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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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트리키는 고대 로마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로마 왕정 시대에 등장하여, 정치적으로 소외된 평민(플레브스)을 지배했다. 파트리키는 켄투리아 민회에서 유리한 구조를 가졌으며,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직을 독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유한 플레브스가 등장하고, 파트리키와 융합하여 노빌레스(신 귀족) 계급이 나타나면서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파트리키는 공화정 후기 및 제국 시대를 거치며 쇠퇴했지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작위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구분은 출생에 기반했으며, 두 계급 간의 갈등은 계층 갈등으로 이어졌다. 현대에도 "파트리키"는 상류층을, "플레브스"는 하류층을 비유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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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키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언어 | 라틴어 |
관련 민족 | 로마인 |
사회 및 정치적 지위 | |
신분 | 귀족 |
지위 획득 | 세습 |
권한 | 정치적 권력 장악 고위 관직 독점 종교적 권위 보유 사회적 특권 향유 |
역사 | |
기원 | 로마 건국 초기 로마 왕정 시대 |
로마 공화정 | 정치적 지배 계급 형성 원로원 구성원 |
로마 제정 | 일부 특권 유지 사회적 지위 변화 정치적 영향력 약화 |
몰락 | 로마 제국 멸망과 함께 소멸 |
특징 | |
결혼 | 파트리키 간 결혼 선호 플레브스와의 결혼 제한 |
사회적 관계 | 클리엔테스 관계 형성 플레브스 보호 |
후손 | 귀족 가문 유지 세습 신분 유지 |
명칭 | |
로마자 표기 | patricius |
어원 | patres patres conscripti |
복수형 | Patricii |
기타 명칭 | 파트리키 (한국어) 패트리션 (영어) |
2. 역사
파트리키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파트리키'라고 자칭했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로마 왕정의 행정 조직인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가 193개로 나뉘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그러나 로마의 5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차지하는 상위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하여, 소수였던 파트리키가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그 결과 플레브스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고 볼 수 있다.[34]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 직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신관 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오글루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렸을 때였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하면서 파트리키와 융합하여 노빌레스(신 귀족)라는 계급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빈곤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둘을 구분하는 정의는 모호해졌다. 순혈 파트리키들은 여러 원인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카이사르 같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고, 몰락 전까지는 한니발과 같은 위기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순혈 파트리키보다는 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과 지위를 누렸고, 순혈 파트리키들은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후대에 파트리키는 칭호로 계승되었고,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로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에게 주어지는 작위의 명칭이 되었다.
2. 1. 기원
파트리키의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이견이 있지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파트리키'라고 자칭했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당시 로마 왕정의 행정 조직인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가 193개로 나뉘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그러나 로마의 5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차지하는 상위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하여, 소수였던 파트리키가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그 결과 플레브스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고 볼 수 있다.[34]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 직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신관 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오글루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렸을 때였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하면서 파트리키와 융합하여 노빌레스(신 귀족)라는 계급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빈곤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둘을 구분하는 정의는 모호해졌다. 순혈 파트리키들은 여러 원인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카이사르 같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고, 몰락 전까지는 한니발과 같은 위기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순혈 파트리키보다는 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 특권과 지위를 누렸고, 순혈 파트리키들은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리비우스와 키케로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한 100명의 남성들은 "아버지들"(라틴어 ''patres'')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후손들이 파트리키 계급이 되었다.[1] 이들은 원로원에 임명되면서 귀족 신분을 얻었고, 이는 파트리키와 플레베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이들이 지혜 때문에 선택되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고대 로마가 실력주의적 이상에 기반하여 건설되었다는 생각과 일치한다.[1] 다른 견해에 따르면, 파트리키(patriciila)는 원래 전체 시민 집단을 구성했던 씨족(gentesla)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었다.[2]
왕정 시대에 알바 롱가 등 다른 지역에서 온 귀족 가문들도 파트리키에 편입되었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 의해 파괴된 후 알바 롱가에서 이주한 여러 가문이 포함되었고, 율리우스 족, 세르빌리우스 족 등의 유력자들이 이주해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원로원 의사당이 건설되었다.[33] 기원전 1세기 이전에 파트리키에 편입된 마지막 사례는 기원전 504년, 공화정 수립 5년 후 로마에 온 클라우디이였다.[3][20][4][5]
로물루스가 특정 남성들을 파트리키로 선택한 기준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지만, 파트리키와 플레베이 구분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 매우 중요했다는 점은 모두 인정한다.[6] 이 구분은 공화정 말기까지 사회에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파트리키는 원로원에 임명될 때 귀족 신분을 얻어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플레베이보다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7] 고대 로마의 파트리키는 그리스 사회의 귀족과 같은 신분으로,[8] 정부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플레베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러한 특권은 두 계급 사이에 큰 격차를 만들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인구 조사(국세조사)를 실시하고, 행정 단위의 하나로 켄투리아(백인대)와 재산에 따른 클라시스(계급)을 정했다.[34]
후대에 파트리키는 칭호로 계승되었고,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로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에게 주어지는 작위의 명칭이 되었다.
