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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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은 기원전 55년과 54년에 걸쳐 일어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군사 원정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 중 브리튼인들이 갈리아의 켈트족을 지원한 것을 침공의 이유로 들었으며, 브리튼섬의 자원과 경제적 잠재력 또한 침공의 배경이 되었다. 1차 침공은 켄트 해안에 상륙했으나, 폭풍으로 인한 피해와 보급 문제로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이듬해 카이사르는 더 많은 병력과 개선된 기술로 2차 침공을 감행, 켄트 지역을 장악하고 템스강까지 진격했으나, 브리튼 부족들의 연합과 게릴라전에 직면하여 제한적인 성과만을 거두고 갈리아로 철수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에 대한 지리, 기후, 민족,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 원정을 통해 브리튼이 로마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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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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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갈리아 전쟁 |
시기 | 기원전 55년 및 기원전 54년 |
장소 | 켄트, 템스강, 에식스주, 하트퍼드셔 |
원인 | 없음 |
결과 | 로마에 의해 설정된 지역 종속 왕국 및 공물 부족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국 |
교전국 2 | 켈트족 브리튼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지휘관 2 | 카시벨라우누스 |
전력 | |
전력 1 (기원전 55년) | 7,000–10,000명의 군단병과 기병 및 보조병 수송선 100척 |
전력 1 (기원전 54년) | 17,500–25,000명의 군단병 기병 2,000명 수송선 600척 전함 28척 |
전력 2 | 미상 |
추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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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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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이사르 이전의 브리튼
고전 고대 시기 브리튼섬은 주석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4세기 피테아스가 브리튼섬 연안을 탐험했고, 기원전 5세기에는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가 북유럽 해안을 탐험하면서 브리튼섬이 알려졌다. 그러나 로마인에게 브리튼섬은 여전히 미지의 섬이었고, 일부 로마 기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했다.[115] 피테아스의 항해는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쯤으로 여겨졌다.[116]
카이사르가 당도할 즈음 브리튼섬은 철기 시대 문화를 지녔고 인구는 1백만에서 4백만 명 정도였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경제 활동은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뉘어 있었다. 저지대의 동남부는 비옥한 토양으로 농작이 발전했고 고대 교역로와 템스강이 중요한 교역로였다. 고지대는 글로스터에서 링컨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파스토랄 방식의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 흩어져 있어 농작이 어려웠다. 남동부 저지대에서는 오피둠 형태의 대규모 정착지가 생겨났고, 강줄기를 이용한 교역이 중요했다. 브리튼섬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가 로마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브르타뉴반도를 중심으로 한 아르모리카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반도의 포도주가 도싯의 행기스트버리 해드로 수입되었다.[117]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부의 벨가이족이 브리튼에 건너와 정착하고 있으며, 수에시오네스족의 왕이었던 디비키아쿠스가 갈리아와 브리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기록하였다.[118] 당시 브리튼섬에서는 기원전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나 기원전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 등이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었다. 후대로 가면 도싯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남부 연안까지 화폐가 사용되었고 이는 벨가이족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의미한다.[119]
2. 1. 브리튼섬의 지리적, 경제적 환경
브리튼섬은 고대 그리스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패권을 행사하던 고전 고대 시기에 이미 주석의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피테아스는 기원전 4세기에 브리튼섬 연안을 탐험하였고, 그보다 전인 기원전 5세기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가 북유럽 해안들을 탐험하면서 브리튼섬도 고전 고대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 시기에 들어서도 브리튼섬은 로마인에게 여전히 바다 건너 세상 끝에 있는 미지의 섬이었고 심지어 몇몇 로마 기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115] 그들은 피테아스의 항해를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쯤으로 여겼다.[116]카이사르가 당도할 즈음 브리튼섬은 철기 시대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인구는 1백만에서 4백만 명 정도였다. 고고학 조사에 의하면 경제 활동은 크게 보아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뉘어 있었다. 저지대의 동남부는 비옥한 토양으로 농작의 발전이 가능했고 고대 교역로가 놓여져 있었다. 브리튼섬의 경우 템스강 역시 중요한 교역로였다. 한편 고지대는 글로스터에서 링컨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파스토랄 방식의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 곳곳에 흩어져 있을 뿐이어서 농작을 하기는 어려웠다. 북쪽 고지대의 정착지는 주로 둔덕을 요새화하고 주변의 목축지를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남동부 저지대에서는 오피둠 형태의 요새화된 대규모 정착지들이 생겨났다. 이들 저지대의 읍락에서는 강줄기를 이용한 교역이 중요한 경제 요소였다. 브리튼섬은 이미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가 로마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오늘날의 브르타뉴반도를 중심으로한 아르모리카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반도의 포도주가 도싯의 행기스트버리 해드로 수입되고 있었다.[117]
카이사르는 브리튼에 대해 갈리아 북부의 벨가이족이 건너와 정착하고 있으며 정치 권력 역시 갈리아의 영향 아래에 있어 수에시오네스족의 왕이었던 디비키아쿠스를 기억하고 있다고 기록하였다.[118] 당시 브리튼섬에서 통용되던 화폐는 잡다하였는데 기원전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나 기원전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 등이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후대로 가면 도싯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남부 연안까지 화폐가 사용되었고 이는 벨가이족의 인구와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음을 의미한다.[119]
2. 2. 브리튼섬과 유럽 대륙과의 관계
