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빈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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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빈다주는 앙골라 북서부에 위치한 주로,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과 접경하고 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거쳐 1885년 시물람부코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후 앙골라와 행정적으로 통합되었다. 1960년대부터 카빈다 해방전선(FLEC)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소규모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 카빈다주는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여 앙골라 석유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주민들은 부패로 인해 석유 수입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4개의 지방 자치 단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도시로는 카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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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빈다주 - 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
카빈다 월경지 해방전선(FLEC)은 1963년 카빈다 지역 독립을 목표로 설립된 무장단체로, 포르투갈 식민 지배 시대부터 활동하며 앙골라 내전에 개입, 테러 활동을 자행하여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카빈다의 지위 문제는 현재까지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 카빈다주 - 카빈다 분쟁
카빈다 분쟁은 1885년 포르투갈 식민지 이후 앙골라 독립 후에도 카빈다 지역에서 지속된 분리주의 무장 투쟁으로, 자결권, 석유 자원, 인권 침해 등을 쟁점으로 2006년 휴전 이후에도 무력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 앙골라-콩고 민주 공화국 국경 - 카사이강
카사이강은 중앙 아프리카 콩고강의 주요 지류로서, 운송과 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이아몬드 매장으로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카빈다주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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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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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주 |
알보르 협정 | 1975년 1월 15일 |
수도 | 카빈다 |
면적 | 7,290 km² |
정부 | |
국가 | 앙골라 |
주지사 | 에우제니우 세자르 라보리뉴 |
경제 부문 부지사 | 마카리우 로망 렘베 |
정치 및 사회 부문 부지사 | 알베르투 파카 주지 마코소 |
기술 서비스 및 인프라 부문 부지사 | 조아킹 둠바 말리치 |
인구 | |
총인구 | 824,143명 (2019년 중반) |
인구 밀도 | auto |
인구 통계 | 2014년 716,076명 |
인구 통계 | 2019년 중반 824,143명 |
기타 정보 | |
시간대 | WAT |
UTC 오프셋 | +1 |
ISO 코드 | AO-CAB |
인간 개발 지수 (2022년) | 0.688 |
HDI 순위 | 2위 |
공식 웹사이트 | www.cabinda.gov.ao |
2. 역사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탐험가, 선교사, 상인들이 콩고 강 어귀에 도착하여 당시 강력했던 바콩고 부족의 왕인 마니콩고와 접촉했다. 마니콩고는 현재의 카빈다 지역에 위치했던 응고요, 로앙고, 카콩고와 같은 작은 왕국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후 수년에 걸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열강은 카빈다에 무역 기지, 벌목 캠프, 소규모 팜유 가공 공장 등을 설립하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이는 열강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편, 1827년부터 1830년까지 브라질 제국 해군은 카빈다 서부에 해군 기지를 유지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은 1885년 2월 시물람부코 조약을 통해 카빈다 지역 왕자들의 요청 형식을 빌려 이 지역을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주권을 주장했다. 이 조약은 이후 카빈다의 자결권 주장의 주요 법적·역사적 근거로 인용되고 있다. 같은 해 베를린 회의의 결정으로 콩고 자유국 영토가 콩고 강 하구까지 확장되면서 카빈다는 앙골라 본토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 카빈다에서는 고무가 수확되고 거래되었으며, 이웃한 콩고 자유국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생산 과정에서 잔혹 행위가 발생하기도 했다.[11][12]
20세기 들어 앙골라와의 행정적 통합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933년 포르투갈 헌법은 앙골라 식민지와 카빈다 보호령을 구분했지만, 1956년에는 행정권이 앙골라 총독에게 이관되는 등 실질적인 통합이 진행되었다.[13] 포르투갈 통치 하에서 카빈다는 농업과 임업의 중심지였고, 1967년 대규모 해상 유전이 발견되면서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수십 년간 이어진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식민지 독립 절차가 시작되었다. 앙골라의 독립 과정에서 카빈다의 지위는 주요 쟁점이 되었다. 1975년, 포르투갈과 앙골라의 주요 해방 운동 세력(FNLA, MPLA, UNITA) 간에 체결된 알보르 협정은 카빈다를 앙골라 영토로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카빈다의 독립을 주장하던 FLEC 등 지역 정치 세력의 참여 없이 체결되었고, 이들은 협정 결과를 거부했다.