2. 2. 로마 공화정 시대
파트리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스스로를 '파트리키'라 칭하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당시 로마 왕정의 행정 기구인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를 193개로 나누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로마의 5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속한 상위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하여, 소수였던 파트리키가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그 결과 플레브스가 행정직을 맡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직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신관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의 정원이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을 때였다.[35]
그러나 공화정 후기가 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하여 기존의 파트리키와 융합, 노빌레스(신 귀족)라는 계급이 생겨났다. 한편으로는 빈곤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양자를 구분하는 정의는 모호해졌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평민을 결코 받지 않거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받지 않아서 구성원 전체가 귀족인 파트리키들은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고집스러운 자들 역시도 카이사르와 같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망하기 전까지는 한니발 같은 위기에서도 상당히 활약하였다. 물론 그런 순수성이 로마 사회에서 꼭 우월한 지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으며 그런 특권과 지위를 가진 파트리키들은 순혈 파트리키가 아닌 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순혈 귀족들인 파트리키들은 특히나 가문이 힘든 상황에 있거나 몰락한 경우에는 특권이 아닌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로마 의회에서 파트리키는 플레브스보다 더 많은 특권과 권리를 누렸다. 독재관, 집정관, 검열관 같은 고위 공직은 파트리키만이 차지할 수 있었고, 모든 사제직(예: 최고 대제사장)은 비파트리키에게는 금지되었다. 파트리키만이 로마 신들과 소통하고 신성한 의식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9] 최고의 토지를 소유함으로서 파트리키 계급은 더 나은 농업 생산과 같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플레브스가 정치직에 출마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당선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10] 파트리키 계급은 고대 로마 정부를 사실상 통제했다.[10] 카시우스는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간의 신분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파트리키가 신었던 특정 신발을 언급하며, "도시에서 파트리키아들이 신었던 신발은 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디자인은 그들이 원래 상원의원 100명의 후손임을 의미하는 문자였다."라고 설명한다.[11]
공화정 초기 로마 고위 관리 목록에는 플레브스의 이름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기원전 4세기에 통과된 두 법률은 플레브스에게 고위 관리직을 점차 개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은 플레브스가 집정관직을 가질 권리를 확립했고, 기원전 342년 게누키우스 법은 집정관 중 적어도 한 명이 플레브스여야 한다고 규정했다.
로마 제국 확장과 함께,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고대 파트리키 가문(gens)은 많이 사라지고 새로운 플레브스 가문이 부상했다. 많은 오래된 가문은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분파를 가졌는데, 파트리키 계열은 종종 몰락하고 플레브스 동명 가문에 가려졌다.
공화정 말기, 특히 동맹 전쟁부터 삼두정치의 숙청까지의 내전으로 쇠퇴가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기원전 1세기 동안 여러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이 멸종 위기에 처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레스처럼 입양을 통해서만 살아남기도 했다.
