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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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첨성대는 신라 시대에 건립된 천문 관측소로,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북쪽에 위치해 있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로 원통형을 이루며, 높이 9.4미터, 밑면 지름 6.09미터이다. 13층에서 15층 사이에 문이 있고, 내부에는 흙이 채워져 있다. 첨성대는 1년의 일수, 12개월, 24절기 등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으며, 2016년 경주 지진으로 기울기가 증가하는 등 보존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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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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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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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천문대 |
한글 | 첨성대 |
한자 | 瞻星臺 |
로마자 표기 | Cheomseongdae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 |
상세 정보 | |
높이 | 9.17미터 |
시대 | 신라 |
지정 | 국보 제31호 |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소유 | 국유 |
2. 구조 및 위치
첨성대는 신라 월성 북쪽에 위치한다. 기단은 너비가 5.7m인 정사각형이며, 12개의 직사각형 돌로 이루어져 있다.[9][5] 기단에서 창문까지는 흙과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9]
2009년 조사 결과, 첨성대 지반이 침하하여 중심축이 매년 약 1mm씩 기울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5] 석재를 쌓아 올린 구조이기 때문에 보수하지 않으면 붕괴될 가능성도 제기된다.[16]
2016년 경주 지진으로 첨성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기울기가 20mm 증가하여 224mm가 되었고,[16] 최상단 정자석을 비롯한 석재 틈새도 수 mm에서 수 cm 벌어졌다.[17] 국립문화재연구원은 복원 보수를 검토하고 있지만, 지진 발생 전 정밀한 구조 기록이 없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8]
2. 1. 구조적 특징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화강암 벽돌 362개[25]를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26] 높이는 9.4m, 밑면 지름은 6.09m, 지대석 한 변 길이는 5.35m이다.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우물 정(井) 모양의 천장돌 2층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 아래로 12층, 위로 13층이 있어 첨성대 위아래 중간에 문이 있다. 이 문에 사다리를 걸쳐 사람이 오르내렸다.[24]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은 장대석으로 되어 있다.위에서 보면 첨성대는 한자 자를 닮았으며, 이는 "우물"을 의미한다.[9]
원통형 몸체는 1년의 날짜 수[9]를 상징하는 365개의 잘 다듬어진 화강암 조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역사적 문서마다 서로 다른 수의 돌을 기록하고 있다. 송(1983)은 경주 국립 박물관장 홍사준이 1962년에 현장을 조사하여 366개의 블록을 발견했다고 인용했다.[10] 이러한 돌의 수 불일치는 일부 연구자들이 탑 꼭대기 안쪽에 있어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돌판을 포함하거나 제외했기 때문일 수 있다.[5] 돌들은 환상형 단면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각 돌이 곡선 또는 굽은 직사각형 모양임을 의미한다.
꼭대기에는 두 층의 이 있으며, 관측 장치가 그 위에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1]
이 구조 방식은 분황사의 구조와 유사하다. 화강암이 건재로 사용되었으며, 원통형으로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높이는 9.108m, 지상 부분의 직경은 4.98m, 상층부의 직경은 2.85m이다.[13] 화강암은 두께 약 30cm로 가공되었으며, 27단을 쌓아 올렸다. 지상 부분에는 입구가 없고, 13단에서 15단 부분에 사각형 창이 하나 있다. 이 창에 사다리를 걸어 내부로 출입했다고 한다. 현재 내부는 지상 부분에서 화강암 12단 부분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다.[13] 19단과 20단 부분, 25단과 26단 부분에 바닥이 있다. 천장은 없고, 상부는 개방되어 있다.
2. 2. 상징성
첨성대 중앙의 구멍 또는 창은 몸체를 위아래 각각 12층의 돌로 나누어 연간 12개월과 24절기를 상징한다.[9] 기단을 구성하는 12개의 돌 역시 12개월을 나타낼 수 있다.[5]
3. 건립 시점
《삼국유사》는 첨성대의 건립 시점을 선덕여왕대(632~647)로 밝히고 있고,[32] 《삼국유사》 이후의 사서에서도 이에 반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선덕여왕대(632~647년)에 첨성대가 건립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33]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는 당 태종(唐 太宗) 7년(633년)에,[34] 《증보문헌비고》는 선덕여왕이 사망한 해인 재위 16년(647년)에 건립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여러 사서에서 구체적인 건립 연도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지만, 《삼국유사》와 《여지고(輿地)고》에는 관련 기록이 나타난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기사로, 그 치세(632년 - 647년)에 건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삼국유사》에는 "이 왕(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세웠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용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14] 조선 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는 내부 구조 해설이나 천문 관측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건조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시대의 기록이므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14] 또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쓰여진 몇 편의 시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서도 첨성대가 등장한다.[14]
4. 용도
첨성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전통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 기능을 했으리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64년 해시계의 규표일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된 후[35][36] 제단이었다는 가설,[37] 정치적 조형물이라는 가설,[38]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우물이라는 가설[39] 등 여러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첨성대 건설 이후 기록된 유성의 떨어진 위치들이 모두 첨성대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 첨성대가 완성된 후 신라의 천문 관측 기록의 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 정밀해졌다는 점 등을 근거로 천문대 기능을 했으리라는 주장도 계속 이어진다.[40]
첨성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첨성대라 명명한 것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의 천체 관측 기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건조 연도, 건조자, 건조 목적은 불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예로부터 "첨성대"라고 전해져 왔다. 첨성대에 관한 기사는 한반도의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전혀 없지만, 《삼국유사》와 《여지(輿地)고》에는 보인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의 선덕여왕 기사이므로, 그 치세(632년 - 647년)에 건조되었다고 여겨진다. 《삼국유사》의 기술은 "이 왕(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세웠다"고만 되어 있을 뿐, 용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14] . 조선 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는 내부 구조의 해설이나 천문 관측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건조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시대의 기록이므로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14] . 또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쓰여진 몇 편의 시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 안에서도 첨성대가 등장한다[14] .
