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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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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야누스 원주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원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 기둥이다. 로마 포럼에 위치하며, 나선형 부조로 트라야누스의 업적을 묘사하고 있다. 내부에는 185개의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기둥의 높이는 약 30m에 달한다. 이 기둥은 로마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많은 기념물의 모델이 되었다. 부조는 다키아 전쟁을 묘사하며, 로마 군대와 다키아인들의 전투, 황제의 연설 등 다양한 장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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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원주
기본 정보
트라야누스 원주, 로마 포룸 북쪽
트라야누스 포룸 북쪽에 위치한 트라야누스 원주
위치트라야누스 포룸
건설 시기서기 107년~113년
건설 주체트라야누스
종류로마 개선 원주
좌표위치
지도 위치 표시트라야누스 원주
지도 레이블 위치위쪽
지도 유형이탈리아 로마 고대 유적
지도 오버레이Roma Plan.jpg
지도 크기270
지도 프레임 폭270
지도 프레임
지도 프레임 캡션지도를 클릭하면 전체 화면으로 볼 수 있음
지도 프레임 줌13
지도 프레임 마커기념물
지도 프레임 위키데이터
이탈리아어Colonna Traiana
라틴어Columna Traiani
높이 (추정)30 미터
높이 (전체)35 미터
기둥 직경3.7 미터
프리즈 길이190 미터
기초 높이34 미터
명칭
이탈리아어 명칭Colonna Traiana
라틴어 명칭Columna Traiani

2. 역사적 배경

오늘날 트라야누스 원주는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지만, 원래의 환경에서 고립되어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적 특징이다. 원주는 포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전체 포룸 단지의 초점이 되었다. 양쪽에 두 개의 도서관과 울피아 바실리카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주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두루마리를 연구하기 위한 곳이었다.[16] 이 도서관들은 원주와 함께 지어졌으며, 원주의 양쪽을 볼 수 있는 상층 관람 플랫폼을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높은 곳에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얕은 부조로 새겨지고 페인트와 금속 부품으로 상세하게 표현된 장면들의 인물들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원주의 상부 영역의 가시성에 대한 문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비교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인물들은 더 깊게 새겨져 있고, 관람 플랫폼 역할을 할 주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기둥의 높이에 따라 더욱 단순화되었다.

두 도서관은 황제의 선전 프로그램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원주를 볼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로마 시민들을 위한 귀중한 문학 작품들을 보관했다. 이곳에 보관된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는 현재는 유실된 트라야누스 자신의 다키아 전쟁 기록이었다. 다키아 전쟁을 기록한 원주의 부조는 트라야누스의 전쟁 기록을 생생하게 보완했을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포룸의 열린 공간과 편의 시설을 즐길 때마다 그의 승리를 상기했다.[17] 원주와 그 주변을 둘러싼 웅장한 건물들의 조합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

2. 1. 건립 과정

1586년 바티칸 오벨리스크를 리프팅 타워로 세우는 모습. 트라야누스 원주의 건설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간과 인력은 더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원통형 드럼은 기중기로 제자리에 들어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28][29] 고대 문헌과 상당한 양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로마 공학자들은 땅에서 큰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의 전형적인 드럼은 약 32ton이며,[30] 주두는 받침대 위에 있는 가장 무거운 블록으로 53.3ton으로, 34m 높이까지 들어 올려야 했다.[28] 무게를 줄이기 위해 디딤판은 채석장에서 또는 현장에서 미리 조각했을 것이다.[26][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하중의 경우, 최대 15m에서 18m 높이에 도달할 수 있는 전형적인 로마 답차 기중기는 분명히 부적절했다.[28] 대신, 건물 부지 주변에 탑 모양의 나무 구조물을 세웠고, 그 가운데 도르래, 로프, 주포 시스템으로 대리석 블록을 들어 올렸다. 이들은 지상에 널리 퍼져 있는 많은 인력과 아마도 역마의 동력을 사용했다.[32] 현대의 계산에 따르면, 55ton의 기본 블록을 들어 올리는 데 8개의 주포가 필요했고, 가장 높은 드럼에 필요한 로프의 길이는 두 블록 도르래를 가정할 때 약 210m였다.[33]