브리튼섬은 고전 고대 시기 주석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기원전 4세기 피테아스가 브리튼섬 연안을 탐험했고, 기원전 5세기에는 카르타고의 항해자 히밀코가 북유럽 해안을 탐험하면서 브리튼섬이 알려졌다. 그러나 로마인에게 브리튼섬은 여전히 미지의 섬이었고, 일부 로마 기록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도 했다.[115] 피테아스의 항해는 그럴듯하게 꾸며낸 이야기쯤으로 여겨졌다.[116]카이사르가 당도할 즈음 브리튼섬은 철기 시대 문화를 지녔고 인구는 1백만에서 4백만 명 정도였다. 고고학 조사에 따르면 경제 활동은 저지대와 고지대로 나뉘어 있었다. 저지대의 동남부는 비옥한 토양으로 농작이 발전했고 고대 교역로와 템스강이 중요한 교역로였다. 고지대는 글로스터에서 링컨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파스토랄 방식의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 흩어져 있어 농작이 어려웠다. 남동부 저지대에서는 오피둠 형태의 대규모 정착지가 생겨났고, 강줄기를 이용한 교역이 중요했다. 브리튼섬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가 로마에 복속하기 이전부터 유럽 대륙과 교역로로 연결되어 있었고, 브르타뉴반도를 중심으로 한 아르모리카 지역을 거쳐 이탈리아반도의 포도주가 도싯의 행기스트버리 해드로 수입되었다.[117]
카이사르는 브리튼에 대해 갈리아 북부의 벨가이족이 건너와 정착하고 있으며, 수에시오네스족의 왕이었던 디비키아쿠스가 갈리아와 브리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기록하였다.[118] 당시 브리튼섬에서 통용되던 화폐는 기원전 100년 무렵의 갈리아-벨가이 화폐나 기원전 150년 무렵의 갈리아 화폐 등이 켄트 지방을 중심으로 통용되었다. 후대로 가면 도싯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남부 연안까지 화폐가 사용되었고 이는 벨가이족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의미한다.[119]
3. 첫 침공 (기원전 55년)
기원전 55년 늦여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브리튼섬 정찰을 결정하였다. 브리튼섬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았으나, 정보를 얻지 못했다.[54]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에게 정찰을 명했으나, 그는 켄트 연안을 정찰했지만 상륙하지 못하고 닷새 뒤 정보를 보고하였다.[10]
이때 브리튼족 나라 중 한 곳이 복속을 약속하는 대사를 보내왔고, 카이사르는 아트레바트족의 왕 코미우스를 함께 보냈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제7군단, 제10군단)을 수송할 80척의 수송선과 모리니족 영내 항구(이티우스 항 추정)의 군선, 그리고 앙블퇴즈에서 출항할 18척의 화물선을 준비했다.[56]
카이사르는 도버에 상륙하려 했으나, 브리튼인들이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월머 해안에 상륙하였다.[127] 레스터 대학교는 페그웰만을 상륙지로 추정하지만, 월머에서 페그웰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일 수 있다.[128]
브리튼인들은 기병과 전차로 맞섰으나, 로마군은 함선의 발리스타로 견제하며 교두보를 마련했다. 카이사르는 아퀼리페르를 앞세우고 상륙을 강행했다.[15] 그러나 바람이 좋지 않아 기병이 도착하지 못해 추격하지 못했다.[130]
상황 | 로마군 | 브리튼인 |
---|---|---|
병력 | 제7군단, 제10군단 | 기병, 전차 |
상륙 시도 | 어려움 (깊은 물, 적의 공격) | 저지 시도 (해안 방어) |
결과 | 상륙 성공 (교두보 마련) | 방어 실패 (로마군 상륙 저지 실패) |
로마군은 콤미우스와 브리튼인 사절을 맞이하여 교섭하였으나, 폭풍으로 기병을 태운 배가 갈리아로 회항하고 교섭이 결렬되었다. 폭풍으로 전함과 수송선이 파손되어 보급에 문제가 생겼다.[65]
카이사르는 겨울을 넘기며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어, 브리튼인들과 협상 후 갈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다수 브리튼인 부족들은 로마에 강한 반감을 가졌다.[131]
3. 1. 침공 배경과 명분
갈리아 전쟁 과정에서 브리튼인들이 유럽 대륙에서 패퇴하여 브리튼섬의 정착지로 도망친 벨가이족과 합세하여 갈리아 본토의 캘트족을 지원하고 자신에게 대항하였다는 것이 카이사르가 밝힌 침공의 이유였다.[120] 또한 브리튼 섬과의 선박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아르모리카의 베네티족 역시 기원전 56년 브리튼족과 동맹을 맺었다.[121] 스트라본은 카이사르가 베네티족과 브리튼족의 해상 무역을 봉쇄하자 기원전 56년 반란이 일어났다고 기록하였다.[122] 이러한 정황을 볼 때 로마의 브리튼섬 정찰은 기록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수 있다.기원전 55년 늦여름, 전쟁을 치르기엔 늦은 계절이었음에도 카이사르는 브리튼섬 정찰을 결정하였다. 그는 브리튼섬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아 브리튼족의 관습이나 흔히 쓰는 전략, 쓸만한 항구의 상황 등을 물었지만, 상인들은 해협 양안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호민관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에게 전함 한 척을 내주어 정찰을 시켰고, 그는 하이드에서 샌드위치사이로 짐작되는 켄트 연안을 정찰하였지만 삼엄한 경계 때문에 상륙할 수는 없었고 닷새 뒤 카이사르에게 돌아가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였다.[123]
이때 브리튼족 나라들 가운데 한 곳이 침략이 임박했다는 상인의 경고에 따라 복속을 약속하는 대사를 보내왔다. 카이사르는 정복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동맹이었던 아트레바트족의 왕 코미우스를 그들과 함께 브리튼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를 정복해 왔으며, 기원전 56년에는 모르비앙 해전에서 베네티를 격파한 후 북서부 갈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카이사르가 침공을 감행한 또 다른 명분은 "갈리아와의 거의 모든 전쟁에서 그 나라(브리튼)가 우리 적에게 원조를 제공했다"는 것이었고, 갈리아의 벨가이 출신 도망자들이 브리튼의 벨가이 정착지로 도망쳤으며,[5] 브리튼과의 해상 무역을 통제하던 아르모리카의 베네티는 기원전 56년 카이사르에 맞서 싸우기 위해 브리튼 동맹군에게 원조를 요청했다.[6] 스트라본은 기원전 56년 베네티의 반란이 카이사르가 브리튼으로 건너가 그들의 상업 활동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며,[7] 이는 당시 이미 브리튼 원정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브리튼의 광물 자원과 경제적 잠재력을 조사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수도 있다. 이후 키케로는 섬에 금이나 은이 없다는 실망스러운 발견에 대해 언급했으며;[8]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진주를 찾으러 브리튼으로 갔다고 전한다.[9]
한편으로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집정관직으로 인해 로마인들의 눈에 위상을 높이기 위한 구실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정치적 동맹이었고, 크라수스의 아들은 전 해에 그 밑에서 싸웠지만, 또한 그의 경쟁자였으며, 뛰어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집정관들이 여론을 쉽게 좌우하고 매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대중의 눈에 계속 머물 필요가 있었다. 그의 해결책은 로마 군대가 이전에 시도한 적이 없는 두 개의 수역, 라인 강과 영국 해협을 건너는 것이었다.
3. 2. 정찰과 준비
기원전 58년부터 갈리아 트란살피나, 일리리쿰 등의 속주 총독으로 취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해부터 갈리아 전쟁을 시작하여 갈리아 정복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와 적대하는 벨가이인 (갈리아인의 일파)이 브리타니아에 있는 벨가이인의 정착지로 도망친 것을 간과했고,[51] 또한 갈리아인들의 전투를 브리타니아인들이 지원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과정에서 브리튼인들이 유럽에서 패퇴하여 브리튼섬의 정착지로 도망친 벨가이족과 합세하여 갈리아 본토의 캘트족을 지원하고 자신에게 대항하였다고 침공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120]스트라본은 기원전 56년 베네티족의 반란(모르비앙 만 해전)은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로 건너가는 것, 베네티족의 상업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 이미 고려되었던 브리타니아에 대한 간섭 등을 막기 위해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53] 실제로 브리튼 섬과의 선박 무역을 주도하고 있던 아르모리카의 베네티족 역시 기원전 56년 브리튼족과 동맹을 맺었다.[121] 이러한 정황을 볼 때 로마의 브리튼섬 정찰은 기록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수 있다.