이후 카빈다는 공식적으로 앙골라의 한 주가 되었으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저항과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 1960년대부터 카빈다의 독립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FLEC과 같은 분리주의 조직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알보르 협정 이후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 1975년 11월 앙골라 독립 직후, 쿠바군의 지원을 받은 MPLA 군대가 카빈다를 장악하고 FLEC 임시 정부를 축출하며 앙골라에 강제 편입시켰다. 이후 수십 년간 FLEC는 앙골라 정부를 상대로 저강도 게릴라전을 벌이며 분리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15][16] 분쟁 과정에서 앙골라 정부군에 의한 인권 침해 문제도 꾸준히 제기되었다. 카빈다 분리주의 세력은 국제적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여 1997년 UNPO, 2010년 신흥 아프리카 국가 기구(OEAS) 등에 가입했다.
2. 1. 포르투갈령 콩고
15세기 중반, 포르투갈 탐험가, 선교사, 상인들이 콩고 강 어귀에 도착하여 당시 강력했던 바콩고 부족의 왕인 마니콩고와 접촉했다. 마니콩고는 현재의 카빈다 지역에 위치했던 응고요, 로앙고, 카콩고와 같은 작은 왕국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시간이 흐르면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은 카빈다에 무역 기지, 벌목 캠프, 소규모 팜유 가공 공장 등을 설립했다. 무역 활동이 지속되고 유럽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경쟁하는 식민 열강 간의 갈등도 발생했다. 한편, 1827년부터 1830년까지 브라질 제국 해군은 카빈다 서부에 해군 기지를 유지했는데, 이는 남아메리카 외부에서 브라질이 유일하게 보유했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은 1885년 2월 시물람부코 조약을 통해 카빈다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 이 조약은 "카빈다의 왕자들과 통치자들"의 요청 형식을 빌려 카빈다에 포르투갈 왕관의 보호령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은 오늘날 카빈다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주요한 법적·역사적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조약 제1조는 "왕자들과 수장들 및 그 후계자들이 자발적으로 포르투갈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들이 통치하는 모든 영토를 이 나라의 보호령 아래 둔다"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분리주의자들이 자주 근거로 삼는 제2조는 "포르투갈은 그 보호 아래 놓인 영토의 완전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카빙다 점령지 해방전선(FLEC-R) 등 분리주의 세력은 이 조약이 포르투갈 왕관의 사절들과 당시 포르투갈령 콩고로 불렸던 카빈다의 왕자들 및 유력자들 사이에 체결되었으며, 카콩고, 로앙고, 응고요라는 세 개의 독립된 보호령을 탄생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1885년 포르투갈 왕과 카빈다 왕자들 사이에 체결된 시물람부코 조약은 지역 왕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카빈다를 앙골라와는 별개의 포르투갈 보호령으로 선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본래 카빈다는 앙골라와의 유일한 자연 경계로 콩고 강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해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 자유국의 영토가 콩고 강을 따라 바다까지 확장되면서 카빈다는 앙골라 본토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었다.
이 시기 카빈다에서는 고무가 주요 생산품으로 수확되고 거래되었다. 고무 생산 과정에서 손목 절단과 같은 잔혹 행위가 자행되기도 했으나, 이러한 만행에 대한 포괄적인 기록은 이웃한 콩고 자유국에 비해 훨씬 적고 덜 알려져 있다.[11][12]
2. 2. 앙골라와의 행정적 통합
1920년대 중반까지 앙골라의 국경이 이웃 식민 국가들과의 협상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후, 앙골라와 카빈다(Cabinda)는 1933년 포르투갈 헌법에 따라 별개의 단위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법적 구분은 1975년 1월 15일 알보르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1933년 포르투갈 헌법은 앙골라 식민지와 카빈다 보호령을 구분했지만, 실제 행정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1956년 카빈다의 행정권은 앙골라 총독에게 이관되었다. 카빈다의 지위가 앙골라와 다르다는 법적 구분은 1971년 포르투갈 헌법에도 다시 명시되었으나,[13] 1951년 앙골라가 포르투갈 제국 내의 "해외주"(Província Ultramarinapt)로 선포되었을 때, 카빈다는 이미 앙골라의 일반적인 행정구역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1972년에는 앙골라의 공식 명칭이 "앙골라 주"로 변경되었다.
포르투갈 지배하에서 카빈다는 중요한 농업 및 임업 중심지였으며, 1967년에는 대규모 해상 유전이 발견되면서 경제적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당시 주요 수출품은 석유, 목재, 코코아(Cocoa bean)였다. 카빈다 준주(territory)의 수도인 카빈다시는 항구와 비행장을 갖춘 포르투갈의 행정 및 서비스 중심지였고, 해변은 포르투갈계 앙골라인들에게 인기 있는 휴양지였다.
