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쩐쫑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쩐쫑낌은 1883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교육가로 활동하며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유교, 불교, 베트남 역사를 연구했으며, 저서 '베트남사략'을 저술했다. 1945년 일본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 제국의 총리가 되었으나, 일본의 패망과 함께 내각이 붕괴되었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 1953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베트남의 일제 부역자 - 바오다이
    바오다이는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베트남국의 국가주석으로, 프랑스의 보호 아래 즉위했으나 일본의 지원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퇴위 후 다시 프랑스의 지원으로 국가주석이 되었지만 결국 망명하여 생을 마감하여 그의 통치 기간과 행적은 베트남 역사에서 논쟁적이다.
쩐쫑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Trần Trọng Kim
Trần Trọng Kim (『월남사략』에서)
국어 표기Trần Trọng Kim (쩐쫑낌)
한자 표기陳仲金 (진중금) / 陳重金 (진중금)
가타카나 표기チャン・チョン・キム
히라가나 표기ちんじゅうきん
직함
직위베트남 제국 내각 수반
임기 시작1945년 4월 17일
임기 종료1945년 8월 25일
군주바오다이
전임직책 신설
후임판안
호찌민 (베트남 민주 공화국 주석으로서)
개인 정보
배우자부이 티 뚜앗
자녀쩐 지에우 쯔엉 (딸)
출생 연도1883년
출생지응이쑤언, 하띤, 대남
사망일1953년 12월 2일
사망 장소달랏, 베트남국
직업학자, 교육자

2. 생애

쩐쫑낌은 1883년 하띤 성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문을 배웠고, 이후 프랑스어와 서구 학문을 익혔다. 프랑스 유학 후 귀국하여 하노이 등지에서 교사 및 교육 행정가로 활동하며 초등학교 시학관, 교과서 편찬반장, 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개지진덕회 활동과 저술 활동에 참여하여 ''베트남사략''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43년 교육계에서 은퇴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일본의 개입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이 명호 작전으로 프랑스 식민 통치를 종식시킨 후, 4월 17일 바오다이 황제에 의해 명목상 독립한 베트남 제국의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다.

1945년 베트남 제국 총리 쩐쫑낌.


그의 내각은 국호를 베트남 제국으로 정하고 새로운 국가와 국기를 제정했으며, 프랑스 식민 통치 하에 분리되었던 남부 코친차이나를 베트남 영토로 통합하고 베트남어 교육 과정을 도입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일본군에게 있었기에 그의 정부는 일본의 괴뢰 정부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1945년 베트남 기근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쩐쫑낌 내각은 8월 23일 총사퇴하며 붕괴되었다. 이후 베트민8월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자, 그는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 등지를 떠돌았다. 1947년 사이공으로 잠시 귀국했다가 캄보디아로 이주했으며, 1953년 12월 2일 달랏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쩐쫑낌은 동서양 학문에 두루 능통했던 학자이자 교육자로 평가받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보황파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그의 대표 저서 ''베트남사략''은 베트남 역사 개설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

2. 1. 생애 초반

쩐쫑낌은 1883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기 베트남 북중부 하띤 성 응이쑤언현 끼에우안 사 키에우린 마을에서 태어났다.[3] 당시 하띤 성은 프랑스보호령인 안남 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는 유교 학자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다.[3] 그가 태어난 응에안-하띤 지역은 판딘퐁이 이끄는 항불 게릴라 운동의 중심지였으나,[1] 이 운동은 프랑스에 의해 진압되었다.[1]

그는 성장하여[1] 하노이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으며,[2] 1897년에는 남딘의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0년 통역관 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졸업했다. 1904년 닌빈 성에서 통역사로 잠시 근무하다가,[3] 1905년 사기업 직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3] 이 시기 반프랑스 독립운동에 잠시 참여하여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받기도 했으나, 곧 학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1908년 프랑스 식민지 학교(École Coloniale) 장학금을 받아 멜룅의 사범학교(École Normale)에서 교사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3]

1911년 9월 베트남으로 돌아와 안남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으며,[3] 이후 식민지 중학교(부오이 학교), 하노이 관료 학교, 남자 사범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육계에서 경력을 쌓아 1921년 초등학교 시학관, 1924년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반장, 1931년 실업사범학교 교사, 1939년 하노이 남자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42년에는 통킹 지역 초등 공공 교육 감찰관의 자리에 올랐다.[3] 그는 교육학 관련 저술 활동과 교육 평론지 발행에도 참여했다.[2] 한편으로 베트남의 지하 비밀 독립운동 조직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교육자로서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유교, 불교, 베트남의 역사를 깊이 연구했다.[3] 특히 쯔 꾸옥 응으로 저술한 교과서들로 큰 명성을 얻었다.[3] 그의 대표작으로는 1920년 출간된 ''베트남사략''(Việt Nam sử lượcvie)과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출간된 ''유교''(Nho giáovie)가 있다.[5] ''베트남사략''은 베트남 사회에 대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조했으며,[6]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워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는 베트남 역사 개설서로 평가받는다.[2] ''유교''는 중국 유교 사상과 그것이 베트남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저서로, 당시 베트남 지식인 사회에서 유교의 위치에 대한 활발한 논쟁을 촉발했다.[7] 이 책은 프랑스 식민 통치 이전의 전통 유학자 세대와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신세대 지식인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로 여겨지기도 한다.[8]

