 | 허헌 조소앙 원세훈 김창숙 |
결과 및 영향 | |
결과 | 미군정의 소극적 태도와 좌우익의 반발로 인해 실패 여운형 암살로 운동 동력 상실 |
역사적 의의 | 분단 시대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정부 수립 시도 민족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받음 |
평가 | |
긍정적 평가 | 분단 극복을 위한 노력 좌우익의 대립을 해소하고 민족 통합을 이루고자 한 시도 |
부정적 평가 | 이상적인 목표에 비해 현실적인 문제 해결 능력 부족 좌우익의 극단적인 대립을 극복하지 못함 |
기타 | |
관련 사건 | 모스크바 삼상 회의 |
관련 단체 | 민족자주연맹 민족통일총본부 |
참고 자료 | 김세중의 《좌우합작운동 연구》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
2. 배경
해방 이후 한국은 이념에 따라 여러 정치 세력으로 나뉘었다.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가 논의되었고, 1946년 3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신탁통치 하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협의 대상을 두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면서 5월에 결렬되었다.[1]
당시 남한의 각 정당과 정치 단체들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했고, 미군정은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1] 이러한 교착 상태에서 김규식과 여운형은 좌우 양측의 온건 세력이 협력하여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미군정 또한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 친미적인 정권 수립을 기대하며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2. 1. 정치 계파
정치 계파 | 구분 | 신탁통치 입장 | 정부 수립 방향 |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 계열) | 우익 | 반대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
한민당 (김성수 계열) | 우익 | 반대 | 남한 단독 정부 수립 |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계열) | 우익 | 반대 | 남북 통일 정부 수립 |
조선 공산당 (박헌영 계열) | 좌익 | 찬성 (모스크바 3상회의 의결 내용) | 남북 통일 정부 수립 |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세력 | 중도 | 신중[15] |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한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 |
2. 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좌우익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좌익세력의 박헌영은 신탁통치 찬성 입장을 발표[11]하였고, 우익진영은 김구·이승만 주도로 1945년 12월부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12월 27일 김규식은 처음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했지만, 신탁통치 전문을 읽어본 후 불가피성을 인정하였다.[12] 안재홍 역시 신탁통치 반대에서 수용으로 입장을 바꾸었다.한민당 내에서는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다가, 1945년 12월 29일 경교장에 참석한 뒤, 다음날 새벽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되었다. 1946년 1월 8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4개 정당 지도자와 임정세력들이 모여 이 문제에 합의했는데, 핵심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데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 문제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해결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 '4당 코뮤니케'는 해방 정국에서 분단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좌우의 주요 정당이 유일하게 합의한 사항이라는 점, 그리고 3상회의 결정에 대해 좌우가 적절하게 합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합의는 중경 임시정부 세력들과 한민당 보수파들의 반발로 하루도 못 가 무산되었다.[13] 이후 신탁통치 찬반 논란 속에서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못했다.[14]
2. 3. 제1차 미소공위 결렬과 정읍 발언
1946년 3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를 포함할지를 두고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면서 5월에 결렬되었다.[1]구분 | 미국 측 입장 | 소련 측 입장 |
---|---|---|
참여 대상>신탁통치 반대 세력 포함 | 신탁통치 반대 세력 제외 |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각 정당과 정치 단체들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했고, 미군정은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1]
구분 | 입장 |
---|---|
이승만 계 (우파, 한국민주당) | 신탁통치 반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 |
김구 계 (우파,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 | 신탁통치 반대, 남북 통일 정부 수립 | |
좌익 계 (조선공산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 신탁통치 찬성, 남북 통일 정부 수립 | |
중간파 (여운형, 김규식 등)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의견 유보, 좌우 협력에 의한 남북 통일 정부 수립 |
1946년 6월,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좌우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1]
3. 전개와 목표
1946년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중도파 세력들은 좌우 대립이 계속되면 결국 남북이 분단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1946년 7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하여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했다.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이념을 넘어선 중도적 사상의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중도 우익과 중도 좌익 계열 인사들로 구성되었다.중도 우익 중도 좌익
3. 1. 좌우합작 7원칙
1946년 7월에 수립된 좌우합작위원회는 좌파 세력이 가져온 5원칙과 우파 세력이 가져온 8원칙을 바탕으로 서로 절충하고 논의하여, 3개월 후인 1946년 10월에 '''좌우합작 7원칙'''을 합의, 제정했다. 좌우합작 7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
좌우합작 7원칙은 극도로 분열되던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좌우익 세력이 한 걸음 양보해 얻은 소중한 결실이었기에, 사상과 이념을 넘어선 것에 큰 의의를 둔다.
당시 좌우합작 7원칙 내용 중 '제3조 토지개혁'과 '제4조 친일파 청산'이 가장 주요한 내용이었는데, 이 원칙에 대해 일부 세력은 강하게 반발하여 좌우합작운동을 비난하기도 했다.[17] 한국민주당은 토지 개혁 방법(유상 몰수, 무상 분배)에서 무상 분배가 재정 파탄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한편 조선공산당은 토지 개혁 방법에서 유상 몰수가 지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 입법 기구의 결정이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좌우합작 7원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이 좌우합작에 간접적으로 지원했는데, 그 이유는 미군정이 주선한 우익 계열만의 정치 개편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군정은 새로운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중도파 정치인사인 여운형과 김규식 지지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러한 미군정의 개입과 간접적 지원에 탄력을 받아 1946년 12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미군정의 과도 입법기구를 말한다.)이 구성되어 제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1946년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좌우 세력을 결집시키는 좌우합작이 전면에 급부상하게 된다.
