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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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렬왕은 고려의 제25대 국왕으로, 1274년 원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몽골 제국(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고, 일본 정벌에 동원되는 등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원 간섭기 동안 국내 자주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1298년 충선왕에게 양위 후 복위했다. 충렬왕은 몽골식 시호인 '충렬'로 불렸으며, 고려 왕조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국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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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즉위하여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와 삼별초의 항쟁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74년에 사망했다.
충렬왕 | |
---|---|
기본 정보 | |
이름 | 충렬왕 |
한자 표기 | 忠烈王 |
로마자 표기 | Chungnyeol-wang |
출생 이름 (한글) | 왕거 |
출생 이름 (한자) | 王昛 |
출생 이름 (로마자 표기) | Wang Geo |
즉위 방식 | 왕세자 |
별칭 | 태손(太孫) |
몽골식 존칭 | 부마국왕 (駙馬國王) |
시호 (고려) | 광문선덕경효대왕 (光文宣德景孝大王) |
시호 (원) | 충렬왕 (忠烈王) |
출생일 | 1236년 4월 3일 |
출생지 | 강화도 별궁, 고려 |
사망일 | 1308년 7월 30일 |
사망지 | 개경 신효사, 고려 |
능묘 | 경릉 (慶陵) |
종교 | 불교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원종 |
어머니 | 순경태후 |
배우자 | 제국대장공주 (1274년 결혼, 1297년 사망) 정신부주 (1260년 결혼, 1308년 사망) |
자녀 | 충선왕 강양공 왕자 정녕원비 명순원비 소군 왕서 |
재위 | |
즉위 년도 | 1274년 |
첫 번째 재위 기간 | 1274년 - 1298년 |
두 번째 재위 기간 | 1298년 - 1308년 |
태상왕 재위 기간 | 1298년 |
태상왕 전임 | 왕태자 전 (원종) |
태상왕 후임 | 왕세자 원 (충선왕) |
국왕 전임 | 원종 |
국왕 후임 | 충선왕 |
기타 | |
칭호 | 일수왕 (逸壽王) |
왕조 | 고려 |
가문 | 왕씨 |
2. 생애
1236년 고종 23년, 원종과 정순왕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59년 할아버지 고종이 붕어하자 아버지가 원나라에 간 사이 반년간 국정을 돌보았다. 1260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1274년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한 뒤 그해 원종이 붕어하여 왕위에 올랐다.
1276년 원나라 다루가치의 지적으로 고려 왕실의 용어가 격하되었고, '조', '종'의 묘호 대신 시호를 사용하게 되었다.[25] 1277년 제주도에 목마장이 설치되었고, 1280년 정동행중서성 설치 후 일본 원정을 준비했다. 1290년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기도 했다. 1281년 쿠빌라이 카안에게서 부마국왕으로 책봉되었다.[26]
1298년 아들 충선왕에게 선위했으나 7개월 만에 복위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순성수정상승대왕이었으나, 충선왕의 뜻에 따라 원나라식 시호인 충렬로 불리게 되었다.
2. 1. 출생과 즉위
1236년(고종 23년), 당시 태자였던 왕식(원종)과 태자비 김씨(정순왕후)의 장남으로 강도에서 태어났다.[24] 이듬해 어머니를 여의었다.1259년(고종 46년), 할아버지 고종이 붕어하였는데, 당시 아버지 원종은 원나라에 있었으므로 고종의 장례를 주관하고 아버지가 귀국할 때까지 반년간 국정을 임시로 돌보았으며 관례를 치렀다.
1260년(원종 1년) 8월, 세자로 책봉되었다.[2] 1271년 쿠빌라이 칸에게 그의 딸과 결혼할 것을 제안했고, 쿠빌라이 칸은 이에 동의했다. 이후 80년 이상 동안 고려 국왕들은 몽골 왕족과 결혼했다. 왕위 계승자들은 몽골식 이름을 받았고, 다두로 보내져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했다.
