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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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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힐티는 스위스의 법학자, 정치인, 윤리학자이며, 종교적, 윤리적 저술로 널리 알려졌다. 베른 대학교 교수, 육군 재판장, 헤이그 국제 중재 재판소 스위스 위원을 역임했으며,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고 금주 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저작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기반한 삶을 강조하면서도,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사회주의와 유물론을 비판했다.

2. 생애

베르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15] 1855년 고향 쿠어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동했고, 1873년부터 베른 대학교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했다. 1902년 이후 육군 재판장을 역임했으며, 1909년에는 국제법 권위자로서 헤이그 국제 중재 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클라렌스에서 사망했다.[15]

정치 관련 저서로는 1886년 이후 출간된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종교 및 윤리 관련 저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저작은 윌리엄 제임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15] 특히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카를 힐티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연도사건
1833년스위스 장크트갈렌 주 베르덴베르크 출생
1844년주립 김나지움 입학, 종교/고전/영문/불문학 공부
1851년독일 괴팅겐 대학교 입학, 법학/철학/역사 공부
1852년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법학 연구
1854년박사 학위 취득 후 런던, 파리 유학
1855년쿠어에서 변호사 개업
1856년보병 장교로 법무 담당
1857년요한나 게르트너와 결혼
1873년베른 대학교 정교수, 스위스 국법/국법학/국제법 강의
1890년베르덴베르크 구 선출 대의원
1892년스위스 육군 재판장
1902년베른 대학교 총장
1909년헤이그 국제 중재 재판소 스위스 위원
1909년 10월 12일심장마비로 사망 (77세)


2. 1. 초기 생애와 교육

괴팅겐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15] 1851년부터 1853년까지 괴팅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3] 1852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법학 연구에 전념했다. 1854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언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잠시 런던파리에서 시간을 보냈다.[3]

스위스 북동부에 위치한 상트갈렌 주의 작은 마을 베르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라우뷘덴 주의 주도인 쿠어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 요한 울리히 힐티였다. 그의 가족은 수세기 동안 베르덴베르크에 정착했으며, 1835년에 그는 낡은 베르덴베르크 성을 경매에서 구입했다.[1] 카를 힐티의 어머니 엘리자베트(결혼 전 성씨는 킬리아스)는 쿠어 출신으로, 프랑스 육군의 전 야전 외과 의사의 딸이었다. 그녀는 1847년에 사망했다.[2]

카를 힐티는 쿠어에서 성장하여 처음에는 공립 초등학교를 다녔고, 그 다음에는 스위스 개혁 교회의 주립 학교를 다녔다.

1857년, 불과 몇 달의 약혼 기간을 거쳐 힐티는 프로이센법학자 가문 출신인 요한나 개르트너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1842년에 사망했지만 본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시몬은 브로츠와프에서 판사의 딸이자 프로이센 법학자 시험 위원회의 전 회장으로 태어났으며, 1848~1849년 독일 혁명에 대한 정치 소설을 쓰고 출판했다. 그녀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저명한 일원이었던 그녀의 오빠 하인리히 시몬처럼, 진압된 혁명 이후의 반동 시대에 반민주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탄압에서 벗어나 스위스 망명에 합류해야 했다. 요한나의 대부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민족주의자이자 친민주주의 작가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였다.[5]

힐티의 여동생 안나는 19세기 후반 그라우뷘덴의 주요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인 법학자이자 준장인 한트 홀드와 결혼했다.[6]

연도사건
1833년스위스 장크트갈렌 주 벨덴베르크에서 출생.
1844년주립 김나지움에 입학. 종교 교육, 고전학, 영문학, 불문학을 배움.
1851년독일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 법학, 철학, 역사를 배움.
1852년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법학 연구에 전념.
1854년박사 (Doktor) 학위를 취득한 후, 런던, 파리로 유학.
1857년요한나 게르트너와 결혼.


2. 2. 법조 및 학문 경력

베르덴베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855년 고향인 쿠어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른 대학교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902년 이후 육군재판장이 되었다. 1909년에는 국제법의 권위자로서 헤이그 국제 중재 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5]

1862년, 힐티는 법률 사무소에서의 업무와 함께 스위스군의 법무 참모로 합류했다. 1872년에는 쿠어 대시의회 의원이 되었으며,[7] 1874년에는 베른 대학교 헌법 교수가 되었다. 1890년에는 국민의회 의원이 되었다.

