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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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작스는 1494년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독일의 구두 제작자이자 마이스터징어, 극작가, 시인이다. 그는 종교 개혁을 지지하며 마르틴 루터를 기리는 시 "비텐베르크의 나이팅게일"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6,000편이 넘는 다양한 작품을 썼으며, 4,000개 이상의 마이스터징어 작품을 포함하여, 16세기 자유 도시 시민 문화의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작스는 17세기에는 잊혀졌으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통해 재조명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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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작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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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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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4년 11월 5일, 뉘른베르크 |
사망 | 1576년 1월 19일 (향년 81세), 뉘른베르크 |
직업 | 마이스터징어 극작가 시인 구두 직공 |
상세 정보 | |
활동 시기 | 16세기 |
장르 | 마이스터징 희곡 사육제 연극 |
영향 | |
영향을 준 인물 | 리하르트 바그너 |
2. 생애
한스 작스는 1494년 11월 5일 뉘른베르크에서 구두제작 장인 이외르크 작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1509년부터 1511년까지 신발제작 교육과정을 마쳤다. 이후 장인시험을 앞둔 도제들에게 통상적이었던 5년간의 도제방랑을 시작했다.
이 시기 동안 인스브루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임시로 일하면서 마이스터징어 교육과정을 밟기로 결심한다. 1513년 벨스에서 순수 예술을 연마했고, 같은 해 뮌헨에서 장인(마이스터) 리엔하르트 누넨베크에게서 마이스터징어 수업을 받았다. 1516년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여 1520년 신발제작 마이스터가 되었고, 마이스터징어 공인길드의 활발한 회원 및 의장(1555년경)으로 활동했다.
1519년 9월 1일 쿠니군데 크로이처와 결혼했으나, 아내와 일곱 자녀는 모두 작스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1560년 아내가 사망하자 1561년 9월 2일 바바라 하셔와 재혼했다.
초기부터 종교개혁을 옹호하며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전파한 작스는 '비텐베르크의 종달새'(1523)라는 시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2] 1576년 1월 19일 사망하여 뉘른베르크 요하니스 묘지에 안장되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한스 작스는 1494년 11월 5일 뉘른베르크에서 재단사였던 아버지 예르크 작스의 아들로 태어났다.[9] 그는 7세에 교회 부속 라틴어 학교에 입학하였고,[9] 뉘른베르크 교회에서 열린 성가 학교에 다니면서 시와 음악에 대한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1] 15세에 구두 가게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9]1509년부터 1511년까지 신발제작 교육과정을 졸업한 후, 장인시험을 앞둔 도제들에게 통상적이었던 5년간의 도제방랑기에 접어들게 된다. 17세에 직공이 되어 동료 및 학생들과 함께 방랑 시대(''Wanderjahre'' 또는 ''Walz'')를 시작했다.[1] 수년에 걸쳐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잘츠부르크, 뮌헨, 오스나브뤼크, 뤼베크, 라이프치히를 포함한 많은 도시에서 일했다.[2]
1513년 벨스에 도착하여 한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순수 예술을 연마했다.[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이 도시를 지나갔고, 한스 작스는 인스브루크 궁전에 배치되었다가,[1] 나중에 궁정을 떠나 샤츠와 뮌헨으로 갔다. 같은 해 뮌헨에서 린넨 직공인 리엔하르트 눈넨베크를 스승으로 하여 마이스터징어(mastersinger)가 되기 위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1] 그의 자전시 『나의 시업의 모든 것』에는 방랑 중에 "뮌헨에서 노래 학교 운영에 협력하고, 여러 도시에서 가르쳤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노래에 관해서는 출발 전에 마이스터 칭호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
