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히도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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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레히도르섬은 필리핀 카비테주에 속한 섬으로, 마닐라만 입구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거친 지형과 요새로 인해 "더 록"이라고도 불리며, 과거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지배를 거치며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미군과 필리핀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이었으며, 현재는 전쟁의 흔적을 간직한 역사 유적지로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말린타 터널, 태평양 전쟁 기념관 등이 있으며, 마닐라항에서 배편으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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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히도르섬 - 코레히도르 전투
코레히도르 전투는 1941년 12월부터 1942년 5월까지 마닐라 만 입구의 전략적 요충지인 코레히도르 섬에서 일본군과 미군 및 필리핀 연합군 간에 벌어져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섬이 함락되고 필리핀 전체가 함락되는 결과를 낳았다. - 미국의 요새 - 포트 트라이언 공원
포트 트라이언 공원은 뉴욕시 맨해튼 북부에 위치하며, 미국 독립 전쟁 중 요새로 사용된 후 자선가의 기증으로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클로이스터스 미술관, 린든 테라스 등 다양한 시설과 야생 동물을 갖춘 문화 행사 장소이다.
코레히도르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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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코레히도르 |
위치 | 마닐라만 |
![]() | |
소속 군도 | 필리핀 제도 |
지리 | |
면적 | 5.49 km² |
길이 | 6.5 km |
너비 | 2.0 km |
최고점 | 탑사이드 (고원) |
해발고도 | 179.5 m |
행정 구역 | |
국가 | 필리핀 |
주 | 카비테주 |
도시 | 카비테시 |
바랑가이 | 바랑가이 8 (마누엘 S. 로하스) |
기타 정보 |
2. 지리
바탄주 남부 해안에 더 가깝지만, 코레히도르섬과 마닐라만의 다른 요새화된 섬들은 필리핀 카비테시의 관할이다.[2][3][4] 코레히도르섬은 "더 록(The Rock)"이라고도 불리며, 남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카바요섬과 함께 마닐라만 입구를 북쪽 채널과 남쪽 채널로 나눈다.
올챙이 모양의 이 섬은 꼬리가 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는 약 6.5km, 가장 넓은 곳의 너비는 약 2km, 총 면적은 약 900ha이다. 최고 고도는 탑사이드에서 180m이다.[5] 코레히도르섬과 카바요섬은 코레히도르 칼데라의 잔해이며, 필리핀 화산 지진 연구소(PHIVOLCS)는 여전히 코레히도르섬을 잠재적 활화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2. 1. 지형
바탄주 남부 해안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레히도르섬과 마닐라만의 다른 요새화된 섬들은 필리핀의 도시인 카비테시의 관할 하에 있다.[2][3][4] 코레히도르섬은 거친 지형과 강력한 요새 때문에 "더 록(The Rock)"이라고도 불리며, 남쪽으로 약 1.7km 떨어진 카바요섬과 함께 마닐라만 입구를 북쪽 채널과 남쪽 채널로 나눈다.올챙이 모양의 이 섬은 꼬리가 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는 약 6.5km이고 가장 넓은 곳의 너비는 약 2km이며, 총 면적은 약 900ha이다. 최고 고도는 탑사이드에서 180m이다.[5] 섬은 네 부분으로 나뉜다.
코레히도르섬과 카바요섬은 약 100만 년 전에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화산 분화구인 코레히도르 칼데라의 잔해이다. 하지만, 필리핀 화산 지진 연구소(PHIVOLCS)는 여전히 코레히도르섬을 잠재적 활화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3. 역사
스페인 통치 시대, 코레히도르 섬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마닐라 만에 들어오는 선박을 검사했다. '코레히도르'라는 이름은 스페인어 "코레히르"(corregir, "엄중하게 검사하기" 또는 "바로잡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필리핀 통치자가 미국으로 바뀌면서, 1902년에 포트 밀스 기지가 세워져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미군은 대량의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거대한 대포를 설치하고 코레히도르 섬을 철벽의 해상 요새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공격하면서 미국 극동 육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코레히도르에 사령부를 두고 방어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42년 3월 가족과 마누엘 케손 필리핀 대통령 등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했다. 같은 해 4월 바탄 반도의 미군 및 필리핀군은 항복했지만, 코레히도르 섬은 남아 전투를 계속했고, 1942년 5월 6일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항복했다.
