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긴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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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모토 긴고로는 일본 육군 군인으로, 쿠데타를 여러 차례 시도하고 중일 전쟁에서 파나이호 사건에 연루되어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인물이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터키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며 혁명 사상을 접했으며, 참모본부에서 러시아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벚꽃회를 조직하여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실패했고, 2.26 사건 당시에는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다시 소집되어 난징 전투에서 파나이호를 격침시킨 책임을 지고 퇴역했다. 이후 파시즘 운동과 정치 활동을 했으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가석방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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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군파 - 조 이사무
조 이사무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난징 대학살과 오키나와 전투에 깊이 관여했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자결한 인물이다. - 청군파 - 앵회
앵회는 1930년 일본 육군 장교들이 결성한 비밀 결사 조직으로, 국가 개조를 목표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 일본의 파시스트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일본의 파시스트 -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 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하고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그의 사상은 2·26 사건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적인 면모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26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당했다. - 3월 사건 관련자 - 우가키 가즈시게
우가키 가즈시게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육군대신과 조선총독을 역임했으며, 군사 개혁을 단행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수상 취임에 실패하고 외무대신으로서 중일 전쟁 종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 3월 사건 관련자 - 도쿠가와 요시치카
도쿠가와 요시치카는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으로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양자가 되어 화족이자 식물학자, 탐험가로 활동하며 도쿠가와 미술관과 호사 문고 설립에 기여했고, '호랑이 사냥 영주'라는 별명으로 불린 사냥 애호가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점령하 말레이에서 군정 고문으로 활동했다.
| 하시모토 긴고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일 | 1890년 2월 19일 |
| 출생지 |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 |
| 사망일 | 1957년 6월 29일 |
| 사망지 | 도쿄도 |
| 직업 | 군인, 정치인 |
| 국적 | 일본 제국 |
| 별칭 | 하시킨 |
| 군 경력 | |
| 복무 기간 | 1911년 - 1939년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 최종 계급 | 육군 대좌 |
| 정치 활동 | |
| 제대 후 활동 | 우익 활동가, 국회의원 |
| 매장 정보 | |
| 묘지 | 시즈오카시 뎃슈지 |
2. 인물과 경력
하시모토 긴고로는 성격이 급하고 히스테릭했으며, 현역 시절 60회가 넘는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극동국제군사재판 중에도 사소한 일로 격분하여 시라토리 토시오의 얼굴을 때린 적이 있다.[7]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되었을 때는 A급 전범 중에서도 가장 본보기가 되지 않는 이기적인 불평을 하는 인물로 토요다 부케, 사토 켄료와 함께 언급되기도 했다.[7]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모든 피고인 중 유일하게 미국인 변호인을 거절했다. 한편으로는 시(詩) 재능이 뛰어난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시게미쓰 마모루의 수기 「스가모 일기」에 따르면, 전시 중 한 조선인 남성이 도쿄의 제국호텔 접객원인 일본인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조선반도로 건너갔으나, 일본의 항복 후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여성이 겐카이나다(玄界灘)에 투신 자살했고, 후에 그 남성이 하시모토에게 여성의 묘비에 새길 시를 부탁했다는 일화가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하시모토 긴고로는 1890년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서 태어나, 7살 때 후쿠오카현 모지시로 이사했다. 고등소학교를 거쳐 1904년 9월 구마모토 육군 지방 유년학교에 입학했다.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23기)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32기)에 진학했다.[7] 터키 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혁명 사상에 접한 것이 이후의 행적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참모본부 러시아 담당 과장이 되어 1930년 참모본부 장교들과 비밀리에 벚꽃회를 조직했다.[8] 3.15 사건·10.26 사건을 계획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벚꽃회는 해산되었다.