- 율리우스 카이사레스 (Julii Caesares)
- 만리이 토르콰티이 (Manlii Torquatii)
- 파피리이 마소네스 (Papirii Masones)
- 포스투미이 알비니 (Postumii Albini)
- 세르빌리이 카이피오네스 (Servilii Caepiones)
그러나 여러 갈래를 가진 큰 젠테스는 더 잘 대처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밀리이, 클라우디이, 코르넬리이, 파비이, 술피키이, 발레리이는 모두 원수정 시대에 계속 번영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인구 조사(국세조사)를 실시하고 행정 단위로 켄투리아(백인대)와 재산에 따른 클라시스(계급)를 정했다. 켄투리아는 193개였고 켄투리아 민회의 투표 단위였으나, 로마 6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차지하는 상류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해 소수파라도 정치적으로 유리했다.[34]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키운 플레브스가 나타나 기존 파트리키와 융합, 노빌레스(신귀족)가 나타났고, 양자를 구분하는 정의는 모호해졌다.
2. 3. 로마 제국 시대
3세기 위기 말, 공화정 시대의 귀족 신분은 의미를 잃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년~337년)는 이 용어를 특정 행정직과 관련 없는 제국 최고 명예직 칭호로 재도입하여 처음에는 소수에게만 제한했다.[25][26] 조시무스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파트리키 칭호를 가진 자들이 근위대 대장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기록했다.[27]후기 서로마 제국에서 이 칭호는 드물게 사용되었지만 높은 명성을 유지했으며, 특히 5세기에 국가를 지배했던 강력한 마기스터 밀리툼la들에게 수여되었다.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코메스 보니파키우스, 리키메르 등이 그 예이다.[25]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서유럽에서 귀족 칭호가 간혹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스테파누스 2세 교황은 프랑크 왕 페팽 짧은에게 "로마인들의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수여했다.[25]
3. 파트리키 가문
파트리키의 기원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스스로를 '파트리키'라 칭하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왕정의 행정 기관으로, 각 켄투리아가 193개로 나뉘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파트리키는 로마의 5개 계급 중 상위 2개 계급에 속하며 98개의 켄투리아를 차지하여, 소수임에도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플레브스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 직을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하고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행정관이 연초나 전쟁 전에 신탁을 받는 것이 관례였기에, 신관 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린 오글루니우스 법 제정 이후였다.
공화정 후기,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하여 기존의 파트리키와 융합, 노빌레스(신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한편으로는 빈곤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면서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해졌다. 파트리키 가문은 평민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아[35]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카이사르 같은 인재를 배출하고 한니발 전쟁과 같은 위기에서도 활약했다. 순수 파트리키들은 특권보다는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평민 혈통과 섞이지 않았던 파트리키들은 카이사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손을 남기지 못해 거의 사라졌으나, 카시야 법(lex Cassia) 등으로 칭호는 후대에 계승되었다. 중세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로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에게 주어지는 작위 명칭도 있었다.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한 100명의 남성들은 "아버지들"(라틴어 ''patres'')이라 불렸고, 그들의 후손은 파트리키 계급이 되었다고 리비우스와 키케로가 언급했다.[1] 이들은 원로원에 임명되어 귀족 신분을 얻었으며,[1] 어떤 기록에는 지혜 때문에 선택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고대 로마가 실력주의에 기반했다는 생각과 일치한다.[1] 다른 견해로는 파트리키(patriciila)가 원래 시민 집단을 구성했던 씨족(gentesla) 구성원을 가리킨다고도 한다.[2]
왕정 시대에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 의해 파괴된 알바 롱가 등 다른 귀족 가문들도 로마에 와 파트리키에 편입되었다. 기원전 504년, 공화정 수립 5년 후 로마에 온 클라우디이가 파트리키에 편입된 것이 기원전 1세기 이전 마지막 사례이다.[3][20][4][5]
로물루스가 특정 남성을 파트리키 계급으로 선택한 기준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지만, 파트리키와 플레베이 구분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은 모두 인정한다. 파트리키와 플레베이 구분은 고대 로마 시작부터 존재했으며,[6] 공화정 말기까지 중요해졌다.