4. 당시 좌우익 세력의 반응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은 공식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등 반대가 있어,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는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관망하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독립당 내부에서 조소앙은 '신탁통치안에 반탁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좌우합작에 비판적이었으며, 신익희는 반대했다. 한국독립당이 좌우합작에 소극적 입장을 보이자, 당시 친일파 처리문제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입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18] 이승만 역시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으며, 김성수를 비롯한 동아일보 계열의 한민당도 좌우합작운동은 한민당의 몰락을 의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1946년 5월, 미군정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조선공산당 탄압을 본격화하자, 조선공산당은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 등으로 맞대응하면서 미군정과 정면충돌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남로당과 한민당 등 좌우익 세력들은 좌우합작운동에 반대, 불참하였다.
5. 당시 여론의 반응
해방정국 군정기 시기 김규식과 여운형이 주창한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은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19]
1946년 8월 미군정이 8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정치 형태는 대중정치(대의정치) 85%, 계급독재 3%였으며, 체제는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서중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기회주의자는 극좌와 극우에 많았”으며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조소앙 등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고 분석했다.[19]
6. 좌우합작위원회의 결속과 좌절
1947년 이 무렵 미국에서는 소련과의 협력 분위기가 깨지고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미 국무부 내 진보적 관리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한 정책은 반공 노선으로 급선회했고, 미군정기 조선의 상황에도 영향을 미쳐 중도파 정치 세력은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다.[20]
이런 상황에서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공위 개최 이전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우익 진영 정당 및 단체들은 미소공위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익 진영 내부에서 한민당 일부 세력은 미소공위에 무조건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다수의 당 중진들이 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1]
한편, 중간 진영인 좌우합작위원회는 5월 23일 김규식 명의로 '좌우합작 7원칙'에 명시된 바와 같이, 우리의 최대 목표인 공위가 재개되었으므로 "최단 시일 안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을 성취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좌익과 중간 진영은 물론, 대부분의 우익 진영도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공위 참가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신탁통치 문제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 후 민족 총의로 반대해야 한다'는 조건부 입장 하에 미소공위 참가를 결정했다.[21] 좌우합작위원회는 미소공위의 성공적 추진을 통해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중간파 세력을 더욱 광범위하게 결집했다.[22]
당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등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좌우합작운동을 옹호했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심화되자, 미군정은 1947년 3월 좌우합작운동 지원 약속을 철회하고 우익 세력을 옹호하게 되었다. 미국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지원은 단체 결성 이후 사실상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은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지향하며 한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중도파 인사들은 극우 및 극좌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신변의 위협과 테러를 당했다. 7월 19일에는 좌우합작운동의 구심점이자 중도 좌파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던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어갔다. 1947년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면서, 미국은 결국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했다. 1947년 12월 좌우합작위원회는 공식 해체되어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었고,[23] 한반도는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안이 확정되기에 이르렀다.[24]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했지만, 그 취지는 김규식 등을 통해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다.
7. 결론 및 역사적 의의
좌우합작운동은 남북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는 중도파의 노력이었으나, 미소 냉전 심화, 좌우 대립 격화, 여운형 암살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실패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좌우합작운동을 민족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높이 평가하며, 특히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 인사들의 헌신을 강조한다. 반면, 국민의힘을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좌우합작운동을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 시도로 평가절하하며,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 노선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좌우합작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으로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민족 통합과 평화 통일을 위한 노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교훈으로 남아있다.
참조
[1]
웹사이트
송진우 (宋鎭禹)
https://encykorea.ak[...]
2023-07-24
[2]
서적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3]
뉴스
몽양의 죽음으로 좌절된 좌우합작
http://www.ohmynews.[...]
[4]
서적
여운형 평전
[5]
웹사이트
좌우합작하느니 시골서 닭키우겠다
http://www.newdaily.[...]
[6]
간행물
1946년 7월 6일자 현대일보 사설 내용 발췌
현대일보
[7]
뉴스
해방정국 좌우합작 지지 많았다
http://news.naver.co[...]
[8]
서적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9]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10]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11]
기타
[12]
기타
[13]
서적
지배자의 국가/민중의 나라
[14]
뉴스
몽양의 죽음으로 좌절된 좌우합작
http://www.ohmynews.[...]
[15]
기타
[16]
서적
여운형 평전
[17]
웹사이트
좌우합작하느니 시골서 닭키우겠다
http://www.newdaily.[...]
[18]
간행물
1946년 7월 6일자 현대일보 사설 내용 발췌
현대일보
[19]
뉴스
“해방정국 좌우합작 지지 많았다”
https://news.naver.c[...]
[20]
서적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21]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2]
서적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3]
기타
[24]
뉴스
김규식 여운형과 좌우합작 주도하기도
http://www.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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