이러한 리프팅 타워는 나중에 르네상스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로마에서 오벨리스크를 재배치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양한 인양 팀 간의 리프트를 조정하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규율이 필요했는데, 힘이 균등하게 가해지지 않으면 로프에 과도한 스트레스가 가해져 파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34] 트라야누스 원주의 경우, 인접한 울피아 바실리카(Basilica Ulpia)에서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면서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었고, 이는 가용 공간을 제한하여 주포 승무원이 한쪽에서만 적절한 접근을 할 수 있었다.[35][36]

3. 부조

트라야누스다키아 원정(1차: 101년-102년, 2차: 105년-106년)을 묘사한 연속적인 부조는 아래에서 위로 원주의 표면을 따라 이어진다. 아래쪽 절반은 1차 원정, 위쪽 절반은 2차 원정을 묘사하며, 두 부분은 트로피가 옆에 달린 방패를 든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조각으로 구분된다.

조각에는 원근법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한 장면에 여러 시점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벽 뒤에서 일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해 다른 각도를 적용하는 식이다. 부조는 주로 다키아인들과 전투하고, 요새를 지으며, 황제의 연설을 듣는 로마군을 묘사하고 있다.

부조에는 선원, 병사, 정치가, 사제 등 총 2,500여 명의 인물이 묘사되어 있으며, 발리스타나 투석기 같은 로마와 다키아인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사실적인 스타일로 59번 등장하며, 강의 신도 찾아볼 수 있다. 원정 양측의 남녀와 각기 다른 집단 내의 계급을 구별하기 위해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기단은 다키아 무기의 부조로 덮여 있는데, 고대에는 패배한 병사가 항복의 표시로 승자 앞에 무기를 던졌으므로, 항복의 표시로 볼 수 있다.[8]

3. 1. 묘사 내용

부조는 트라야누스의 두 차례에 걸친 다키아 원정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쪽 절반은 1차 원정(101-102년), 위쪽 절반은 2차 원정(105-106년)을 묘사하며, 두 부분은 트로피가 옆에 달린 방패를 든 승리를 의인화한 조각으로 구분된다.[8]

프리즈의 장면들은 연속적이며, 아래에서 볼 때 같은 크기로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조각에는 원근법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한 장면에 여러 시점이 적용되어 더 많은 사실을 표현했다. (벽 뒤에서 일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한 다른 각도의 적용)[8]

부조는 다키아인들과 전투하고, 요새를 지으며, 황제의 연설을 듣는 로마군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조각은 2500여 개에 달하는 선원, 병사, 정치인, 사제의 조각으로 가득 차 있고, 발리스타나 투석기 같은 로마와 다키아인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현대 역사가들에게 제공한다.[8] 트라야누스 조각상 59개와 강의 신도 찾아볼 수 있다.[8]

기단은 다키아 무기의 부조로 덮여 있는데, 고대에 패배한 병사가 항복의 표시로 승자 앞에 무기를 던졌으므로, 항복의 표시로 볼 수 있다.[8] 원주는 2,662개의 인물과 155개의 장면을 보여주며, 트라야누스 황제는 58번 등장한다.[8]

연속적인 나선형 부조는 기단에서 원주 머리까지 23번 꼬여 있으며, 당시 건축적인 혁신이었다.[9] 이 디자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후대 황제들에게 채택되었다. 이야기 띠는 원주 기단부에서 약 1m에서 꼭대기 부분의 1.2m로 넓어진다.[10]

장면은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종종 동일한 장면에서 다양한 원근법이 사용되어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예: 벽 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각도가 사용된다).[9] 부조는 다키아인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두 번의 승리한 군사 원정을 묘사하고 있으며, 아래쪽 절반은 첫 번째 원정(101–102년)을, 위쪽 절반은 두 번째 원정(105–106년)을 묘사한다. 이 원정들은 기둥이 건설된 당시와 일치한다.[11] 부조는 황제의 연설(''adlocutio''), 희생(''lustratio''), 군대의 출정(''profectio'')과 같은 표준화된 장면을 반복한다.[11] 전투 장면은 기둥에서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하며, 대신 의례와 건설을 수행하는 질서 정연한 군인들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다키아 원정의 목표는 다키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에서는 전쟁 폭력과 관련된 이미지는 전반적으로 축소되었으며, 외국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는 묘사되지 않는다.[9] 일부 학자들은 전투 장면의 부족과 건설 장면의 많은 수가 로마의 도시 인구(주요 독자)에게 말하기 위한 의도였으며, 부수적인 피해가 거의 없는 전쟁으로 군대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과 불신을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9] 로마 군대를 비교적 온화하게 묘사한 것은 "정의, 관용, 절제, 자제"의 사람으로서 트라야누스의 이미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다.[15]