1911년 육군사관학교(23기)를, 1920년 육군대학교(32기)를 졸업했다. 1922년 4월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어 하얼빈에 주둔했고, 1923년 소련과의 국경 근처 만주리에 특별 임무로 파견되었다. 1927년 9월부터 1930년 6월까지 터키에 무관으로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일본 육군 참모 본부 러시아 연구 부서를 이끌었다. 1930년 8월 대령으로 승진했고, 10월 육군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그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 연도 | 내용 |
|---|---|
| 1911년 5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23기) |
| 1911년 12월 | 소위 진급, 야포병 제24연대 배속 |
| 1914년 12월 | 중위 진급 |
| 1915년 12월 | 육군포병학교 고등과 졸업(21기) |
| 1916년 11월 | 포병학교 학생대 배속 |
| 1920년 4월 | 대위 진급 |
| 1920년 11월 | 육군대학교 졸업(32기) |
| 1921년 7월 | 참모본부 근무(러시아 담당) |
| 1922년 4월 | 관동군 사령부 배속(하얼빈 특무기관) |
| 1923년 8월 | 관동군 사령부 배속(만주리 특무기관) |
| 1926년 8월 | 소좌 진급 |
| 1927년 9월 | 터키 공사관 부무관(~ 1930년 6월) |
| 1930년 7월 | 참모본부 러시아 담당 과장 |
| 1930년 8월 | 중좌 진급 |
| 1930년 10월 | 벚꽃회 결성 |
| 1930년 11월 | 육군대학교 교관 |
| 1931년 10월 | 10월 사건으로 체포 |
| 1931년 11월 | 20일간 징계 처분 |
| 1931년 12월 | 야포병 제10연대 배속 |
| 1933년 8월 | 야중포병 제2연대 배속 |
| 1934년 8월 1일 | 대좌 진급, 야중포병 제2연대 연대장 |
| 1936년 8월 29일 | 예비역 편입 |
| 1937년 10월 8일 | 소집, 야중포병 제13연대 연대장 |
| 1939년 3월 10일 | 소집 해제 |
2. 2. 군부 내 우익 정치 관여와 쿠데타 시도
하시모토 긴고로는 1930년에 참모 본부의 장교들과 은밀히 육군 중견 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인 벚꽃회를 조직해 우익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8] 1931년 3.15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와 조 이사무(長勇) 대위가 비밀리에 결성한 벚꽃회는 쿠데타를 통해 당파 정치를 제거하고 군부의 통제하에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여 일본의 부패한 정치, 경제, 사상을 일소하는 정치 개혁을 추구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일본의 서구화를 역전시키는 것을 의미했다.[7]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하시모토는 조 이사무, 오가와 슈메이(大川周明),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함께 또 다른 쿠데타인 10.26 사건(황군색 사건)을 기획했다. 모든 공모자들은 체포되어 다른 보직으로 발령받았다. 마지막 시도인 육군사관학교 사건에서도 하시모토와 아라키의 사주 의혹이 제기되었다. 3월 사건과 10월 사건의 실패로 벚꽃회는 해산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열린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하시모토가 A급 전범으로 기소된 최대의 이유로 연합국 측이 3월 사건과 10월 사건을 침략 계획의 발단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7]
1936년 2월 2·26 사건 당시에는 스스로 쇼와 천황과 결기 부대의 중재 역할을 하여 결기 부대에 유리하도록 사태를 수습하려고 육군대신 관저에 들어갔으나, 천황이 결기 부대를 "폭도"라고 부르며 진압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하시모토에게도 책임 문제가 미쳐 대좌로 예비역으로 전역하게 되었다.[3]
2. 3. 2.26 사건과 예비역 편입
하시모토는 2·26 사건이 일어날 당시 급히 상경해 사태 수습에 분주했지만, 궐기 부대는 역적으로 판단되어 본의 아니게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9]2. 4. 중일 전쟁과 파나이호 사건
중일 전쟁 발발에 따라 하시모토는 다시 소집되었지만, 난징 공략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 항공기에 난징에서 탈출하는 선박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포함 〈파나이 호〉를 격침하고 영국의 포함 〈레이디버드 호〉에도 큰 피해를 주었다.[9] 이 사건으로 인해 하시모토는 책임을 지고 육군 포병 대령으로 퇴역하였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해군 제독은 하시모토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였다.[9]1937년 12월 12일, 하시모토는 파나이호 사건에 관여했는데, 이 사건에서 일본 폭격기는 양쯔강에서 파나이호를 공격하여 침몰시켰다. 하시모토는 당시 해당 지역의 최고위급 일본 장교였으며, 침몰 며칠 후 미국 신문에 "나는 발포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다.