1945년 전황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유리하게 역전되면서, 맥아더는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이끌고 필리핀의 일본군을 압도했다. 맥아더는 코레히도르 섬 탈환을 준비하였고, 같은 해 2월 제503공수연대전투단의 공수 강하 작전을 통해 섬을 재점령했다.
현재 코레히도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용했던 무기와 요새 설비가 보존되어 있으며, 거대한 말린타 터널과 폐허가 된 막사 등을 포함한 유적이 남아 관광 명소가 되었다.
3. 1. 스페인 식민지 시대
스페인 통치 시대, 코레히도르 섬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마닐라 만에 들어오는 선박의 검사가 이루어졌다. '코레히도르'라는 이름은 스페인어 "코레히르"(corregir, "엄중하게 검사하기" 또는 "바로잡다"라는 뜻)에서 유래했다.[11] 스페인 통치 시대의 명칭 "Isla del Corregidor"는 "코레히도르의 섬"이라는 의미이다. 코레히도르는 국왕 직할 하에 있는 왕실의 행정 구역 "코레히미엔토"(Corregimiento)를 이끄는 심문 권한을 가진 행정 구역의 장(시장)을 의미한다.[12]1570년 5월 19일,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와 그의 군대가 마닐라 만에 도착하면서 이 섬은 스페인 주권 하에 놓이게 되었다. 레가스피는 스페인 왕실로부터 필리핀의 수도를 마닐라에 건설하고, 루손과 민다나오에 있는 무슬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권한을 부여받았다. 코레히도르는 이 작전에 사용된 9척의 스페인 갤리온을 지원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통치 하에서, 코레히도르는 방어 요새, 형무소, 세관 검사소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배의 접근을 마닐라에 알리는 신호 전초 기지 역할도 했다.
1574년 11월 23일, 중국 해적 리마홍과 65척의 선단, 3,000명의 병력이 코레히도르와 마리벨레스 사이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그는 리마홍 자신이 지휘하거나 일본 해적 시오코가 지휘하는 두 차례의 마닐라 공격을 감행했다. 두 공격 모두 후안 데 살세도 총독이 이끄는 치열한 방어 전투로 인해 실패했다.
1600년 11월과 12월, 네덜란드와 스페인 간의 80년 전쟁 중, 네덜란드 사략선이자 제독인 올리비에 반 노르트는 코레히도르 섬 주변을 그의 마지막 두 척의 배, ''모리셔스''와 ''에인데라흐트''의 정박지로 사용했다. 그곳에서 그는 스페인이 해적으로 간주하는 활동, 즉 마닐라를 오가는 항로의 배들을 공격했다. 이 상황은 1600년 12월 14일 포춘 섬에서의 해전 이후 종료되었다. 스페인은 급하게 개조된 마닐라 갤리온 ''산 디에고''를 잃었지만, 네덜란드 선박 ''에인데라흐트''를 포획했고, 반 노르트 제독은 필리핀에서 철수했다. 반 노르트는 3년의 항해를 계속하며 남은 한 척의 배로 귀향하여 45명의 생존자와 함께 세계를 항해한 최초의 네덜란드 선장이 되었다.[13]
이러한 사건들과 민다나오에서 무슬림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만 입구를 통제하기 위해 코레히도르에 감시 선박이 배치되었다. 1637년 자료에 따르면, 이 선박에는 20명의 승무원이 있었으며, 이 임무를 위해 연간 540페소를 받았다.
코레히도르 섬은 1647년 6월 네덜란드에 점령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카비테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으나, 앙드레 로페스 데 아잘두이가 지휘하는 스페인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루손과 세부 근처의 중국 상선 교통을 가로채는 작전 기지로 이 섬을 잘 활용했기 때문에 7개월 더 섬에 머물렀다.