묘사된 주요 특정 사건으로는 로마 군단의 다뉴브강 첫 번째 도하,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트라야누스의 항해, 첫 번째 전쟁 종결 시 다키아인의 항복, 두 번째 전쟁 중 다뉴브강 교량에서의 대규모 희생, 다키아 수도 공격, 다키아 왕 데체발루스의 죽음 등이 있다.[13] 두 부분은 승리의 의인화인 빅토리아가 트로피로 양쪽에 둘러싸인 방패에 글을 쓰는 모습으로 구분된다.[13]

여성은 대부분 장면의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정의한다. 그러나 로마 국가 예술에서 인간 여성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전쟁 기념물에 포함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의 남성적 담론에서 여성은 정복당한 외국인을 여성화함으로써 복종의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는 시각적 표현이다.[9] 그러나 기둥에는 "로마 예술에서 여성에 대한 가장 특이하고, 충격적이며, 폭력적인 묘사 중 하나인 고문 장면"이 있다.[9] 이 특이한 장면에서는 4명의 다키아 여성들이 두 명의 나체 남성을 고문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3. 2. 역사적 가치

부조는 트라야누스다키아 원정(1차: 101년-102년, 2차: 105년-106년)을 묘사한다. 아래쪽 절반은 1차 원정, 위쪽 절반은 2차 원정을 묘사하며, 두 부분은 트로피가 옆에 달린 방패를 든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 조각으로 구분된다.[13]

부조의 장면들은 연속적이며, 아래에서 볼 때 같은 크기로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조각에는 원근법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한 장면에 여러 시점을 적용하여 더 많은 사실을 표현하였다. (예: 벽 뒤에서 일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한 다른 각도 적용)[9]

부조는 다키아인들과 전투하고, 요새를 지으며, 황제의 연설을 듣는 로마군을 주로 묘사한다. 선원, 병사, 정치가, 사제 등 총 2,5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며,[9] 발리스타, 투석기 같은 로마와 다키아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트라야누스 조각상 59개와 강의 신도 찾아볼 수 있다.[13]

기단은 다키아 무기의 부조로 덮여 있는데, 고대에 패배한 병사가 항복의 표시로 승자 앞에 무기를 던졌으므로 항복의 표시로 볼 수 있다.[13] 원주에는 2,662개의 인물과 155개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는 58번 등장한다.[8]

연속적인 나선형 부조는 기단에서 원주 머리까지 23번 꼬여 있으며, 당시 건축적인 혁신이었다.[9] 이 디자인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후대 황제들에게 채택되었다. 이야기 띠는 원주 기단부에서 약 1m에서 꼭대기 부분의 1.2m로 넓어진다.[10]

장면은 연속적으로 펼쳐지며, 종종 동일한 장면에서 다양한 원근법이 사용되어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9] 부조는 황제의 연설, 희생, 군대의 출정 등 표준화된 장면을 반복한다.[11] 전투 장면은 적고, 의례와 건설을 수행하는 질서 정연한 군인들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다키아 원정의 목표는 다키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에서는 전쟁 폭력과 관련된 이미지가 축소되었고, 외국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는 묘사되지 않았다.[9] 이는 로마 도시 인구에게 군대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해소하고, "정의, 관용, 절제, 자제"를 갖춘 트라야누스의 이미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15]

일부는 기둥의 나무 베기 장면(224그루 중 48그루)과 다뉴브강 교량 건설이 이전보다 더 완전한 지방 정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12] 묘사된 주요 사건으로는 로마 군단의 다뉴브강 도하, 트라야누스의 항해, 다키아인의 항복, 다뉴브강 교량에서의 희생, 다키아 수도 공격, 데체발루스 왕의 죽음 등이 있다.[13]

