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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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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우샴비는 기원전 2천년기부터 존재했던 고대 도시로, 현재 인도 프라야그라지 구에 위치해 있다. 밧사국의 수도였으며,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중요한 중계지 역할을 했다. 아쇼카 석주가 발견되었고, 불교 경전에 언급될 정도로 불교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기원전 7세기의 성벽과 궁전 건축물이 확인되었으며, 붓다 시대부터 여러 사찰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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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샴비 - [지명]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코삼비 주조 동전
코삼비 주조 동전. 기원전 1세기. 상단에 브라흐미 문자로 "Kosabi"라고 새겨져 있음. 대영 박물관.
유형도시
위치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카우샴비 구

2. 역사

두 마리의 황소를 탄 여성(청동), 카우샴비 출토,


기원전 2천년경 황토색 도자기 문화가 이 지역에 확산되었다. 코삼비는 베다 시대 후기부터 마우리아 제국 말기까지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굽타 제국까지 점령이 이어졌다.[1][2] 베다 시대 후기, 홍수로 파괴된 하스티나푸르를 대신하여 쿠루 왕국의 통치자들이 새로운 수도로 건설했다.[3] 쿠루 왕은 모든 신하들과 함께 갠지스-자무나 합류점 근처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는데, 이곳은 쿠루 왕국의 최남단에서 56km 떨어져 있으며, 현재 프라야그라지(이전의 알라하바드)이다.[3]

마우리아 제국 이전 시대에 코삼비는 마하자나파다 중 하나인 밧사국의 수도였다.[4]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매우 번영한 도시였으며, 많은 부유한 상인들이 거주했다. 이곳은 북서부와 남부 지역의 상품과 여행객들의 중요한 중계지였으며, 붓다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머리에 무기를 든 청동 여신, 북인도(추정 코삼비), 기원전 2세기


불교 주석 경전에서는 코삼비/코삼비라는 이름에 대해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더 선호되는 것은[13] 이 도시가 현자 쿠숨바(v.l. 쿠숨바)가 한때 거주했던 은둔소의 부지 또는 그 근처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14] 도시 안팎에 크고 위엄 있는 님 나무 (코삼마루크)가 많이 자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우샴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벽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6세기에 에프탈의 침략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33]

푸라나 문헌에 따르면 쿠루국의 자나메자야(아르주나의 현손)의 4대째 왕 때 수도인 하스티나푸르갠지스강의 홍수로 피해를 입어 카우샴비로 천도했다고 전해지지만, 하스티나푸르와 카우샴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34]

우다야나 왕 시대에 카우샴비는 교통의 요지였고 상업이 발달했다. 팔리 경전에 따르면, 기원정사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상인 고시타, 쿠크타, 파바리카 3인은 우안거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부처를 초청했다.[32]

현장은 카우샴비에서 우다야나 왕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백단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을 보았으며, 고시라(고시타)의 집터가 있었다고 전한다.[36]

2. 1. 마우리아 제국과 굽타 제국 시대

역사적으로 코삼비는 마우리아 시대와 굽타 시대에도 견고한 도시 중심지였다. 아쇼카 석주는 코삼비와 프라야그라지에서 모두 발견된다. 요새 유적 내에 있는 현재 코삼비 석주의 위치는 이 지역에 마우리아 군대가 주둔했음을 증명한다. 알라하바드 석주는 코삼비의 마하마트라(대신)에게 상가를 분열시키는 자를 벌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이 석주가 원래 코삼비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다.[5][6]

카우샴비 분열 칙령(소 석주 칙령 2)은 "왕은 카우샴비 관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 ... 상가의 길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시간 이후로 상가의 단결을 깨뜨리는 자는 승려든 비구니든 흰 옷을 입고 상가 밖의 장소에 거주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7]

