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이 (종교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최영이 바르바라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과 형벌을 견디며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했다.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당시 23세였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40년 사망 - 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는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뛰어난 연주 기교로 명성을 얻었으며 24개의 카프리스와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하고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1840년 사망 - 하인리히 올베르스
하인리히 올베르스는 독일의 의사이자 천문학자로, 팔라스와 베스타 두 소행성을 발견하고 혜성 궤도 계산법을 개발했으며, 올베르스의 역설을 제시하여 우주론 연구에 기여했다. - 1818년 출생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18년 출생 -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는 1818년에 태어나 1848년에 사망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언니 샬럿 브론테와 함께 시집을 출판하고 소설 《폭풍의 언덕》을 썼으며, 사후에 영국 문학의 걸작으로 인정받았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최영이 (종교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최영이 바르바라 |
출생일 | 1818년 |
사망일 | 1840년 2월 1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당고개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최영이는 한양 출신의 천주교 신자로, 독실한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20세에 조신철 카롤로와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고 신앙 공동체를 꾸렸다.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하자 남편과 함께 피신하였으나, 같은 해 6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지내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배교를 강요하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한양 근교의 당고개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이때 나이는 23세였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천주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2. 1. 신앙 생활과 결혼
최영이는 한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본받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녀의 부모가 그녀의 혼담을 정할 때,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배우자는 매우 독실한 교우여야 하지만, 양반이나 부자는 싫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20세의 나이에 44세의 늙은 홀아비인 조신철 카롤로와 결혼했다. 이듬해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그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2. 2. 체포와 투옥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남편 조신철 카롤로와 함께 피신했으나, 같은 해 6월 친정에 머물던 중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1][2] 체포될 당시 아들을 데리고 감옥에 들어갔다.[1]그러나 감옥은 공기가 혼탁하고 어두우며 음식도 부족하여 어린 아들이 지내기에는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다. 또한 최영이는 아들 때문에 자신의 굳건한 천주교 신앙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아들을 감옥 밖의 친척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1][2]
포장은 최영이에게 배교하고 동료 천주교 신자들과 집에서 발견된 종교 물품들의 소유주 이름을 대라고 강요했다.[1] 하지만 최영이는 배교를 거부하고, 교우들과 알고 지내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리다고 답했다.[1][2] 이로 인해 최영이는 두 차례의 주뢰형과 260여 대의 태형을 받았다.[1]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벌과 고문을 견뎌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1][2]
2. 3. 고문과 순교
1839년 기해박해 중 6월, 최영이는 남편과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친정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아들을 데리고 감옥에 들어갔으나, 감옥의 열악한 환경과 아들로 인해 자신의 굳건한 신앙이 흔들릴 것을 염려하여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포장은 최영이에게 배교하고 동료 천주교인들의 이름과 집에서 발견된 종교 물품의 주인을 밝히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최영이는 배교를 거부하며, "교우들과 알고 지내기에 자신은 너무 젊다"고 말하며 동료들의 정보를 발설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녀는 두 차례의 주뢰형과 260여 대의 태형을 당하는 혹독한 고문을 겪었다. 이후 형조에서도 세 차례의 형벌과 고문을 더 견뎌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최영이는 사형 선고 후 남긴 편지에서 순교한 부모님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과 순교의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행복한 마음을 드러냈다.
> 순교로 제 부모를 잃었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하지만, 제가 천국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위로가 되며 순교의 특권을 주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840년 2월 1일, 최영이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 형장으로 끌려가 이문우 요한, 홍영주 바오로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3세였다. 최영이의 어머니 역시 순교자였으나, 당시 조선의 형법에 따라 친족을 같은 날 처형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최영이가 순교하기 하루 전에 먼저 처형되었다.
3. 시복 및 시성
최영이 바르바라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3]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21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