2. 3. 앙골라 독립 이후
1974년 리스본에서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수십 년간 포르투갈을 지배했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새로운 정부는 즉시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표였다. 앙골라에서는 탈식민화 과정이 여러 게릴라 운동과 그 동맹 세력 간의 격렬한 갈등으로 이어졌다.1960년대 초, 카빈다의 독립적 지위를 주장하는 여러 운동이 등장했다. 카빈다 점령지 해방 운동(MLEC)은 루이스 랑크 프랑크의 지도 아래 1960년에 결성되었으며, 브라자빌에 있던 여러 망명 단체들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MLEC는 빠르게 가장 두드러진 분리주의 운동으로 부상했다. 또 다른 단체로는 인구의 소수 민족인 마욤베를 대표하는 알리아마(Alliance of the Mayombe)가 있었다. 1963년 8월, 이들 운동은 통합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연합하여 스스로를 카빈다 점령지 해방 전선(FLEC)이라 칭하고, MLEC의 랑크 프랑크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FLEC는 국제 사회, 특히 아프리카 연합(OAU) 회원국들로부터 망명 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으나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OAU 회원국들은 국가 경계의 신성함을 지지하며, 카빈다 독립 인정이 다른 지역의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FLEC 인정을 거부했다.
1975년 1월, 포르투갈과 앙골라의 주요 해방 운동 세력인 앙골라 민족 해방 전선(FNLA),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 앙골라 완전 독립을 위한 전국 연합(UNITA)은 알보르 협정에 서명하여 독립 이행 방식을 확립했다. 이 협정은 카빈다가 앙골라 영토의 일부임을 재확인했지만, FLEC는 이 협상에 초대받지 못했으며 협정 내용을 거부했다. "카빈다 자유국"을 주장하는 이들은 카빈다가 1974년 앙골라가 침공하기 전까지 포르투갈의 보호령이었다고 주장하며,[14] 현재 카빈다 영토의 85%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4]
1975년 8월 1일, 캄팔라에서 열린 OAU 정상 회담 중 랑크 프랑크는 "카빈다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자이르의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는 카빈다의 미래에 대한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FLEC는 앙리케스 티아고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했고, 루이스 랑크 프랑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5년 11월 앙골라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쿠바군의 지원을 받은 MPLA 군대가 카빈다를 침공하여 FLEC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고 카빈다를 앙골라의 한 주로 편입시켰다.
그 이후 카빈다는 공식적으로는 앙골라의 주가 되었지만, 이러한 지위에 대한 정치적 저항과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었다.[15] 1970년대와 1980년대 대부분 동안 FLEC는 앙골라 정부군과 경제 시설을 공격하거나 석유 및 건설 사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직원을 납치하는 등 저강도 게릴라전을 벌였다. 1990년대에는 루밍구 루이스 짐비가 이끄는 또 다른 무장 분리주의 단체인 카빈다 해방을 위한 국가 연합(UNLC)이 등장했다.[16]
1997년 4월, 카빈다는 원주민, 점령된 국가, 소수 민족 및 독립 국가 또는 영토를 회원으로 하는 민주적 국제 기구인 대표되지 않은 국가 및 민족 기구(UNPO)에 가입했다. 2010년에는 신흥 아프리카 국가 기구(OEAS)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카빈다의 인권 상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었다. 2003년 유엔 임시 위원회 보고서는 MPLA가 자행한 여러 잔혹 행위를 보고했으며, 2004년 휴먼 라이츠 워치는 앙골라군이 카빈다에서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앙골라 정부는 FLEC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카빈다 공화국 망명 정부 측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한편, 과거 유가 상승으로 인해 카빈다의 미개발 육상 유전 매장량은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2. 4. 분리주의 운동
카빈다인의 자결권 주장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민족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물람부쿠 조약 체결 이전, 현재 카빈다로 알려진 지역에는 카콩고, 응고요, 로앙고라는 세 개의 왕국이 존재했다. 카빈다 주민들은 콩고족에 속하며 키콩고어를 사용하지만, 앙골라 내 다른 콩고족 집단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문화와 키콩고어의 독특한 변형을 발전시켜 왔다.1960년대 초,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가 약해지면서 카빈다의 독립적 지위를 주장하는 여러 운동이 생겨났다. 루이스 랑크 프랑크가 이끈 카빈다 점령지 해방 운동(MLEC)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the Enclave of Cabinda)은 1960년에 결성되었고, 소수 민족인 마욤베를 대표하는 알리아마(Alliama) (Alliance of the Mayombe) 등의 단체도 활동했다. 