기원전 55년 늦여름, 카이사르는 전쟁을 치르기엔 늦은 계절이었음에도 브리튼섬 정찰을 결정하였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섬과 교역하는 상인들을 불러모아 브리튼족의 관습이나 흔히 쓰는 전략, 쓸만한 항구의 상황 등을 물었지만 그들은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상인들은 그때까지 독점하고 있던 해협 양안의 무역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54]
카이사르는 해안을 정찰하기 위해 트리부누스 가이우스 볼루세누스를 태운 군선 1척을 브리타니아로 보냈다. 그는 호민관 가이우스 볼루세누스에게 전함 한 척을 내주어 정찰을 시켰다. 그는 하이드에서 샌드위치사이로 짐작되는 켄트 연안을 정찰하였지만 삼엄한 경계 때문에 상륙할 수는 없었고 닷새 뒤 카이사르에게 돌아가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였다.[10] 볼루세누스는, 아마도 하이드와 샌드위치 사이의 켄티움 해안을 관찰했지만, "배에서 내려 원주민에게 몸을 맡기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55]며, 상륙은 하지 못했다. 5일 후에 귀환하여, 볼루세누스는 얻은 정보를 카이사르에게 전달했다.
그 무렵, 상인들로부터 로마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받은 브리타니아의 몇몇 부족이, 스스로 복종을 약속하기 위해 사자를 보내 카이사르에게 도착했다. 이때 브리튼족 나라들 가운데 한 곳이 침략이 임박했다는 상인의 경고에 따라 복속을 약속하는 대사를 보내왔다. 카이사르는 정복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판단하고 동맹이었던 아트레바트족의 왕 코미우스를 그들과 함께 브리튼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가능한 한 많은 부족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도록 갈리아계 아르브라테스족의 왕이자 동맹자인 코미우스에게 지시했고, 코미우스를 로마 측 사절로 브리타니아 사절들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보냈다.
|thumb|300px|기원전 55년의 작전 지도. 카이사르의 라인강 도하와, 주황색으로 표시된 게르만족의 반격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제7군단, 제10군단)을 수송할 수 있는 80척의 수송선을 모았고, 모리니족 영내의 항구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이티우스 항으로 추정)에도 퀘스토르(재무관)의 지휘 하에 수의 정보는 없지만 군선이 모였으며, 다른 18척의 화물선이 다른 항구(아마도 앙블퇴즈)에서 출항할 예정이었다.[56] 그는 80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모았는데, 이는 두 개의 로마 군단 (제7군단과 제10군단)과 퀘스토르 휘하의 알려지지 않은 수의 군함을 수송하기에 충분했고, 모리니 영토의 이름 없는 항구, 거의 확실히 포르투스 이티우스 (생토메르)에 집결했다. 기병을 위한 다른 18척의 수송선은 아마도 앙블퇴즈에서 다른 항구에서 출항할 예정이었다.
이들 배는 삼단노선 또는 갤리선이거나, 이전에 카이사르가 베네티족의 설계도를 참고하여 채택한 선박이거나, 베네티족이나 다른 연안 부족에게서 빼앗은 배일 수 있었다.
3. 3. 상륙과 전투
카이사르는 당초 도버에 해당하는 두브리스에 상륙하려 했으나, 브리튼인들이 언덕과 도버 백악절벽 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127] 카이사르는 "제9시"(오늘날 오후 3시)까지 기다렸다가 7마일 정도 떨어진 월머 해안에 상륙하였다.[127] 레스터 대학교 고고학팀은 페그웰만을 상륙지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상륙 지점은 월머에서 페그웰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일 수 있다.[128]브리튼인들은 기병과 전차를 동원하여 로마군의 상륙에 맞섰다. 로마 함선들은 짐 때문에 얕은 물가로 접근하기 어려웠고, 병사들은 깊은 물에서 내려야 했다.[15] 그러나 카이사르는 아퀼리페르를 앞세우고 상륙을 강행했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10군단의 선봉은 "뛰어내려 따르라 병사들이여. 너희의 독수리를 적들에게 내줄 셈이냐. 나는 내 분신인 공화국과 장군을 위해 의무를 다하련다."라고 외쳤다고 한다.[129]
상황 | 로마군 | 브리튼인 |
---|---|---|
병력 | 제7군단, 제10군단 | 기병, 전차 |
상륙 시도 | 어려움 (깊은 물, 적의 공격) | 저지 시도 (해안 방어) |
결과 | 상륙 성공 (교두보 마련) | 방어 실패 (로마군 상륙 저지 실패) |
로마군은 함선의 발리스타로 브리튼인을 견제하며 해안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바람이 좋지 않아 기병이 도착하지 못해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을 추격하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은 그의 성격과 달리 "익숙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30]
3. 4. 교두보 확보와 협상, 그리고 좌절
로마군은 상륙지에 교두보를 마련하고 브리튼섬으로 미리 파견되었다가 포로가 된 콤미우스와 브리튼인들의 사절을 맞이하였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 지도자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교섭하였고 그 사이 아직 당도하지 못한 기병을 기다렸다. 기병을 태운 배는 교두보 근처까지 다가왔으나 폭풍 때문에 갈리아로 회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교섭은 결렬되고 사절은 내륙으로 돌아갔다. 폭풍으로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지원 병력뿐만 아니라 음식의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다. 지중해에서 나고 자란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의 거친 폭풍우를 처음 겪고서는 대경실색할 지경이었다. 정박하여 두었던 전함에는 물이 들이차고 연안에 닻을 내려 두었던 수송선들은 서로 부딪혀 파손되었다. 일부 선박은 침몰하였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도저히 사용할 상태가 아니었다.[65]카이사르가 배고픔에 시달리며 겨울을 견디고 있는 사이 브리튼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나온 로마군을 매복과 기습으로 괴롭혔다. 마침내 폭풍이 지나가자 브리튼인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로마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한편 콤미우스는 친로마 브리튼인을 규합하여 로마군과 함께 싸웠다. 로마군과 콤미우스는 당시 로마군의 정책에 따라 인근 브리튼인 거주지를 초토화하였다.[67]
레스터 대학교의 최근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상륙 해변은 페그웰 만의 엡스플릿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제안된 것처럼 큰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배의 해변 정박은 월머에서 페그웰 만에 이르는 수 마일에 걸쳐 펼쳐졌을 수 있다.[16]
3. 5. 첫 침공의 결과
카이사르는 전투 후 많은 포로를 인질로 잡았지만, 겨울을 넘기며 전쟁을 계속할 여력은 없었다. 브리튼인들이 다시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내자 카이사르는 두 부족의 복속을 명분삼아 갈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다수의 브리튼인 부족들은 여전히 로마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카이사르는 돌아갈 방편을 마련하는 것도 버거웠다.[131]카이사르의 브리튼섬 침공은 갈리아 전쟁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고 영구적인 정복이나 브리튼의 복속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하는 점도 일리가 없지는 않지만, 완전히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131] 《갈리아 전기》에서 카이사르는 브리튼 침공의 명분을 "갈리아의 적들을 지원하는 모든 나라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고 일정 정도 성과를 보였다고 자찬하고 있지만, 키케로는 브리튼 섬에 금이나 은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 실망스럽다고 평가했고[132] 수에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브리튼을 침공한 이유로 진주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133]
카이사르는 보급품이 거의 없는 부족한 병력으로 머나먼 땅으로 진군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비록 브리튼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상륙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업적이었다. 이것은 또한 멋진 선전 승리였으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기록되었다. ''갈리아 전기''의 기록은 카이사르의 업적에 대한 꾸준한 업데이트를 로마에 제공했다(그가 직접 사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카이사르의 명성과 홍보는 엄청나게 성공했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전례 없는 20일간의 감사제를 받았다.