2. 2. 후(後) 마우리아 시대

갠지스 계곡에서 출토된 두 개의 다마루 모양 동전


후(後)마우리아 시대에 코삼비(현대 프라야그라지 구)의 부족 사회는 다마루 드럼과 유사한 모양의 주조된 구리 주화를 만들었는데, 펀치 마크가 있거나 없었다.[8] 이 주화들은 인도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8] 푸샤미트라 숭가가 수도를 파탈리푸트라에서 카우샴비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사후 제국은 여러 미트라 왕조로 분할되었다.[9]

2. 3. 고고학적 발굴

1949년 알라하바드 대학교의 G. R. Sharma에 의해 고고학적 발굴이 수행되었으며, 1951년부터 1956년까지 다시 발굴이 진행되었다.[3] 발굴 결과, 이 유적지는 기원전 12세기에 점유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전략적인 지리적 위치 덕분에 카우샴비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성장했다.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흙을 쌓아 올린 대규모 성벽이 건설되었고, 이후 벽돌 벽과 보루, 탑, 성벽 및 관문으로 강화되었다.[10] G. R. Sharma에 따르면, 성벽은 기원전 1025년에서 955년 사이에 건설되었고 벽돌로 덮였으며, 해자는 기원전 855년에서 815년 사이에 가장 먼저 발굴되었다.[11] 숯과 북부 흑색 연마 도자기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390년부터 서기 600년까지 지속적인 점유 시기가 추정된다.[12]

코삼비는 불규칙한 장방형 평면을 가진 요새화된 도시였다. 유적 발굴을 통해 동, 서, 북 세 방향에 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문 위치는 침식으로 인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보루, 문, 아치문 외에도, 도시는 세 방향에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일부는 매립되었지만 여전히 북쪽에서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는 두 개 이상의 해자가 있다는 증거도 있다. 도시의 면적은 약 6.5km2에 달했다. 도시에는 많은 벽돌 공사가 있어 도시의 구조 밀도를 보여주었다.

3. 불교에서의 코삼비

코삼비는 고타마 붓다 시대에 매우 번영한 도시로, 많은 부유한 상인들이 거주했다. 이곳은 북서부와 남부 지역의 상품과 여행객들의 중요한 중계지였으며, 붓다의 생애에 대한 기록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4] 붓다 시대에 이 도시의 왕은 파란타파였으며, 그의 아들 우데나(팔리어: Udena, 산스크리트어: Udayana)가 그 뒤를 이었다.[15] 아난다는 붓다의 열반에 적합한 장소 중 하나로 코삼비를 언급하기도 했다.[16]

이 도시는 바라나시에서 강을 따라 30 리그 떨어져 있었으며,[18] 라자가하(지금의 라지기르)에서 코삼비로 가는 일반적인 경로는 강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다.[19] 육로를 이용할 경우, 우자이니, 고나다, 비디샤, 바나사브야, 카우샴비, 사케타, 사왓티, 카필라바스투, 쿠시나라, 파바, 베살리 등을 거쳐 라자가하까지 갈 수 있었다.[19]

코삼비 근처 강가에는 우다야나/우데나의 공원인 우다카바나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난다와 핀돌라 바라드바자가 우데나 궁궐의 여성들에게 설법하기도 했다.[20] 붓다는 코삼비의 심시파바나에 한 번 머물렀다고도 전해진다.[21]

알라하바드에 있는 아쇼카 왕의 석주는 원래 카우샴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는 코삼비의 대신(마하마트라)에게 상가를 분열시키는 자를 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35]

현장은 카우샴비에서 우다야나 왕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백단 나무 불상을 보았고, 고시라(고시타)의 집터가 있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36]