1762년 10월, 새뮤얼 코니쉬 경과 윌리엄 드레이퍼가 이끈 마닐라 및 카비테에 대한 영국 침공 동안, 코레히도르는 전함, 특히 HMS ''팬더''와 HMS ''아르고''의 정박지로 사용되었다. 또한 1762년 11월,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포획된 스페인 보물 갤리온의 정박지로도 사용되었다.
필리핀 섬에 경고를 발령하는 임무를 띤 이그나시오 마리오 데 알라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의 도착은 코레히도르 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는 활동을 해군 기지를 카비테에 건설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1853년 1월 18일, 코레히도르 섬 등대가 섬의 가장 높은 부분에서 처음 불을 밝혀 남중국해에서 들어오는 선박을 위해 마닐라 만 입구를 표시했다. 스페인 정부는 이 2등급 불빛을 건설했는데, 이는 해발 약 194.77m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32.19km 거리에서 보인다.[14]
3. 2. 미국 식민지 시대
스페인 통치 시대, 코레히도르 섬에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마닐라 만에 들어오는 선박의 검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코레히도르라는 이름은 스페인어 "엄중하게 검사하기"에서 유래했다. 스페인-미국 전쟁의 결과 필리핀 통치자가 미국으로 바뀌면서, 1902년에 포트 밀스 기지가 세워져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미군은 대량의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거대한 대포를 설치하고 코레히도르 섬을 철벽의 해상 요새로 삼았다.1902년, 이 섬은 미국의 군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1903년, 미국 육군에 의해 요양병원이 설립되었다.
윌리엄 H. 태프트가 의장을 맡은 요새 위원회는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획득한 영토의 주요 항구를 요새화할 것을 권고했다.[17] 결과적으로 코레히도르 섬은 요새화되어 마닐라 및 수비크 만 항만 방어에 통합되었다. 1908년, 미국 육군의 포병 참모총장 사무엘 마이어스 밀스 주니어 준장을 기리기 위해 정규 육군 부대가 섬에 설립되었으며, 포트 밀스로 지정되었다. 1909년 초, 미국 육군 공병대 제2대대 H중대가 코레히도르 섬에 배치되어 섬의 여러 지역에 콘크리트 진지, 방공호 및 길 건설을 시작했다. 이 선구적인 공병대는 1912년 3월 15일에 포트 밀스를 떠났다. 1909년과 1923년 사이에 35개의 다양한 번호가 매겨진 해안 포병대 중대의 전부 또는 일부가 포트 밀스에서 복무했다.
코레히도르 섬의 방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시 조지 F.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해안 포병 사령부의 직접적인 책임이었다. 1924년 연대 시스템으로의 복귀 후 섬에 주둔한 정규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제59 해안 포병 (미국 정규 육군)
- 제60 해안 포병 AA (미국 정규 육군)
- 제91 해안 포병 (필리핀 스카우트)
- 제92 해안 포병 (트랙터 견인) (필리핀 스카우트)
- 마닐라 및 수비크 만 항만 방어 및 해상 방어 사령부 본부.
포트 밀스 외에도, 카바요 섬의 육군 기지는 포트 휴즈로, 엘 프라이레 섬의 포트 드럼으로, 카라바오 섬에는 포트 프랭크로 명명되었다. 전쟁 계획에 따르면, 이 요새들은 6개월 동안의 포위를 견딜 수 있었으며, 그 후 미국이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코레히도르 섬의 요새는 전적으로 해상 공격에 대비하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미국의 군사 계획가들은 비행기가 포트 밀스를 쓸모없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미국은 1922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해 요새를 개선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 1932년~1934년에 미국 육군은 전쟁 시 군수품과 중요한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일련의 관련 측면 터널과 함께 말린타 터널을 건설했다.