문학 및 학술계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불교 및 유교 관련 단체에서도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며, 1939년에는 통킹 인민 대표 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었다.[3] 또한 프리메이슨 단체의 일원이기도 했다.[4]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43년 프랑스에서 발행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저명인사 소개 간행물에도 이름이 실렸다.[2] 그는 1943년 교육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2. 2. 독립 운동과 친일 행적

1943년 쩐쫑낌은 일본베트남의 독립을 약속한다는 조건 하에 협력 제안을 받아들였다.[15] 당시 일본은 베트남 내 친일 성향의 정당과 단체들을 규합하여 사이공에서 통합 대회를 열고 '베트남 복국동맹회'를 결성하며, 임시 정부 수립 준비와 끄엉 데 황자의 추대를 계획하고 있었다.[15]

같은 해 11월, 프랑스 식민 당국이 이들 단체 지도부에 대한 검거에 나서자, 쩐쫑낌은 즈엉 바 짝(Duong Ba Trac) 등과 함께 북부 베트남에서 일본 헌병대의 보호를 받아 체포를 피했다.[15] 프랑스 당국은 1943년 가을부터 친일 베트남인에 대한 숙청을 진행했으며, 쩐쫑낌은 일본 요원에 의해 하노이의 헌병대 사무실로 옮겨져 보호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즈엉 바 짝과 함께 싱가포르로의 탈출을 신청했고, 일본은 이들을 사이공으로 호송한 뒤 일본 사업가 마쓰시타 미쓰히로의 보호 아래 두었다.[3]

1944년 1월 1일, 쩐쫑낌과 즈엉 바 짝은 일본 선박을 타고 싱가포르로 떠났다.[3] 즈엉 바 짝이 그해 12월 사망한 후, 쩐쫑낌은 방콕으로 이송되었다. 1945년 3월 30일, 그는 "역사" 자문을 명목으로 일본에 의해 갑작스럽게 사이공으로 소환되었다.[3][9] 이는 1944년 8월 파리 해방 이후 프랑스 식민 행정부의 협력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일본이 1945년 3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인도차이나를 직접 장악한 직후였다. 일본은 명목상의 군주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남 제국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실질적인 군사 통제권은 유지했다.[10]

사이공에서 쩐쫑낌은 일본군 고위 관계자들을 만났고, 바오 다이 황제가 새 정부 구성을 위해 초청한 인물 중 하나라는 설명을 들었다.[3] 일본은 당초 총리 후보로 거론되던 응오 딘 지엠 대신 친일 성향이면서도 온건한 쩐쫑낌을 선택하여 내각 구성을 지시했다.[16][10] 쩐쫑낌은 1945년 4월 17일 내각 수립을 위임받아 베트남 제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쩐쫑낌 정부는 실질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일본군의 보호 아래 있었으며, 군대 보유가 금지되었고 내각에 국방부조차 두지 못했다.[16]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 공영권의 이상과 달리, 실제로는 일본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위한 지배 체제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쩐쫑낌 정부를 실권 없는 친일 괴뢰 정부로 간주했다. 특히 1945년 베트남 기근 당시 정부는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했으나, 수단과 자원이 일본군에 장악되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 어려웠다. 초기에는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으로 환영받았던 일본의 점령은 점차 베트남 민중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쩐쫑낌 내각 역시 8월 23일 붕괴되었다.

2. 3. 베트남 제국 총리 재직

1945년 3월 9일, 일본은 명호 작전을 통해 프랑스 식민 정부를 전복시키고 인도차이나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버마, 필리핀과 유사하게 명목상의 독립을 부여한다고 선전했다. 이에 부응하여 1945년 3월 11일, 후에응우옌 왕조 궁정은 1884년 프랑스와 체결했던 후에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베트남의 주권 회복을 선포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바오다이 황제는 새로운 독립 정부를 이끌 총리를 물색했다. 당초 응오딘지엠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려 했으나, 일본 측이 디엠의 독자적인 행보를 우려하여 이를 막았다는 설이 있다.[10] 이후 일본의 보호 아래 있던 쩐쫑낌이 유력 후보로 부상했다. 낌은 1943년 가을, 프랑스 식민 정부의 친일 베트남인 숙청 당시 일본 요원의 도움으로 싱가포르방콕 등지에서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3] 1945년 3월 30일, 낌은 "역사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의해 사이공으로 소환되었다.[3][9]