3. 1. 불교 사원

붓다 재세 시기부터 코삼비에는 콕쿠타라마, 고시타라마, 파바리카-암바바나, 바다리카라마 등 승가의 네 곳의 사찰이 있었다.[23] 이 사찰들은 각각 콕쿠타, 고시타, 파바리카라는 코삼비의 가장 저명한 시민 세 명이 기증했다. 붓다는 여러 차례 코삼비를 방문하여 이 사찰들에 머물렀으며, 이 방문 중에 설해진 여러 설법이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붓다는 코삼비에서 아홉 번째 우기를 보냈으며, 이때 브라만 마간디야의 딸인 마간디야의 혼인 제안을 받았다. 마간디야는 부처의 거절을 모욕으로 여겼고, 코삼비의 우데나 왕과 결혼한 후 부처와 부처의 추종자였던 우데나의 아내 사마바티에게 여러 방식으로 복수하려 했다.[23] 팔리 경전에 따르면, 기원정사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상인 고시타, 쿠크타, 파바리카 3인은 우안거를 위한 시설을 만들어 부처를 초청했다.[32]

3. 2. 코삼비 분열

붓다 시대에 코삼비의 승려들 사이에서 큰 분열이 일어났다. 한 승려가 화장실 물통에 물을 남겨둔 죄(모기가 번식하게 하는 행위)로 비난받았지만, 그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율장에 정통했기에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혐의를 기각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규칙은 복잡했다. 한편으로 그 승려는 규칙을 위반하여 범죄자로 취급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그렇게 취급받아서는 안 되었다. 결국 그 승려는 파문되었고, 이는 큰 불화를 야기했다.[24]

이 문제는 붓다에게 보고되었고, 붓다는 양쪽 편의 지지자들을 꾸짖고 그들에게 갈등을 포기하도록 촉구했지만, 그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심지어 폭력 사태까지 벌어졌다. 코삼비의 사람들은 승려들의 행동에 분노했고, 다툼은 더욱 격렬해졌다. 붓다는 다시 화합을 권하며, 코살라의 디기티 왕의 이야기를 승려들에게 들려주었지만, 그의 화해 노력은 소용이 없었고, 한 승려는 실제로 그에게 그들의 갈등을 그가 간섭하지 않고 해결하도록 놔두라고 요청했다. 붓다는 실망하여 코삼비를 떠났고, 발라칼로나카라가마와 파치나밤사다야를 거쳐 파리레이야카 숲으로 들어가 혼자 수행했다. 그동안 양쪽의 승려들은 부분적으로 코삼비의 신도들의 압력에 의해 뉘우쳤고, 사왓티에 있는 붓다에게 와서 그의 용서를 구하고 분쟁을 해결했다.[24]

3. 3. 기타 불교 관련 기록

바쿨라는 카우샴비의 은행가 아들이었다.[25] 붓다 시대에 카우샴비의 나루터 근처에는 과거 선장의 환생인 강력한 나가 왕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사가타에 의해 개종되었다.[26] 루자는 카우샴비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고,[27] 치타 판디타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다.[28] 현장은 코삼비에서 우다야나 왕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백단 나무 불상을 보았고, 고시라(고시타)의 집터가 있다는 것도 전하고 있다.[36]

4. 코삼비 궁전 건축

인도 고고학 조사단(ASI)이 카우샴비에서 실시한 고고학 발굴 조사는 기원전 8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6단계로 건축된 궁전을 밝혀냈다. 서기 1-2세기에 해당되는 마지막 단계는 세 개의 블록으로 나뉘고 두 개의 갤러리를 포함하는 광대한 구조물이었다. 중앙 블록에는 중앙 홀이 있었으며, 이는 통치자의 주거 공간 역할을 하는 방으로 둘러싸인 알현실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구조물은 벽돌과 돌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으며, 두 층에 걸쳐 석회가 칠해졌다.[30]

궁전은 광대한 지하 챔버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부 구조와 갤러리는 진정한 아치의 원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좁은 통로에는 4중심 첨두 아치가, 더 넓은 구역에는 분절 아치가 사용되었다. 중앙 및 동쪽 블록의 상부 구조는 건물을 장식하는 돔의 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체 갤러리와 상부 구조는 5cm 두께의 재 층 아래에서 붕괴된 것으로 발견되었으며, 이는 화재로 인한 궁전의 파괴를 나타낸다.[30]

5. 위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프라야가(지금의 알라하바드)에서 서남쪽으로 500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며, 『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서는 프라야가에서 7일이 걸린다고 기록하고 있다.[31] 그러나 실제 카우샴비는 알라하바드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야무나 강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32] 현장의 기록은 거리를 과장되게 묘사한 것이다. 이 일대는 현재 카우샴비현(Kaushambi district)이라고 불린다.