브리타니아 침공이 시작되기 전에 로마에 반역한 하에두이족의 둠노릭스(en)를 로마군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이전부터 반로마적인 자세를 취하는 트레웨리족의 인도티오마루스(en)의 동향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갈리아에서 브리타니아의 상륙 지점까지 정기적인 식량 수송, 이티우스 항구의 수비를 맡기는 것 외에 갈리아의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다.[72]
로마인과 로마 속주민이 선장을 맡은 상업 무역 선단이나, 교역 기회에 몫을 얻으려 했던 현지 갈리아인 등이 브리타니아 원정의 군선단에 합류했다. 카이사르는 총 선박 수를 800척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로마군이 관할하는 군선이나 수송선뿐만 아니라, 이러한 민간 상선의 수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카이사르는 제1차 원정 때(기원전 55년) 상륙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인식했던 지점에 상륙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명백히 카이사르 군의 함선의 수와 (배 자체의) 크기에 압도당하여 상륙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카이사르는 기록하고 있다.[72] 그러나 이것은 브리타니아 군을 집결시킬 시간을 주기 위한 전술적 전략이거나, 로마군의 관심이 부족했던 것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4. 2차 침공 (기원전 54년)
카이사르는 상륙 후 퀸투스 아트리우스를 상륙 지점 수비를 위해 남겨두고, 밤에 즉시 내륙으로 약 19.31km를 진격하여 스토어 강으로 추정되는 강을 건너온 브리타니아 군과 조우했다.[74] 로마군은 브리타니아인의 공격을 받았지만 격퇴했고, 브리타니아군은 숲 속의 요새화된 장소(켄트 주의 빅버리 우드에 있던 언덕 위 취락으로 추정)에서 재편성을 시도했으나[74] 다시 패배하여 흩어졌다.
당시 로마군은 아직 세력권이 굳혀지지 않았고 해가 저물었기에,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군을 추격하던 부대를 불러들여 진영을 쳤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카이사르가 전날 격퇴한 브리타니아 군을 추격할 준비를 하던 중, 아트리우스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전년과 마찬가지로 닻을 내리고 있던 함대가 폭풍으로 선박끼리 충돌하여 심각한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약 40척을 잃었다"고 기록했다.[75]
로마군은 대서양과 영국 해협의 조수 간만과 폭풍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1차 원정 때와 맞먹는 손해를 고려하면 카이사르의 계획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달성도를 과장하기 위해 일부러 손해를 입은 선박 수를 과장했을지도 모른다.[75]
카이사르는 선발대로 갔던 군단 병사들을 불러들여 해안으로 철수시켜 함선 수리를 맡겼다. 군단 병사들은 로마 군영 주변을 요새화하고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약 10일 동안 주야로 수리에 매달렸다. 또한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브리타니아로 더 많은 함선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키케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카이사르가 9월 1일에 해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무렵,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키케로는 동생 퀸투스에게 "카이사르의 슬픔을 생각하면 답장을 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냈다.[76]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율리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전한다.[46]
4. 1. 준비
카이사르는 갈리아로 복귀하자마자 2차 침공을 준비하였는데, 이 준비는 기원전 54년 여름까지 이어졌다. 키케로는 카이사르 군영에서 복무하던 친구 트레바티우스 테스타와 자신의 형제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트레바티우스의 무공을 칭찬하고 퀸투스에게 브리튼섬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퀸투스는 2차 침공에도 참여하여 키케로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고, 카이사르 역시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냈다.[134]카이사르는 작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5개 군단 규모의 더 큰 군대를 편성하고, 2천 기병을 상륙에 용이한 베네토족의 배에 실어 수송하기로 하였다. 2차 침공의 출발 지점은 포르투스 이티우스로 선정되었다.[135] 카이사르는 800척의 배, 다섯 군단과 2,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질서 유지를 위해 나머지 군대는 갈리아에 남겨 두었다. 또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많은 갈리아 족장들을 감시하기 위해 데려갔다.
4. 2. 상륙과 켄트 전역
카이사르는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포르투스 이티우스의 수비 담당으로 남겨두고, 1차 침공 때 최적의 상륙지로 선정했던 두비우스 인근 해변에 상륙하였다.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상륙에 동원된 배는 800여 척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인근 갈리아 지역의 상선을 징발한 것이었다. 브리튼인들은 상륙군 규모에 위축되어 반격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방어군을 소집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 있다.[136]상륙 후, 카이사르는 퀸투스 아트리우스에게 교두보 방어를 맡기고 즉시 야간 행군을 이끌어 약 19.31km가량 내륙으로 진군하였고, 스타우어강으로 여겨지는 켄트의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브리튼인 군대와 대치하였다. 브리튼인들은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숲 속으로 들어가 언덕 요새에 진지를 구축하였다.[136] 그러나 로마군이 다시 진지를 공격하자 패배하여 흩어졌다. 당시 전투 지점은 기록된 바가 없어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음 날 아침 카이사르가 진군을 준비하는 사이 교두보의 퀸투스가 보내온 소식이 도착하였다. 폭풍이 몰아쳐 수송선의 상당수가 닻을 잃고 서로 부딪혀 파손되었다는 보고였다. 퀸투스는 약 40척의 함선을 잃었다고 밝혔다. 로마군은 대서양과 영국해협에 대해 아는 바가 적었기 때문에 항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작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어서 카이사르의 계획에 명백한 하자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137] 카이사르는 급히 해안 교두보로 퇴각하여 함선의 수리를 지시하였다. 로마군은 대략 열흘 동안 밤낮을 쉬지 않고 함선 수리와 교두보 요새화에 매달려야 하였다. 그 사이 카이사르는 출항지의 라비에누스에게 추가 함선을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9월 1일 카이사르는 교두보에서 키케로에게 편지를 썼다. 딸 줄리아의 사망 소식에 답장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138]
4. 3. 내륙 진격과 브리튼 부족 연합
카이사르가 스토어강((en))을 건너 재정비하려 할 때, 브리튼인들은 많은 병력을 소집하여 방어 준비를 마친 뒤였다. 브리튼인의 전쟁사령관은 템스강 북부 출신의 카시벨라우누스((en))였고, 당시 브리튼 부족 대부분을 모아 지휘하였다. 그는 친로마 입장을 취했던 트리노반테스족의 왕 만두브라키우스(en)를 몰아내고 로마에 대항하도록 하였다.[77] 브리튼인 연합 부대는 몇 차례 전투에서 로마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트리부누스 밀리툼 퀸투스 라베리우스 두루스((en))가 전사하였고,[78] 레가투스(총독 대리)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휘하의 군단이 곤경에 처했으나, 로마 기병대가 브리튼인의 공격을 막았다.카시벨라우누스는 정규 회전으로 로마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 4천여 대의 전차를 분산시켜 게릴라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한편 카이사르는 템스강에 도착하여 브리튼의 방어 상태를 살폈다. 템스강 양안은 모두 요새화되어 있었고 강 바닥에도 방어물이 있었다. 템스강변 전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2세기 무렵 기록에는 카이사르가 코끼리 궁병대를 이용하였다는 서술이 있다. 로마군은 템스강을 넘어 카시벨라우누스의 영토에 진입하였다.[139]
카이사르가 브리튼섬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이라 평가한 트리노반트족은 사절을 보내 자신들이 로마에 대항할 의사가 없지만 카시벨라우누스의 강압에 못 이겨 참전하였노라고 해명하였다. 이들은 쫓겨난 왕 만두브라키우스를 복위시켜 준다면 로마 편에 서고 인질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트리노반트족 외에 케니마그니, 세곤티아키(en), 안칼리테스en]), 비브로키(en), 카시(en)의 5개 부족이 같은 약속을 하며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79] 카이사르는 위트햄스테드((Wheathampstead))의 언덕 요새로 카시벨라우누스를 몰아넣었다.[140]
카시벨라우누스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켄트의 4명의 왕, 킨게토리크스(en), 카르빌리우스(en), 탁시마굴루스(en), 세고왁스(en)에게 전갈을 보내 로마군을 협공하자고 제안하였다.[141] 그러나 이 협공은 실패했다.
