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테오도어 페르디난트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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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테오도어 페르디난트 그륀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로, 19세기 독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뤼덴샤이트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하며 청년 헤겔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륀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을 독일 철학과 결합하려 했으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 학문적 경력을 쌓지 못하고 망명 생활을 했다. 1848년 혁명 이후 독일로 돌아와 프로이센 국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으며, 동생 알베르트 그륀 또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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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테오도어 페르디난트 그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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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카를 테오도어 페르디난트 그륀 |
원어 이름 | Karl Theodor Ferdinand Grün |
출생 | 1817년 9월 30일 |
출생지 | 뤼덴샤이트 |
사망 | 1887년 2월 18일 (69세) |
사망지 | 빈 |
국적 | 독일 |
직업 | 저널리스트 정치 이론가 정치인 |
분야 | 철학, 정치학, 사회주의 |
사상과 활동 | |
사상 | 헤겔 좌파 독일 사회주의 |
활동 | 저널리즘 정치 활동 저술 |
주요 저서 | |
철학적 및 사회주의적 연구 | Die soziale Bewegung in Frankreich und Belgien (1845) |
루트비히 퓌르바흐와 새로운 시대의 종말 | Ludwig Feuerbach in seinem Briefwechsel und Nachlass sowie in seiner philosophischen Charakterentwicklung (1874) |
문화사 | Kulturgeschichte des 16. Jahrhunderts (1880)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뤼덴샤이트에서 태어나 헤센 주 베츨라의 김나지움을 졸업하였다. 이후 본 대학교와 베를린에서 철학, 프로테스탄트 신학, 문헌학 등을 공부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하였고 헤겔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자우어란트 지방에 있는 뤼덴샤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헤센 주 베츨라의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에는 교내에서 주간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835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본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했다. 본 대학교 재학 중에는 훗날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가 되는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38년에는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문헌학과 철학을 연구했으며, 이 시기 헤겔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2. 2. 교육 과정
헤센 주 베츨라의 김나지움에 다니며 교내 주간 신문을 발행하는 활동을 했다. 1835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본 대학교에 진학하여 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했다. 본 대학교 재학 중 카를 마르크스를 만나 교류했다. 1838년에는 베를린으로 가서 문헌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이 시기에 헤겔 좌파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3. 청년 헤겔주의와 '진정한 사회주의'
그륀은 본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하고 청년 헤겔 학파의 급진적인 철학 서클에 참여했다. 이 시기 그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유물론'과 동시대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륀은 이러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청년 헤겔주의 철학,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 그리고 프랑스 사회주의를 민주주의 정치와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그는 모세 헤스를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주의'(Wahren Sozialismusde) 그룹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독일의 비판 철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운동이 서로 보완적이며,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이 두 흐름이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륀 역시 비판 철학이 사회주의와 만나고, 사회주의가 철학적 비판을 수용해야만 진정한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 소외가 현실 사회의 부당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지만, 포이어바흐와 달리 '행동의 철학'을 강조하며 사회의 정치·경제적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혁명적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이후 저술 활동과 정치 활동의 바탕이 되었으나, 물질적 조건을 중시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는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3][6]
3. 1. 청년 헤겔학파와의 관계
1835년부터 1838년까지 그는 본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신학을, 베를린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시절 그륀은 카를 마르크스를 만났고, 두 사람은 청년 헤겔 학파의 급진적인 철학 서클에 참여하며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유물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마르크스와는 경쟁 관계로 인해 개인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그륀은 동시대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에도 큰 영향을 받아, 이를 청년 헤겔 학파 및 포이어바흐 철학, 민주주의 정치와 결합하고자 했다. 그는 청년 헤겔 학파 철학자이자 노동 시오니즘의 선구자인 모세 헤스를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주의자' 그룹과 교류했다. 이 그룹은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비판 철학이 사회주의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 현실의 물질적 조건보다 이념을 앞세운다며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2][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 등에서 그륀을 비판했으며, 특히 그의 저서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 1845년)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6]
그륀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필요한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관점을 받아들여, 신에 대한 관념이 인간 사회의 소외되고 부당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사변적인 포이어바흐와 달리, 그륀은 '행동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종교에서의 정신적 소외는 사회에서의 정치·경제적 소외가 혁명적 행동을 통해 극복될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청년 헤겔학파처럼 그륀 역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 발전과 독일의 비판 철학 혁명을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여겼다.
