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헤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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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년 헤겔주의는 19세기 초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사상 조류로,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을 계승, 비판적으로 발전시켰다. 헤겔 철학과의 관계, 종교 비판, 정치·사회 비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다비트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카를 마르크스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국가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유물론적 입장을 발전시켰으며, 1840년대 프로이센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화되며 소멸했다. 청년 헤겔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등 후대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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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헤겔주의 | |
---|---|
기본 정보 | |
이름 | 청년 헤겔주의 |
다른 이름 | 좌파 헤겔주의 급진 헤겔주의 신헤겔주의 |
역사적 맥락 | |
시기 | 1830년대 ~ 1840년대 |
영향 | 헤겔 철학 프랑스 혁명 계몽주의 젊은 독일 |
주요 사상 | |
핵심 개념 | 비판적 철학 정치적 급진주의 종교 비판 소외 이론 변증법적 방법론 |
목표 | 헤겔 철학의 진보적 해석 사회적 변혁 추구 자유와 해방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루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모제스 헤스 카를 그륀 |
관련 인물 | 에드거 바우어 막스 폰 젠버그 |
학파의 분열 | |
주요 논쟁 | 종교 비판과 유물론 국가와 시민 사회 개인과 사회의 관계 |
분화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막스 슈티르너의 개인주의 마르크스주의 |
영향 및 유산 | |
영향 |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실존주의 비판 이론 |
유산 | 철학적 비판의 중요성 강조 사회 변혁에 대한 영감 근대성에 대한 분석적 접근 |
관련 주제 | |
관련 주제 | 헤겔주의 우파 헤겔주의 변증법 독일 관념론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실존주의 비판 이론 |
참고 자료 | |
참고 자료 |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 - Young Hegelians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 - Young Hegelian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Young Hegelians |
2. 헤겔 철학과의 관계
1831년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을 계승한 학자들은 정치적·종교적 성향에 따라 크게 '좌파'(Left) 또는 '젊은'(young) 헤겔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우파'(Right) 또는 '늙은'(old) 헤겔주의자들로 나뉘었다.[1] 우파 헤겔리안들은 헤겔의 변증법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고, 당시 프로이센(Prussia) 국가를 이성과 자유가 구현된 이상적인 형태로 보았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입헌군주제를 택한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정치적으로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1]
반면,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이 강조한 이성과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현실의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 이들은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수용하면서도, 현실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운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1835년 다비트 슈트라우스(David Strauss)가 쓴 『예수의 생애』는 '젊은 헤겔주의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1]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복음서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고 신화로 해석했으며, 그리스도의 도래가 인류 전체를 통해 실현된다고 주장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다.[1]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아놀드 루게(Arnold Ruge)가 편집한 『할레 연보』(Hallische Jahrbücher, 1838~1841)와 『독일 연보』(Deutsche Jahrbücher, 1841~1843)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다.[2] 이들은 가톨릭과 정통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했고, 초기에는 프로이센의 점진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1837년에 설립된 베를린의 의사 클럽(후에 '자유'(the Free)로 알려짐)은 (Bruno Bauer)를 중심으로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출판하기도 했다.[2]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ederick William IV)가 즉위하면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운동은 더욱 급진화, 정치화되었다. 새 국왕은 이전보다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제한했고, 이에 따라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국가를 역사의 완성으로 보는 헤겔의 교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3]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을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는 (republicanism)로 돌아섰다. (Moses Hess)와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겔주의를 공산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다.[3]
2. 1. 헤겔 철학의 계승과 발전