여성은 대부분 장면의 가장자리를 차지하며, 로마 국가 예술에서 인간 여성은 드물기 때문에 전쟁 기념물에 포함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전쟁의 남성적 담론에서 여성은 정복당한 외국인을 여성화하여 복종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시각적 표현이다.[9] 그러나 기둥에는 4명의 다키아 여성들이 두 명의 나체 남성을 고문하는 "로마 예술에서 여성에 대한 가장 특이하고, 충격적이며, 폭력적인 묘사"도 있다.[9]

3. 3. 예술적 특징

부조는 두 차례에 걸친 트라야누스의 성공적인 다키아 원정을 표현하고 있다. 아래쪽 절반은 1차 원정, 위쪽 절반은 2차 원정을 묘사한다. 두 부분은 트로피가 옆에 달린 방패를 든, 승리를 의인화한 조각에 의해 분리된다.

프리즈의 장면들은 연속적이며, 아래에서 볼 때 같은 크기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다. 조각에는 원근법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고, 한 장면에 여러 시점이 적용되어 더 많은 사실을 표현할 수 있었다. (벽 뒤에서 일하는 병사를 묘사하기 위한 다른 각도의 적용)

부조는 다키아인들과 전투하고, 요새를 지으며, 황제의 연설을 듣는 로마군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 조각은 2500여 개에 달하는 선원, 병사, 정치인, 사제의 조각으로 가득 차 있고, 발리스타투석기 같은 로마와 다키아인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현대 역사가들에게 제공한다. 또한 트라야누스 조각상 59개와 강의 신도 찾아볼 수 있다.

연속적인 부조는 아래에서 위로 원주의 표면을 돌면서 이어진다. 이 부조는 트라야누스 황제가 승리한 두 차례의 다키아 원정을 묘사한 것으로, 아래 절반은 1차 원정(101년 - 102년), 위 절반은 2차 원정(105년 - 106년)을 묘사하고 있다.

두 부분 사이에는 승리를 의인화한 여신 빅토리아를 묘사하고, 그 전후에 전리품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부분은 비스듬히 점차 올라가는 형태로 계속해서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조각가는 원근법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도상은 사실적이지 않다. 같은 사건을 다양한 시점에서 묘사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성벽 뒤에서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등도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은 로마군이 다키아군과 교전하는 광경이며, 그 외에 요새를 건설하는 광경이나, 황제가 군단을 앞에 두고 연설하는 광경, 승리한 황제 등을 묘사하고 있다. 선원, 병사, 정치가, 신관 등 총 2,500명의 인간이 묘사되어 있으며, 요새, 배, 무기 등도 묘사되어 있어, 역사학자들에게는 당시 전쟁에 대한 귀중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 예를 들어 이 부조에서는 발리스타 또는 카타펄트로 보이는 것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군단에 섞여 총 59번 묘사되어 있다.[8]

4. 명문

트라야누스 원기둥 받침대 비문, 로마 정방형 대문자 사용


원주 기단의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19][20]



SENATVS·POPVLVSQVE·ROMANVS

IMP·CAESARI·DIVI·NERVAE·F·NERVAE

TRAIANO·AVG·GERM·DACICO·PONTIF

MAXIMO·TRIB·POT··IMP··COS··P·P

AD·DECLARANDVM·QVANTAE·ALTITVDINIS

MONS·ET·LOCVS·TANT[IS·OPER]IBVS·SIT·EGESTVS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SPQR)은 신성한 황제 카이사르 네르바 트라야누스, 네르바의 아들, 최고 제사장, 독일과 다키아의 정복자에게, 트리뷴의 권한 17번, 임페라토르 6번, 로마 집정관 6번, 국부, 산과 그와 같은 높이의 장소가 이러한 작업에 대해 얼마나 굴착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바쳤습니다.



이 명문은 카피톨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 사이의 안장 부근, 즉 트라야누스 포룸트라야누스 시장이 있던 곳에 대한 언급으로, 제국 포룸 지역의 트라야누스의 전체 건설 프로젝트를 가리킨다.

이 명문은 돌 기념물에 사용되는 로마 정방형 대문자의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이다. 아래에서 읽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원근감을 주기 위해 하단 글자는 상단 글자보다 약간 작다. 일부 단어는 점으로 구분되며, 특히 제목과 같은 많은 단어가 축약되어 있다. 숫자 위에는 가로선(''titulus'')이 표시되어 있다.