이들 운동은 1963년 8월 통합하여 FLEC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Enclave of Cabinda)을 결성하고 랑크 프랑크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이후 탈식민화 과정에서 카빈다의 지위 문제가 부상했다. 1975년 포르투갈과 앙골라의 주요 해방 운동 세력 간에 체결된 알보르 협정은 카빈다를 앙골라 영토로 재확인했으나, FLEC는 이 협정에 초대받지 못했고 그 결과를 거부했다.[14] FLEC는 카빈다가 본래 포르투갈의 보호령이었으며 1974년 앙골라에 의해 불법적으로 점령되었다고 주장하며[14], "카빈다 공화국" (Republic of Cabinda)으로서 분리 독립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후 FLEC는 앙골라 정부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전개해왔다.[15] 이들은 저강도 게릴라전을 수행하며 앙골라 정부군과 경제 목표물을 공격하거나 외국인 직원을 납치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FLEC는 국제 사회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국가 경계 유지를 중시한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회원국 대다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카빈다는 1997년 UNPO에 가입했으며, 2010년에는 신흥 아프리카 국가 기구(OEAS)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2003년 이후 일부 간부들의 투항으로 조직이 약화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FLEC는 여전히 정부와의 평화적 대화를 거부하고 소규모 게릴라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 4. 1. 최근 역사
1974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수십 년간 지속된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새로운 정부는 즉시 모든 포르투갈 식민지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민족주의 게릴라 운동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목표였다. 앙골라에서는 탈식민화 과정에서 여러 게릴라 운동과 그 동맹 세력 간의 격렬한 갈등이 발생했다.1960년대 초, 카빈다의 독립을 주장하는 여러 운동이 생겨났다. 루이스 랑크 프랑크가 이끄는 카빈다 점령지 해방 운동(MLEC)은 1960년에 결성되었다. 브라자빌의 여러 망명 단체가 합쳐져 만들어진 MLEC는 빠르게 가장 주요한 분리주의 운동으로 부상했다. 또 다른 단체로는 소수 민족인 마욤베를 대표하는 알리아마(Alliama)가 있었다. 1963년 8월, 이 운동들은 통합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연합하여 스스로를 FLEC(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Enclave of Cabinda)이라 칭하고, MLEC의 랑크 프랑크를 지도자로 삼았다.
1975년, 포르투갈과 앙골라의 주요 해방 운동 세력인 FNLA, MPLA, UNITA는 알보르 협정을 체결하여 독립 이행 방식을 정했다. 이 협정은 카빈다를 앙골라 영토로 재확인했지만, FLEC 및 다른 지역 정치 조직들은 이 협정에 초대받지 못했고 이를 거부했다.[14] FLEC는 카빈다가 1974년 앙골라 침공 전까지 포르투갈의 보호령이었다고 주장하며, 영토의 85%를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4] 이후 카빈다는 공식적으로 앙골라의 주가 되었지만, 이러한 지위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여러 차례의 게릴라 활동이 지속되었다.[15]
FLEC는 망명 정부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대부분의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회원국들은 국가 경계의 신성함을 지지하며 다른 지역의 분리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로 FLEC 인정을 거부했다.
1975년 8월 1일, 캄팔라에서 열린 OAU 정상 회담 중 랑크 프랑크는 "카빈다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당시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대통령 모부투 세세 세코는 카빈다의 미래에 대한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FLEC는 앙리케스 티아고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루이스 랑크 프랑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1975년 11월 앙골라가 독립을 선언한 후, MPLA 군대가 쿠바군의 지원을 받아 카빈다를 침공하여 FLEC 임시 정부를 전복시키고 카빈다를 앙골라에 편입시켰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대부분 동안 FLEC는 저강도 게릴라전을 벌이며 앙골라 정부군과 경제 목표물을 공격하고, 석유 및 건설 사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직원을 납치하는 등 활동을 지속했다. 1990년대에는 루밍구 루이스 짐비가 이끄는 무장 분리주의 단체인 카빈다 해방을 위한 국가 연합(UNLC)이 등장했다.[16]
1997년 4월, 카빈다는 원주민, 점령된 국가, 소수 민족 및 독립 국가 또는 영토를 회원으로 하는 민주적 국제 기구인 UNPO에 가입했다. 2010년에는 신흥 아프리카 국가 기구(OEAS)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카빈다 인권 문제에 대한 유엔 임시 위원회는 2003년 보고서에서 MPLA가 자행한 많은 잔혹 행위를 보고했다. 2004년,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의 아프리카 국장 피터 타키람부데는 앙골라군이 카빈다에서 민간인에 대한 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고 밝혔다. 앙골라 정부는 FLEC이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FLEC 측은 이를 부인한다.