1831년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은 정치적·종교적 성향에 따라 '좌파'(Left) 또는 '젊은'(young) 헤겔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우파'(Right) 또는 '늙은'(old) 헤겔주의자들로 나뉘었다.[1] 우파 헤겔리안들은 헤겔의 변증법이 완성되었다고 보았고, 당시 프로이센(Prussia) 국가를 이성과 자유가 구현된 이상적인 형태로 여겼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입헌군주제를 택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후진적인 평가를 받았다.[1]반면,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철학을 바탕으로,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1] 이들은 처음에는 정치보다는 종교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종교, 보건, 교육 장관인 카를 폰 슈타인 쮸 알텐슈타인(Karl vom Stein zum Altenstein)의 영향으로 종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1]
1835년 다비트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저서 『예수의 생애』는 '젊은 헤겔주의자들'이 하나의 독립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1] 슈트라우스는 이 책에서 복음서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정하고 신화로 해석했으며, 그리스도의 도래가 인류 전체를 통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헤겔 학파 내부뿐만 아니라 신학계 전반에 큰 논쟁을 일으켰다.[1]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통합에 기여한 것은 아놀드 루게(Arnold Ruge)가 편집한 잡지 『할레 연보』(Hallische Jahrbücher)(1838~1841)와 『독일 연보』(Deutsche Jahrbücher)(1841~1843)였다.[2] 이 잡지들은 가톨릭과 정통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하고, 초기에는 프로이센의 점진적 개혁을 지지하는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1837년에 설립된 베를린의 의사 클럽(후에 '자유'(the Free)로 알려짐)은 (Bruno Bauer)가 이끌었으며, 반기독교적인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출판했다.[2]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면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운동은 더욱 급진화, 정치화되었다. 새 국왕은 이전보다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제한했고, 이에 따라 젊은 헤겔주의자들은 프로이센 국가를 역사의 완성으로 보는 헤겔의 교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3]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을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는 (republicanism)로 돌아섰다. (Moses Hess)]와
2. 2. 헤겔과의 결별
1831년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은 정치적·종교적 성향에 따라 '좌파'(젊은 헤겔학파)와 '우파'(늙은 헤겔학파)로 나뉘었다. 우파 헤겔리안들은 헤겔의 변증법이 프로이센(Prussia) 국가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았으나, 젊은 헤겔학파는 헤겔의 이성과 자유 개념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의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1]1835년 다비트 슈트라우스(David Strauss)의 『예수의 생애』는 '젊은 헤겔학파'라는 독립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아놀드 루게(Arnold Ruge)가 편집한 『할레 연보』(Hallische Jahrbücher, 1838~1841)와 『독일 연보』(Deutsche Jahrbücher, 1841~1843)를 통해 가톨릭과 정통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했다.[3] 베를린의 의사 클럽(후에 '자유'(the Free)로 알려짐)은 (Bruno Bauer)를 중심으로 반기독교적 활동을 펼쳤다.[2]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ederick William IV)가 즉위하면서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관용이 제한되자, 젊은 헤겔학파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들은 헤겔의 국가 철학과 결별하고, 기독교를 거부하며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또한, 대부분 (republicanism)로 전향했으며, (Moses Hess)와 마르크스, 엥겔스는 헤겔주의를 공산주의와 결합했다.
젊은 헤겔학파는 (Johann Gottlieb Fichte)의 사상, 특히 인간에 의한 세계의 자기 초월 개념을 수용했다. 그러나 『독일 연보』가 탄압받으면서, 젊은 헤겔학파는 와해되기 시작했다.[3]
3. 주요 분파 및 사상가
청년 헤겔학파는 크게 종교 비판, 정치 및 사회 비판, 그리고 기타 분파로 나눌 수 있으며, 주요 분파 및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다.
분파 | 주요 사상가 | 사상 |
---|---|---|
종교 비판 | 다비트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 기독교 교리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비판, 무신론적 경향 |
정치 및 사회 비판 | 아놀드 루게, 카를 마르크스, 막스 슈티르너, 에드가 바우어 | 프로이센의 전제정치 비판, 민주주의, 공화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정치적 입장 |
기타 | 아우구스트 폰 치에슈코프스키, 카를 슈미트 | 헤겔 철학을 행동철학으로 발전,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자아실현 강조 |
이들은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각자의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다비트 슈트라우스는 복음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신화적 해석을 제시했다.[4]
- 브루노 바우어는 예수의 역사적 실존 자체를 부정했다.[4]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종교를 인간 심리의 투영으로 보았다.[4]
- 아놀드 루게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장했다.[7]
- 카를 마르크스는 초기에는 종교 비판에 공감했으나, 이후 독자적인 유물론적 역사관을 발전시켰다.[5]
- 막스 슈티르너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강조했다.