1989년 캐롤 트윔블리는 이 명문을 기반으로 트라야누스라는 글꼴을 디자인했다.[51] 프레데릭 구디와 워렌 채플 등 다른 디자이너들도 이 명문을 기반으로 한 글꼴을 디자인했다.

5. 구조

트라야누스 원주는 카라라 대리석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교하게 쌓아 올려져 있다. 나선형 계단은 19개의 블록으로 조각되었는데, 14계단마다 한 바퀴 회전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는 12개 또는 16개 계단으로 한 바퀴 도는 일반적인 나선형 계단보다 더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단은 거의 균일하게 제작되었고 블록 사이의 이음새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당시 로마 건축 기술의 뛰어남을 보여준다.[26]

원주는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불구하고 0.5도 미만의 각도로만 기울어져 있다.[26]

5. 1. 전체 구조

트라야누스 원주는 오늘날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지만, 원래의 환경에서 고립되어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적 특징이다. 원주는 포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전체 포룸 단지의 초점이 되었다. 양쪽에 두 개의 도서관과 울피아 바실리카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주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두루마리를 연구하기 위한 곳이었다.[16] 이 도서관들은 원주와 함께 지어졌으며, 원주의 양쪽을 볼 수 있는 상층 관람 플랫폼을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 내부는 비어 있으며, 기단 측면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18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나선형 계단은 위쪽 플랫폼으로 이어지며, 고대 방문객들에게 주변 트라야누스 포럼의 전망을 제공했다. 43개의 창문 틈새가 올라가는 길을 밝힌다.[21]

원주는 지면에서 조각상 기단 상단까지 38.4m 높이로 서 있다.[22] 기단, 조각상, 기단을 제외한 원주 자체의 높이는 29.76m로, 이는 거의 100 로마 피트에 해당한다. 원주는 총 1100 t 이상 무게의 29개의 루니 대리석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22] 나선형 계단 자체는 19개의 블록으로 조각되었으며, 14계단마다 한 바퀴 회전한다.

트라야누스 원주는, 특히 나선형 계단 디자인은 이후 로마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나선형 계단이 이전에는 로마 건물에서 드문 광경이었지만, 이 공간 절약형은 이후 제국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었다.[27]

구분수치비고
기단부 높이1.7m [41]
기둥 몸체 높이26.92m
일반적인 드럼 높이1.521m
기둥 몸체 지름3.695m
주두 높이1.16m
기둥 자체의 높이29.78m
계단의 나선형 부분 높이29.68m(약 100 로마 피트)
받침대를 제외한 기둥 높이28.91m
받침대를 포함한 받침대 높이6.16m
지상에서 기둥 상단까지의 높이35.07m



기둥의 높이는 약 30미터이며, 거대한 받침대를 더하면 전체 높이는 약 38미터에 달한다. 카라라산의, 하나당 40톤의 무게가 나가는 거대한 드럼형 대리석(지름 3.7미터) 20개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원주 내부에는 185개의 계단이 있어,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주두 블록은 53.3톤이나 되었으며, 지상에서 약 34미터 높이에 놓여 있다[52]

5. 2. 나선형 계단

받침대와 내부 계단의 단면도 (이미지 클릭)


트라야누스 원주 내부는 비어 있으며, 기단 측면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18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나선형 계단은 위쪽 플랫폼으로 이어져, 고대 방문객들에게 주변 트라야누스 포럼의 전망을 제공했다. 올라가는 길에는 43개의 창문 틈새가 있다.[21]

내부 나선형 계단은 기단 하단 바로 위에서 시작하며 길이는 8cm 정도 짧다.[24] 나선형 계단은 19개의 블록으로 조각되었으며, 14계단마다 한 바퀴 회전한다. 이는 12개 또는 16개 계단으로 한 바퀴 도는 것보다 더 복잡한 기하학을 필요로 했다.[25] 장인의 솜씨는 매우 정교하여 계단이 거의 균일하고 거대한 블록 사이의 이음새가 여전히 정확하게 맞을 정도였다.[26] 과거에 수많은 지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는 오늘날 0.5도 미만의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26]

트라야누스 원주, 특히 나선형 계단 디자인은 이후 로마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 로마 건물에서는 나선형 계단이 드물었지만, 이 공간 절약형 계단은 이후 제국 전역으로 점차 확산되었다.[27] 이 디자인은 실용적인 이점 외에도 제국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나중에 채택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조 조각이 나선형으로 장식된 유사한 원주가 파리의 방돔 광장에 세워졌다.