1861년에 알렉산더 커닝엄은 야무나 강 북쪽 지역을 카우샴비와 동일시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G.R. 샤르마가 이끄는 알라하바드 대학교의 고고학적 조사로 카우샴비 유적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 추정이 옳았음이 밝혀졌다.[32]

참조

[1] 서적 The Wonder That Was India Rupa and Co
[2] 서적 The Strides of Vishnu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3] 뉴스 The Ghositarama of Kaushambiern http://www.dailynews[...] 2007-12-05
[4] 문서 J.iv.28; vi.236
[5] 서적 Aśoka and the Decline of the Mauryas Oxford University Press, New Delhi
[6] 간행물 A Note on the Allahabad Pillar of Aśoka 1935-10
[7] 서적 The Edicts of Aśoka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New Delhi
[8] 서적 Numismatic Digest https://books.google[...] Numismatic Society of Bombay.
[9] 서적 Indian Numismatic Studies https://books.google[...] Abhinav Publications 2004-10
[10] 서적 The City in South As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11] 웹사이트 Fortified Cities of Ancient India: A Comparative Study https://books.google[...] Anthem Press 2014-12-01
[12] 서적 Recent Studies in Indian Archaeology
[13] 문서 E.g., UdA.248; SNA.300; MA.i.535. Epic tradition ascribes the foundation of Kosambī to a Cedi prince, while the origin of the Vatsa people is traced to a king of Kāsī, see PHAI.83, 84
[14] 문서 e.g., MA i.539; PsA.413
[15] 문서 MA.ii.740f; DhA.i.164f
[16] 문서 D.ii.146,169
[17] 문서 See, e.g., Vin.i.277
[18] 문서 AA.i.170; PsA.491
[19] 문서 See Vin.ii.184f
[20] 문서 Vin.ii.290f; SNA.ii.514; J.iv.375
[21] 문서 S.v.437
[22] 문서 PvA.141
[23] 문서 DhA.i.199ff; iii.193ff; iv.1ff; Ud.vii.10
[24] 문서 Vin.i.337-57; J.iii.486ff (cp.iii.211ff); DhA.i.44ff; SA.ii.222f. The story of the Buddha going into the forest is given in Ud.iv.5. and in S.iii.94, but the reason given in these texts is that he found Kosambī uncomfortable owing to the vast number of monks, lay people, and heretics. But see UdA.248f, and SA.ii.222f).
[25] 문서 MA.ii.929; AA.i.170
[26] 문서 AA.i.179; but see J.i.360, where the incident is given as happening at Bhaddavatikā
[27] 문서 J.vi.237f
[28] 문서 J.iv.392
[29] 문서 S.iv.179; but see AA.i.170; MA.ii.929; PsA.491, all of which indicate that the city was on the Yamunā) as being "Gangāya nadiyā tīre." This is either an error, or here the name Gangā refers not to the Ganges but to the Yamunī.
[30] 서적 Indian Archaeology: A review 1961-62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31] 문서 水谷訳(1999) 巻2 pp.228-230
[32] citation The Ghositarama of Kaushambi http://www.dailynews[...] Daily News 2007-12-05
[33] 문서 水谷訳(1999) p.230
[34] 문서 Pargiter (1922) p.285
[35] 문서 Salomon (1998) p.139
[36] 서적 水谷訳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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