- 에드가 바우어는 가장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11]
- 아우구스트 폰 치에슈코프스키는 헤겔 철학을 행동철학으로 발전시키려 했다.[10]
- 카를 나우베르크는 베를린에서 헤겔 철학을 강의했던 인물로, 1842년 브루노 바우어와 함께 강의 자격을 박탈당했다.[6]
1831년 헤겔 사후 독일 철학자들은 정치적·종교적으로 급진적인 '좌파'(Left) 또는 '젊은'(young) 헤겔리안과 보수적인 '우파'(Right) 또는 '늙은'(old) 헤겔리안으로 대략 나눌 수 있다. 우파 헤겔리안들은 역사의 변증법이 끝났다고 믿었다. 반면 젊은 헤겔리안들은 헤겔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의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1]

'''Die Freiende''' (자유로운 자들)은 19세기 베를린 대학교에서 결성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브루노 바우어가 주도했다. 막스 슈티르너, 아놀드 루게,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통일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대표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젊은 헤겔학파"로 여겨졌다. 그들은 주로 베를린 중심부의 히펠 와인바에서 만났다.[2][3]
3. 1. 종교 비판: 다비트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다비트 슈트라우스는 1835년에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de, 영어: The Life of Jesus/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를 저술하여 헤겔적 틀 안에서 복음서의 초자연적 요소와 기독교 교회가 절대 진리의 유일한 전달자라는 생각에 반박했다.[4] 그는 복음서 이야기가 당시 유대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신화적 반응이라고 믿었다. ‘무한한 이성’ 또는 ‘절대자’(즉, 헤겔의 폭넓은 신 개념)가 유한한 인간 안에 화신될 수 있다는 생각은 특히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은 점차 타락하여 권력자들에 의해 탈취되었고, 세상 사람들에게 현세에서 권력에 대한 반항을 삼가면 내세에서 상을 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조종하고 억압하는 데 이용되었다.[4] 슈트라우스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개인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약으로부터 물려받은 메시아적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한 신화"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브루노 바우어는 더 나아가 예수의 전 생애가 신화라고 주장했다.[4] 그는 당시 존재하던 어떤 로마 기록에도 "나사렛 예수아"라는 이름의 사람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그의 저서 ''연대기''에서, 그리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그의 저서 ''유대 고대사''에서 실제로 그러한 언급을 하고 있지만, 바우어는 고대의 거의 모든 저명한 역사적 인물들이 다른 작품들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 (예: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희곡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롱하는 것)을 근거로, 예수에 대한 그러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예수의 전 생애가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4]
루트비히 폰 파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영어: The Essence of Christianity, Das Wesen des Christentumsde)이라는 저서에서 신앙인의 심리적 프로파일을 작성했다. 그는 신앙인이 환상을 세상에 투영하도록 부추기는 교리를 제시받는다고 주장한다. 신앙인들은 기적을 믿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불멸하는 신을 상상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결점과 단점의 정반대를 나타내는 신을 이상화하도록 격려받는다.[4]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그의 ''헤겔의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를 묘사하기 위해 "아편(opium of the peopl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5]
3. 2. 정치 및 사회 비판: 아놀드 루게, 카를 마르크스, 막스 슈티르너
아놀드 루게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주장하며, 프로이센의 전제정치를 비판했다.[7] 그는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을 옹호했으며, 역사는 자유의 실현을 향한 진보적인 발전이고, 자유는 합리적인 일반 의지의 창조물인 국가에서 달성된다는 헤겔의 믿음을 공유했다. 그러나 루게는 헤겔이 미래에 대해 폐쇄적인 역사 해석을 제시하여 새로운 것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고 비판했다.[7]카를 마르크스는 초기에는 젊은 헤겔학파의 영향을 받아 프로이센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공격하는 전략에 공감했다. 그러나 이후 독자적인 유물론적 역사관과 자본주의 비판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젊은 헤겔학파와 결별하고, 『독일 이데올로기』와 같은 저술에서 그들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체제 권력의 기반이 아니라 자본 소유(기술, 토지, 자본, 특히 인적 노동력을 사용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과정)가 체제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종교를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구성 요소이자 전합리적 사고방식으로 간주하고, 지배 엘리트가 정치 권력의 진정한 기반을 포함한 사회적 관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묘사했다.[5]
막스 슈티르너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자아실현을 강조하며, 모든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을 주장했다. 그는 때때로 젊은 헤겔파들과 어울렸지만, 그들과는 매우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저서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그들을 풍자하고 조롱했다.