1274년(원종 15년) 5월,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 같은 해 6월 원종이 붕어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해에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
2. 2. 원 간섭기의 시작과 자주적 노력
1274년(원종 15년) 5월,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 그해 음력 6월 원종이 붕어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24]1276년(충렬왕 2년) 3월,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가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하자, 고려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25] 또한 원종을 마지막으로 왕의 사후 태묘에 봉안하는 위패에 올리는 묘호인 '조', '종'을 쓰지 못하고 시호만으로 칭했다. 충렬은 원에서 보낸 시호이다. 충렬왕이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으므로 몽골에서 온 칙사나 장군과 지위가 같다고 보고 국왕이 이들과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상대하는 것을 중지하고, 높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이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한 제주도에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됐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내침하여 강화로 천도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1281년 원나라 쿠빌라이 카안으로부터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 도장을 수여받았다.[26]
1298년 (충렬왕 24년) 세자(충선왕)에게 선위하고 '''광문선덕'''(光文宣德)의 존호를 받아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7개월 만에 복위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처음 올린 시호는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며, 상국에서 시호를 받아와야 된다는 충선왕의 뜻에 따라 원나라식 시호 충렬로 불리었다. 후에 공민왕 즉위 후 공민왕이 다시 고려식 시호를 올려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이라 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사후 줄곧 몽골식 시호인 충렬왕으로 불리었다.
충렬왕은 ‘왕(王)’이라는 칭호로 기억되는 최초의 고려 국왕이다. 이전의 통치자들은 ‘조(祖)’나 ‘종(宗)’이라는 접미사가 붙은 묘호를 받았는데, 이는 ‘숭배받는 조상’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칭호였다. 고려가 몽골이 지배하는 원의 속국이 된 후, 원 황제 쿠빌라이 칸은 이러한 관행이 자신의 권력을 낮추는 것이라고 여겨 고려 국왕들이 앞으로 그러한 이름을 받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1260년에 왕세자가 된 충렬왕은 1271년 쿠빌라이 칸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고, 쿠빌라이 칸은 이에 동의했다.[2] 그 이후 80년 이상 동안 고려 국왕들은 몽골 왕족과 결혼했다. 왕위 계승자들은 몽골식 이름을 받았고, 다두로 보내져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했다.
1274년 고려 원종의 죽음 이후, 충렬왕이 고려 제25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28년간의 몽골 제국과의 격렬한 저항 이후 고려가 굴복하여 몽골에 의해 강요된 낮은 칭호를 받은 최초의 고려 국왕이었다.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고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고려 조정에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렬왕은 국내 자주성을 유지하고 쿠빌라이가 보장한 자치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업적으로는 전쟁 중 몽골에 빼앗겼던 동녕과 탐라 지역을 협상을 통해 되찾은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는 20년 전 쿠빌라이 자신이 원종에게 항복 후 약속했던 대로, 고려가 전통과 관습을 유지할 권리를 원나라에 명확히 밝혔다.[1] 충렬왕은 1278년 다시 원나라를 방문하여 20년 전 쿠빌라이의 약속을 구실로 고려에 주둔한 몽골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청하였다.[2][3] 그 결과 원나라 군대나 관리들은 더 이상 고려에 주둔하지 않았다. 이러한 권리와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은 부분적으로 고려 국왕들이 몽골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여 칸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 국왕들은 쿠릴타이에 한국과 심양의 지배자로 참석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4] 심지어 존경받는 원나라 다루가치들도 고려 국왕 앞에서는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절하고 음료를 받아 존경을 표해야 했다.
충렬왕은 재위 기간 동안 부패한 귀족들의 불법 재산을 몰수하는 데 중점을 둔 전민변정도감과 같은 감찰 기구를 재정비하는 등 개혁을 시도하였다.[5] 동시에 그는 국내 유교 학문의 발전을 장려하였다. 또한 그는 몽골의 지배로부터 고려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6]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공자를 제사하는 유교 사당인 문묘가 건립되었다.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관과 같은 유교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고, 저명한 유학자 안향이 제안한 장학 재단도 설립되었다.[2]
2. 3. 일본 원정과 고려의 피해
쿠빌라이 칸이 일본 가마쿠라 막부를 침략하기 위한 계획(몽골의 일본 원정)을 실행하기로 결정하면서, 고려는 막대한 함대 건조와 병력 파병 및 수송 임무를 맡게 되었다.[6] 이는 고려에 막대한 비용 부담을 안겼지만, 충렬왕이나 고려 정부는 쿠빌라이 칸의 강요에 반대할 수 없었다. 결국 고려는 일본 원정 준비로 인해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백성들은 전쟁 물자 징발로 생계가 파괴되었다.[7]1274년 원나라는 고려에 전함 300척 건조를 명하고, 일본 원정(원구)을 위해 전함 대소 900척을 준비하게 하였다.[12] 1280년에는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면서,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준비하게 되었다.
