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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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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법상은 남북조 시대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무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병서를 즐겨 읽고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며, 남진과 북주 사이에서 활약했다. 북주에 투항하여 순주 자사를 지냈고, 남진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수나라 건국 후에는 파주 자사, 형주 총관 등을 역임하며 남진 정벌에 참여했다. 영남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으나, 614년 고구려 원정 중 사망했다. 사후 무위대장군이 증직되고 시호는 희(僖)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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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법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자 표기周法尙
자(字)덕매(德邁)
시호희(僖)
출생556년
출생지여남군 안성현
사망614년 (59세)
사망 원인병사
국적남진북주수나라
직업장군
작위산음현후 → 귀의현공 → 초군공
칭호우광록대부(산관)
경력
초기 경력중병참군 → 겸 복파장군 → 정의장군 겸 산기상시 겸 제창군사
지방관 경력순주자사 → 파주자사 → 형주총관 겸 4주제군사 → 황주총관 → 악주자사 → 영주총관 → 계주총관 → 검교노주사 → 운주자사 → 정양태수
말년 경력좌무위장군 → 겸 돈황태수 → 회령태수
사후 증직무위대장군
군사 활동
주요 참전남진의 멸망, 여수전쟁

2. 생애

주법상(周法尚)은 주경(周炅)의 아들로, 젊어서부터 대담하고 병법을 좋아했다. 18세에 시흥왕(始興王) 중병참군이 되었고, 태건 8년(576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감정주사(監定州事)가 되어 아버지의 병사를 인계받았다. 여러 전공으로 사지절(使持節)·정의장군(貞毅將軍)·산기상시(散騎常侍)를 받았고, 행제창군사(行齊昌郡事)를 맡았으며, 산음현후(山陰縣侯)에 봉해졌다. 형 주법승(周法僧)을 대신하여 정주 자사가 되었다.

579년[3],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사왕(長沙王) 진숙견(陳叔堅)이 주법상이 반란을 꾀한다고 선제에게 참소하여 주법상을 잡아들이려 하였다. 이에 주법상은 부하들과 함께 북주로 피하였다. 우문윤은 주법상을 환대하여 순주자사(順州, 지금의 후베이성 쑤이현) 등을 제수하였다.

580년(대상 2년), 양견이 승상에 오르자 울지형(尉遲迥) 등이 군사적으로 반발하였다.[4] 사마소난(司馬消難)도 이에 호응하여 단순(段珣)으로 하여금 순주를 취하게 했다. 주법상은 외부의 지원 없이 20일을 어렵게 버텼으나 끝내 을 포기하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581년, 양견이 황제에 올라 수나라를 세우자[4] 주법상은 파주자사(巴州)가 되었다. 주국(柱國) 왕의를 따라 진나라 군을 격퇴하여 형주총관(―總管) 등으로 전임되었고, 초군공(譙郡公)으로 개봉되었다. 586년[1], 황주 총관으로 전임되어 문제의 밀명을 받아 강남 경략을 준비하고 정세를 조사했다. 588년[5], 진왕(秦王) 양준 밑의 행군총관으로서 수군(水軍) 3만 명을 거느리고 번구(樊口)로 나아갔다.

589년[4], 악주자사를 거쳐 영주총관(永州)으로 발령받아 영남을 안집하였다. 590년, 계주총관 겸 영남안무대사로 옮겼다.

597년[4], 입조하여 숙위하던 중 계주에서 이광사(李光仕)가 거병하였다. 주법상은 영남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하여 이광사를 궤멸시키고 참살하였다.

인수 연간에는 수주(遂州, 지금의 쓰촨성 쑤이닝시)의 요인(獠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이후 수주(巂州)가 오만(烏蠻)에게 피해를 입자, 정벌에 나섰다.

612년 제2차 여수전쟁에서 주법상은 24개 군 중 좌(左) 제10군[9] 조선도군을 담당했고, 내호아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평양을 직공할 때 그 부총관으로서 수행하였다.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로 들어가 평양이 60리 남은 지점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자 내호아가 승세를 몰아 바로 쳐들어가려 하였다.[11] 이에 주법상은 육군을 기다려 협공해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내호아는 듣지 않았다.