에드가 바우어는 브루노 바우어의 동생으로, 로렌스 S. 스테펠레비치에 따르면 청년 헤겔학파에서 가장 무정부주의적인 인물이었다.[11] 그는 초기 저술에서 정치 테러의 이론적 정당화를 찾아볼 수 있다고 평가받는다.[11]
3. 3. 기타 분파
아우구스트 폰 치에슈코프스키는 헤겔의 역사철학을 행동철학으로 발전시키려 했다.[10] 그는 헤겔의 세계사관에 초점을 맞추어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함으로써 헤겔 철학 자체를 더 잘 수용하도록 개혁했다. 그의 저서 『역사철학 서설(Prolegomena to Historiosophy)』에서 치에슈코프스키는 우리가 현실을 사유하는 단계였던 예술(과거)에서 이상을 사유하는 철학(현재)으로 옮겨왔으며, 헤겔의 철학이 철학의 집대성이자 완성이었기 때문에 철학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 즉 행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10]카를 슈미트(Karl Schmidt)는 그의 저서 『이해의 영역과 개인』(Das Verstandestum und das Individuum)에서 헤겔주의의 역사를 검토하고 "나는 오직 나 자신일 뿐이다"라는 진리를 도출했다. 변증법의 끝에서 개인은 "정신의 은총으로 존재하며, 정신의 법칙은 정신 자체에 적용되어 무덤으로 끌려간다". 개인은 변증법의 증거로 남고,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가 합쳐지는 곳에서 개인은 폐허 위에 서 있다. 개인은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는 다르다. 유일자의 고유한 본성은 비교에서 유래하지만, 개인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며 모든 관념의 존재이다. 그것은 특이성과 고유성 그 자체일 뿐이다. 카를 슈미트는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젊은 헤겔주의자였으며, 아마도 주목할 만한 젊은 헤겔주의자들 중 가장 무명이었을 것이다.
4. 국체론 논쟁
청년 헤겔학파는 1839년부터 1843년까지 프로이센의 국체(國體)를 둘러싸고 다양한 논쟁을 벌였다. 1831년 헤겔 사후, 독일 철학자들은 정치적·종교적으로 급진적인 '좌파' 또는 '젊은' 헤겔리안과 보수적인 '우파' 또는 '늙은' 헤겔리안으로 대략 나눌 수 있다.[1] 우파 헤겔리안들은 변증법이 끝났다고 믿었으나, 젊은 헤겔리안들은 이성과 자유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
이들은 아놀드 루게가 편집한 『할레 연보』(1838~1841)와 『독일 연보』(1841~1843)를 통해 가톨릭과 정통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하고, 프로이센의 개혁을 통해 입헌 군주제,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가진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2]
그러나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즉위 후 정치적·종교적 자유가 제한되자, 젊은 헤겔학파는 급진화되어 무신론을 수용하고 공화주의로 전환했다. 모세스 헤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주의를 공산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다.[3]
1843년 『독일 연보』가 탄압받으면서 청년 헤겔학파 운동은 와해되기 시작했다.[3]
4. 1. 프로이센 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
청년 헤겔학파는 프로이센의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 체제를 요구했다. 이들은 입헌군주제, 공화제, 심지어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까지 다양한 정치적 이상을 제시했다.1831년 헤겔(Hegel) 사후, 독일 철학자들은 정치적·종교적으로 급진적인 '좌파'(Left) 또는 '젊은'(young) 헤겔리안과 보수적인 '우파'(Right) 또는 '늙은'(old) 헤겔리안으로 나눌 수 있다. 우파 헤겔리안들은 역사의 변증법이 끝났다고 믿는 스승을 따랐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독자가 끝에 이르렀을 때 역사의 정점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이성과 자유가 기존 프로이센(Prussia) 국가에 의해 구현된 것처럼 최대치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여기서 스승의 주장은 기껏해야 역설로 여겨졌다. 프로이센 정권은 실제로 광범위한 시민 및 사회복지, 우수한 대학, 높은 고용률, 그리고 어느 정도의 산업화를 제공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더 자유로운 입헌군주제에 비해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후진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젊은 헤겔리안들은 역사의 지배적인 힘으로서 헤겔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과 '정신'이 이성과 자유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는 그의 생각을 활용했다. 