1281년 홍안의 역에는 흔도, 홍다구, 김방경 등이 이끄는 동로군이 합포에서 일본으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원정군은 큰 피해를 입고 고려로 귀환하였다.[8]
이때 원정을 위한 군마를 기르기 위해 제주도에 군마 목장이 설치되었다.[8]
2. 4. 내정의 혼란과 말년
1276년(충렬왕 2년) 3월,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가 충렬왕에게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하자, 고려 관리 중찬 김방경과 좌승선 박항에게 해명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감히 참람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조종(祖宗)께서 서로 전하여 오던 옛날 법을 따른 것뿐입니다."라고 해명하였다. 이날 이후 고려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이 격하되었다.[25] 또한 원종을 마지막으로 왕의 사후 태묘에 봉안하는 위패에 올리는 묘호인 '조', '종'을 쓰지 못하고 시호만으로 칭했다. 충렬은 원에서 보낸 시호이다.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김방경의 활약으로 수차 왜구·여진의 침입을 격퇴할 수 있었다.
1298년 (충렬왕 24년) 세자(충선왕)에게 선위하고 '''광문선덕'''(光文宣德)의 존호를 받아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복위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처음 올린 시호는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며, 충선왕의 뜻에 따라 원나라식 시호 충렬로 불리었다. 후에 공민왕 즉위 후 공민왕이 다시 고려식 시호를 올려 광문선덕경효대왕(光文宣德景孝大王)이라 했다. 그러나 사후 줄곧 몽골식 시호인 충렬왕으로 불리워졌다.
1290년, 카다안(哈丹|카다안중국어)은 내만대(乃蠻帶|내만대중국어)가 이끄는 원나라 군대에 패한 후 고려를 침입했다. 카다안의 반란군이 고려 영토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 원나라의 강제적인 무장 해제로 인해 고려군이 침입자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극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렬왕은 사치스러운 궁중 연회로 자신과 신하들을 탐닉시키며 침입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상황을 방치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국고를 낭비한 충렬왕은 카다안의 반란군과 싸우는 고려군을 지원하러 온 몽골 장군 내만대에게조차 비난을 받았다. 치악성(雉岳城)과 연기(燕岐)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려의 방어는 나중에 효과적임을 증명했고, 이후 내만대가 이끄는 1만 명의 원나라 군대의 지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다안이 이끄는 반란군은 식량과 보급품을 약탈하면서 많은 고려 백성들이 살해당했다.[9]
충렬왕은 측근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한 후에도 연회와 매사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297년에 원나라에서 왕세자(충선왕)와 계국공주가 돌아오자, 1298년에 왕위를 아들 창(충선왕)에게 물려줄 뜻을 밝히고 결국 물러났다.[6]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대와 왕실의 간통 사건 등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여러 당파 간에 음모가 난무했다. 결국 8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복위되었다. 1306년 충렬왕은 당시 고려 국왕이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이라는 조건 하에 즉위할 수 있었던 점을 이용하여 왕세자의 복위를 막기 위해 세자와의 이혼을 목적으로 세자를 몰락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왕세자의 신속한 대응과 왕세자의 처의 형제인 쿠빌라이 칸의 사망으로 충렬왕의 음모는 무산되었다. 결국 왕세자는 1307년 충선왕으로 즉위했고, 충렬왕은 대도(Khanbaliq)의 사찰에 유폐되었다. 그는 모든 정치적 권력을 박탈당한 채 고려로 돌아왔다.[2]
정치적 분쟁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패배하고 고려로 돌아온 충렬왕은 정치에 대한 의지를 잃고 1308년 7월, 73세의 나이로 신효사에서 사망했다. 그는 말년을 사냥과 술로 보냈다고 한다. 나라가 황폐해진 것과 왕실 가족 간의 불화를 야기한 정치적 분쟁에 대해 깊은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3. 대외 관계
충렬왕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고려는 외교 관계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 '''원나라와의 관계'''