파트리키는 원로원 임명으로 귀족 신분을 얻어 초기 공화정 시대에 플레베이보다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7] 이들은 그리스 사회의 귀족과 같은 신분이었다.[8] 귀족 계급은 파트리키가 정부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플레베이는 그럴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이는 두 계급 사이에 큰 격차를 야기했다.
공화정 중기와 말기에 플레베이들은 대부분 영역에서 동등한 권리를, 어떤 영역에서는 더 큰 권리를 얻었다. 플레베이 호민관은 플레베이만 역임할 수 있었고,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플레베이에게 할당되었다. 파트리키 신분은 여전히 명예로웠지만, 실질적 중요성은 최소화되었다. 공화정 전성기 원로원 계급 플레브스들은 파트리키보다 부유했다.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는 플레베이 호민관이 되기 위해 플레베이 가문에 입양되기도 했다.
다음은 귀족(Patrician)으로 여겨졌던 족속들의 목록이다. 평민(Plebeian) 구성원이나 분파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족속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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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귀족에 속했지만, 주로 평민 분파로 알려진 족속들은 다음과 같다.
- 안토니아
- 카시아
- 코미니아
- 쿠리아티아
- 호스틸리아
- 유니아
- 마르키아
로마가 알바 롱가를 정복한 후, 율리우스 족, 세르빌리우스 족 등 유력자들이 이주해 왔고, 원로원 의사당이 건설되었다.[33]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국세조사를 실시하고, 행정 단위인 켄투리아(백인대)와 재산에 따른 클라시스(계급)를 정했다. 켄투리아는 193개였고, 켄투리아 민회 투표 단위였다. 파트리키가 차지하는 상류 2개 계급 켄투리아가 98개여서 소수파라도 정치적으로 유리했다.[34]
공화정 초기, 사제직은 파트리키만 담당했다. 이들은 로마 신들과 교신하고 신들의 의식을 거행한다고 믿어졌다. 연초나 전쟁 전 관리가 신들에게 묻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사제직(아우구르)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 사제직을 맡은 것은 기원전 300년 오글루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 정원이 4명에서 9명으로 증원되었을 때이다.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 기존 파트리키와 융합하여 노빌레스(신귀족)가 나타났고, 양자 구분은 모호해졌다.
후대에도 칭호는 계승되어, 중세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 작위 명칭이 되었다.
3. 1. 주요 가문 (Gentes Maiores)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한 100명의 남성들은 "아버지들"(라틴어 ''patres'')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파트리키 계급이 되었다. 이러한 기록은 키케로에 의해서도 언급된다.[1]파트리키 중에는 특정 가문들이 gentes maiores|겐테스 마이오레스la로 알려져 있었는데, 가장 위대하거나 가장 귀족적인 가문들이었다. 다른 파트리키 가문들은 gentes minores|겐테스 미노레스la라고 불렸다. 이러한 구분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원 의장(princeps senatus|프린켑스 세나투스la)은 전통적으로 gentes maiores|겐테스 마이오레스la에서 선출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gentes maiores|겐테스 마이오레스la 목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아밀리이(Aemilii), 클라우디이(Claudii), 코르넬리이(Cornelii), 파비이(Fabii), 만리이(Manlii), 발레리이(Valerii) 가문이 그중에 포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 인명 및 신화 사전'에서는 gentes maiores|겐테스 마이오레스la가 로물루스 시대, 혹은 적어도 알바 롱가 멸망 이전에 로마에 정착한 가문들로 구성되었다고 제시한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에 로마에 정착한 알바의 귀족 가문들은 그 후 gentes minores|겐테스 미노레스la의 핵심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율리이(Julii), 툴리이(Tulii), 세르빌리이(Servilii), 퀸크티이(Quinctii), 게가니이(Geganii), 쿠르티이(Curtii), 클로엘리이(Cloelii) 가문이 포함된다.[20][21]