4. 4. 항복과 귀환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을 정복할 의도는 없었지만, 전쟁 결과 만두브라시우스의 왕국은 브리튼섬의 로마 종속 왕국이 되었다. 코미우스의 벨가이족 왕국과 함께 이들 종속 왕국은 훗날 로마가 브리튼섬을 정복하고 속주인 브리타니아를 세울 때까지 친로마 정권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카이사르가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해안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이것이 브리튼을 로마의 휘하에 남긴 것은 아니었고 로마가 브리튼을 알게 된 계기였다고 평했다.[143]템스강 북쪽에 위치한 전쟁 영웅 카시벨라우누스는 이전부터 브리튼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왔고, 최근에는 트리노반테스 족의 왕을 전복시키고 그의 아들 만두브라키우스를 망명시킨 인물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침략에 직면하여 브리튼족은 연합군 지휘관으로 카시벨라우누스를 임명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 이후, 브리튼족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휘하의 로마군 식량 조달 부대를 공격했지만, 로마 기병대에 격퇴되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정면 대결로는 카이사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카이사르가 템스 강에 도착했을 때,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여울은 날카로운 말뚝으로 요새화되어 있었다. 2세기의 자료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갑옷을 착용한 대형 전쟁 코끼리를 사용하여 방어군을 도주하게 했다.[20] 이는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정복과 혼동되었을 수 있다.[21]
카이사르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이라고 묘사한 트리노반테스족은 카시벨라우누스에게 고통받고 있었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원조와 식량을 약속했다. 만두브라키우스는 그들의 왕으로 복귀했고, 트리노반테스족은 곡물과 인질을 제공했다. 세니마그니, 세곤티아키, 안칼리테스, 비브로키, 카시 등 다섯 부족이 카이사르에게 항복하고, 카시벨라우누스의 요새 위치를 알려주었다. 카이사르는 그곳을 포위 공격했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켄트 지역의 동맹인 싱게토릭스, 카르빌리우스, 탁시마굴루스, 세고박스에게 로마군 교두보에 공격을 가하도록 명령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항복 협상을 위해 사절을 보냈다. 카이사르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콤미우스가 중재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카시벨라우누스는 인질을 내주고 연간 조공을 약속했으며, 만두브라키우스 또는 트리노반테스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카이사르는 9월 26일 키케로에게 편지를 보내 인질을 받았지만 전리품은 없었고, 군대가 갈리아로 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확인했다.[23] 그는 브리타니아에 로마 병사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떠났으며, 조공이 실제로 지불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곡물, 노예, 로마에 대한 연간 조공을 요구했지만, 당시 브리타니아는 특별히 부유하지 않았다. 키케로는 "그 섬에는 은 조각이 없고, 노예를 제외하고는 전리품에 대한 희망도 없다."라고 요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브리튼족을 물리치고 조공을 징수하여 실질적인 신민으로 만들었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떠나야 했기 때문에 부족들에게 관대했다.
테오도어 몸젠은 제2차 원정의 결과에 대해 카이사르는 승리를, 병사들은 전리품을 획득할 수 없었으며, 로마군은 카시벨라우누스의 방어 시스템에 저지되었다고 기록했다. 유일한 성과는 트리노반테스족으로부터 인질과 복종을 얻은 것이었지만, 이는 트리노반테스족과 카시벨라우누스가 앙숙 관계였기 때문이었다.[63]
5. 카이사르가 본 브리튼섬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전까지 브리튼은 로마 제국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족의 관습과 전투 방식을 직접 경험한 최초의 로마 지배층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전투와 관련된 단편적인 내용만 담고 있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의 전쟁 방식, 특히 로마인들에게 생소했던 전차 사용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브리튼에 대한 지리학적, 기상학적, 민족학적 조사를 통해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했다. 그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의와 소문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내륙 깊숙이 진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직접 접촉했던 부족 외의 지역에 그의 정보를 적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구분 | 내용 |
---|---|
지리와 기후 | 카이사르는 켄트 동부와 템스 계곡 정도만 직접 보았지만, 브리튼섬의 지리와 기후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을 남겼다. 전반적으로 피테아스의 기록을 답습한 것이 많고 부정확한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
민족과 문화 |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대체로 갈리아인과 비슷한 문화를 지녔다고 평가했다. 내륙 지역과 해안 지역의 문화를 구분하여 설명했는데, 내륙 지역은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해안 지역은 밸가이족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출신 지역의 방식을 유지한다고 기록했다. |
군사 기술 | 브리튼인들은 보병, 기병과 함께 로마에서 들여온 전차를 운용하였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의 전차 운용 방식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다. |
종교 | 카이사르는 드루이드교의 시원이 브리튼 섬이고 갈리아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
자원 |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에 목축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황동과 철이 풍부하며 주석도 생산되지만 양은 많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
5. 1. 지리와 기후
카이사르가 직접 본 곳은 켄트 동부와 템스 계곡 정도였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의 지리와 기후에 대한 일반적인 기록을 남겼는데, 전반적으로 피테아스의 기록을 답습한 것이 많고 부정확한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카이사르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날씨는 갈리아보다 온화하고, 추위는 덜한 편이다.[144]
- 섬의 모양은 삼각형이고 한 변이 갈리아와 마주하고 있다. 갈리아와 마주한 곳은 켄트 지방으로 갈리아에서 출항하는 선박 대부분이 그리로 직항한다. 동부에서 남부로 점차 낮아지며 약 804.67km쯤 된다. 브리타니아라고 불리는 서쪽 해안은 히스파니아를 향해 뻗어 있으며 둘 사이의 거리는 갈리아와 브리튼섬 사이의 거리와 같다. 항로 가운데에 모나가 놓여있고 자잘한 섬들이 있다. 서쪽 해안의 길이는 약 1126.54km쯤 된다. 삼각형의 마지막 한 변인 북쪽해안은 게르마니아로 향하고 길이는 약 1287.47km쯤으로 섬 전체의 둘레는 약 3218.68km이 된다.[145]
카이사르 이전에 브리튼섬의 항구나 상륙지점에 대한 로마측 기록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은 로마의 군사와 무역에 상당한 이점을 제공하였다. 침공 전 정찰 과정에서 볼루세누스는 두브리스(도버)의 위치를 특정하였고 카이사르 스스로도 상륙 가능한 지점을 언급하였다. 당시 도버는 대군이 상륙하기엔 포구가 작아서 로마군은 인근 해변으로 상륙하여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이와 같은 상황은 카이사르 이후 100년이 지나 이루어진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튼 정복 과정에서도 반복되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의 전쟁 방식, 특히 로마인들에게 생소했던 전차 사용에 대해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브리튼에 대한 지리적, 기상학적, 민족지학적 조사를 통해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했다. 그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의와 소문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내륙 깊숙이 진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직접 접촉했던 부족 외의 지역에 그의 정보를 적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직접적인 발견은 켄트 동부와 템스 계곡으로 제한되었지만, 그는 섬의 지형과 기상에 대한 묘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의 측정은 완전히 정확하지 않고, 피테아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지만, 그의 일반적인 결론은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 기후는 갈리아보다 더 온화하며, 추위가 덜 심하다.[26]
