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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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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년에 태어나 서기 37년에 사망한 로마 제국의 두 번째 황제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유능한 군인이자 행정가였지만, 원로원과의 갈등, 세야누스 사건, 카프리 섬 은둔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티베리우스는 금융 위기 대책과 국경 방어망 구축에 힘썼으며,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계승하고 확립하는 데 힘썼지만, 재정 긴축 정책으로 시민들의 인기를 얻지 못했다. 말년에는 세야누스의 발호와 몰락, 카프리 섬에서의 은둔 생활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현대에는 로마 제국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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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기본 정보
로마자 표기Tiberius Iulius Caesar Augustus
이름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전체 이름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기원전 42년 - 서기 4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서기 4년–14년)
별칭티베리우스 1세
출생일기원전 42년 11월 16일
출생지로마, 이탈리아
사망일서기 37년 3월 16일 (77세)
사망지미세눔, 이탈리아
매장지아우구스투스 영묘, 로마
통치 기간서기 14년 9월 17일 – 37년 3월 16일
선임자아우구스투스
후임자칼리굴라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흰색 흉상
툴루즈, 생레몽 박물관에 있는 흉상
배우자빕사니아 아그리피나 (기원전 19년 결혼, 기원전 11년 이혼)
율리아 (기원전 11년 결혼, 기원전 2년 이혼)
자녀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양자)
아버지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아우구스투스 (양부)
어머니리비아
추가 정보
참고때때로 후대의 동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와 티베리우스 3세를 참조하여 '티베리우스 1세'라고도 불린다.
로마 황제
황제로마 황제
통치자 정보
군주프린켑스
가계도
프랑스 대형 카메오
프랑스 대형 카메오

2. 생애

기원전 42년 11월 16일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태어난[70][71] 티베리우스는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모두 명문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아 가문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로마를 떠나 도피 생활을 했다.[70]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훗날 아우구스투스) 사이의 협정으로 로마로 돌아왔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어머니 리비아와 결혼하면서 부모는 이혼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38년에 태어난 이복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정무와 군무 경험을 쌓았다. 기원전 29년 악티움 해전 승리 기념 개선식에 참여했고,[6] 이후 군단을 지휘하며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카와 친구가 후보였지만, 결국 티베리우스가 후견인으로 선택되었다. 티베리우스는 비프사니아와 결혼해 아들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강요로 이혼하고 그의 딸 율리아와 결혼해야 했다.

율리아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로도스섬으로 은둔했다. 기원전 2년 로마로 돌아왔지만, 후계자 후보였던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형제가 사망하면서 티베리우스가 유력한 후계자가 되었다. 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었고,[13]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아야 했다.[13] 같은 해, 티베리우스는 두 번째 호민관 직권을 받았다.[14]

기원전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다.[16]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자, 티베리우스는 유언에 따라 임페라토르로 즉위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계승하고 금융 위기 대책,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러나 업적을 과시하지 않고 공공 투자를 자제하여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재정 낭비를 막기 위해 전차 경기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켜 로마 시민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29년 아그리피나를 소탕하고, 31년에는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처형했다.[4] 2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카프리섬에 은거하여 통치했기 때문에 인기는 더욱 하락했다.

티베리우스와 그의 어머니 리비아, 서기 14~19년, 파에스툼 출토, 스페인 국립 고고학 박물관, 마드리드


티베리우스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동전.

2. 1. 어린 시절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년 11월 16일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70][71] 티베리우스의 친부모는 모두 고대 공화정 초기부터 명성을 떨친 귀족 가문인 클라우디아 가문 출신이었다. 어머니 리비아는 외할아버지의 입양을 통해 플레베이 가문 출신이지만, 유명한 리비우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반(反) 옥타비아누스파였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어린 시절 로마를 떠나 페르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 등지로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70] 네아폴리스에서는 항구로 도망치던 중 티베리우스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발각될 뻔한 적도 있었다. 숲에서 산불을 만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머리와 옷만 그을리고 살아남기도 했다.[70]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에 맡겨지기도 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협정이 성립되자 티베리우스 일가는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와 결혼하기를 원했고, 결국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이혼했다.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했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38년에 태어난 이복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이후 어머니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와 재혼하면서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2. 2. 어머니의 재혼과 계부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42년 11월 16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난 티베리우스는 3살 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협정으로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에게 반해 결혼을 원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이혼했고,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재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어머니가 결혼 직후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8]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청소년이 된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12세부터 정무와 군무에 종사하며 경험을 쌓았다. 기원전 29년 8월, 악티움 해전 승리 기념 개선식에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참여하였다.[6] 이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을 지휘하며 각지에서 활약하여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2. 3.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기원전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지위를 세습하여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고자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카 마르켈루스와 오랜 친구 아그리파가 후보로 거론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 율리아를 처음에 마르켈루스에게, 마르켈루스가 요절한 후에는 아그리파에게 시집보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 가이우스루키우스 형제가 태어나자,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손자를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 보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두 손자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생각했지만,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사망하자,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친족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던 티베리우스를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폼포니아의 딸 비프사니아와 결혼하여 아들 드루수스를 낳는 등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비프사니아와 이혼시키고 과부가 된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게 했다.