그러나 '고전 고대 사전'에서는 알바 가문들도 gentes maiores|겐테스 마이오레스la에 포함되었고, gentes minores|겐테스 미노레스la는 타르퀴니우스 왕조 시대와 로마 공화정 초기의 파트리키로 받아들여진 가문들로 구성되었다고 제시한다. 어떤 경우이든, 클라우디이 가문이 왕들의 추방 이후에 로마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 구분은 순전히 우선순위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20][22][23][24]
3. 2. 소수 가문 (Gentes Minores)
리비우스와 키케로에 따르면, 초기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된 100명의 남성들은 "아버지들"(patresla)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파트리키 계급이 되었다.[1] 이들은 원로원에 임명됨으로써 귀족 신분을 얻었으며, 이는 파트리키와 플레베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1] 어떤 기록에는 지혜 때문에 이들이 선택되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고대 로마가 실력주의적 이상에 기반했다는 생각과 일치한다.[1]왕정 시대에 로마에 온 다른 귀족 가문들도 파트리키에 편입되었는데,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에 의해 파괴된 후 알바 롱가에서 이주한 여러 가문도 포함된다. 기원전 504년, 공화정 수립 5년 후 로마에 온 클라우디이가 파트리키의 반열에 오른 것이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씨족이 파트리키에 편입된 마지막 사례이다.[3][20][4][5]
파트리키 중에는 특정 가문들이 gentes maioresla로 알려져 있었는데, 가장 위대한 혹은 가장 귀족적인 가문들이었다. 다른 파트리키 가문들은 gentes minoresla라고 불렸다. 이러한 구분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원 의장(princeps senatusla)은 전통적으로 gentes maioresla에서 선출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gentes maioresla의 목록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 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아밀리이, 클라우디이, 코르넬리이, 파비이, 만리이, 발레리이 가문이 그중에 포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스와 로마 인명 및 신화 사전(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에서는 gentes maioresla가 로물루스 시대, 혹은 적어도 알바 롱가 멸망 이전에 로마에 정착한 가문들로 구성되었다고 제시한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에 로마에 정착한 알바의 귀족 가문들은 그 후 gentes minoresla의 핵심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율리이, 툴리이, 세르빌리이, 퀸크티이, 게가니이, 쿠르티이, 클로엘리이 가문이 포함된다.[20][21]
그러나 고전 고대 사전(Harper's Dictionary of Classical Antiquities)에서는 알바 가문들도 gentes maioresla에 포함되었고, gentes minoresla는 타르퀴니우스 왕조 시대와 로마 공화정 초기의 파트리키로 받아들여진 가문들로 구성되었다고 제시한다. 어떤 경우이든, 클라우디이 가문이 왕들의 추방 이후에 로마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 구분은 순전히 우선순위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20][22][23][24]
4.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파트리키의 기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스스로를 '파트리키'라고 칭하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왕정의 행정 기구로, 켄투리아마다 193개로 나뉘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그러나 로마의 5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속한 상위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하여, 소수였던 파트리키가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그 결과 플레브스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 직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들에게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신관 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렸을 때였다.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키운 플레브스가 나타나 기존의 파트리키와 융합하면서 노빌레스(신귀족)가 등장했고,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나누는 기준은 점차 불분명해졌다. 한편으로는 가난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해졌다.