- 섬은 삼각형 모양이며, 한 변은 갈리아와 마주보고 있다. 이 변의 한 각은 켄트에 있으며, 갈리아에서 오는 거의 모든 배가 이쪽으로 향하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아래쪽은 남쪽을 향한다. 이 변의 길이는 약 약 804.67km이다. 다른 변은 히스파니아와 서쪽을 향하며, 그 부분에는 아일랜드가 있는데, 브리튼보다 절반 정도 작다고 여겨진다. 그곳에서 브리튼으로 가는 거리는 갈리아에서 가는 거리와 같다. 이 항해의 중간에는 모나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작은 섬들이 그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섬들 중 일부는 동지 때 밤이 30일 연속된다고 기록했다. 물을 이용한 측정으로 그곳의 밤이 대륙보다 짧다는 것을 감지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변의 길이는 약 1126.54km이다. 세 번째 변은 북쪽을 향하며, 섬의 이 부분에는 어떤 땅도 마주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변의 한 각은 주로 독일을 향하고 있다. 이 변의 길이는 약 1287.47km로 여겨진다. 따라서 섬 전체의 둘레는 약 약 3218.68km이다.[27]

카이사르의 첫 번째 발견은 켄트 지역 동부와 템스강 평야에 한정되었지만, 브리타니아의 지리와 기후에 대한 묘사를 얻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가 기록한 측정값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피테아스(en)의 자료에서 일부를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개략적인 결론은 이치에 맞는다.
- 풍토는 갈리아보다 심하지 않았고, 추위도 완만하였다.[88]
- 섬의 모양은 삼각형이며, 그 삼각형의 한 변은 갈리아를 마주하고 있다. 이 갈리아를 마주하고 있는 변은 칸티움(켄트)에 해당하며, 갈리아에서 도착한 대부분의 배가 기항한다. 칸티움 쪽의 각도는 동쪽, 낮은 쪽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칸티움 쪽의 길이는 약 약 804.67km이다.
- 또 다른 변은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와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히베르니아 섬(현: 아일랜드 섬)도 있다. 히베르니아 섬은 브리타니아의 절반 크기이며, 히베르니아 섬에서 브리타니아까지의 거리는 갈리아에서 브리타니아까지의 거리와 같다. 브리타니아와 히베르니아 섬의 중간쯤에 ''모나''(Mona, 현: 맨 섬[89])라고 불리는 섬이 있으며, 브리타니아와 히베르니아 섬 사이에는 더 작은 섬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섬들에서는 동지 시기에 밤이 30일 동안 이어진다(극야).
- 물에 의한 정확한 측정으로, 우리는 브리타니아가 대륙(갈리아)보다 밤이 짧다고 느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선배들의 저술과 전언에 따르면, 이 변의 길이는 약 약 1126.54km이다.
- 세 번째 변은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 부분은 대륙과 접하지 않고 주로 게르마니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 변의 길이는 약 1287.47km로 추정된다. 따라서 브리타니아 섬 전체는 약 약 3218.68km의 외주 거리이다.[90]
5. 2. 민족과 문화
카이사르는 브리튼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하였고 대체로 갈리아인과 비슷한 문화를 지녔다고 여겼다.[146] 카이사르의 이러한 평가는 야만족을 무찌르는 로마의 영광이라는 관점에서 쓰인 것이다. 브리튼족은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되며, 일부다처제 등 이국적인 사회적 관습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면에서 갈리아인과 유사하지만,[28] 로마인에게 영광을 안겨줄 수 있는 용감한 적이다.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의 내륙과 해안 지역의 문화를 구분하여 설명했다.
- 내륙 지역: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144] 이들은 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며,[26] 곡물을 재배하지 않고 우유와 고기를 먹으며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29]
- 해안 지역: 밸가이족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하고 있으며,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을 여전히 자신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그 땅에서 전쟁을 치르건 경작을 하건 출신 지역의 방식을 유지한다.[144] 이들은 약탈과 전쟁을 목적으로 벨가이 지방에서 건너왔으며, 전쟁 후 정착하여 토지를 경작했다.[26] 대부분 출신 국가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88]
브리튼의 인구는 매우 많고 건물도 많으며, 대부분 갈리아의 것과 유사하다.[144] 가장 문명화된 곳은 켄트로, 주된 해양 활동 근거지이고 갈리아 풍습을 따른다.[147] 이들은 완전히 해안 지역에 거주하며, 갈리아 관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29]
브리튼인들은 대청으로 스스로를 푸르스름하게 물들여 전투에서 용맹하게 보이려 했다.[147] 머리카락은 길게 기르지만 머리와 콧수염을 제외하곤 면도를 했다.[147] 아내는 보통 열 명, 많게는 열둘까지도 거느리는데 형제들이 공유하며 자식들 역시 모두의 아이들로 여겼다.[147] 그러나 아내들에게서 자녀가 태어날 경우, 처녀 시절에 각자 처음 결혼한 사람의 자녀로 여겨졌다.[29]
브리튼인들은 토끼, 닭, 거위를 먹는 것을 불법으로 여겼지만, 놀이와 즐거움을 위해 그것들을 길렀다.[26]
카이사르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의와 소문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147] 그는 브리튼 내륙 깊숙이 진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직접 접촉했던 부족 외의 지역에 그의 정보를 적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5. 3. 군사 기술
브리튼인들은 보병, 기병과 함께 로마에서 들여온 전차를 운용하였다.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의 전차 운용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브리튼인들은 굉음을 울리며 모든 전차를 몰아 투척 무기를 적진에 던진 후 보병과 기병 사이의 공간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전차에 탔던 전사가 보병에 합류하여 전투를 치르게 되면 전차 기수는 전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대기하였다. 적의 수가 많은 경우 전차 기수는 말을 끌어내어 기병으로 전환되었고 보병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면 전차와 말들은 최고 속도로 달리게 하여 상태를 점검하였다. 정비가 끝난 전차에는 창과 같은 무기가 다시 채워졌고 다음날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148]
카이사르는 브리튼의 전쟁 방식, 특히 로마인들에게 생소했던 전차 사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전차를 이용한 전투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의 전차를 이용한 전투 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그들은 모든 방향으로 질주하며 무기를 던지고, 말의 위협과 수레바퀴 소리만으로 적의 대열을 흩뜨린다. 그리고 기병대 사이로 파고들어 전차에서 뛰어내려 도보로 교전한다. 전차병들은 그동안 전투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물러나 전차와 함께 위치하는데, 만약 주인이 적의 수에 밀릴 경우, 그들 부대로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그들은 전투에서 말의 속도와 보병의 굳건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매일 훈련과 연습을 통해 숙련되어 비탈지고 가파른 곳에서도 전속력으로 말을 멈추고, 즉시 조작하고 돌릴 수 있으며, 말 멍에 위로 달려가 고삐 위에 서서 가장 민첩하게 전차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30]
갈리아에서는 이미 전차에서 기병 중심의 전투 방법으로 변화했다고 여겨진다.[93]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의 전차 운용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의 전차를 이용한 전투 방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전장 전체의 주변을 전차로 질주하며 무기를 던진다. 대개는 말의 공포와 바퀴 소리에 적의 대열은 무너진다. 그리고 기병 부대 사이에서 활동할 때, (전차에 타고 있던 병사가) 전차에서 뛰어내려 도보로 싸운다. 잠시 후 마부는 전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물러나 전차와 함께 그들 자신의 위치, 그들의 주력이 적의 수에 압도당할 것 같으면 그들 자신의 분대(부대)로 퇴각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 브리타니아 인은 전투에서 말의 속도와 보병의 굳건함을 보여주었다. 즉, 이러한 경험으로 얻은 매일의 단련과 실전을 통해 순간적으로 턴을 하거나, 기둥이나 막대 사이를 달리게 하거나, 굴레 위에 세우거나, 그리고 그 순간부터 다시 전차를 최대 속도로 달리게 하거나, 내리막길이나 급경사에서도 전속력의 말을 멈추게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94]。」
훗날 카이사르의 내전 동안 카이사르는 브리튼인들의 쿠라치나 웨일스의 코라클과 같은 보트를 제작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용골과 늑재를 가벼운 나무로 만들고 선체는 고리버들로 제작하였고 덮개를 씌워 위장하였다.[149]
기원전 49년부터 시작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등 원로원파와의 내전 중에,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에서 사용했던 일종의 보트(아일랜드의 크라흐(currach)나 웨일스의 코라클(coracle)과 같은 것)를 활용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보트 제작 방법에 대해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골과 갈비뼈는 가벼운 목재로 만들고, 배의 잔해는 잔가지로 세공하여 가죽으로 덮는다[95]。」
5. 4. 종교