좀 더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난징 함락 당시인 1937년 12월 12일에 하시모토는 영국 포함 레디버드호에 피해를 입히고(레디버드호 사건), 같은 날 중국 공군 기지로 가는 휘발유를 싣고 있던 유조선 3척을 호송 중이던 미국의 포함 파나이호에 포격을 가했다. 파나이호는 육군의 포격으로 인한 손상은 없었지만, 그 후 난징 상류에 정박 중, 육군으로부터 공격 협력 요청을 받은 해군 현지(상하이) 항공대의 공습으로 격침되어 사상자를 냈다.[3]
2. 5. 파시즘 운동과 정치 활동
하시모토 긴고로는 1930년에 참모 본부 장교들과 비밀리에 벚꽃회를 조직하여 우익 쿠데타를 음모했다.[8] 이 단체는 3.15 사건과 10.26 사건의 실패로 해산되었다.[8] 제2차 세계 대전 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하시모토가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가장 큰 이유는 연합국 측이 이 두 사건을 침략 계획의 발단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1936년 2·26 사건 당시 하시모토는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궐기 부대는 역적으로 판단되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중일 전쟁 발발로 다시 소집되었으나, 난징 공략전 당시 일본 해군 항공기에 난징에서 탈출하는 선박 공격을 명령하여 미국의 포함 파나이 호를 격침시키고, 영국의 포함 레이디버드 호에 큰 피해를 입혔다.[9] 이 사건으로 하시모토는 육군 포병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퇴역 후 1936년에 대일본청년당(이후 대일본적성회로 개칭)을 조직하여 파시즘 운동을 전개하였고,[4] 고노에 후미마로가 주창한 신체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42년 익찬 선거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익찬 정치회 총무로 취임하였다.[5]
2. 6. 극동 국제 군사 재판과 A급 전범
하시모토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연합국은 3.15 사건과 10.26 사건을 침략 계획의 발단으로 간주하여 하시모토를 A급 전범으로 기소하였다. 가석방 후, 1956년 제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1957년 6월 29일 폐암으로 사망했다.[2]2. 7. 가석방 이후와 죽음
하시모토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가석방 후 1956년 제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57년 6월 29일 폐암으로 사망했다.[2] 향년 67세.가석방 후에도 옥중에서 "생각나는 일도 없으나 다시 한번 큰 일을 하고 죽고 싶다"라고 말한 것처럼 국가 개조에 대한 야심은 변함없었다. 1956년 제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전국구에 정당 공천이나 자금 지원 없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출옥 후 결혼한 세 번째 부인이 있었지만, 하시모토가 임종하기 직전 이혼을 요구하고 떠났다. 장례는 3.15 사건 이후로 지원을 받았던 도쿠가와 요시치카가 맡았다.
3. 성격 및 평가
하시모토 긴고로는 생전에 그를 알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매우 급하고 히스테릭했으며,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해서 현역 시절 받은 징계가 60회가 넘었다고 한다.[1] 극동국제군사재판 공판 중에도 아주 사소한 일에도 격분하여 법정 대기실에서 시라토리 토시오의 얼굴을 안경이 날아갈 정도로 때린 적이 있다.[1] 다만 시라토리 또한 매우 적을 만들기 쉬운 성격의 트러블 메이커였다.[1]
이시하라 코이치로는 스가모 구치소에 구금된 A급 전범 중에서 젊은 B, C급 전범에게 가장 본보기가 되지 않는 이기적인 불평을 하는 작은 인물로 토요다 부케와 사토 켄료와 함께 이름을 거론했다.[2] 하시모토는 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모든 피고인 중 유일하게 미국인 변호인을 계속 거절했다.[3]
한편 하시모토는 시 재능이 뛰어난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4] 시게미쓰 마모루가 인정한 수기 「스가모 일기」(「문예춘추」 1952년 8월호 게재)에 따르면, 전시 중 어떤 조선인 남성이 도쿄의 제국호텔에 숙박했을 때, 웨이터인 일본인 여성에게 첫눈에 반해, 가출과 같은 형태로 조선반도로 건너갔다.[4] 그러나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여 연합국의 의향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추방당하게 되었고, 여성은 그 일을 비관하여 겐카이나다에 투신 자살했다.[4] 후에 그 남성이 일본을 방문하여 하시모토를 찾아와, 여성의 묘를 남성의 고향에 세우게 되었으니 묘비에 새길 시를 써달라고 하시모토에게 부탁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고 한다.[4]
4. 연보
- 1911년(메이지 44년) 5월 - 육군사관학교 졸업(23기).