힐티는 여성의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옹호하는 대변인이었으며, 이는 이 문제가 주류가 되기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힐티는 여러 국적과 언어를 가진 국가인 스위스가 국가가 부족주의적 성향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8]

그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851년독일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 법학, 철학, 역사를 배움.
1852년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옮겨 법학 연구에 전념.
1854년박사 (Doktor) 학위를 취득한 후, 런던, 파리로 유학.
1855년쿠어 시에서 변호사 개업.
1856년보병 장교로서 법무를 담당.
1873년베른 대학교 정교수가 되어, 스위스 국법, 국법학, 국제법을 강의.
1890년벨덴베르크 구 선출 대의원이 됨.
1892년스위스 육군 재판장.
1902년베른 대학교 총장.
1909년헤이그 국제 중재 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됨.


2. 3. 결혼과 가족

1857년, 힐티는 불과 몇 달 간의 약혼 기간을 거쳐 프로이센의 법학자 가문 출신인 요한나 게르트너와 결혼했다.[5] 요한나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1842년에 사망했지만 본 대학교의 법학 교수였다. 요한나의 어머니 마리 시몬은 브로츠와프 출신으로, 판사의 딸이자 프로이센 법학자 시험 위원회 전 회장이었다. 마리 시몬은 1848~1849년 독일 혁명에 대한 정치 소설을 쓰고 출판하기도 했다. 그녀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저명한 의원이었던 오빠 하인리히 시몬처럼, 진압된 혁명 이후의 반동 시대에 반민주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다. 요한나의 대부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이었던 민족주의자이자 친민주주의 작가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였다.[5]

힐티의 여동생 안나는 19세기 후반 그라우뷘덴의 주요 자유주의자 중 한 명인 법학자이자 준장인 한트 홀드와 결혼했다.[6]

2. 4. 여성 참정권 옹호

힐티는 여성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옹호자였으며, 이는 이러한 문제가 주류가 되기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힐티는 여러 국적과 언어를 가진 국가인 스위스가 국가가 부족주의적 성향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8]

2. 5. 만년과 죽음

1909년 클라렌스에서 사망했다. 1902년 베른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1909년에는 국제법 권위자로서 헤이그 상설 중재 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12일 심장마비로 사망(77세)했다. 그의 아내 요한나는 1897년에 사망했다.[5]

연도사건
1902년베른 대학교 총장
1909년헤이그 상설 중재 재판소 스위스 위원 임명
1909년 10월 12일심장마비로 사망(77세)


3. 사상

힐티의 철학적 관심은 실용적인 것에 집중되었다. 그는 행복, 삶과 일의 의미, 좋은 습관, 시간 관리, 그리고 인생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방법에 대해 저술했다. 1891년, 1895년, 1899년에 세 권으로 처음 출판된 행복에 관한 저술로 유명해졌으며, 이 에세이들은 "행복: 삶의 의미에 대한 에세이"라는 제목으로 묶였다. 이 책에서 힐티는 고대 스토아주의 사상과 기독교적 믿음을 결합했다.[10] 이 작품은 하버드 대학교의 기독교 윤리 교수 프란시스 그린우드 피보디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1903년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힐티는 취리히에서 봉사를 시작한 구세군을 지지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소란스러운 모습에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몇 년 후에는 그들을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몇 안 되는 단체 중 하나로 인정했다. 힐티는 다윈 이후 새로운 과학을 따라 소위 "수도원적" 철학에 헌신한 많은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전히 복음을 믿었던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물질주의 시대 이후 교회와 정치의 교리를 넘어선 새로운 종교 개혁을 믿었다.

힐티의 대표적인 저작은 『행복론』,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등이며, 종교적,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다. 법률가, 정치인으로서 저술한 저작도 모두 일관된 기독교 신앙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힐티는 성경 말씀을 매우 중시했으며, 특히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자로서의 자세와 하느님에 대한 신뢰, 사랑을 통한 인내를 이야기했다. 성경 이외에도 스토아 철학의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인 단테 등을 자주 인용했다.