6. 건설 기술

원통형 드럼은 기중기로 제자리에 들어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28][29] 고대 문헌과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로마 공학자들은 큰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원주의 드럼은 약 32t이며,[30] 주두는 53.3t으로, 34m 높이까지 들어 올려야 했다.[28] 무게를 줄이기 위해 디딤판은 채석장이나 현장에서 미리 조각했을 것이다.[26][31]

답차 기중기는 최대 15m~18m 높이까지만 들어올릴 수 있어서, 대신 건물 부지 주변에 탑 모양의 나무 구조물을 세웠고, 그 가운데 도르래, 로프, 주포 시스템으로 대리석 블록을 들어 올렸다. 이들은 지상에 널리 퍼져 있는 많은 인력과 역마의 동력을 사용했다.[32] 현대의 계산에 따르면, 55t의 기본 블록을 들어 올리는 데 8개의 주포가 필요했고, 가장 높은 드럼에 필요한 로프의 길이는 두 블록 도르래를 가정할 때 약 210m였다.[33]

이러한 리프팅 타워는 르네상스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로마에서 오벨리스크를 재배치하는 데 사용했다. 그의 보고서에 따르면, 다양한 인양 팀 간의 리프트를 조정하려면 상당한 집중력과 규율이 필요했는데, 힘이 균등하게 가해지지 않으면 로프에 과도한 스트레스가 가해져 파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34] 트라야누스 원주의 경우, 인접한 울피아 바실리카(Basilica Ulpia)에서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면서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었고, 이는 가용 공간을 제한하여 주포 승무원이 한쪽에서만 적절한 접근을 할 수 있었다.[35][36]

7. 건립 목적과 의의

트라야누스 원주는 오늘날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지만, 원래의 환경에서 고립되어 트라야누스 포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적 특징이다. 원주는 포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여 전체 포룸 단지의 초점이 되었다. 양쪽에 두 개의 도서관과 울피아 바실리카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주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쓰인 두루마리를 연구하기 위한 곳이었다.[16] 이 도서관들은 원주와 함께 지어졌으며, 원주의 양쪽을 볼 수 있는 상층 관람 플랫폼을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높은 곳에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얕은 부조로 새겨지고 페인트와 금속 부품으로 상세하게 표현된 장면들의 인물들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관람객이 부조의 연속적인 나선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주의 상부 영역의 가시성에 대한 문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비교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의 인물들은 더 깊게 새겨져 있고, 관람 플랫폼 역할을 할 주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기둥의 높이에 따라 더욱 단순화되었다. 이러한 조각 스타일의 차이는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원주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도서관은 황제의 선전 프로그램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원주를 볼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로마 시민들을 위한 귀중한 문학 작품들을 보관했다. 이곳에 보관된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는 현재는 유실된 트라야누스 자신의 다키아 전쟁 기록이었다. 다키아 전쟁을 기록한 원주의 부조는 트라야누스의 전쟁 기록을 생생하게 보완했을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포룸의 열린 공간과 편의 시설을 즐길 때마다 그의 승리를 상기했으며, 원주와 그 주변을 둘러싼 웅장한 건물들의 조합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관을 연출했을 것이다.[17]

로마군과 다키아군의 격렬한 전투 장면

7. 1. 건립 목적

트라야누스 원주가 기념 기능, 정치적 선전, 혹은 두 가지 모두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학문에서는 이 원주를 트라야누스를 로마의 위대한 황제로 받드는 영광스러운 기념물로 여겼다. 그러나 최근 트라야누스 포룸의 재건축을 통해 원주의 넓은 시야는 포럼 내 두 개의 도서관에 의해 대부분 가려졌을 것이며, 이 도서관은 원주를 꽉 채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17] 또한 나선형 프리즈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머리를 기울인 채 원을 그리며 걷는), 원주의 서사적 힘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프랑스 고고학자 폴 베인이 지적했듯이, 부조는 아래에서 "수직적"으로 읽을 수 있으며, 황제의 모습은 이미지 밴드 전체에서 인식할 수 있다. 마치 방돔 기둥에서 나폴레옹의 모습을 장면마다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이를 둘러싼 두 개의 도서관은 관람자가 최상층에 서면 원주를 관찰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여 프리즈의 전체적인 모습을 훨씬 더 잘 볼 수 있게 해준다.