또한 그는 1848년 3월 혁명 이전 시기인 ''포어매르츠'' 시대의 여러 급진적 지식인들, 예를 들어 아르놀트 루게, 브루노 바우어,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헤르베크 등과 교류했다. 1843년에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한 브루노 바우어의 글 '유대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바우어의 입장을 비판했다.
3. 2. '진정한 사회주의' 사상
그륀은 본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청년 헤겔 학파의 급진적인 철학 서클에 참여했고,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유물론'과 동시대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사상들을 청년 헤겔 학파 철학 및 민주주의 정치와 결합하고자 했다.1843년 쾰른에 거주하며 모제스 헤스 등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받아들여 "진정한 사회주의"(Wahren Sozialismus|de)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세 헤스를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주의자' 그룹과 관련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일의 비판 철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이론을 병행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륀은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비판 철학이 사회주의와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륀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필요한 물질적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관점을 수용하여, 신에 대한 관념이 인간의 사회성('종의 존재')이 소외된 표현이며 현실 사회의 부당한 조건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동적인 경향을 보인 포이어바흐와 달리, 그륀은 '행동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종교에서의 정신적 소외는 사회에서의 정치적, 경제적 소외가 혁명적 행동을 통해 극복될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다.
파리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을 비롯한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de, 1845년)은 당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이해를 보여준다.[6]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자라고 비판했으며[2], 특히 그륀의 사상이 물질적 조건보다 이데올로기(관념)를 부당하게 우선시한다고 보았다.[3]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에서 그륀을 비롯한 '진정한 사회주의' 사상가들을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3. 3. 포어메르츠 시대의 활동
헤센 주 베츨라의 김나지움 재학 시절부터 급진적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여 불법적인 민주주의 관련 소책자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활동을 도왔다. 1835년부터 1838년까지 본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신학을, 베를린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박사 학위를 준비했다. 본 대학교 재학 중 카를 마르크스와 알게 되었으며, 두 사람 모두 청년 헤겔 학파의 급진적인 철학 모임에 참여하며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유물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륀은 또한 동시대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청년 헤겔 학파 및 포이어바흐 철학, 민주주의 정치와 결합하고자 했다. 그는 모세 헤스를 중심으로 한 '진정한 사회주의' 그룹과 교류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을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자라고 비판했다.[2]) 그륀은 아르놀트 루게, 브루노 바우어,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헤르베크 등 포어메르츠 시대의 여러 급진적 인물들과도 교류했다.그륀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생존을 위해 공동체가 필요한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그는 포이어바흐의 관점을 받아들여, 신에 대한 관념이 인간의 사회성 또는 '종적 존재'가 소외된 표현이며 현실 사회의 소외되고 부당한 조건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포이어바흐와 달리 '행동의 철학'을 강조했는데, 종교에서의 정신적 소외는 사회에서의 정치·경제적 소외가 혁명적 행동을 통해 극복될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많은 청년 헤겔 학파처럼 그륀은 프랑스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과 독일 비판 철학의 혁신을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헤스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를 따라, 비판 철학이 사회주의가 되고 사회주의가 철학적 비판을 수용할 때 인간 해방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견해가 이데올로기에 부당한 우선권을 부여한다고 보고 거부하게 되었다.)[3]
