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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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형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도움을 받아 교육받았다. 그는 안찰관, 법무관을 거쳐 아시아 속주에서 복무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카이사르 내전에서는 폼페이우스 편에 섰으나, 결국 카이사르에게 사면받았지만,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에 올라 형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는 충동적인 성격도 있었지만, 주지사로서 정직하고 교양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리스 비극을 쓰기도 했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형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도움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아테네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기원전 70년 형의 절친한 친구인 아티쿠스의 동생 폼포니아와 결혼했지만, 둘 사이에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이혼했다.
퀸투스는 충동적이고 잔혹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로마인들, 특히 스토아주의를 따르는 이들은 감정 통제를 중시했기에 퀸투스의 성격은 비판받을 만한 요소였다. 형 마르쿠스는 퀸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우려하여 그를 혼자 두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퀸투스는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서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했으며, 그리스 비극을 즐겨 읽고 직접 쓰기도 하는 등 교양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퀸투스는 갈리아 전쟁 시기에 그리스풍 비극 4편을 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쓴 비극 중 세 편의 제목은 《트로아스》, 《에리고네스》, 《엘렉트라》였다. 그는 또한 카이사르의 두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에 관한 시 몇 편과, 티로에게 보낸 세 통의 서한(현재 전해짐), 그리고 형에게 보낸 네 번째 서한을 썼다. 《Commentariolum Petitionis》(《선거 운동 핸드북》)이라는 긴 편지도 남아있는데, 이 편지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최근 학자 앤드루 린토트는 퀸투스가 진짜 저자라고 주장했다.[2] 이 작품은 키케로 시대의 정치적 행동 지침으로 여겨진다.
[1]
서적
弟クィントゥス宛書簡
2. 생애
기원전 66년 안찰관, 기원전 62년 법무관을 역임하며 쿠르수스 호노룸을 밟았다. 기원전 61년부터 아시아 속주에서 전직 법무관으로 복무했고, 기원전 54년부터 52년까지는 형의 소개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단장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여했다.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했고, 벨가이족 암비오릭스의 반란으로 네르비족에게 포위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숙영지를 지키며 용감하게 싸웠다.
카이사르의 내전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에 가담하여 카이사르와 대적했지만, 카이사르에게 사면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자 형 마르쿠스와 함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살생부에 포함되어 도망쳤다. 아들이 삼두정파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자, 퀸투스는 아들을 구하고자 자수했고, 결국 형과 함께 처형당했다.
퀸투스는 충동적인 기질을 지녔고, 군사 작전 중 잔혹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로마의 이상은 전투 중에도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었지만, 퀸투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존속 살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가혹한 처벌을 선호하기도 했다. 형은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퀸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퀸투스는 주지사로서 매우 정직했으며, 그리스 비극을 즐겨 읽고 직접 비극을 쓸 정도로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형제 사이의 관계는 기원전 49년~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독재 기간 동안 불화를 겪기도 했지만, 대부분 애정 어린 관계였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알피눔 출신의 유력한 에퀴테스(기사 계급) 가문인 툴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로마, 아테네, 로도스 등지에서 당대 최고의 웅변가와 철학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형 키케로가 기원전 79년부터 기원전 77년까지 그리스, 로도스 섬, 아시아로 유학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기원전 70년경, 형의 절친한 친구인 아티쿠스의 여동생 폼포니아와 결혼했으나, 성격 차이로 인해 불화가 잦았다. 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기원전 45년 이혼했다. 기원전 66년에 아들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낳았다.
2. 2. 정치 경력
기원전 66년 안찰관, 기원전 62년 법무관 등 쿠르수스 호노룸의 단계를 밟았다.[1] 기원전 61년부터 프로콘술로서 아시아 속주를 다스렸지만 평판이 좋지 않았고, 정무를 노예에게 맡기기도 했다.[1] 형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퀸투스에게 마케도니아 속주의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의 친부)를 본받으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기원전 58년 형 키케로가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에 의해 추방되었을 때, 퀸투스는 형의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 기원전 57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프로콘술 격으로 곡물 공급 임페리움을 5년 동안 부여받고 15명의 레가투스(부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사르데냐를 담당했다.[1] 형 키케로는 추방을 취소하는 법이 성립되어 로마 시로 귀환했고, 퀸투스는 이 귀환 운동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 3. 갈리아 전쟁 참전
기원전 54년부터 52년까지, 퀸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휘하에서 군단장으로 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2] 그는 제2차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여했으며, 벨가이족 암비오릭스의 반란 당시 네르비족에게 포위되었을 때 카이사르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용감하게 싸워 무공을 세웠다.[2] 카이사르는 "그는 키케로와 그의 부하들을 칭찬했는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라며 칭찬했다.
기원전 53년, 퀸투스는 물자가 축적된 아두아투카에서 제14군단을 이끌며 수비를 맡았다. 카이사르가 에부로네스족의 땅으로 원정을 떠난 사이, 여러 부족이 아두아투카를 공격해 왔다. 퀸투스는 카이사르의 귀환 예정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식량 조달을 위해 부대를 파견했는데, 그 틈을 타 적의 공격을 받았다. 부상당한 전 프리무스 필루스(수석 백인대장) 등의 활약으로 간신히 버티는 사이, 징발 부대가 돌아와 적진을 돌파했고, 적은 포위를 포기했다. 카이사르는 징발 부대를 내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탄했지만, 포르투나(운명의 여신)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기원전 52년,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한 후, 퀸투스는 겨울 주둔을 위해 하에두이족의 땅으로 파견되었다. 카이사르는 대체로 퀸투스의 지휘를 평가했지만,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퀸투스를 비판하기도 했다.
2. 4. 카이사르 내전과 죽음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퀸투스는 폼페이우스의 '원로원파'에 참여하여 카이사르와 대적했으나, 결국 카이사르에게 사면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43년 제2차 삼두정치가 결성되자 퀸투스는 형 마르쿠스와 함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살생부(프로스크립티오)에 포함되어 박해를 피해 도망쳤다.
퀸투스의 아들은 삼두정파에 붙잡혔을 때 모진 고문 속에서도 아버지의 은신처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퀸투스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자수했고, 결국 형과 함께 붙잡혀 처형당했다.
3. 성격 및 형과의 관계
형제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애정 어린 관계였다.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무엇이 옳은 일인지 설교하는 "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형의 역할을 자주 했다. 마르쿠스가 보낸 많은 편지 ''ad Quintum fratrem''은 형제 간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애정 어린지 보여준다. 그러나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4년까지 카이사르의 독재 기간 동안에는 심각한 불화를 겪기도 했다.
퀸투스는 에피쿠로스 학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4. 저술 활동
기원전 54년, 퀸투스는 카이사르 휘하의 레가투스(Legatus)로서 브리타니아 원정에 참가했다.[2] 기원전 53년에는 물자가 축적된 아두아투카의 수비를 맡은 제14군단의 지휘를 담당했다.[2] 『갈리아 전기』의 내용과는 달리,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퀸투스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2]
참조
[2]
서적
ローマ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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