포트 밀스의 방어 시설에는 1.5억달러 이상이 소요되었으며, 이는 카바요, 카라바오 및 엘 프라이레의 인접 섬 요새화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3.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 12월, 일본군이 필리핀을 공격하면서 미국 극동 육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코레히도르에 사령부를 두고 방어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42년 3월 가족과 마누엘 케손 필리핀 대통령 등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했다. 1942년 4월 바탄 반도의 미군 및 필리핀군은 항복했지만, 코레히도르 섬은 남아 전투를 계속했고, 1942년 5월 6일 코레히도르 수비대는 결국 항복했다.이후 코레히도르는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었지만, 1945년 전황이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 유리하게 역전되면서, 맥아더는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이끌고 필리핀의 일본군을 압도했다. 맥아더는 코레히도르 섬 탈환을 준비하였고, 1945년 2월 제503공수연대전투단의 공수 강하 작전을 통해 섬을 재점령했다.
현재 코레히도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용했던 무기와 요새 설비가 보존되어 있으며, 거대한 말린타 터널과 폐허가 된 막사 등을 포함한 유적이 남아 관광 명소가 되었다.
3. 3. 1. 필리핀 공방전 (1941-42)
1941년~1942년 필리핀 전투 동안 일본 제국 육군은 북쪽에서 루손섬을 침공하여 육지 쪽에서 마닐라를 공격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국군과 필리핀군은 마닐라만 서쪽에 있는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1942년 4월 9일 바탄의 함락은 극동 미국 육군 (USAFFE)의 모든 조직적인 저항을 종식시켰고, 필리핀 북부 루손섬에 일본 침략군의 진격을 허용했다.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항복해야 했고, 코레히도르섬과 마닐라만 인근 섬만이 이 지역에서 미국의 통제를 받는 유일한 지역으로 남았다.[3]1941년 12월 24일부터 1942년 2월 19일까지 코레히도르섬은 필리핀 정부의 임시 소재지였다. 1941년 12월 30일, 마누엘 L. 케손과 세르히오 오스메냐는 말린타 터널 밖에서 각각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1942년 3월 11일까지 코레히도르섬을 연합군 사령부로 사용했다. USAFFE의 라디오 방송국인 자유의 소리는 코레히도르섬에서 방송되어 바탄의 함락에 대한 악명 높은 발표를 내보냈다. 1942년 4월에는 제4해병대의 한 대대가 섬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3]
코레히도르 전투는 필리핀 정복을 위한 일본군의 작전의 절정이었다. 마닐라만 입구에 있는 요새는 일본 제14방면군의 본마 마사하루 중장이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에게 남은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코레히도르섬과 인근 섬의 미국군과 필리핀 군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마닐라만 사용을 막았지만, 일본 제국 육군은 바탄 남쪽에 중포를 배치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코레히도르섬을 봉쇄했다. 일본군은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의 지휘 아래 1942년 5월 6일, 남아있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의 항복을 강요했다.[3]

3. 3. 2. 코레히도르 전투 (1945)
1945년 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코레히도르섬 탈환 전투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과 필리핀군은 일본 점령군으로부터 섬 요새를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맥아더는 1942년 3월에 미국 대통령의 지시로 가족 및 마누엘 케손 필리핀 대통령 등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한 후, 코레히도르 섬 탈환에 집착했다.[3] 전황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역전되면서, 맥아더는 미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이끌고 필리핀의 일본군을 압도했다. 마침내 1945년 2월, 제503공수연대전투단의 공수 작전을 통해 코레히도르 섬을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다.[3]3. 4. 전후
현재 코레히도르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무기와 요새 설비가 보존되어 있으며, 거대한 마린타 터널과 폐허가 된 병영 등을 포함한 유적이 남아 관광 명소가 되었다. 많은 참전 용사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섬의 역사 때문에 섬을 방문하고 있으며, 역사적인 기념물이자 관광 명소로 많은 여행사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군사 시설을 둘러보는 섬 당일 투어를 제공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의 대부분은 복원되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사망한 필리핀과 미국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전쟁 이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3. 4. 1. 자비다 학살 (1968)