이러한 제언들로 인해 현대에는 현대적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했을 것이라기보다도, 점성술 및 제의까지도 행해진 고대인들의 천문대로서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으리라 여겨진다.[41] 이 경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점성대가 첨성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42][43]
4. 1. 천문 관측
첨성대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전통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의 기능을 했으리라 여겨져 왔다. 1960년대 이전에는 별 이견 없이 세키노 타다시와[29] 와다 유지,[30] 1917년 루퍼스(Rufus,W.C.)에[31]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주목받았다.첨성대는 창문을 제외하면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이며,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가지 계절과 24절기를 확실히 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 역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 관측의 중심지로서, 신라 천문 관측에서 자오선과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1910년에 첨성대의 존재를 학계에 알린 것은 조선총독부 관측소 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였다. 기상학자였던 와다는 현지에 방문하여 1909년 4월에 방치된 상태였던 첨성대를 확인하고, 전승과 문헌 기록을 연구하는 동시에 문화재로서 그 보호에 힘썼다.[19] 와다는 첨성대 정상에 목조 건조물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혼천의와 같은 천문 관측 기구로 관측이 상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20]
대한민국 성립 후 국내 과학사학계에서는 첨성대의 건축 의도에 대한 해석이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과학사학자 전상운은 1964년에 첨성대의 구조와 기능을 검토하여, 천문 관측용 구조물을 설치하기에는 부적합한 구조임을 지적했다. 전상운은 태양의 운행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를 기록하는 규표(해시계)로서의 역할이 주였으며, 내부 혹은 정상에서 천문 관측을 했다고 해도, 일식 등의 변이에 즈음하여 임시로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했다.[13][14]
1990년대에는 논쟁이 잦아들면서, 상설적인 천문대라는 전통적인 견해도, 종교적·상징적인 의미만을 인정하는 주장도 모두 쇠퇴했다.[22] 1996년에 열린 제9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학회에서는 첨성대에서 어떤 형태의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다만, 구체적인 관측 형태나 그 의미 부여에 대해서는 통일적인 견해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13][22]
4. 2. 천문 관측 이외의 용도
첨성대는 《삼국유사》 기록에 따라 전통적으로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 기능을 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964년 해시계의 규표일 것이라는 가설이 제시된 후[35][36] 제단이었다는 가설,[37] 정치적 조형물이라는 가설,[38]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우물이라는 가설[39] 등 여러 가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첨성대 구조는 하늘에 대한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라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오늘날에는 첨성대가 현대적 천문대로서 기능보다는 점성술 및 제의까지도 행해진 고대인들의 천문대로서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했으리라 여겨진다.[41] 이 경우 《삼국유사》에 기록된 점성대가 첨성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42][43]
4. 3. 과학사적 평가 (일본어 위키백과 참고)
1910년 조선총독부 관측소 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가 첨성대의 존재를 학계에 알렸다.[19] 기상학자였던 와다는 1909년 4월 방치된 첨성대를 현지에서 확인하고, 전승과 문헌 기록을 연구하는 동시에 문화재로서 보호에 힘썼다.[19] 와다는 첨성대 정상에 목조 건조물이 설치되어 혼천의와 같은 천문 관측 기구로 상시 관측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20] 첨성대를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칭한 와다의 설은 병합 시대 조선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켰고,[21] 이후 오랫동안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13][14]대한민국 성립 후 국내 과학사학계에서는 첨성대 건축 의도에 대한 해석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60년대부터 첨성대에 대한 학문적인 조사 연구가 시작되었다. 과학사학자 전상운은 1964년에 첨성대 구조와 기능을 검토하여, 천문 관측용 구조물을 설치하기에는 부적합한 구조임을 지적했다. 전상운은 태양 운행에 따른 그림자 길이를 기록하는 규표(해시계)로서의 역할이 주였으며, 내부 혹은 정상에서 천문 관측을 했다고 해도, 일식 등의 변이에 즈음하여 임시로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3][14]
전상운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과학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해 다양한 설이 제기되었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첨성대가 천문 관측과는 무관한 종교적·상징적인 건조물이라는 주장도 이때 등장했다. 김용운은 첨성대가 주비산경 등에 나오는 당시 과학 지식을 집대성한 일종의 기념비이며, 사용된 돌의 수(약 360개)는 1년의 날짜 수를, 쌓인 단의 수(일설에는 28단)는 이십팔수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이룡범은 선덕여왕이 불교에 힘썼던 점을 고려하여, 불교 발전을 기원하며 영산인 수미산을 본뜬 제단일 것이라고 추정했다.[13][22]
1990년대에는 논쟁이 잦아들면서, 상설적인 천문대라는 전통적인 견해도, 종교적·상징적인 의미만을 인정하는 주장도 모두 쇠퇴했다.[22] 1996년 제9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학회에서는 첨성대에서 어떤 형태의 천문 관측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대해 사학자들 사이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다만, 구체적인 관측 형태나 그 의미 부여에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13][22]
5. 보존 상태
첨성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원통형으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이다. 높이는 9.108미터, 지상 부분의 직경은 4.98미터, 상층부의 직경은 2.85미터이다.[13] 화강암은 두께 약 30센티미터로 가공되었으며, 27단을 쌓아 올렸다. 지상 부분에는 입구가 없고, 13단에서 15단 부분에 사각형 창이 하나 있다. 이 창에 사다리를 걸어 내부로 출입했다고 한다. 현재 내부는 지상에서 12단 부분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으며,[13] 19단과 20단, 25단과 26단 부분에 바닥이 있다. 천장은 없고, 상부는 개방되어 있다.