1839년에는 첫 저서인 Wanderungen Ostsee und Rhein|발트해 연안과 라인강으로의 여행de을 출간하여 카를 구츠코프에게 헌정했다. 1842년 독일로 돌아왔으나,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공화주의 및 사회주의적 입장을 표명한 그의 급진적인 저술 활동과 정치적 연관성 때문에 학문적 경력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마르부르크 대학교는 그의 박사 후 과정 등록을 거부했고, 프로이센 당국은 그를 '정치범' 명단에 올렸다. 여러 독일 주에서 추방당한 그는 쾰른 등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저널리즘, 강연, 교사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Der Sprecher|데어 슈프레허de('연설자')와 월간지 Bielefelder Monatsschrift|빌레펠더 몬아트스슈리프트de 등 여러 급진적인 출판물에 기고하고 편집했으며, 이들 중 다수는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 1843년에는 브루노 바우어가 유대인의 시민권 부여에 반대한 글 '유대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바우어의 입장을 비판했다. 같은 해 6월부터 가족과 함께 쾰른에 거주하며 모제스 헤스 등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받아들여 '진정한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베젤에서 Der Sprecherde지를 편집했으며, 이후 Triererischen Zeitung|트리어 신문de의 편집을 맡았으나 신문의 급진적 성향으로 인해 1844년 발행이 정지되었고, 그륀은 프로이센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브뤼셀에서 페르디난트 프라이리히라트를 만났고, 파리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e (1845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
4. 초기 저술 활동 및 망명
그륀은 청년 시절 본과 베를린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며 카를 마르크스 등과 교류했고 헤겔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 특히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진정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초기 저술 활동과 정치적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활동으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을 받아 1844년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망명 기간 동안 그는 브뤼셀과 파리 등지에서 페르디난트 프라이리히라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등 당대의 여러 급진적 사상가 및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전파했다. 특히 프루동과의 교류는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 시기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저작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de, 1845년)을 남기기도 했다.[4] 1848년 혁명이 발발하자 독일에 잠시 귀국하여 프로이센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정치 활동에 참여했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투옥되었다가 다시 망명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6]
4. 1. 초기 저술 활동
1835년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38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문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이 시기 헤겔 좌파의 영향을 받았다.1839년 첫 저서인 『발트해 연안과 라인강으로의 여행』(Wanderungen Ostsee und Rheinde)을 출간하여 카를 구츠코프에게 헌정했다. 1843년 6월부터는 가족과 함께 쾰른으로 이주하여 모제스 헤스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했다. 이 무렵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의 사상을 받아들여 "진정한 사회주의"(Wahren Sozialismusde)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베젤에서 『Der Sprecher』(Der Sprecherde)라는 신문을 편집했으며, 이후 『트리어 신문』(Triererischen Zeitungde)을 기관지로 발행했다. 그러나 신문의 급진적인 논조가 문제가 되어 1844년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발행 정지 처분을 받았고, 그륀 자신도 프로이센에서 추방되었다. 추방 후 브뤼셀에서는 페르디난트 프라이리히라트를 만났고, 파리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을 비롯한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의 주요 저서 중 하나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de, 1845년)은 이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6]
4. 2. 망명 생활
1844년, 가난과 검열의 압박, 체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그륀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브뤼셀로 이주하여 급진적인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이리히라트와 교류했으며, 그곳에서 마르크스와 다시 마주쳤다. 그러나 벨기에 정부는 그를 마르크스 및 다른 독일 난민들과 함께 추방했고, 그는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그는 아나키스트 철학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 친구가 되었다. 프루동의 사상은 그륀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륀은 프루동의 사상을 독일 급진파 사이에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륀은 프루동에게 헤겔 철학, 청년 헤겔주의, 포이어바흐 철학을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파리에는 1830년대와 1840년대 러시아와 독일의 청년 헤겔 서클에 참여했던 러시아 망명자 미하일 바쿠닌도 있었는데, 그륀은 그와도 교류했다. 1845년, 그륀은 프랑스어권 세계 사회주의의 주목할 만한 초기 역사를 담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을 출판했다.[4] 그의 망명 생활은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이어졌으며, 저널리즘 활동 외에 한동안 인쇄업자로 일하기도 했다.1848년 2월, 그륀은 루이 필리프 국왕에 대항한 프랑스 혁명과 제2 공화국의 수립을 열렬히 환영했다. 