카이사르는 드루이드교의 시원이 브리튼 섬이고 갈리아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판단하였다.[150]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타니아의 신앙·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드루이드의 제도는 브리타니아에 기원을 두고, 갈리아로 소개되었다고 생각되며, 오늘날에도 드루이데스를 더욱 정확하게 정통하고 싶은 자는 습득하기 위해 브리타니아로 건너간다[96]。」
카이사르는 브리튼의 전쟁 방식, 특히 로마인들에게 생소했던 전차 사용에 대해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브리튼에 대한 지리학적, 기상학적, 민족학적 조사를 통해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했다. 그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의와 소문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내륙 깊숙이 진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직접 접촉했던 부족 외의 지역에 그의 정보를 적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32]
5. 5. 자원
카이사르는 브리튼섬에 목축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황동과 철이 풍부하며 주석도 생산되지만 양은 많지 않다고 기록하였다.[144] 당시 브리튼섬의 콘웰과 데번은 주석의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본 곳은 이들과는 떨어진 동부였고 내륙 지역의 사정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카이사르는 브리튼섬의 경제적 자원을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공물과 교역 무역의 풍부한 원천으로서 설명하려 했다. 그는 브리튼의 전쟁 방식, 특히 로마인들에게 생소했던 전차 사용에 대해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브리튼에 대한 지리적, 기상학적, 민족지학적 조사를 통해 로마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했다.[26] 그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문의와 소문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내륙 깊숙이 진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가 직접 접촉했던 부족 외의 지역에 그의 정보를 적용하는 것을 경계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가축의 수가 많다. 그들은 돈으로 특정한 무게로 정해진 구리 또는 철 반지를 사용한다. 주석은 중부 지역에서 생산되고, 해안 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지만 그 양은 적다. 그들은 수입된 구리를 사용한다. 거기에는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너도밤나무와 전나무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목재가 있다.[88]
"내륙 지역"에 관한 기술은 정확하지 않다. 주석 생산과 무역은 콘월과 데번의 잉글랜드 남서부에서 발생했으며, 이것이 피테아스와 다른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에섹스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무역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무역이 내륙에서 온 것으로 인식하기 쉬웠을 것이다. 또한, 철도 일정 수준의 산출량을 가지며, (놋쇠의 원료가 되는) 구리도 산출되었다.[97]
6. 이후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만두브라키우스를 왕위에 앉혀 로마와 클리엔테스 관계를 시작했고,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이 브리타니아로 유입되었다.[98] 이후 1세기 동안 외교 및 무역 관계가 발전하면서, 43년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본격적인 브리타니아 정복이 시작되었다.[98]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원정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가난한 브리타니아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재화가 적어 병사들에게 충분한 몫을 주지 못했다고 기록했다.[46]
타키투스는 "사실상, 최초로 브리타니아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한 신군 율리우스(=카이사르)가 모든 시작이며, 카이사르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원주민을 회유하여 해안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군 율리우스는 로마에 브리타니아를 유증했다기보다는, 미개한 브리타니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99]
6. 1. 코미우스의 배신과 브리튼 정착
코미우스는 훗날 진영을 바꾸어 반로마 세력에 합류하였다. 고향인 갈리아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유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151] 1세기에 쓰여진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의 《전략》(Strategemata)은 코미우스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브리튼섬으로 도망쳤으며 카이사르가 추격하였으나 마침 영국 해협이 썰물 때여서 코미우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다.[151] 존 크레이턴은[152] 프론티누스의 설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코미우스의 화친이 결렬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마도 안토니우스와의 화친 조건 가운데 하나에 따라 코미우스가 브리튼섬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프론티누스의 서술은 그가 브리트니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 현지에서 전해들은 이야기여서 부정확할 것이라는 것이다.[153] 크라이튼은 브리튼 이주 후 코미우스가 카이사르에 의해 다시 왕으로 임명되었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벌인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지지하여 관계를 회복하였다고 말했다.[153]코미우스는 이후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에 가담했고, 카이사르 군과의 일련의 교전에서 패배한 후 브리튼으로 도망쳤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그의 저서 《전술》에서 코미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카이사르의 추격을 받으며 배에 탑승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썰물로 인해 배가 여전히 뭍에 닿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미우스는 돛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아직 거리가 좀 떨어진 카이사르는 배가 물에 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추격을 멈췄다.[24] 존 크레이튼은 이 일화가 전설이며, 코미우스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휴전의 일환으로 우호적인 왕으로 브리튼에 보내졌다고 믿고 있다.[25]
코미우스는 햄프셔 지역에 자신의 왕국을 세웠는데, 이는 그 지방에서 출토된 갈로-벨기카식 화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87]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인 43년 브리튼 정복을 촉발한 아트레바테스족의 왕 베리카Verica영어는 코미우스의 아들이다.[87]
6. 2. 로마의 브리타니아 정복 (서기 43년)의 발판
코미우스는 한때 카이사르의 동맹이었으나, 이후 진영을 바꾸어 반로마 세력에 합류하였다. 그는 갈리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프론티누스의 《전략》(Strategemata)에는 코미우스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브리튼섬으로 도망쳤으며 카이사르가 추격하였으나 영국해협의 썰물 때문에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51] 그러나 고고학자 존 크라이튼은 코미우스가 안토니우스와의 화친 조건에 따라 브리튼섬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52]코미우스의 왕국은 로마가 브리튼섬 남부를 장악하여 속주로 삼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카이사르는 브리튼 정복을 이루지 못했지만, 만두브라키우스를 왕위에 앉혀 속국의 시작을 알렸다. 이는 브리튼을 로마의 정치적 영향력 안에 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세기 동안 외교 및 무역 관계가 발전하면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시작된 서기 43년의 본격적인 정복의 가능성을 열었다. 타키투스는 "신격화된 율리우스가 로마인 중 처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브리튼에 들어갔다. 그는 성공적인 전투로 원주민들을 위협했고 해안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게 브리튼을 물려주기보다는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기록했다.[33]
루카누스의 파르살리아에는 카이사르가 "공격하러 왔던 브리튼인들에게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라는 조롱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아트레바테스족의 콤미우스는 후에 알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와 함께 알레시아 전투(기원전 52년)에 참전했다.[82] 알레시아 함락 후에도 로마군의 숙적으로 여러 부족을 이끌고 싸웠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로마군에게 암살당할 뻔한 일[83]도 있어 콤미우스는 갈리아를 버리고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저서 『전술론』에서, 로마군에게 쫓기고 있던 콤미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배에 어떻게 탔는지 묘사하고 있다.