확고한 신앙에 기반한 삶을 살기 위해, 힐티는 다양한 처세술, 사고방식, 대처법을 제시했다. 특히 섭생적인 생활을 중시하며 향락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 1. 기독교 신앙과 윤리

힐티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뿌리내린 윤리적 삶을 강조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종교적, 윤리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법률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쓴 글들도 기독교 신앙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9]

힐티는 성경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의 저작에는 성경 구절이 자주 인용된다. 특히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 신자로서의 자세와 하느님에 대한 신뢰, 사랑을 통한 인내를 이야기했다. 그는 스토아 철학의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인 단테 등도 자주 인용했다.[10]

힐티는 확고한 신앙에 기반한 삶을 살기 위해 다양한 처세술, 사고방식, 대처법을 제시했다. 특히 섭생적인 생활을 중시하며 향락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중에서도 음주를 경계했다. 그는 금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러 논문을 저술했고, 그의 노력으로 1908년 스위스 국회에서 압생트 금주령이 가결되기도 했다.[12] 다만, 극심한 피로 시에는 소량의 알코올을 약용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불면증 해소를 위한 음주는 엄격히 금지하고, 대신 사과나 꿀 같은 가벼운 음식을 권했다.[13]

힐티는 기독교 신앙에 의한 생활을 최선으로 여겼지만, 불교, 인도 철학, 중국 철학,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의 형식적인 교회 출석, 수도원 생활, 명상에 몰두하는 겉치레 신앙을 비판하고, 교회 제도의 결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또한, 그의 사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속죄 의식이 옅고, 사회주의유물론에 부정적이라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힐티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파악하고, 모방하며, 실천하는 것만이 인류에게 유일한 복음이며,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그 가르침은 현대의 어떤 선진 문명 국가에도 필요한 항구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믿었다.[14]

3. 2. 사회주의와 유물론에 대한 비판

힐티는 사회주의유물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12] 그는 확고한 기독교 신앙에 기반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따르는 삶을 강조했다. 힐티는 금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압생트 금주령 가결에 기여했다.[12] 그는 향락을 피하고 검소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정신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3. 3. 평화주의

힐티는 "평화는 전쟁과 머리카락 한 올 차이"라고 말했다.[9] 그는 기독교인이었지만 평화주의자는 아니었고, 다가올 세계 대전을 예상했다.

4. 저작

카를 힐티의 저작은 크게 학술적인 저서와 개인적인 저서로 나뉜다. 정치적 저서로는 《스위스 연방 정치연감》, 《민주정치의 이론가와 이상가》 등이 있으나, 종교적·윤리적 저작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저작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15]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특히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가 유명하다.
학술 저서


  • 《민주주의의 이론가와 이상주의자》(Theoretiker und Idealisten der Demokratie), 베른, 1868
  • 《스위스 정치의 사상과 이상》(Ideen und Ideale schweizerischer Politik), 베른, 1875
  • 《스위스 연방 정치에 관한 강의》(Vorlesungen über die Politik der Eidgenossenschaft), 베른, 1879
  • 《사형제 부활에 관하여》(Ueber die Wiedereinfuhrung der Todesstrafe), 베른, 1879
  • 《오늘날 이해되는 스위스의 중립성》(Die Neutralität der Schweiz in ihrer heutigen Auffassung), 베른, 1889

:(멘타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 1889)

  • 《스위스 헌법에서의 국민투표》(Das Referendum im schweizerischen Staatsrecht), 공법 아카이브, 1887
  • 《보어 전쟁》(Der Burenkrieg), 베른, 1900.

개인적인 저서

  • 《행복》(Glück), 1891, (에두아르트 피멘(Eduard Fimmen)에 의해 네덜란드어로 번역, 1903) .
  • 《읽기와 말하기》(Lesen und Reden), 1891
  •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Für schlaflose Nächte), 1901.