1274년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고, 같은 해 원종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면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국내 자주성을 유지하고 쿠빌라이가 보장한 자치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1] 전쟁으로 몽골에 빼앗겼던 동녕부와 탐라 지역을 되찾고, 고려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할 권리를 원에 요구하기도 했다.[1] 1278년에는 원나라에 주둔하던 몽골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청하여, 원나라 군대와 관리가 더 이상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2][3]
1290년에는 만주 지역의 몽골 장군 출신 카다안(哈丹)이 고려를 침입했으나, 충렬왕은 사치스러운 연회를 즐기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군과 원나라 지원군이 카다안의 반란군을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고려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9]
- '''일본과의 관계'''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강요로 몽골의 일본 원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1274년 일본 원정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고,[24] 원나라는 고려에 전함 300척 건조를 명하는 등 일본 원정을 준비하게 했다.[12] 이로 인해 고려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백성들의 생계가 어려워졌다.[7]
3. 1. 원나라와의 관계
1274년 5월,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24] 같은 해 음력 6월 원종이 붕어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1276년(충렬왕 2년) 3월, 원나라 관리 다루가치가 충렬왕에게 "선지(宣旨)라고 일컫고, 짐(朕)·사(赦)라고 일컫는 것이 어찌 참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지적하자, 고려는 "짐"은 "고" 또는 "과인"으로,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선지"는 "왕지"로 명칭을 격하했다.[25] 또한 원종을 마지막으로 왕의 사후 태묘에 봉안하는 위패에 올리는 묘호인 '조', '종'을 쓰지 못하고 시호만으로 칭했다. 충렬은 원에서 보낸 시호이다. 충렬왕이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으므로 몽골에서 온 칙사나 장군과 지위가 같다고 보고 국왕이 이들과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상대하는 것을 중지하고, 높은 임금의 자리에 앉아서 이들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제주도에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한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됐다.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81년 원나라 쿠빌라이 카안으로부터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 도장을 수여받았다.[26]
1290년(충렬왕 16년)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김방경(金方慶)의 활약으로 왜구·여진의 침입을 여러 차례 격퇴할 수 있었다.
원의 속국이 된 후, 원 황제 쿠빌라이 칸은 고려 국왕들이 묘호를 받는 것이 자신의 권력을 낮추는 것이라고 여겨 고려 국왕들이 앞으로 그러한 이름을 받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1260년에 왕세자가 된 충렬왕은 1271년 쿠빌라이 칸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고, 쿠빌라이 칸은 이에 동의했다.[2] 그 이후 80년 이상 동안 고려 국왕들은 몽골 왕족과 결혼했다. 왕위 계승자들은 몽골식 이름을 받았고, 다두로 보내져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했다.
충렬왕은 28년간의 몽골 제국과의 격렬한 저항 이후 고려가 굴복하여 몽골에 의해 강요된 낮은 칭호를 받은 최초의 고려 국왕이었다.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고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 되면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고려 조정에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렬왕은 국내 자주성을 유지하고 쿠빌라이가 보장한 자치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전쟁 중 몽골에 빼앗겼던 동녕과 탐라 지역을 협상을 통해 되찾았다. 또한 그는 20년 전 쿠빌라이 자신이 원종에게 항복 후 약속했던 대로, 고려가 전통과 관습을 유지할 권리를 원나라에 명확히 밝혔다.[1] 1278년 다시 원나라를 방문하여 20년 전 쿠빌라이의 약속을 구실로 고려에 주둔한 몽골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청하였다.[2][3] 그 결과 원나라 군대나 관리들은 더 이상 고려에 주둔하지 않았다. 원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고려 국왕들은 쿠릴타이에 한국과 심양(瀋王)의 지배자로 참석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4] 심지어 존경받는 원나라 다루가치들도 고려 국왕 앞에서는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으며, 그들에게 절하고 음료를 받아 존경을 표해야 했다.