1945년 4월 7일, 후에에서 바오다이 황제를 만난 쩐쫑낌은 처음에는 고령과 정치 경험 부족 등을 이유로 총리직을 사양했다.[9] 그러나 지속적인 설득 끝에 4월 16일 새 정부 구성에 동의했고, 다음 날인 4월 17일 베트남 제국의 초대 총리로 공식 임명되었다.[3] 그는 10명의 장관으로 내각을 구성했는데, 대부분 프랑스 학교 교육을 받았으나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4] 내각에는 황쑤언한과 청년부 장관 판 아인 등이 포함되었으며,[11] 대월국민당과 판보이쩌우, 끄엉데와 연관된 베트남 광복회 등 민족주의 정당들의 지지를 받았다.[4]

그러나 쩐쫑낌 내각은 출범 초기부터 일본의 강력한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내각에 군사 통수권을 부여하지 않아 쩐쫑낌은 사실상 명목상의 총리에 불과했다.[16] 또한 국방부 설치를 추진하지 않아 훗날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의 봉기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당초 약속과 달리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쩐 내각 역시 일본에 어떠한 권리도 요구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드러냈다.[16] 이 때문에 많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쩐쫑낌 정부를 일본의 하수인이자 괴뢰 정부로 간주하며 비판했다.[16] 전국 각지에서 쩐 내각에 반대하는 봉기와 소요 사태가 발생했지만, 정부는 자체적인 군사력 부재로 이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 특히 베트남 공산당(베트민)의 게릴라 활동은 정부에 큰 위협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을유년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했으나 실질적인 수단과 자원이 일본군에 장악되어 있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쩐쫑낌 정부는 짧은 존속 기간 동안 몇 가지 의미 있는 조치를 시행했다. 1945년 6월, 국호를 베트남 제국으로 공식 제정하고, 국가(國歌)로 '단단궁'(Đăng đàn cung)을, 국기로는 황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리(離) 괘를 그린 기를 채택했다. 또한 프랑스 식민 통치 하에 분리되었던 남부 코친차이나를 베트남 영토로 통합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황쑤언한의 주도로 프랑스어 중심 교육 과정을 베트남어로 개편하는 작업을 추진했으며, 청년부 장관 판 아인은 청년 전선(Thanh niên tiền tuyến), 사회주의 청년(Thanh niên xã hội)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청년 운동을 활성화했다. 이들 단체에서 활동한 청년 중 일부는 훗날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군대의 장교로 활동하기도 했다.

쩐쫑낌 내각은 약 5개월간 존속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무조건 항복하면서 급격히 기반을 상실했다. 결국 8월 23일 내각은 총사퇴하고 붕괴되었으며, 이후 베트민8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쩐쫑낌의 총리 재직 기간 활동에 대해서는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 수반이었다는 비판적 시각(밀턴 삭스, 존 T. 맥앨리스터 등)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활동한 비정치적인 기술 관료 집단이었다는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쯔엉 버우 럼 등)가 공존한다.[12]

2. 4. 총리 퇴진 이후

1945년 8월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쩐쫑낌이 총리로 있던 베트남 제국 역시 짧은 기간 만에 막을 내렸다. 바오다이 황제가 8월 23일 퇴위함에 따라 쩐쫑낌 역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정권을 장악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쩐쫑낌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 광저우와 홍콩 등지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1947년 2월 6일, 쩐쫑낌은 사이공(현 호찌민시)으로 돌아와 변호사 찡 딘 타오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캄보디아 프놈펜에 있는 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말년에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53년 12월 2일 달랏에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3. 평가

쩐쫑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총리로 재임했던 시기의 활동과 정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진다. 일본의 지원 아래 수립된 그의 내각은 실질적인 권한이 거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의 괴뢰 정권 또는 꼭두각시 정권이라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16][12]

당시 많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쩐쫑낌 정부를 프랑스 식민 통치와 다를 바 없는 일본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 등 독립운동 세력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으며,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정부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함께 불과 5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대부분의 정책은 실행되지 못했다.[3]

일각에서는 쩐쫑낌을 정치적 야심보다는 혼란기에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던 비정치적 기술 관료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12] 그러나 그의 정부가 실질적인 자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일본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3. 1. 부정적 평가

1943년 쩐쫑낌은 일본베트남의 독립을 약속한다는 조건 하에 협력 제안을 받아들였다.[15] 이후 프랑스 식민 당국의 검거를 피해 일본 헌병대의 보호를 받기도 했다.[15] 1945년 4월 17일,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바오다이 황제는 쩐쫑낌을 총리로 임명했다.[16][3] 그는 처음에는 총리직을 거부했으나 결국 수락했다.[9]