1516년 가을, 방랑 수련을 마치고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9]
2. 2. 도제 방랑과 마이스터징어 수업
한스 작스는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1509년부터 1511년까지 신발제작 교육과정을 마쳤다. 그 후 장인시험을 앞둔 도제들에게 일반적이었던 5년간의 도제방랑을 시작했다.[1] 그는 인스브루크에 있는 막시밀리안 1세의 궁정에서 일하면서 마이스터징어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다. 1513년 벨스에서 순수 예술을 연마했고,[1]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이 도시를 지나갈 때 궁정의 화려함에 휩쓸려 인스브루크 궁전으로 가게 되었다.[1] 이후 작스는 궁정을 떠나 샤츠와 뮌헨으로 갔다. 같은 해, 뮌헨에서 린넨 직공이자 장인(마이스터)인 리엔하르트 눈넨베크에게서 마이스터징어 수업을 받았다.1512년에 직인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방랑 수련 여행을 떠났는데, 그의 자전시 『나의 시업의 모든 것』에는 "뮌헨에서 노래 학교 운영에 협력하고, 여러 도시에서 가르쳤다"는 기술이 있어, 노래에 관해서는 출발 전에 마이스터 칭호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516년 가을에 방랑 수련을 마치고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2. 3. 뉘른베르크 정착과 결혼
1516년에 작스는 뉘른베르크에 정착하였다.[1] 1519년 9월 1일, 쿠니군데 크로이처(1502–1560)와 결혼하였다.[3]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작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3] 1520년에 신발제작 마이스터(장인)가 되었고,[9] 마이스터징어 공인길드의 회원으로, 1555년경에는 의장으로도 활동했다.1560년에 쿠니군데가 세상을 떠난 후, 1561년 9월 2일에 미망인 바바라 하셔와 재혼한다.[3]
2. 4. 종교 개혁 지지와 사회 참여
작스는 초기에 종교개혁을 옹호하며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1523년에 쓴 '비텐베르크의 종달새'는 루터의 가르침을 민중적으로 형상화한 시로, 이를 통해 그는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2] 이 시에는 우의 판화가 들어갔으며, 한스 작스의 이름은 독일 전역에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524년에는 『주교좌 참사회원과 구두 수선공의 대화』, 『성직자의 겉치레 선행과 서원에 관하여』, 『탐욕 등 사회의 악덕에 관한 대화』, 『복음주의 기독교도와 루터파 교도의 대화』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며 교권 비판을 이어갔다. 1523년부터 1526년까지는 개혁극, 시대 비판적 전단, 개혁의 노래 등을 출판하여 민중들을 계몽했다.
이러한 사회 참여는 그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 정부는 그에게 출판 금지령을 내렸고, 구두 장인으로서도 제한을 받았다. 1527년 3월, 안드레아스 오지안데르와 함께 쓴 『교황의 기묘한 예언을 풀이하다』는 시 참사회에 의해 문제 삼아져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뉘른베르크 시의회는 작스에게 더 이상 "소책자나 운문"을 출판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1529년, 뉘른베르크에서 많은 평신도들에 의해 종교 개혁이 점점 활발하게 일어났다. 정부의 제한은 의미가 없어졌고, 한스 작스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530년, 『뉘른베르크 시를 찬양하는 시』를 통해 창작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 시에는 시 당국과의 화해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9]
2. 5. 말년
1560년, 아내 쿠니군데가 사망했다. 두 아들과 다섯 딸은 이미 요절했다. 이 전후, 작스는 자작의 집대성을 생각하여 「폴리오판 전집」 3권(1558년 - 1561년, 나머지 2권은 사후 간행)을 펴냈다.1561년 9월 2일, 40세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과부 바르바라 엔데르스와 재혼했다. 바르바라는 구 성은 할샤였으며, 전 남편은 양초 제작으로 6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후 작스는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1566년부터 1567년에 걸쳐 자전시 『나의 시업의 모든 것』을 저술했다. 1576년 1월 19일 사망. 뉘른베르크 시내의 성 요한 교회 묘지에 묻혔다.[1]
3. 작품 활동
한스 작스는 마이스터징어 외에도 격언시, 희극, 대화체 산문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정신적인 내용과 세속적인 내용을 모두 다루었으며, 격언시에는 정신적, 역사적, 정치적, 희극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작스는 종종 다른 장르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사용했다.