트라야누스 원주가 시야 확보에 이상적인 장소에 세워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분명히 있지만, 원주를 일종의 영광스러운 구조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주를 건설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는 중요한 점이 있으므로 숨겨지거나 눈에 띄지 않도록 포럼에 설치했을 가능성은 낮다.[17]

또한 원주를 트라야누스의 상징으로 보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있다. 트라야누스의 유해는 원주 기단의 묘실에 묻혔고, 원주 꼭대기에는 트라야누스 동상이 있었다. 로마인들의 삶의 중심지인 포럼의 지상에 트라야누스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기대되었던 황제의 신격화, 특히 영광스러운 트라야누스의 신격화를 고려할 때, 트라야누스의 유해가 로마인들과 함께 포럼에 머무르면서 그의 정복이 그를 하늘로 승천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17]

117년 트라야누스가 죽은 후, 로마 원로원은 트라야누스의 유해를 원주의 사각형 기단에 묻기로 결의했으며, 이 기단은 포획된 다키아의 무기와 갑옷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의 유해와 아내 플로티나의 유해는 금 항아리에 담겨 기단 안에 안치되었다(이후 기념물에서 사라짐). 이를 통해 트라야누스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원주를 자신의 최종 안식처로 의도했을 수 있으며, 다른 장례 구조물과 디자인이 유사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이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18] 특히 원주의 프리즈를 보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순회는 로마 장례 관행을 연상시키며, 중앙, 즉 트라야누스의 파이널로 주의를 집중시킨다.

7. 2. 영향

트라야누스 원주는 이후 로마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원주 내부의 나선형 계단 디자인은 당시 로마 건축에서는 드물었지만, 공간 절약형 구조로서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다.[27] 이러한 디자인은 실용적인 이점뿐만 아니라 제국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이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기념주 설계에 채택했다.[5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파리의 방돔 광장에 트라야누스 원주와 유사한 나선형 부조를 가진 원주를 건설했다.

트라야누스 원주에서 영향을 받은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 아르카디우스 원주
  • 테오도시우스 원주


'''중세'''

  • 독일 힐데스하임 대성당의 베른바르트 원주


'''현대'''

  • 오리건주 애스토리아의 애스토리아 원주
  • 파리의 방돔 원주
  • 브뤼셀의 의회 원주
  • 비엔나의 카를성당

비엔나의 카를성당 전경. 트라야누스 원주를 본뜬 두 개의 기둥이 양쪽에 있다.

  •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종교적 기념물인 마리아 및 삼위일체 원주
  • 워싱턴 기념탑 (볼티모어)
  • 런던 대화재 기념탑
  • 넬슨 기념주

8. 현대의 연구 및 복원

로마 문명 박물관에 눈높이에 맞춰 놓인 석고 모형


19세기20세기에 제작된 부조 석고틀은 1세기에 걸친 산성 물질 오염으로 인해 현재 원본보다 상세하고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로마 문명 박물관(로마) - 이야기의 구분에 따라 절단한 것을 수평으로 순서대로 전시.
  • 루마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부쿠레슈티) - 프리즈를 수평으로 부분별로 전시.
  • 빅토리아 & 앨버트 박물관의 Cast Courts(런던) - 트라야누스 원주의 복제품을 반으로 잘라 실내에 전시.


이 외에도 프리즈 부분 복제품 전시는 마인츠의 고대 항해 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독일 고고학자 콘라트 치코리우스는 석고틀을 사진 촬영하여 1896년1900년에 발표했으며[60][61][62], 현대에도 연구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63]。치코리우스의 성과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사진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연구용 웹 기반 뷰어가 독일 이미지 데이터베이스 Arachne에서 제작되었다[64]

8. 1. 연구

19세기와 20세기에 부조의 석고 모형이 제작되었다. 한 세기 동안의 산성비로 인한 산성 오염으로 인해, 현재는 원본보다 세부 사항이 더 읽기 쉬워졌으며, 전시 방식은 학생들이 원본 현장보다 부조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다음에서 그 예를 연구할 수 있다.