파트리키와 플레브스의 구분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계층 갈등을 거치면서 플레브스는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고, 파트리키와의 결혼도 허용되는 등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4. 1. 신분 차이와 갈등
파트리키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스스로를 '파트리키'라 칭하고,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플레브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진다.당시 로마 왕정의 행정 기구인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가 193개로 나뉘어 각각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그러나 로마의 5개 계급 중 파트리키가 속한 상위 2개 계급이 98개를 차지하여, 소수였던 파트리키가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그 결과 플레브스가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고 볼 수 있다.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 직은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할 수 있으며,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들에게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신관 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으로 신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원전 300년,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렸을 때였다.[35]
기원전 3세기 삼니움 전쟁 이후, 부와 권력을 키운 플레브스가 나타나 기존의 파트리키와 융합하면서 노빌레스(신귀족)가 등장했고, 파트리키와 플레브스를 나누는 기준은 점차 불분명해졌다. 한편으로는 가난에 시달리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모호해졌다. 정확히는 그들의 가문에 평민을 결코 받지 않거나 특수한 경우[35]를 제외하곤 거의 받지 않아서 구성원 전체가 귀족인 파트리키들은 여러 원인으로 인하여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고집스러운 자들 역시도 카이사르와 같은 인재들을 배출하였으며 망하기 전까지는 한니발 같은 위기에서도 상당히 활약하였다. 물론 그런 순수성이 로마 사회에서 꼭 우월한 지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으며 그런 특권과 지위를 가진 파트리키들은 순혈 파트리키가 아닌 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래서 의외로 순혈 귀족들인 파트리키들은 특히나 가문이 힘든 상황에 있거나 몰락한 경우에는 특권이 아닌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노빌레스를 비롯한 평민 혈통과 섞이지 않았던 파트리키들은 카이사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손을 남기지 못하여 거의 절멸하였으나 카시야 법(lex Cassia) 등으로 후대에도 칭호로 계승되었다. 중세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의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에게 주어지는 작위 명칭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파트리키는 플레브스보다 더 많은 특권과 권리를 누렸다. 이러한 신분 차이는 공화정 초기에 두드러졌다. 파트리키는 로마 의회에서 더 많은 대표성을 가졌으며, 독재관, 집정관, 검열관 같은 고위 공직은 파트리키만이 맡을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사제직(예: 최고 대제사장)은 비파트리키에게는 금지되었다. 파트리키가 로마 신들과 더 잘 소통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만이 신성한 의식을 수행하고 조짐을 받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정치적 지위가 높았을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 가장 좋은 토지를 소유했다.[9] 최고의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파트리키 계급은 더 나은 농업 생산과 같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적 결과를 가져왔는데, 연초나 군사 원정 전에 로마 고위 관리들은 신들에게 자문을 구했기 때문이다. 리비우스는 플레브스가 사제단에 처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 통과와 함께 점술가 단의 수가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플레브스는 다른 종교 단체에도 받아들여졌다. 공화정 말기에는 살리이, 플라미네스, 렉스 사크로룸과 같이 정치적 중요성이 제한적인 사제직만이 파트리키에 의해 독점적으로 채워졌다.
플레브스가 정치직에 출마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플레브스는 당선에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10]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파트리키 계급은 본질적으로 고대 로마 정부를 통제했다.[10] 카시우스의 고대 로마에 대한 기록에서 그는 파트리키 계급이 플레브스 계급에 비해 얼마나 중요하고 유리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파트리키들이 신었던 특정 신발을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파트리키와 플레브스 사이의 신분 차이를 보여준다. 카시우스는 "도시에서 파트리키들이 신었던 신발은 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디자인은 그들이 원래 상원의원 100명의 후손임을 의미하는 문자였다."라고 말한다.[11]