작스는 1523년부터 1526년까지 개혁극, 시대 비판적 전단, 개혁 노래 등을 출판하여 민중 계몽에 힘썼다.[4] 이러한 활동은 그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당시 정부는 출판 금지령을 내리고 구두장이로서의 활동도 제한했다. 그러나 1529년 뉘른베르크에서 개혁이 활발해지면서 정부의 제한은 무의미해졌고, 작스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플리니우스, 플루타르코스, 아이소포스(이솝), 오비디우스, 보카치오 등 고전을 섭렵한 폭넓은 독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당시 장인 계급에서는 드문 일이었으며, 에라스무스의 『우신 예찬』 번역가인 제바스티안 프랑크의 저작에 친숙해지는 등 당대 흐름에도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3. 1. 주요 작품
한스 작스는 당대인들에게 마이스터곡으로 인정받았으며, 연극 배우로도 활동했다. 1558년 뉘른베르크에서 전통적인 사육제극, 희곡, 시, 우화, 익살극을 출판하여 전파했다.
한스 작스는 6000개가 넘는 다양한 작품을 썼고, 그 중 4000개 이상이 마이스터게장이었다. 정확한 작품 수는 참고 문헌에 따라 다양한데, 이는 작품이 온전한 하나인지, 혹은 방대한 문장 중 일부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한스 작스는 마이스터게장 외에도 격언시, 희극, 대화체 산문 등 세 가지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 그의 작품 주제는 매우 다양하여, 곡에는 정신적·세속적 내용이, 격언시에는 정신적·역사적·정치적·희극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스 작스는 종종 다른 장르에서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뉘른베르크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익살극과 사육제 연극이 두드러진다. 그의 희극과 비극은 성서, 고전, 중세 시대로 돌아가는데, 이는 대개 소시민적 표상 세계에 물든 교훈적이고 풍자적인 캐릭터로 나타난다.
한스 작스는 시민들에게 종교적, 세속적 교양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허구의 인물로 개혁 문제와 올바른 생활 태도에 대해 논의하는 대화체 산문을 짓기도 했다.
예문)
Die Wittenbergisch Nachtigall (Gedicht, 1523) 비텐베르크의 밤꾀꼬리(시, 1523년) 中
“Wacht auf, es nahet gen den tag!” „일어나, 아침이 다가온다!“
Ich hoer singen im gruenen hag 숲속에서의 노래를 듣는다
Ein wunnukliche nachtigall; 아름다운 밤꾀꼬리
Ir stim durchklingt berg und tal.. 너의 목소리가 계곡을 타고 울린다.

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마이스터징어(Meisterliederde) (약 4200편)
- 기타 시와 노래
- 카니발 극
- 비극
- 희극
- 산문 대화
- 우화
- 종교적 소책자,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와 공동으로 쓴 "교황청에 대한 놀라운 예언, 세상의 끝까지 어떻게 될 것인가"(Eyn wunderliche Weyssagung von dem Babsttumb, wie es ihm biz an das endt der welt gehen solde)(1527) 포함.[4]
작스는 "퓬징의 말 도둑"("Der Roßdieb zu Fünsing")과 "퓬징 농부들"("Die Fünsinger Bauern") 두 편에서 가상의 "바보 마을"인 퓬징에 대해 썼다.(1558)[5]
작스는 평생 4,374편의 마이스터 가(Meister歌), 약 2,000개의 축사(祝詞) 노래(Spruch), 120편 이상의 희비극, 85편의 사육제극, 7편의 산문 대화를 남겼다.[9]
작품 주제는 루터 번역 성경 구절, 오래된 교회 제도에 대한 풍자, 시사 사건 기록[11], 도덕적 교훈을 담은 우화 등 다양하다.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나의 죽은 아내 쿠니군데 작스에 대한 이상한 꿈』(1560년)에서는 가정에서의 섬세한 애정도 엿볼 수 있다.
음악적으로는 13개의 새로운 "마이스터 선율" 외에 16개의 선율을 만들었다.[12]
4. 역사적 의의와 재평가
한스 작스는 16세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로, 그의 작품은 당시 자유도시 시민 문화의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마이스터게장을 단순한 형식과 수공업 관련 내용으로 썼으며, 시 짓기를 개인과 동료들 사회 속에서 즐기도록 독려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의 사육제극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작스는 17세기에 잊혀졌다가, 괴테와 빌란트 등의 작가들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서 작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시켰다.