티베리우스는 비프사니아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의 행실로 인해 부부 사이는 악화되었고, 여러 가지 이유[4]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로도스섬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섬에서 은둔하는 동안 율리아는 간통죄로 고발되어 티베리우스와 이혼하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 무렵 후계자 후보였던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형제가 요절하면서,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 기원전 4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었다.[13] 그 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小)드루수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 (동생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안토니아 미노르의 아들)를 양자로 삼아야 했다.[13] 게르마니쿠스는 율리우스 씨족의 혈통을 이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티베리우스에게 두 번째 호민관 직권이 주어졌다.[14] 한편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양자 결연이 파기되어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2. 4. 임페라토르 즉위

기원전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다.[16] 서기 14년 8월 19일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티베리우스는 유산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임페라토르로 즉위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미 ''원수(Princeps)''로서 행정 및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와 ''파테르 파트리아에(국부)'' 칭호는 없었고, 시민관도 거부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금융 위기 대책과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는 나에게 있어 법이다"라고 말하며,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을 계승하고 확립하는 데 힘썼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권력 투쟁 끝에 로마 공화정을 가장한 제정을 구축했다면, 티베리우스의 역할은 그것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거나 로마에 대한 과도한 공공 투자를 자제했다. 이는 "벽돌의 로마를 받아 대리석의 로마를 남긴" 아우구스투스와는 대조적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업적은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의 사후 1700년 이상이 지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임페라토르 주최의 전차 경기 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는 낮았다. 또한 29년에는 아그리피나를 소탕하고, 31년 10월 28일에는 권력욕을 드러내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를 처형하기도 했다.[4] 26년부터 37년 사망할 때까지 카프리섬에 은거하여 세야누스를 통해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더욱 하락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을 "노예가 되기에 적합한 자들"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3. 통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의 협력을 중시했지만, 원로원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점차 독자적인 통치를 강화했다.[16] 그는 원로원을 "노예가 되기에 적합한 자들"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티베리우스의 양자 게르마니쿠스의 흉상 (루브르 박물관, 파리)


즉위 초, 다뉴브 강과 라인 강 방어선의 군단 병사들이 상여금과 제대 문제로 파업을 일으켰다. 티베리우스는 아들 소 드루수스와 양자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진압했다. 게르마니쿠스는 테우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잃어버린 군기를 되찾는 등 큰 공을 세워 개선식을 거행했다.

티베리우스는 속주 총독들의 부정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여 속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증세 없이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려 노력했고, 황제 주최의 전차 경기 중단 등 긴축 정책을 펼쳤다. 수도에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미 많은 공공 사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지 보수 외에는 최소한의 투자만 했다. 반면 판노니아 등 속주에서는 많은 인프라 정비를 실시했다.

게르마니아 원정을 중단하고 라인 강과 다뉴브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엘베 강 진출을 포기했다. 또한 파르티아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여 동방의 안전 보장을 확립했다.

근위대장 루키우스 엘리우스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강화했다. 26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으로 은거하면서, 세야누스는 로마 시와 국가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16] 세야누스는 황실 우편을 통제하고 정적들을 숙청하며 권력을 키웠다. 게르마니쿠스의 가족들을 숙청하고, 31년에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티베리우스가 말년 대부분을 보낸 카프리 섬에 있는 요비의 별장 유적. 티베리우스는 제국 통치를 근위대 대장 루키우스 엘리우스 세야누스에게 맡겼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소 안토니아로부터 세야누스의 음모를 전해 듣고, 31년 원로원에서 세야누스를 탄핵하는 서신을 낭독하게 했다. 세야누스는 즉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일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야누스 처형 후, 그 일파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소 드루수스 암살의 진실이 밝혀졌고, 티베리우스는 의심이 더욱 많아져 치세 말기의 공포 정치로 이어졌다. 세야누스 사건은 티베리우스의 이미지와 명성에 큰 손상을 입혔다.