613년 제3차 여수전쟁에서도 내호아의 부장으로서 동래에 닿았는데 양현감이 난을 일으켜 동도가 위험에 빠졌다.

614년 제4차 여수전쟁 때 서해로 나서다가 군중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59세였다.[1]

2. 1. 남진에서의 활약과 북주로의 망명

579년[3]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사왕(長沙王) 진숙견(陳叔堅)이 주법상이 반란을 꾀한다고 선제에게 참소하여 주법상을 잡아들이려 하였다. 이에 주법상은 부하들과 함께 북주로 피하였다. 우문윤은 주법상을 환대하여 순주자사(順州―, 지금의 후베이성 쑤이현), 귀의현공(歸義縣公), 식읍 1,000호를 제수하고, 5필, 기녀 5명, 비단 500단에 금대(金帶)까지 주었다. 남진에서는 번맹(樊猛)을 보내 주법상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주법상은 함께 귀순한 부하 중 한 명을 거짓으로 투항시켰다. 번맹은 주법상의 부하들이 남진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줄 착각하여 장강을 타고 빠르게 진군하였다. 주법상은 번맹이 두려운 척하며 웅크리고는 몰래 빠른 들과 정예병들을 숨겼다. 이윽고 양군이 만나자 주법상은 뭍에 올라 수 를 도망갔다. 번맹이 함정인 것도 모르고 배에서 내려 추격했다. 고촌(古村) 북쪽에 이르자 복병이 뛰쳐나와 번맹을 공격했다. 번맹이 급히 자신의 선단으로 내달았지만, 그 배들 역시 숨어있던 주법상의 배들이 이미 취한 후였다. 이로써 번맹을 대파하고 8,00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580년(대상 2년) 양견이 승상에 오르자 울지형(尉遲迥) 등이 군사적으로 반발하였다.[4] 사마소난(司馬消難)도 이에 호응하여 단순(段珣)으로 하여금 순주를 취하게 했다. 주법상은 외부의 지원 없이 20일을 어렵게 버텼으나 끝내 을 포기하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사마소난은 주법상의 가족을 잡아 남진으로 넘어갔다.

2. 2. 수나라 건국과 남진 정벌

581년 양견이 황제에 올라 수나라를 세우자[4] 주법상은 파주자사(巴州―)가 되었다. 주국(柱國) 왕의를 따라 진나라 군을 격퇴하여 형주총관(―總管), 도독사주제군사(都督四州諸軍事)로 전임되었고, 초군공(譙郡公)으로 개봉되었다. 586년[1] 황주 총관으로 전임되어 문제의 밀명을 받아 강남의 경략을 준비하고 정세를 조사했다. 588년[5] 진왕(秦王) 양준 밑의 행군총관으로서 수군(水軍) 3만 명을 거느리고 번구(樊口)로 나아가 성주자사(城州―) 웅문초(熊門超)를 격파하였다.

589년[4] 악주자사를 거쳐 영주총관(永州―)으로 발령받아 영남을 안집하였다. 진의 잔당인 계주자사(桂州―, 지금의 광시 좡족 자치구 구이린시) 전계경(錢季卿), 남강내사(南康―, 지금의 장시성 간저우시) 유선(柳璿), 서형주자사(西衡州―, 지금의 광둥성 칭위안시) 등고(鄧暠), 양산태수(陽山―) 모상(毛爽) 등은 항복시키고, 정주자사 여자곽(呂子廓)은 무력으로 소탕하였다. 590년 계주총관 겸 영남안무대사로 옮겼다.