그러나 쩐쫑낌 정부는 실질적인 권한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은 쩐쫑낌 내각이 군대를 보유하거나 국방부를 설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16] 이는 사실상 일본의 군사 통제 하에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군사력 부재는 훗날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의 봉기를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일본은 당초 약속했던 베트남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쩐쫑낌 내각 역시 이에 대해 어떠한 요구도 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다.[16] 이러한 이유로 쩐쫑낌 정부는 일본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16] 이는 일본 패망 이후 베트남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붕괴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많은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쩐쫑낌 내각을 프랑스 식민 통치와 다를 바 없는 일본의 괴뢰 정부로 간주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전국 각지에서는 쩐쫑낌 정부에 반대하는 폭동과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쩐쫑낌은 민병대를 동원해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고, 특히 베트남 공산당(월맹)의 게릴라 활동은 큰 위협이 되었다.

쩐쫑낌은 일본에 군대나 국방부 설치를 요구하지 않고 민병대에 의존해 치안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가 파견한 민병대는 명분상 호치민의 월맹에 밀렸고, 전투에서도 연패를 거듭했다.[17] 특히 북부 베트남에서는 친일 세력이 미약했고, 쩐쫑낌 정부의 민병대는 월맹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17] 당시 북부의 친일 인사들은 대중의 요구에는 무관심한 채 일본 당국에 접근하여 관직을 얻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17] 쩐쫑낌이 공산당의 폭력성을 비판했지만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병사들의 급여 인상과 처우 개선, 애국심 호소 등으로 민병대의 사기를 높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대중들은 친일 쩐쫑낌 정부의 무능에 실망하고, 일본의 패망이 임박했다는 월맹의 선전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18]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8월 23일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면서 쩐쫑낌 역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통치 기간은 불과 5개월에 그쳤고, 대부분의 정책은 실행되지 못했다.[3] 쩐쫑낌의 행적에 대해 일부에서는 그를 일본의 꼭두각시로 평가하는 반면,[12] 비정치적인 기술 관료였다는 시각도 존재한다.[12] 하지만 그의 정부가 실질적인 자주권 없이 일본의 통제 하에 있었으며, 베트남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4. 저서

쩐쫑낌은 학자로서 쯔 꾸옥 응으로 된 교과서를 편찬하고 유교, 불교, 베트남 역사 관련 저술 활동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3]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1920년에 출판된 ''베트남사략''과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출판된 ''유교''이다.[5] ''베트남사략''에서 그는 베트남 사회에 대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조했으며,[6] 이 책은 2009년까지도 계속 출판될 정도로 중요한 역사서로 평가받는다.[2] ''유교''는 중국의 유교 사상과 그것이 베트남에 미친 영향을 다루면서 유교 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베트남 사회에서 유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활발한 지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7] 프랑스 식민 통치 이전의 전통 유교 교육을 받은 구세대 학자들과 프랑스식 교육을 받은 신세대 학자들 사이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여겨졌다.[8]

쩐쫑낌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1945년 이전 주요 저서
출판 연도제목원제비고
1914논리학 입문Sơ học luân lývie
1914왕양명Vương Dương Minhvie
1916논리학 교과서Luân lý giáo khoa thưvie
1916사범과 요약Sư phạm khoa yếu lượcvie
1919월남사략Việt Nam sử lượcvie
1925취교전 주해Truyện Thúy Kiều chú giảivie
1930유교Nho giáovie
1940불록Phật Lụcvie
국문 교과서 (3권)Quốc văn giáo khoa thưvie응우옌 반 응옥, 당 딘 푹, 도 탄과 공저; 남 선 응우옌 반 토 삽화
1941월남 문범Việt Nam văn phạmvie부이 키, 응우옌 마인 투옹과 공저



1945년 이후 주요 저서
출판 연도제목원제비고
1949한진의 먼지 바람Một cơn gió bụivie1942년~1948년 회상록


참조

[1] 서적 Marr
[2] 서적 Dommen
[3] 서적 Chieu
[4] 서적 Hammer
[5] 서적 McHale
[6] 서적 McHale
[7] 서적 McHale
[8] 서적 McHale
[9] 서적 Shiraishi and Furuta
[10] 서적 Hammer
[11] 서적 Vietnam: State, War, and Revolution (1945–1946) 2013
[12] 서적 Shiraishi and Furuta
[13] 웹사이트 チャン・チョン・キム https://kotobank.jp/[...]
[14] 웹사이트 陳重金 https://kotobank.jp/[...]
[15] 서적 일제하의 동남아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5
[16] 서적 일제하의 동남아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5
[17] 서적 일제하의 동남아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5
[18] 서적 일제하의 동남아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