1290년, 만주에 주둔하던 몽골 장군 출신이자 원나라 반란군이었던 카다안(哈丹)은 고려를 침입했다. 카다안의 반란군이 고려 영토로 더 깊숙이 진입하고, 원나라의 강제적인 무장 해제로 인해 고려군이 침입자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극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충렬왕은 사치스러운 궁중 연회로 자신과 신하들을 탐닉시키며 침입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상황을 방치하고 무책임한 태도로 국고를 낭비한 충렬왕은 카다안의 반란군과 싸우는 고려군을 지원하러 온 몽골 장군에게조차 비난을 받았다. 치악성(雉岳城)과 연기(燕岐)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고려의 방어는 나중에 효과적임을 증명했고, 이후 1만 명의 원나라 군대의 지원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다안이 이끄는 반란군은 식량과 보급품을 약탈하면서 많은 고려 백성들이 살해당했다.[9]
3. 2. 일본과의 관계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한 후,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참여하게 되었다.[24] 1274년(충렬왕 즉위년) 쿠빌라이의 강요로 일본 정벌에 동로군(東路軍)을 파견하였다.[24]1274년 원나라는 고려에 전함 300척 건조를 명하고, 일본 원정(원구)을 위해 전함 대소 900척을 준비하게 하였다.[12] 몽골의 일본 원정 준비로 인해 고려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백성들의 생계가 파괴되었다.[7] 이때 원정을 위한 군마를 기르기 위해 제주도에 군마 목장이 설립되었다.[7]
1280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이 설치되자 원나라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1281년 원나라 쿠빌라이 카안으로부터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정식 책봉, 부마고려국왕인(駙馬高麗國王印) 도장을 수여받았다.[26]
4. 문화 정책
충렬왕은 전민변정도감(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한국어)을 다시 설치하여 부패한 귀족들의 불법적인 토지와 백성 소유를 바로잡으려 했다.[5] 또한 유교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6]
그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문묘|文廟한국어)를 건립하고, 국학(성균관)을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교 교육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저명한 유학자 안향의 건의를 받아들여 장학 재단을 설립했다.[2]
5. 평가
충렬왕은 고려 국왕 중 처음으로 '왕(王)'이라는 칭호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이전의 고려 국왕들은 '조(祖)'나 '종(宗)'과 같은 묘호를 받았는데, 이는 황제에게만 사용되는 칭호였다. 그러나 고려가 원의 속국이 되면서,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은 이러한 관행이 자신의 권위를 낮춘다고 여겨 고려 국왕들이 묘호를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어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자주성을 유지하고 자치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동녕부와 탐라 지역을 원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되찾았고, 고려의 전통과 관습을 유지할 권리를 원나라에 명확히 하였다.[1] 또한, 원나라에 주둔하던 다루가치와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청하여, 원나라 군대와 관리들이 더 이상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되었다.[2][3]
충렬왕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재정비하여 부패한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고,[5] 성균관의 전신인 국학을 설립하고, 유학자 안향의 제안으로 장학 재단을 설립하는 등 유교 학문 발전을 장려하였다.[2] 또한 문묘(文廟)를 건립하여 공자를 제사하였다.