그들은 당시 독일의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청년 헤겔학파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프로이센의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헤겔은 프로이센 국가를 이성이 구현된 최고의 국가 형태로 보았지만, 청년 헤겔학파는 프로이센이 여전히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라고 비판했다.[14]
청년 헤겔학파는 프로이센이 1797년에 등극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통치하는 전제군주제 국가라는 점에 주목했다. 학파 분열이 시작된 9년 후인 1840년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통치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프로이센이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14]
청년 헤겔학파는 프로이센 정권이 이전 시기에 비해 더 나은 교육, 산업 발전, 복지 수준을 갖추고 있었지만, 여전히 영국과 프랑스보다 봉건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고, 본질적으로 반동적인 전통주의자들이 사회를 주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들은 당대 독일 사회를 이성의 완숙한 변증법적 발전에 따른 국가 현현의 결과로 인정하지 않았다.[14]
이들은 입헌군주제부터 공산제 및 아나키스트 공동체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제시하며, 프로이센의 전제군주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14]
4. 1. 1. 루게의 입헌군주제 비판
아놀드 루게(Arnold Ruge)는 초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으나, 이후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로 전환하였다. 그는 공화제만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공화제 이외의 모든 정부 형태는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15]루게는 1840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자신이 발행인이었던 《할레연보》에 프로이센 고위 관료 칼 슈트렉푸스(Karl Streckfuß)의 글에 대한 익명의 반박문을 게재했다.[15] 이 글에서 루게는 '절대자' 대신 바우어의 '자기의식'을 제시하며, "현재 모든 것이 출발하는 원리는 정신의 자발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학문에서는 "합리주의"를, 국가에서는 "자유주의"를 강조하며, 국가는 "우리들의 자기의식이 진행하는 실존"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루게는 이 시점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며, "국가는 사적 소유(res privata)가 아니라 공적 소유(res publica, \[=공화정])"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공화제는 프랑스 제1공화정과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15]
1841년 《독일연보》에 실린 글에서 루게는 1806년 이후 독일의 국체를 "자유주의의 국가" 혹은 "공화주의적 군주제"라고 규정했다.[15] 1843년 초, 그는 공화정을 주장하는 자신의 입장을 '자유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라고 '자기비판'하며, 이전의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에 대한 청년 헤겔학파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았음을 드러냈다.[15]
1842년 4월의 편지에서 루게는 '민주공화국'을 주장하며, "만약 공화정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그 공화정은 현실적인 공화정이 아니다."라고 썼다.[16] 1842년 8월, 그는 「헤겔법철학비판과 우리 시대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헤겔 법철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16]