1968년, 테일사이드의 킨들리 비행장 근처 지역은 방사모로와 모로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자비다 학살이 일어난 곳이다.[18][19]북보르네오 분쟁과 관련하여, 당시 필리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비밀리에 "메르데카 작전"의 실행을 승인했다. 이 작전은 "자비다"라는 암호명으로 불리는 비밀 모로 특공대를 코레히도르에서 훈련시켜 사바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다양한 설명[20]에 따르면 18명에서 69명[21][22]의 신병들은 주로 술루 출신의 타우수그족이었는데,[21][22] 결국 지휘관들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급여 미지급, 혹은 최종 임무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면서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23] 지휘관들은 그 후 모든 병사들을 총살했고, 유일한 목격자인 지빈 아룰라만이 죽은 척하여 탈출에 성공했다.[21]
지빈 아룰라는 탈출하기 위해 수영을 시도하다가 카라발로 섬 근처에서 어부들에게 구조되었고, 그의 증언은 결국 수많은 재판과 청문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연루된 지휘관들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고, 이는 마르코스 정부가 무슬림 공동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호로 작용했다.[20] 이 사건은 필리핀 무슬림 사회에서 격분을 불러일으켰고,[24] 결국 모로 독립 요구를 촉발시켰으며, 무슬림 독립 운동, 모로 민족 해방 전선,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같은 분리주의 운동의 부상, 그리고 전반적인 모로 분쟁으로 이어졌다.[25][19] 현재 자치 방사모로 자치구 (BARMM) 정부는 자비다 학살을 방사모로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인정한다.[25]
2015년, 학살 47주년 기념식에서 '민다나오 평화의 정원: 코레히도르 섬'이라는 상징적인 평화 기념비가 학살 생존자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26]
4. 주요 시설
코레히도르섬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시설들이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기념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코레히도르섬에서 벌어진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시설이다.
- 태평양 전쟁 기념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필리핀군 및 미군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다. 1968년에 300만달러의 비용으로 완공되었으며, 돔의 오큘러스 바로 아래에 원형 제단이 있는 로툰다가 있다. 5월 5일 정오 12시에 빛이 제단에 직접 닿는데, 이는 그곳에 주둔했던 군대의 항복과 72일간의 폭격 동안 보여준 용기를 기리는 의미이다. 기념비 뒤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약 12.19m 높이의 코르텐 강철 구조물인 ''영원한 자유의 불꽃''이 있다.[28]
- 말린타 터널: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점령 직전 필리핀-미국 연합군의 마지막 거점이었으며, 현재는 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여주는 오디오-비주얼 프레젠테이션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철수, 마누엘 L. 케손 필리핀 대통령과 그의 가족의 대피 등이 포함된다.[6]
- 코레히도르 호텔: (설명 추가 필요)
- 필리핀 영웅 기념관: 테일 엔드에 위치한 6000m2 규모의 단지로, 15세기부터 현재까지 필리핀인들이 벌인 영웅적인 전투를 묘사한 14개의 벽화가 있다. 1992년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에 의해 개관되었다.[29]
- 일본 정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코레히도르섬에서 복무하고 사망한 일본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기도 공간, 신사, 기념비, 사진과 기념품을 보관하는 작은 정자가 있다.[29]
- 등대: 1853년 처음 불을 밝힌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오래된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손상되었으나, 1950년대에 재건되었다.
4. 1. 군사 시설
이 섬은 1902년에 미국의 군사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1903년에는 미국 육군에 의해 요양병원이 설립되었다.윌리엄 H. 태프트가 의장을 맡은 요새 위원회는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획득한 영토의 주요 항구를 요새화할 것을 권고했다.[17] 그 결과, 코레히도르 섬은 요새화되어 마닐라 및 수비크 만 항만 방어에 통합되었다. 1908년, 미국 육군의 포병 참모총장 사무엘 마이어스 밀스 주니어 준장을 기리기 위해 정규 육군 부대가 섬에 설립되었으며, 포트 밀스로 지정되었다. 1909년 초, 미국 육군 공병대 제2대대 H중대가 코레히도르 섬에 배치되어 섬의 여러 지역에 콘크리트 진지, 방공호 및 길 건설을 시작했다. 이 선구적인 공병대는 1912년 3월 15일에 포트 밀스를 떠났다. 1909년과 1923년 사이에 35개의 다양한 번호가 매겨진 해안 포병대 중대의 전부 또는 일부가 포트 밀스에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작 시 코레히도르 섬의 방어는 조지 F. 무어 소장이 지휘하는 필리핀 해안 포병 사령부의 직접적인 책임이었다. 1924년 연대 시스템으로 복귀 후 섬에 주둔한 정규 부대는 다음과 같다.