한 달 후, 혁명이 여러 독일 국가로 확산되자 그륀은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트리어에 정착하여 지역 '민주 클럽'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고, 정치 저널리즘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849년, 그는 비틀리히에서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 국민 의회에서 극좌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혁명의 기세가 꺾이자 프로이센 정부는 의회를 해산했다. 이에 그륀은 대규모 시위 집회를 조직하고 연설했으며, 이는 지역 봉기와 프륌 무기고 습격 시도로 이어졌다. 비록 무기고 습격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륀은 봉기에 대한 '지적 책임'을 물어 8개월간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나폴레옹 3세 정권과 그의 1851년 쿠데타로 드러난 카이사르적 야망에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다시 브뤼셀로 돌아갔다. 그륀은 1850년부터 1861년까지 브뤼셀에 머물며 주로 개인 교사로 일하는 한편,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는 격문을 썼다. 1859년에는 브뤼셀 대학교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5. 1848년 혁명과 이후 활동
1848년 혁명 당시 독일로 돌아와 정치 활동에 참여하여 프로이센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나, 혁명 실패 후 투옥되었다가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4] 이후 브뤼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하이델베르크, 빈 등지에서 활동하며 저술, 강연, 반(反)프로이센 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빈에서는 포이어바흐의 유고 정리에 힘쓰다 생을 마감했다.[4] 그의 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6]
5. 1. 1848년 혁명 참여
1848년 2월, 그륀은 루이 필리프 국왕에 대항한 프랑스 혁명과 제2 공화국의 수립을 지지했다. 한 달 뒤 혁명이 독일 여러 국가로 확산되자, 그륀은 독일로 돌아갔다. 그는 트리어에 정착하여 지역 '민주 클럽'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저널리즘 활동을 재개했다.1849년, 그는 비틀리히(Wittlich)에서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의회 내 극좌파 그룹에 소속되었다. 혁명의 동력이 약해지자 프로이센 정부는 의회 해산을 결정했다. 이에 그륀은 대규모 항의 시위를 조직하고 연설했으며, 이는 지역 봉기와 프뤼름(Prüm)의 무기고 습격 시도로 이어졌다.
그륀은 무기고 습격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봉기에 대한 '지적 책임' 또는 관여 혐의로 기소되어 8개월간 구금되었다.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이후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루이 보나파르트 정권에 반대하여 브뤼셀로 이주했다.
5. 2. 망명 이후 활동
1844년, 그륀은 가난과 검열, 체포의 위협을 피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브뤼셀로 이주하여 급진적인 시인 페르디난트 프레이리히라트와 교류했으며, 카를 마르크스와도 다시 만났다. 그러나 벨기에 정부에 의해 마르크스 등 다른 독일 망명자들과 함께 추방되어 파리에 정착했다.[4]파리에서 그는 아나키스트 철학자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 친구가 되어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고, 프루동의 사상을 독일 급진파에게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륀은 프루동에게 헤겔 철학, 청년 헤겔주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철학을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파리에 망명 중이던 러시아의 미하일 바쿠닌과도 교류했다. 1845년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초기 역사서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을 출판했다.[4][6] 망명 생활 동안 그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저널리즘 활동 외에 인쇄업자로 일하기도 했다.[4]
1848년 2월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 루이 필리프 국왕이 퇴위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한 달 뒤 독일 여러 지역으로 혁명이 확산되자 독일로 돌아가 트리어에 정착했다. 그는 지역 '민주 클럽'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고 정치 저널리즘 활동을 재개했다. 1849년에는 비틀리히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프로이센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극좌파 그룹에 속했다.[4]
그러나 혁명의 기세가 꺾이자 프로이센 정부는 의회를 해산했다. 그륀은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연설했으며, 이는 지역 봉기와 프륌(Prüm) 무기고 습격 시도로 이어졌다. 비록 습격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봉기에 대한 '지적 책임'을 물어 체포되어 8개월간 구금되었다. 무죄 판결 후 석방되었지만, 다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4]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와 제정 수립 움직임에 격렬히 반대했기 때문에 1850년부터 브뤼셀로 돌아가 1861년까지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주로 개인 교사로 일하면서 나폴레옹 3세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1859년에는 브뤼셀 대학교에서 강연하기도 했다.[4]
1861년 독일로 돌아온 후, 1862년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신문 기사를 쓰고 학교에서 문학사를 가르쳤다. 1865년에는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으며, 1866년을 전후하여 반(反)프로이센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1868년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 정착하여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고를 정리하고 출판하는 작업에 관여했다. 그는 빈에서 사망했다.[4]