2003년 5월 이후 FLEC 간부들이 잇따라 앙골라 정부군에 투항하면서 조직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정부와의 평화적 대화에는 응하지 않고 소규모 게릴라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10년 1월 9일에는 2010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하던 토고 축구 국가대표팀 버스가 FLEC의 공격을 받아 선수단 버스 운전사, 팀 대변인, 코치 등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전의 원유 가격 상승으로 카빈다의 미개발 육상 유전 매장량이 중요한 자원이 되었다.
3. 경제
주로 열대우림으로 이루어진 카빈다주는 경재목, 커피, 코코아, 천연고무, 그리고 팜유를 생산한다. 하지만 카빈다주가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풍부한 석유 자원이다. 보수적인 추산에 따르면 카빈다는 앙골라 석유 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며, 이는 하루 약 90만 배럴로 추산된다. 카빈다주의 석유 수출액은 카빈다 주민 1인당 연간 10만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21]
그러나 이러한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카빈다는 여전히 앙골라에서 가장 가난한 주 중 하나이다. 1996년 중앙 정부와 주 정부 간의 합의에 따라 카빈다의 석유 수입세 중 10%가 주에 환원되도록 규정되었지만, 많은 카빈다 주민들은 부패로 인해 이러한 수입이 전체 주민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다. 특히 석유 산업을 포함한 민간 부문은 분리주의 갈등에 영향을 미치고 갈등의 영향을 받았다. 카빈다 투쟁 초기에는 석유 회사들이 카빈다의 자결 운동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동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분리주의자들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한 전략 중 하나는 외국인 납치였는데, 1999년 FLEC-R은 외국인 노동자 4명(포르투갈인 2명, 프랑스인 2명)을 납치했으나 몇 달 후 석방했다. FLEC-FAC 또한 2000년 건설 회사에 고용된 포르투갈인 노동자 3명을 납치하는 등 활동을 증가시켰으며, FLEC-R은 또 다른 포르투갈 민간인 5명을 납치했다. 이 인질들은 가봉과 콩고 공화국 정부의 외교적 개입 이후 2001년 6월에야 석방되었다.
카빈다 해역에서는 여러 중요한 유전이 발견되었다. 말롱가 노스(Malonga North)와 말롱가 웨스트(Malonga West)라는 두 개의 거대한 유전이 각각 1967년과 1970년에 발견되었는데, 둘 다 소금층 아래 지층 또는 압티아절 이전 지층에서 생산되는 유전이다.[23] 수심 50m~75m 지점에서는 1971년 바렘절 지층에서, 그리고 1979년에는 세노마눔절 지층에서 원유가 발견되었다. 탁쿨라(Takula) 지역에는 '와바(Wamba)', '타쿨라(Takula)', '눔비(Numbi)', '부코(Vuko)' 등 4개의 해상 유전이 위치해 있으며, 해안 환경에 퇴적된 상부 백악기, 세노마눔절 베르멜랴(Vermelha) 사암에서 생산된다.[23]
카빈다 해역은 세계적으로 중요한 석유 생산 지역이며, 앙골라 내전 당시 카빈다만은 내전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석유 외 다른 경제 활동으로는 열대림 지대에서 연간 약 8만ton의 목재를 수출하고, 커피, 코코아를 생산하며, 인광석을 채굴한다. 아프리카 야자도 재배되고 있다.
란다나(Lândana)에서는 카빈다켈리스(Cabindachelys)[24]를 포함한 백악기와 팔레오세의 척추동물 화석이 발굴되기도 했다.
4. 행정 구역
카빈다주는 아래 표와 같이 4개의 지방 자치 단체( municípiospt)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단체의 면적과 2014년 인구 조사 및 2019년 공식 추정 인구는 다음과 같다.[22]
이름 | 면적 (km2) | 인구 (2014년 5월 16일 조사) | 인구 (2019년 7월 1일 추정치) |
---|---|---|---|
벨리즈 | 1360km2 | 19,561 | 22,514 |
부쿠자우 | 1979km2 | 32,792 | 37,741 |
카빈다 | 2273km2 | 624,646 | 718,915 |
카콩고 | 1679km2 | 39,076 | 44,974 |
'합계' | 7290km2 | 716,076 | 824,143 |
카빈다 시는 주 전체 인구의 약 87%를 차지하며, 다른 세 지방 자치 단체는 카빈다 시의 북쪽에 위치한다.
카빈다주의 코무나( comunaspt)는 각 지방 자치 단체별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 '''카빈다 시''': 카빈다, 말렘보, 탄토-진제
- '''카콩고 시''': 카콩고, 딩게, 마사비
- '''부코-자우 시''': 부코-자우, 인후카, 네쿠토
- '''벨리즈 시''': 벨리즈, 루알리, 미콩제
5. 인접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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