- 제59 해안 포병 (미국 정규 육군)
- 제60 해안 포병 AA (미국 정규 육군)
- 제91 해안 포병 (필리핀 스카우트)
- 제92 해안 포병 (트랙터 견인) (필리핀 스카우트)
- 마닐라 및 수비크 만 항만 방어 및 해상 방어 사령부 본부.
포트 밀스 외에도, 카바요 섬의 육군 기지는 포트 휴즈로, 엘 프라이레 섬의 포트 드럼으로, 카라바오 섬에는 포트 프랭크로 명명되었다. 전쟁 계획에 따르면, 이 요새들은 6개월 동안의 포위를 견딜 수 있었으며, 그 후 미국이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었다. 코레히도르 섬의 요새는 전적으로 해상 공격에 대비하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미국의 군사 계획가들은 비행기가 포트 밀스를 쓸모없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미국은 1922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의해 요새를 개선하는 데 제한을 받았다. 1932~1934년에 미국 육군은 전쟁 시 군수품과 중요한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일련의 관련 측면 터널과 함께 말린타 터널을 건설했다.
포트 밀스의 방어 시설은 미국 연방 정부에 1.5억달러 이상을 지출했으며, 이는 카바요, 카라바오 및 엘 프라이레의 인접 섬 요새화 비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코레히도르섬은 두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과 격전지였다. 첫 번째는 1942년 초 몇 달 동안, 두 번째는 1945년 2월에 일본 제국 육군과 미국 육군, 그리고 그 하위 부대인 필리핀 육군 사이에 벌어졌다.
필리핀 전투 (1941–42) 동안 일본 제국 육군은 1942년 초 북쪽(린가옌 만에서)에서 루손섬을 침공하여 육지 쪽에서 마닐라를 공격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의 미국군과 필리핀군은 마닐라만 서쪽에 있는 바탄 반도로 후퇴했다. 1942년 4월 9일 바탄의 함락은 극동 미군 (USAFFE)의 모든 조직적인 저항을 종식시켰고, 필리핀 북부의 루손섬에 일본 침략군의 진격을 허용했다. 식량과 탄약 부족으로 인해 항복해야 했고, 코레히도르섬과 마닐라만 인근 섬만이 이 지역에서 미국의 통제를 받는 유일한 지역으로 남았다.
1941년 12월 24일부터 1942년 2월 19일까지 코레히도르섬은 필리핀 정부의 임시 소재지였다. 1941년 12월 30일, 마누엘 L. 케손과 세르히오 오스메냐는 말린타 터널 밖에서 각각 필리핀 연방의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1942년 3월 11일까지 코레히도르섬을 연합군 사령부로 사용했다. USAFFE의 라디오 방송국인 자유의 소리는 코레히도르섬에서 방송되어 바탄의 함락에 대한 악명 높은 발표를 내보냈다. 1942년 4월에는 제4해병대의 한 대대가 섬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코레히도르 전투는 필리핀 정복을 위한 일본군의 작전의 절정이었다. 마닐라만 입구에 있는 요새는 일본 제14방면군의 본마 마사하루 중장이 이끄는 일본 제국 육군에게 남은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코레히도르섬과 인근 섬의 미국군과 필리핀 군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마닐라만 사용을 막았지만, 일본 제국 육군은 바탄 남쪽에 중포를 배치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코레히도르섬을 봉쇄했다. 일본군은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의 지휘 아래 1942년 5월 6일, 남아있는 미국군과 필리핀군의 항복을 강요했다.