3. 1. 초기 통치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의 협력을 중시했지만, 원로원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점차 독자적인 통치를 강화했다.[16]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모호한 명령에 대해 논쟁을 벌였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을 "노예가 되기에 적합한 자들"이라고 조롱했다.

즉위 초기에 다뉴브 강과 라인 강 방어선에서 군단 병사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약속한 상여금을 받지 못했고, 제대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와 양자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진압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마니아 영토로 원정을 감행하여 테우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잃어버린 군기를 되찾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게르마니쿠스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서기 17년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티베리우스는 속주 총독들의 부정을 엄격하게 감시하고 처벌하여 속주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증세 없이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려 노력했고, 황제 주최의 전차 경기 중단 등 긴축 정책을 펼쳤다. 수도에서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이미 많은 공공 사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지 보수 외에는 최소한의 투자만 했다. 반면 속주, 특히 판노니아에서는 많은 인프라 정비를 실시했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원정을 중단하고 라인 강과 다뉴브 강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했다. 그는 엘베 강 진출을 포기했다. 또한 동방의 파르티아와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여 동방의 안전 보장을 확립했다. 이를 위해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에 파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동방에서 시리아 속주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의 불화 끝에 급사했다. 피소의 독살설이 널리 퍼졌고, 티베리우스는 재판을 통해 피소를 처벌했다. 피소는 자살했고,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의심하여 후일 유배된다.

3. 2. 세야누스의 발호와 몰락

루키우스 엘리우스 세야누스는 서기 15년에 근위대 대장이 되어 거의 20년 동안 황실을 섬겼다.[16] 티베리우스가 프린켑스 지위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제한된 비서실, 특히 세야누스와 근위대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서기 17년 또는 18년에 티베리우스는 도시 방어를 담당하는 프레토리안 근위대의 수를 줄이고, 도시 성벽 밖의 진영에서 도시 안으로 이동시켰다. 이로써 세야누스는 6000명에서 9000명에 이르는 병력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드루수스의 죽음은 티베리우스에게 세야누스를 더욱 신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그를 ''소키우스 라보룸''(나의 노고의 동반자)이라고 불렀고, 도시 곳곳에 세야누스의 동상을 세웠다. 서기 26년 티베리우스가 로마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세야누스는 로마 시와 국가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세야누스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로마 시의 상원 의원들과 부유한 기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인 아그리피나 대제와 그녀의 두 아들인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서기 30년에 체포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모두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죽었다. 세야누스의 숙청에서 칼리굴라, 아그리피나 소제,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만이 살아남았다.

23년 시점에서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는 친아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 그리고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였다. 정치 실권을 장악하려 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이들은 달갑지 않았고, 특히 드루수스는 세야누스에게 명백한 적의를 보였기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세야누스는 드루수스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아내인 리빌라에게 접근하여, 23년에 드루수스를 독살했다. 이 암살은 매우 교묘하게 행해져 8년 후 세야누스 일파가 숙청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26년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로 떠났는데, 타라치나 근처 별장에서 식사를 하던 중 낙반이 일어나 세야누스가 목숨을 걸고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이후 그의 신뢰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29년 티베리우스와 대등한 권위를 가진 리비아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공개적으로 네로와 아그리피나를 공격했다. 네로는 폰티아 섬으로, 아그리피나는 판다테리아 섬으로 유배되었다. 남은 드루수스는 30년에 팔라티누스 궁전에 유폐되었다.

세야누스는 31년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에 대한 의혹을 품기 시작했고, 세야누스가 황제와의 면담, 서신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자 의혹은 더욱 강해졌다. 티베리우스는 소 안토니아로부터 세야누스의 음모를 전해 듣고, 10월 18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를 탄핵하는 서신을 낭독하게 했다. 세야누스는 즉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일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세야누스의 처형 후, 그 일파에 대한 숙청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드루수스 암살의 진실이 밝혀졌고, 티베리우스는 의심이 더욱 많아져 치세 말기의 공포 정치로 이어졌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양심의 가책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하며,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토고 샐먼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의 폭정에 대한 타키투스의 묘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세야누스 사건과 반역죄 재판은 티베리우스의 이미지와 명성에 큰 손상을 입혔다. 세야누스의 몰락 이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제국은 관료제의 관성에 따라 운영되었다.