루게는 포이어바흐의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명제」(1843년 상반기 출간) 원고를 1842년에 이미 읽고, 헤겔 철학이 '본질-이론적'이며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성을 통해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루게는 국가나 철학 개념 자체가 역사적 산물이며, "국가체제(Staatsverfassung), 즉 특정한 국가는 영원한 형상"이 아니라 "정신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실존(Existenz)"이라고 강조했다.[16]
헤겔은 "인격, 가족, 사회, 국가와 같은 영원한 규정성들"을 "논리적 혹은 형이상학적" 규정성으로 파악했지만, 루게는 "논리적 범주"와 "역사적" 범주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헤겔이 "국가의 체제(Verfassung)"를 "역사적 비판의 산물로서 혹은 인류 발전의 산물"로 파악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17]
루게는 헤겔이 "세습왕제, 장자상속제, 양원제 등을 논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며 "역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헤겔의 '개념과 현실' 결합이 "실존을 개념으로 신격화"한 것이며, 진정한 종합은 "신적 개념을 실존으로 육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7]
루게는 헤겔 철학을 재구성하며, 헤겔이 국가를 역사로부터 분리하고 종교, 학문, 예술에서 실천적 측면을 제거했다고 비판했다. 1843년 1월, 그는 《독일연보》에 게재한 「자유주의의 자기비판」에서 '민주공화정'을 다시 주장하며, "자유주의" 기반의 입헌군주정을 반대하고 "민주주의" 기반의 공화정을 지지했다.[17]
4. 1. 2. 바우어의 입헌군주제 비판
1842년 1월 브루노 바우어는 「라인신문」에 프랑스 입헌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당시 프랑스는 1830년 7월 혁명 이후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정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과도한 충돌로 정치적 혼란이 가시지 않았다. 바우어는 행정부와 입법부는 특정한 개념을 구성하는 ‘양자 부정이 없는 구성’이라는 기존 헤겔의 주장을 비판하였다.[17]바우어의 입장에서 입법부는 의지이고, 행정부는 행동이다. 행동은 의지에 기반하고, 의지는 행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분리가 선행될 경우 필연적인 상호 모순에 직면한다. 나아가 제도적인 요인에 의해 기계적 분리가 상시적인 행정부와 입법부의 상호 대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우어의 주장이었다.[18]
결과적으로 헤겔이 주장한 ‘입헌군주제하의 완성된 역학 구조’는 본질적으로 오류이다.
바우어는 헤겔의 입헌군주제 이론이 유기적 매개 체계를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헤겔은 군주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서명에 의해서 비로소 법적 구속력을 가지며,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완성된 역학 구조가 성립된다고 하였다. 즉, 군주의 서명은 매개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는 입법부가 아니기에 의지가 아니다. 본래 입법 권력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의지는 직접적으로 행동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행동은 의지에 기반하고 있으나, 군주는 애당초 입법부와 분리된 존재이며 의지의 행동으로서 당위성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두 관계는 태초에 분리된 것이라는 것이 바우어의 견해이다.[18]
5. Die Freien (자유로운 자들)
Die Freiende(자유로운 자들)은 19세기 베를린 대학교에서 결성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브루노 바우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 바우어는 헤겔의 강의를 들었으며,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논쟁에서 구 헤겔학파를 옹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바우어는 이 책을 검토하면서 슈트라우스보다 더 급진적인 견해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가 역사적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이며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주장했다.