결국 평민들은 하층민으로서 귀족들과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15] 로마 역사에서 이 시기는 기원전 500년부터 287년까지 이어진 계층 갈등(Conflict of the Orders)으로 불린다.[15] 귀족들이 정치적 지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평민 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정부 내 대표가 없었다.[15] 대변자가 없다는 것은 평민들이 자신들이 따라야 할 법을 항상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15]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귀족들은 이 지위를 잃고 싶어하지 않았고, 평민들에게 더 많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15] 결국 평민 계급은 자신들의 통치 기구인
계층 갈등에서 나온 또 다른 발전은 십이표법이었다. 고대 로마에서 이 시기에는 왕정이 타도되었다.[16] 평민들은 법을 알고 싶어했고, 그 결과 법의 성문화인 십이표법이 탄생했다.[15] 이 법들이 기록되고 새로운 백인회(Centuriate Assembly)가 만들어진 후에도 귀족 계급은 권력을 유지했다. 회의는 시민들을 계급으로 나누었지만, 최상위 두 계급인
4. 2. 결혼
귀족과 평민 사이의 결혼은 두 계급을 법적으로 통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십이표법이 성문화되면서 두 계급 간의 결혼은 금지되었다.[13] 기원전 445년 카눌레이아 법에 의해 이 금지 조항은 폐지되었다.[14] 귀족과 평민이 결혼하면 그 자녀는 귀족 신분을 부여받았다. 이 법은 계급 혼합을 막기 위해 제정되었다. 고대 로마에서 여성은 가정 내 권력이 없었다. 마티센에 따르면, 불법적으로 다른 계급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는 결혼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13] 법적으로 인정받는 결혼은 결혼으로 태어난 자녀에게 로마 시민권과 상속받을 수 있는 모든 재산을 보장했다.[13]4. 3. 사회 변화
로마 왕정 시대에 사회가 계층화되면서 부와 권력을 가진 계층은 스스로를 '파트리키'라 칭하며, '플레브스'를 지배했다. 당시 켄투리아 민회는 193개의 켄투리아로 구분되었고, 각 켄투리아는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다. 파트리키는 상류 2개 계급에 속하며 98개의 켄투리아를 차지하여, 소수임에도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플레브스가 행정직을 맡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트리키가 독점했다.[34]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신관직도 파트리키만 맡을 수 있었다. 파트리키는 자신들만이 로마의 신들과 소통하고 신들의 의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연초나 전쟁 전에 행정관이 신탁을 받는 것이 일상이었기에, 신관직은 정치적 역할도 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플레브스가 처음 신관이 된 것은 기원전 300년 오굴니우스 법으로 아우구르 정원이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난 때였다.[17]
그러나 공화정 후기에 부와 권력을 가진 플레브스가 등장하면서 파트리키와 융합하여 노빌레스(신 귀족)라는 계급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빈곤에 허덕이는 파트리키도 나타나는 등, 양자를 구분하는 정의는 모호해졌다. 순수 혈통을 중시하던 파트리키들은 여러 원인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졌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니발과 같은 위기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순수 혈통이 로마 사회에서 우월한 지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특권과 지위를 가진 파트리키들은 주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몰락한 순혈 파트리키들은 실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카이사르는 파트리키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자손을 남기지 못해 거의 절멸하였다. 이후 카시야 법(lex Cassia) 등으로 칭호는 계승되었다.[22] 중세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그리스어로 ‘파트리키오스’라는 문무 고관에게 주어지는 작위 명칭도 있었다.
계층 갈등 (기원전 500년 ~ 287년)에서, 평민들은 하층민으로서 귀족들과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15] 평민 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정부 내 대표가 없었다.[15] 귀족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고, 평민들에게 더 많은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15] 결국 평민 계급은 자신들의 통치 기구인
계층 갈등에서 나온 또 다른 발전은 십이표법이었다. 평민들은 법을 알고 싶어했고, 그 결과 법의 성문화인 십이표법이 탄생했다.[15] 이 법들이 기록되고 새로운 백인회(Centuriate Assembly)가 만들어진 후에도 귀족 계급은 권력을 유지했다. 회의는 시민들을 계급으로 나누었지만, 최상위 두 계급인
두 계급 간의 차이를 줄이는 일련의 법들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17]
- 카눌레이아 법 (기원전 445년): 귀족과 평민 간의 결혼 허용
-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 (기원전 367년): 공유지(ager publicus) 소유 제한, 한 명의 집정관을 평민으로 선출
- 오굴니우스 법 (기원전 300년): 평민들이 사제직에 접근 허용
- 호르텐시아 법 (기원전 287년): 평민회의 결정(plebiscita)이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갖도록 함
후기 공화정 시대가 되면서 귀족과 평민 간의 대부분의 차이점은 점차 사라졌다.
5. 현대적 의미
"파트리키"(Patrician)와 "플레베이안"(plebeian)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상류층과 하류층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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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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