3. 3. 카프리 섬 은둔과 통치

루키우스 엘리우스 세야누스는 서기 15년에 근위대 대장이 된 후 거의 20년 동안 황실을 섬겼다. 티베리우스는 ''프린케프스'' 지위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하면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제한된 비서실, 특히 세야누스와 근위대에 더욱 의존했다. 서기 26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완전히 물러나 카프리 섬에 은거했고, 세야누스는 전체 국가 기구와 로마 시를 책임지게 되었다.[16]

세야누스는 황실 우편을 통제하여 티베리우스가 로마로부터 받는 정보와 로마가 티베리우스로부터 받는 정보를 통제했다. 그는 로마 시의 상원 의원들과 부유한 기사들을 숙청 재판으로 제거하며 권력을 키웠다.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아그리피나 대제와 그녀의 두 아들 네로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서기 30년에 체포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모두 죽었다.

31년에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in absentia''로 있는 가운데 집정관직을 맡았다. 세야누스는 율리우스 가문과 관련된 가문을 은밀히 구애하고 ''프린케프스'' 지위를 차지하거나 잠재적인 섭정이 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음모는 소 안토니아를 통해 티베리우스에게 알려졌고,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를 비난하고 즉각 처형할 것을 명령하는 편지를 보냈다. 세야누스는 재판을 받았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일주일 안에 처형되었다. 근위대 사령관은 나에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로 대체되었다.

세야누스 사건과 반역죄 재판으로 이어진 최후의 몇 년은 티베리우스의 이미지와 명성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혔다. 세야누스 몰락 이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수립한 관료제의 관성에 따라 운영되었다.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편집증에 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죽음

티베리우스의 죽음, 장-폴 로랑 작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 3월 16일, 78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미세눔에서 사망했다.[21] 고대 자료들은 그의 사망 날짜와 장소에는 동의하지만,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타키투스는 황제가 호흡을 멈춘 것처럼 보였고, 티베리우스의 별장에 있던 칼리굴라가 제국 계승을 축하받고 있던 중 황제가 소생하여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이어서 잠시 전에 칼리굴라를 아우구스투스로 인정했던 사람들은 황제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도망쳤고, 마크로는 혼란을 이용하여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침구로 질식시켰다고 보고한다.[21]

수에토니우스는 병이 나은 후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티베리우스가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황제가 칼리굴라에게 독살당했거나, 굶주림으로 죽었거나, 베개로 질식당했다는 여러 소문들을 더 전한다.[21] 세네카 장로 또한 티베리우스가 자연사했다고 전한다.[21]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황제가 회복될까 봐 두려워한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음식 요구를 거부하고 따뜻함이 필요하지 음식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 후 마크로의 도움을 받아 침구로 황제를 질식시켰다.[21]

요세푸스, 플리니우스, 필론은 티베리우스의 질식 사건을 전하지 않고 단순히 그의 사망 날짜 및/또는 통치 기간만을 기록한다. 현대 의학 분석은 티베리우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결론지었다.[23][24]

그의 사망 후, 원로원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졌던 신격화를 티베리우스에게 투표하는 것을 거부했고, 군중들은 거리에 가득 차서 "티베리우스를 티베르 강에 던져라!"(범죄자들의 시신은 매장되거나 화장되는 대신 일반적으로 강에 버려졌다)고 외쳤다.[25] 그러나 황제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되었다.[26]

유언에서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공동 상속자로 지명했다.[21] 칼리굴라가 프린켑스가 된 후 첫 행동은 티베리우스의 유언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21]

5. 평가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군인이자 행정가였지만, 원로원과의 불화, 세야누스 사건, 카프리섬 은둔 등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그의 치세가 로마 제국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필론은 티베리우스의 치세에 대해 제국 전역에 공정한 법이 엄정하게 시행되었고, 모든 땅과 바다가 로마 제국의 이름 아래 조화로운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36] 그는 부가 축적되어 금과 은이 넘쳐흘렀고, 교역망을 통해 부와 물산이 왕성하게 교류되었으며, 군사력도 잘 정비되어 제국 안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묘사를 했지만,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의 미덕을 위선으로 돌렸다.[65] 그는 티베리우스의 성격이 여러 시기를 거쳤다고 평가하며, 아우구스투스 휘하에서는 훌륭했지만,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교활하게 미덕을 가장했고, 세야누스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기록했다.[65]

스웨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의 행동을 칭찬하며 그의 겸손함을 강조했지만, 카프리 섬에서의 방탕한 행위들을 파헤치기도 했다.[66]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티베리우스와 세야누스 모두에게 찬사를 보냈다.[37]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계승하고 제정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지 않고 공공 투자를 자제했지만, 이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통치 방식으로 평가받기 어려웠다. 그의 업적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과의 협력을 요청하고 관직 선거 장소를 원로원으로 옮기는 등 정책을 실시했지만, 원로원 의원들의 무능함에 실망하여 카프리 섬에 은퇴하게 되었다.