1290년, 원나라 반란군 카다안(哈丹)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충렬왕은 사치스러운 연회를 즐기며 침입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9] 이는 몽골 장군 내만대에게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고려군과 원나라 지원군이 카다안의 반란군을 진압했지만, 많은 고려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9]
충렬왕은 측근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했지만, 이후 연회와 매사냥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했다. 1298년 아들 충선왕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8개월 만에 복위하였다. 이후 충선왕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실패하고, 대도(Khanbaliq)의 사찰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돌아와 1308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는 말년에 사냥과 술로 시간을 보냈으며, 나라가 황폐해지고 왕실 가족 간의 불화를 야기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6. 가족 관계
시호 | 이름/본관 | 생몰년 | 부모 | 별칭 | 비고 | |
---|---|---|---|---|---|---|
제1비 | 장목왕후 |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 | 1259년 - 1297년 | 세조, 예쉬진 카둔 | 원성공주, 안평공주, 인명태후 | 칭기즈 칸의 증손녀 |
제2비 | 정화원비 왕씨 | 개성 | 미상 - 1319년 | 시안공 왕인[28] | 정신부주, 정화궁주 | 원종 원년(1260년) 태자비 책봉,[29] 제국대장공주에 의해 후비로 강등 |
제3비 | 숙창원비 김씨 | 언양 | 미상 | 김양감, 정주 정씨 | 숙비 | 충선왕의 후궁이 됨 |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비고 | ||
---|---|---|---|---|---|---|
1 | 소군 | 서 | 1258년 - 미상 | 시비 반주 | 미상 | |
2 | 강양공 | 자 | 미상 - 1308년 | 정신부주 왕씨 | 미상 | 공양왕의 어머니인 국대비 왕씨의 조부 |
3 | 충선왕 | 장 이지르부카mn | 1275년 - 1325년 | 장목왕후 | 계국대장공주 | 제26대 국왕 |
4 | ▨▨군[32][33] | 1278년 - 미상 | 장목왕후 | 미혼 | 조졸 |
7. 기타
- 1236년 강도에서 원종과 순경태후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6]
- 1271년 쿠빌라이의 황녀 홀도루개리미실(クトゥルク=ケルミシュ)과 혼인을 허락받았다.[17]
- 1274년 원나라에서 고려에 전함 300척 건조를 명하고, 일본 원정(원구)을 위해 전함 900척을 준비하게 하였다.[12]
- 1276년 통문관을 설치하였다.[19]
- 1278년 변발·호복령을 내렸다.[20]
- 1290년 카다안(哈丹)의 침입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겼다.[21]
- 2012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무신》에서 진원이 분했다.
- 2017년 MBC 드라마 《왕이 된 남자》에서 정보석이 분했다.
참조
[1]
논문
고려후기 상반된 질서의 공존과 그 역사적 의미 - Coexistence of contradictory order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its historical significance
https://s-space.snu.[...]
2015
[2]
웹사이트
충렬왕 - Chungnyeong of Goryeo
http://encykorea.aks[...]
[3]
웹사이트
원종(元宗) - Wonjong of Goryeo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심왕(瀋王)
http://encykorea.aks[...]
2021-11-06
[5]
웹사이트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http://encykorea.aks[...]
2021-11-06
[6]
뉴스
고려 충선왕, 유배 길에 오르다!
https://world.kbs.co[...]
2009-12-19
[7]
웹사이트
일본원정(日本遠征)
http://encykorea.aks[...]
2021-11-06
[8]
웹사이트
김방경(金方慶)
http://encykorea.aks[...]
2021-11-06
[9]
웹사이트
합단의침입(哈丹─侵入)
http://encykorea.aks[...]
2021-11-06
[10]
서적
고려와 몽골
元史, 高麗史, 集史
[11]
서적
고려와 몽골
高麗史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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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
[13]
서적
고려와 몽골
元史
[14]
서적
고려와 몽골
高麗史
[15]
서적
고려와 몽골
高麗史
[16]
문서
충렬왕의 妃
[17]
문서
禿魯花
[18]
서적
고려와 몽골
高麗史
[19]
문서
사역원
[20]
서적
고려와 몽골
高麗史
[21]
서적
나얀-카다안의 난
モンゴル帝国の興亡(下) 世界経営の時代
[22]
문서
충렬왕 행적
[23]
문서
고려 원종 원년
[24]
서적
고려사 고종 23년
고려사
[25]
웹사이트
네이버 국역 동국통감 충렬왕 2년 3월
https://terms.naver.[...]
[26]
서적
고려사 충렬왕 7년
고려사
[27]
문서
최충헌의 손녀
[28]
문서
고려 신종의 손자
[29]
서적
고려사 원종 원년
고려사
[30]
서적
고려사절요 충렬왕 23년
고려사절요
[31]
서적
고려사 충렬왕 31년
고려사
[32]
서적
고려사 열전2 후비2
고려사
[33]
서적
고려사 충렬왕 1년 및 동국통감 고려기
고려사, 동국통감
[34]
문서
고려 고종의 딸 수흥궁주의 아들
[35]
문서
고려 고종의 손자이며 안경공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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