그의 주저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 등에서 비판받기도 했다.[6] 그 외에도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포이어바흐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4]
6. 후기 활동 및 저술
1861년 사면령으로 프로이센 영토로 돌아온 그륀은 독일 내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1862년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 문학사를 가르쳤고, 1865년에는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하여 민주주의 '인민당'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관여했다. 1868년부터는 빈에 정착하여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그의 저술 활동은 생애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초기 저서로는 1839년 출간된 『발트해 연안과 라인강으로의 여행』(Wanderungen Ostsee und Rheinde)이 있다. 1845년에는 그의 주저로 평가받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de)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 등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비판받기도 했다.[6]
빈 시기에는 특히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연구에 몰두하여 그의 서신과 유고를 정리해 출판하고, 2권으로 된 포이어바흐의 철학적 전기를 저술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유물론 철학에 대한 비판서를 비롯하여 프리드리히 폰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에 대한 저작과 철학, 예술, 문학, 역사에 관한 여러 글을 남겼다.
6. 1. 빈 시기 활동
1861년 사면령에 따라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그륀은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고, 1862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여 문학사를 가르치며 ''노이에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에 기고했다. 1865년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한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 중 하나인 민주주의 '인민당'에 참여하며 프로이센의 패권주의적 야심에 반대하는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866년 발발한 보오 전쟁에서는 호엔촐레른의 야욕에 대한 반감으로 반 프로이센 입장을 취했다. 1867년에는 존 스튜어트 밀, 바쿠닌, 주세페 가리발디 등이 참석한 제네바 평화 자유 연맹 국제 회의에 참여하기도 했다.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륀은 1868년 빈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빈에서 그는 정기 간행물 Demokratische Korrespondenzde를 편집하고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서신과 사후 저작물을 정리하여 출판했으며, 포이어바흐에 대한 2권짜리 철학적 전기를 저술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유물론 철학에 대한 비판서를 비롯하여 철학, 예술, 문학, 역사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겼다.
1871년, 그륀은 파리 코뮌 봉기를 지지했으며, 1870년대에는 노동자 교육 서클 창설을 지원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기여했다. 이 서클은 훗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의 모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륀은 1887년 빈에서 사망했다.[6]
6. 2. 노동 운동과의 관계
1861년 사면 이후 프로이센으로 돌아온 그륀은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1865년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한 후, 그는 민주주의적인 '인민당'(훗날 독일 사회민주당의 모태 중 하나가 됨)에 참여하며 프로이센의 패권주의적 야심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866년 보오 전쟁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지지보다는 호엔촐레른의 팽창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반 프로이센적인 태도를 취했다.국제적인 연대 활동에도 참여하여, 1867년에는 제네바에서 열린 평화 자유 연맹의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는 존 스튜어트 밀, 미하일 바쿠닌, 주세페 가리발디와 같은 당대의 주요 사상가 및 활동가들이 함께했다.
1868년 빈으로 이주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신념은 이어졌다. 1871년에는 파리 코뮌의 봉기를 지지하며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또한 187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 힘썼는데, 그가 지원했던 노동자 교육 서클은 훗날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정당이 창설되는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륀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노동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1887년 빈에서 생을 마감했다.
7. 사망
1865년에는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으며, 1866년 무렵에는 반프로이센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1868년부터는 빈에 정착하여 포이어바흐의 유고 간행 작업에 관여했다. 이후 빈에서 사망했다.