5. 1. 모임의 성격과 활동
Die Freiende(자유인들)은 19세기 베를린 대학교에서 결성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수년간 비공식적인 토론을 이어갔다. 이 모임의 지도자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강의를 들었던 브루노 바우어였다. 바우어는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주장에 맞서 구헤겔학파의 입장을 옹호하도록 요청받았으나, 이후 더욱 급진적인 입장으로 개종하여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이며 진보의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10]이 모임에는 막스 슈티르너, 브루노 바우어, 아놀드 루게,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참여했다. 이 그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존 헨리 매케이의 막스 슈티르너 전기가 가장 권위 있는 자료로 여겨진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이후 칼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 『임금 노동과 자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와 막스 슈티르너(같은 시기에 『나와 나의 것』을 저술)에게 이 그룹과의 연관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Die Freiende 구성원들은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토론을 목적으로 만났다. 이들은 통일된 정치적 또는 이념적 관점을 대표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이후 "젊은 헤겔학파"로 여겨졌다. 이들은 보통 베를린 중심부의 히펠 와인바에서 만났다. 존 헨리 매케이의 막스 슈티르너 전기에 따르면, 이들은 심한 욕설로 유명했으며, 한때 아놀드 루게가 이들을 질책하고 뛰쳐나간 일도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그룹에는 많은 여성이 참여했지만, 막스 슈티르너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 데인하르트에 대한 정보만 남아 있다. 주인이 이들에게 술값을 더 이상 빌려주지 않자, 이들은 거리에서 농담 삼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케이는 이들이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만취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
6. 영향 및 역사적 의의
청년 헤겔학파는 19세기 독일 사회의 지적, 정치적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다양한 사상 조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31년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을 계승한 학자들은 '좌파'(젊은 헤겔학파)와 '우파'(늙은 헤겔학파)로 나뉘었다. 우파 헤겔학파는 헤겔의 변증법이 프로이센 국가에서 완성되었다고 보았지만, 젊은 헤겔학파는 이를 비판하며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1]
다비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1835)는 젊은 헤겔학파가 독립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할레 연보』(1838~1841)와 『독일 연보』(1841~1843) 등의 잡지를 통해 가톨릭과 정통 프로테스탄트를 비판하고, 프로이센의 개혁을 통해 입헌 군주제와 종교적 자유, 언론의 자유를 가진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3]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즉위 후 정치적, 종교적 자유가 제한되자, 젊은 헤겔학파는 더욱 급진화되었다. 이들은 헤겔의 국가 철학을 비판하고 무신론을 수용했으며, 공화주의를 지향했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사상을 받아들여 인간에 의한 세계의 자기 초월을 강조하기도 했다.[3]
이들은 독일 전역에 민주적 사상을 퍼뜨렸지만, 1843년 『독일 연보』가 탄압받으면서 운동은 와해되기 시작했다.[3] 젊은 헤겔학파는 국가 기구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정당성을 주장한다고 보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 종교의 철학적 기반을 공격했다.
헤겔 사후 그의 철학은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의 강력한 논리성에 기반하여 독일 철학 연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헤겔의 철학은 프로이센 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급속히 확대되었고, 학술지 『학술 비판 연보』는 헤겔 학파의 번영을 촉진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는 헤겔 학파의 분열을 야기했고, 젊은 헤겔학파는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고 국가 비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의 불화, 『할레 연보』와 『라인 신문』의 발행 금지, 젊은 헤겔학파 학자들의 대학 추방 등은 이들의 활동을 위축시켰다. 이들은 사회주의, 입헌 군주주의, 무정부주의 등으로 분열되어 통일성을 잃고 소멸되었다.
당시 독일 지식인들은 봉건 사회를 인정하는 헤겔 철학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넘어, 더욱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을 요구했다. 이는 독일이 후진국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관념"이 아닌 "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한편, 서민들은 비더마이어 사상에 따라 검소하고 일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젊은 헤겔학파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으로 계승되었다. 다비트 슈트라우스,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등이 대표적인 젊은 헤겔학파 철학자이며, 칼 마르크스, 키르케고르, 미하일 바쿠닌, 하인리히 하이네 등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6. 1. 독일 사회에 미친 영향
청년 헤겔학파는 1848년 혁명을 전후로 독일 사회의 민주화와 자유주의 확산에 기여했다.[3] 이들의 사상은 독일 통일 이후에도 사회 비판과 개혁을 위한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 활용되었다.이들은 헤겔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당시 독일의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권위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1] 특히,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국가 기구의 정당성을 비판하며, 종교의 철학적 기반을 공격함으로써 부패하고 전제적인 국가를 무너뜨리려 했다.[7]
아놀드 루게는 헤겔의 역사 철학을 수용하면서도, 미래에 대해 열린 해석을 제시했다.[7] 카를 마르크스는 초기에는 이러한 전략에 공감했으나, 후에 종교보다는 자본 소유가 체제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를 사회적 관계를 흐리게 하는 "아편"으로 묘사했다.[7]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막스 슈티르너 등은 베를린의 히펠 와인바에서 모임을 가졌던 Die Freien|디 프라이엔de 그룹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현대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2]
그러나 젊은 헤겔리안들은 종교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견해로 인해 대학에서 인기가 없었고, 브루노 바우어는 교수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13] 이들은 헤겔의 '게이스트'(정신) 개념을 세속화하여 종교적 연관성을 제거하고, 인간을 역사의 주체로 대체하는 철학을 제시했다.[13]
6. 2. 후대 사상에 미친 영향