- * 12월 - 소위로 진급. 야포병 제24연대 배속.
- 1914년(다이쇼 3년) 12월 - 중위로 진급.
- 1915년(다이쇼 4년) 12월 - 육군포병학교 고등과 졸업(21기).
- 1916년(다이쇼 5년) 11월 - 포병학교 학생대 배속.
- 1920년(다이쇼 9년) 4월 - 대위로 진급.
- * 11월 - 육군대학교 졸업(32기).
- 1921년(다이쇼 10년) 7월 - 참모본부 근무(러시아 담당).
- 1922년(다이쇼 11년) 4월 - 관동군 사령부 배속( 하얼빈 특무기관).
- 1923년(다이쇼 12년) 8월 - 관동군 사령부 배속(만주리 특무기관).
- 1926년(다이쇼 15년) 8월 - 소좌로 진급.
- 1927년(쇼와 2년) 9월 - 터키 공사관 부무관(1930년 6월까지).
- 1930년(쇼와 5년) 7월 - 참모본부 러시아 담당 과장.
- * 8월 - 중좌로 진급.
- * 10월 - 벚꽃회 결성.
- * 11월 - 육군대학교 교관.
- 1931년(쇼와 6년) 10월 - 10월 사건으로 체포.
- * 11월 - 20일간의 징계 처분을 받음.
- * 12월 - 야포병 제10연대 배속.
- 1933년(쇼와 8년) 8월 - 야중포병 제2연대 배속.
- 1934년(쇼와 9년) 8월 1일 - 대좌로 진급. 야중포병 제2연대 연대장.
- 1936년(쇼와 11년) 8월 29일 - 예비역 편입.
- * 10월 - 대일본청년당 당수.
- 1937년(쇼와 12년) 10월 8일 - 소집. 야중포병 제13연대 연대장.
- 1939년(쇼와 14년) 3월 10일 - 소집 해제.
- 1940년(쇼와 15년) 10월 - 대정익찬회 상임총무(1941년 3월까지).
- 1942년(쇼와 17년) 5월 - 중의원 의원(1945년 12월까지).
- 1944년(쇼와 19년) 8월 - 대일본익찬장년단 부단장. 중앙본부장(1945년 2월까지).
5. 수상
| 수여 날짜 | 훈장 |
|---|---|
| 1915년 11월 7일 | 훈육등 단광 욱일장[6] |
| 1922년 6월 27일 | 훈오등 수보장[6] |
| 1929년 6월 26일 | 훈사등 수보장[6] |
| 1934년 4월 5일 | 훈삼등 수보장[6] |
| 1934년 4월 29일 | 욱일중수장[6] |
| 1940년 4월 29일 | 공사급 금치훈장[6] |
참조
[1]
서적
Warlord: Tojo Against the World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01-01-01
[2]
서적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Abridged: Part 2: 1868 to 2000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08-13
[3]
서적
帝国陸海軍 人事の闇
光人社NF文庫
[4]
뉴스
朝日新聞
1946-02-10
[5]
간행물
官報
1945-12-06
[6]
법률문서
法廷証第105号: 橋本欣五郎關スル人事局履歴書
[7]
서적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8]
서적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9]
서적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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