코레히도르섬 탈환 전투는 1945년 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벌어졌으며, 미국군과 필리핀군은 일본 점령군으로부터 섬 요새를 성공적으로 탈환했다. 코레히도르에는 56문의 해안 방어포와 박격포로 구성된 23개의 포대가 설치되었다. 또한 코레히도르에는 76문의 대공포(3인치 28문, 50구경 48문)와 10개의 60인치 스페리 탐조등을 갖춘 13개의 대공포대가 있었다.
가장 사거리가 긴 해안포는 배터리 헌과 스미스에 설치된 12인치포 2문으로, 수평 사거리는 였다. 전방위로 회전이 가능했지만, 이 포들은 평탄한 궤도로 인해 최대 고도가 35도에 불과하여 바탄과 카비테의 방어 구역 목표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포위 기간 동안 섬에는 충분한 철갑탄이 있었지만, 바탄의 육상 목표에 사용하기 위해 가장 많이 필요했던 대인용 탄약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인용 포탄은 배터리 웨이와 기어리의 12인치 박격포용이었다. 배터리 몬자는 휠러 포인트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필리핀 스카우트의 제92해안 포병 연대 G포대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포대는 두 문의 프랑스제 155mm GPF 곡사포를 갖추고 있었으며, 두 문 모두 섬 절벽 측면에 숨겨져 있었다. 한 문의 포는 로버트 L. 오번 소위가 지휘했는데, 그는 전투 말기에 "포탄이 [적] 함선을 향해 흔들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포는 권총 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오번 소위의 포는 1942년 4월 28일에 피격되어 파괴되었고, 포병 2명이 사망했다. 배터리 몬자의 나머지 병력은 1942년 7월 18일까지 게릴라로 활동하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오번 소위를 포함하여 단 6명만이 포로가 된 후 살아남았다. 포병으로 복무하던 5명의 사병들은 체포된 지 이틀 만에 임시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탈출 시도 중 모두 사망했다.
배터리 웨이는 헨리 N. 웨이 중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배터리 기어리와 함께 일본 침략 당시 코레히도르 수비대의 주력이었다. 360도 회전이 가능한 4문의 12인치 박격포는 바탄의 육상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포들은 1942년 1월 말부터 2월 중순까지 바탄 남서부 해안에서 시도된 상륙 작전 동안 일본군 진지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다. 이 박격포들은 1942년 5월 적의 포격으로 침묵했다. 배터리 기어리는 8문의 13톤 12인치 박격포로 구성되어 있었다. 코레히도르 남쪽 해안의 움푹 파인 곳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포격으로부터 비교적 잘 보호받았다. 1942년 1월 6일, 벤 유잉 킹 대위의 지휘하에 일본군의 폭탄이 임시로 만들어진 벙커에 떨어져 배터리 기어리의 부사관과 포병 31명이 사망했다.
1942년 1월 26일 이른 아침, 배터리 기어리는 바탄 전투 중 바탄 반도 서쪽의 롱가스카와얀 곶 근처에 있던 일본군 부대에 포격을 가했다.[27] 이는 남북 전쟁 이후 고정된 해안 포병이 적을 향해 발포한 첫 번째 사례였다. 비록 포격이 정확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벙커 대령은 킹 대위를 교체하기로 결정하고, 킹 대위는 포트 XO의 임무를 수행하고 포트 드럼의 본부 포대를 지휘하도록 보냈다. 배터리 기어리의 후임은 토마스 W. 데이비스 대위였다. 이후, 이 포대는 일본군 포병에 의해 정확히 지목되어 심한 포격을 받았다. 1942년 5월 2일, 240mm 포탄이 직접 명중하여 포탄 저장고가 폭발한 것이 코레히도르 공방전 전체에서 가장 치명적인 일격으로 판명되었다. 이 폭발로 50톤짜리 박격포 포신이 흩날렸으며, 하나는 떨어진 곳으로, 다른 하나는 3피트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 벽을 뚫고 인접한 배터리 크로켓의 화약 저장고로 날아갔다. 쇠붙이 조각들이 말린타 터널까지 날아가 포대 승무원 27명이 즉사했다. 또한, 박격포 하나는 포미에 실탄이 장전된 상태였고, 탄약고가 피격당했을 때 발사하려는 과정에 있었다. 그 생존한 대인용 탄환은 아직 박격포 포미에 남아 있다.