일본어 번역 저서

  • 『힐티 저작집』 전 11권, 하쿠스이샤(白水社), 초판 1958-59, 신판 1978-79 외
  • 제1권 『행복론 1』 코오리우에 히데히로(氷上英広) 역
  • 제2권 『행복론 2』 사이토 에이지(斎藤栄治) 역
  • 제3권 『행복론 3』 마에다 모로오(前田護郎)・스기야마 요시(杉山好) 공역, ※각・신장판 2012
  • 제4권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1』 코이케 타츠오(小池辰男) 역, ※신장판 1996
  • 제5권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2』 토바리 마사미(登張正実)・코시오 세츠(小塩節) 역
  • 제6권 『사랑과 희망』 아키야마 히데오(秋山英夫) 역
  • 제7권 『동정과 신앙』 키시다 반세츠(岸田晩節) 역
  • 제8권 『고뇌와 빛』 쿠니마츠 코우지(国松孝二) 등 역
  • 제9권 『그리스도의 복음』 나카자와 코우키(中沢洽樹) 역
  • 제10권 『인간 교육』 다카하시 사부로(高橋三郎) 역
  • 제11권 『영원한 평화』 히데무라 킨지(秀村欣二)・아라이 켄(荒井献) 역
  • 『힐티 선집』 도쿄 소겐샤(東京創元社), 1956-59
  • 제1・2권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마에다 케이사쿠(前田敬作) 역. 개역판・치쿠마 총서(筑摩叢書) 1972, 신판 1985
  • 제3권 『행복론 제1』 야나이하라 이사쿠(矢内原伊作)・시오야 이요시 역
  • 제4권 『행복론 제2』 요시무라 히로츠구(吉村博次) 역
  • 제5권 『인생론』 시오야 이요시 역
  • 쿠사마 헤이사쿠(草間平作)・야마토 쿠니타로 역 『행복론』 이와나미 문고(전 3권), 이후 와이드판
  • 쿠사마 헤이사쿠(草間平作)・야마토 쿠니타로 역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이와나미 문고(전 2권)
  • 와타나베 요시오(渡辺義雄) 역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카도카와 문고(角川文庫), 1959
  • 카바 슌오(樺俊雄) 역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해』 신쵸 문고(新潮文庫)(상하), 1959-63
  • 아키야마 히데오(秋山英夫) 역 『인생론』 카도카와 문고(角川文庫), 개정판 1968
  • 아키야마 히데오(秋山英夫) 역 『행복론』 카도카와 문고(角川文庫), 개정판 1968
  • 『행복론』 카도카와 소피아 문고(角川ソフィア文庫), 2017, 해설 와시다 코야타(鷲田小彌太). 위 2권의 신편・초역판
  • 『행복론』 첫 번째 번역자는 히라타 겐키치(平田元吉)로 1913년

편역판 (발췌 독본)

  • 사이토 에이지(斎藤栄治) 편 『행복론』 하쿠스이샤(白水社), 신장판 1995・2008(저작집에서 발췌)
  • 사이토 타카시(齋藤孝) 편역 『자신의 인생에 가장 좋은 결과를 내는 행복술』 미카사 쇼보(三笠書房), 2007
  • 각・개제 신판, 미카사 쇼보(三笠書房), 2018, 동・지적 생존 방식 문고, 2012
  • 카나모리 세이야(金森誠也) 역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생활술』 PHP 연구소(PHP研究所), 2010
  • 아키야마 히데오(秋山英夫) 역 『희망과 행복 힐티의 말』 사회사상사(社会思想社), 신판 1992

5. 평가

힐티의 저작은 윌리엄 제임스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11]

참조

[1] 웹사이트 Die Familie Hilty in Städtli und Schloss https://schloss-werd[...] 2014
[2] 백과사전 Hilty, Carl https://www.deutsche[...] 2021-02-26
[3] 웹사이트 Hilty, Carl https://hls-dhs-dss.[...] 2021-03-01
[4] 웹사이트 Staatspolitik heisst Suche nach leitenden Ideen https://www.nzz.ch/s[...] 2021-03-01
[5] 간행물 Studie zu einem Bild Carl Hiltys (1833-1909) https://www.e-period[...] 2021-02-23
[6] 웹사이트 Hold, Hans https://hls-dhs-dss.[...] 2021-03-01
[7] 웹사이트 "Schliessen Sie sich Christus an, nicht bloss Menschen" https://www.jesus.ch[...] 2021-03-01
[8] 서적 What is a nation? : Europe 1789-1914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9] 서적 100 years of happiness insights and findings from the experts Praeger 2012
[10] 서적 Adenauer the father of the new Germany J. Wiley 2001
[11] 서적 The Religious Life: The Insights of William James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5
[12] 문서 岩波文庫『眠られぬ夜のために第一部』383頁
[13] 문서 マタイによる福音書11章18節-19節、ルカによる福音書7章33節-34節。
[14] 문서 白水社『ヒルティ伝―ある偉大なるスイス人の生涯と活動』1959年版154頁
[15] 서적 The Religious Life: The Insights of William James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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