그는 다뉴브 강, 라인 강 방어선에서 일어난 파업을 진압하고, 법의 공정한 시행을 통해 통치의 신뢰를 높였다. 또한, 속주 총독의 부정에 대한 재판에 열심이었다.

티베리우스는 긴축 재정 정책을 펼쳤지만,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출은 확실하게 집행했다. 그는 게르마니아 원정을 포기하고 라인 강과 다뉴브 강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파르티아와의 문제도 해결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음모를 밝혀내고 처형했다.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의 의심을 깊게 만들었고, 치세 말기의 공포 정치로 이어졌다.

티베리우스는 77세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기뻐하면서도 진실인지 걱정했다.[61][62]

현대의 연구에서는 고대의 부정적인 평가에 과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관료 조직 정비와 속주 안정 등 국내외 문제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원수정의 기반을 굳혔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6. 가족 관계

티베리우스는 두 번 결혼했으나, 첫 번째 부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만 아들 드루수스를 두었다. 율리아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했다.[20]

배우자자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딸) (기원전 16년 – 기원전 11년)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4년 – 서기 23년)
율리아 마이오르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기원전 11년 – 기원전 6년)"티베릴루스" (유아 사망)


7. 업적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28년간 이어진 게르마니아와의 전쟁을 종결하고, 엘베 강 진출 대신 라인 강과 다뉴브 강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 파르티아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여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를 해결하고 동방의 안전을 확보했다.[1]

티베리우스는 내정 개혁을 통해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재정 건전성을 확보했다. 증세 없이 국가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 주최의 전차 경기 중단 등 긴축 정책을 펼쳤다.[1] 비록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제국 전체를 위한 통치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추진했다.[1] 판노니아 등 속주에는 인프라 정비를 실시하여,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지출은 확실하게 집행했다.[1]

티베리우스는 로마 시 북동부에 근위대 병영을 신설하여 치안 안정에 기여했다.[1] 이전까지 중대 단위로 분산 배치되었던 근위대를 한 곳에 주둔시켜 이탈리아 본토의 치안을 강화했지만, 이는 훗날 근위대가 황제 자리를 좌우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

인재 등용에 있어서 티베리우스는 능력 중심의 인사를 단행했다.[1] 신분과 출신 지역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했고, 이는 인적 자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1] 광대한 제국 운영을 위해 정보 전달망을 정비하고 각 지역의 책임을 철저히 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1]

8. 일화


  •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 따르면, 티베리우스의 하인 중 한 명이 티베리우스를 '주인님'(도미누스)이라고 부르자, 티베리우스는 "다시는 나를 그딴 모욕적인 말로 부르지 마라."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 티베리우스가 카프리섬에 은둔하고 있을 때 온갖 추문과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겼다는 수에토니우스의 증언은, 다른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에서는 그러한 행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부정된다. 타키투스는 소문 수준으로 언급했고, 카시우스 디오는 타키투스보다 조금 자세히 적었으나 수에토니우스만큼은 아니었다. 유대인 역사학자 파테로클루스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티베리우스를 호의적으로 기록했고, 대(大) 플리니우스와 세네카는 티베리우스의 폐쇄적인 성격을 언급하면서도 악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인 플루타르코스와 유대인 요세푸스 또한 티베리우스의 악덕을 언급하지 않았다. 풍자작가 유베날리스는 카프리섬에서 점성술사에게 둘러싸여 사는 늙은 황제를 비웃었지만 성적인 악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이혼하게 된 빕사니아와의 사이는 원래 나쁘지 않았다. 수에토니우스는 《황제열전》에서 빕사니아와 이혼하고 난 뒤 어느 날 티베리우스는 길에서 빕사니아와 마주쳤는데, 빕사니아가 길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듣고 티베리우스가 빕사니아와 사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더욱 제재를 가했다고 전한다.
  • 티베리우스가 황제로 재위하고 있던 시절에 유대 속주에서 예수십자가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
  • 물로 희석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로마인들과는 달리, 티베리우스는 스트레이트로 많은 양의 와인을 마셨다. (트라야누스도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와인이 포도즙이 농축되어 있고, 많은 당분이 알코올로 전환되지 않아 매우 달콤한 음료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과도한 단맛을 줄이기 위한 것이 물 희석이었다. 현대 와인의 제조법이 확립된 것은 로마 시대이며, 즉 달콤한 음료에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음료로 변화하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 박과 식물의 열매[69]를 좋아해서 매일 먹을 수 있도록 개인 온실에서 재배했다고 한다.[6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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