4. 2. 기념 시설
오늘날 코레히도르섬은 역사적인 기념물이자 관광 명소이다. 많은 여행사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군사 시설을 둘러보는 섬 당일 투어를 제공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건물들의 대부분은 복원되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사망한 필리핀과 미국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전쟁 이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코레히도르섬 탑사이드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태평양 전쟁 기념비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필리핀군 및 미군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다. 1968년에 300만달러의 비용으로 완공되었다. 주요 기념물 구조는 돔의 오큘러스 바로 아래에 원형 제단이 있는 로툰다로, 낮 동안 빛이 제단으로 떨어진다. 5월 5일 정오 12시에 빛이 제단에 직접 닿는데, 이는 그곳에 주둔했던 군대의 항복과 72일간의 폭격 동안 보여준 용기를 기리는 의미이다. 기념비 뒤에는 자유를 상징하는 약 12.19m 높이의 코르텐 강철 구조물인 ''영원한 자유의 불꽃''이 있으며, 아리스티데스 데메트리오스에게 의뢰되었다.[28]
말린타 터널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의 점령 직전 필리핀-미국 연합군의 마지막 거점이었으며, 현재는 국민 예술가 람베르토 V. 아벨라나가 제작한 오디오-비주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마지못한 철수, 마누엘 L. 케손 필리핀 대통령과 그의 가족의 필리핀 미점령 지역으로의 대피, 그리고 결국 미국으로의 망명이 포함된다.[6]
코레히도르섬의 가장 최근 추가된 시설 중 하나는 테일 엔드에 위치한 필리핀 영웅 기념관이다. 이 6000m2 규모의 단지에는 15세기부터 현재까지 필리핀인들이 벌인 영웅적인 전투를 묘사한 14개의 벽화가 있다. 이 기념관은 프란시스코 마뇨사가 설계했으며, 벽화와 필리핀 게릴라의 조각상은 마누엘 카사스가 제작했다. 이 단지는 1992년 8월 28일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에 의해 개관되었다.[29]
일본 정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코레히도르섬에서 복무하고 사망한 일본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공원에는 기도 공간, 신사, 기념비, 사진과 기념품을 보관하는 작은 정자가 있다.[29]
등대는 1853년 처음 불을 밝힌 코레히도르에서 가장 오래된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1897년에는 결함이 있는 조명 장치가 교체되어 사정거리가 약 53.11km로 늘어났다. 부지 및 관리인 거주지는 미국의 점령 기간 동안 더욱 개선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코레히도르 포위 공격으로 등대가 손상되었다. 등대는 1950년대에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디자인이 변경되었고, 최초의 등대가 세워졌던 동일한 장소에 서 있다. 등대의 전체 랜턴은 최근 필리핀 해안 경비대에 의해 태양광 발전으로 작동하도록 교체되었다.
5. 교통
코레히도르 섬에는 포장된 도로와 산책로가 65km 있었고, 전기 철도 선로는 19.5km에 달했다. 이 철도는 주로 무거운 장비와 탄약을 바텀사이드에서 각 포대로 운반하는 데 사용되었다. 코레히도르 고등학교는 섬에 배치된 필리핀 및 미국 군인의 자녀들이 공부하는 곳이었다. 섬에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전기 트롤리 시스템, 영화관(시네 코레히도르), 야구장 및 수영장도 있었다. 이 지역사회의 상업 및 사교 중심지는 톱사이드에 위치해 있었다.
마닐라항에서 관광선을 타면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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