청년 헤겔학파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실존주의, 무정부주의 등 다양한 사상 조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칼 마르크스는 청년 헤겔학파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20세기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3]루트비히 폰 파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신앙인이 환상을 세상에 투영하도록 부추기는 교리를 제시받는다고 주장하며, 신앙인들이 인간의 모든 결점과 단점의 정반대를 나타내는 신을 이상화하도록 격려받는다고 보았다.[4] 이러한 견해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그는 ''헤겔의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를 "아편"이라고 묘사했다.[5]
아놀드 루게는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을 옹호하며, 역사는 자유의 실현을 향한 진보적인 발전이며 자유는 합리적인 일반 의지의 창조물인 국가에서 달성된다는 헤겔의 믿음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는 헤겔이 미래에 대해 폐쇄적인 역사 해석을 제시했다고 비판했다.[7]
칼 마르크스는 처음에는 프로이센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공격하는 전략에 공감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되어 청년 헤겔학파와 결별하고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들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체제 권력의 기반이 아니라 자본 소유가 체제 권력의 중심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종교를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구성 요소이자 전합리적 사고방식으로 간주했지만, 지배 엘리트는 정치 권력의 진정한 기반을 포함한 사회적 관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보았다.[5]
Die Freiende(자유로운 자들)은 19세기 베를린 대학교에서 결성된 젊은 헤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브루노 바우어가 이끌었다. 막스 슈티르너, 아놀드 루게, 프리드리히 엥겔스 등이 참석했다. 이 그룹은 현대 정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엥겔스와 슈티르너에게 이 그룹과의 연관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Die Freiende의 구성원들은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토론을 목적으로 만났다. 그들은 통일된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대표하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후 "젊은 헤겔학파"로 여겨졌다.[2]
마르크스는 국가가 보편성과 합리성의 근거지라는 헤겔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시민사회와 국가 사이의 차이가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프롤레타리아의 목표는 사실상 그러한 차이를 없애는 것이었다.
다른 젊은 헤겔리안들은 헤겔 철학에 대해 다른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다비트 슈트라우스는 헤겔이 기독교의 역사성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독교의 신화 해체를 위해 어떠한 역사적 기반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개인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약으로부터 물려받은 메시아적 전통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한 신화"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젊은 헤겔리안들은 종교와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견해 때문에 대학에서 인기가 없었다. 브루노 바우어는 1842년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마르크스와 다른 학생들은 평판 때문에 논문을 베를린 대학교에 제출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젊은 헤겔파의 발자취는 이후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으로 계승된다. 젊은 헤겔파 철학자로는 다비트 슈트라우스,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등이 있으며, 칼 마르크스, 세렌 키르케고르, 미하일 바쿠닌, 하인리히 하이네 등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6. 3.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주어진 원문은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저서와 그의 사상에 대한 내용으로, 한국 사회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청년 헤겔학파의 사상이 한국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참조
[1]
서적
Marx and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Penguin Classics
2002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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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on
2005
[3]
웹사이트
The "New Left" of Restoration Germany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23-08-07
[4]
서적
The Essence of Christianit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12-08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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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12-02
[6]
간행물
Becoming Historical – Cultural Reformation and Public Memory in Nineteenth-Century Berlin
http://assets.cambri[...]
[7]
서적
A History of Philosophy, volume VII
[8]
서적
Capital: A critical analysis of capitalist production
New York
1967
[9]
서적
Introduction to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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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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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서적
The Young Hegelians: An Ant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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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Routledge History of Philosophy
Routledge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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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 to Hegel and the Philosophy of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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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14]
서적
청년헤겔학파의 국가론 -청년마르크스(1839-1843)를 중심으로-
인문사회 21
2017
[15]
서적
2017
[16]
서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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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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