: "조류가 없고, 배는 아직 해안에 있었지만, 콤미우스는 돛을 올리라고 명령했다. 콤미우스가 있는 위치까지 거리가 있던 카이사르는 배가 이미 출항했다고 판단하고 추적을 포기했다[84]."
존 클레이튼은 이 일화가 전설이며, 카이사르 군의 레가투스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정을 맺은[85] 콤미우스가, 로마에게 우호적인 왕으로서 브리타니아로 보내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86]
콤미우스는 햄프셔 지방에 자신의 왕권을 세웠는데, 이는 그 지방에서 출토된 갈로-벨기카식 화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또한,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인 43년에 로마 제국군의 침공을 초래한 왕으로 알려진 아트레바테스족의 왕 베리카는 콤미우스의 아들이며, 베리카로부터 지배지를 빼앗아 로마로 망명하게 한 카투벨라우니족의 왕 카라타쿠스는 제2차 침공(기원전 54년)에서 카이사르를 괴롭힌 카시벨라우누스의 후손으로 전해진다.[87]
타키투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사실상, 최초로 브리타니아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한 '''신군 율리우스'''(=카이사르)가 모든 시작이며, 카이사르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원주민을 회유하여 해안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군 율리우스는 로마에 브리타니아를 유증했다기보다는, 미개한 브리타니아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99]
6. 3. 고대 및 현대 문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에 대한 기록은 다양한 고대 및 현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문헌
| 저자 | 저서 | 비고 |
| :------------------------------------- | :-------------------------------------------------------------------------------------------------- | :-------------------------------------------------------------------------------------------------------------------------------------------------------------------------------------------------------------------------------------------------------------------------------------------- |
|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갈리아 전기》 |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기록으로, 침공의 과정과 배경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34] |
| 디오 카시우스 | 《로마사》 | 카이사르 사후 약 200년 뒤에 저술된 로마의 역사서로, 카이사르의 침공을 다룬다.[35] |
| 키케로 | 편지 (친구, 형제,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 | 카이사르와 동시대 인물인 키케로가 보낸 편지들에는 침공 당시의 로마 정세와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
| 타키투스 | 《아그리콜라》 | 로마의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던 아그리콜라의 전기로, 카이사르의 침공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
| 수에토니우스 | 《황제전》 | 로마 황제들의 전기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에서 침공에 대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
| 플루타르코스 | 《영웅전》 | 카이사르 편에서 침공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 《로마사》 | 카이사르의 침공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
| 아피아노스 | 《갈리아 약사》 및 《내전》 | 카이사르의 침공을 다룬다. |
| 유트로피우스 | 《로마 약사》 | 카이사르의 침공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
|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 『기억할 만한 말과 행동』 | 카이사르 휘하 백부장 마르쿠스 카에시우스 스카에바의 용맹함을 칭찬하는 내용이 나온다.[34] |
| 폴리아에누스 | 『계략집』 | 카이사르가 갑옷을 입은 코끼리를 사용하여 브리튼족을 격퇴했다는 기록이 있다.[20] 이는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튼 정복 당시 코끼리 사용과 혼동되었을 수 있다.[21] |
| 오로시우스 | 『이교도에 대한 역사』 | 카이사르의 침공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담고 있지만, 몇 가지 오류가 있다.[35] |
| 베다 | 《잉글랜드 민족 교회 및 인민의 역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 오로시우스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카이사르 침공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다.[36] |
| 넨니우스(Nennius) | 《브리튼인의 역사(Historia Britonum)》 | 왜곡된 설명을 제공하며, 카이사르가 세 번 침공하고 켄트 해변 대신 템스강 어귀에 상륙했다고 기록한다.[37] |
| 헌팅던의 헨리(Henry of Huntingdon) | 《영국사(Historia Anglorum)》 | 베다와 《브리튼인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설명을 제공하며, 카이사르의 연설을 추가했다.[38] |
|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 | 《브리튼 왕들의 역사(History of the Kings of Britain)》 | 카이사르의 침공을 다루지만, 역사적 기록과 다른 부분이 많다.[39] |
- 중세 및 근대 문헌
| 저자 | 저서 | 비고 |
| :------------------------------------- | :-------------------------------------------------------------------------------------------------- | :------------------------------------------------------------------------------------------------------------------------------------------ |
| 중세 시대의 웨일스 삼가시(Welsh Triads) | | 카이사르의 침공을 언급하며, 일부는 제프리의 설명과 관련이 있지만, 독립적인 전통을 암시하는 내용도 있다. |
| 이올로 모건웍(Iolo Morganwg) | 18세기 삼가시 모음집 | 웨일스 삼가시 전통의 확장된 버전을 포함한다. |
| | 13세기의 프랑스 작품 《로마인의 업적(Li Fet des Romains)》 | 카이사르와 제프리의 기록을 부분적으로 기반으로 한 침공 설명을 담고 있다. |
| | 14세기의 프랑스 로맨스 《페르세포레(Perceforest)》 | 카이사르의 침공을 다루는 내용이 있다. |
- 현대 문헌
| 저자 | 저서 |
| :------------------------------------- | :---------------------------------------------------------------------- |
| Sheppard Frere | 《Britannia: A History of Roman Britain》 |
| Peter Salway | Roman Britain (''Oxford History of England'') |
| John Peddie | ''Conquest: The Roman Conquest of Britain'' |
| T. Rice Holmes | ''Ancient Britain and the Invasions of Julius Caesar'' |
| R. C. Carrington | "Caesar's Invasions of Britain" |
| Peter Berresford Ellis | ''Caesar's Invasion of Britain'' |
| W. Welch, C. G. Duffield (Editor) | ''Caesar: Invasion of Brit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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