2. 3. 영남 평정과 반란 토벌

597년[4] 입조하여 숙위하던 중 계주에서 이광사(李光仕)가 거병하였다. 주법상은 영남의 군사를, 왕세적(王世積)은 영북의 군사를 모아 윤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왕세적의 군사들이 풍토병에 걸려 형주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주법상은 홀로 진군하였고 이광사는 백석동(白石洞)에서 농성하였다. 주법상은 반군의 가족들을 붙잡아 항복하는 자에게는 처자를 돌려주었고, 열흘 만에 수천 명이 항복했다. 이후 수풀 속에 복병을 숨겨 저항하는 이광사를 궤멸시키고 참살하였다. 이 공로로 노비 150명, 황금 150, 150을 상으로 받았다.

인수 연간에는 수주(遂州, 지금의 쓰촨성 쑤이닝시)의 요인(獠人)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이후 수주(巂州)가 오만(烏蠻)에게 피해를 입자, 정벌에 나섰으나 오만이 속으로 숨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주법상은 가짜 관직을 내려주고 20리 정도 돌아가는 척하여 수령들이 방심하고 내려와 잔치를 벌이게 했다. 그 틈을 타 보병기병 수천 명을 뽑아 들이쳐 수천 명을 사로잡고 남녀 만여 명을 포획하였다. 이 공로로 촉마(蜀馬) 20필 등 많은 상과 검교노주사(檢校潞州事)를 받았다.

2. 4. 수 양제 시기와 고구려 원정

612년 제2차 여수전쟁에서 주법상은 24개 군 중 좌(左) 제10군[9] 조선도군을 담당했고, 내호아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평양을 직공할 때 그 부총관으로서 수행하였다.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로 들어가 평양이 60리 남은 지점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자 내호아가 승세를 몰아 바로 쳐들어가려 하였다.[11] 이에 주법상은 육군을 기다려 협공해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내호아는 듣지 않고 4만 명을 골라 성으로 진격하였다.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가[10] 그런 내호아를 성 안으로 유인하여 섬멸하였다. 내호아와 수천 명만이 간신히 빠져나왔고 배에 남아있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여 이들을 맞아들였다. 이후 별다른 기동을 하지 못하고 포구에 주둔하다가 살수에서의 패배를 듣고는 철수하였다.[11]

613년 제3차 여수전쟁에서도 내호아의 부장으로서 동래에 닿았는데 양현감이 난을 일으켜 동도가 위험에 빠졌다. 아직 양제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회군해서는 안된다고 진언했지만 내호아는 군을 돌려 동도로 향했다.[12] 다행히 중간에 칙서가 내려왔고 우문술 등과 난을 진압한 공으로 우광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제군(齊郡) 장백산을 근거지로 세력이 커진 농민 반란군 왕박(王薄), 맹양(孟讓)과도 싸웠다. 614년 제4차 여수전쟁 때 서해로 나서다가 군중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59세였다.[1] 무위대장군을 증직하고 시호는 희(僖)라 하였다.

3. 가계

주령기를 할아버지로, 주경을 아버지로 두었다. 형제로는 형인 주법승이 있었다. 아들로는 장남 주소기, 차남 주소범을 포함하여 6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중 주소사는 영수현령을 지냈고, 주소범이 가장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손자로는 주도무가 있었다.

관계이름
할아버지주령기
아버지주경
주법승
장남주소기
차남주소범
기타 아들주소업
손자주도무


4. 평가

주법상에 대한 평가는 수서북사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隋書 高祖紀上および北史 隋本紀上
[2] 서적 진서 13권 열전 제7 주경
[3] 서적 자치통감 173권 진기 제7 선제 태건 11년
[4] 서적 수서 1권 제기 제1 고조 양견上
[5] 서적 수서 2권 제기 제2 고조 양견下
[6] 서적 수서 3권 제기 제3 양제 양광上
[7] 서적 수서 30권 지 제25 지리中 기주 정양군
[8] 서적 수서 3권 제기 제3 양제 양광上, 63권 열전 제28 원수
[9] 서적 수서 4권 제기 제4 양제 양광下 대업 8년
[10] 서적 수서 64권 열전 제29 내호아
[11] 서적 자치통감 181권 수기 제5 양제 대업 8년
[12] 서적 북사 76권 열전 제64 내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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