  • 로마 문명 박물관에서는 서사시의 각 "프레임"이 별도의 섹션으로 잘리고, 해당 섹션이 가로로 순서대로 전시된다.
  • 루마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은 프리즈를 수평으로 분할하여 전시한다.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Cast Courts (런던). 기둥 형태로 전시되어 있으며, 기단을 포함하여 기둥이 두 부분으로 잘려 있다.
  • 취리히 대학교 고고학 컬렉션|취리히 대학교 고고학 컬렉션de, 취리히 대학교


또한, 프리즈의 개별 모형은 마인츠의 고대 항해 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독일 고고학자 콘라트 키키리우스는 1896년에서 1900년 사이에 단색으로 된 전체 조사 자료를 출판했으며(Commons 참조),[37][38] 이는 여전히 현대 학문의 기초를 형성한다.[39] 키키리우스의 연구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독일어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서 트라야누스 원주를 위한 연구 중심의 웹 기반 뷰어가 제작되었다.[40]

8. 2. 복원



19세기와 20세기에 부조의 석고 모형이 제작되었다. 한 세기 동안의 산성 오염으로 인해, 현재는 원본보다 세부 사항이 더 읽기 쉬워졌으며, 전시 방식은 학생들이 원본 현장보다 부조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다음에서 그 예를 연구할 수 있다.

  • 로마 문명 박물관에서는 서사시의 각 "프레임"이 별도의 섹션으로 잘리고, 해당 섹션이 가로로 순서대로 전시된다.
  • 루마니아 국립 역사 박물관은 프리즈를 수평으로 분할하여 전시한다.
  •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의 Cast Courts (런던). 기둥 형태로 전시되어 있으며, 기단을 포함하여 기둥이 두 부분으로 잘려 있다.
  • 취리히 대학교 고고학 컬렉션|취리히 대학교 고고학 컬렉션de, 취리히 대학교


또한, 프리즈의 개별 모형은 마인츠의 고대 항해 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독일 고고학자 콘라트 키키리우스는 1896년에서 1900년 사이에 단색으로 된 전체 조사 자료를 출판했으며(Commons 참조),[37][38] 이는 여전히 현대 학문의 기초를 형성한다.[39] 키키리우스의 연구와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독일어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서 트라야누스 원주를 위한 연구 중심의 웹 기반 뷰어가 제작되었다.[40]

참조

[1] AV media The Ascent of Augustus and Access to Italian Marble https://web.archive.[...] Yale University 2015-02-22
[2] 문헌
[3] 문헌
[4] 서적 The Romans: New Perspectives https://books.google[...] ABC-CLIO 2004
[5] 서적 Roman Architecture and Urbanism: From the Origins to Late Antiquit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09-05
[6] 서적 Roman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2-01-04
[7] 서적 Political Autobiographies and Memoirs in Antiquity: A Brill Companion https://books.google[...] BRILL 2011-09-23
[8] 웹사이트 Trajan's Amazing Column https://www.national[...] 2018-04-11
[9] 서적 Representation of War in Ancient Rom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0] 서적 Art History Prentice Hall
[11] 서적 2001
[12] 문헌
[13] 웹사이트 Trajan's Column http://www.visual-ar[...] 2018-04-11
[14] 문헌
[15] 웹사이트 Introduction to the Spiral Frieze of Trajan's Column in Rome http://www.trajans-c[...] 2018-04-11
[16] 문서 A Description of the Trajan Column George E. Eyre and William Spottiswoode
[17] 간행물 Trajan's Glorious Forum 1998
[18] 문헌
[19] 문서 CIL VI.960
[20] 웹사이트 Column for Trajan - Honorific Inscription http://omeka.wellesl[...] Wellesley College 2023-09-18
[21] 문헌
[22] 문헌
[23] 문헌
[24] 문헌
[25] 문헌
[26] 문헌
[27] 문헌
[28] 문헌
[29] 문헌
[30] 문헌
[31]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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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문헌
[34] 문헌
[35] 문헌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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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서적
[3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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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서적
[42] 서적
[43] 서적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웹사이트 Fonts tagged 'trajan' http://www.myfonts.c[...]
[52] 서적
[53] 서적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서적
[59] 서적
[60] 문서 commons:Category:Trajan's Column - Cichorius Plates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미켈란젤로, 생의 마지막 여행 책과함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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