2005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첨성대는 북쪽으로 7.2센티미터, 동쪽으로 2.4센티미터 정도 기울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원인을 북동쪽 지반이 무르고 수분이 많은 탓으로 보았으며, 지역 주민들은 한국 전쟁 이후 기울어짐이 심해졌고 당시 북쪽 도로를 지나던 탱크 등에 의해 지반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27] 문화재청은 우려할 수준은 아니며, 국내외 연구진에 의한 연구 결과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밝혔다.[28]
2016년 경주 지진의 여파로 석축이 지진 발생 전에 비해 약 1.2cm 정도 벌어졌지만 균열은 없었다고 한다.
5. 1. 보존 노력
첨성대는 1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원래의 모습과 형태를 유지해 왔지만, 현재 구조물이 북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12] 2007년에는 첨성대의 상태를 매시간 측정하는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특히 균열 및 구조적 변위, 기초석의 움직임이 우려된다. 첨성대는 또한 노후화 및 풍화 작용, 특히 지반 침하로 인한 대기 오염과 구조적 불균형으로 인해 마모되기 쉽다. 구조물 외부는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세척된다.[12]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81년부터 이 구조물에 대한 정기적인 조사를 실시해 왔다. 경주시청은 부지의 관리 및 보존을 감독한다.[12]
2009년 조사에 의해, 첨성대가 서 있는 지반이 침하하고 있으며, 중심축의 기울기가 매년 약 1mm씩 증가하고 있음이 밝혀졌다.[15] 단순하게 석재를 쌓아 올린 구조이기 때문에, 이대로 보수를 하지 않으면 장래 붕괴될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16]
2016년 9월에 일어난 경주 지진은 첨성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기울기는 한꺼번에 20mm 증가하여 224mm가 되었으며,[16] 최상단에 짜여진 정자석을 비롯한 석재 틈새도 수 밀리미터에서 수 센티미터 벌어졌다.[17] 국립문화재연구원은 복원 보수를 검토하고 있지만, 지진 발생 전의 정밀한 구조 기록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이 문제시되었다.[18]
6. 대중문화
첨성대는 대한민국의 인기 드라마 《선덕여왕》에 언급되었다. 2009년 드라마에서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건설되었으며, 이는 그녀가 공주로서 내린 첫 번째 조치였다. 첨성대는 미실과 같은 한 사람이 천문학 지식을 남용하는 대신, 모든 사람과 천문학 지식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또한 자신의 신성한 권리를 포기했다.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고 많은 보수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첨성대 개장식에 참석한 귀족은 거의 없었다.
7.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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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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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돌의 수는 세는 방법에 따라 달라지며, 362라는 수가 1년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음력 1년은 354.37일이며, 당시 신라에서는 양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26]
문서
홍사준(1963)의 실측에 의하면 원통형에 사용된 석재는 362매이며, 그 이외에도 지대석 8매, 기단석 12매, 상부정자석 2단 8매, 중간정자석 총 8매, 남측 창문의 문주석 2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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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첨성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첨성대의 해석의 역사와 신라시대의 천문관
[42]
간행물
삼국유사
[43]
웹인용
첨성대는 정말 천문대일까? 서금석 박사 "점성대 가능성도"
http://www.ggilbo.co[...]
경기일보
2022-04-09
[44]
웹사이트
첨성대는 천문대였다 - 천문(연) 7일 한국천문학회에서 발표
https://www.kasi.re.[...]
한국천문연구원
2011-04-07
[45]
웹인용
첨성대에서 보는 별자리와 경주 고분 및 유적들
https://www.pressian[...]
프레시안
2012-09-12
[46]
방송
선덕여왕의 비밀코드, 첨성대
https://vod.kbs.co.k[...]
KBS
200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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