그의 마이스터징어는 뉘른베르크 마이스터징어 학교에서만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출판되지 않았으며, 작스는 이 학교의 지도자였다. 그의 명성은 주로 그의 극작품을 포함하는 "스프루흐게디히테"에 기인한다. 그의 "비극"과 "희극"은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낸 것에 불과하며, 다양한 막으로 나뉜다. 작스는 극적인 구성이나 행동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
주제는 성경, 고전, 이탈리아 소설 등 다양한 출처에서 가져왔다. 그는 짧은 일화적인 파스트나흐트슈필에서 가장 성공했는데, 여기서 등장인물 묘사와 유머러스한 상황이 극적 형식이나 구성보다 더 중요했다. 그의 몇몇 풍자극은 현대 무대에서 상연되었다.[2]
작스를 비롯한 마이스터징어들이 활약했던 16세기의 독일 르네상스는 17-18세기에 뉘른베르크가 쇠퇴하고, 바로크에서 계몽기에 걸쳐 독일에서 그리스・로마의 고전, 이탈리아 문학, 프랑스 연극에 대한 동경으로 눈길이 쏠리면서 잊혀졌다. 작스의 첫 번째 완결된 저작집이 간행된 것은 그로부터 약 100년 후인 1870년이다.
4. 1. 기념과 추모
그의 작품은 16세기 자유도시 시민 문화의 중요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스 작스는 재능 있고 유능하며 유명한 마이스터징어로 인정받았고 그 명성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마이스터징어 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시 짓기를 개인과 동료들 사회 속에서 즐기도록 독려했다는 것이다. 그의 사육제극은 지금까지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17세기에 작스는 점점 잊혀져 가는 듯 했다. 그러나 괴테, 빌란트가 주목해서 작품을 썼는데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에서 한스 작스를 주인공으로 설정했고, 이후 그의 중요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뉘른베르크에 작스 기념비가 한스 작스 광장에 세워져 현재에도 그를 추모하고 있다. 그의 흉부상 또한 뮌헨의 기념회관에 전시되어 있다. 1894년 그를 추모하기 위한 한스 작스 축제가 개최되었고 건축가이자 화가인 칼 하머가 석판화로 그를 형상화했다.
작스 부흥의 계기가 된 것은 사망 200주년인 1776년, 괴테의 시 '한스 작스의 시적 생명'이다. 이 시는 바이마르에서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가 발행하던 '독일의 메르쿠어(Teutsche Merkur)' 지의 특별 기념호에 실렸다.
낭만주의와 민족주의의 고양을 배경으로, 뉘른베르크가 민족 정신의 요람으로 다시 주목을 받게 되자, 여러 작가들이 작스를 매력적으로 묘사했다. 19세기에는 작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극작품이 20편 정도 쓰여졌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1868년 초연)에 이른다.
바그너에 앞선 작품으로, 요한 루드비히 다인하르트슈타인의 극시 '한스 작스'(1827년)가 있다. 이 작품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독일에서는 40개 이상의 극장에서 상연되는 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40년에는 다인하르트슈타인의 극시를 필리프 레거가 각색하여, 알베르트 로르칭 작곡의 오페라 '한스 작스'가 라이프치히에서 상연되었다.[13]
5. 한스 작스를 소재로 한 작품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76년에 『한스 작스의 시적 생명』을 썼다.[14][15] 요한 루트비히 다인하르트슈타인은 1827년에 극시 『한스 작스』를 썼다. 알베르트 로르칭은 1840년에 오페라 『한스 작스』를 작곡했는데, 대본은 다인하르트슈타인의 극시를 필리프 레거가 각색한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68년에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작곡했다. 오페라 3막에서 뉘른베르크의 민중이 부르는 코랄 "깨어나라. 아침이 다가왔다"는 작스의 시 『비텐베르크의 종달새』의 첫 구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13][14][15] 바그너는 다인하르트슈타인의 극시에서도 모티프를 몇 가지 가져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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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the Great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in Germany, Switzerland
General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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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書
ありのままのアンデルセン ヨーロッパ独り旅を追う
晶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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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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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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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오스만 제국군에 의한 1차 빈 포위(1529년),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 마르틴 루터의 사망(1546년),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의 패배(1557년), 페스트 유행(1561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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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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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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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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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スタンダード・オペラ鑑賞ブッ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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