8. 형제 알베르트 그륀
카를 그륀의 남동생인 알베르트 그륀 역시 1830년대와 1840년대 독일의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알베르트 그륀은 1822년 5월 31일 뤼덴샤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세이던 1836년부터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형 카를의 영향을 받아 청년 헤겔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불법적인 민주주의 조직에 가담했고, 포이에르바흐의 철학과 푸리에, 프루동 등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여러 급진적인 성향의 간행물에 글을 기고했으며, 1846년에는 국왕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벨기에 브뤼셀로 피신하여 현대 연극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로 돌아와 베를린에서 활동했다. 그는 독일 최초의 노동 조합 중 하나로 평가받는 '기계 제작자 협회'를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1849년에는 작센 혁명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으며, 팔라티나테와 바덴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에도 참여했다. 바덴 혁명 가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프랑스 알자스 주의 수도인 스트라스부르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문학 강의를 하고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860년대에 사면을 받았지만 독일에 돌아가지 않고 스트라스부르에 계속 머물렀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이 알자스를 병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륀은 다양한 직책에서 교사와 가정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독일어 일반 협회의 회원으로서 프랑스와 독일 민족 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을 지지했다. 알베르트 그륀은 역사, 정치, 문학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출판했다. 그는 1904년 4월 22일 스트라스부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9. 주요 저작
카를 그륀의 주요 저작들은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의 몇몇 논문들은 청년 헤겔주의 저술 선집에 포함되었다. 그의 독일어 출판물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원제 | 한국어 제목 |
---|---|---|
1843 | Die Judenfrage. Gegen Bruno Bauer.deu | 유대인 문제. 브루노 바우어 반대 |
1844 | Friedrich Schiller als Mensch, Geschichtschreiber, Denker und Dichter.deu | 인간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사상가로서, 시인으로서의 프리드리히 실러 |
1845 | Die soziale Bewegung in Frankreich und Belgien. Briefe und Studien.deu |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 편지 및 연구 |
1846 | Über Goethe vom menschlichen Standpunkte.deu | 인간적 관점에서 본 괴테 |
1860 | Louis Napoleon Bonaparte, die Sphinx auf dem französischen Kaiserthron.deu |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황제의 왕좌 위의 스핑크스 |
1861 | Italien im Frühjahr 1861.deu | 1861년 봄의 이탈리아 |
1872 | Kulturgeschichte des 16. Jahrhunderts.deu | 16세기의 문화사 |
1874 | Ludwig Feuerbachdeu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2권) |
1876 | Die Philosophie in der Gegenwart.deu | 현재의 철학 |
1880 | Kulturgeschichte des 17. Jahrhunderts.deu | 17세기의 문화사 |
그는 또한 1847년에 프루동(Proudhon)의 Système des contradictions économiques ou Philosophie de la misère|경제적 모순의 체계 또는 빈곤의 철학fra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출판했으며, 1868년에는 급진 시인 루트비히 뵈르네의 Briefe aus Paris|파리에서 온 편지deu를 편집하여 출판했다.
그의 독일어 저작 선집은 마누엘라 쾨페(Manuela Köppe)에 의해 철학적 서문과 함께 출판되었다.
- Grün, K., ''Ausgewählte Schriften in zwei Bänden.'' Ed. M. Köppe. 베를린, 2005. (2권으로 된 선집)
10. 평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와 『공산당 선언』에서 그륀을 비판받은 사회주의자 중 한 명으로 언급한다. 특히 그의 주요 저서인 『프랑스와 벨기에의 사회 운동』(''Die socialen Bewegungen in Frankreich und Belgien'', 1845년)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6] 그 외에도 그륀은 프리드리히 폰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포이어바흐에 대한 저작을 남겼다.
참조
[1]
문서
Other acquaintances included the writers Ludwig Börne, Georg Büchner, David Kalisch, Georg Herwegh, Ludwig Büchner, Edgar Bauer, Victor Hugo, George Sand and Eugène Sue.
[2]
서적
The Holy Family
1844
[3]
서적
Ausgewählte Schriften in zwei Bänden
Berlin
2005
[4]
서적
The Poverty of Philosophy
1847
[5]
간행물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9
International Publishers: New York
1977
[6]
서적
ドイツ社会民主主義史(上)
ミネルヴァ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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